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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구릅/나의 산행

남한산성 - ( 2022.11.12 )

by the road of Wind. 2022. 11. 12.

남한산성

- ( 2022.11.12 )

 

오늘은 오후부터 비소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전은 쨍쨍 햇볕이 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침 일찍 전철 8호선 산성역에 내려 2번 출구, 직진 93m(도보1분) 정류소에서  남한산성 순환버스 ( 산성역 <-> 남한산성 ) 9-1번 버스 ( 순환버스는 주말과 공휴일에만 운행) 를 타고 남한산성을 올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버스 회차 종점 (산성 종로 정류소) 에서 부터 산책을 시작하여 < 산성 종로 - 북문 - 서문- 서문전망대 - 수어장대 - 남문 - 남문 터널 정류소 > 코스로 걸은 후, 남문터널 앞 버스 정류소에서 다시 9-1번 버스를 타고 산성역으로 내려갔습니다. 아침에는 미세먼지 때문에 흐릿한 날씨였는데, 해가 뜨자 어느 순간 부터 청명하지는 않지만 햇빛이 나는 날씨로 변했습니다. 만약 날씨 걱정만 하지 않고, 스틱만 가졌다면 남문을 지나 남한산성 외곽으로 검단산(536.4m) 통신대를 지나 성남 사기막골로 하산하였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늘은 남한산성 차도의 차량 정체도 염려되어 빠르게 남한산성을 내려가려 했습니다. 나는 산성역 3번 출구 앞 정류소에 하차하여, 전철을 타고 모란역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모란시장에서 내가 좋아하는 국밥을 하나 먹고, 진주 대봉 한 박스 (18개, 12,000원)를 사서 들고 집에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집 근처에서는 8개에 12,000원 한다는데, 모란역이 확실히 싼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진주 대봉 한 박스는 생각보다 무거웠습니다. 오늘 남한산성 산책 잘 하고, 모란시장 국밥 잘 먹고, 커다란 대봉을 샀으니 이만하면 족한 줄 알겠습니다.

 

남한산성 탐방시는 항상 역사의 진실 앞에서 마음이 무거울 때가 많습니다. 나는 솔직히 우리 선조들이 조금이라도 세계 정세에 눈이 밝았으면 하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우연과 필연의 합집합일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우리나라의 운명 앞에 가로놓인 엄중한 안보상황 앞에서 똑 같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나 같은 서민도 잠이 오지 않을 경우가 많습니다.

 

남한산성(南漢山城): 경기도 광주시, 성남시, 하남시에 걸쳐 남한산(480m) 을 중심으로 하는 산성(山城)이다. 병자호란 때 우리나라의 치욕적인 수난의 진원지이기도 하다. 대외정세에 둔감하게 대응한 국제정치의 실패의 결과이다. 난한산성의 역사는 백제의 수도인 하남위례성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조선 시대에 인조와 숙종 때에 산성을 증축하여 오늘날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남한산성의 성벽은 국가사적 제57호, 남한산성은 1971년 경기도립공원 제158호, 2014년 세계문화유산 에 등재되었다. 남한산성에는 원성외성, 옹성, 4대문, 암문, 치, 장대, 포루, 수구, 단, 묘, 공해, 정, 사찰, 제당 등 많은 시설물과 행궁이 있으며 그 중 성곽 ,수어장대,숭렬전,청량당, 현절사, 침괘정, 연무관, 지수당, 장경사, 망월사지, 개원사지, 남한산성 행궁이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주요 시설에 대한 간단한 개략을 알아본다.  

- 성곽 : 원성과 외성으로 나뉜다. 원성은 하나로 연결된 본성이며, 외성으로 봉암성과 한봉성, 신남성이 있으며, 두 개의 돈대가 있다.
- 성벽: 원성은 높이가 약 3~7m내외다.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 성문: 남한산성에는 남문(지화문_至和門), 북문(전승문_全勝門), 동문(좌익문_左翼門), 서문(우익문_右翼門) 의 4대문이 있다. 
- 외성: 외성은 봉암성, 한봉성, 신남성의 3성이 있다.
- 옹성: 주 성곽에서 돌출 작은 성곽으로, 적군을 옆에서도 공격할 수 있다. 연주봉옹성, 장경사 신지옹성 등 총 5개의 옹성이 있다.
- 여장: 성위에 낮게 쌓은 담이다. 몸을 숨겨 총이나 활을 쏠 수 있게 만든 시설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하부는 석재로, 상부는 전돌을 사용한다.   
- 암문: 암문은 적이 관측하기 어려운 곳에 만든 성루가 없는 성문이다. 남한산성에 16개가 있으며, 우리나라 성곽 중에서 가장 많다.
- 수어장대(守禦將臺): 장군의 지휘소다. 2층으로 되어있으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 남장대 터:  제2남옹성 바로 곁에 있다. 지금은 주춧돌만 남아있다. 
- 동장대 터: 남한산성의 동쪽에 있던 장대로 수어청에 소속된 5영 중 좌영장이 지휘하던 동장대가 있던 곳이다.
- 남한산성행궁: 광주 행궁이라고도 불린다. 유사시 왕이 피난할 수 있도록 준비된 예비 궁궐이다. 총융사 이서의 계책에 따라 완성되었다.
- 숭렬전: 백제의 시조 온조왕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드리던 사당이다.
- 청량당: 수어장대 담 밖 서쪽에 있는 당집이다. 남한산성의 동남쪽 부분 축성 책임자 이회와 그 부인, 그리고 서북성 축조 담당 벽암스님의 혼령을 모신 사당이다. 이회는 모함으로 참수를 당했으나 후에 누명이 풀렸으며 이곳에 봉안되었다.
- 연무관: 군사들이 무술을 연마하던 곳이다. 현재는 건물 복원 작업을 위한 주춧돌만을 남기고 있다.
- 장경사: 대한불교 조계종 조계사의 말사이다. 남한산성 내에 존재했던 9개의 사찰 가운데 당시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현존하는 유일한 절이다.
- 국청사: 남한산성 안의 산성리에 있는 절이다. 승군의 숙식과 훈련을 담당하고, 비밀리에 군기와 화약,군량미 등을 비축하였던 사찰이다

 

남한산성 탐방안내도   

 1코스 (거리 3.8Km / 소요시간 1시간 20분):
산성로터리 – 북문(0.4km) – 서문(1.1km) – 수어장대(0.6km) – 영춘정(0.3km) – 남문(0.7km) – 산성로터리(0.7km)
 2코스 (거리 : 2.9km / 소요시간 : 60분):
산성로터리 – 영월정(0.4km) – 숭렬전(0.2km) – 서문(0.7km) – 수어장대(0.6km) – 산성로터리(0.9km)
▶ 3코스 (거리 : 5.7km / 소요시간 : 2시간):
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 현절사(0.1km) – 벌봉(1.8km) – 장경사(1.5km) – 망월사(1.1km) – 동문(1.0km) – 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4코스 (거리 : 3.8km / 소요시간 : 1시간 20분):
산성로터리 – 남문(0.7km) – 남장대터(0.6km) – 동문(1.1km) – 지수당(0.5km) – 개원사(0.3km) – 산성로터리(0.6km)
▶ 5코스 (거리 : 7.7km / 소요시간 : 3시간 20분):
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 동문(0.6km) – 동장대터(1.1km) – 북문(1.6km) – 서문(1.1km) – 수어장대(0.6km) – 영춘정(0.3km) – 남문(0.7km) – 동문(1.7km) – 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산   책 : 걸음수 8,245 steps, 거리 5.1 km, 소모열량 273 kcal, 소요시간 01:30 hrs, 속도 3.4 km/h, 기온 14℃.

 코   스  남한산성 종로 (로터리)  -  북문(전승문; 재건축 중) - 서문 (우익문) -  서문 전망대 - 수어장대 (청량산; 497.1m) -  남문 (지화문).

 

 

 

산성 종로 로터리 버스 정류소

9-1번, 남한산성 순환버스 ( 산성역 <-> 남한산성 ).

주말과 공휴일에만 운행함.

 

일상 군형 캠페인  WORK & LIFE
" 일상은 군형있게,  인생은 행복하게 "
- 고용노동부

 

오전 8:58분, 산성 로터리 근처 남문 주차장에 차들이 아주 많이 보인다

조금 늦게 오면 주차할 곳이 없다. 주말에는 빨리 빨리~~

 

 


주차장 이용요금 (후불):


- 이륜차, 1000cc미만 승용차:   평일 1,500원,  공휴일 2,500원.
- 1000cc이상 승용차, 소형 승합차(15인스 이하), 소형화물차(1톤이하) 평일 3,000원,  공휴일 5,000원.
- 중.대형 승합차, 화물차 (공휴일은 주차불가): 평일 6,000원 / 10,,000원.

- 20:00-09:00 무료

- 30분 이내 출차 무료.

 

 

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500m -> 

 

남한산성 산성리 마을 내력: 

남한산성내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아주 먼 과거로 올라가겠지만, 본격적으로 대규모의 취락이 형성된 것은 인조5년(1627)에 광주부의 읍치를 산성으로 옮기고 나서부터라고 하겠다. 현재남한산성 내 마을의 행정구역은 ‘산성리’이며, 1914년 일제가 조선의 지방행정구역을 대대적으로 개편할 때부터 이처럼 불리기 시작하였다. 산성리 마을은 조선후기 광주유수부 시기에 두 개의행정 단위로 나누어져 있었다. 광주 행궁에서 동문에 이르는 도로를 경계로 하여 남쪽은 남동, 북쪽은 북동으로 나누어진 것이다. 그러다가 1910년경 산성내 마을은 군내면 광주읍에 속하게 되고, 마을은 광주읍 동부, 광주읍 서부, 광주읍 남부, 광주읍 북부, 광주읍 중부 등 5개의 행정단위로 나누어졌다. 그리고, 1914년 광주읍 5개 마을이 중부면 산성리로 통합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1917년 광주군청이 산성 안에서 경안으로 이전하면서, 300여 년간 화려한 군사·행정 중심지였던 남한산성내 산성리 마을은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산성리 마을은 풍부한 농경지가 있는 곳도 아니었고, 행정 중심지로서의 기능만을 수행한 곳이었다. 따라서 광주군청과 함께 치안·체신기관이떠난, 교통조차 불편한 산촌 마을인 산성리는 주민들이 생계조차 유지하기 어려웠다. 1,000여호 4,000여 인구를 자랑하는 산성리 마을 인구는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많은 주민들이서울과 광주, 여주, 이천, 양평 등지로 떠났고, 해방과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는 70∼80호로 줄어, 산성리는 한적한 산촌 벽지로 변하였다. 한편 산성리 마을에는 산성 내 소나무를 보호하기 위한 금림조합이 결성되어 1945년까지 활동하였다.  - 경기도 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산성 종로 로터리

 

남한산성 옛길 종합안내

 

로터리

" 남한산성 내의 기준점 "


남한산성 안에는 핵심 간선 도로망이있던 봉화로가 남문과 동문을 통해 이어져 있으며, 남한산성  중심지에서 한양도성의 동쪽(현재 하남시)과 남쪽 (송파, 마천)으로 바로 이어지는 중요 노선들이 한 점을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산성 로터리입니다. 남한산성에서 동으로 몇리, 남으로 몇리 이렇게 이렇게 거리를 측정하는 것도 바로 이 로터리를 기준으로 정하게 됩니다. 행궁의 바로 옆에 위치한 일종의 랜드마크와도 같아서 이곳을 왕래하는 주민들의 심리적 중심적 역할을 합니다. 남한산성 내에 위치한 마을이 산성리인데, 산성리 주민들은 로터리에서 우(북 또는 서)로 얼마를 가면 행궁이 있고 아래(동 또는 남)로 얼마를 가면 관아가 있고 방앗간이 있고 장터가 있다는 식으로 심리적 위치를 정하곤 합니다. 주민들 뿐만 아니라  남한산성을 찾는 많은 시민들은 지금도 남한산성 안에서 특정 지점을 말할 때 이 로터리를 기준으로 이여기를 하곤 합니다. 

<- 지화문 700m,  전승문 400m ->

 

 

 

세계유산 남한산성

WORLD HERITAGE  NAMHANSANSEONG

 

 

국왕의 길 2코스

 

 

남한산성 종각의 천흥사 동종

 

남한산성의 천흥사 동종은 높이 170cm, 입지름 100cm로 몸체에 세겨진 명문 ‘聖居山天興寺銅鐘總和二十八年庚戌二月日'_성거산 천흥사 동종 총화 이십팔년 경술이월일’ 에 따르면 고려 현종1년(1010)에 주조된 것으로 원래는 태조4년(921)에 태조가 창건한 충청남도 천안시 성거읍 천흥리 천흥사에 있었다고 한다. 남한산성으로 언제 옮겼는지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 산성 내 시간을 알려주는 역할을 했으며 이후 일제강점기 이왕가박물관에 옮겨지고, 해방이후 덕수궁 미술관을 거쳐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엇다. 현재 종은 원래의 모양및 형태 그대로 재현 한 것으로 타종시 울림을 좋게하기 위하여 약 3배 정도 더 크게 제작하였다. 

 

 

남한산성 인화관 방향

 

 

2코스

남한산성 역사테마길

현위치 종루 남한산성 로터리

2코스 국왕의 길 <-

3코스 승병의 길 ->

4코스 옹성의 길 ->

 

 

인화관 (人和館)

 

인화관(人和館): 남한산성 행궁 동쪽에 위치한 인화관은 사신 등 손님들이 머무는 객관(客館)이었다. 한양에 계신 왕을 위해 매월 2차례 예를 올리기도 하고, 중앙에서 관리가 오면 묵을수 있는 용도라고 한다. 인화관은 인조 2년(1624)에 세운 것을 순조 29년(1829)에 수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뒤 빈터만 남은 것을 새롭게 복원을 추진하여 2015년에 완공되었다. 

 

 

남한산성 행궁, 한남루(漢南樓)

 

행궁(行宮):  왕이 도성을 떠나 행행(行幸)할 때 임시로 머무는 곳으로, 전란시·능행시·휴양 등의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조선시대에는 수원행궁, 강화행궁, 전주행궁, 의주행궁, 양주행궁, 온양행궁 등 10여개 이상의 행궁이 있는데, 그 중 남한산성행궁은 전쟁이나 내란 등 유사시 후방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한양 도성의 궁궐을 대신할 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하여 인조 3년(1625) 남한산성 수축과 함께 건립되었다. 실제로 약 10년 후인 1636년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47일간(1636.12.14~1637.01.30) 항전하게 된다. 이후 숙종·영조·정조·철종·고종이 여주에 있던 효종릉(寧陵) 등의 능행길에 머물러 이용하였다. 남한산성행궁은 종묘(좌전)와 사직(우실)을 두고 있는 유일한 행궁으로 일반적인 행궁에 머물지 않고 유사시 임시수도의 중요한 역할을 하던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국가사적480호이다. - < 남한산성 도립공원 >

 

관람시간하절기(04월~10월); 10:00 - 18:00, 동절기(11월~03월): 10:00-17:00

남한산성 행궁관람 요금:

 

- 어른(만19세~만64세): 2,000원
- 어른단체(30인이상): 1,600원
- 청소년(만7세~만18세): 1,000원.
- 청소년단체(30인이상): 800원

- 무료: 만6세이하 어린이, 만 65세 이상의 노인, 경기도민, 등등  

 

 

=== < 2021.03.02 남한산성 행궁 photo start : > ===

한남루남한산성 한남루는 유수 홍억(洪憶)에 의해 정조 22년(1798)에 세워졌으며, 왕이 머무는 행궁의 하궐 앞에 자리한 외삼문 주 출입구이다. 

외행전...외행전은 하궐의 중심 건물로 인조3년(1625)에 준공되었다.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상궐 내행전과 동일한 전체 28칸의 건물이았다. 바닥면적이 142㎡로 내행전 167 ㎡ 보다 적고 내행전에 비해 6m정도 낮은 곳에 지었다. 병자호란 당시 병사들에게 음식물을 베푼 호궤를 이곳에서 행하였고, 한봉에서 청나라군이 홍이포를 쏘아 포환이 외행전 기둥을 맞혔다는 기록이 있다. 죄승당이 지어지기 전에는 광주부 유수 집무실로 사용되었다.  현재 외행전은 2010년에 중건 된 것으로, 건축 당시 통일 신라시대 유구가 확인되어 건물지와 기와를 쌓은 곳 일부를 보존하고 있다. 

 

 

일장각:  행궁 하궐에 있던 광주부 유수가 사용하던 건물이다. 일장각은 수어장대가 위치하고 있는 청량산의 다른 이름인 일장산을 건물의 이름으로 한 것이다. 하궐 내부담장 밖에 있었던 여러 건물 중 하나로써, 조 29년에 광주부 유수 이지연이 세운 건물이다. 1900년대에 촬영한 사진에서 일장각의 모습은 확인되지만 행궁지에 있었던 광주군 청사가 철거되는 과정에서 함께 철거된 것으로 보인다. 발굴조사 과정에서 건물지의 일부를 확인하였으며 현재 일장각은 2010년에 중건되었다.

 

 

내행전

 

좌승당...좌승당은 광주유수의 집무용 건물이다. 순조 17년(1817) 광주유수 심상규가 건립하였다. 좌승당이란 이길만한 계책이 있으면 적을 앉아서도 물리칠 수 있는 의미이다.

 

이위정 &  좌전 ( 영녕전 & 정전 )

 

 

내행전...상궐 내행전은 왕이 잠을 자고 생활하던 공간이다. 정면 7칸 측면 4칸 전체 28칸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간운데 4칸은 대청으로 되어있고 좌우 2칸은 온돌방과 마루방이다. 내행전 위 공포는 새의 날개처럼 된 부재를 두개 겹쳐쌓은 이익공 형식으로 행궁내 건물 중 가장 격식이 높다.

 

 내행전 임금님 용상

 

내행전 내부...일월오악도 병품이 둘러있다. 병풍은 평소에는 접어두었다가 임금이 주석할 때만 펴서 세운다. 혹시 자객이 숨어 있을 수도 있어서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궁궐이나 행궁에서 문을 3개 통과 해야만 임금의 얼굴을 볼 수 있는데, 이것도 침입자를 방어하기 위한 수단 아닌가 한다. 중국 황제의 경우 5개의 문을 통과해야 한다. 

 

 

한남루

=== < photo end >===

 

 

남한산성 역사 테마길:

 

남한산성 역사 테마길은 세계유산이며 도립공원인 남한산성의 가치를 체험할 수 있도록 테마별로 구성된 탐방로입니다. 국가지정 사적 제57호인 남한산성과 제480호인 남한산성 행궁을 비롯한 수많은 문화재가 잇으며, 백제 시조 온조왕, 병자호란 등 많은 역사적 의미를 간직한 장소입니다. 탐방객은 관심분야와 여건에 맞는 코스를 선택하여 체험할 수 있습니다.  

- 장수의 길 1코스:

1코스 장수의 길은 세계유산 남한산성이 가지고 있는 방어요새의 특징들을 살펴볼 수 있는 탐방코스입니다.  방어시설의 중심이었던 존승문(북문), 우익문(서문), 자화문(남문)을 거닐며, 전쟁시 비상연락 및 적정 탐색을 위한 암문과 지휘를 했던 수어장대를 볼 수 있습니다. 장수의 길에서 세계유산 남한산성의 굳건한 모습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제1코스 (3.8km, 80분):  산성로터리- 북문(0.4km)- 서문(1.1km)- 수어장대(0.6km- 무궁화동산(0.3km- 남문(0.7km)- 산성로타리(0.7km)

- 국왕의 길 2코스:

2코스 국왕의 길은 조선시대 국왕의 공간이었던 행궁에서 시작되어, 침괘정을 지나 병자호란 시기 인조가 항복하러 성문을 나간 서문을 아우르는 탐방코스 입니다. 국왕이 행차하여 머물렀던 남한산성 행궁, 백제시조 온조왕 사당인 숭렬전, 인조 관련 이야기가 전해지는 침괘정과 우익문(서문)을 볼 수 있습니다. 국와의길에서 잘 가꾸어진 소나무 숲길을 거닐며 세계유산 남한산성의 시원한 자연환경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2코스(2.9km, 60분): 산성로터리- 영월정(0.4km)- 숭렬전(0.2km)- 수어장대-(0.6km) 서문(0.7km)- 국청사(0.1km)- 산성로타리(0.9km)


- 승병의 길 3코스:

3코스승병의 길은 남한산성을 만들 때 부터 전쟁시기 남한산성을 지켰던 승병들의 생활을 알아볼 수 있는 탐방코스 입니다. 산성의 수축과 유지를 위해 승병이 머물렀던 장경사와 망월사와 남한산성의 외성인 봉암성을 볼 수 있습니다. 승병의 기레서 사찰을 거닐며 세계유산 남한산성 사찰의 고즈넉한 모습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3코스(5.7km,120분): 남한산성 세계유산센터- 현절사(0.1km)- 벌봉(1.8km)- 장경사(1.5km)- 망월사(1.1km)- 지수당(1.0km)-  남한산성 세계유산센터 (0.2km)


-  옹성의 길 4코스:

4코스 옹성의 길은 남한산성의 약점을 보완하고자 했던 선조들의 고민을 느낄 수 있는 탐방코스입니다. 적 대포에 대응한 방어시설이었던 제1남옹성, 제2남옹성, 제3남옹성을 볼 수 있습니다. 옹성의 길에서는 굳건한 남한산성의 성벽과 양생화를 비롯한 아름다운 자연황경이 어우러져 있어 세계유산 남한산성의 평화로운 모습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4코스(3.8km, 80분): 산성로터리- 남문(0.7km)- 남장대터(0.6km)- 동문(1.1km)- 지수당(0.5km)- 개원사(0.3km)- 산성로타리 (0.6km)


 산성의 길 5코스:

5코스 산성의 길은 '하늘이 만든 성'으로 알려진 남한산성의 성벽을 두루 볼 수 있는 탐방코스 입니다. 남한산성을 지키는 성벽을 따라 암문과 치성 등 방어시설물을 볼 수 있습니다. 산성의 길에서 남한산성 성벽의 경관과 성남, 하남, 광주의 경관을 모두 볼 수 있어 세계유산 남한산성의 다채로운 모습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5코스(7.7km, 200분): 남한산성 역사관주차장- 동문(0.6km)- 동장대터(1.1km)- 북문(1.6km)- 서문(1.1km)- 수어장대(0.6km)- 영춘정(0.3km)- 남문(0.7km)- 동문 ( 1.7km)

 



 

cafe 오로지

 

백제장

 

석산정

 

cafe 반월

 

앗, 농촌 풍경

 

'숲속으로'

 

 

가을의 정감이 느껴지는 집

 

카페 베이커리

 

 

청와정

 

 

coffee 아름다운 단체석 완비, 맛있는 단팥죽

 

 

수수정원,  소금빵, coffee

 

 

청수가

 

↑  2.9km 지화문(남문), ↑  0.1km 전승문(북문),  <- 숭렬전 0.5km,  ↓ 종로 0.3km

<- 국청사 가는 길 방향의

남한산성 음식점:


송림정 30m↑   , 동촌 10m , 국청사 800m <-, 한경직목사 우거지 650m <-, 숭렬전 500m <-, 계곡산장 300m <-,  카페 작은 숲 250m <-,  영락수녀원 200m <-,  용마루 140m <-, 석촌 100m <-, 돌집 50m <-, 먹거리창고 30m <-, 백송식당 20m <-, 카페 남한산성 <-

 

 

=== < 2021.03.02 사진, start > === 

( 2016.8.14) 한경직 목사님 우거처...신축하기 전 모습)

 

한경직 목사님 우거처:  우거처는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 북문 입구와 국청사 중간쯤에 산 속에 있다.  우거처 앞마당에는 예배실인 팔복재와 관리실 건물이 있다. 팔복재는 마태복음 5장의 ‘팔복(八福)’을 의미한다는데, 한경직 목사의 삶과 정신을 느끼게 한다. 한경직 목사님은 “나는 내게 속한 집 한 칸, 땅 한 평도 없는 사람이라며 “재산을 소유한다는 것은 어딘가 모르게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고 한다. 새로 짓기 전 한목사님이 계실 때의 우거처에는 좁고 허름한 거실 겸 주방, 주방 작업대, 의자를 세 개만 놓여있었다 한다. 한경직 목사님은 청빈한 삶의 대명사이다.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지금 우리나라 목사님들도 한경직 목사님과 같은 청빈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민들의 시각과 동 떨어진 일부 대형교회 목사님들의 삶의 형태가 뉴스로 보도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분명 다시 생각할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물론 목사도 인간이기 때문에 부를 추구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성직자로서 수긍할 수 있는 한도 내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부의 대물림을 뜻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대형교회를 세습하는 일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은 아닐 것이다. 세습은 국가 권력이나 종교 권력 등에 있어서 용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경직 목사 (1903-2000) 평남 간리 출생. 평안북도 정주 오산고등보통학교 졸업, 평안남도 평양 숭실전문학교 졸업, 미국 미국 엠포리아대학교(College of Emporia) 졸업,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신학석사), 미국 엠포리아 대학교 대학원 졸업 (신학박사). 평북 정주 오산학교에서 조만식 선생으로부터 학문을 배우며 민족에 눈을 떴다. 1945년 월남해 영락교회와 영락모자원, 영락노인복지센터, 영락보린원 등을 세우며 가난하고 힘든 자들을 아낌없이 도왔다. 1992년 종교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템플턴상을 수상했다. 그는 청빈하고 겸손하여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목회자로 칭송받고 있다. 1남1녀의 자손을 두었다. 저서: <창조적 생활의 비결>, <팔복>, <내일을 사는 인생>, <예수를 바라보자>, <사도 바울에게 배운다>, <열매맺는 신앙생활>, <나의 인생 길의 아름다운 명상>, <병상에서의 묵상>, <신랑 신부에게>, <나의 감사> <경직 구술 자서전> 등등 다수.

 

=== < 2021.03.02 사진, end > === 

 

 

소림정 & 백송

 

북문 (전승문)은 보이지 않고

지금 재건축 중

 

앗, 식당가를 지나고 이제 본격적으로 성곽의 내부 둘레길을 따라 길을 간다.

 

 

1코스

남한산성 역사테마길

현위치: 전승문 (북문)

 

1코스 장수의 길  ->

2코스 국왕의 길  <-

   3코스 산성의 길  <->

 

공사명: 남한산성 북문 해체보수
공사기간: 2021.04.21 ~ 202_ ._ ._ . 

 

 

==< 2020.04.21 사진, 북문(전승문) > === 

                                                                            북문

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북문은 병자호란 당시 성문을 열고 나가 기습공격을 감행했던 문이다.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에서 '전승문'이라고도 하였다. 당시 영의정 김류의 주장에 의해 군사 300여명이 북문을 열고나가 청나라 군을 공격하였으나, 적의 계략에 빠져 전멸하고 말았다. 이를 '법화골 전투' 라고 하는데,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있었던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였다. 정조3년(1779) 성곽을 개보수할 때 성문을 개축하고 이름을 붙여 전승문(全勝門)이라 한 것은 그 때의 패전을 잊지말자는 뜻이었을 것이다. 선조 때의 기록을 보면 산성 내에 동문과 남문, 수구문의 3개의 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북문은 인조2년(1624)에 신축된 성문이라고 생각된다.  
 

== < photo end > ==

 

 

 

나무를 지키는 금림조합
남한산성의 귀중한 숲을 지켜 후손에게 "


남한산성의 산림은 매우 잘 보존되어온 아름다운 생태유산입니다. 이는 오래전부터 산성 내의 숲을 보호하고자 하는 산성 주민들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는데요, 일반적으로 근대화 이전의 생활연료는 나무였기에 20세기 초반 대부분 산들은 나무가 없는 민둥산이 도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나 산성 안의 나무들은 예외였는데, 마을 주민들이 '금림조합'을 만들어 순산원을 두고 도벌을 막아 보호한 덕택에 지금처럼 건강하게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금림조합은 남한산성의 숲을 보호하기 위해 산감(山監: 산림 감시원) 50명을 선출하여 매일 6명 씩 교대로 산림을 감시토록 하였습니다. 산감은 극빈자 계층에서 선발하였기 때문에 숲을 보호하는 것과 동시에 취약계층의 구제에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남한산성 금림조합의 노력은 이후 2016년까지 90년에 가깝게 지속되어 왔으며, 덕분에 남한산성은 귀중한 생태문화자원을 잘 보존하여 후손에게 전할 수 있게 되었답니다. 


<- 전승문 300m, -> 우익문 700m.

 

 

하남시 광암동 금암산(321.2m) 방향

 

 

하남 고골 방향

 

고골:  하남의 지형은 낮은 야산과 구릉지대가 펼쳐져 있고, 북쪽으로 흐르는 한강에는 망월천, 덕풍천,산곡천 같은 작은 샛강이 흘러 들어가며 강줄기의 옆에는 평야가 형성되어 있어서 B.C 4000여년 전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였으며, 수로를 이용한 타 지역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여 문화가 융성했던 지역이다. 또한 남쪽으론 남한산, 동쪽은 검단산, 북쪽으론 한강이 흘러 군사의 요충지로서 더할 나위 없이 좋아 백제의 시조인 온조께서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470여 년간 한성백제의 수도로 위상을 떨치던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한수의 쟁패를 놓고 삼국이 각축을 벌이던 역사의 현장 이기도 하다. 고려시대에 접어들어선 후삼국을 통일하고 태조의 개국을 도와 새로운 나라의 기틀을 조성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광주의 대호족 왕규가 세거를 이루었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종때(983년)에 이르러서는 지방통제를 위한 지방관제를 실시하여 지방행정상 요지에 12목(광주,양주,충주,청주,공주,진주,상주,전주,나주,송주,해주,황주)을 설치하였는데 광주도 12목의 하나로서 읍치가 바로 하남의 춘궁동(고골) 이었다. - ( 하남시 ) 

 

 

 

하남시 상사창동 고골 일대

이 곳에 제3기 교산신도시가 들어선다.

 

하남교산 신도시;

 
- 위치: 경기도 하남시 천현동, 항동, 하사창동 교산동, 상사창동, 춘궁동, 덕풍동, 창우동, 신장동 일원
- 면적:  6,314,121㎡ (1,910천평),

- 사업시행기간: 2019년 ~ 2028년
- 인구및 주택계획:  주택 33,000호, 인구 78,000인.

 

 

도시

" 한양 다음으로 큰 완전한 소비도시산성리 "


조선시대 한양은 20만 명이 넘는 인구를 가진 도시였습니다. 18세기 후반 산업혁명 시기 영국 런던의 인구가 5만 명이었다는 사실에 비교해 보면 가히 한양의 인구규모를 짐작할 만 합니다. 남한산성 옛길이 위치한 산성리 지역은 한양에 인접한 소비도시 였는데  토박이 주민의 제보에 따르면 산성내 주민들이 주변 마을 사람들을 촌놈 취급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을 정도 입니다. 1627년 (인조6년) 광주부 읍치(邑治: 행정중심지)를 산성 내부로 옮기면서 산성리 인구는 폭증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1895년 조선총독부에 의한 행정구획 통폐합까지 일어나 중심지로서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면서 그 규모가 서서히 줄어들게 됩니다. 일제에 의해 산성 내에 위치하고 있던 광주군청이 경안 등으로 이전하게 되면서 군사도시, 행정도시의 위용은 완전히 사라지고, 근대화 시기로 접어들며 주요 도로가 남한산성을 제외한 채 건설됩니다. 이후 한강 이남에서 가장 번성했던 지역 중 하나였던 남한산성은 한적한 마을로 점차 변화하여 잠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됩니다.   

 

 

 

<- 0.5km 전승문(북문), 학암동 -> 1.9km, 수어장대 -> 1.1lm, 우익문(서문) -> 0.5km

 

 

국청사 방향

 

 

국청사

 

== < 2018.6.2 사진; 국청사 > ==

 

 

국청사:  1625년(인조 3)에 각성(覺性)을 팔도도총섭총절제중군주장(八道都摠攝總節制中軍主將)에 임명하고, 팔도의 승군을 동원하여 남한산성의 축조를 담당하게 할 때 7개의 사찰을 창건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 국청사이다. 승군의 숙식과 훈련을 담당하여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고, 비밀리에 군기(軍器)와 화약·군량미 등을 비축하였던 사찰이다. 그 뒤 한말에 의병의 군기창고로 사용되다가 비밀이 누설되자 일본군이 불태워서 절터만 남아있던 것을 1968년에 보운(普運)이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성삼문(成三問)의 친필이라고 전하는 병풍 1점과 송시열(宋時烈)의 친필책자 3권이 전해오고 있다. 절 근처에는 국청사정(國淸寺井)이라고 하는 조그만 우물이 있는데, 금닭이 나와 홰를 치며 울었다는 전설이 있다.

 

 

 

앗, 우익문 (서문)

 

서문 이정표 
<- 1.0km 수어장대, <- 일장천약수, -> 위례둘레길 (벌봉) 3.2km,  -> 위례둘레길 (북문) 1.1km

 

 

 

서문 (우익문)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서문은 4개의 대문중 규모가 가장 작고, 산성을 처음 쌓았을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 3년(1799)에  다른 문과 같이 개축하며 우익문(右翼門)이라 칭하였다. 행궁을 중심으로 국왕은 남쪽을 바라보며 국정을 살피니, 서문이 행궁의 우측에 있어 우익문이라 하였다. 서문은 인조15년(1637) 1월 30일 왕이 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항복하기 위해 남한산성을 나간 바로 그 문이다. 남한산성의 서쪽 사면은 경사가 급해 물자수송이 어렵지만 광나루나 송파나루 방면에서 산성으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남한산성 서문

 

<- 1.0km 수어장대, <- 일장천약수, -> 푯말삼거리 1.3km,  -> 위례둘레길(덕풍골) 0.7km,  

↙ 위례둘레길(벌봉) 3.2km,  ↙ 위례둘레길(북문) 1.1km.  

 

 

서문 전망대

 

 

위례신도시

 

 

잠실 롯데월드타워 방향, 미세먼지로 날씨가 흐려 희미하게 보인다.

바로 계곡 아래는 서울 마천동, 하남 학암동 남한산성 등산로 입구가 있는 곳이다. 

 

 

 

남한산성 서문 전망대  동영상

 

 

통제안내판

문화유산 보호 및 안전을 위해 출입을 통제합니다.

 

 

우익문 (서문) 방향

 

 

 

남한산성 (사적 제57호): 


1 남한산성 행궁, 2 수어장대, 3 숭렬전, 4 청량당, 5 현절사, 6 침괘정, 7 연무관, 8 지수당, 9 장경사, 10 망월사, 11 개원사, 12 제1남옹성, 13 제2남옹성, 14 남문(지회문), 15 서문 (우익문), 16 연주봉옹성, 17 북문(전승문), 18 동문(좌익문), 19 장경사신지옹성, 20 동장대터, 21 봉암성, 22 벌봉   

남한산성은 조선시대 뿐 아니라 삼국시대부터 천연의 요새로 중요한 역할을 하던 곳이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의 욍성이었다는 기록이 있고, 나당전쟁이 한창이던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한산주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기록도 있다. 고려시대에는 몽고의 침입을 격퇴한 곳이기도 하고 일제강점기에는 항일운동의  거점이 되기고 한 곳이다. 그러나 남한산성은 주로 병자호란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조선 인조 14년(1636)에 청나라가 침략해 오자 왕은 이곳으로 피신하여 항전하였으나, 왕자들이 피신해 있던 강화도가 함락되고 패색이 짙어지자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 나가 치욕적인 항복을 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남한산성은 패배를 알지 못하는 곳이다. 성의 외부는 급경사를 이루어 적의 접근이 어렵고, 내부는 경사가 완만하여 넓은 경작지와 물을 갖춘 천혜의 전략적 요충이기 때문에, 병자호란 당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청군에 함락당하지 않고 47일간이나 항전할 수 있었던 곳이다. 이처럼 오랜 기간동안 우여곡절을 가진 성의 역사처럼 성곽의 형태 또한 단순하지 않아서 하나의 폐곡선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본성, 봉암성, 한봉성, 신남성과 5개의 옹성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조이다. 인조 4년(1636) 에 중앙부의 가장 큰 폐곡선인 본성이 완성되었고, 병자호란 이후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동쪽의 봉암성, 한봉성 등을 비롯하여 여러차례 증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수어장대와 수어청:

한양 남쪽의 상비군수어청 "


수어장대는 남한산성 서문과 남문 사이 가장 높은 지대에 위치한 지휘소 겸 적정 감시시설입니다. 특히 남한산성 방위의 총사령관이라고 할 수 있는 수어사는 조선시대 군사제도인 5군영 제도 중 하나인 수어청의 수장이기도 합니다. 조선은 임진왜란을 겪으며 상비군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데요, 그래서 전쟁 중에 설립된 기관이 훈련도감입니다. 훈련도감은 전쟁에 꼭 필요한 상비군을 훈련하고 유지하는 기관이었습니다. 이 훈련도감과 함께 4개의 지방 상비군이 설치되는데 그 중 남한산성에 설치된 군영이 바로 수어청입니다. 조선은 훈련도감 설치 이후 수도 한양을 방위할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는데 먼저 화기를 사용하는 총포군을 양성할 수 있는 어영청을 설치합니다. 다음으로 한양의 북쪽을 방어총융청을 설치합니다. 총융청의 본부는 북한산성이었고 한양에 적군이 진입하기 전 북한산성에서 격퇴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다음 설치된 것이 바로 남한산성의 수어청입니다. 마지막으로 설치된 왕의 직할부대 개념의 금위영까지, 5군영 체제는  조선후기까지 이어지는 핵심 군사제도였습니다.   


↑  수어장대 0,1km, ->지화문 1.1km.

 

 

 

수어장대(守禦將臺) 와 청량당(淸凉堂)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 제3호):


수어장대는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목적으로 지은 누각이다. 남한산서에 있던 5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있으며, 성 안에 남아있는 건물중 화려하고 웅장하다...남한산성 축성때 단층으로 지어 서장대라 불리던 것을 영조 27년 유수 이기진이 왕명을 받아 이층으로 다시 짓고 '수어장대'라 편액을 달았다...수어장대 2층 내부에는 '무망루'라는 편액이 달려 있었는데,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다가 귀국하여 북벌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지은 것이다. 현재 무망루 판액은 수어장대 오른편에 보호각을 지어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보관하고 있다.

청량당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 사당은 남한산성 쌓을 때 동남측 축성의 책임자였던 이회 장군과 그의 부인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이회는 공사비를 횡령했다는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고 이 소식을 들은 부인 송씨는 한강에 몸을 던져 따라죽었다. 이회는 죽을 때 자신의 죄가 없으면 매 한마리가 날아올 것이라 에언 했는데 과연 매가 날아와 그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한다. 후에 누명이 벗겨지고 그가 맡은 공사가 가장 잘된 것으로 알려지자 사당을 지어 초상을 안치하고 넋을 기렸다. 원래의 청량당은 6.25 전쟁때 소실 되어 다시지었다. 서장대가 있는 산 이름이 청량산이므로 청량당이라 이름 지었다.

 

 

청량당(淸凉堂),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호):  

 


남한산성 수어장대:  보물, 사적 제57호 남한산성

 

※ 병자호란 주요 연표:

1598년 (선조 31년): 임진왜란 끝남.
1608년 (선조 41년): 광해군 즉위.
1616년 (광해군 9년): 누루하치 후금 건국.
1618년 (광해군 11년): 명과 후금의 전쟁, 명에 원병 파견함.
1619년 (광해군 12년): 강홍립 후금에 투항. -> (중립외교).
1622년 (광해군 15년): 명나라 장수 모문룡 가도에 주둔.
1623년 (광해군 16년): 인조반정으로 인조 즉위. -> ( 친명배금정책 )
- 1624년 (인조 2년): 이괄의 난.
1627년 (인조 5년): 정묘호란 발생.
1635년 (인조 13년): 후금 내몽고 점령.

- 1636년 (인조14년): 후금 청으로 국호 변경하고, 조선에 군신관계 요구 ( 척화론과 주화론 대립 ).

                                  12월 28일 병자호란 발생. 남한산성 전투.
1637년 (인조 15년): 2월 24일 인조 송파 삼전도에서 항복. 청과 사대관계 맺음. 
- 1644년 (인조 21년): 명나라 멸망. 청 중국 통일.

 

 

무망루


조선 영조27년(1751) 광주 유수 이기진이 증축한 수어장대 2층의 내편(內篇) 문루로서 그 편액(扁額)이 2층 누각에 있어 1989년 전각을 건립하고 이 안에 현판을 새로 설치 일반인이 볼 수 있게 하였다. 무망루는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혔다가 귀국 후 북벌을 꾀하다가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이믐지은 것이다.

 

매바위, 그리고 '수어서대' 암각글씨.


청량당에 위폐가 모셔진 남한산성 공사 책임자 중 한사람이었던 이회가 공사비 횡령에 연류되어 억울하게 처단되자 죽 전에 자신의 죄가 없다면 매가 날아와 이 바위에 앉을 것이라고 유언을 했는데, 그 후 과연 매가 날아와 매바위에 구슬피 울었다고 하며, 다시 확인해 보니 죄가 없음이 드러났으며, 오히려 다른 구간보다 성이 더 견고히 축성되었음이 밝혀졌다. 예나 지금이나 모함은 한 인간을 파멸로 이끌기도 한다.

 

 

향나무 보호수,  수령 360년 ( 지정일자 1983.03.10 ), 수고 2.5m, 나무둘레  250cm

 

 

 

 

하산 길:

제6암문(서암문)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의 비밀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도 설치하지 않았다. 이 암문은 성벽의 흐름 방향과 달리 입구가 북서쪽을 향하고 있어 외부에서 쉽게 관측되지 않도록 하였다. 또한 북동쪽의 성벽을 돌출하여 암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원성에 설치된 12개 암문의 외측 개구부는 대부분 홍예식이지만 제2암문과 더불어 이 암문의 개구부는 평거식이다. 인조 15년(1637) 1월 23일, 한밤중에 습격해 온 청병을 크게 물리친 곳이라 하여 이 암문 부근을 '서암문 파적지'라 부른다.  

 

 

서울 송파 위례신도시

 

 

 

 

                 

<- 900m 수어장대,  지화문 700m ->                  

 

병자호란:

 

우리 민족의 삶을 바꿔놓은 전쟁 "


병자호란조선청나라가 군사력으로 부딪힌 동아시아의 대사건입니다. 이 전쟁을 계기로 동아시아의 질서는 급격하게 청나라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우리 민족 역시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됩니다. 이 병자호란의 중심에는 바로 남한산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산성에서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각지의 근왕병과 지원병이 청군의 남한산성 포위를 풀지 못 한채 모두 격퇴되고 말았고, 설상가상으로 두 달 분의 비축물자가 바닥나자 결국 인조는 항복을 결심하기에 이릅니다. 패배의 결과로 인조 송파에 위치한 삼전도로 걸어 내려가 '삼배구고두례'(*)를 행하고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습니다. 이로 인해 조선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고 이후 수많은 변화를 맞게됩니다. 패배를 씻기 위해 북벌론이 대두되기도 하고, 명분만을 중시하던 사상체게의 변화가 일어나 수많은 실학자들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민중 계층에서도 패배한 전쟁의 결과를 극복하기 위한 수많은 민담과 설화들이 창작되었습니다. 병자호란시대의 변화를 알리는 기폭제였으며 동시에 우리 민족의 사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역사의 분기점이 된 사건이었습니다

 

 

(*)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삼배구고두례'는 중국 청나라 시대에 황제나 대신을 만났을 때 머리를 조아려 절하는 예법이다. 삼궤구고두례를 행하는 방식은 “”(跪)의 명령을 듣고 무릎을 꿇는다. “일고두(一叩頭)", “재고두(再叩頭)", “삼고두(三叩頭)"의 호령에 따라 양 손을 땅에 댄 다음에 이마가 땅에 닿을 듯 머리를 조아리는 행동을 3차례 하고, “기(起)"의 호령에 따라 일어선다. 이와 같은 행동을 3회 반복한다. 인조는 삼전도에서 겨울 얼어붙은 맨 땅에 머리를 9번이나 찧으면서 나라 숭덕제(崇德帝(1592 ~ 1643; 태종太宗) 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말았다.역사적인 치욕이다.

청나라의 강요로 세원진 삼전도비가 지금도 잠실 롯데백화점 곁에 있는 석천호수 서호 대로변 방향 코너에 설치되어 있다. 우리 후손들은 이런 역사적 유물을 보면서 역사의 치욕을 떠올리며, 냉엄한 국제질서 앞에 우리 나라가 다시는 이런 치욕을 겪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믿는다. 힘있는 나라는 누가 건드리지 못한다. 전쟁을 잃으켜 같이 죽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만약 국가가 힘이 없어 적에게 쓰러지면 그 후에 오는 무자비한 양민학살, 부녀자 유린, 재산 몰수, 강제노역 강요 등 전쟁 패전국의 수난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대부분 주민들도 고향에서 적국의 깊은 오지로 강제 이주시키고 말 것이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일어나는 전쟁의 참상이고 현실이다. 그러니 전쟁이 나면 목숨을 잃더라도 전쟁 터에 죽을 힘을 다하여 싸워야 한다. 전쟁터에서 죽는 것이 살아서 비참하게 타살되는 것보다 나를 것이다. 그보다 나라의 지도자들은 유비무환, 전쟁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산성마을 방향

 

 

남한산성 하산 길 동영상

 

 

 

남한산성 하산 길 동영상

 

 

칼 쓴 십자가  

" 천주교 비극의 역사, 남한산성 "

 

남한산성 성지성당 내부에는 순교자들의 옥에 갇혀있을 때 쓰고 있었던 칼이 채워져 있는 독특한 십자가상이 있습니다. 천주교 탄압의 본격적인 서막은 신유박해(1801년) 부터였는데요. 천주교에 대해 큰 반감이 없었던 정조가  승하하자 정순황후가 가혹한 탄압을 시작한 것이죠. 박해의 진짜 이유는 정조시기에 세력을 키운 남인을 숙청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이 신유박해 때 남한산성에서 첫 순교자가 발생하게 됩니다. 천주교 신자가 광주 및 인근 지역에서 잡히면 남한산성 포도청으로 이송되어 감옥에 갇혔습니다. 순교자들은 심문을 당하다 결국은 감옥에서 순교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교살형이나 교수형이 대부분 감옥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감옥이 곧 순교터가 되었습니다. 감옥에서 죽거나 고문 끝에 죽은 순교자들은 동문 밖으로 시신을 버렸는데 그 장소가 수구문이었습니다. 시체가 너무 많이 나가고 피가 물처럼 흘러 수구문은 시구문으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 0.9km 수어징대, <- 1.5km 우익문(서문), -> 남문 0.6km

 

 

수어장대(청량산) 방향

 

 

 

앗, 지화문(남문)

 

남문 (지화문)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었는데, 남문은 남한산성에 있는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으로 현재에도 출입이 가장 많은 곳이다. 선조때 기록을 보면 동문. 남문. 수구문의 세문을 수축하였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남문은 인조2년(1624) 수축되기 이전 부터 이미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남문은 정조3년(1779) 성곽을 보수할 때 개축하여 지화문(至和門)으로 이름이 붙여졌으며 4대문 중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는 문이다.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처음 남한산성으로 들어올 때 바로 이 문을 통해 들어왔다.

 

 

 

보호수


수종: 느티나무 (약 360년), 지정일자: 2006.6.20
수고: 14~16m, 나무둘레 0.9~1.37m
소재지: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은행동 산 132-2


연혁 및 전설: 한산성 성곽은 인조 4년 (1626년)에 준공되었으며 느티나무(보호수)는 당시 성곽사면 토양유실 방지 및 차폐의 목적으로 식재된 것으로 추정된다. 남한산성 순환도로 터널이 개통 된 후 폐도 부지가 된 남문 앞 느티나무 주변을 2006년 재정비 및 느티나무 생육환경 개선 후 4주를 보호수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 성남시. 

 

 

 

지화문 (남문)

 

 

지화문 (남문) 


정조3년 성곽을 보수 할 때 '지하문'이라 칭하였고 남한산성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이다.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다. 또한 현재는 성남으로 통하는 관문역할을 하고 있으며, 성문앞에 식재된 (350년 수령, 성남시 보호수) 느티나무와 함께 문화와 역사가 살아숨쉬는 시민의 역사터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 - 성남시.

 

 

 

 

남한산성 남문 밖 동영상

 

 

 

남문 앞 이정표:  
<- 1.5km 수어장대, <- 2.1km 우익문(서문), -> 종로 0.7km.

 

 

 

남한산성 비석군

 

 

남한산성 비석은 역대 광주유수, 수어사, 부윤, 군수들의 선정*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비의 앞면에는 비석명, 뒷면에는 건립시기 및 관련자에 대한 내용이 새겨져 있다. 이곳 비석들의 원위치는 남한산성 행궁 주변이었다. 남한산성 행궁 복원 사업으로 현자리로 옮겼으며, 이 비들을 통해 세계유산 남한산성 통치경관의 한 요소를 엿볼 수 있다. 

* 선정; 백성을 바르고 어질게 다스림.

1. 흥선대원군영세불망비 (1863),   2. 전 군참사 이용식 거사비 (1932),  

3. 전 군수 강원달 영세불망비 (1911-1915),  4. 겸유수 수어사 민치구 영세불망비 (1868),  

5. 유수겸 수어사 홍학연 선정비 (1850),  6. 부윤 서리 양주군수 홍태윤 영세불망비 (1985)
7. 유수겸 수어사 심상규 거사비 (1818),  8. 유수겸 수어사 김이채  거사비 (1835)
9. 수어사 이조원 거사비 (1816), 10. 유수 겸 수어사 남병철 영세불망비 (1863)
11. 유수 겸 수어사 정기선 거사비-1 (1836), 12.  유수 겸 수어사 정기선 거사비-2 (1836)
13.  유수 겸 수어사 김교근 선정비 (1841), 14. 흥선 대원군 영세불망비 (1864)
15.  유수 겸 수어사 박희수 영세불망비 (1860), 16. 유수 겸 수어사 조경호 영세불망비 (1884)
17. 유수 겸 수어사 남정손 영세불망비 (1885), 18. 유수 겸 수어사 김윤식 영세불망비 (1888)
19. 유수 겸 수어사 민영소 영세불망비 (1891), 20. 유수 겸 수어사 박기수 선정비 (1837)
21. 유수 겸 수어사 서희순 선정비 (1846), 22. 유수 겸 수어사 조두순 선정비 (1851)
23. 유수 겸 수어사 이지연 거사비-1 (1829), 24. 유수 겸 수어사 이지연 거사비-2 (1829)
25. 유수 겸 수어사 이지연 거사비-3 (1829), 26. 부윤 김수홍 영세불망비 (1705)
27. 부윤 정지선 선정비 (1707), 28. 부윤 박태순 선정비 (1705), 29. 부윤 이제 선정비 (1705)

30. 유수 겸 수어사 조석우 영세불망비 (1873)

 

 

 

남문 터널 앞 정류소

여기에서 9-1번 <남한산성<-> 산성역> 순환버스 탑승.

 

 

8호선 산성역:

산성역 3번 출구에 하차

 

 

산성역 포레스티아 아파트

 

 

남한산성 순환버스 9-1번 버스 도로 오른쪽 산성역 2번 출구 앞 정류소에서 승차.

 

 

모란시장:

진주 대봉, 진주대곡단감작목회 055) 745-9546

 

씨알 굵은 18개 한 박스 12,000원

나를 감동시킨 대봉~~, 모란시장 학실히 좋습니다.

그런데 생각치도 않게 꽤 무거웠습니다. 내가 약골인가? 

집에 까지 들고 가느라 힘들었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