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구릅/여행(旅行)

② 거북선대교, 하멜등대 - ( 2022.11.21 )

by the road of Wind. 2022. 11. 22.

거북선대교, 하멜등대

- ( 2022.11.21 )

 

여수 해양공원 바닷가 길을 걸었습니다. 여수항은 정말 아름다운 미항(美航) 입니다. 항구 바닷길에서 바라보는 저 돌산도장군도, 돌산대교, 거북선대교, 그리고 여수 주변을 감싸고 있는 산 능선, 또한 영취산에서 급하게 바다로 내려 앉은 산 줄기 때문에 넓은 평지는 보이지 않지만 산비탈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주택들이 한데 어루려진 경치는 아름답습니다. 또한 해협같은 앞 바다는 그 자체의 푸름과 빛깔로 아름다우며, 그 위를 물살을 가르며 지나가는 어선들과 유람선, 조그만 배들은 어떤 감동까지 주게됩니다. 웅웅, 통통... 뱃소리도 여러가지로 들려옵니다.

바닷가 제방이나 선창가에는 낚시대를 드리우고 앉아있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모든 풍경이 나에게는 하나의 캠퍼스 안의 정물화 처럼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이순대교 위로 연신 줄줄이 다니는 여수해상케이블카는 젊음의 낭만을 느끼게도 합니다. 그리고 이순신대교 아래 방파제 끝 부분의 빨강 하멜 등대는 어떤 이국적인 느낌마저 주었습니다. 

 

거북선대교는 사장교로 아름다운 모습이며, 돌산도에서 오동도를 굽어볼 수 있는 자산공원 아래를 터널로 통과하여 여수엑스포 단지 근처와 여수산업단지 방면으로 지나갑니다.

 

그리고 여수 하면 오동도입니다.  오동도의 자태는 무엇으로 형용할 수 있겠습니까?  남해안의 여수반도의 끝 부분에 조그만 섬, 동백나무로 덮여 아름다운 섬, 등대가 있는 섬,...육지와 약 737m 거리의 방파제로 연결된 섬입니다. 이 방파제는 여수 신항을 파도로 부터 지키는 역할을 합니다. 언젠가는 해일이 방파제를 덮쳐 인명사고도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오동도는 차량이 출입할 수 없습니다. 오직 걸어서 출입하던지 코끼리열차를 타고 출입해야 합니다. 나는 옛날 언젠가 열차 시간이 조금 남아 있어 오동도나 구경하자고 코끼리열차를 타고 들어가 등대까지 구경하고 나왔는데, 코끼리열차도 끊겨있고, 택시도 부를 수 없는 상황이어서 서울 가는 열차를 놓칠뻔 한 일이 있었습니다. 다행이 시청 공무원이 타고 온 작업차량에 부탁하여 가까스로 열차를 탈 수 있었습니다. 그 분의 고마움을 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등에 식은 땀이 나는군요. 그 당시에는 열차표 예매도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나는 그동안 여수에 오면 바라보는 자산공원은 한번도 올라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오동도 방파제 초입 산책 후 되돌아 나오다, 자산공원 오르는 승강기를 발견하여 좋은 경치를 조망할 수 있었습니다. 자산공원 팔각정에서 바라보는 오동도 여수신항, 엑스포 단지 주변, 돌산도 방향, 경상도 남해도 방향의 경치는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바다 위에 광양항 입항 대기 중인 것 같은 커다란 대형 상선들의 모습이 아름다웠습니다. 팔각정에서 여수해상케이블카 자산공원 정류장 건물까지 는 가깝습니다. 나는 케이블카 정류장 건물로 가서 주변을 바라보다가, 자산공원에서 내려와 여수 엑스포역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걸어가는 도중에 만나는 엑스포 관련 시설물은 아름다웠습니다. 산책로 곁에 있는 소노캄호텔, 베네치아호텔, 유탑마리나호텔 등 숙박시설, 아쿠아리움 (수족관), 빅오(bIG-O) 조형물엑스포 주제관, 마지막으로 여수엑스포역 곁의 67m 높이의 스카이타워 전망대 등을 돌아보았습니다. 여수 신항에는 유람선 등이 선박되어 있고, 모터보트등이 낭만적인 풍경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오동도 주변의 길고 긴 하얀 방파제는 아름답고 인상적이었습니다.

 

하멜등대: 

 

거북선대교  &  여수해양케이블카

 

 

 

 

정박중인 어선들과 방파제 하멜등대

 

 

종포(鐘浦)마을

종포는 조선시대에 현재의 종화동에 있던 포구를 이르는 지명이다. 종고산(鐘鼓山) 아래 마을로 아름답고 평화로운 포구라 하여 '종개' 또는 '종포'라 하였다. 조선시대의 종포는 읍내에서 떨어진 동쪽의 해안마을로 전라좌수영의 본영과 인접하고 있으며, 이순신 장군이 1591년(선조24)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여 왜군의 침입에 데비해 돌산과 소포(현 거북선대교 아래) 바다 밑에 철쇄형(쇄 사슬)을 설치하였다. 이 내용은 '난중일기'에도 기록되어 있다. 고소대 아래에서 오동도가 있는  자산공원과 동쪽 해변까지를 종포라 하였으며, 서쪽 에서 동쪽으로 윗종포와 아랫종포로 불렀다. 일제강점기에는 여수 최초의 어업전진 기지로 수산업과 유통이 활발하였고 어업과 관계된 기관이 종포에 위치하여 수산업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1846년 일제강점기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정(町)을 동(洞) 으로 변경하면서 종포동과 남동 일부가 분리되어 종남동이 되었다가 1953년 행정구역 재편으로 종화동으로 바뀌었으며 1998년 부터 행정동인 동문동(東門洞) 관할에 있다. 현재는 해양친수공원과 아름다운 경관 조명이 어우러져 관광객과 시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여수 밤바다의 대표적인 해안산책로가 되었으며, 종포에서 오동도를 배경으로 바라보는 해돋이도 관광명소로 유명하다.   

 

 

 

동도팬션

낭만포차18번, 여수낭만포차88번, 낭만포차88번 2호점, 낭만포차24시,  등등

 

 

하멜전시관

 

여수 구봉산 (388m)이 멀리 바라보인다.

 

 

하멜전시관

 

 

하멜등대

 

 

돌산도, 거북선대교

 

 

1. 공식 기록으로서의 하멜 이야기:

본 이야기는 하멜이 조선에 억류된 기간(1653.8.~ 1666.9.) 동안 받지 못한 임금(賃金)을 동인도회사에 청구하기 위하여 작성한 업무보고서의 내용과 1668년 네댈란드에서 출판된 하멜보고서에 실려 있는 목판화본 삽화를 인용하였으며, 참고자료는 전라 병영성 하멜기념관으로 부터 협조를 받았다.       

 

 

2. 태풍을 만나 난파되어 제주도에 표착:

1650년 6월 훠헬 스트라이스호를 타고 네델란드 텍셀항을 출발하여 1651년 7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도착하였다. 1653년 6월 스패르붸르호를 타고 타이완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하멜 일행은 8월 태풍을 만나 64명 중 36명이 살아 제주도에  표착하였다.  제주에서는 네델란드 출신 박연(얀 얀스 벨테브레)을 만났으며, 1654년 4월 탈출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3. 서울로 이송;

전임 제주목사 이원진의 진언에 따라 1654년 5월 하멜 일행을 서울로 상경시키라는 효종의 명령서가 도착하여, 그 해 배를 타고 제주를 출발하여 전라도 해남에서 말로 갈아탄 후 영암, 나주, 장성, 입암산성, 정읍, 태인, 금구, 전주, 여산을 지나, 충청도 은진, 연산, 공주를 거쳐 서울에 도착하였다.  

 

 

4. 조선의 군인으로 생활:

1654년 6월 서울로 옮겨온 하멜 일행은 처음에는 통역들이 근무하는 사역원(司譯院)에 수용되었다. 이들은 효종을 알현하여 일본으로의 송환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북벌정책에  따른 군사력 강화 목적에 따라 거절당하고, 임금님의 친위대인 훈련도감에 배치되어 호패와 무기를 지급받아 군인으로 생활하였다.    

 

 

5. 청나라 사신행렬 앞에서 탈출 소동:

조선 정부는 청나라 사신 방문시마다 하멜 일행을 남한산성으로 숨겼으나, 일행 중 2명이 서울에서의 고된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청나라 사신 행렬을 헤집고 들어가, 본국으로의 송환을 호소하고 탈출하려는 사건을 일으켰다. 탈출이 실패로 돌아가자 하멜일행은 1년 9개월 만인 1656년 3월 강진병영으로 유배되었다.    

 

 

6. 강진 병영에서의 생활:

유배된 하멜 일행은 약 7년 동안 강진 병영에서 부역에 동원되어 병영성 장터의 풀을 뽑고 청소하는 일을 하였다. 1660년 부임한 절도사 구문치가 비교적 활동의 자유를 주어 집과 가구, 텃밭을 마련하여 모처럼 평화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으나, 3년 이상 기근이 계속되자 1663년 3월까지 생존한 하멜 일행 22명은 남원, 순천, 그리고 전라좌수영인 여수에 각각 분산되었다. 

 

 

7. 여수에서의 생활과 탈출:

여수로 오게 된 하멜 일행은 나뭇가지를 잘라 화살을 만들고, 쌀으,ㄹ 찧고, 새끼를 꼬는 등 고달픈 노역을 했다. 끝이 없는 부역과 노예 같은 생활에 지친 하멜 일행은 탈출 계획을 세워 1666년 9월 순천에 있었던 항해사 얀피터슨을 비롯한 8명이 배를 구해 여수 종포 (현재의 위치)에서 밤 늦은 시간을 틈타 출항하였다.   

 

 

8. 그리운 고향으로;

하멜 일행은 여수를 출항한지 3일 만에 탈출에 성공하여 1666년 9월 일본 교토 지역에 표착하였다. 이후 나가사키를 거쳐 1667년 11월 자카르타에 도착했다. 자카르타로 돌아온 하멜은 홀로 남아 직접 작성한 하멜보고서를 근거로 밀린 임금을 받고자 노력했다. 이후 조선에 잔류되었던 나머지 일행이 돌아오자 고국을 떠난지 20년 만인 1670년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멜등대  HAMEL LIGHTHOUSE

 

 

 

지금은 저 바다위에
    가득한 허공 뿐이니


한 시절 이 땅에
     네델란드 젊은이들이


하늬바람 일던 그날은
     귀향의 돛을 높이 올려
      저 수평선을 넘어기 갔다오


이 땅에 한도 두고
      정 또한 두고


그 겨울 유난히 바람이 잦고
       오동도 동백꽃은 더더욱 붉었다 하더이다.

2005년 3월 2일
국제로타리클럽 여수지회 

 

 

여수시 극동 아파단지 &  극동항..

 

 

여수 극동항

 

 

여수 자산공원 방향

 

 

관광 오동도유람선

 

하멜전시관

 

하멜의 조국 네델란드 풍차

 

 

하멜 동상

 

하멜과 여수

 

1653년 1월에 네델란드 상선 스페르베르호가 텍셀에서 출발하여 7월 바타비아(자카르타)를 거쳐 일본 나가사키로 가는 도중 8월 16일 제주도 근해에서 태풍을 만나 제주에 표착하였다.


살아남은 사람은 64명 중 36명이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헨드릭 하멜이었다. 1654년 5월 왕(효종) 명으로 일행은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1656년 강진 전라병영으로 압송되어 7년 세월을 보냈다. 가뭄으로 식량이 부족하자 1663년 2월 살아남은 22명을 여수에 12명, 순천에 5명, 남원에 5명씩 분산수용하게 되었다.

여수에 오게된 12명 중에 하멜이 있었고, 여수 좌수영성 문지기 생활을 하였다. 1664년 초에 부임한 이도빈 수사는 인자하여 하멜 일행을 편안하고 따뜻하게 대해주었으며 양모장사를 하여 탈츨힐 배도 살 수 있는 돈을 벌 게 되었다. 1666년 부임한 수사 정영은 인자하지 못하여 힘든 생활을 하다가 탈출을 시도하게 되었다.

1666년 9월 4일 밤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주민들과 함께 지내다가 전라좌수영정 담을 넘어 약속해 두었던 부둣가로 갔다, 식수를 준비하여 썰물이 시작될 때 군선 옆을 지나 남쪽 끝을 향하여 달렸다. 저녁 무렵 부산 끝을 마지막으로 보면서 한국 영역을 완전히 벗어났다.

이곳이 하멜 일행이 자유를 찾아 항해를 시작한 출발지이다.  

 

 

청춘낭만포차....꽃 보다 낭만...

 

 

바닷가 낚시하는 사람...

 

 

거북선대교

 

 

바다뷰 전망 좋은 집!  2층
낭만포차 낭만도시  32번

돌문어해물삼합 40,000원, 딱새우회 30,000원,
육회탕탕이 40,000원, 서대회무침 35,000원,
꽃게탕 45,000원, 낙지탕탕이 35,000원, 연포탕 45,000원
광어회 50,000원, 전복버터구이 40,000원, 전복회 40,000원
새우버터 35,000원, 낙지호롱이 35,000원, 모듬숙회 40,000원
갑오징어숙회 35,000원, 돌문어숙회 35,000원, 소라숙회 35,000원.

 

돌산도 우두리 방향

 

 

돌산도 우두리 조선소... 돌산도갓김치로 유명한 곳이다.

 

 

나는 이곳이 처음인데, 바닷가로 너무 좋은 나무데크 산책로가 자산공원, 오동도 방향으로 나있었다.

차도는 산 밑에 비교적 짧은 터널을 지나게 되며, 바로 오동도 입구가 나온다. 이순신광장에서 해양공원, 극동항을 거쳐 걸어온 거리와 오동도에서의 방파제 산책을 생각해서 여기에서 택시를 타고 오동도 입구로 향했다. 택시비 기본요금. 3300원? 집사람만 아니었으면 나는 걷고 싶었다. 

 

 

 

앗, 아름다운 남해 바다와 바다 건너 경상도 남해군 남면 선구리 방향...

 

 

거대한 선박 해체 작업 같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