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경복궁
- ( 2026.05.24 )
경복궁을 다녀옸습니다. 경복궁은 우리나라 궁전 중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곳입니다. 나는 경복궁 하면 근정전과 경회루, 향원정이 떠오릅니다. 오늘도 나는 가볍게 근정전과 경회루, 향원정 주변을 둘러보고 왔습니다. 경복궁에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한복을 입고 거닐고 있어, 마치 내가 조선시대 궁전에 와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것 같았읍니다. 한복 입은 젊은 아릿다운 처녀들을 보면 그 옛날 궁궐에서 생활하던 궁녀들을 보는 것만 같았습니다. 우리나라 한복이 이렇게 아름다울까 감탄하게 됩니다.

세종문화회관....5호선 광화문역 8번 출구

서시 (序詩)
운동주 (1917-1945)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시인 윤동주 (1917-1945): 중국 길림성 회룡면 명동촌 출생. 연희전문대 졸업. 일본 릿코대학 문학부 입학. 그러나 피어보지 못한 꽃 같은 젊은 시인은 해방을 불과 6개월 앞두고 후쿠오까 형무소에서 28의 젊은 나이에 옥사하였다.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의 詩>.


광화문 광장

별
정지용 (1902~1950)
누워서 보는 별 하나는
진정 멀 - 고나.
아스름 다치랴는 눈초리와
금金실로 잇은 듯 가깝기도 하고,
잠 살포시 깨인 한밤엔
창유리에 붙어서 엿보노나,
불현듯 솟아나 듯
불리울 듯 맞아들일 듯
문득, 영혼 안에 외로운 불이
바람처럼 이는 회한悔恨에 피어오른다
흰 자리옷 채로 일어나
가슴 우에 손을 여미다.
* 아스름: 아스라히, 희미하게
* 다치랴는: 닫히려는
* 흰 자리옷: 흰 잠옷
* 가슴 우에: 가슴 위에
* 손을 여미다: 손을 모으다
♠ 정지용 (1902~1950): 충청북도 옥천 출생. 1910년 옥천공립보통학교에 입학, 1913년 송재숙과 결혼. 1918년 서울휘문고등보통학교 입학하여 동인지 <요람>을 발간. 1919년 3.1운동 때는 교내 시위를 주동하다가 무기정학을 받기도 함. 1919년에 창간된 월간종합지 <서광>에 <3인>이라는 소설을 발표. 1922년 휘문고보를 졸업한 뒤, 시작(詩作) 활동을 하였고, 이듬해 1923년 일본 교토의 도시샤대학 영문과에 입학. 1926년 유학생 잡지인 <학조(學潮)> 창간호에 <카페 프란스>를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문단 활동을 시작. 1929년 대학 졸업후 귀국, 휘문고보 영어과 교사로 부임하여 해방이 될 때까지 재임. 1930년 <시문학>을 발간하고, 1933년에는 순수문학을 지향하며 한국 시단을 대표하는 인물로 떠오름. 34세 때인 1935년 그 동안 발표했던 시들을 묶어 첫 시집인 <정지용 시집> 을 출간함. 1939년부터는 시뿐 아니라 평론과 기행문 등의 산문도 활발히 발표했으며, 1941년에는 두 번째 시집인 <백록담>을 발간함. 태평양 전쟁 발발로 작품 활동을 중단한 채 은거 함. 해방 이후 이화여자대학교의 교수가 되어 한국어와 라틴어를 강의하였고, <경향신문>의 편집주간으로 활동험. 1946년에 시집 <지용시선(芝溶詩選)>을 발간.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이화여대 교수를 사임하고, 지금의 서울 은평구 녹번동에 초당을 짓고 은거하며 <문학독본(文學讀本)>을 출간함. 이듬해인 1949년 2월 <산문(散文)> 출간.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 서대문형무소에 수용, 이후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었다가 1953년 평양에서 타계했다고 알려진다. 정지용은 1930년대에 이미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시대를 개척한 선구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시인 김기림은 “한국의 현대시가 지용에서 비롯되었다”고 평하기도 했다.




위대한 세종대왕

한글 창제 이야기 조형물...

광화문 대로 버스 정류장


아름다운 한복의 여성들...

광화문(光化門):
경복궁의 남쪽 정문이다. 光化(광화)의 의미는 ‘임금의 큰 덕(德)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뜻이라고 한다. 1395년(태조 4) 에 경복궁이 건설될 때 함께 세워졌다. 광화문이라는 이름은 그냥 정문(正門)으로 부르다 세종때 붙여진 것이다. 광화문은 1592년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불타면서 같이 무너졌다. 이후 273년간 공터로 있다가 흥선 대원군이 경복궁을 다시 복원하면서 1865년 재건되었다. 현판 글씨는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무관 임태영의 글씨라고 한다.광화문의 천장에는 주작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후 광화문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 그 위치가 현재 건춘문 위의 국립민속박물관 터로 옮겨졌고, 한국 전쟁때 목조부분이 불에 타 없어졌다. 이후 광화문은 2006년 문화재청 주도의 경복궁 복원사업 일환으로 해체하여 고종 중기 모습으로 2010년 현재 위치에 다시 세워졌다.

흥례문(興禮門):
광화문과 근정문 사이에 있는 남쪽 문이다. 본래 홍례문(弘禮門)이었으나, 중건할 때 청나라 건륭제(乾隆帝)(1711~1799)의 이름인 홍력(弘曆)을 피하고자 흥례문으로 바뀌었다. 지금의 흥례문은 조선총독부 건물이었던 옛 중앙청을 철거한 다음 2001년에 복원한 것이다.

관람요금:
일반관람권 (경복궁);
대인(19~64세): 개인 3,000원, 단체 2,400원 (10인 이상)
통합관람권 (경복궁, 창덕궁,창경궁, 덕수궁, 종묘, 각 궁 1회 관람):
대인(내국인 만25~만64세/ 외국인(19세~64세): 개인 6,000원
* 만 65세 이상 경로: 무료.
* 한복 착용자는 무료 통과


경복궁(景福宮):
조선왕조 개국 4년째인 1395년 (태조4)에 처음으로 지은 으뜸 궁궐이다. "하늘이 내린 큰 복"이라는 뜻으로 경복궁(景福宮)이라 이름 지었다. 북악산을 주산으로, 목멱산(지금의 남산)을 안산으로 삼아 풍수지리적인 터잡기에도 한양의 중심을 차지했다. 정문인 광화문 남쪽으로 관청가인 육조거리(지금의 세종로)를 조성하고, 그 연장선 위에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등 중한 궁궐건물들을 일렬로 놓아, 왕조국가인 조선의 상징 축으로 삼았다. 임진왜란으로 완전히 불타 없어진 후, 1610년 제2의 궁궐인 창덕궁은 재건하였으나 경복궁은 270년 이상 폐허로 남게 되었다. 1867년 (고종4)에 비로소 왕조 중흥의 큰 업적을 이루기 위해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691,921m2 의 광활한 대지에 약 500여동의 건물들을 건립하였으며 조선 왕실의 전통과 현실을 조화시켜 전체적으로는 규칙적 배치를 따르면서 부분적 변화를 가미하였다. 중건된 경복궁은 정무공간을 중심부에 두고, 좌우 뒤편으로 왕족의 생활공간, 그리고 곳곳에 정원시설들이 배치되어 하나의 작은 도시를 이루었다. 일제강점기에 대부분의 건물들이 철거되어 중심부의 일부 건물들만 남았고, 광화문을 비롯한 외전 일부를 헐어내고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어 궁궐의 정면을 막기도 했다. 1990년 부터 복원 사업이 꾸준히 진행되어, 총독부 청사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원래의 흥례문과 행각을 복원했고, 왕과 왕비의 침전 및 왕세자가 기거한 동궁을 비롯한 궁궐의 정문인 광화문도 다시 복원하여 경복궁의 원모습을 회복 중이다.
궁궐 영역 번호:
1. 광화문과 궁궐담장, 2. 근정전 일원, 3. 사정전 일원, 4. 강녕전과 교태전, 5. 흠경각과 함원전, 6. 자경전 일원, 7. 동궁 일원, 8. 함화당.집경당과 흥복전, 9. 향원정과 건청궁, 10. 집옥재 일원, 11. 태원전 일원, 12. 경회루, 13. 주정전과 궐내각사, 14. 소주방 일원, 15. 자선당 기단과 주춧돌


근정문

근정전(勤政殿):
조선시대 법궁인 경복궁의 중심 건물이다.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곳이다. 태조 4년(1395)에 지었으며, 정종과 세종을 비롯한 조선 전기의 여러 왕들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하기도 하였다. ‘근정’이란 이름은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잘 다스려진다' 는 의미로 정도전이 지었다. 지금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고종 4년(1867) 다시 지은 것이다. 건물 내부는 임금의 자리인 어좌가 있다. 어좌 뒤에는 ‘일월오악도’ 병풍을 놓았고, 위는 화려한 장식으로 꾸몄다. 근정전에서 근정문에 이르는 길 좌우에는 문무백관들의 지위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차례로 놓여 있다. 근정전은 조선 왕궁의 위엄을 갖춘 웅장한 궁궐 건축물이다.

근정전 앞 품계석

근정전의 문이 굳게 닫혀있다. 왕의 어좌와 일월오악도를 볼 수 없었다.





경회루

경복궁과 통하는 문


수정전과 궐내각사:
왕실과 밀접하게 관련있는 관청을 궁궐안에 설치해 궐내각사(闕內各司)라 불렀다. 비설인 승정원, 서작 편찬을 맡앗던 홍문관, 의료기관인 내의원 등 크고 작은 관청들이 근정전 서쪽에 있었다. 세종 때 한글 창제의 무대가 된 집현전은 지금의 수정전 자리에 있었다. 1867년 중건된 이곳은 왕의 출입이 빈번하여 관청으로는 드물게 정면에 월대를 두었다. 수정전은 일상 집무공간으로 사용하다가 1894년 갑오개혁 때 내각 본부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경회루 (慶會樓):
왕실의 큰 연회를 베풀거나 외국 사신을 접대하던 곳으로 1867년 재건되었다. 높은 2층 누마루에 올라 서쪽으로 인왕산, 동쪽으로 궁궐의 아름다운 경관을 감상하며, 주위의 넓은 연못에는 뱃노리를 했다고 한다. 7 X 5칸, 바닥면적 933㎡ (282평)로 현존 목조 건물 가운데 가장 큰 규모다. 2층 마루는 3겹으로 구성되었는데, 중심 3칸은 천지인(天地人) 을, 그 바깥 12칸은 1년 12달을, 가장 바깥의 24기둥은 24절기를 의미하는 등 동양적 우주관을 건축으로 상징했다. 중건 당시에 경회루(慶會樓) 연못에 2마리 청동 용을 넣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실제로 1997년 준설공사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풍기대(風旗臺)... 보물제847호
풍기대는 대 위에 구멍을 뚫어 깃대를 꽂고 그 깃대에 기를 달아 바람의 방향과 속도를 가늠했던 기상 관측기구이다. 18세기 유물로 추정하며, 탁자 모양의 돌 위에 긴 팔각기둥을 세우고 넝쿨무늬를 정교하게 새겼다. 본 풍기대는 경복궁 흥복전권역 복원공사 구역에 위치하고 있어, 공사기간 동안 불가피하게 이곳으로 임시 이전하여습니다.



하향정(荷香亭):
하향정은 경회루 연지(蓮池) 북쪽에 있는 정자로, 1959년 지어졌다. 하향정은 일반 정자에서는 보기드문 육각형의 형태이며 규모는 적지만 건축 기법이 섬세하고, 익공(翼工) 형식의 조선 후기 궁궐 건축 양식을 따랐다.


인왕산 방향

북악산 방향

경회루 방향

진덕문


함화당


집경당 방향

향원정 곁 도로변....경복궁 수문장 순라의식

향원정(香遠亭):
1873년 고종이 건청궁을 지을 때 옛 후원인 서현정 일대를 새롭게 조성하였는데 연못 한가운데 인공의 섬을 만들고 그 위에 육각형 정자를 지어서 ‘향기가 멀리 퍼져나간다’는 향원정(香遠亭)이라 불렀다. 원래 조선시대의 정자에는 창호를 두지 않고 사방이 개방되어 있는 것이 보통인데, 이 향원정은 사방에 창호를 달아서 바람을 막을 수 있게 해 놓고 있다. 당시 선진국이라 생각했던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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