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 2025.01.21 )
남한산성
- ( 2025.01.21 )
오후 남한산성을 가보았습니다. 남한산성 안에는 임금이 머무는 동궁이 있으며, 남한산성 전체가 유네스코 세게문화유산 에 등재되어 있습니다. 남한산성 산책이나 산행 코스도 다양하며, 4계절에 따라 아름다운 경관을 선물합니다. 또한 남한산성은 찾아가기 쉬운 교통이 편리한 곳입니다. 8호선 산성역 2번 출구앞 '산성역.포레스티아 동문' 버스 정류장에서 9번 버스가 자주 운행되고 있으며, 주말이나 공휴일엔 9-1번 버스도 추가로 투입되어 운행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미세먼지가 너무 심해 등산 내내 곤란했습니다. 날씨는 따뜻하였고, 폭설이 많이 내렸던 남한산성의 눈은 거의 그대로인데 산책로는 염화카리 처리를 했는지 깨끗하여 걷는데 조금도 불편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겨울 산행은 예기치 못한 빙판, 눈길을 만날 수 있으므로 반드시 아이젠을 챙겨 가져 가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8호선 산성역 2번 출구 앞 '산성역.포레스티아 동문' 버스 정류장
※ 남한산성 가는 버스:
9번: < 사동종점 - 남한산성 입구 - 중앙주차장 >, 배차간격: 10-20분.
9-1번 (휴일): <산성역.포레스티아동문 - 남한산성도립공원>, 배차간격: 7-10분.
53번(주말): <남위례역- 남문터널>, 배차간격: 35-45분.
52번: < 성남동대형주차장- 남한산성도립공원>, 배차간격: 90-100분.
▶ 산 행 : 걸음수 7,093 steps, 거리 4.99 km, 소모열량 246 kcal, 소요시간 01:15 hrs, 속도 4.3 km/h, 기온 5℃.
▶ 코 스 : 남문 정류장 - 남문(지화문) - 수어장대 (청량산; 483m) - 서문(우익문) - 남한산성 전망대 - 북문(전승문) - 종로 로터리.
남한산성 남문 앞 하차
남문 주차장 방향
남문터널 방향
남한산성 비석군:
남한산성 비석은 역대 광주유수, 수어사, 부윤, 군수들의 선정* 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비의 앞면에는 비석명, 뒷면에는 건립시기 및 관련자에 대한 내용이 새겨져 있다. 이곳 비석들의 원위치는 남한산성 행궁 주변이었다. 남한산성 행궁 복원 사업으로 현자리로 옮겼으며, 이 비들을 통해 세계유산 남한산성 통치경관의 한 요소를 엿볼 수 있다.
* 선정: 백성을 바르고 어질게 다스림.
1. 흥선대원군영세불망비 (1863), 2. 전 군참사 이용식 거사비 (1932),
3. 전 군수 강원달 영세불망비 (1911-1915), 4. 겸유수 수어사 민치구 영세불망비 (1868),
5. 유수겸 수어사 홍학연 선정비 (1850), 6. 부윤 서리 양주군수 홍태윤 영세불망비 (1985)
7. 유수겸 수어사 심상규 거사비 (1818), 8. 유수겸 수어사 김이채 거사비 (1835)
9. 수어사 이조원 거사비 (1816), 10. 유수 겸 수어사 남병철 영세불망비 (1863)
11. 유수 겸 수어사 정기선 거사비 (1836), 12. 유수 겸 수어사 정기선 거사비 (1836)
13. 유수 겸 수어사 김교근 선정비 (1841), 14. 흥선 대원군 영세불망비 (1864)
15. 유수 겸 수어사 박희수 영세불망비 (1860), 16. 유수 겸 수어사 조경호 영세불망비 (1884)
17. 유수 겸 수어사 남정손 영세불망비 (1885), 18. 유수 겸 수어사 김윤식 영세불망비 (1888)
19. 유수 겸 수어사 민영소 영세불망비 (1891), 20. 유수 겸 수어사 박기수 선정비 (1837)
21. 유수 겸 수어사 서희순 선정비 (1846), 22. 유수 겸 수어사 조두순 선정비 (1851)
23. 유수 겸 수어사 이지연 거사비 (1829), 24. 유수 겸 수어사 이지연 거사비 (1829)
25. 유수 겸 수어사 이지연 거사비 (1829), 26. 부윤 김수홍 영세불망비 (1705)
27. 부윤 정지선 선정비 (1707), 28. 부윤 박태순 선정비 (1705), 29. 부윤 이제 선정비 (1705)
30. 유수 겸 수어사 조석우 영세불망비 (1873)
오늘 무슨 날인가? 남문 앞 개인 주택 곁에 많은 승용차가 와있다.
세계유산 남한산성 종합안내판
1코스: 산성로터리- 북문- 서문- 수어장대- 영춘정- 남문- 산성로타리 ( 3.8km, 1시간 20분 )
2코스: 산성로터리- 영월정- 숭렬전- 수어장대- 서문- 국청사- 산성로타리 ( 2.9km, 1시간 )
3코스: 남한산성 역사관주차장- 현절사- 벌봉- 장경사- 망월사- 지수당- 남한산성 역사관주차장 ( 5.7km, 2시간 )
4코스: 산성로터리- 남문- 남장대터- 동문- 지수당- 개원사- 산성로타리 ( 3.8km, 1시간 20분 )
5코스: 남한산성 역사관주차장- 동문- 동장대터- 북문- 서문- 수어장대- 영춘정- 남문- 동문 ( 7.7km, 3시간 20분 )
선정비
지화문 (남문)
남문 南門.至和門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남문은 남한산성에 있는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으로 현재에도 출입이 가장 많은 문이다. 선조 때의 기록을 보면 동문, 남문, 수구문의 세 문을 수축하였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남문은 인조 2년(1624)수축되기 이전 부터 이미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남문은 정조 3년(1779) 성곽을 보수할 때 개축하며, 지화문(至和門)으로 이름이 붙여졌으며 4대문 중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는 문이다.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처음 남한산성에 들어올 때 바로 이 문을 통해서 들어왔다.
<- 1.5km 수어장대, <- 2.1km 우익문(서문), -> 0.7km 종로
지화문:
정조3년 성곽을 보수 할 때 '지하문'이라 칭하였고 남한산성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이다.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다. 또한 현재는 성남으로 통하는 관문역할을 하고 있으며, 성문앞에 식재된 (350년 수령, 성남시 보호수) 느티나무와 함께 문화와 역사가 살아숨쉬는 시민의 역사터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 - 성남시.
누비길.... 성남 누비길 노선 안내
검단산 길, 성남 누비길을 일주합시다. 울창한 숲에서의 등산은 신체리듬을 회복시키고 산소공급을 원할히 하여 운동시경을 단련시키는 등 인체건강에 유익합니다. 시민 여러분의 건강과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성남누비길을 일주해 봅시다.
누비길 코스:
1구간: 남한산성길 7.5km ( 4시간 )
2구간: 검단산 길 7.4km ( 3시간 30분 )
3구간: 영장산 길 9.7km ( 4시간 30분 )
4구간: 불곡산 길 8.8km ( 4시간 )
5구간: 태봉산 길 10.7km ( 4시간 30분 )
6구간: 청계산 길 8.5km ( 4시간 30분 )
7구간: 인능산 길 9.5km ( 4시간 )
> 검단산 길:
검단산은 태백산맥의 철령(鐵嶺) 부근에서 분기하여 서울 부근에 이르는 광주산맥의 지맥으로서 남한산성과 연결되는 산줄기를 이루며, 높이는 534.7m이다. 경기도 성남시 동쪽으로 광주시와 경계를 이루며, 전체적으로 '凹(요)'자 모양의 산지를 형성한다. 이 산을 중심으로 하는 성남시의 동쪽 산지는 남쪽으로 갈 수록 해발고도가 낮아지며 완만한 산이라 하여 그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 산성역 - 불망비 - 남문(지화문): 3,7km
검단산길 2코스: 남문(지화문) - 1.0km- 산림초소 - 1.4km - 검단산 정상 (536.4m) - 1.4km - 만수천 약수터 - 0.7km - 망덕산 정상 ( 500.3m ) - 0.5km - 형제봉 정상 ( 435m ) - 0.8km - 이배재고개 - 1.8km - 갈마치고개.
호국정신과 선비정신이 깃든
남문 앞 역사터 안내
- 남한산성은 한성 백제시대의 성산이요 진산의 개념으로 백제의 시조 온조대왕의 사당 숭렬전(경기도유형문화재 제2호)이 있는 곳이다.
- 남한산성은 통일신라시대에는 주장성(晝長城) (일장(日長)산성)으로 불렀으며 한강유역의 중요 산성으로 발전하였다.
- 고려시대에는 몽고군의 침입을 물리친 국방의 요새지 이었다.
- 조선왕조 제16대 인조임금 원년(1623)에 성의 축성을 시작하여 1826년에 완성 (본성의 둘레가 9.05km)하니 남한산성은 경도보장지(京都保障地)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 남한산성은 주봉인 청량산(497.8m) 을 중심으로 4대문과 18암문을 완성하고 성내에는 행궁을 비롯하여 수어장대 등 각종 문화유적이 남아있고, 현재는 경기도 도립공원(국가사적 제57호)으로 성남시, 하남시, 송파구, 광주시 등 4개 지방자치 단체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 특히 남문은 성의 서남쪽 곡저부의 해발 370M 지점에 위치하여 있으며 정조 3년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하여 지화눈(至和門)으로 칭하였고,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 문이며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으며 성남으로 통하는 관문 역할을 하는 문이다.
- 인조 14년에 청태종의 침공(병자호란)으로 인조 임금이 이곳으로 피신하여 45일간 항전한 유서 깊은 곳이다.
- <남문 앞 역사 터>는 성남시가 문화재청과 협의를 거쳐 2007. 5.15부터 약 6개월간의 공사로 2007.11.19 준공하였으며, 성문 앞에 식재된 380여년 된 느티나무와 원형이 가장 잘 보전된 것으로 평가받는 남문은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역사 공간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
- 성남시 보호수인 느티나무(4주)는 성곽방어의 특성을 고려하여 남문을 시각적으로 차폐하기 위하여 식재하였을 가능성과 성문 주변이 평상시 왕래가 많고 지형상 경사가 심하여 우수 시에 토양유실을 막기 위해 식재하였을 것으로 추론되는 역사터다. - 성남시
남문(지화문) - 백련사 - 주 등산로 - 산성유원지 입구 - 검단산 - 시계 등산로 - 남문 (지화문)
보호수...느티나무, 수령 약 450년( 지정일자 2006.6.20), 수고 14~17m, 나무둘레 80~160m
남한산성 성곽은 인조 4년(1626년)에 준공되었으며, 느티나무(보호수)는 당시 성곽사면 토양유실 방지 및 차폐의 목적으로 식재된 것으로 추정된다. 남한산성 순환도로 터널이 개통된 후 폐도 부지가 된 남문 앞 느티나무 주변을 2006년 재정비하여 느티나무 생육환경개선 후 총 4주를 보호수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 성남시 중원구.
지화문
동절기 탐방로 이용안내
동절기 안전한 산행을 위해 탐방로 이용시는 반드시 등산화 및 아이젠 등 안전방비를 착용후 이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경기도 남한산성 세계유산센터
이곳의 음지에는 내린 눈이 녹지 않고 있다.
남한산성은 소나무가 많은 곳인데, 습한 폭설로 무게를 못 이겨 부러진 나무 들이 많았다.
청량산 수어장대 방향
칼 쓴 십자가
" 천주교 비극의 역사, 남한산성 "
남한산성 성지성당 내부에는 순교자들의 옥에 갇혀있을 때 쓰고 있었던 칼이 채워져 있는 독특한 십자가상이 있습니다. 천주교 탄압의 본격적인 서막은 신유박해(1801년) 부터였는데요. 천주교에 대해 큰 반감이 없었던 정조가 승하하자 정순황후가 가혹한 탄압을 시작한 것이죠. 박해의 진짜 이유는 정조시기에 세력을 키운 남인을 숙청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이 신유박해 때 남한산성에서 첫 순교자가 발생하게 됩니다. 천주교 신자가 광주 및 인근 지역에서 잡히면 남한산성 포도청으로 이송되어 감옥에 갇혔습니다. 순교자들은 심문을 당하다 결국은 감옥에서 순교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교살형이나 교수형이 대부분 감옥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감옥이 곧 순교터가 되었습니다. 감옥에서 죽거나 고문 끝에 죽은 순교자들은 동문 밖으로 시신을 버렸는데 그 장소가 수구문이었습니다. 시체가 너무 많이 나가고 피가 물처럼 흘러 수구문은 시구문으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 900m 수어장대, 지화문 700m ->
병자호란:
" 우리 민족의 삶을 바꿔놓은 전쟁 "
병자호란은 조선과 청나라가 군사력으로 부딪힌 동아시아의 대사건입니다. 이 전쟁을 계기로 동아시아의 질서는 급격하게 청나라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우리 민족 역시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됩니다. 이 병자호란의 중심에는 바로 남한산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산성에서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각지의 근왕병과 지원병이 청군의 남한산성 포위를 풀지 못 한채 모두 격퇴되고 말았고, 설상가상으로 두 달 분의 비축물자가 바닥나자 결국 인조는 항복을 결심하기에 이릅니다. 패배의 결과로 인조는 송파에 위치한 삼전도로 걸어 내려가 '삼배구고두례'(*) 를 행하고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습니다. 이로 인해 조선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고 이후 수많은 변화를 맞게됩니다. 패배를 씻기 위해 북벌론이 대두되기도 하고, 명분만을 중시하던 사상체게의 변화가 일어나 수많은 실학자들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민중 계층에서도 패배한 전쟁의 결과를 극복하기 위한 수많은 민담과 설화들이 창작되었습니다. 병자호란은 시대의 변화를 알리는 기폭제였으며 동시에 우리 민족의 사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역사의 분기점이 된 사건이었습니다.
(*)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삼배구고두례'는 중국 청나라 시대에 황제나 대신을 만났을 때 머리를 조아려 절하는 예법이다. 삼궤구고두례를 행하는 방식은 “궤”(跪)의 명령을 듣고 무릎을 꿇는다. “일고두(一叩頭)", “재고두(再叩頭)", “삼고두(三叩頭)"의 호령에 따라 양 손을 땅에 댄 다음에 이마가 땅에 닿을 듯 머리를 조아리는 행동을 3차례 하고, “기(起)"의 호령에 따라 일어선다. 이와 같은 행동을 3회 반복한다. 인조는 삼전도에서 겨울 얼어붙은 맨 땅에 머리를 9번이나 찧으면서 청 나라 숭덕제(崇德帝(1592 ~ 1643; 태종太宗) 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말았다.역사적인 치욕이다. 청나라의 강요로 세원진 삼전도비가 지금도 잠실 롯데백화점 곁에 있는 석천호수 서호 대로변 방향 코너에 설치되어 있다.
옛날 정자가 있었던 곳...이곳에서 잔치국수, 파전, 막걸리 등을 팔았는 데, 맛이 너무 좋아 잊을 수 없다. 이곳을 지나자면 그 때 기억이 떠오른다. 한번은 식구들을 데리고 남문에서 성곽길을 따라 이곳에 오다가 마지막 내리막 길을 거의 다 내려와 집사람이 발을 헛디뎌 발목을 다쳐 우리 큰 애가 집사람을 업고 남문 쪽으로 다시 내려가 택시를 불러 타고 병원으로 간 기억이 떠오른다. 산에서 다치니 처음엔 참 난감하였다. 혼자 산행시는 정말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느낀다.
이곳에서 집사람이 발목을 삐였던 곳이다. 발목 깊스를 하고 한동안 고생하였다. 잔치국수고, 막걸리고 뭐고 다 허사가 되었다.
제6암문(서암문)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의 비밀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도 설치하지 않았다. 이 암문은 성벽의 흐름 방향과 달리 입구가 북서쪽을 향하고 있어 외부에서 쉽게 관측되지 않도록 하였다. 또한 북동쪽의 성벽을 돌출하여 암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원성에 설치된 12개 암문의 외측 개구부는 대부분 홍예식이지만 제2암문과 더불어 이 암문의 개구부는 평거식이다. 인조 15년(1637) 1월 23일, 한밤중에 습격해 온 청병을 크게 물리친 곳이라 하여 이 암문 부근을 '서암문 파적지'라 부른다.
앗, 수어장대다.
청량당(淸凉堂)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호):
청량당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 사당은 남한산성 쌓을 때 동남측 축성의 책임자였던 이회 장군과 그의 부인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이회는 공사비를 횡령했다는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고 이 소식을 들은 부인 송씨는 한강에 몸을 던져 따라죽었다. 이회는 죽을 때 자신의 죄가 없으면 매 한마리가 날아올 것이라 에언 했는데 과연 매가 날아와 그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한다. 후에 누명이 벗겨지고 그가 맡은 공사가 가장 잘된 것으로 알려지자 사당을 지어 초상을 안치하고 넋을 기렸다. 원래의 청량당은 6.25 전쟁때 소실 되어 다시지었다. 서장대가 있는 산 이름이 청량산이므로 청량당이라 이름 지었다.
보호수 향나무, 수령 360년, 수고 2.5m, 지정일자 1983. 03. 10.
사적 제57호 남한산성
남한산성 수어장대: 보물
장대란 지휘와 관측을 위해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누각 건물로 남한산성에는 5개의 장대가 있었다. 수어장대는 남한산성 서쪽에 있어 본래 '서장대' 라고 불렸다. 병자호란 당시에는 단층 누각이었고, 수어청 우영장이 서장대에 머물며 군사를 지휘하였다. 이후 영조 27년(1751)에 유수 이기진이 복층으로 중건하고, '수어장대'라는 편액을 달았다. 지금의 수어장대 현판은 헌종 2년(1836)에 유수 박기수가 수어장대를 증축하였는데, 그 형인 박주수가 쓴 것이다. 수어장대에서는 수어사가 수어청의 군사를 지휘하였는데, 정2품 상사에 해당하였다. 수어청은 한양을 수비하는 5군영의 하나로, 본래 한성부 북부 진장방 (오늘의 서울 종로구 삼청동, 팔판동,화동 일부)에 그 본청이 있고, 광주부윤을 부사로 삼아 남한산성을 관할케 하였다. 그러다 운영의 효율성을 도모하고자 정조19년에 본청을 완전히 남한산성으로 옮기고, 광주유수가 수어사를 겸하게 하였다. 남한산성 수어장대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로 관리되어 오다 2021년에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승격되었다. 또한, 수어장대는 세계문화유산 남한산성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 중 하나인 군사 경관 (장대)에 해당한다. 수어장대는 여러 문헌에 등장하는데, 그중 조선 숙종의 정비인 인경왕후의 아버지 김만기는 <서장대기>에서 아래와 같이 언급하였다.
" 비록 한강의 흐름을 기울여도 그날의 비린내는 씻지 못할 것이다. 만약에 혹시라도 풍경이나 구경하고 유람이나 탐하면서 다시는 감개하고 탄식하는 마음이 없다고 하면 이는 이른바 그 양심을 잃은 자이다. "
무망루
조선 영조27년(1751) 광주 유수 이기진이 증축한 수어장대 2층의 내편(內篇) 문루로서 그 편액(扁額)이 2층 누각에 있어 1989년 전각을 건립하고 이 안에 현판을 새로 설치 일반인이 볼 수 있게 하였다. 무망루는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혔다가 귀국 후 북벌을 꾀하다가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이믐지은 것이다.
매바위, 그리고 '수어서대" 암각글씨.
청량당에 위폐가 모셔진 남한산성 공사 책임자 중 한사람이었던 이회가 공사비 횡령에 연류되어 억울하게 처단되자 죽 전에 자신의 죄가 없다면 매가 날아와 이 바위에 앉을 것이라고 유언을 했는데, 그 후 과연 매가 날아와 매바위에 구슬피 울었다고 하며, 다시 확인해 보니 죄가 없음이 드러났으며, 오히려 다른 구간보다 성이 더 견고히 축성되었음이 밝혀졌다. 예나 지금이나 모함은 한 인간을 파멸로 이끌기도 한다.
수어장대
※ 병자호란 주요 연표:
- 1598년 (선조 31년): - 임진왜란 끝남.
- 1608년 (선조 41년): - 광해군 즉위.
- 1616년 (광해군 9년): - 누루하치 후금 건국.
- 1618년 (광해군 11년): - 명과 후금의 전쟁, 명에 원병 파견함.
- 1619년 (광해군 12년): - 강홍립 후금에 투항. -> (중립외교).
- 1622년 (광해군 15년): - 명나라 장수 모문룡 가도에 주둔.
- 1623년 (광해군 16년): - 인조반정으로 인조 즉위. -> (친명배금정책)
- 1624년 (인조 2년): - 이괄의 난.
- 1627년 (인조 5년): - 정묘호란 발생.
- 1635년 (인조 13년): - 후금 내몽고 점령.
- 1636년 (인조 14년): - 후금 청으로 국호 변경하고, 조선에 군신관계 요구 (척화론과 주화론 대립).
- 12월 28일 병자호란 발생. 남한산성 전투.
- 1637년 (인조 15년): - 2월 24일 인조 송파 삼전도에서 항복. 청과 사대관계 맺음.
- 1644년 (인조 21년): - 명나라 멸망. 청 중국 통일.
미세먼지로 시야가 극히 좋지 않다. 남한산 벌봉 방향
▶ 하산 하는 길:
수어장대와 수어청
" 한양 남쪽의 상비군, 수어청 "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의 서문과 남문 사이 가장 높은 지대에 위치한 지휘소 겸 적정 감시시설입니다. 특히 남한산성 방위의 총사령관이라 할 수 있는 수어사는 조선시대 군사제도인 5군영 제도 중 하나인 수어청의 수장이기도 합니다. 조선은 임진왜란을 겪으며 상비군의 필요성을 절감하느데요 . 그래서 전쟁 중에 설립된 기관이 훈련도감입니다. 훈련도감은 전쟁 중에 꼭 필요한 상비군을 훈련하고 유지하는 기관이었습니다. 이 훈련도감과 함께 4개의 지방 상비군이 설치되는데 그 중 남한산성에 설치된 군영이 바로 수어청입니다. 조선은 훈련도감 설치 이후 수도 한양을 방어할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는데 먼저 화기를 사용하는 총포군을 양성할 수 있는 어영청을 설치합니다. 다음으로 한양의 북쪽을 방어할 총융청을 설치합니다. 총융청의 본부는 북한산성이었고 한양에 적군이 진입하기 전 북한산성에서 격퇴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다음 설치된 곳이 바로 남한산성의 수어청입니다. 마지막으로 설치된 왕의 직할부대 개념의 금위영까지, 5군영 체제는 조선후기까지 어어지는 핵심 군사제도였습니다.
↑ 수어장대 0.1km, -> 지화문1.1km.
남한산성 (사적 제57호):
1 남한산성 행궁, 2 수어장대, 3 숭렬전, 4 청량당, 5 현절사, 6 침괘정, 7 연무관, 8 지수당, 9 장경사, 10 망월사, 11 개원사, 12 제1남옹성, 13 제2남옹성, 14 남문(지회문), 15 서문 (우익문), 16 연주봉옹성, 17 북문(전승문), 18 동문(좌익문), 19 장경사신지옹성, 20 동장대터, 21 봉암성, 22 벌봉
남한산성은 조선시대 뿐 아니라 삼국시대부터 천연의 요새로 중요한 역할을 하던 곳이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의 욍성이었다는 기록이 있고, 나당전쟁이 한창이던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한산주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기록도 있다. 고려시대에는 몽고의 침입을 격퇴한 곳이기도 하고 일제강점기에는 항일운동의 거점이 되기고 한 곳이다. 그러나 남한산성은 주로 병자호란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조선 인조 14년(1636)에 청나라가 침략해 오자 왕은 이곳으로 피신하여 항전하였으나, 왕자들이 피신해 있던 강화도가 함락되고 패색이 짙어지자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 나가 치욕적인 항복을 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남한산성은 패배를 알지 못하는 곳이다. 성의 외부는 급경사를 이루어 적의 접근이 어렵고, 내부는 경사가 완만하여 넓은 경작지와 물을 갖춘 천혜의 전략적 요충이기 때문에, 병자호란 당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청군에 함락당하지 않고 47일간이나 항전할 수 있었던 곳이다. 이처럼 오랜 기간동안 우여곡절을 가진 성의 역사처럼 성곽의 형태 또한 단순하지 않아서 하나의 폐곡선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본성, 봉암성, 한봉성, 신남성과 5개의 옹성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조이다. 인조 4년(1636) 에 중앙부의 가장 큰 폐곡선인 본성이 완성되었고, 병자호란 이후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동쪽의 봉암성, 한봉성 등을 비롯하여 여러차례 증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코스 남한산성 역사테마길, 현위치 수어장대인근:
1코스 장수의길 <->, 2코스 국왕의 길 ↓, 5코스 산성의 길 <->
<- 0.6km 우익문(서문), <- 1.3km 전승문(북문), -> 수어장대 0.3km, -> 지화문(남문) 1.6km
위험 추락주의
폭설피해로 위험목이 많으니 안전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길과 길
남한산성 옛길
" 왕들의 능행길, 민간의 상업루트 "
남한산성이 위치한 지금의 성남시, 광주시, 하남시는 옛날 조선시대 행정구역으로 보면 모두 광주유수부의 관할지역이었습니다. 광주수유부는 남한산성의 군사요충지적 특성 때문에 매우 중요한 행정중심지였습니다. 또 남한산성은 왕의 이동과 관련이 깊은 곳입니다. 조선시대 왕들은 반드시 선대와들의 능에 성묘를 가야 했으며 왕들의 이런 성묘행사를 능행이라고 불렀습니다. 후대의 왕들이 영녕릉(英寧陵)에 참배를 하려 가려면 일 년에도 몇 차례씩 남한산성 옛길을 이용해 여주까지 가야했습니다. 남한산성 옛길의 또 다른 특징은 조선후기 상거래가 활발해지면서 필요해진 내륙의 유통망으로 민간에서 이용했던 상업루트였다는 점입니다. 많은 보부상들이 바로 남한산성 옛길을 통해 상업유통의 한축을 담담하게 됩니다. 이렇게 이용된 남한산성 옛길은 목적지인 경상북도 봉화의 이름을 따 통칭 봉화로라고 불렀습니다.
우익문(서문) 이정표:
<- 1.0km 수어장대, <- 일장천약수, -> 위례둘레길 (벌봉) 3.2km, -> 위례둘레길 (북문) 1.1km
서문 (우익문)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서문은 4개의 대문중 규모가 가장 작고, 산성을 처음 쌓았을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 3년(1799)에 다른 문과 같이 개축하며 우익문(右翼門)이라 칭하였다. 행궁을 중심으로 국왕은 남쪽을 바라보며 국정을 살피니, 서문이 행궁의 우측에 있어 우익문이라 하였다. 서문은 인조15년(1637) 1월 30일 왕이 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항복하기 위해 남한산성을 나간 바로 그 문이다. 남한산성의 서쪽 사면은 경사가 급해 물자수송이 어렵지만 광나루나 송파나루 방면에서 산성으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문
" 위상이 남다른 4개의 문 "
남한산성에는 4개의 문이 있습니다. 한양의 4대문 처럼 남한산성의 4개문은 좌익문(左翼門: 동문), 우익문(右翼門: 서문), 지화문(至和門: 남문), 전승문(全勝門: 북문) 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한양 도성의 문 이름과 비슷하지요? 가장 크고 넓은 문이 지화문입니다. 지화문은 좌익문과 함께 남한산성의 핵심 도로인 봉화로에 설치된 성문입니다. 왕의 행렬, 마차와 수레, 여러 장사치들과 주민들이 드나들었던 지화문은 남한산성 옛길을 따라 좌익문과 이어지게 됩니다. 이 길은 남한산성 옛길의 가장 핵심적인 루트입니다. 남한산성 옛길은 산성 로터리를 중심으로 북문, 서문, 남문을 일주하는 노선을 따라 이루어져 있습니다.
감이동 1.9km
감이동 - 성불사, 청운사 - 왕행길 - 현위치, 우익문(서문) -전승문(북문) / 지화문(남문).
서문노선 2.1km
우익문(서문)
<- 3.2km 위례둘레길(벌봉), <- 1.1km위례둘레길(북문), ↗ 푯말삼거리, ↗ 위례둘레길(덕풍골) 8.7km
↖ 1.0km 수어장대, ↖ 일장천약수
국청사
남한산성 국청사 연혁:
본 도장은 조선인조3년(서기1625년) 각성대사에 의하여 창건되었다. 각성대사는 인조대왕으로 부터 팔도총섭총절제중군주장으로 임명을 받은 후 전국팔도에서 승군을 모아 남한산에 성을 축성하시고 9개사찰을 창건하시었다. 병자호란으로 인한 수모를 또 다시 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승군을 훈련하고 군기며 화약, 군량미를 비축하였으니 그 중 하나인 국청사이다. 선사의 유시로 국난에 대비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든바, 일제침략시 일본군에 의하여 방화소진되었던 것을 서기 1968년 중건되었으나 서기 1986년 불자 최계순(불명, 원만행)께서 부지 1,003평(대웅전 요사채)를 기증 하시었으며, 이 모든 것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 국태민안 광도중생을 기원하기 위하여 현주지 선걸 스님께서 삼성각 요사채를 신축하시고 서기 1998년 대웅전을 중건중수 하시었다. 본 도장의 삼존불은 신라 헌안왕 3년(서가 859년) 강원도 철원 보개산 심원사에 조성 봉안하였던 천불 중 서기 1393년 심원사 화재와 임진왜란 때 소실 도난 되었던 바 그 중 삼존불중 한분만 본도장 국청사에 모시었다.
불기 2543년 4월, 서기 1999년 5월 대한불교조계종 국청사
북문 가는 길
미세 먼지가 심하다. 주변이 뿌였다.
도시
" 한양 다음으로 큰 완전한 소비도시, 산성리 "
조선시대 한양은 20만 명이 넘는 인구를 가진 도시였습니다. 18세기 후반 산업혁명 시기 영국 런던의 인구가 5만 명이었다는 사실에 비교해 보면 가히 한양의 인구규모를 짐작할 만 합니다. 남한산성 옛길이 위치한 산성리 지역은 한양에 인접한 소비도시 였는데 토박이 주민의 제보에 따르면 산성내 주민들이 주변 마을 사람들을 촌놈 취급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을 정도 입니다. 1627년 (인조6년) 광주부 읍치(邑治: 행정중심지)를 산성 내부로 옮기면서 산성리 인구는 폭증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1895년 조선총독부에 의한 행정구획 통폐합까지 일어나 중심지로서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면서 그 규모가 서서히 줄어들게 됩니다. 일제에 의해 산성 내에 위치하고 있던 광주군청이 경안 등으로 이전하게 되면서 군사도시, 행정도시의 위용은 완전히 사라지고, 근대화 시기로 접어들며 주요 도로가 남한산성을 제외한 채 건설됩니다. 이후 한강 이남에서 가장 번성했던 지역 중 하나였던 남한산성은 한적한 마을로 점차 변화하여 잠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됩니다.
금암산(321.2m) 방향
나무를 지키는 금림조합
" 남한산성의 귀중한 숲을 지켜 후손에게 "
남한산성의 산림은 매우 잘 보존되어온 아름다운 생태유산입니다. 이는 오래전부터 산성 내의 숲을 보호하고자 하는 산성 주민들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는데요, 일반적으로 근대화 이전의 생활연료는 나무였기에 20세기 초반 대부분 산들은 나무가 없는 민둥산이 도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나 산성 안의 나무들은 예외였는데, 마을 주민들이 '금림조합'을 만들어 순산원을 두고 도벌을 막아 보호한 덕택에 지금처럼 건강하게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금림조합은 남한산성의 숲을 보호하기 위해 산감(山監: 산림 감시원) 50명을 선출하여 매일 6명 씩 교대로 산림을 감시토록 하였습니다. 산감은 극빈자 계층에서 선발하였기 때문에 숲을 보호하는 것과 동시에 취약계층의 구제에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남한산성 금림조합의 노력은 이후 2016년까지 90년에 가깝게 지속되어 왔으며, 덕분에 남한산성은 귀중한 생태문화자원을 잘 보존하여 후손에게 전할 수 있게 되었답니다.
<- 전승문 300m, -> 우익문 700m.
앗, 북문
북문 밖 이정표:
<- 2.1km 위례 둘레길(벌봉), <- 1.1km 위례 둘레길(서문), -> 2.2km 위례 둘레길(법화골), -> 1.3km 위례 둘레길(고골)
북문을 통해 이 방향으로 내려가면 하남시 고골, 법화골이 나온다.
벌봉 방향
북문( 전승문 ):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북문은 병자호란 당시 성문을 열고 나가 기습공격을 감행했던 문이다.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에서 '전승문'이라고도 하였다. 당시 영의정 김류의 주장에 의해 군사 300여명이 북문을 열고나가 청나라 군을 공격하였으나, 적의 계략에 빠져 전멸하고 말았다. 이를 '법화골 전투';라고 하는데,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있었던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였다. 정조3년(1779) 성곽을 개보수할 때 성문을 개축하고 이름을 붙여 전승문(全勝門)이라 한 것은 그 때의 패전을 잊지말자는 뜻이었을 것이다. 선조 때의 기록을 보면 산성 내에 동문과 남문, 수구문의 3개의 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북문은 인조2년(1624)에 신축된 성문이라고 생각된다.
<- 2.9km 지화문(남문), <- 0.1km 전승문(북문), ↓ 0.35km 숭렬전, -> 지화문(남문) 0.9km, -> 종로 0.3km
-> 국청사 800m
전승문(북문) ↓, 송림정 ↓, 동촌 ↓, 국청사->, 한경직목사 우거지->, 숭렬전->, 계곡산장->, 카페 작은 숲->, 영락수녀원->
, 용마루->, 석촌->, 돌집->, 먹거리창고->, 백송식당->, 카페 남한산성->
남한산성 역사 테마길:
남한산성 역사 테마길은 세계유산이며 도립공원인 남한산성의 가치를 체험할 수 있도록 테마별로 구성된 탐방로입니다. 국가지정 사적 제57호인 남한산성과 제480호인 남한산성 행궁을 비롯한 수많은 문화재가 잇으며, 백제 시조 온조왕, 병자호란 등 많은 역사적 의미를 간직한 장소입니다. 탐방객은 관심분야와 여건에 맞는 코스를 선택하여 체험할 수 있습니다.
- 장수의 길 1코스:
1코스 장수의 길은 세계유산 남한산성이 가지고 있는 방어요새의 특징들을 살펴볼 수 있는 탐방코스입니다. 방어시설의 중심이었던 존승문(북문), 우익문(서문), 자화문(남문)을 거닐며, 전쟁시 비상연락 및 적정 탐색을 위한 암문과 지휘를 했던 수어장대를 볼 수 있습니다. 장수의 길에서 세계유산 남한산성의 굳건한 모습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제1코스 (3.8km, 80분): 산성로터리- 북문(0.4km)- 서문(1.1km)- 수어장대(0.6km- 무궁화동산(0.3km- 남문(0.7km)- 산성로타리(0.7km)
- 국왕의 길 2코스:
2코스 국왕의 길은 조선시대 국왕의 공간이었던 행궁에서 시작되어, 침괘정을 지나 병자호란 시기 인조가 항복하러 성문을 나간 서문을 아우르는 탐방코스 입니다. 국왕이 행차하여 머물렀던 남한산성 행궁, 백제시조 온조왕 사당인 숭렬전, 인조 관련 이야기가 전해지는 침괘정과 우익문(서문)을 볼 수 있습니다. 국와의길에서 잘 가꾸어진 소나무 숲길을 거닐며 세계유산 남한산성의 시원한 자연환경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2코스(2.9km, 60분): 산성로터리- 영월정(0.4km)- 숭렬전(0.2km)- 수어장대-(0.6km) 서문(0.7km)- 국청사(0.1km)- 산성로타리(0.9km)
- 승병의 길 3코스:
3코스승병의 길은 남한산성을 만들 때 부터 전쟁시기 남한산성을 지켰던 승병들의 생활을 알아볼 수 있는 탐방코스 입니다. 산성의 수축과 유지를 위해 승병이 머물렀던 장경사와 망월사와 남한산성의 외성인 봉암성을 볼 수 있습니다. 승병의 기레서 사찰을 거닐며 세계유산 남한산성 사찰의 고즈넉한 모습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3코스(5.7km,120분): 남한산성 세계유산센터- 현절사(0.1km)- 벌봉(1.8km)- 장경사(1.5km)- 망월사(1.1km)- 지수당(1.0km)- 남한산성 세계유산센터 (0.2km)
- 옹성의 길 4코스:
4코스 옹성의 길은 남한산성의 약점을 보완하고자 했던 선조들의 고민을 느낄 수 있는 탐방코스입니다. 적 대포에 대응한 방어시설이었던 제1남옹성, 제2남옹성, 제3남옹성을 볼 수 있습니다. 옹성의 길에서는 굳건한 남한산성의 성벽과 양생화를 비롯한 아름다운 자연황경이 어우러져 있어 세계유산 남한산성의 평화로운 모습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4코스(3.8km, 80분): 산성로터리- 남문(0.7km)- 남장대터(0.6km)- 동문(1.1km)- 지수당(0.5km)- 개원사(0.3km)- 산성로타리 (0.6km)
- 산성의 길 5코스:
5코스 산성의 길은 '하늘이 만든 성'으로 알려진 남한산성의 성벽을 두루 볼 수 있는 탐방코스 입니다. 남한산성을 지키는 성벽을 따라 암문과 치성 등 방어시설물을 볼 수 있습니다. 산성의 길에서 남한산성 성벽의 경관과 성남, 하남, 광주의 경관을 모두 볼 수 있어 세계유산 남한산성의 다채로운 모습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5코스(7.7km, 200분): 남한산성 역사관주차장- 동문(0.6km)- 동장대터(1.1km)- 북문(1.6km)- 서문(1.1km)- 수어장대(0.6km)- 영춘정(0.3km)- 남문(0.7km)- 동문 ( 1.7km)
산성마을 종로 로터리
세계유산 남한산성
World Heritage
남한산성 옛길 종합안내
로터리
" 남한산성 내의 기준점 "
남한산성 안에는 핵심 간선 도로망이있던 봉화로가 남문과 동문을 통해 이어져 있으며, 남한산성 중심지에서 한양도성의 동쪽(현재 하남시)과 남쪽 (송파, 마천)으로 바로 이어지는 중요 노선들이 한 점을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산성 로터리입니다. 남한산성에서 동으로 몇리, 남으로 몇리 이렇게 이렇게 거리를 측정하는 것도 바로 이 로터리를 기준으로 정하게 됩니다. 행궁의 바로 옆에 위치한 일종의 랜드마크와도 같아서 이곳을 왕래하는 주민들의 심리적 중심적 역할을 합니다. 남한산성 내에 위치한 마을이 산성리인데, 산성리 주민들은 로터리에서 우(북 또는 서)로 얼마를 가면 행궁이 있고 아래(동 또는 남)로 얼마를 가면 관아가 있고 방앗간이 있고 장터가 있다는 식으로 심리적 위치를 정하곤 합니다. 주민들 뿐만 아니라 남한산성을 찾는 많은 시민들은 지금도 남한산성 안에서 특정 지점을 말할 때 이 로터리를 기준으로 이여기를 하곤 합니다.
<- 지화문 700m, 전승문 400m ->
산성역 가는 9-1번 버스 정류장
동종 & 침괘정 방향
남한산성 종각의 천흥사 동종:
남한산성의 천흥사 동종은 높이 170cm, 지름 100cm로 몸체에 세겨진 명문 ‘聖居山天興寺銅鐘總和二十八年庚戌二月日' (성거산 천흥사 동종 총화 이십팔년 경술이월일)’ 에 따르면 고려 현종1년(1010)에 주조된 것으로 원래는 태조4년(921)에 태조가 창건한 충청남도 천안시 성거읍 천흥리 천흥사에 있었다고 한다. 남한산성으로 언제 옮겼는지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 산성 내 시간을 알려주는 역할을 했으며 이후 일제강점기 이왕가박물관에 옮겨지고, 해방이후 덕수궁 미술관을 거쳐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었다. 현재 종은 원래의 모양 및 형태 그대로 재현 한 것으로 타종시 울림을 좋게하기 위하여 약 3배 정도 더 크게 제작하였다.
침괘정...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호
침괘정은 무기제작소라 알려져 왔으나 온돌과 마루방, 화랑처럼 된 툇마루 등 건물 구조로 보아 집무실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최초의 건립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주변에 있던 무기창고를 명나라 사신 정룡이 '총용무고'라 이름 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 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영조 27년(1751) 광주유수 이기진이 고쳐 짓고 '枕戈亭'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침과정'을 침괘정'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명확하지 않다. 무기 제작소와 무기창고는 침괘정 부근에 별도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계유산 남한산성 탐방 안내도
남한산성 행궁 방향
남한산성 행궁:
행궁(行宮): 왕이 도성을 떠나 행행(行幸)할 때 임시로 머무는 곳으로, 전란시·능행시·휴양 등의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조선시대에는 수원행궁, 강화행궁, 전주행궁, 의주행궁, 양주행궁, 온양행궁 등 10여개 이상의 행궁이 있는데, 그 중 남한산성행궁은 전쟁이나 내란 등 유사시 후방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한양 도성의 궁궐을 대신할 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하여 인조 3년(1625) 남한산성 수축과 함께 건립되었다. 실제로 약 10년 후인 1636년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47일간(1636.12.14~1637.01.30) 항전하게 된다. 이후 숙종·영조·정조·철종·고종이 여주에 있던 효종릉(寧陵) 등의 능행길에 머물러 이용하였다. 남한산성행궁은 종묘(좌전)와 사직(우실)을 두고 있는 유일한 행궁으로 일반적인 행궁에 머물지 않고 유사시 임시수도의 중요한 역할을 하던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국가사적480호이다. - < 남한산성 도립공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