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양평 갈산공원 주변 남한강변 벚꽃- ( 2025.04.10 )
② 양평 갈산공원 주변 남한강변 벚꽃
- ( 2025.04.10 )
▶ 되돌아 가는 길 (남한강변길, 갈산공원):
남한강변 동영상
남한강변 길
보트 선착장
남한강변 동영상
남한강변 동영상
양평읍 강상면
앗, 카약이라...
도곡천에 가로막힌다. 오른쪽으로 제방길로 오른다.
도곡천 배수시설....양평휴먼빌라리버파크 어반아파트
갈산공원 산책로 동영상
떠나요~~~ 양평 여행
양강정
갈산 오르는 길
갈산 주차장
충혼탑
충혼탑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1950년 6월 25일 북한공산당의 불법 남침으로 조국을 수호하다 호국의 신으로 산화한 호국용사 고 이기용 소령 외 620위인 등 양평 출신 호국용사의 거룩한 넋을 추모하고 그 얼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하여 1968년 6월 6일 양평 군민의 성금으로 충혼탑을 건립하였으며 1989년 새로운 충혼탑 건립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전군민의 뜻을 담아 재건립하였다. 삼가 호국영령릐 명복을 빕니다.
양평 3.1 독립항쟁사
서종면, 3월 10일: - 문호리에서 수백명이 참가한 가운데 양평지역 최초의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양서면, 4월1일/ 4월2일: - 4월 1일 양서면 도곡리 일대에서 2,000여명의 군중이 모여 대규모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날 시위는 전날 강하면 시위를 주도했던 최대현이 참가하여 2,000여명의 시위군중을 이끌고 헌병분견소 앞으로 나아가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튿날 4월 2일에는 여운형의 친척인 여운긍, 여광현 등이 주도하는 가운데 1,000여명의 군중들이 양서면사무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했다.
강하면, 3월31일: - 강하면에서는 진행된 만세시위는 한말 오위장(五衛將) 출신으로 1870년 군대해산 후 의병운동을 전개한 68세의 최대현이 주도했다. 최대현은 윤기영, 이보원, 신우균 등과 함께 면사무소 앞에서 태극기를 휘날리며 300여명의 군중과 함께 마세시위를 벌였다.
강상면, 3월 29일: - 교평 나루터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는 양근리 장터에 가기 위해 모인 군중들에 의해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났다. 나루터에서 누군가가 " 조선의 독립은 세계각국에서 이미 승인했다"고 하는 말을 신석영이 태극기를 뽑아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자 약 100여명의 군중이 호응하여 만세를 부르면서 나루터는 시위장으로 바꿨다.
갈산면, 3월24일: - 갈산면은 장날을 진행된 만세시위는 연희전문학교 서기 이진규가 양평으로 오면서 시작되었다. 이진규는 장터에 모인 군중들에게 " 독립의 시기는 왔다. 이 시기를 놓치면 다시는 만나기 어렵다" 고 연설하고 서울에서 가지고 온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배포하면서 독립만세를 선창했다. 여기에 곽영준, 한창호, 김경석, 서상식, 김석봉, 한봉철 등이 적극 호응하여 시위를 이끌어 1,000여명의 군중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장 안을 행진하자, 헌병들이 출동하여 이진규와 곽영준을 체포.구금했다. 이에 군중들은 헌병 분소 앞으로 몰려가 이들의 석방을 요구했으며, 수백명의 군중들이 갈산면사무소, 양평군청, 양평우편소로 처들어가 서류, 장부 일부를 폐기하기도 했다.
고읍면 (현재 옥천면), 4월 3일: - 고읍면에서 고읍, 강상, 강하, 양서 4개 면민 4,000명이 운집한 대규모 연합만세시위가 일어났다. 강하면 시위를 주도했던 최대현, 윤기영, 이보원, 신우균 등이 다시 참가하여 군중들을 이끌고 헌병주재소 앞으로 나아가 독립만세를 연창했다. 시위 군중들이 양평읍내를 향해 행진하던 중 일본 헌병대와 마주쳐 최대현은 체포되고 시위대는 해산되었다.
단월면, 청운면, 3월 23일: - 용두리 장날을 기해 천도교인들이 주축이 되어 200여명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했다. 이날 시위는 단월면 덕수리의 신재원과 부안리의 김종학이 청운면 갈운리의 민주혁과 양동면 쌍학리의 정경시를 만나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조선독립기'라고 쓴 깃발을 만들어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선도했다. 시위 행진이 계속되자 일본 헌병이 출동하여 시위 주동자를 체포하여 재판에 회부했다.
용문면, 3월30일: - 광탄리에서 진행된 만세시위는 마룡리의 조용호, 오촌면의 김윤구, 신순근 등의 주도로 시작되었다. 조용호는 태극기를 높이 들고 "지금 우리는 일본과 쌍란 속에 들어있다. 이제 때가 되었으니 응당 두가지로 갈라져야 하지 않겠느나" 고 외치자 수백명의 군중이 만세행진에 나섰다. 시위 주도자들은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개군면, 지재면 (현재 지평면), 4월3일/ 4월 11일: - 4월 3일 지재면 곡수리에서 3,000여명의 군중들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시위가 치열한 양상으로 전개되면서 일본 경찰이 발포하여 6명이 피살되었다. 4월 11일에도 지재면 곡수장터에서 시위군중 3,000여명이 참가한 대대적인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 시위는 당시 여주군 개군면에 속했던 김영규, 이철영, 이호승,곽수영 등이 사전준비에 의해 진행되었다. 시위군중이 행진을 하던 도중 기마헌병대의 총격을 받아 김영구가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시위대는 해산했다. 시위 이후 헌병대가 마을을 수색하면서 이호승이 총격을 맞고 현장에서 사망했다.
양동면, 4월 7일: - 석곡리 일대에서 3,000여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 시위는 전석현이 동지를 규합하여 격문을 작성하고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전석현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이종성의 선창으로 독립만세를 외치자 장날에 모인 많은 군중들이 합세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시위 군중들이 앙평을 향해 행진하던 중 양평기마헌병대 수십명이 출동하여 무차별 발포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고 시위대는 해산되었다.
양평 3.1 독립항쟁사 & 서훈(敍勳) 독립운동가 66명 명단
갈산(葛山)... 소재지 양평읍 양근리, 해발고도 64.5m.
갈산은 양평읍 지역의 옛 이름으로 칡이 많았다 하여 칡미라고도 부른다. 1747년(조선 영조23)에 군 소재지가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양평의 정치 경제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갈산면(양평읍)이 설치되고 갈산시장(양평시장)이 호황을 누리면서 양평 중심지를 일컫는 이름으로 자리잡았다. 양강(楊江, 남한강)을 두르고 용문산으로 병풍을 삼은 갈산의 풍경은 예로 부터 유명하였다. 특히 "용문산을 감싸 안은 푸른께 형상의 구름"과 "양강의 금빛 모래밭에 쏟아지는 화살같은 햇살" 이라 묘사한 옛 싯구절은 갈산의 풍경을 잘 표현하는 말이라 하겠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 신사가 있었다고 하나 해방후 파괴되었고, 현재는 조선시대 영호대(暎湖臺)를 재건한 영호정과 6.25 전몰 용사를 기리는 충혼탑, 반공지사 변종식 충혼비, 반공위령탑 등이 있다. 갈산 서남쪽에 양근나루가 있으며 주변 일대는 갈산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양평읍장.
갈산공원 동영상
영호저 & 반공지사 변종식 충혼비
반공지사 변종식 충혼비
선생은 1906년 음력 4월 12일 이곳 양평에서 출생하시었다. 원래 성격이 강직하고 자유수호의 정신이 투철한 분으로 국민회의 양평지부장, 양평대한 청년단 등을 역임하여 조국재건을 위하여 반공정신 앙양과 청년지도에 투신하던 중 6.25전쟁 당시 남침한 북한공산군의 손에 피체되어 금오의 몸이 되자 그들이 투여하는 음식을 배격하며 불굴의 항거를 계속하다 잔인한 고문으로 인하여 마침내 1950년 7월 10일 옥사하시었다. 백세에 귀감이 될 선생의 행적을 새겨 길이 남기려하는 바이다.
영호정
영호정 映湖亭, 조선시대건립, 1991년 복원.
이 영호정은 조선시대에 건립된 정자이다. 조선후기에 제작된 <양근읍지(楊根邑誌)>에 의하면, 남한강변 갈산에 태허루(泰虛樓)라는 객사가 있고, 그 아래 석축을 쌓아 영호대를 세워 지역주민과 방문객들이 남한강을 굽어보는 풍류의 장소로 활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후 오랜 세월 동안 페허로 남아있던 이 정자를 일제강점기 때인 1930년대에 지역유지들이 재건하였으나, 일제가 이 정자 자리에 신사(神祠) 를 세우고자 파괴하였다. 해방 직후 영호정건립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일제 잔재인 신사를 헐어내고 재건하였으나 6.25 사변으로 다시 소실되었다. 그 후 재건하지 못하다가 1991년 지역인사들의 건의와 주민 의견을 받들어 양평군청에서 고증을 받아 골기와를 얹었다.
영호대에서 바라보는 남한강 경치
여성 탐방객들이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다.
비목 (碑木) *
한명희
초연(硝煙) * 이 쓸고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모를
이름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樵童) * 친구
두고 온 하늘 가
그리워
마디 마디 이끼되어 맺혔네
궁노루 산울림 달빛 타고
달빛 타고 흐르는 밤
홀로 선 적막감에 울어지친
울어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퍼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 한국자유총연맹 양평군지회
* 비목(碑木): 죽은 이의 신원 따위를 새겨 무덤 앞에 세우는, 나무로 만든 비(碑).
* 초연(硝煙): 화약의 연기.
* 초동(樵童): 땔나무를 하는 아이.
♠ 한명희 (1939~ ): 충북 충주 출생. 서울대 국악과, 동 대학원 졸업. 성균관대 대학원 동양철학 박사. 카자흐탄 알마타음악원 명예박사, 우즈베키스탄 타슈겐트 음악원 명예박사, 동양방송 프로듀서, 서울시립대 교수, 국립국악원 원장, 한국문화예술위원장(직무대행), 대한민국예술원 부회장 역임. 비목이란 노래는 한명희씨가 1964년 육균소위 임관 후 6.25 전쟁 격전지 7사단 백암산 계곡 부근 GOP에서 군복무시 어느 초가을날 훈련 중 마주한 잡초 우거진 양지바른 산모퉁이를 지나며 돌무덤들을 보면서 지은 시라고 한다. 그 후 1968년 작곡가 장일남씨으로 부터 노래말 의뢰를 받고, 그 당시를 떠올려 조국을 위해 죽어간 젊은이들을 기리는 내용의 비목의 가사를 지었다고 한다.
넓은 쉼터가 있네...
양평교
갈산공원 전망대 동영상
갈산 초입 전망대
양평대교 북단 로터리, 양평 1배수펌프장...
인사동 청국장, 고기반 막칭반
양평역 가는 길...새들의 노래
양평장로교회
시장1길 동문
양평전통시장
탄이네 연탄구이
순옥이네
건대통통
효동곱창
중앙정육식당
화화돼지왕갈비 양평점
양평5일장터...매월 5일, 10일
기성족발..
양평 오일장 족발집
남한강축산
양평오일장순대국
<- 양평역 170m
양평의 랜드마크, 양평역 앞, 현대성우오스타 코아루 아파트
요술가위
앗, 양평역....오늘의 종착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