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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구릅/나의 산행

이성산 (208.1m), 경기 광주향교- ( 2023.01.12 )

by the road of Wind. 2023. 1. 12.

이성산 (208.1m), 경기 광주향교

- ( 2023.01.12 )

 

새해 들어 처음 산행을 해보았습니다. 낮은 산을 찾아보다, 집에서 가까운 하남시 춘궁동 이성산을 걸어보기로 하였습니다. 이성산성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시작하는 등산은 날씨마저 풀려 좋았습니다. 앙상한 갈참나무들이 많은 이성산은 능선을 따라 한바퀴 도는데 약 1시간 정도 소요되는 산행 거리로 부담감 없이 걸을 수 있습니다. 성철 스님의 법어처럼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이 말씀에 더 이상의 수식어는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겨울 산에는 나무가 있고, 산길이 있으며, 낙엽이 떨어져 덮혀있고, 가끔 잔잔한 바람이 있을 뿐입니다. 먼 산, 먼 하늘이 보일 뿐입니다. 말라버린 길가의 풀숲은 앙상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 아래 땅 속에서는 생명이 잠깐의 쉼을 얻고 있을 것입니다. 봄의 훈풍이 대지를 쓰다듬으면 그 손길을 감지하고 생명은 다시 약동할 것입니다. 이성산은 남한산성의 마지막 능선의 끝 자락으로 한강 상류의 조망이 가능한 곳입니다. 백제시대 옛 선조들이 나라의 방위를 위해 요새화 했던 곳입니다. 그래서 이곳에는 저수지와 옛 건물 터가 군데군데 남아있습니다. 장구한 세월은 흐르고, 세상은 끊임없이 변합니다. 지금 내가 걸었던 길을 아주 먼 미래에 누군가도 걸을 것입니다. 

 

이성산을 돌아보고, 해 지기 전에 하남시 교산동 소재 유서깊은 광주향교를 둘러보았습니다. 광주향교는 이성산성주차장에서 약 1km 정도 거리에 있습니다. 조용하기만 한 광주향교는 옛 선비들의 향기가 담장 넘어로 퍼져오는 것 같았습니다. 이곳에 오면 공자님의 높은 가르침을 듣는 듯 합니다.  

 

 산   책 : 걸음수 5,576 steps, 거리 3.23 km, 소모열량 220 kcal, 소요시간 01:03 hrs, 속도 3.2 km/h, 기온 12℃.

 코   스 이성산성주차장 -  A지구 저수지 -  서문지 - 이성산 정상 -  8각 건물지 - 장방형 건물지 - 동문지 - C지구 2호 건물지 - C지구 12각 건물지 -  C지구 저수지 -  A지구 저수지 -  수막새 음식점 - 이성산성 주차장.

 

 

● 이성산:

 

이성산성 안내소

 

 

백제의 얼이 살아숨쉬는 하남위례길

 

하남위례길:


하남시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이 최초의 도읍으로 정하였던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이 위치했던 곳으로 추정되며, 백제 한성시대 약 500여년간 도읍이었던 역사적인 고장이다. 그래서 옛길을 복원하여 만든, 걷고 싶은 길의 이름을 백제 하남 위례성의 역사성과 전통을 담아 하남위례길이라 하였다. 

위례사랑길
산곡천 - 닭바위- 연리옥- 도미나루- 두껍바위 - 철새도래지- 팔당댐.

- 위례강변길
산곡천 - 억새밭- 덕풍천- 미사리경정공원- 미사리선사유적지- 나무고아원- 잉어산란장- 선동축구장.

위례역사길
광주향교- 이성산성- 춘궁동 동사지- 선법사.

위례둘레길:
시청- 샘재- 객산- 남한산성- 금암산- 이성산성- 덕풍골.    

 

 

 

하남 이성산성, 이성산성 안내도, 하남역사박물관 이성산성AR실감관
 
● 하남 이성산성:  사적 제422호.

이성산성은 춘궁동 이성산 정상부에서 남쪽으로 계곡을 감싸면서 돌로 쌓은 삼국시대 산성이다. 이성산성 면적은 231,313 m2, 둘레는 약 1.9km로, 한강을 포함한 주변 지역을 한눈에 모두 볼 수 잇을 정도로 위치가 좋다. 지리적으로 강북의 적으로 부터 한강 우역과 남쪽의 평야지역을 방어하기 유리한 지점에 있다. 이성산성은 1986년 문화재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 장방형, 8각, 9각, 12각 건물지 등 20여 동에 이르는 건물지와 성문지, 저수지 등이 드러났고, 목간(木癎), 요고(腰鼓), 쇠발, 조각품, 벼루, 나무자 등 다양한 유물이 촐토되었다. 이성산성은 처음 산성을 쌓은 사람들이 백제 또는 고구려 사람들이라는 이야기가 있으나 대체로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난 후 6세기 중반에서 8세기 까지 주로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성산성은 삼국을 통일하던 시기 신라의 군사적 요충지(군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장소)이자 새롭게 점령한 한강 유역의 행정 중심지, 또는 국가의례와 제사를 실시하던 유적으로 보인다. 앞으로도 꾸준한 조사와 연구를 통해 산성이 처음 만들어진 시기나 정확한 용도, 사용기간 등 밝혀낼 역사적 사실이 많은 고대 산성이다. 성안에서 나온 유물은 하남역사박물관과 한양대학교 박물관 등에서 직접 볼 수있다.   

● 이성산 안내도:  

1) 저수지(A지구), 2) 9각 건물지,  3) 12각 건물지, 4) 장방형 건물지, 5) 건물지, 6) 8각건물지, 장방형 건물지,  
7) 9각 건물지, 8) 건물지, 9) 동문지, 10) 서문지

 

 

 

이성산성 주차장 (무료)

 

 

등산로 입구

 

 

이성산 산책로에는 눈과 얼음은 녹고 없었다. 오직 여기만 음달이어서 눈이  아직 녹지 않고 남아 있었다.

 

 

애견카페 푼타하우스, &  황토민물장어

 

 

뾰족한 객산 방향

 

 

이성산성성벽,   사적 제422호.

이성산성 성벽은 2번에 걸쳐 만들어졌다. 수직에 가깝게 쌓은 1차 성벽은 일정기간이 지난 후 어떤 요인으로 무너졌고, 이상산성의 지배자는 적의 침입에 방비하고 요새를 굳건히 만들기 위하여 다시 성벽을 쌓았다. 새롭게 만든 2차 성벽의 성돌은 마치 옥수수알 모양처럼 둥그스럼한 모양이 되도록 정성스럽게 듬었다. 성돌의 끝은 좁고 길게 깎아 성벽을 만들 때 성돌과 뒷채움돌이 견고하게 물리도록 하였다. 

 

 

A지구 저수지

 

 

 

<- 0.2km 위례 역사길 (남문지), -> 위례둘레길 (남한산성) 6.0km, ->  위례둘레길 (이성산) 0.6 km

 

 

성벽

서문지 ↑,  남벽 ->

 

성벽 Fortress Wall

하남 이성산성 성벽의 단면은 전치적으로 사다리꼴의 형태이며, 높이는 약 7m, 기울기는 수직에 가깝다. 6세기 중엽 처음 쌓은 이후,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에 보수하였고, 시간이 흐른 뒤 성벽이 무너져 8세기 초에 2차 성벽을 다시 덧붙여 쌓았다.  2차 성벽은 옥수수알 모양으로 잘 다듬은 성돌로 쌓았다. 1차 성벽의 밑바닥에서 약 1.5m 높이까지 돌을 채워쌓고, 그 위에 너비 60~90cm 크기의 지대석* 을 올려 놓았다.  지대석 위에는 모서리를 둥글게 깍은 옥수수모양의 성돌을 위로 가며 10cm 정도씩 들여쌓아 성벽에 기울기를 준다. 들여쌓기는 성벽의 안정성을 높여주었다. 그리고 성돌 모서리를 둥글게 깍은 옥수수알 성돌은 적들이 쉽게 성벽을 오르지 못하게 만들어 성벽의 방어력을 높여준다.  

* 지대석: 건축물이 세워지는 곳을 주위보다 조금 높이기 위해 쌓은 돌.

 

 

 

<- 위례둘레길 (남한산성) 6.0km, ->  위례둘레길 (이성산) 0.6 km

 

 

남한산성 능선 방향

 

 

조용하고 호젓한 산길..... 겨울산은 남다른 운치가 있다. 

산새들도 보이지 않고, 모든 만물이 종요하다. 

 

 

서문지  西門址

이성산성에는 동.서.남.북에 1개씩 총 4개의 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지금까지 발굴 조사를 한 결과 동쪼과 서쪽에서 문 터가 발견되었다. 동문지와 마찬가지로 서문지는 사다리를 걸쳐놓고 올라가야 하는 현문식 懸門式 구조이다. 문의 크기를 파악할 수 잇는 주변 성벽도와 함께 확인되었다. 바닥에는 동문과 마찬가지로 물을 빼내는 시설을 설치하였다. 성벽은 두번에 걸쳐 다시 지었기 때문에 처음 지었던 문초측과 다시 지어진 문수축으로 구분되며, 문의 규모로 파악할 수 있는 옆 벽축벽이 성벽의 동서 양 쪽에서 확인되었다. 처음 축조한 문의 너비는 약 6.8m 이며 높이는 1.3m 가량 남아 있었다. 다시 지어진 문은 너비 약 3.8m이며 문의 입구 안쪽에 2개의 문확석* 이 발견되었다.   

* 문확석:  문을 끼워넣는 구멍이 있는 돌.

 

 

 

춘궁동(春宮洞): 

춘궁동은 춘장리의 춘(春)자와 궁말의 궁(宮)자를 붙여 춘궁동이 되었다. 춘장(春長)은 옛 백제시대에 궁궐이 있던 마을을 뜻하며, 궁말도 백제 때의 국궐이 있었던 것을 뜻한다. 

 

 

 

남문지갈림길 이정표:


 ↖ 위례둘레길 (덕풍골) 3.1 km, ↖ 위례둘레길 (이성산) 0.2 km,  <- 0.6km 위례 역사길 (동문지), 

-> 위례둘레길 (남한산성) 5.6 km,   -> 위례역사길 (동사지) 1.3 km.  

 

 

하남시 초이동 방향

 

 

이성산 정상, 산불감시초소

 

 

이성산 해발 209m

 

 

이성산(二聖山):  

춘궁동 산 36번지 일대에 위치한 산으로서 해발 209m이며 춘궁동과 초이동을 끼고 있다. 남한산성에서 금암산을 따라 이어진 줄기에 속한 이 산은 이성산성이라 불리우는 석축산성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백베의 왕자 두 사람이 이 산에 거주 하였다 하여 이성산이라 칭하였다는 설이 있다. 발굴조사 결과 삼국시대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으며, 오래 전 부터 백제 도읍지와 관련하여 학계의 부목을 받아오고 있는 산이다.  



 

 

위례역사길 코스  


↙ 1.8km 위례둘레길(동사지).
↖ 2.7km 위례둘레길(덕풍골), ↖ 0.1km 위례둘레길(동문지), 
-> 6.0km 위례둘레길(남한산성), -> 0.2km 위례둘레길(이성산). 

 

 

8각 건물지


동문지 주변에서는 8각 건물지, 9각 건물지, 장방형 건물지가 1곳씩 확인되었다. 8각 건물지는 지름이 8.8M이다. 중심부에 하나의 초석을 두고 주변으로 세 줄이 원을 그리며 놓여있다. 초석의 수는 21개이다. 주요 유물로는 격자문. 당초문* 기와, 고배, 합**, 벼루, 도가니***, 시루, 철제 못 등이 있다. 이러한 유물과 건물지의 모양을 볼 때 사직단**** 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 당초문: 덩굴풀이 꼬여서 뻗어나가는 모양을 그린 무늬.
** 합:  뚜겅이 있는 그릇.
*** 도가니:  쇠붙이를 녹이는데 쓰는 오목한 그릇.
**** 사직단: 토지의 신인 '사'와 곡식의 신인 '직'에게 제사를 지내던 제단.

 

 

장방형 건물지:

동문 주변애서는 8각 건물지, 9각 건물지, 장방형 건물지가 각1곳씩 확인되었다. 장방형 건물지는 15X4칸 규모이며 창고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원래 초석*의 수는 80개 였을 것으로 보이나, 현재 남아있는 초석은 54개이다. 건물은 특별히 기단부* 를 높이거나 하지 안호고 산의 완만한 경사면을 다듬기만 한 후 지었으며, 초석 역시 기둥이 놓이는 윗면만 다듬어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건물지 주변에서는 흙이나 철로 만든 44개의 말을 일부러 부러뜨려 문어 놓은 것이 발견되었다. 건물초석** 에 동물 머리를 파묻는 것은 중국 고대부터 있던 풍습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백제 풍납토성에서 말머리가 발견된 사례가 있다. 삼국시대 중반 이후로는 이성산성에서 발견된 것과 같이 흙이나 철 등으로 작은 말 모형을 만들어 묻었다. 또 토제벼루편, 돌화살촉, 돌도끼도 여러 점 발견되었다. 

*  초석: 건물의 기둥 아래 괸돌.
** 기단부: 건물의 기초가 되는 단 부분.



 

9각 건물지


동문 주변에서는 8각 건물지, 9각 건물지, 장방형 건물지가 1곳씩 확인 되었다. 9각 건물지는 중심부에 120X50X30cm 크기의 초석* 4개가 20~40cm정도 크기의 적심석** 위에 놓여 있고, 주변으로 초석이 두 겹으로 원을 그리며 놓인 구조다. 건물지의 지름은 10.32m 이다. 원래 있던 초석의 수는 총 22개로 추정하며, 현재 남아있는 초석은 17개 이다. 출입구나 난방시설 등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이곳에 있던 건물은 하늘에 제사 지내는 제단인 '천단'으로 추정한다. 출토된 유물로는 굽다리접시, 합***, 기와 조각, 완**** 등이 있다.  

*     초석: 건물 기둥 아래 괸 돌.    

**   적심석: 돌을 쌓을 때 안쪽에 심을 박아 쌓는 돌
***  합: 뚜껑이 있는 그릇.   
**** 완: 가운데가 움푹 드러간 주발 모양의 그릇

 

 

 

광주군 향토유적 광주제1호 
이성산성 (二聖山城)

 

 

하남 이성산성:  

 

사적  Historic Site:

산성이란 적의 침입에 대비해 전투에 유리한 산을 이용하여 쌓은 성을 말한다. 이성산성은 해발 209.8m인 이성산 정상부에서 남쪽으로 계곡을 감싼 포곡식 산성이다, 남쪽은 광야를 둘러싼 높은 산들이 있으나 북쪽은 나지막한 구릉만 있어 한강주변 지역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뒤쪽의 평야지역을 방어하고 강 넘어 북쪽의 적으로 부터 한강 유역을 지키기에 매우 유리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삼국시대 산성으로 성을 쌓은 기법과 출토 유물등으로 보아,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인 6세기 중반 무렵 쌓아 만들었다. 7세기 후반~ 8세기 초반에 대대적으로 다시 쌓았으며 고려시대 초기 이후부터 산성으로 사용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다만 조선시대 <남한지> <대동지지>를 비롯해 초기 백제와 관련된 왕성으로 보는 기록도 있어 백제의 흔적이 나올 가능성도 있다. 총둘레 1,665m로 삼국시대 성곽 중에서는 큰 편이다. 1986년 부터 여러 차례 발굴조사를 하여 치성* 1곳, 건물 11곳, 문 2곳, 저수지 3곳, 저장 구덩이 3곳, 의례유구 ** 4곳 등이 확인되었다. 특히 9각, 12각 등 다각형 건물이 많다.  유물은 6~8세기 무렵 신라시대의 토기와 기와, 도끼, 쇠스랑***, 짚신, 요고***, 바구니, 괭이, 목간***** 등이 출토되었다.

*       치성: 성벽에 기어오르는 적을 쏘기 위해 성벽 밖으로 여기저기 내밀어 쌓아 놓았던 돌출부.
**     유구: 옛날 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
***   쇠스랑: 쇠로 서너개의 발을 만들고 자루를 박아 갈퀴모양으로 만든 농기국.
**** 요고: 허리에 차거나 무릎 위에 올려놓고 연주하는 타악기. 오늘날 장구의 원형.
***** 목간: 글을 적은 나뭇조각.      

 


1) 남문지, 2) 제2저수지, 3) 장방형건물지, 4) 9각건물지, 5) 12각건물지, 6) 장방형건물지, 7)  장방형부석건물지, 8) 제1저수지, 9) 장방형건물지, 10) 동문지, 11) 9각건물지, 12)장방형건물지, 13) 8각건물지, 14) 북문지, 15) 장방형건물지, 16)  장방형건물지, 17) 서문지

 

 

 

이성산성 동문지:   

<-  6.1km 위례둘레길(남한산성), <- 0.3km 위례둘레길(이성산), 

-> 2.6km 위례둘레길(덕풍골),  ↘ 0.4km 위례둘레길(남문지).

 

 

 

서울 강동구 고덕동, 상일동, 하남시 풍산동,  상일IC 방향

 

 

하남시 전경

하남미사리 경정장, 하남유니온타워, 팔당대교 방향.... 멀리 한강 건너 팔당 예봉산(678.8m)

 

 

 

멀리 검단산(657m),  중앙의 객산(292.1m)

 

 

하남시 춘궁동 일대....

 

 

동문지 東門址   

이성산성에는 동,서,남,북에 각 1개씩 총 4개의 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지금까지 발굴 조사한 결과 동쪽과 서쪽에서 문이 발견되었다. 동쪽에서 조사된 동문은 사다리를 걸쳐놓고 올라가야하는 현문식 구조이다. 성벽과 같이 두 번에 걸쳐 만들어지고 사용되었다. 성벽 위 3.5m 높이에 망들었고, 처음에는 너비 6.2m, 그 다음에는 3.56m로 하였다. 문 양쪽에서 문을 고정하는 돌 두개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목재로 된 문을 걸어 사용했을 것이다. 바닥에는 물을 빼내는 시설을 설치하였다.   


< 참고 > 이성산성은 한강주변에 접해있는 여러 성 城들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해 있으며,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리적 가치를 지닌 유적이다. 동문東門의 형태는 凹요 모양의 현문식懸門式-출입구가 성벽 중간에 있어 드나들 때 사다리 등의 특수시설을 이용해야 하는 문 이며, ‘ㄱ’ 자형으로 꺾여있어 적으로부터 공격시 효율적인 방어가 가능하도록 축조되었다. 외벽 안쪽으로는 2차 개축 때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 문지공석門址孔石-기둥을 무너지지 않게 고정시키는 돌, 문비고정석門扉固定石-문을 닫을 때 문이 뒤로 밀려나지 않게 고정시키는 돌과 집수시설集水施設, 배수로排水路 및 두 차례 이상 개축한 것으로 보이는 측벽이 있다. 문비고정석 중앙 하부는 암반층을 굴토하여 집수시설과 배수로를 만들었으며, 출수구로 물을 배출시킬 수 있도록 자연스러운 경사로를 만들어 조성하였다. 이는 동-서 방향의 경사로 인해 성 내부로 흘러들어온 물을 모아 성 외부로 배출시키기 위한 것이다.

 

 

 

C지구 1호 건물지


시C지구는 이성산성의 중심구역으로 여러 건물터와 저수지 등의 유구가 집중적으로 발견되었다. C지구 1호 건물지는 직사각형 형태이다. 건물의 기둥을 받치는 돌이 90여개 늘어서 있고, 가운데 1M 높이의 큰 돌이 하나 있는데 이 돌의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선문-격자문-어골문 기와, 고배, 시루, 벼루, 어망추 등이 있다. 1호 건물지에서 북쪽으로 약 15M 떨어진 지점에는 바닥에 돌을 깔았던 건물지가 있다. 창고로 추정되며 규모는 7.5x5M 이다.   

 

 

C지구 2호 건물지


시C지구는 이성산성의 중심구역으로 여러 건물터와 저수지 등의 유구가 집중적으로 발견되었다. C지구 2호 건물지는 훼손이 심해 정확하지는 않으나 16x4칸 크기로 추정한다. 원래 건물 기둥을 받치는 돌이 85개 있었으나, 현재는 26개만 남아 있다. 출토된 유물로는 연화문 수막새*, 어골문**, 기와, 고배***, 시루, 바루, 철로 만든 화살촉 등이 있다. 

*  연화문 주막새:  연꽃 모양의 무늬가 있는 추녀 끝 장식 기와
** 어골문: 물고기 뼈 모양과 같이 빗금들이 엇갈리게 겹쳐 나간 무늬
** 고배: 고대 식기의 하나로 높은 굽이 달린 접시

 

 

C지구 12각 건물지:


시(C)지구는 이성산성의 중심 구역으로 여러 주요 건물지와 저수지가 집중적으로 발견되었다. 시(C)지구 12각 건물지의 지름은 10.78cm이며 12개의 초석*을 3겹 놓았다. 경사진 곳에 축대를 쌓고 그 안쪽에 흙을 채워 다져서 공간을 확보한 뒤 건물을 지었다. 흘ㄷ을 채운 곳이 내려 앉으면서 초석이 가라앉거나 원위치에서 이동한 것이 많고 없어진 초석도 있다. 전체 초석은 원래 36개일 것으로  추정한다. 이 가운데 원위치에 있는 것이 9개, 이동하거나 넘어진 것이 18개, 없어진 것이 9개로 확인된다 주요 유물로 격자문 기와, 고배**, 합*** 등이 있다. 

 

*    초석: 건물 기둥 아래 괸 돌.    
**  고배: 고대 석기의 하나로 높은 굽이 달린 접시.
*** : 뚜껑이 있는 그릇.   

 

 

 

C지구 저수지

 

시(C)지구 저수지는 A지구 저수지 보다 약 60m 높은 지점에 있다. A지구 2차 저수지와 같은 시기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한다. 크기는 21x15m, 깊이 1.8m 정도이다. 토기, 자(尺), 명문이 새겨진 목간*, 허리가 잘룩한 북의 일종인 요고, 목제품 등이 출토되었다. 

* 목간: 글을 적은 나뭇조각.  

 

 

 

 

A지구 저수지


에이(A)지구 저수지는 두 차례에 걸쳐서 만들어졌으며 각각 1차 저수지와 2차 저수지로 부른다. 1차 저수지는 자연 저수지로, 형태는 타원형이고 크기는 대략 54x30m, 깊이 4.3m 정도로 추정한다. 저수지 안에서는 목간*, 목재 및 토기, 연화문 수막새** 등 다양한 유물이 나왔다. 특히 목간에는 무진년 戊辰年 608년으로 추정 정월 12일에 열린 행사와 행사에 참석한 지방의 관리, 지방 유력 세력의 명칭 등이 적혀 있어 당시 생활 모습과 신라의 지방 지배제도에 대한 정보를 알려준다. 2차 저수지는 크기 18X27m, 깊이 2.3m 내외의 직사가형이며 돌로 쌓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1차 저수지가 자연적으로 기능을 잃게되자 1차 저수지 내부의 밑바닥을 일부 파고 2차 저수지를 만들었다. 2차저수지에서는 인화문 토기*** 등의 토기와 목간, 목재 인물상, 목제 빗 등 각종 목재 유물, 연화문 수막새 등이 발견되었다. 

목간: 글을 적은 나뭇조각.
** 수막새: 지붕 추녀 끝 장식 기와.
*** 인화문 토기: 겉면에 무늬가 새겨진 도장을 눌러찍어 무늬를 낸 토기.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 토기 형태. 



 

↑ 1.4km 위례역사길 (동사지), 1.3km 위례역사길 (광주향교),  
↓ 위례둘레길( 덕풍골) 3.0km,  위례역사길 (동문지) 0.4 km, -> 위례둘레길 (남한산성) 6.2km.

 

 

이성산성 주차장 방향

 

황토민물장어  031-792-8295  

 

 

 

 

'수막새' 한옥 음식점, 이영루

 

최부자집

 

 

보리향

 

 

중화음식점 리향, 카페 르쿠쿠

 

 

 이성산성 주차장

 


● 광주향교:

 

향교 수호목 향나무, 

광주향교 주차장 (무료)

 

 

'향교의 수호목'
보호수 은행나무, 나무나이 약500년  
이 나무는 수나무로 향교 주위에 4그루의 암나무를 거느리고 있다.

 


 

광주향교 사무실

 

 

광주향교 |  廣州鄕校  

향교는 성현에게 제사를 올리고 지방민을 교육.교화하고자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현재는 교육은 하지 않고 제사만 올리고 있다. 광주향교를 처음 지은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숙종 29년(1703)에  고읍(古邑) 서쪽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향교의 가장 뒤쪽에는 제사 공간인 대성전동무.서무가 있으며 그 앞으로 교육 공간인 명륜당동재.서재가 있어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 구성으로 배치되어 있다.  대성전은 앞면 3칸, 옆면 4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려고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공포가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안쪽에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의 위폐를 모셨다. 명륜당은 앞면 5칸. 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명륜당은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당이고, 동재.서재는 학생들의 기숙사이다.  

광주향교 전체 배치도:

1. 대성전(大成殿), 2. 동무(東廡), 3. 서무(西廡), 4. 내삼문(內三門), 5. 명륜당(明倫堂), 6. 동제(東齊), 7. 서재(西齊), 8. 외삼문(外三門), 9. 수복사(守僕舍), 10. 협문(夾門), 11. 전사청, 제기고 터(典祀廳, 祭器庫 址) 

 

 

 

 廣州鄕校_ 광주향교

 

공자 (BC 551~ BC 479):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정치가, 사상가, 교육자이다.  예수, 석가, 소크라테스와 함께 세계 4대 성인 중 한 사람이다. 

탄생

노나라 시대 산동성 추읍(郰邑)에서 아버지 숙량홀이 64세에 세째 아내 안씨와의 사이에 늦둥이로 태어나다. 공자의 어머니는 아들을 얻기 위해 니구산(尼丘山)에 가서 신령님께 기도를 올리고 공자를 낳았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공자의 이름의 니구산의 구(丘) 자에서 따왔다고 하는 설이 있다. 


성장: 

공자 3세 아버지 타계하고, 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함. 공자는 성장하면서 15세 이전 학문에 열중하고, 어릴 때 부터 예(禮)에 뛰어났다고 한다. 


결혼생활: 

공자 19세에 어머니 권유로 노나라 거주 송나라 사람 계관씨의 딸과 결혼함. 결혼후 1년만에 아들을 얻었으나 부인에 대하여는 별로 알려진 게 없다. 


교육활동: 

공자 나이 24세에 어머니 돌아가심. 그 후 자기집을 서당으로 젊을 때부터 교육활동을 하여 수십년 동안 무려 3,000명이 넘는 제자를 양성함. 제자 중 특히 안연, 자공, 자로, 자장, 자하 등이 유명하다. 


관리생활: 

나이 50세에 고향의 관리가 되다. 이듬해 노나라 정공의 제나라와의 화해조약 행차시 대동함. 54세에 재상의 실권을 득함. 그 후 정공이 제나라에서 보내온 여자들 때문에 정사를 돌보지 않자 관직을 사임함.


생의 마감

56세에 모국인 노나라를 떠나 약 14년 동안 천하를 주유하며 인(仁)에 기초한 정치를 펼치려 했으나 실패하여 유가 경전을 정리, 편찬하는 데 전념하고, 제자 양성에 힘썼다. 공자 나이 68세에 아들을 먼저 떠나보냄. 제자 중 70세에 도(道)의 계승자로 여기던 안연이 타계하고, 71세에 재아, 72세에 가장 믿었던 자로 마저 세상을 떠남. 그후 공자는 73세에 타계함. 


- 공자의 사상:  

공자는 인(仁)을 인간의 최고의 도(道)와 덕(德)임을 주창하였다. 공자는 인을 근본으로 예를 실천하는 사람이 군자라고 설파앴다. 《논어》는 그의 제자들이 스승이 죽은 후 편찬한 것으로 공자의 사상이 집대성 되어있다. 
  

▶ 공자 년표:

BC551년 ( 1세)노나라 창평향 추읍에서 출생
BC549년 ( 3세): 아버지 숙량흘 여의다. 
BC537년 (15세): 배움에 뜻을 두다. - < 논어>
BC535년 (17세): 이 무렵 어머니 안씨를 여의다.  
BC533년 (19세): 송나라 견관씨와 결혼하다.
BC532년 (20세): 아들 공리가 태어나다. 계씨의 창고지기가 되다.
BC531년 (21세): 가축사육하는 일을 맡다. 
BC525년 (27세): 노나라에 온 담자에게서 고대 관제를 배우다. 
BC522년 (30세): 자립하다. -<논어>
BC518년 (34세): 노나라 대부 맹희자가 아들 맹의자와 남궁경숙에게 공자를 스승으로 삼아 예를 배우라로 유언하여 공자에 입문함.
BC516년 (36세): 제나라 경공이 정치를 묻다. 
BC516년 (36세): 소악(韶樂)을 듣고 음악에 심취하다.
BC515년 (37세): 제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오다.  
BC512년 (40세): 의혹되지 아니하다 -<논어>  
BC509년 (43세): 노나라 정공 즉위하다.
BC502년 (50세): 천명을 알다. -<논어>  
BC501년 (51세): 정공9년 노나라 정공이 중도(中都)의 제(帝)로 삼다. 중도의 제에서 사공(司空), 대사구(大司寇)로 승진하다.
BC500년 (52세): 정공10년. 노정공과 제경공의 협곡회담에 참여하다. 제경공으로 부터 노나라 따을 돌려받다. 
BC497년 (55세): 정공13년. 제나라로 부터 여악(女樂)받고 정사를 돌보지 않자 위나라로 떠나다. 
BC497년 (55세): 위나라에서 10개월을 머물다 진나라로 가는 도중 광(匡)에서 포위되는 재난을 당하다. 
BC492년 (60세): 귀가 순하게 되다. - <논어>
BC490년 (62세): 섭나라의 섭공과 정치를 이야기하다.
BC489년 (63세): 초나라로 가는 도중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식량이 떨어져 곤경에 처하다.
BC484년 (68세): 노나라의 계강자가 예를 갖추어 공자를 부르니 14년(BC497-484) 만에 노나라에 돌아오다.  
BC483년 (69세): 악(樂)을 바로 잡다. 아들 공공리가 50세로 죽다. 
BC482년 (70세): 마음이 하는 대로 따라도 정도를 지나치지 않게 되다. - <논어>. 노나라가 공자를 정치에 쓰지 않자 제자를 가르치고 문헌을 정리하는일에 힘쓰다. 제자 안희 죽다. 
BC481년 (71세): 춘추를 짓다.
BC480년 (72세): 위나라 정변으로 제자 자로 죽다. 자로의 시체를 소금에 절였다는 말을 듣다.
BC479년 (73세): 애공 16년 하(夏) 사월에 공자 세상을 떠나다. 노나라 도성 북쪽 사수(泗水) 강 언덕에 묻히다. 

 

 

 명륜당, 동제, 서제

 

 

《 공자 어록 》:  

○ 子曰 由아誨女知之乎인저. 知之爲知之오 不知爲不知 是知也니라. ( 자왈 유 회여지지호 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 ) - 유야 너에게 안다는 것을 가르쳐 주마, 아는 것을 안다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다.

○ 成事라 不說하며 遂事라 不諫하며 旣往이라 不咎로다. ( 성사 불설 수사 불간 기왕 불구 )
- 이미 이루어진 일은 말하지 않으며, 끝난 일은 간하지 않으며, 지난 일은 탓하지 않는다.

○ 子曰 不仁者는 不可以久處約이며 不可以長處樂이니 仁者는 安仁하고 知者는 利仁이니라. ( 불인자 불가이구처약 불가이장처락 인자 안인 지자 이인 )
어질지 못한 사람은 역경에 오래 있지 못하며 행복도 오래 누리지 못한다. 그리고 어진 사람은 仁(인)을 편안하게 여기고 지혜로운 사람은 인을 이롭게 생각한다.

○ 子曰 德不孤라 必有隣이니라. ( 덕불고 필유린 )
- 덕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으며 반드시 이웃이 있다.

○ 子曰 人之生也 直하니 罔之生也는 幸而免이니라. ( 인지생야 직 망지생야 행이면 )
인간의 삶은 원래 정직한 것이다, 정직하지 않으면서도 살 수 있는 것은 요행히 화를 면하고 있는 것이다.

○ 子 絶四러시니 毋意毋必毋固毋我러시다. ( 자 절사 무의무필무고무아 _
공자께서 네 가지를 근절 하셨으니 자의대로 하는 일이 없었고, 집착하지 아니하고, 고집을 안부리고, 자기만을 내 세우는일 (생각하는 일) 은 없으셨다.

○ 過猶不及이니라. ( 과유불급 ) - 지나친 것은 모자란 것과 같다.

○ 子曰 不患人之不己知오 患不知人也니라. ( 불환인지불기지 환부지인야 )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탓하라.

○ 子曰 人無遠慮면 必有近憂니라. ( 인무원려 필유근우 )
사람이 먼 앞날을 걱정하지 않으면 반드시 가까운 시일에 근심이 생긴다.

○ 子曰 躬自厚而薄責於人이면 則遠怨矣니라. ( 궁자후이박책어인 즉원원의 )
- 자신을 꾸짖기는 엄하게 하고 남을 책망하길 가볍게 하면 남의 원망하는 소리를 멀리할 수 있다

○ 子曰 唯女子與小人이 爲難養也니 近之則不孫하고 遠之則怨이니라 
( 유녀자여소인 위난양야 근지즉불손 원지즉원 )
여자와 소인은 다루기 어렵다. 가까이 하면 불손하게 굴고 멀리 하면 원망을 한다.

○ 子曰 年四十而見惡焉이면 其終也已니라. ( 연사십이견오언 기종야이 )
- 나이 사십이 되어서도 남에게 미움을 받는다면 그것은 끝장이 난 것이다.

○ 子貢이 問曰 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者乎이까 子曰 其恕乎인저 己所不欲을 勿施於人이니라. 
( 자공 문왈 유일언이가이종신행지자호 기서호 기소불욕 물시어인 )
자공이 한마디의 말로 평생토록 행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 묻자 그것은 오직 서(용서) 이니라.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 것이니라.

○ 子曰 君子는 求諸己오 小人은 求諸人이니라. ( 군자 구저기 소인 구저인 )
군자는 모든 책임의 소재를 자신에서 구하나 소인은 남에게서 구한다.

 
 

 

하남 객산 방향

 

 

광주향교사적비

 

 

보호수 은행나무:  (1981.1.13 지정)
나무 나이 약 450년, 높이 32m, 둘레 670cm.

 

 

보호수 은행나무:  (1981.3.11 지정)
나무 나이 약 450년, 높이 30m, 둘레 290cm.

 

 

보호수 은행나무:  (1981.3.11 지정)
나무 나이 약 500년, 높이 31m, 둘레 810cm.

 

 

대성전

 

 

 

인류의 스승이신 공자의 고귀한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따뜻한 날씨에 이성산성에서 겨울 산보를 잘 마치고 집에 돌아갔다. 

한마디도 흘려 들어서는 안될 주옥같은 공자의 어록이다. 인류에게 세세에 걸쳐 기억될 말씀이었다.  

나는 광주향교를 들를 때 마다 언제나 공자의 빛나는 말씀을 마음으로 듣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