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 ( 2020.05.12 )
○ 하이킹: 소모열량 501 kcal, 거리 7.04 km, 소요시간 02:45 hrs ( 3:04-6:10, pm ) , 속도 2.5 km/h.
○ 코 스: 마천동 '만남의 장소' - 성불사 - 연주봉옹성 - 제5암문 - 서문(우익문) - 수어장대- 남문( 지화문) - 산성로터리.
남한산성
오랜만에 남한산성 을 등산해 본다. 마천역에서 출발, '만남의 장소'를 지나, 성불사 코스로 남한산성 등산을 하였다. 마천역에서 만남의 장소 까지는 734m, 도보 약 10분 거리다. 만남의 장소 주변은 위례신도시건설 후에도 아직 많은 공공주택단지 아파트건물이 아직 건설되고 있었다. 만남의 장소에서 시작되는 좁은 시장같은 통로에는 많은 음식점들과 등산복 매장들이 들어서 있고, 여기가 남한산성 입구입니다 라고 소리치고 있는 듯 하였다. 참새가 방아간 그냥 지나치는 경우는 없다고 하는데, 이상하게 나는 그렇게 여러번 남한산성 출입을 했으면서도, 이 골목 음식점에 앉아서 막걸리 한잔을 해 본 적 기억이 없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이상하고, 기적같은 일이다. 겨울철이면 춘천호나 의암호에서 많이 잡힐 듯 한 빙어를 수족관에 살려두고 장사를 하는 집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늘 지나가면서 호기심이 발동하곤 하였으나, 그 빙어를 끝내 먹어보지 못했다. 민물고기를 날 것으로 먹는다는 것에 대한 간디스토마 같은 것이 떠올라 거부감이 있어서일 것이다. 지금도 나는 송어회를 그렇게 좋아하지만 회식의 경우 외에는 내가 직접 사먹은 기억이 없다. 남한산성 마천동 산행 깃점은 모든 것이 추억거리다. 옛날 내가 송파 살 때의 아련한 추억이 떠오른다. 그 때는 내 나이 40대의 시기였으므로 인생이 좋았을 때다. 이제 세월은 쏜 살 같이 흘렀다. 내 70의 나이에 다시 남한산성을 오르며 지난 날들을 떠올려 본다. 인생 70은 시속 70km로 달리는 세월이라고 한다.
○ 남한산성(南漢山城): 조선시대(1392~1910)에 유사시를 대비하여 임시 수도로서 역할을 담당하도록 경기도(京畿道) 광주시(廣州市)·성남시(城南市)·하남시(河南市) 일원의 해발 480m가 넘는 험준한 지형을 따라 건설된 산성이다. 남한산성의 초기 유적에는 7세기의 것들도 있지만 이후 수차례 축성되었다. 후금(後金)의 위협을 받고 이괄(李适)의 난을 겪은 인조는 1624년 총융사 이서(李曙, 1580∼1637)에게 산성의 축성을 명령하여, 2년 뒤에 둘레 6,297보, 여장(女墻) 1,897개, 옹성(甕城) 3개, 성랑(城廊) 115개, 문 4곳, 암문(暗門) 16곳, 우물 80곳, 샘 45곳 등을 설치하고서 광주읍의 치소(治所)를 산성 안으로 옮겼다. 축성 공사에는 각성(覺性)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삼아 전국 8도의 승군을 동원하였는데, 승군의 사역과 보호를 위하여 현재 남아 있는 장경사(長慶寺)를 비롯한 7곳의 사찰을 새로 건립하기도 하였다. 남한산성은 건립된 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성관 안에는 많은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둘레의 길이는 약 8㎞ 정도이며, 면적도 약 528,460㎡ 에 달한다. 2014.6.22 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남한산성 문화재: 남한산성, 남한산성 행궁, 수어장대, 숭렬전, 청량당, 현절사, 침괘정, 연무관, 지수당, 남한산성 사찰 ( 망월사터, 장경사, 개원사터, 장경사 동종)
남한산성 등산길:
옛날 군부대가 있던 곳엔 아파트 건설이 한창이다...
마천동 버스 종점, 그리고 만남의 장소...
" 여기서 부터 하남시입니다." ...
아스 남한산성....그리고 공공주택 건설 현장...
쌍바위가든....보신탕 등등..
남한산성 성불사...
<- 수어장대 2380M, < -서문 2070M, <- 연주봉옹성 1780M.
베드민턴장...참 오래된 곳이다. 오른쪽에 하나 더 생겼다.
물이 졸졸...약수물이라고 하네...
태풍 곤파스의 흔적....수많은 키 큰 아카시아 나무들이 쓰러졌었다.
스포츠 클럽을 연상 시키는 운동 쉼터...
옛날 산불 감시 초소가 있던 곳....
우거진 숲 사이로 남한산성...
중간 쉼터의 이정표 ....<- 우익문(서문) 1.3km, <_ 연주봉옹성 0.8km, -> 성불사 1.2km, -> 쌍바위약수 0.8km.
긴 나무 계단 길...
앗, 능선 길에서....하남시 방향...
연주봉 옹성 아래 산불감시초소...
앗, 연주봉옹성.......
옹성(甕城): 성문(城門)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문 밖으로 한 겹의 성벽을 둘러쌓은 이중(二重) 성벽을 말한다. 성 내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이 옹성을 먼저 통과해야 했으며, 성벽에서 밖으로 돌출되어 있어 성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三面)에서 입체적(立體的)으로 공격(攻擊)할 수 있도록 한 시설물(施設物)이다. 남한산성의 옹성은 연주봉옹성, 장경사 신지옹성 등 남한산성에는 총 5개의 옹성이 있다. 옹성은 남쪽에 3개, 동쪽과 북쪽에 각각 1개씩 설치되었다. 연주봉옹성은 둘레가 315m에 면적은 865㎡이고, 73개의 여장이 있었다. 남한산성도에 옹성 말단에 포루라는 표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옹성에는 포루가 있었지만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이 옹성 역시 2000년 토지박물관에서 발굴조사 후 현재는 복원되어 있다. 연주봉에서 바라보면 아차산 북쪽과 남양주 일대의 한강이 조망되고, 이성산성과 하남시 춘궁동 일대가 특히 잘 보이며, 성 내부의 지역도 관측되는 중요한 요충지 이다. 날씨가 쾌청한 날은 북쪽으로는 소요산과 감악산까지 조망되며, 서쪽으로는 강화도 까지, 동쪽으로는 검단산, 예장산, 용문산까지 조망되고 남쪽으로는 본성에 가려 멀리 볼 수 없지만, 삼면은 시야가 막히는 곳이 없이 시원하게 펼쳐지는 아름다운 곳이다.
병꽃..
제5암문 (연주봉옹성 암문)..... 암문은 적이 관측하기 어려운 곳에 만든 성루가 없는 성문이다. 남한산성에 16개가 있으며, 우리나라 성곽 중에서 가장 많다.
제5암문 이정표....<- 학암동 1.7km, <- 수어장대 0.9km, <- 우익문(서문) 0.3km, -> 전승문(북문) 0.8km.....
119 연주봉옹성, <- 서문 0.3km, -> 북문 1.0km
등산한 능선을 바라본다...
잠실방향....왼쪽 희미한 롯데월드타워 ...
앗, 서문(우익문)...
남한산성 하면 조선의 국치인 병자호란 (1936.12 ~1937.1)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우익문(서문)을 바라보면 정일월 추운 엄동설한에 아주 가파른 남한산성 길을 내려가 송파 삼전도에서 조선의 국왕 인조가 삼궤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로 머리를 아홉번 땅에 찧는 수모를 당하며 항복을 하는 말할 수 없는 국치를 겪게되었다. 또한 국제정세에 어두운 조정의 지도자들 때문에 죄없는 백성이 억울하게 전쟁으로 죽어나가고, 적국에 인질로 집혀가고, 말할 수 없는 고통에 신음한 역사가 안타깝기만 하다.
위례신도시 방향..
○ 서문 (우익문) :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서문은 4개의 대문중 규모가 가장 작고, 산성을 처음 쌓았을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 3년(1799)에 다른 문과 같이 개축하며 우익문(右翼門)이라 칭하였다. 행궁을 중심으로 국왕은 남쪽을 바라보며 국정을 살피니, 서문이 행궁의 유측에 있어 우익문이라 하였다. 서문은 인조15년(1637) 1월 30일 왕이 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항복하기 위해 남한산성을 나간 바로 그 문이다. 남한산성의 서쪽 사면은 경사가 급해 물자수송이 어렵지만 광나루나 송파나루 방면에서 산성으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우익문 (서문) 이정표..........<- 0.6km 수어장대, ↙ 0.1km 국청사, -> 북문(전승문) 1.0km...↑ 1.4km 학암동.
문......./ 우익문....감이동 1.9km,.
" 위상이 남다른 4개의 문 ".....
남한산성에는 4개의 문이 있습니다. 한양의 4대문 처럼 남한산성의 4개문은 좌익문(左翼門: 동문), 우익문(右翼門: 서문), 지화문(至和門:남문), 전승문(全勝門:북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한양 도성의 문 이름들과 비슷하지요? 가장 크고 넓은 문이 지화문입니다. 지화문은 좌익문과 함께 남한 산성의 핵심도로인 봉화로에 설치된 문입니다. 왕의 행렬, 마차와 수레, 여러 장사들과 주민들이 드나들었던 지화문은 남한산성 옛길을 따라 좌익문과 이어지게 됩니다. 이 길은 남한산성 옛길의 가장 핵심적인 루트입니다. 남한산성 옛길은 산성로터리를 중심으로 북문, 서문, 남문을 일주하는 노선을 따라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익문...
서문 밖의 성곽...
서문 통로에서 산성 내로 다시 들어가며.....
국청사 방향..
청량산, 수어장대 가는 길...
대모산과 멀리 관악산...
길과 길...남한산성 옛길...
"왕들의 능행길, 민간의 상업루트"...
남한산성이 위치한 지금의 성남시, 광주시, 하남시는 예날 조선시대 행정구역으로 보면 모두 광주유수부의 관할지역이었습니다. 광주유수부는 남한산성의 군사요충지적 특성 때문에 매우 중요한 행정중심지였습니다. 또 남한산성은 왕의 이동과 관련이 깊은 곳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왕들은 반드시 선대왕들의 능에 성묘를 가야했으며 왕들의 이런 성묘행사를 능행이라고 불렀습니다. 후대의 왕들이 영년릉(英寧陵)에 참배를 하려 가려면 일 년에도 몇 차례씩 남한산성 옛길을 이용해 여주까지 가야했습니다. 남한산성 옛길의 또다른 특징은 조선후기 상거래가 활발해 지면서 필요해진 내륙 유통망으로 민간에서 이용했던 상업루트였다는 점입니다. 많은 보부상들이 바로 남한산성 옛길을 통해 상업유통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됩니다. 이렇게 이용된 남한산성 옛길은 목적지인 경상북도 봉화의 이름을 따 통칭 봉화로라 불렀습니다.
코로나19 전염병 사태로 수어장대 출입금지...아쉽다. 남한산성에 오면 수어장대를 보고 가야하는데...
○ 수어장대(守禦將臺): 수어장대는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목적으로 지은 누각이다. 남한산성에 있던 5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있으며, 성 안에 남아있는 건물중 화려하고 웅장하다...남한산성 축성때 단층으로 지어 서장대라 불리던 것을 영조 27년 유수 이기진이 왕명을 받아 이층으로 다시 짓고 '수어장대'라 편액을 달았다...수어장대 2층 내부에는 '무망루'라는 편액이 달려 있었는데,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다가 귀국하여 북벌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지은 것이다. 현재 무망루 판액은 수어장대 오른편에 보호각을 지어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보관하고 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
남문으로 하산길:
송파 잠실 방향...
제6암문(서암문)...
암문 밖의 성곽...
좁은 암문을 바라보며..
성안에서 다시 남문으로...
남한산성 능선...일장산, 성남 방향...
멀리 중간에 청계산...그리고 조금 오른쪽 멀리 희미한 관악산...오른쪽 앞부분 강남의 구룡산, 대모산...
위례신도시...
무궁화동산...
칼 쓴 십자가...
"천주교 비극의 역사, 남한산성 "...
남한산성 성지 성당 내부에는 순교자들이 옥에 갇혀 있을 때 쓰고 있던 칼이 채워져 있는 독특한 십자가상이 있습니다. 천주교 탄압의 본격적인 서막은 신유박해(1801년) 부터 였는데요, 천주교에 대한 큰 반감이 없었던 정조가 승하하자 정순황후가 가혹한 탄압을 시작한 것이죠. 박해의 진짜 이유는 정조 시기에 세력을 키운 남인을 숙청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이 신유박해 때 남한산성에서 첫 순교자가 발생하게 됩니다. 천주교 신자가 광부 및 인근 지역에서 잡히면 남한산성의 포도청으로 이송되어 감옥에 갇혔습니다. 순교자들은 심문을 당하다 결국은 감옥에서 순교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교살형이나 교수형이 대부분 감옥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감옥이 곧 순교터가 되었습니다. 감옥에서 죽거나 고문 끝에 죽은 순교자들은 동문 밖으로 시신을 버렸는데 그 장소가 수구문이었습니다. 시체가 너무 많이 나가고 피가 물처럼 흘러 수구문은 시구문으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남문 가는 길...<- 0.4km 만해기념관, <- 0.9km 수어징대, <- 1.5km 우익문(서문), -> 지화문(남문) 0.6km..
만해기념관으로? 남문으로? 그래도 남문을 향한다...
청량산 (수어장대) ....
앗, 남문 (지화문)...
지화문...
지화문을 나가본다...
보호수와 상곽...
지화문 안내...
지하문(남문): 정조3년 성곽을 보수 할 때 '지하문'이라 칭하였고 남한산성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이다.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다. 또한 현재는 성남으로 통하는 관문역할을 하고 있으며, 성문앞에 식재된 (350년 수령, 성남시 보호수) 느티나무와 함께 문화와 역사가 살아숨쉬는 시민의 역사터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 - 성남시.
검단산길 & 성남 누비길 노선안내....
검단산길.....검단산은 태백산맥의 철령(鐵嶺) 부근에서 분기하여 서울 부근에 이르는 광주산맥의 지맥으로서 남한산성과 연결되는 산줄기를 이루며, 높이는 534.7m이다. 경기도 성남시 동쪽으로 광주시와 경계를 이루며, 전체적으로 '凹(요)' 자 모양의 산지를 형성한다. 이 산을 중심으로 하는 성남시의 동쪽 산지는 남쪽으로 갈 수록 해발고도가 낮아지며 완만한 사면이 발달해 있다. 또한 예로부터 신성한 산이라 하여 그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누비길 코스:
1구간: 남한산성길 7.5km (4시간)
2구간: 검단산 길 7.4km (3시간 30분)
3구간: 영장산 길 9.7km (4시간 30분)
4구간: 불곡산 길 8.8km (4시간)
5구간: 태봉산 길 10.7km (4시간 40분)
6구간: 청계산 길 8.5km (4시간 30분)
7구간: 인능산 길 9.5km (4시)
450여년 수령의 느티나무 보호수...
남한산성 도립공원 안내도...
1코스: 산성로터리- 북문- 서문- 수어장대- 영춘정- 남문- 산성로토리 ( 3.8km, 1시간 20분 )
2코스: 산성로터리- 영월정- 숭렬전- 수어장대- 서문- 국청사- 산성로토리 ( 2.9km, 1시간 )
3코스: 남한산성 역사관주차장- 현절사- 벌봉- 장경사- 망월사- 지수당- 남한산성 역사관주차장 ( 5.7km, 2시간 )
4코스: 산성로터리- 남문- 남장대터- 동문- 지수당- 개원사- 산성로토리 ( 3.8km, 1시간 20분 )
5코스: 남한산성 역사관주차장- 동문- 동장대터- 북문- 서문- 수어장대- 영춘정- 남문- 동문 ( 7.7km, 3시간 20분 )
남한산성비석군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114-1번지 소재.....
성 내에는 18~20세기 무렵에 설치된 39여기의 비석이 있다. 이 중 본 부지(남문진입로)내로 남한산성 행궁 복원 사업에 따라 이전된 11기와 현 위치에 보존되어 있던 19기를 포함한 총30기의 비석을 한곳으로 모아 남한산성을 방문하는 탐방객들에게 옛 선현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후대에 소중히 전승될 수 있도록 비석을 한 곳으로 옮겨 정비해 놓았다. 이곳에 있는 비석은 역대 광주유수(廣州留守) 및 수어사(守禦使), 부윤(府尹), 군수(郡守)의 비로서 재직시 백성들을 정성스레 돌봐 치정을 잘 했거나 사랑을 베풀어 선정을 한 분들에게 백성들이 그들을 추념하여 새운 비로서 광주유수.영의정을 지낸 심상규(沈象奎)의 비를 포함 30기의 비석이 이곳에 위치하고 있다.
<- (종점) 남문, ↑ 성남...
남한산성 공용주차장...
● 주차료: 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는 산성 내에 중앙(주차면 수: 179면), 남문(172면), 로터리(55면), 센터(55면) 등 4개 유료주차장을 운영 중이며, 주차료는 시간과 관계없이 승용차 기준으로 평일 3000원, 주말 5000원이다.
남한산성 행궁 방향...
민속주점..."먹어야 산다"...
행궁 방향...
산성마을 종로로터리...
이곳 정류소에서 9번 버스를 타고 성남 산성역으로 내려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남한산성은 공용주차장도 많고, 산성역에서 9번, 주말엔 9-1번 버스도 추가하여 대중교통 수단이 좋습니다. 언제 걸어보아도 남한산성 성길은 좋으며, 우리나라의 슬픈 역사를 되새길 수 있는 사색의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국란의 위기 앞에서 인간들이 어떻게 반응하고, 그 결과는 무엇인가를 똑똑하게 상기할 수 있습니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시는 우리 민족에게 이런 비극적인 역사는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순전히 지도자들의 역할이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국제 정세 판단을 잘 못하면 역사는 비극으로 흐를 것입니다. 인류사에 처음 보는 찬란한 한강의 기적을 달성한 우리들입니다. 이것은 창의적이고 근면한 우리 민족이 이루어낸 결과물입니다. 이를 더욱 발전시켜 후대에 물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저 남미의 잘못된 역사를 반면 교사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코로나 전염병 사태로 막중한 위기에 봉착해 있습니다. 국가는 어렵고 절박한 민초들을 보살피려 긴급자금을 투하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굶어 죽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어려운 이웃을 살려야 내야 합니다. 하늘이 도외서 우리 민족이 코로나 극복에서 세계인의 칭송을 받듯이,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삼아 위대한 인류사에 영원히 남을 새역사를 쓸 수 있기만을 기원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