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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구릅/일상들 ( life )

① 창덕궁, 창경궁- ( 2024.05.30 )

by the road of Wind. 2024. 6. 1.

창덕궁, 창경궁

- ( 2024.05.30 )

 

《   창덕궁, 낙선재  》

 

늦은 오후 시내 갔다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 창덕궁창경궁을 주마간산격으로 간단히 둘러보았습니다. 창덕궁과 창경궁은 언제 와보아도 우리이 역사가 스며있는 귀중한 곳이며, 기품있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갑니다. 그러나 역사는 후세에게 그 의미를 부여하고, 돠새기게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과거를 귀감으로 삼아 미래를 설계하고 개척해 나가는데 나침판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산   책 : 걸음수 4,899 steps, 거리 3.34 km, 소모열량 164 kcal, 소요시간 00:52 hrs, 속도 3.8 km/h

 코   스 : (3호선) 안국역 - 창덕궁돈화문 - 진선문 - 인정문 - 선정전 - 희정당 - 대조전 - 흥복헌 - 낙선재)  - 창경궁 ( 통명전- 양화당 - 집복헌 - 영춘헌 - 환경전- 경춘전 - 함인정 - 문정문 - 문정전 - 숭문당 - 명정전  명정문 - 옥천교 - 홍화문 

 

창덕궁:

 

청덕궁 돈화문 곁 매표소 쉼터

 

종합관람지원센터

보호수, 은행나무...수령 425년 (지정일자: 1972.10.12)

 

궁궐전각 관람요금

 

일반: 3,000원 (만 25세 ~ 만64세)

단체: 2,400원 (성인 유로관람객 10인 이상)

무료: 만24세 이하, 만 65세 이상 경로, 장애인, 국가유공자, 한복착용자

할인: 종로구민 (50%) (관련증빙제시)

 

특별관람요금:

 

상시관람권: 30,000원. 1개월 (관람시간내)

점심시간 관람권: 5,000원.  3개월 (10회 한정) 12:00-14:00. 인근 직장인 및 주민대상/ 구입한 고궁만 입장 가능.

통합관람권: 6,000원. 관람장소- 창덕궁(후원제외), 경복궁, 창경궁, 덕수궁, 종묘, 유효기간: 구입일로 부터 6개월.

 

 

  후원:  

  후원 관람시간

 

. 휴관일은 매주 월요일입니다. 

. 정기휴관일인 월요일이 공휴일일 경우 개방하며, 개방한 공휴일 다음의 첫번째 비공휴일이 휴관일입니다. 


2월: 10:00-16:10 (입장마감 15:00) 

3월-6월: 10:00-17:30 (입장마감 16:00) 
7월-8월: 10:00-17:10 (입장마감 16:00)

9월-10월: 10:00-17:30 (입장마감 16:00) 
11월: 10:00-17:00 (입장마감 15:30)

12월-1월: 10:00-16:10 (입장마감 15:00)

  후원 관람요금 (후원은 전각관람과 함께 구매): 

1- 소인 (만 7세-만18세); 2,500원 (+전각요금 무료) 
2- 대인 (만 19세-만24세); 5,000원 (+전각요금 무료) 
3- 대인 (만 25세-만64세); 5,000원 (+전각요금 3,000원) 
4- 경로 (만 65세 이상); 5,000원 (+전각요금 무료) 
5- 단체 (성인 유료 10인 이상); 5,000원 (+전각요금 2,400원) 


6- 외국인 소인 (만 7세-만18세); 2,500원 (+전각요금 무료) 
7- 외국인 대인 (만 19세-만64세); 5,000원 (+전각요금 3,000원) 
8- 외국인 경로 (만 65세 이상); 5,000원 (+전각요금 무료) 
9- 외국인 단체 (유료 관람객 10인 이상) 소인 (만 7세-만18세); 2,500원 (+전각요금 무료) 
10- 외국인 단체 (유료 관람객 10인 이상)  대인 (만 19세-만64세); 5,000원 (+전각요금 2,400원) 
11- 무료대상:  만6세이하(내.외국인), 장애인(내국인), 국가유공자(내국인). (신분증 또는 증빙 제시)

 

돈화문(敦化門):  

돈화문은 창덕궁의 정문으로, 1412년(태종 12)에 건립되었다. 창건 당시 창덕궁 앞에는 종묘가 자리 잡고 있어 궁의 진입로를 궁궐의 남서쪽에 세웠다. 2층 누각형 목조건물로 궁궐 대문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며, 앞에 넓은 월대를 두어 궁궐 정문의 위엄을 갖추었다. 돈화문은 왕의 행차와 같은 의례가 있을 때 출입문으로 사용했고, 신하들은 서쪽의 금호문으로 드나들었다. 원래 돈화문 2층 누각에는 종과 북을 매달아 통행금지 시간에는 종을 울리고 해제 시간에는 북을 쳤다고 한다. 돈화문은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가 1609년에 재건되었다.

 

 

창덕궁 (昌德宮):

조선조 3대 임금인 태종은 1405년에 제2의 왕궁으로 창덕궁(昌德宮)을 창건했다. 그럼으로써 수도 한양의 서쪽에는 경복궁이, 동쪽에는 창덕궁이 위치하여 균형잡힌 도시공간을 구성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서울의 모든 궁궐이 불탄 후 경복궁은 재건되지 않았고, 270여년 동안 창덕궁이 조선 왕조 제1의 정궁으로 역할 하였으며, 마지막 임금인 순종 때 까지 사용된 최후의 궁궐이기도 한다. 동쪽의 창경궁(昌慶宮)과 함께 하나의 궁궐로 사용되어 동권(東闕)이란 별칭을 갖고 있다. 중국을 비롯한 동양의 궁궐 예재는 남북 중심축을 따라 엄격하게 배치되는 것이 일반적이며 경복궁 역시 이 제도를 따랐다. 그러나 산자락에 자리잡은 창덕궁은 인위적이 제도를 벗어나 주변 자연 지형에 순응하고 변화를 거듭하면서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 되었다. 왕실 생활에 편리하면서도 친근감을 주는 공간구성은 경희궁, 덕수궁 등 다른 궁궐 구성에 영향을 주었다. 1917년 대조전을 비롯한 내전들이 불타 없어지자 경복궁의 전각들을 헐어다 옮겨짓는 등 많은 건물들이 변형, 훼손, 철거되었다가, 1991년 부터 복원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덕궁은 조선 궁궐의 원형을 비교적 충실히 지니고 있으며,동궐의 후원은 한국 전통 조경의 특성과 아름다움을 가장 후륭하게 구현한 예로 평가된다. 1997년 12월 유네스코(UNESCO)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제되었다.    

* 궁궐 영역별:


1. 돈화문 일원, 2. 인정전 일원, 3. 선정전, 4. 희정당, 5. 대조전 일원, 6. 성정각 일원, 7. 궐내각사, 8. 선원전 일원, 9. 낙선재 일원, 10. 부용지와 주합루, 11. 애련지와 의두합, 12. 연경당, 13. 존덕정과 폄우사, 14. 옥류천 일원, 15. 신선원전 일원.

 

휠체어, 유모차 이용 관람객을 위한 경사로 관람 동선 안내

 

뒷편 궐내각사


궐내각사(闕內各司):  왕실과 직접 관련이 있는 여러 관청들이 궁궐안에 설치되었고, 이를 궐내각사(闕內各司)라 부른다. 그 가운데 정치를 보좌하는 홍문관(弘文館, 玉堂), 건강을 보살피는 내의원(內醫院, 藥房), 정신문화를 담당하는 규장각(奎章閣, 內閣), 왕의 칙령과 교서를 보관하던 예문관(藝文館) 등이 중심 시설이었다. 대부분의 건물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소멸되었다가 2005년에 복원되었다. 가운데 흐르는 금천을 경계와 경관 요소로 삼았고, 여러 관청들이 밀집되면서 미로와 같이 복잡하게 구성되었다.   

 

 

창덕궁 세계유산

 

진선문...그 앞에 금천교

 

금천(禁川)

 

진선문(進善門):  

진선이란 임금께 바른말을 올린다는 뜻이다. 임금이 계시는 정전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므로 올바른 정치를 기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영조 때엔 이곳에 신문고가 설치되어 있었다. 신문고는 커다란 북으로,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한 백성이 신문고를 두드려 임금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인정문

 

인정전(仁政殿) 

인정전(仁政殿)  일원: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正殿)으로 신하들이 임금에게 문안도 하고 정사를 아뢰며  외국의 사신을 접견 등 중요한 의식을 행하던 곳이다. 앞쪽으로 임금이 다니던 길인 어도(御道)와 벼슬의 등급을 나타내는 품계석을 둔 조정 마당을 두어 국가의 상징 공간으로 삼고, 뒤편에는 인정전 뒷산인 매봉과 맥이 이어지도록 계단식 정원을 마련하였다. 조정 마당을 둘러싼 내행각에는 호위대 주둔소와 창고 등을 두었으나 현재는 비어있다. 인정문 앞 외행각의 사다리꼴 마당은 불규칙한 지형과 규칙적인 궁궐형식을 절묘하게 융합한 공간으로, 세종 때의 건축가 박자청이 설계한 것이다.  외행각과 진선문, 숙장문은 1996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인정전 품계석

인정전 임금님 용상

 

용상과 일월오악도:

인정전의 내부: 인정전 안에는 정면에 임금님의 용상이 있고 그 뒤에는 나무로 만든 곡병과 곡병 뒤에는 일월오악도(日月五岳圖)라는 병풍이 있다. 병풍에는 음양을 뜻하는 해와 달이 있으며 이는 다시 왕과 왕비를 상징한다. 그 아래 다섯 개의 산봉우리는 우리나라의 동,서,남,북,중앙의 다섯 산을 가리키며 이는 국토를 의미한다.이것은 임금이 중앙에서 사방을 다스리고, 음양의 이치에 따라 정치를 펼친다는 뜻을 담고 있기도 하다.그리고 주변에는 유리창을 비롯하여 전구나 커튼 등 서양 장신구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구한말 외국과의 수교 후 다양한 외래 문물이 들어 온 것이며, 1907년 순종이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한 후에 인정전의 실내바닥이 전돌에서 마루로 바뀌고, 전구가 설치되는 등 부분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참고로 5대궁 중에서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온 곳은 1887년 경복궁이다.   - < 문화재청 >

용상 주위가 약간 서양식으로 된 것은 순종이 이 곳에 이어하면서 1907년 무렵 서양식 가구와 실내장식이 도입되고서 부터라고 한다.

 

인정전 측면

 

선정문

 

선정전(宣政殿):  

선정전은 궁궐의 편전(便殿:사무공간)으로서 왕이 고위직 신하들가 더불어 일상 업무를 보던 곳으로 지형에 맞추어 정전 동쪽에 세워졌다. 아침의 조정회의, 업무보고, 국정 세미나인 경연 등 각종 회의가 매일같이 열였다. 주위를 둘러싼 행각들은 비서실, 창고 등으로 이용되었으나 전체적으로 비좁았다. 선정전은 청기와를 올린 것과 앞쪽 선정문 까지 복도각 건물로 연결한 것이 특징이다. 선정전은 한 때 혼전(魂殿: 신주를 모시는 곳)으로 쓰였는데, 복도는 그때의 흔적이다.   

 

선정전 임금님 용상

 



 

희정당(熙政堂):   

희정당은 왕의 거처이며 집무실이다. 원래의 이름은 숭문당이었는데, 연산군 대에 희정당(熙政堂)으로 바꾸었다. 선정전이 종종 국장에 사용되면서 또 다른 집무실로 활용되었고, 왕의 침실로 쓰이기도 했다. 지금의 희정당은 1917년에 붙에 타 없어진 희정당을  복구하면서 경복궁 강녕전을 이전하여 건축한 것으로, 원래의 모습과 다르다. 앞쪽에는 자동차를 타고 내릴 수 있도록 현관이 마련되고, 내부에는 유리창과 전등, 근대적 화장실을 설치하고 유럽풍의 가구를 갖추었다.  

 

희정당

 

선평문

 

신식 접견실

 

대조전이 보인다.

대조전

 

대조전(大造殿) 일원  

대조전은 창덕궁의 침전이자 생활공간이다. 대청을 사이에 두고 양옆으로 왕과 왕비의 온돌방이 있다. 대조전 오른쪽에 있는 흥복헌(興福軒)은 1910년 마지막 *어전 회의가 열려 경술국치가 결정된 비운의 장소이다. 대조전 전체 지역은 여러 부속 건물들이 **행각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뒤뜰에 조성된 ***화계에는 아름다운 굴뚝이 세워져 있다. 현재의 대조잔은 1917년 일어난 화재로 이전의 대조전이 불타 없어지자 그 터에 경복궁 침전이었던 교태전을 옮겨 지은 것으로 마지막 왕과 왕비가 살았던 1920년대의 모습이 비교적 잘 남아있다.

* 어전회의: 중요한 국사를 다루기 위하여 임금 앞에서 중신들이 하는 회의.
** 행각: 궁궐, 절 따위의 정당(正堂) 앞이나 좌우에 지은 줄행랑.
*** 화계: 돌과 흙으로 층계를 만들어 꽃이나 나무를 심어 놓은 계단식 화단.

 

신식 가구들

 

대조전....대조전은 왕비가 거처하는 내전 중 가장 으뜸가는 건물이다. 이 건물에서 조선 제9대 왕인 성종을 비롯하여 인조·효종이 죽었고, 순조의 세자로 뒤에 왕으로 추존된 익종이 태어나기도 하였다. 조선 태종 5년(1405)에 지었는데 임진왜란 때를 비롯하여 그 뒤로도 여러 차례 불이 나서 다시 지었다. 1917년 또 화재를 당하여 불에 탄 것을 1920년에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고 그 부재로 이곳에 옮겨지어 ‘대조전’이란 현판을 걸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차례에 걸쳐 다시 지었기 때문에, 건물 자체는 물론 주변의 부속 건물들도 많은 변화를 거쳤다. 대조전은 현재 36칸으로 앞면 9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건물 가운데 3칸은 거실로 삼았으며, 거실의 동·서쪽으로 왕과 왕비의 침실을 두었다. 각 침실의 옆면과 뒷면에는 작은 방을 두어 시중 드는 사람들의 처소로 삼았다. 건물 안쪽에는 서양식 쪽마루와 유리창, 가구 등을 구비하여 현대적인 실내 장식을 보이고 있다.  - <문화재청>

 

영현문:

 

영현문은 성정각의 남문이다. 성정각은 왕의 경연, 욍세자의 서연이 열리던 곳이다. 영현은 '어진 분을 맞이하는 문' 이란 듯이다.

 

보춘정(報春亭):

창덕궁의 성정각(誠正閣)안의 누각으로, 성정(誠正)이란 말은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의 앞글자를 따온 것이다.

" 조화어약(調和御藥) 보호성궁(保護聖躳) "  

임금의 약을 제조하여 임금의 몸을 보호한다. 허준이 이곳 상정각에서 내의원으로 일하였다고 한다. 1917년 창덕궁 화재로 순종황제께서 후원 영역에 있는 연경당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일제가 임의로 이곳 성정각을 내의원으로 상요하게 된 것이다.

 

창덕궁 비원 메표소 &  창경궁 출입문

 

 

낙선재 일원:

 

낙선제 일원:

낙선재는 1847년에 지어진 창덕궁의 건물이다. 본래 이름은 낙선당이었으며, 창경궁에 속해 있었다. 정면 6칸, 측면 2칸의 단층 건물이다. 2012년 국보 제1759호로 지정되었다. 고종 황제도 이곳에서 지낸 바 있으며, 1917년 창덕궁에 큰 불이 났을 때 순종 황제도 내전 대신 낙선재에 머물렀다. 이곳은 황족들이 마지막을 보낸 곳으로 유명하다. 낙선재 일원은 창덕궁 영역의 생활공간으로 낙선재, 석복현, 수강제가 하나로 영역을 이루고 있다.

* 조선의 마지막 왕비 순정효황후- 1906년 13세의 나이에 동궁의 계비로 책정되었다, 1907년 순종이 황제에 오르자 황후가 된 분이다. 6.25사변 때 피신을 못하고 낙선재에 있었지만 미굼의 도움으로 부산에 피신할 수 있었다. 전쟁후 이승만 정권의 거부로 낙선재로 돌아오지 못하고 정릉 수인재에서 기거하다 1960년 석복현으로 환궁하였다.

* 영왕비 이방자 여사- 1963년 귀국하여 1989년 까지 낙선재에 기거하였다.

* 비운의 덕혜옹주 - 1912년 고종과 복영당 양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7년 환적에 입적함. 1919년 공종 서거. 1921년 복녕당 아가씨로 부르다 덕혜라는 호를 받음. 1925년 강제로 일본에 끌려가 학습원 입학함. 1931년 대마도 도주 후예인 백작 소오 다케유키와 정결혼 함. 이듬해 딸 마사에 출산, 병세 악화. 1955년 이혼. 외동딸 마사에(정혜) 결혼 실패 및 일본 남알프스 실종. 이승만 정부 반대로 환국 좌절. 박정희 대통령의 배려로 1962년 실어증 등 병든 몸으로 78세에 귀국. 1989년 78세로 수강제에서 비극적인 삶 마감함.

 

낙선제

 

"오래도록 즐거움이 있다." 낙선제엔 여러 황족들이 마지막을 보낸 곳이다. 마지막 황후 순정황후 윤씨, 마지막 왕 영친왕, 마지막 공주 덕헤공주, 조선과 일본 두나라 사이에 있던  등 이방자 여사 주로 비운의 주인공 들이다. 1917년 창덕궁 화재시 순종황후더 머물렀다. 모든 건물들이 소박하고 어느 양반가의 저택 같이 느겨져 친근감이 있다.  

 

석복헌....낙선재의 안사랑채 역할을 하는 곳이다. 조선 24대 헌종의 빈인 경비이 거처한 곳이다. 헌종은 첫째 왕비 효헌황후가 16세로 세상을 뜨자 이듬해 왕비를 간택했는데 대와대비가 명헌왕후 홍씨를 간택했는데 마음에 들지 않았고 후사도 없었다. 그러자 본인이 3년전 본 김재청의 딸을 후궁인 경빈으로 맞아드리고 여기에 살게 했다.

수강제....수강이란 오래 건강하게 산다는 의미이다. 정조9년(1785) 단종이 머물렀던 옛 수강궁 자리에 수가강제를 세웠다. 순조 27년(1827)부터 대리청정을 했던 효명세지(익종)의 별당이었다. 헌종14년(1848)에는 헌종의 할머니 순원황후의거처로 중수하였다. 수강제는 낙선제, 석복헌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있다.  

 

낙선제 일원 나가는 길에서..

자두나무

매화나무

 고마운 우리나라 관광객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