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익선동 한옥마을, 창덕궁, 창경궁, 광장시장
- ( 2024.10.01 )
《 창덕궁 》:
궁궐 연표:
1392년 태조 1 - 조선개국, 태조의 4대 조상을 왕으로 추존함
1394년 태조 3 - 한양 천도 결정. 경복궁 궁궐 조성 시작, 종묘 조성 시작
1395년 태조 4 - 경복궁 : 궁궐 중심전각 완공(390여 칸) , 종묘 : 종묘 완공,
1398년 태조 7 - 경복궁 궁궐 담장(궁장) 완공
1405년 태종 5 - 창덕궁 궁궐 조성 시작
1406년 태종 6 - 창덕궁 후원 조성
1411년 태종 11 - 창덕궁 금천교 건립
1412년 태종 12 - 경복궁 경회루 중건, 창덕궁 돈화문 건립
1418년 세종 즉위 - 창경궁 상왕전(태종)으로 수강궁 창건
1421년 세종 3 - 종묘 영녕전 건립.
1427년 세종 9 - 경복궁 동궁(자선당) 건립
1438년 세종 20 - 경복궁 흠경각 건립, 선원전 건립
1443년 세종 25 - 경복궁 교태전 건립
1462년 세조8 - 창덕궁 후원 본격 확장
1483년 성종 14 - 창경궁 수강궁 터에 창경궁 창건
1494년 연산 즉위 - 창덕궁 후원 꾸밈
1546년 명종 1 - 종묘 정전 11칸으로 증축
1554년 명종 9 - 경복궁 화재로 손실괸 강녕전, 사정전, 흠경각 복구
1592년 선조 25 -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종묘 소실
1593년 선조 26 - 덕수궁 월산대군의 저택을 임시 궁궐로 삼고, '정릉동 행궁'이라 부름
1608년 선조 41 - 광해 즉위. 덕수궁 선조 석어당(추정)에서 승하. 광해군 즉조당(추정)에서 즉위, 종묘 : 정전 11칸, 영녕전 10칸 규모로 증건
1610년 광해 2 - 창덕궁 재건하여 법궁으로 삼음
1611년 광해 3 - 광해군 덕수궁(정릉동 행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김. 정릉동 행궁을 경운궁이라 칭함. 광해군 경운궁으로 다시 옮김
1615년 광해 7 - 광해군 창덕궁으로 다시 옮김
1616년 광해 8 - 창경궁 중건
1618년 광해 10 - 덕수궁 인목대비를 폐위하여 석어당에 유폐
1623년 광해 15 - 인조 즉위. 창덕궁 인조반정으로 전각 대부분 소실, 창경궁 인조반정으로 동궁인 저승전과 내전 일대 소실. 덕수궁 인조 즉조당(추정)에서 즉위. 창덕궁으로 옮김
1624년 인조 2 - 창경궁 이괄의 난으로 통명전, 양화당 등 소실
1633년 인조 11 - 창경궁 통명전, 양화당 등 중건
1636년 인조 14 - 창덕궁 후원 옥류천에 소요정, 청의정, 태극정 건립
1647년 인조 25 - 창덕궁 선정전, 대조전, 희정당 등 소실된 건물 중건
1667년 현종 8 - 종묘 영녕전 12칸으로 증축
1704년 숙종 30 - 창덕궁 후원에 대보단 조성
1726년 영조 2 - 종묘 정전 15칸으로 증축
1776년 정조 즉위.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 설치
1777년 정조 1 - 창경궁 자경전 건립
1790년 정조 14 - 창경궁 통명전 소실
1803년 순조 3 - 창덕궁 인정전 소실
1804년 순조 4 - 창덕궁 인정전 재건
1830년 순조 30 - 창경궁 환경전에서 발생한 화재로 내전 일대 소실
1833년 순조 33 - 창덕궁 대조전, 희정당 등 소실
1834년 순조 34 - 창덕궁 대조전, 희정당 등 재건. 창경궁 통명전, 환경전 등 소실된 전각 재건
1836년 헌종 2 - 종묘 정전 19칸으로 증축. 영녕전 16칸으로 증축
1857년 철종 8 - 창경궁 선인문, 위장소, 주자소 등 60여 칸 소실
1865년 고종 2 - 경복궁 중건 시작
1867년 고종 4 - 경복궁 중건 완공
1873년 고종 10 - 경복궁 건청궁 창건
1876년 고종 13 - 경복궁 교태전, 자경전 등 내전 830여 칸이 화재로 소실. 덕수궁 강화도 조약 체결, 문호 개방 시작
1877년 고종 14 - 창경궁 : 수리
1882년 고종 19 - 창덕궁 임오군란, 성난 군중 창덕궁에 침입
1884년 고종 21 - 창덕궁 갑신정변, 개화파가 고종을 관물헌에 모심
1888년 고종 25 - 경복궁 소실된 전각 중건
1895년 고종 32 - 경복궁 건청궁에서 명성황후 시해사건 발생
1896년 고종 33 - 고종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
1897년 고종 34, 고종 광무 1 - 고종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돌아옴. 덕수궁: 대한제국 선포, 고종 황제 즉위
1904년 고종 광무 8 - 덕수궁 대화재로 중화전, 석어당, 즉조당, 함녕전 등 전각 소실
1905년 고종 광무 9 - 덕수궁 중명전에서 을사늑약 체결
1906년 고종 광무 10 - 덕수궁 대안문을 수리하고 대한문으로 개칭
1907년 순종 융희 1 - 덕수궁 순종 창덕궁으로 옮김. 경운궁을 덕수궁으로 부르기 시작
1909년 순종 융희 3 - 창경궁 동ㆍ식물원 조성으로 궁궐 훼손. 덕수궁 석조전 완공
1910년 창덕궁 흥복헌에서 한일병합조약 체결
1911년 창경궁 창경원으로 격하
1915년 경복궁 조선물산공진회 개최로 전각 다수 철거
1917년 창덕궁 대화재로 대조전 소실
1919년 덕수궁 고종, 함녕전에서 승하
1920년 창덕궁 경복궁의 일부 건물 헐어 대조전, 희정당 등 재건
1926년 경복궁 조선총독부 청사 완공. 창덕궁 대조전에서 순종 승하
1927년 경복궁 광후문 이건
1938년 덕수궁 석조전 서관 완공. 이왕가미술관으로 개관
1946년 덕수궁 석조전에서 미소공동위원회 열림
1951년 경복궁 한국전쟁으로 광화문 소실
1968년 경복궁 광화문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복원
1973년 종묘 영녕전 16실에 의민황태자(영왕) 신주 봉안
1983년 창경궁 창경궁으로 환원. 창경궁 복원 공사
1989년 창덕궁 낙선재에서 이방자 여사, 덕혜옹주 별세
1990~1999년 창덕궁 인정전 내행각. 외행각 정비 및 복원
1995년 경복궁 강녕전, 교태전, 흠경각. 함원전 복원. 종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
1997 경복궁 구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 창덕궁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1999년 경복궁 동궁(자선당, 비현각) 복원
2001년 경복궁 흥례문, 영제교 복원. 종묘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 유네스코 무형유산 대표 목록으로 선정
2005년 경복궁 태원전 복원
2006년 경복궁 건청궁 복원
2007년 덕수궁 복원 시작
2010년 광화문 복원
창덕궁 가는 길....이 근처에는 한복집들이 많다. 외국인들이 주로 이런 곳에서 한복을 빌려입고 입장(한복착용자- 무료)하는 것 같다.
돈화문 .... 창덕궁의 정문. 경로는 매표소에 가지 않고 신분증을 제시하여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돈화문(敦化門):
돈화문은 창덕궁의 정문으로, 1412년(태종 12)에 건립되었다. 창건 당시 창덕궁 앞에는 종묘가 자리 잡고 있어 궁의 진입로를 궁궐의 남서쪽에 세웠다. 2층 누각형 목조건물로 궁궐 대문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며, 앞에 넓은 월대를 두어 궁궐 정문의 위엄을 갖추었다. 돈화문은 왕의 행차와 같은 의례가 있을 때 출입문으로 사용했고, 신하들은 서쪽의 금호문으로 드나들었다. 원래 돈화문 2층 누각에는 종과 북을 매달아 통행금지 시간에는 종을 울리고 해제 시간에는 북을 쳤다고 한다. 돈화문은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가 1609년에 재건되었다.
▶ 창덕궁 관람 요금
1. 전각 관람:
대인: 내국인 3,000원, 내국인 3,000원
단체: 내국인 2,400원, 내국인 2,400원
( 내국인 만 25세 ~ 만64세, 외국인 만 19세~만 64세 )
* 전각 관람 만 65세 이상 경로 무료.
2. 후원 관람:
경로:
개인: 내국인 5,000원, 외국인 5,000원
단체: 내국인 5,000원, 외국인 5,000원
( 만 65세 이상 )
대인:
개인: 내국인 5,000원, 외국인 5,000원
단체: 내국인 5,000원, 외국인 5,000원
( 만 19세 ~ 만 64세 )
소인:
개인: 내국인 2,500원, 외국인 2,500원
단체: 내국인 2,500원, 외국인2,500원
( 만 7세 ~ 만18세 )
※ 후원 입장 시간: 10:00, 11:00, 12:00, 13:00, 14:00, 15:00.
- 후원 관람 인원은 회차당 인터넷 예매 50명, 현장 구입 50명입니다.
- 후원 입장 예매는 6일전 오전 10시 부터 ~ 전날까지 궁능유적본부 누리집에서 가능합니다. (입장 당일은 현장에서 구입)
- 후원은 창덕궁 해설사의 인솔하에 제한 관람만 가능. 개별 관람 불가.
- 입장 시간 미준수시 입장 및 횐불 불가.
창덕궁 회화나무 군 천연기념물
창덕궁 (昌德宮):
조선조 3대 임금인 태종은 1405년에 제2의 왕궁으로 창덕궁(昌德宮)을 창건했다. 그럼으로써 수도 한양의 서쪽에는 경복궁이, 동쪽에는 창덕궁이 위치하여 균형잡힌 도시공간을 구성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서울의 모든 궁궐이 불탄 후 경복궁은 재건되지 않았고, 270여년 동안 창덕궁이 조선 왕조 제1의 정궁으로 역할 하였으며, 마지막 임금인 순종 때 까지 사용된 최후의 궁궐이기도 한다. 동쪽의 창경궁(昌慶宮)과 함께 하나의 궁궐로 사용되어 동권(東闕)이란 별칭을 갖고 있다. 중국을 비롯한 동양의 궁궐 예재는 남북 중심축을 따라 엄격하게 배치되는 것이 일반적이며 경복궁 역시 이 제도를 따랐다. 그러나 산자락에 자리잡은 창덕궁은 인위적이 제도를 벗어나 주변 자연 지형에 순응하고 변화를 거듭하면서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 되었다. 왕실 생활에 편리하면서도 친근감을 주는 공간구성은 경희궁, 덕수궁 등 다른 궁궐 구성에 영향을 주었다. 1917년 대조전을 비롯한 내전들이 불타 없어지자 경복궁의 전각들을 헐어다 옮겨짓는 등 많은 건물들이 변형, 훼손, 철거되었다가, 1991년 부터 복원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덕궁은 조선 궁궐의 원형을 비교적 충실히 지니고 있으며,동궐의 후원은 한국 전통 조경의 특성과 아름다움을 가장 후륭하게 구현한 예로 평가된다. 1997년 12월 유네스코(UNESCO)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제되었다.
* 궁궐 영역별:
1. 돈화문 일원, 2. 인정전 일원, 3. 선정전, 4. 희정당, 5. 대조전 일원, 6. 성정각 일원, 7. 궐내각사, 8. 선원전 일원, 9. 낙선재 일원, 10. 부용지와 주합루, 11. 애련지와 의두합, 12. 연경당, 13. 존덕정과 폄우사, 14. 옥류천 일원, 15. 신선원전 일원.
휠체어, 유모차 이용 관람객을 위한 경사로 관람 동선 안내
한복착용자들...고궁의 분위기를 밝게하고, 한복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한다. 여성들이 한복을 입으면 맵시가 참 아름답다. 각종 무늬에 누구나 착용이 가능한 한복이야 말로 세계적인 복장이라고 생각한다.
창덕궁 화화 나무 군 천연기념물
창덕궁 회화나무 군 천연기념물:
돈화문 안 마당에 좌우로 자라는 8그루의 회화나무가 모두 천연기념물이다. 나무 높이는 15~16m, 가슴높이 줄기둘레 2~3m, 나이는 약 300~400년에 이른다. 이곳의 회화나무는 1830년 무렵의 창덕궁 그림(동궐도)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에 불타 버린 창덕궁을 다시 지을 때 심은 것으로 짐작된다. 돈화문 주변은 조정의 관료들이 집무하는 관청이 배치되는 공간으로, 이곳에 회화나무를 심은 것은 '궁궐 정문 안쪽에 괴목(회화나무와 느티나무)을 심고 그 아래에서 삼공(三公) 이 나랏일을 논했다." 는 중국 고사에 의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궁궐외에 학덕 높은 선비들이 사는 마을에 흔히 심었다. 그래서 학자나무라고도 한다.
진선문 방향
금천교 & 진선문(進善門):
진선이란 임금께 바른말을 올린다는 뜻이다. 임금이 계시는 정전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므로 올바른 정치를 기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영조 때엔 이곳에 신문고가 설치되어 있었다. 신문고는 커다란 북으로,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한 백성이 신문고를 두드려 임금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었다고 한다.
창덕궁 세계유산
창덕궁은 <세계문화유산 및 자연 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1997년 12월 6일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세계유산'이란 세계적으로 뛰어나고 보편적 가치가 있어 인류전체를 위하여 보호하여야 할 문화유산을 말하는데, 경희궁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것을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그 가치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조선의 3대 임금인 태종5년(1405년)에 경복궁의 이궁(離宮, 궁성 밖에 마련된 임금의 거처)으로 건립한 창덕궁은 조선시대 정통적인 건축으로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한 건축과 조경의 예술적 가치가 뛰어나며 특히 왕궁의 정원인 후원(後苑)은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 정원으로 손꼽힌다.
↗ 권내각사, -> 인정전, -> 후원
궐내각사(闕內各司):
왕실과 직접 관련이 있는 여러 관청들이 궁궐안에 설치되었고, 이를 궐내각사(闕內各司)라 부른다. 그 가운데 정치를 보좌하는 홍문관(弘文館, 玉堂), 건강을 보살피는 내의원(內醫院, 藥房), 정신문화를 담당하는 규장각(奎章閣, 內閣), 왕의 칙령과 교서를 보관하던 예문관(藝文館) 등이 중심 시설이었다. 대부분의 건물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소멸되었다가 2005년에 복원되었다. 가운데 흐르는 금천을 경계와 경관 요소로 삼았고, 여러 관청들이 밀집되면서 미로와 같이 복잡하게 구성되었다.
내각
규장각 (奎章閣):
규장각은 조선 정조 즉위년(1776)에 설치한 왕실 도서관 입니다. 고종 32년(1895)에 규장원으로 고쳤다가 34년(1897)에 다시 규장각으로 불렀다. 역대 임금의 글이나 글씨, 고명(顧命), 유교(遺敎), 선보(璿譜), 보감(寶鑑) 따위와 어진(御眞)을 보관하고, 많은 책을 편찬, 인쇄, 반포하여 조선 후기의 문운(文運)을 불러일으키는 중심 역할을 하다가 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하였다.
운한문
검서청
조선 시대, 규장각에서 서책을 교정하거나 원본과 똑같이 베끼는 일을 맡아보던 검서관들이 사무를 보는 곳을 이르던 곳이다.
책고
정숙문
억석루(憶昔樓):
창덕궁 궐내각사 구역에 있는 내의원의 부속 건물, 약을 다루던 곳이다. 위치는 내의원보다 선원전 구역과 더 가깝다. 선원전 본채와 영의사 사이의 행각 서편에 있다. '억석(憶昔)' 뜻은 '옛날(昔)을 생각한다(億)'는 뜻이다. 영조는 내의원에다 신농(神農)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라고 하면서 '입심억석(入審憶昔)'이란 글자를 써서 하사했다고 한다. 신농은 중국 신화에 나오는 삼황오제 중 한 명으로, 다양한 풀들을 일일이 먹어가면서 약의 효능을 알아내고 이를 바탕으로 질병을 치료했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의약의 창시자로 추앙받았다. 즉, 신농을 생각하여 정성껏 약을 만들라는 의미이다.
만복문
양지당
조선 왕실의 어진과 진전
왕의 초상화를 모셨던 곳, 창덕궁 선원전
창덕궁 안에는 두 곳의 선원전이 있다. 하나는 이곳 구선원전이고 다른 하나는 후원 쪽에 자리한 신선원전이다. 두 선원전은 조선 국왕들의 초상화를 모셨던 곳으로 구선원전은 숙종 대부터 고종 대에 걸쳐 운영되며 어진 차례로 추가될 때 마다 증축되었고, 신선원전은 일제강점기인 1921년에 세워져 덕수궁에서 옮겨온 어전들이 봉안되었다. 구선원전 내부에는 각 임금의 어전을 위한 여러개의 감실이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 비어있다. 반면 신선원전에는 12개의 감실이 설립 당시 모습데로 남아있다. 국왕이 옮길 때마다 선원전의 어진들도 함께 옮겨 봉안되었기 때문에 고종 때에는 창덕궁과 경복궁, 경운궁(덕수궁) 세 궁궐에도 모두 선원전이 있었다.
선원전 일원
숭범문
인정문 방향
인정전
향실
인정전(仁政殿) 일원: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正殿)으로 신하들이 임금에게 문안도 하고 정사를 아뢰며 외국의 사신을 접견 등 중요한 의식을 행하던 곳이다. 앞쪽으로 임금이 다니던 길인 어도(御道)와 벼슬의 등급을 나타내는 품계석을 둔 조정 마당을 두어 국가의 상징 공간으로 삼고, 뒤편에는 인정전 뒷산인 매봉과 맥이 이어지도록 계단식 정원을 마련하였다. 조정 마당을 둘러싼 내행각에는 호위대 주둔소와 창고 등을 두었으나 현재는 비어있다. 인정문 앞 외행각의 사다리꼴 마당은 불규칙한 지형과 규칙적인 궁궐형식을 절묘하게 융합한 공간으로, 세종 때의 건축가 박자청이 설계한 것이다. 외행각과 진선문, 숙장문은 1996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인정전 임금님 용상
용상과 일월오악도:
인정전의 내부: 인정전 안에는 정면에 임금님의 용상이 있고 그 뒤에는 나무로 만든 곡병과 곡병 뒤에는 일월오악도(日月五岳圖)라는 병풍이 있다. 병풍에는 음양을 뜻하는 해와 달이 있으며 이는 다시 왕과 왕비를 상징한다. 그 아래 다섯 개의 산봉우리는 우리나라의 동,서,남,북,중앙의 다섯 산을 가리키며 이는 국토를 의미한다.이것은 임금이 중앙에서 사방을 다스리고, 음양의 이치에 따라 정치를 펼친다는 뜻을 담고 있기도 하다.그리고 주변에는 유리창을 비롯하여 전구나 커튼 등 서양 장신구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구한말 외국과의 수교 후 다양한 외래 문물이 들어 온 것이며, 1907년 순종이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한 후에 인정전의 실내바닥이 전돌에서 마루로 바뀌고, 전구가 설치되는 등 부분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참고로 5대궁 중에서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온 곳은 1887년 경복궁이다. - < 문화재청 >
용상 주위가 약간 서양식으로 된 것은 순종이 이 곳에 이어하면서 1907년 무렵 서양식 가구와 실내장식이 도입되고서 부터라고 한다.
선정전(宣政殿):
선정전은 궁궐의 편전(便殿:사무공간)으로서 왕이 고위직 신하들가 더불어 일상 업무를 보던 곳으로 지형에 맞추어 정전 동쪽에 세워졌다. 아침의 조정회의, 업무보고, 국정 세미나인 경연 등 각종 회의가 매일같이 열였다. 주위를 둘러싼 행각들은 비서실, 창고 등으로 이용되었으나 전체적으로 비좁았다. 선정전은 청기와를 올린 것과 앞쪽 선정문 까지 복도각 건물로 연결한 것이 특징이다. 선정전은 한 때 혼전(魂殿: 신주를 모시는 곳)으로 쓰였는데, 복도는 그때의 흔적이다.
선정전 임금님 용상
희정당(熙政堂):
희정당은 왕의 거처이며 집무실이다. 원래의 이름은 숭문당이었는데, 연산군 대에 희정당(熙政堂)으로 바꾸었다. 선정전이 종종 국장에 사용되면서 또 다른 집무실로 활용되었고, 왕의 침실로 쓰이기도 했다. 지금의 희정당은 1917년에 붙에 타 없어진 희정당을 복구하면서 경복궁 강녕전을 이전하여 건축한 것으로, 원래의 모습과 다르다. 앞쪽에는 자동차를 타고 내릴 수 있도록 현관이 마련되고, 내부에는 유리창과 전등, 근대적 화장실을 설치하고 유럽풍의 가구를 갖추었다.
희정당 내부
보춘정(報春亭):
창덕궁의 성정각(誠正閣)안의 누각으로, 성정(誠正)이란 말은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의 앞글자를 따온 것이다.
" 조화어약(調和御藥) 보호성궁(保護聖躳) "
임금의 약을 제조하여 임금의 몸을 보호한다. 허준이 이곳 상정각에서 내의원으로 일하였다고 한다. 1917년 창덕궁 화재로 순종황제께서 후원 영역에 있는 연경당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일제가 임의로 이곳 성정각을 내의원으로 상요하게 된 것이다.
희우루
후원 입구... & 창경궁 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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