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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구릅/일상들 ( life )

② 남한산성- ( 2025.09.07 )

by the road of wind 2025. 9. 10.

 남한산성

- ( 2025.09.07 )

 

남한산성에 오르면 서울, 성남, 하남의 전경과 벌봉, 남한산, 청량산, 검단산 등 산성 주변의 경치가 너무 아름답게 다가옵니다. 그러면서 성곽길을 걸을 때는 언제나 역사의 향기를 느끼게 됩니다. 산성은 적의 외침을 막기 위한 하나의 수단입니다. 그러므로 산성의 축조에서 부터  방어 시설의 배치 등 일정 면적을 폐곡선을 이루며 흘러가게 되는데, 그 성곽미가 아름답습니다. 우리나라의 산성 중에서도 북한산성, 남한산성, 강화산성 등 수도의 함락을 대비하여 왕이 피할 곳을 민들어 둔 곳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도 강대한 군대가 뒷받침 하지 않으면 언제나 함락은 시간 문제일 뿐이었습니다. 세계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적은 항상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를 엿보고 있으며, 빈틈없는 군대 양성과 임전 태세가 엄중하게 서 있어야 사전에 전쟁을 막을 수 있다는 교훈을 알 수 있습니다. 전쟁의 발생과 고난은 결국 자신의 책임인 것입니다. 

 

청량산 정상의 수어장대를 나서며...

 

수어장대와 수어청

" 한양 남쪽의 상비군, 수어청 "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의 서문과 남문 사이 가장 높은 지대에 위치한 지휘소 겸 적정 감시시설입니다. 특히 남한산성 방위의 총사령관이라 할 수 있는 수어사는 조선시대 군사제도인 5군영 제도 중 하나인 수어청의 수장이기도 합니다. 조선은 임진왜란을 겪으며 상비군의 필요성을 절감하느데요 . 그래서 전쟁 중에 설립된 기관이 훈련도감입니다. 훈련도감은 전쟁 중에 꼭 필요한 상비군을 훈련하고 유지하는 기관이었습니다. 이 훈련도감과 함께 4개의 지방 상비군이 설치되는데 그 중 남한산성에 설치된 군영이 바로 수어청입니다. 조선은 훈련도감 설치 이후 수도 한양을 방어할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는데 먼저 화기를 사용하는 총포군을 양성할 수 있는 어영청을 설치합니다. 다음으로 한양의 북쪽을 방어할 총융청을 설치합니다. 총융청의 본부는 북한산성이었고 한양에 적군이 진입하기 전 북한산성에서 격퇴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다음 설치된 곳이 바로 남한산성의 수어청입니다. 마지막으로 설치된 왕의 직할부대 개념의 금위영까지, 5군영 체제는 조선후기까지 어어지는 핵심 군사제도였습니다. 

↑ 수어장대 0.1km, -> 지화문1.1km.

 

남한산성 (사적 제57호):  

1 남한산성 행궁, 2 수어장대, 3 숭렬전, 4 청량당, 5 현절사, 6 침괘정, 7 연무관, 8 지수당, 9 장경사, 10 망월사, 11 개원사, 12 제1남옹성, 13 제2남옹성, 14 남문(지회문), 15 서문 (우익문), 16 연주봉옹성, 17 북문(전승문), 18 동문(좌익문), 19 장경사신지옹성, 20 동장대터, 21 봉암성, 22 벌봉   

남한산성은 조선시대 뿐 아니라 삼국시대부터 천연의 요새로 중요한 역할을 하던 곳이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의 욍성이었다는 기록이 있고, 나당전쟁이 한창이던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한산주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기록도 있다. 고려시대에는 몽고의 침입을 격퇴한 곳이기도 하고 일제강점기에는 항일운동의  거점이 되기고 한 곳이다. 그러나 남한산성은 주로 병자호란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조선 인조 14년(1636)에 청나라가 침략해 오자 왕은 이곳으로 피신하여 항전하였으나, 왕자들이 피신해 있던 강화도가 함락되고 패색이 짙어지자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 나가 치욕적인 항복을 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남한산성은 패배를 알지 못하는 곳이다. 성의 외부는 급경사를 이루어 적의 접근이 어렵고, 내부는 경사가 완만하여 넓은 경작지와 물을 갖춘 천혜의 전략적 요충이기 때문에, 병자호란 당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청군에 함락당하지 않고 47일간이나 항전할 수 있었던 곳이다. 이처럼 오랜 기간동안 우여곡절을 가진 성의 역사처럼 성곽의 형태 또한 단순하지 않아서 하나의 폐곡선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본성, 봉암성, 한봉성, 신남성과 5개의 옹성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조이다. 인조 4년(1636) 에 중앙부의 가장 큰 폐곡선인 본성이 완성되었고, 병자호란 이후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동쪽의 봉암성, 한봉성 등을 비롯하여 여러차례 증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 0.6km 우익문(서문), <- 1.3km 전승문(북문), -> 수어장대 0.3km, -> 지화문(남문) 1.6km  

1코스 남한산성 역사테마길,

현위치 수어장대 인근:


1코스 장수의길 <->, 2코스 국왕의 길 ↓, 5코스 산성의 길 <->

 

길과 길
남한산성 옛길

" 왕들의 능행길, 민간의 상업루트 "

남한산성이 위치한 지금의 성남시, 광주시, 하남시는 옛날 조선시대 행정구역으로 보면 모두 광주유수부의 관할지역이었습니다. 광주수유부는 남한산성의 군사요충지적 특성 때문에 매우 중요한 행정중심지였습니다. 또 남한산성은 왕의 이동과 관련이 깊은 곳입니다. 조선시대 왕들은 반드시 선대와들의 능에 성묘를 가야 했으며 왕들의 이런 성묘행사를 능행이라고 불렀습니다. 후대의 왕들이 영녕릉(英寧陵)에 참배를 하려 가려면 일 년에도 몇 차례씩 남한산성 옛길을 이용해 여주까지 가야했습니다. 남한산성 옛길의 또 다른 특징은 조선후기 상거래가 활발해지면서 필요해진 내륙의 유통망으로 민간에서 이용했던 상업루트였다는 점입니다. 많은 보부상들이 바로 남한산성 옛길을 통해 상업유통의 한축을 담담하게 됩니다. 이렇게 이용된 남한산성 옛길은 목적지인 경상북도 봉화의 이름을 따 통칭 봉화로라고 불렀습니다.   

 

 

국청사 터

서문 (우익문)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서문은 4개의 대문중 규모가 가장 작고, 산성을 처음 쌓았을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 3년(1799)에  다른 문과 같이 개축하며 우익문(右翼門)이라 칭하였다. 행궁을 중심으로 국왕은 남쪽을 바라보며 국정을 살피니, 서문이 행궁의 우측에 있어 우익문이라 하였다. 서문은 인조15년(1637) 1월 30일 왕이 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항복하기 위해 남한산성을 나간 바로 그 문이다. 남한산성의 서쪽 사면은 경사가 급해 물자수송이 어렵지만 광나루나 송파나루 방면에서 산성으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 0.6km 수어장대,  ↙ 0.1km 국청사, ↘ 전승문(북문) 1.0km, ↑ 학암동 1.4km
 

우익문(서문)



" 위상이 남다른 4개의 문 " 

남한산성에는 4개의 문이 있습니다. 한양의 4대문 처럼 남한산성의 4개문은 좌익문(左翼門: 동문), 우익문(右翼門: 서문), 지화문(至和門: 남문), 전승문(全勝門: 북문) 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한양 도성의 문 이름과 비슷하지요? 가장 크고 넓은 문이 지화문입니다. 지화문은 좌익문과 함께 남한산성의 핵심 도로인  봉화로에 설치된 성문입니다. 왕의 행렬, 마차와 수레, 여러 장사치들과 주민들이 드나들었던 지화문은 남한산성 옛길을 따라 좌익문과 이어지게 됩니다. 이 길은 남한산성 옛길의 가장 핵심적인 루트입니다. 남한산성 옛길은 산성 로터리를 중심으로 북문, 서문, 남문을 일주하는 노선을 따라 이루어져 있습니다.

감이동  1.9km

감이동 - 성불사, 청운사 - 왕행길 - 현위치, 우익문(서문) -전승문(북문) / 지화문(남문).
서문노선 2.1km     

 

서문 전망대

 

서울 송파, 강남 지역

 

중간 아차산, 그리고 오른쪽의 구리시, 남양주시 방향  

 

 

서문 곁 국청사  

남한산성 국청사 연혁  

본 도장은 조선인조3년(서기1625년) 각성대사에 의하여 창건되었다. 각성대사는 인조대왕으로 부터 팔도총섭총절제중군주장으로 임명을 받은 후 전국팔도에서 승군을 모아 남한산에 성을 축성하시고 9개사찰을 창건하시었다. 병자호란으로 인한 수모를 또 다시 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승군을 훈련하고 군기며 화약, 군량미를 비축하였으니 그 중 하나인 국청사이다. 선사의 유시로 국난에 대비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든바, 일제침략시 일본군에 의하여 방화소진되었던 것을 서기 1968년 중건되었으나 서기 1986년 불자 최계순(불명, 원만행)께서 부지 1,003평(대웅전 요사채)를 기증 하시었으며, 이 모든 것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 국태민안 광도중생을 기원하기 위하여 현주지 선걸 스님께서 삼성각 요사채를 신축하시고 서기 1998년 대웅전을 중건중수 하시었다. 본 도장의 삼존불은 신라 헌안왕 3년(서가 859년) 강원도 철원 보개산 심원사에 조성 봉안하였던 천불 중 서기 1393년 심원사 화재와 임진왜란 때 소실 도난 되었던 바 그 중 삼존불중 한분만 본도장 국청사에 모시었다. 불기 2543년 4월, 서기 1999년 5월. 대한불교조계종 국청사   

 

북문(전승문) 가는 길

하남 방향

 

도시

한양 다음으로 큰 완전한 소비도시, 산성리 "

조선시대 한양은 20만 명이 넘는 인구를 가진 도시였습니다. 18세기 후반 산업혁명 시기 영국 런던의 인구가 5만 명이었다는 사실에 비교해 보면 가히 한양의 인구규모를 짐작할 만 합니다. 남한산성 옛길이 위치한 산성리 지역은 한양에 인접한 소비도시 였는데  토박이 주민의 제보에 따르면 산성내 주민들이 주변 마을 사람들을 촌놈 취급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을 정도 입니다. 1627년 (인조6년) 광주부 읍치(邑治: 행정중심지)를 산성 내부로 옮기면서 산성리 인구는 폭증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1895년 조선총독부에 의한 행정구획 통폐합까지 일어나 중심지로서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면서 그 규모가 서서히 줄어들게 됩니다. 일제에 의해 산성 내에 위치하고 있던 광주군청이 경안 등으로 이전하게 되면서 군사도시, 행정도시의 위용은 완전히 사라지고, 근대화 시기로 접어들며 주요 도로가 남한산성을 제외한 채 건설됩니다. 이후 한강 이남에서 가장 번성했던 지역 중 하나였던 남한산성은 한적한 마을로 점차 변화하여 잠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됩니다.

 

하남시 고골 지역

 

 고골:  하남의 지형은 낮은 야산과 구릉지대가 펼쳐져 있고, 북쪽으로 흐르는 한강에는 망월천, 덕풍천,산곡천 같은 작은 샛강이 흘러 들어가며 강줄기의 옆에는 평야가 형성되어 있어서 B.C 4000여년 전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였으며, 수로를 이용한 타 지역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여 문화가 융성했던 지역이다. 또한 남쪽으론 남한산, 동쪽은 검단산, 북쪽으론 한강이 흘러 군사의 요충지로서 더할 나위 없이 좋아 백제의 시조인 온조께서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470여 년간 한성백제의 수도로 위상을 떨치던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한수의 쟁패를 놓고 삼국이 각축을 벌이던 역사의 현장 이기도 하다. 고려시대에 접어들어선 후삼국을 통일하고 태조의 개국을 도와 새로운 나라의 기틀을 조성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광주의 대호족 왕규가 세거를 이루었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종때(983년)에 이르러서는 지방통제를 위한 지방관제를 실시하여 지방행정상 요지에 12목(광주,양주,충주,청주,공주,진주,상주,전주,나주,송주,해주,황주)을 설치하였는데 광주도 12목의 하나로서 읍치가 바로 하남의 춘궁동(고골) 이었다. - ( 하남시 )   

 고골 지역에 들어서는 하남교산 신도시:
 
- 위치: 경기도 하남시 천현동, 항동, 하사창동 교산동, 상사창동, 춘궁동, 덕풍동, 창우동, 신장동 일원
- 면적:  6,314,121㎡ (1,910천평),
- 사업시행기간: 2019년 ~ 2028년
- 인구및 주택계획:  주택 33,000호, 인구 78,000인.  

남한산성 능선 상의 검암산

 

경기 하남시 전경

 

 

나무를 지키는 금림조합

" 남한산성의 귀중한 숲을 지켜 후손에게 "

남한산성의 산림은 매우 잘 보존되어온 아름다운 생태유산입니다. 이는 오래전부터 산성 내의 숲을 보호하고자 하는 산성 주민들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는데요, 일반적으로 근대화 이전의 생활연료는 나무였기에 20세기 초반 대부분 산들은 나무가 없는 민둥산이 도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나 산성 안의 나무들은 예외였는데, 마을 주민들이 '금림조합'을 만들어 순산원을 두고 도벌을 막아 보호한 덕택에 지금처럼 건강하게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금림조합은 남한산성의 숲을 보호하기 위해 산감(山監: 산림 감시원) 50명을 선출하여 매일 6명 씩 교대로 산림을 감시토록 하였습니다. 산감은 극빈자 계층에서 선발하였기 때문에 숲을 보호하는 것과 동시에 취약계층의 구제에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남한산성 금림조합의 노력은 이후 2016년까지 90년에 가깝게 지속되어 왔으며, 덕분에 남한산성은 귀중한 생태문화자원을 잘 보존하여 후손에게 전할 수 있게 되었답니다. 

<- 전승문 300m, -> 우익문 700m.
  

북문(전승문)

 

전승문 (북문):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북문은 병자호란 당시 성문을 열고 나가 기습공격을 감행했던 문이다.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에서 '전승문'이라고도 하였다. 당시 영의정 김류의 주장에 의해 군사 300여명이 북문을 열고나가 청나라 군을 공격하였으나, 적의 계략에 빠져 전멸하고 말았다. 이를 '법화골 전투';라고 하는데,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있었던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였다. 정조3년(1779) 성곽을 개보수할 때 성문을 개축하고 이름을 붙여 전승문(全勝門)이라 한 것은 그 때의 패전을 잊지말자는 뜻이었을 것이다. 선조 때의 기록을 보면 산성 내에 동문과 남문, 수구문의 3개의 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북문은 인조2년(1624)에 신축된 성문이라고 생각된다.

 

백송 & 송림정

 

<- 2.9km 지화문(남문), <- 0.1km 전승문(북문), -> 숭렬전 0.35km, -> 국청사 800m

 

침괘정

 

침괘정에서 바라보는 종로 로터리, 천흥사 동종, 남문 주차장 방향

 
※ 남한산성 공용 주차장


 남한산성 남문 주차장, 남한산성 로터리 주차장, 남한산성 중앙주차장, 세계유산센터주차장.

 주차장 이용요금 (후불):   

이륜차, 1000cc 미만 승용차 ( * 스파크, 레이, 모닝 등 ):  평일 1,500원, 공휴일 2,500원, 월정기료: 25,000원.
100cc이상 승용차. 소형 승합차(15인승 이하), 소형화물차(1톤이하):  종일요금 적용, 평일 3,000원, 주말 및 공휴일 5,000원, 월정기료: 50,000원.
중.대형 승합차, 화물차 (공휴일은 주차불가):  평일 6,000원, 공휴일 10,000원.

오전 9시 ~ 오후 6시까지:  유료 운영. 그 외 시간: 무료.
* 30분 이내 출차:  무료.

남한산성 주차장 감면규정;

- 무료: 국빈 및 외교사절단과 그 수행자/ 공무수행 출입자/ 국가유동자 등/ 한복 등 전통의상 착용자/ 군인 / 3자녀 (다자녀카드와 신분증 제시. 운전자가 직계가족인 경우) / 친환경자동차 /  저공해 자동차 등
주차사용료 50% 감면: 18세 미만 아동인 자녀 2명 이상 가족/ 성실납세자 선정된자. 남한산성 상가 중 주민자치평가위원회 선정 상가 이용객. 

 

보호수 느티나무 

 

침괘정...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호

침괘정은 무기제작소라 알려져 왔으나 온돌과 마루방, 화랑처럼 된 툇마루 등 건물 구조로 보아 집무실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최초의 건립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주변에 있던 무기창고를 명나라 사신 정룡이 '총용무고'라 이름 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 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영조 27년(1751) 광주유수 이기진이 고쳐 짓고 '枕戈亭'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침과정'을 침괘정'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명확하지 않다. 무기 제작소와 무기창고는 침괘정 부근에 별도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화관(人和館):   

남한산성 행궁 동쪽에 위치한 인화관은 사신 등 손님들이 머무는 객관(客館)이었다. 한양에 계신 왕을 위해 매월 2차례 예를 올리기도 하고, 중앙에서 관리가 오면 묵을수 있는 용도라고 한다. 인화관은 인조 2년(1624)에 세운 것을 순조 29년(1829)에 수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뒤 빈터만 남은 것을 새롭게 복원을 추진하여 2015년에 완공되었다. 

 

행궁 매표소 & 한남루

 

 행궁 매표소

  관람안내:

하절기: 04월~10월:  10:00 ~ 18:00,  동절기: 11월~03월:  10:00 ~ 17:00
 
* 매주 월요일은 휴궁일입니다. (공휴일 제외)
* 종료 30분 전까지 매표가능. 

▶  남한산성 행궁 입장료

개인:  성인(만19세~만64세)  2,000원, 청소년(만7세~만18세) 1,000원
- 단체:  성인(만19세~만64세)  1,600원, 청소년(만7세~만18세)    800원
  * 단체 30인 이상.

  관람료 무료 대상자:

1. 경기도민 (신분증 필수)
2. 만 6세 이하, 만 65세 이상 노인 (외국인 제외)
3.. 장애인(1~3급 동반 보호자 1인 포함)
3. 독립운동자, 국가유공자, 5.18민주유공자, 특수임무 수행자 및 그 유족
5. 고엽제 후유증 환자 및 고엽제후유증 2세
6. 한복을 착용한 사람
7. 군복을 입은 현역 군인
8. 학생 인솔 등 교육활동으로 입장하는 초,중,고 교원
9. 그 밖에 도지사가 인정하는 자.

※ 상시 해설안내:  ( 성수기 04월 ~ 06월, 09월~10월, 비수기 11월 ~ 03월, 07월~08월 )

1회:  성수기 평일 ---,       휴일(공휴일) 10:00 / 비수기 평일 --- ,     휴일(공휴일) ---
2회:  성수기 평일 11:00,  휴일(공휴일) 11:00 / 비수기 평일 11:00 , 휴일(공휴일) 11:00.
3회:  성수기 평일 ---,       휴일(공휴일) 13:00 / 비수기 평일 --- ,       휴일(공휴일) 13:00.
4회:  성수기 평일 13:00, 휴일(공휴일) ---         / 비수기 평일 --- ,     휴일(공휴일) ---.
5회:  성수기 평일 14:00, 휴일(공휴일) 14:00 / 비수기 평일 14:00 ,  휴일(공휴일) 14:00.
6회:  성수기 평일 ---,      휴일(공휴일) 15:00 / 비수기 평일 --- ,        휴일(공휴일) 15:00.
7회:  성수기 평일 16:00, 휴일(공휴일) 16:00  / 비수기 평일 --- ,      휴일(공휴일) ---.
 

남한산성 행궁

행궁(行宮)이란 임금이 서울의 궁궐을 떠나 행차하면 임시로 머무는 곳을 말한다. 남한산성 행궁은 전쟁이나 내란 등 유사시에 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하여 종묘사직을 갖춘 전국 유일의 행궁으로 건립되었으며, '광주행궁' 또는 '남한산성 행궁'이라 불렀다. 산성을 가로지르는 길에서는 볼 수 없도록 낮은 언덕에 가려진 곳에 자리를 잡은 남한산성 행궁은 지형의 높낮이에 의해 상궐과 하궐로 구분한다. 상궐은 내행전으로 1625년에 준공한 70여칸의 건물이며, 서쪽 담에 문이 있어 좌승당으로 통하였다. 하궐은 외행전으로서 154칸 규모로 상궐과 동시에 지었고, 상궐 삼문 밖에 있으며, 서쪽 담의 문으로는 일장각과 통한다. 남한산성 행궁이 지어지고 10년 후인 인조14년(1636년)에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47일간 항전하였다. 전쟁 중 청군이 쏜 대포의 탄환이 외행전 기둥에 맞기도 하였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남한산성 행궁에는 숙종.영조.정조.철종. 고종 등이 여주 영릉과 서울 현릉.인릉으로의 능행길에 머물렀다. 제 역할을 다하던 남한산성 행궁은 한일신협약(1907년) 이후 일제에 의해 훼손되었다. 오가는 사람없이 방치된 채로 남아있던 몇몇 건물들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인해 완전히 멸실되었다. 그 후 1999년에 와서야 남한산성 행궁 터는 1차 발굴 조사를 시작으로 2002년에 상궐 복원 공사를 완료하였다. 2004년에는 하궐지의 발굴 조사와 좌전의 복원 공사를 완료하였고, 2012년에 하궐 복원공사를 완료하였다. 2014년 남한산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과정에서, 남한산성 행궁은 남한산성의 통치경관으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조선 정조 때 유수 홍억에 의해 지어진 한남루의 주련에는 아래와 같은 글귀가 적혀있다.

"....비록 원수를 갚아 부끄러움을 씻지 못할지라도 / 縱未能復讐雪恥 (종미능복수설치)    
항상 그 아픔을 참고 원통한 생각을 잊지 말지어다 / 恒存着忍痛含寃 (항존착인통항원) "
 

남한산성 행궁 한남루:

 

한남루는 정조22년(1798) 광주유수 홍억이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세운 2층 누문이다. 원래 궁궐의 제도는 삼문(三門)이라 하여 정전까지 3개의 문을 거쳐 들어가는 것인데, 마침내 한남류를 세우면서 그 법도가 완성되었다. 한남루는 한강 남쪽에 있는 성으로 들어가는 누문이라는 의미이다. 정면과 후면에 있는 8개의 기둥에 주련(柱聯, 기둥이나 벽에 장식으로 써서 붙이는 글귀) 이 걸려있다. 

사진: 한남루 (1892~1893)


한남루 주련의 글씨

 

< 한남루 정면 >


守一城講龍虎韜(수일 성강용 호도)  - 한성을 지킴에 용호(龍虎)의 도략(韜略)을 강(講)하고,
鎭百里閱貔貅士(진백리 열비 휴사)  - 백리(百里)를 누르니 범 같은 용사를 훑어 보도다.
大將軍御下威信(대장군 어하 위신)  - 대장군은 아랫사람을 위엄과 신의로 다스리고,
養刺史宣上恩德(양자 사선상 은덕)  - 좋은 원님은 임금님의 은덕을 선양하네.

 

< 한남루 후면 >


是地兼繭絲保障(시지 사선 상보장)  - 이 땅은 길쌈과 보장을 겸하지만
暇日則雅歌投壺(가일 칙아가 투호)  - 한가한 날에는 노래하며 투호하기도 한다네.
縱未能復讐雪耻(종미능 복수 설치)  - 비록 원수를 갚아 부끄러움을 씻지 못할지라도
恒存着忍痛含寃(항존 착인 통 함원)  - 항상 아픔을  참고 원통한 생각을 잊지 말지니라. 

 * 한남루 주련은 서예가 정도준 선생의 글끼를 받아,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40호 서각장 이규남 선생이 제작한 것으로 <重訂漢南誌 중정한남지> 헌종 13년(1847년)에 홍경모가 편찬한 경기도 광주군 광주읍지로 <규장각본>, <장서각본>이 있다.    

 

남한산성 종각의 천흥사의 동종..

종각은 아침과 저녁 일정한 시각에 종을 치던 곳으로 조선 시대 때 주요한 지방에는 시내 한가운데 종을 매달아두고 쳤다. 남한산성 종각에는 천흥사 동종이 있었는데, 남한산성으로 언제 옮겼는지 알 수 없다. 천흥사 동종 몸체에 새겨진 글귀에 따르면 고려 현종1년(1010)에 주조된 것으로 원래는 태조4년(921)에 태조가 창건한 충청남도 천안시 성거읍 천흥리 천흥사에 있었다. 이 도옹은 고려시대의 동종을 대표할 수 있는 우수한 작품으로 높이 170cm, 입지름 100cm의 크기이다. 천흥사 동종은 일제강점기 이왕가박물관으로 옮겨졌다가 해방이후 덕수궁 미술관을 거쳐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남한산성 종각의 종은 2012년에 원형의 문양 및 형태를 그대로 재현하되 타종시 종 울림을 좋게 하기 위해 약 3배 정도 더 크게 제작한 것이다. 남한산성 종각은 세계유산 남한산성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 중 하나인 통치경관(읍치요소)에 해당한다.         

* 참고: 천흥사 동종 몸체에 세겨진 명문 ‘ 聖居山天興寺銅鐘總和二十八年庚戌二月日_(성거산 천흥사 동종 총화 이십팔년 경술이월일)’ 에 따르면 고려 현종1년(1010)에 주조된 것 으로 원래는 태조4년(921)에 태조가 창건한 충청남도 천안시 성거읍 천흥리 천흥사에 있었다고 한다.

 

 

종로 로터리


남한산성 내의 기준점 "

남한산성 안에는 핵심 간선 도로망이있던 봉화로가 남문과 동문을 통해 이어져 있으며, 남한산성  중심지에서 한양도성의 동쪽(현재 하남시)과 남쪽 (송파, 마천)으로 바로 이어지는 중요 노선들이 한 점을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산성 로터리입니다. 남한산성에서 동으로 몇리, 남으로 몇리 이렇게 이렇게 거리를 측정하는 것도 바로 이 로터리를 기준으로 정하게 됩니다. 행궁의 바로 옆에 위치한 일종의 랜드마크와도 같아서 이곳을 왕래하는 주민들의 심리적 중심적 역할을 합니다. 남한산성 내에 위치한 마을이 산성리인데, 산성리 주민들은 로터리에서 우(북 또는 서)로 얼마를 가면 행궁이 있고 아래(동 또는 남)로 얼마를 가면 관아가 있고 방앗간이 있고 장터가 있다는 식으로 심리적 위치를 정하곤 합니다. 주민들 뿐만 아니라  남한산성을 찾는 많은 시민들은 지금도 남한산성 안에서 특정 지점을 말할 때 이 로터리를 기준으로 이여기를 하곤 합니다. 

<- 지화문 700m,  전승문 400m ->

 

세계유산남한산성 탐방 안내도

 

남한산성 버스 정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