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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구릅/일상들 ( life )

①-b 창덕궁, 창경궁- ( 2026.03.19 )

by the road of wind 2026. 3. 24.

①-b 창덕궁, 창경궁

- ( 2026.03.19 )

 

《  창덕궁  》

 

진선문(進善門):  

진선이란 임금께 바른말을 올린다는 뜻이다. 임금이 계시는 정전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므로 올바른 정치를 기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영조 때엔 이곳에 신문고가 설치되어 있었다. 신문고는 커다란 북으로,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한 백성이 신문고를 두드려 임금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인정문 &  숙장문

 

호위청

 

인정문

 

창덕궁의 정궁, 인정전

 

인정전(仁政殿):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正殿)으로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앞쪽으로 의식을 치르는 마당인 조정(朝廷)이 펼쳐져 있고, 뒷쪽으로는 북한산의 응봉으로 이어져 있다. 2단의 월대 위에 웅장한 중층 궁궐전각으로 세워져 당당해 보이는데, 월대의 높이가 낮고 난간도 달지 않아 경복궁의 근정전에 비하면 소박한 모습이다. 인정전은 겉보기에는 2층이지만 실제로는 통층 건물로 화려하고 높은 천장을 볼 수 있다. 바닥에는 원래 흙을 구워 만든 전돌이 깔려 있었으나, 지금은 마루로 되어있다. 전등, 커튼, 유리 창문 등과 함께 1908년에 서양식으로 개조한 것이다. 인정문 밖 외행각(外行閣)에는 호위청과 상서원 등 여러 관청들을 두었다. 1405년(태종5)에 창덕궁 창건과 함께 건립되었으나 1418년(태종18) 박자청에 의해 다시 지어졌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10년(광해2)에 재건, 1803년(순조 3)에 소실된 것을 이듬해에 복원해 현재에 이른다. 외행각 일원은 1991년 이후에 복원했다.

 

인정전 임금님 용상  

용상과 일월오악도:

인정전의 내부: 인정전 안에는 정면에 임금님의 용상이 있고 그 뒤에는 나무로 만든 곡병과 곡병 뒤에는 일월오악도(日月五岳圖)라는 병풍이 있다. 병풍에는 음양을 뜻하는 해와 달이 있으며 이는 다시 왕과 왕비를 상징한다. 그 아래 다섯 개의 산봉우리는 우리나라의 동,서,남,북,중앙의 다섯 산을 가리키며 이는 국토를 의미한다.이것은 임금이 중앙에서 사방을 다스리고, 음양의 이치에 따라 정치를 펼친다는 뜻을 담고 있기도 하다.그리고 주변에는 유리창을 비롯하여 전구나 커튼 등 서양 장신구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구한말 외국과의 수교 후 다양한 외래 문물이 들어 온 것이며, 1907년 순종이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한 후에 인정전의 실내바닥이 전돌에서 마루로 바뀌고, 전구가 설치되는 등 부분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참고로 5대궁 중에서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온 곳은 1887년 경복궁이다.   - < 문화재청 >

용상 주위가 약간 서양식으로 된 것은 순종이 이 곳에 이어하면서 1907년 무렵 서양식 가구와 실내장식이 도입되고서 부터라고 한다.

 

 

선정문....

 

선정전(宣政殿):  

선정전은 궁궐의 편전(便殿:사무공간)으로서 왕이 고위직 신하들가 더불어 일상 업무를 보던 곳으로 지형에 맞추어 정전 동쪽에 세워졌다. 아침의 조정회의, 업무보고, 국정 세미나인 경연 등 각종 회의가 매일같이 열였다. 주위를 둘러싼 행각들은 비서실, 창고 등으로 이용되었으나 전체적으로 비좁았다. 선정전은 청기와를 올린 것과 앞쪽 선정문 까지 복도각 건물로 연결한 것이 특징이다. 선정전은 한 때 혼전(魂殿: 신주를 모시는 곳)으로 쓰였는데, 복도는 그때의 흔적이다.   

 

선정전

 

선정전 어좌

 

남색의 선정전

 

경훈각

 

선평문....대조전과 희정당 사이의 출입문

 

대조전


대조전(大造殿) 일원  

대조전은 창덕궁의 침전이자 생활공간이다. 대청을 사이에 두고 양옆으로 왕과 왕비의 온돌방이 있다. 대조전 오른쪽에 있는 흥복헌(興福軒)은 1910년 마지막 *어전 회의가 열려 경술국치가 결정된 비운의 장소이다. 대조전 전체 지역은 여러 부속 건물들이 **행각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뒤뜰에 조성된 ***화계에는 아름다운 굴뚝이 세워져 있다. 현재의 대조잔은 1917년 일어난 화재로 이전의 대조전이 불타 없어지자 그 터에 경복궁 침전이었던 교태전을 옮겨 지은 것으로 마지막 왕과 왕비가 살았던 1920년대의 모습이 비교적 잘 남아있다.

어전회의: 중요한 국사를 다루기 위하여 임금 앞에서 중신들이 하는 회의.
** 행각: 궁궐, 절 따위의 정당(正堂) 앞이나 좌우에 지은 줄행랑.
*** 화계: 돌과 흙으로 층계를 만들어 꽃이나 나무를 심어 놓은 계단식 화단.

 

신식 가구들  

대조전은 왕비가 거처하는 내전 중 가장 으뜸가는 건물이다. 이 건물에서 조선 제9대 왕인 성종을 비롯하여 인조·효종이 죽었고, 순조의 세자로 뒤에 왕으로 추존된 익종이 태어나기도 하였다. 조선 태종 5년(1405)에 지었는데 임진왜란 때를 비롯하여 그 뒤로도 여러 차례 불이 나서 다시 지었다. 1917년 또 화재를 당하여 불에 탄 것을 1920년에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고 그 부재로 이곳에 옮겨지어 ‘대조전’이란 현판을 걸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차례에 걸쳐 다시 지었기 때문에, 건물 자체는 물론 주변의 부속 건물들도 많은 변화를 거쳤다. 대조전은 현재 36칸으로 앞면 9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건물 가운데 3칸은 거실로 삼았으며, 거실의 동·서쪽으로 왕과 왕비의 침실을 두었다. 각 침실의 옆면과 뒷면에는 작은 방을 두어 시중 드는 사람들의 처소로 삼았다. 건물 안쪽에는 서양식 쪽마루와 유리창, 가구 등을 구비하여 현대적인 실내 장식을 보이고 있다.  - <문화재청>

 

희정당

 

희정당(熙政堂):   

희정당은 왕의 거처이며 집무실이다. 원래의 이름은 숭문당이었는데, 연산군 대에 희정당(熙政堂)으로 바꾸었다. 선정전이 종종 국장에 사용되면서 또 다른 집무실로 활용되었고, 왕의 침실로 쓰이기도 했다. 지금의 희정당은 1917년에 붙에 타 없어진 희정당을  복구하면서 경복궁 강녕전을 이전하여 건축한 것으로, 원래의 모습과 다르다. 앞쪽에는 자동차를 타고 내릴 수 있도록 현관이 마련되고, 내부에는 유리창과 전등, 근대적 화장실을 설치하고 유럽풍의 가구를 갖추었다.  

" 조화어약(調和御藥) 보호성궁(保護聖躳) "  


임금의 약을 제조하여 임금의 몸을 보호한다. 허준이 이곳 상정각에서 내의원으로 일하였다고 한다. 1917년 창덕궁 화재로 순종황제께서 후원 영역에 있는 연경당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일제가 임의로 이곳 성정각을 내의원으로 상요하게 된 것이다.

 

보춘정(報春亭):


창덕궁의 성정각(誠正閣)안의 누각으로, 성정(誠正)이란 말은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의 앞글자를 따온 것이다.
 

희우루

 

집희

 

관물헌(觀物軒)...성정각 뒤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집희(缉熙)'라는 편액은 고종이 12-13세에 쓴 것이라 한다. 

 

후원(비원) 가는 출입문

 

 

 

낙선재 일원:

 

낙선제 일원:

낙선재는 1847년에 지어진 창덕궁의 건물이다. 본래 이름은 낙선당이었으며, 창경궁에 속해 있었다. 정면 6칸, 측면 2칸의 단층 건물이다. 2012년 국보 제1759호로 지정되었다. 고종 황제도 이곳에서 지낸 바 있으며, 1917년 창덕궁에 큰 불이 났을 때 순종 황제도 내전 대신 낙선재에 머물렀다. 이곳은 황족들이 마지막을 보낸 곳으로 유명하다. 낙선재 일원은 창덕궁 영역의 생활공간으로 낙선재, 석복현, 수강제가 하나로 영역을 이루고 있다.

* 조선의 마지막 왕비 순정효황후- 1906년 13세의 나이에 동궁의 계비로 책정되었다, 1907년 순종이 황제에 오르자 황후가 된 분이다. 6.25사변 때 피신을 못하고 낙선재에 있었지만 미굼의 도움으로 부산에 피신할 수 있었다. 전쟁후 이승만 정권의 거부로 낙선재로 돌아오지 못하고 정릉 수인재에서 기거하다 1960년 석복현으로 환궁하였다.

* 영왕비 이방자 여사- 1963년 귀국하여 1989년 까지 낙선재에 기거하였다.

* 비운의 덕혜옹주 - 1912년 고종과 복영당 양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7년 환적에 입적함. 1919년 공종 서거. 1921년 복녕당 아가씨로 부르다 덕혜라는 호를 받음. 1925년 강제로 일본에 끌려가 학습원 입학함. 1931년 대마도 도주 후예인 백작 소오 다케유키와 정결혼 함. 이듬해 딸 마사에 출산, 병세 악화. 1955년 이혼. 외동딸 마사에(정혜) 결혼 실패 및 일본 남알프스 실종. 이승만 정부 반대로 환국 좌절. 박정희 대통령의 배려로 1962년 실어증 등 병든 몸으로 78세에 귀국. 1989년 78세로 수강제에서 비극적인 삶 마감함.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