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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구릅/나의 산행

남한산성- ( 2026.05.22 )

by the road of wind 2026. 5. 22.

남한산성

- ( 2026.05.22 )

 

오랜만에 남한산성을 가보았습니다. 그동안 내 감기에다, 집사람 핀 제거 수술 치료로 병원 같이 다니느라 조금도 짬을 낼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오늘은 오후에 집에서 가깝고, 시내버스 타고 갈 수 있는 남한산성을 가보게 되었습니다. 어느덧 봄이 다 가버리고 곧 여름이 되려는데, 날씨도 한 여름같은 날씨로 약간 더웠습니다. 그렇지만 30도를 넘어서는 찜통 더위가 곧 올 터인데, 26도 정도 날씨는 감지덕지입니다. 오늘 나는 남한산성 산책 코스의 가장 기본적인 < 남문 - 수어장대 - 서문 - 북문 -  종로로터리 > 코스로 걸어보았습니다.  

 

 남한산성(南漢山城):  조선시대(1392~1910)에 유사시를 대비하여 임시 수도로서 역할을 담당하도록 경기도(京畿道) 광주시(廣州市)·성남시(城南市)·하남시(河南市) 일원의 해발 480m가 넘는 험준한 지형을 따라 건설된 산성이다. 남한산성의 초기 유적에는 7세기의 것들도 있지만 이후 수차례 축성되었다. 후금(後金)의 위협을 받고 이괄(李适)의 난을 겪은 인조는 1624년 총융사 이서(李曙, 1580∼1637)에게 산성의 축성을 명령하여, 2년 뒤에 둘레 6,297보, 여장(女墻) 1,897개, 옹성(甕城) 3개, 성랑(城廊) 115개, 문 4곳, 암문(暗門) 16곳, 우물 80곳, 샘 45곳 등을 설치하고서 광주읍의 치소(治所)를 산성 안으로 옮겼다. 축성 공사에는 각성(覺性)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삼아 전국 8도의 승군을 동원하였는데, 승군의 사역과 보호를 위하여 현재 남아 있는 장경사(長慶寺)를 비롯한 7곳의 사찰을 새로 건립하기도 하였다. 남한산성은 건립된 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성곽 안에는 많은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둘레의 길이는 약 8㎞ 정도이며, 면적도  약 528,460㎡ 에 달한다. 2014.6.22 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산   행 : 걸음수 7,041 steps, 거리 4.25 km, 소모열량 375 kcal, 소요시간 01:16 hrs, 속도 3.3 km/h, 기온 27℃. 

 코   스 :  남문 정류장 (9번버스) -  남문(지화문) -  수어장대 (청량산: 483m) - 서문(우익문) - 북문(전승문) - 종로 로터리.

 

 

( 2025.09.07 사진 ) 8호선 산성역 2번 출구 앞 '산성역.포레스티아 동문' 버스 정류장    


 남한산성 가는 버스:  

9번: < 사동종점 - 남한산성 입구 - 중앙주차장 >, 배차간격: 10-20분.
9-1번 (휴일): <산성역.포레스티아동문 - 남한산성도립공원>, 배차간격: 7-10분.
53번 (주말): <남위례역- 남문터널>, 배차간격: 35-45분.
52번: < 성남동대형주차장- 남한산성도립공원>, 배차간격: 90-100분. 

 

남문 터널 방향

 

남한산성 비석군

   
남한산성 비석은 역대 광주유수, 수어사, 부윤, 군수들의 선정* 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비의 앞면에는 비석명, 뒷면에는 건립시기 및 관련자에 대한 내용이 새겨져 있다. 이곳 비석들의 원위치는 남한산성 행궁 주변이었다. 남한산성 행궁 복원 사업으로 현 자리로 옮겼으며, 이 비들을 통해 세계유산 남한산성 통치경관의 한 요소를 엿볼 수 있다. 

선정: 백성을 바르고 어질게 다스림.

1. 흥선대원군영세불망비 (1863),   2. 전 군참사 이용식 거사비 (1932),  
3. 전 군수 강원달 영세불망비 (1911-1915),  4. 겸유수 수어사 민치구 영세불망비 (1868),  
5. 유수겸 수어사 홍학연 선정비 (1850),  6. 부윤 서리 양주군수 홍태윤 영세불망비 (1985)
7. 유수겸 수어사 심상규 거사비 (1818),  8. 유수겸 수어사 김이채  거사비 (1835)
9. 수어사 이조원 거사비 (1816), 10. 유수 겸 수어사 남병철 영세불망비 (1863)
11. 유수 겸 수어사 정기선 거사비 (1836), 12.  유수 겸 수어사 정기선 거사비 (1836)
13.  유수 겸 수어사 김교근 선정비 (1841), 14. 흥선 대원군 영세불망비 (1864)
15.  유수 겸 수어사 박희수 영세불망비 (1860), 16. 유수 겸 수어사 조경호 영세불망비 (1884)
17. 유수 겸 수어사 남정손 영세불망비 (1885), 18. 유수 겸 수어사 김윤식 영세불망비 (1888)
19. 유수 겸 수어사 민영소 영세불망비 (1891), 20. 유수 겸 수어사 박기수 선정비 (1837)
21. 유수 겸 수어사 서희순 선정비 (1846), 22. 유수 겸 수어사 조두순 선정비 (1851)
23. 유수 겸 수어사 이지연 거사비 (1829), 24. 유수 겸 수어사 이지연 거사비 (1829)
25. 유수 겸 수어사 이지연 거사비 (1829), 26. 부윤 김수홍 영세불망비 (1705)
27. 부윤 정지선 선정비 (1707), 28. 부윤 박태순 선정비 (1705), 29. 부윤 이제 선정비 (1705)
30. 유수 겸 수어사 조석우 영세불망비 (1873)

 

세계유산 남한산성 종합안내판

1코스: 산성로터리- 북문- 서문- 수어장대- 영춘정- 남문- 산성로타리 ( 3.8km, 1시간 20분 )
2코스산성로터리- 영월정- 숭렬전- 수어장대- 서문- 국청사- 산성로타리 ( 2.9km, 1시간 )
3코스남한산성 역사관주차장- 현절사- 벌봉- 장경사- 망월사- 지수당-  남한산성 역사관주차장 ( 5.7km, 2시간 )
4코스산성로터리- 남문- 남장대터- 동문- 지수당- 개원사- 산성로타리 ( 3.8km, 1시간 20분 )
5코스남한산성 역사관주차장- 동문- 동장대터- 북문- 서문- 수어장대- 영춘정- 남문- 동문 ( 7.7km, 3시간 20분 )

 

선정비, 불망비 등

 

남문(지화문)

 

지화문 (至和門):

정조3년 성곽을 보수 할 때 '지하문'이라 칭하였고 남한산성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이다.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다. 또한 현재는 성남으로 통하는 관문역할을 하고 있으며, 성문앞에 식재된 (350년 수령, 성남시 보호수) 느티나무와 함께 문화와 역사가 살아숨쉬는 시민의 역사터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 - 성남시.

 

보호수...느티나무, 수령 약 450년 ( 지정일자 2006.6.20), 수고 14~17m, 나무둘레 80~160m

남한산성 성곽은 인조 4년(1626년)에 준공되었으며, 느티나무(보호수)는 당시 성곽사면 토양유실 방지 및 차폐의 목적으로 식재된 것으로 추정된다. 남한산성 순환도로 터널이 개통된 후 폐도 부지가 된 남문 앞 느티나무 주변을 2006년 재정비하여 느티나무 생육환경개선 후 총 4주를 보호수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 성남시 중원구.
 

누비길 검단산 구간...여기서 부터 제2구간입니다.

 

누비길.... 성남 누비길 노선 안내

검단산 길,  성남 누비길을 일주합시다. 울창한 숲에서의 등산은 신체리듬을 회복시키고 산소공급을 원할히 하여 운동시경을 단련시키는 등 인체건강에 유익합니다. 시민 여러분의 건강과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성남누비길을 일주해 봅시다.

누비길 코스:

1구간:  남한산성길 7.5km ( 4시간 )
2구간:  검단산 길  7.4km ( 3시간 30분 )
3구간:  영장산 길 9.7km ( 4시간 30분 )  
4구간:  불곡산 길 8.8km ( 4시간 )
5구간:  태봉산 길 10.7km  ( 4시간 30분 )  
6구간:  청계산 길 8.5km  ( 4시간 30분 )  
7구간:  인능산 길 9.5km ( 4시간 )

검단산 길:

검단산은 태백산맥의 철령(鐵嶺) 부근에서 분기하여 서울 부근에 이르는 광주산맥의 지맥으로서 남한산성과 연결되는 산줄기를 이루며, 높이는 534.7m이다. 경기도 성남시 동쪽으로 광주시와 경계를 이루며, 전체적으로 '凹(요)'자 모양의 산지를 형성한다. 이 산을 중심으로 하는 성남시의 동쪽 산지는 남쪽으로 갈 수록 해발고도가 낮아지며 완만한 산이라 하여 그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  산성역 -  불망비 -  남문(지화문): 3,7km    

검단산길 2코스:   남문(지화문) - 1.0km- 산림초소 - 1.4km - 검단산 정상 (536.4m)  - 1.4km - 만수천 약수터 - 0.7km -  망덕산 정상 ( 500.3m ) - 0.5km - 형제봉 정상 ( 435m ) - 0.8km - 이배재고개 - 1.8km - 갈마치고개.  

 

호국정신과 선비정신이 깃든
남문 앞 역사터 안내

- 남한산성은 한성 백제시대의 성산이요 진산의 개념으로 백제의 시조 온조대왕의 사당 숭렬전(경기도유형문화재 제2호)이 있는 곳이다.
- 남한산성은 통일신라시대에는 주장성(晝長城) (일장(日長)산성)으로 불렀으며 한강유역의 중요 산성으로 발전하였다. 
- 고려시대에는 몽고군의 침입을 물리친 국방의 요새지 이었다.
- 조선왕조 제16대 인조임금 원년(1623)에 성의 축성을 시작하여 1826년에 완성 (본성의 둘레가 9.05km)하니 남한산성은 경도보장지(京都保障地)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 남한산성은 주봉인 청량산(497.8m) 을 중심으로 4대문과 18암문을 완성하고 성내에는 행궁을 비롯하여 수어장대 등 각종 문화유적이 남아있고, 현재는 경기도 도립공원(국가사적 제57호)으로 성남시, 하남시, 송파구, 광주시 등 4개 지방자치 단체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 특히 남문은 성의 서남쪽 곡저부의 해발 370M 지점에 위치하여 있으며 정조 3년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하여 지화눈(至和門)으로 칭하였고,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 문이며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으며 성남으로 통하는 관문 역할을 하는 문이다.
- 인조 14년에 청태종의 침공(병자호란)으로 인조 임금이 이곳으로 피신하여 45일간 항전한 유서 깊은 곳이다.
- <남문 앞 역사 터>는 성남시가 문화재청과 협의를 거쳐 2007. 5.15부터 약 6개월간의 공사로 2007.11.19 준공하였으며, 성문 앞에 식재된 380여년 된 느티나무와 원형이 가장 잘 보전된 것으로 평가받는 남문은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역사 공간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 
- 성남시 보호수인 느티나무(4주)는 성곽방어의 특성을 고려하여 남문을 시각적으로 차폐하기 위하여 식재하였을 가능성과 성문 주변이 평상시 왕래가 많고 지형상 경사가 심하여 우수 시에 토양유실을 막기 위해 식재하였을 것으로 추론되는 역사터다.   - 성남시

남문(지화문) -  백련사 - 주 등산로 - 산성유원지 입구 - 검단산 - 시계 등산로 -   남문 (지화문)        

 

남문 앞 이정표.....<- 1.5km 수어장대, <- 2.1km 우익문(서문), -> 종로 0.7km

 

남문  南門.至和門: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남문은 남한산성에 있는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으로 현재에도 출입이 가장 많은 문이다. 선조 때의 기록을 보면 동문, 남문, 수구문의 세 문을 수축하였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남문은 인조 2년(1624)수축되기 이전 부터 이미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남문은 정조 3년(1779) 성곽을 보수할 때 개축하며, 지화문(至和門)으로 이름이 붙여졌으며 4대문 중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는 문이다.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처음 남한산성에 들어올 때 바로 이 문을 통해서 들어왔다.    

 

<- 0.9km 수어장대, <- 1.5km 우익문(서문), -> 0.6km 지화문(남문) 

 

칼 쓴 십자가  

 

" 천주교 비극의 역사, 남한산성 "


남한산성 성지성당 내부에는 순교자들의 옥에 갇혀있을 때 쓰고 있었던 칼이 채워져 있는 독특한 십자가상이 있습니다. 천주교 탄압의 본격적인 서막은 신유박해(1801년) 부터였는데요. 천주교에 대해 큰 반감이 없었던 정조가  승하하자 정순황후가 가혹한 탄압을 시작한 것이죠. 박해의 진짜 이유는 정조시기에 세력을 키운 남인을 숙청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이 신유박해 때 남한산성에서 첫 순교자가 발생하게 됩니다. 천주교 신자가 광주 및 인근 지역에서 잡히면 남한산성 포도청으로 이송되어 감옥에 갇혔습니다. 순교자들은 심문을 당하다 결국은 감옥에서 순교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교살형이나 교수형이 대부분 감옥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감옥이 곧 순교터가 되었습니다. 감옥에서 죽거나 고문 끝에 죽은 순교자들은 동문 밖으로 시신을 버렸는데 그 장소가 수구문이었습니다. 시체가 너무 많이 나가고 피가 물처럼 흘러 수구문은 시구문으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제6암문(서암문)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의 비밀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도 설치하지 않았다. 이 암문은 성벽의 흐름 방향과 달리 입구가 북서쪽을 향하고 있어 외부에서 쉽게 관측되지 않도록 하였다. 또한 북동쪽의 성벽을 돌출하여 암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원성에 설치된 12개 암문의 외측 개구부는 대부분 홍예식이지만 제2암문과 더불어 이 암문의 개구부는 평거식이다. 인조 15년(1637) 1월 23일, 한밤중에 습격해 온 청병을 크게 물리친 곳이라 하여 이 암문 부근을 '서암문 파적지'라 부른다.  
 

 

청량당(淸凉堂)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호):  

청량당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 사당은 남한산성 쌓을 때 동남측 축성의 책임자였던 이회 장군과 그의 부인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이회는 공사비를 횡령했다는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고 이 소식을 들은 부인 송씨는 한강에 몸을 던져 따라죽었다. 이회는 죽을 때 자신의 죄가 없으면 매 한마리가 날아올 것이라 에언 했는데 과연 매가 날아와 그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한다. 후에 누명이 벗겨지고 그가 맡은 공사가 가장 잘된 것으로 알려지자 사당을 지어 초상을 안치하고 넋을 기렸다. 원래의 청량당은 6.25 전쟁때 소실 되어 다시지었다. 서장대가 있는 산 이름이 청량산이므로 청량당이라 이름 지었다. 

 

보호수....향나무, 수령 360년, 수고 2.5m ( 지정일자 1983. 03. 10 )

 

사적 제57호 남한산성  

남한산성 수어장대:  보물

장대란 지휘와 관측을 위해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누각 건물로 남한산성에는 5개의 장대가 있었다. 수어장대는 남한산성 서쪽에 있어 본래 '서장대' 라고 불렸다. 병자호란 당시에는 단층 누각이었고, 수어청 우영장이 서장대에 머물며 군사를 지휘하였다. 이후 영조 27년(1751)에 유수 이기진이 복층으로 중건하고, '수어장대'라는 편액을 달았다. 지금의 수어장대 현판은 헌종 2년(1836)에 유수 박기수가 수어장대를 증축하였는데, 그 형인 박주수가 쓴 것이다. 수어장대에서는 수어사가 수어청의 군사를 지휘하였는데, 정2품 상사에 해당하였다. 수어청은 한양을 수비하는 5군영의 하나로, 본래 한성부 북부 진장방 (오늘의 서울 종로구 삼청동, 팔판동,화동 일부)에 그 본청이 있고, 광주부윤을 부사로 삼아 남한산성을 관할케 하였다.  그러다 운영의 효율성을 도모하고자 정조19년에 본청을 완전히 남한산성으로 옮기고, 광주유수가 수어사를 겸하게 하였다. 남한산성 수어장대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로 관리되어 오다 2021년에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승격되었다. 또한, 수어장대는 세계문화유산 남한산성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 중 하나인 군사 경관 (장대)에 해당한다. 수어장대는 여러 문헌에 등장하는데,  그중 조선 숙종의 정비인 인경왕후의 아버지 김만기는 <서장대기>에서 아래와 같이 언급하였다.

" 비록 한강의 흐름을 기울여도 그날의 비린내는 씻지 못할 것이다. 만약에 혹시라도 풍경이나 구경하고 유람이나 탐하면서 다시는 감개하고 탄식하는 마음이 없다고 하면 이는 이른바 그 양심을 잃은 자이다. "     

 

수어장대


※ 병자호란 주요 연표:

- 1598년 (선조 31년)   - 임진왜란 끝남.
- 1608년 (선조 41년):    - 광해군 즉위.
- 1616년 (광해군 9년):   - 누루하치 후금 건국.
- 1618년 (광해군 11년):  - 명과 후금의 전쟁, 명에 원병 파견함.
- 1619년 (광해군 12년):  - 강홍립 후금에 투항. -> (중립외교).
- 1622년 (광해군 15년):  - 명나라 장수 모문룡 가도에 주둔.
- 1623년 (광해군 16년):  - 인조반정으로 인조 즉위. -> (친명배금정책)
- 1624년 (인조 2년):       - 이괄의 난.
- 1627년 (인조 5년):       - 정묘호란 발생.
- 1635년 (인조 13년):     - 후금 내몽고 점령.
- 1636년 (인조 14년):     - 후금 청으로 국호 변경하고,  조선에 군신관계 요구 (척화론과 주화론 대립)
                                      - 12월 28일 병자호란 발생. 남한산성 전투.
- 1637년 (인조 15년):     - 2월 24일 인조 송파 삼전도에서 항복. 청과 사대관계 맺음. 
- 1644년 (인조 21년):     - 명나라 멸망. 청 중국 통일. 

 

무망루...."리 대통령 각하 행차 기념 식수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이신 이승만 대통령 기념 식수.

 

매바위와 수어서대

 

매바위, 그리고 '수어서대" 암각글씨.

청량당에 위폐가 모셔진 남한산성 공사 책임자 중 한사람이었던 이회가 공사비 횡령에 연류되어 억울하게 처단되자 죽 전에 자신의 죄가 없다면 매가 날아와 이 바위에 앉을 것이라고 유언을 했는데, 그 후 과연 매가 날아와 매바위에 구슬피 울었다고 하며, 다시 확인해 보니 죄가 없음이 드러났으며, 오히려 다른 구간보다 성이 더 견고히 축성되었음이 밝혀졌다. 예나 지금이나 모함은 한 인간을 파멸로 이끌기도 한다.

무망루(無忘樓):  

조선 영조27년(1751) 광주 유수 이기진이 증축한 수어장대 2층의 내편(內篇) 문루로서 그 편액(扁額)이 2층 누각에 있어 1989년 전각을 건립하고 이 안에 현판을 새로 설치 일반인이 볼 수 있게 하였다. 무망루는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혔다가 귀국 후 북벌을 꾀하다가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이름지은 것이다. 

 

남한산성 벌봉 방향

 

남한산성 (사적 제57호):  

1 남한산성 행궁, 2 수어장대, 3 숭렬전, 4 청량당, 5 현절사, 6 침괘정, 7 연무관, 8 지수당, 9 장경사, 10 망월사, 11 개원사, 12 제1남옹성, 13 제2남옹성, 14 남문(지회문), 15 서문 (우익문), 16 연주봉옹성, 17 북문(전승문), 18 동문(좌익문), 19 장경사신지옹성, 20 동장대터, 21 봉암성, 22 벌봉   

남한산성은 조선시대 뿐 아니라 삼국시대부터 천연의 요새로 중요한 역할을 하던 곳이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의 욍성이었다는 기록이 있고, 나당전쟁이 한창이던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한산주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기록도 있다. 고려시대에는 몽고의 침입을 격퇴한 곳이기도 하고 일제강점기에는 항일운동의  거점이 되기고 한 곳이다. 그러나 남한산성은 주로 병자호란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조선 인조 14년(1636)에 청나라가 침략해 오자 왕은 이곳으로 피신하여 항전하였으나, 왕자들이 피신해 있던 강화도가 함락되고 패색이 짙어지자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 나가 치욕적인 항복을 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남한산성은 패배를 알지 못하는 곳이다. 성의 외부는 급경사를 이루어 적의 접근이 어렵고, 내부는 경사가 완만하여 넓은 경작지와 물을 갖춘 천혜의 전략적 요충이기 때문에, 병자호란 당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청군에 함락당하지 않고 47일간이나 항전할 수 있었던 곳이다. 이처럼 오랜 기간동안 우여곡절을 가진 성의 역사처럼 성곽의 형태 또한 단순하지 않아서 하나의 폐곡선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본성, 봉암성, 한봉성, 신남성과 5개의 옹성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조이다. 인조 4년(1636) 에 중앙부의 가장 큰 폐곡선인 본성이 완성되었고, 병자호란 이후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동쪽의 봉암성, 한봉성 등을 비롯하여 여러차례 증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길과 길
남한산성 옛길

왕들의 능행길, 민간의 상업루트 "

남한산성이 위치한 지금의 성남시, 광주시, 하남시는 옛날 조선시대 행정구역으로 보면 모두 광주유수부의 관할지역이었습니다. 광주수유부는 남한산성의 군사요충지적 특성 때문에 매우 중요한 행정중심지였습니다. 또 남한산성은 왕의 이동과 관련이 깊은 곳입니다. 조선시대 왕들은 반드시 선대와들의 능에 성묘를 가야 했으며 왕들의 이런 성묘행사를 능행이라고 불렀습니다. 후대의 왕들이 영녕릉(英寧陵)에 참배를 하려 가려면 일 년에도 몇 차례씩 남한산성 옛길을 이용해 여주까지 가야했습니다. 남한산성 옛길의 또 다른 특징은 조선후기 상거래가 활발해지면서 필요해진 내륙의 유통망으로 민간에서 이용했던 상업루트였다는 점입니다. 많은 보부상들이 바로 남한산성 옛길을 통해 상업유통의 한축을 담담하게 됩니다. 이렇게 이용된 남한산성 옛길은 목적지인 경상북도 봉화의 이름을 따 통칭 봉화로라고 불렀습니다.   

 

<- 0.6km 수어장대, ↙ 0.1km 국청사, ↓ 1.0km 전승문(북문),  ↑ 학암동 1.4km    

서문 (우익문)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서문은 4개의 대문중 규모가 가장 작고, 산성을 처음 쌓았을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 3년(1799)에  다른 문과 같이 개축하며 우익문(右翼門)이라 칭하였다. 행궁을 중심으로 국왕은 남쪽을 바라보며 국정을 살피니, 서문이 행궁의 우측에 있어 우익문이라 하였다. 서문은 인조15년(1637) 1월 30일 왕이 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항복하기 위해 남한산성을 나간 바로 그 문이다. 남한산성의 서쪽 사면은 경사가 급해 물자수송이 어렵지만 광나루나 송파나루 방면에서 산성으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 위상이 남다른 4개의 문 " 

남한산성에는 4개의 문이 있습니다. 한양의 4대문 처럼 남한산성의 4개문은 좌익문(左翼門: 동문), 우익문(右翼門: 서문), 지화문(至和門: 남문), 전승문(全勝門: 북문) 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한양 도성의 문 이름과 비슷하지요? 가장 크고 넓은 문이 지화문입니다. 지화문은 좌익문과 함께 남한산성의 핵심 도로인  봉화로에 설치된 성문입니다. 왕의 행렬, 마차와 수레, 여러 장사치들과 주민들이 드나들었던 지화문은 남한산성 옛길을 따라 좌익문과 이어지게 됩니다. 이 길은 남한산성 옛길의 가장 핵심적인 루트입니다. 남한산성 옛길은 산성 로터리를 중심으로 북문, 서문, 남문을 일주하는 노선을 따라 이루어져 있습니다.

감이동  1.9km
감이동 - 성불사, 청운사 - 왕행길 - 현위치, 우익문(서문) -전승문(북문) / 지화문(남문).
서문노선 2.1km     

우익문

 

도시
" 한양 다음으로 큰 완전한 소비도시, 산성리 "

조선시대 한양은 20만 명이 넘는 인구를 가진 도시였습니다. 18세기 후반 산업혁명 시기 영국 런던의 인구가 5만 명이었다는 사실에 비교해 보면 가히 한양의 인구규모를 짐작할 만 합니다. 남한산성 옛길이 위치한 산성리 지역은 한양에 인접한 소비도시 였는데  토박이 주민의 제보에 따르면 산성내 주민들이 주변 마을 사람들을 촌놈 취급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을 정도 입니다. 1627년 (인조6년) 광주부 읍치(邑治: 행정중심지)를 산성 내부로 옮기면서 산성리 인구는 폭증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1895년 조선총독부에 의한 행정구획 통폐합까지 일어나 중심지로서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면서 그 규모가 서서히 줄어들게 됩니다. 일제에 의해 산성 내에 위치하고 있던 광주군청이 경안 등으로 이전하게 되면서 군사도시, 행정도시의 위용은 완전히 사라지고, 근대화 시기로 접어들며 주요 도로가 남한산성을 제외한 채 건설됩니다. 이후 한강 이남에서 가장 번성했던 지역 중 하나였던 남한산성은 한적한 마을로 점차 변화하여 잠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됩니다.

 

하남시 고골지역

 

나무를 지키는 금림조합

" 남한산성의 귀중한 숲을 지켜 후손에게 "

남한산성의 산림은 매우 잘 보존되어온 아름다운 생태유산입니다. 이는 오래전부터 산성 내의 숲을 보호하고자 하는 산성 주민들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는데요, 일반적으로 근대화 이전의 생활연료는 나무였기에 20세기 초반 대부분 산들은 나무가 없는 민둥산이 도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나 산성 안의 나무들은 예외였는데, 마을 주민들이 '금림조합'을 만들어 순산원을 두고 도벌을 막아 보호한 덕택에 지금처럼 건강하게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금림조합은 남한산성의 숲을 보호하기 위해 산감(山監: 산림 감시원) 50명을 선출하여 매일 6명 씩 교대로 산림을 감시토록 하였습니다. 산감은 극빈자 계층에서 선발하였기 때문에 숲을 보호하는 것과 동시에 취약계층의 구제에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남한산성 금림조합의 노력은 이후 2016년까지 90년에 가깝게 지속되어 왔으며, 덕분에 남한산성은 귀중한 생태문화자원을 잘 보존하여 후손에게 전할 수 있게 되었답니다. 

<- 전승문 300m, -> 우익문 700m.
  

북문(전승문)

 

전승문 (북문):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북문은 병자호란 당시 성문을 열고 나가 기습공격을 감행했던 문이다.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에서 '전승문'이라고도 하였다. 당시 영의정 김류의 주장에 의해 군사 300여명이 북문을 열고나가 청나라 군을 공격하였으나, 적의 계략에 빠져 전멸하고 말았다. 이를 '법화골 전투';라고 하는데,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있었던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였다. 정조3년(1779) 성곽을 개보수할 때 성문을 개축하고 이름을 붙여 전승문(全勝門)이라 한 것은 그 때의 패전을 잊지말자는 뜻이었을 것이다. 선조 때의 기록을 보면 산성 내에 동문과 남문, 수구문의 3개의 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북문은 인조2년(1624)에 신축된 성문이라고 생각된다.

 

남한산성 종로로터리

 

남한산성 행궁 방향

 

침괘정 방향

 

9, 52번 정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