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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구릅/일상들 ( life )

② 양평 물안개공원, 양강섬, 갈산- ( 2023.02.18 )

by the road of Wind. 2023. 2. 19.

 양평 물안개공원, 양강섬, 갈산

- ( 2023.02.18 ) 

 

 남한강변길 - 갈산공원 - 현충탑 - 영호정:

 

아, 양평의 갈산에 올라 바라보는

저 유장한 남한강의 아름다움이여.

충주 탄금대를 돌고, 강변의 옛 목계장터도

거치며, 여주 신륵사 강월헌을 돌아 내려오느라

힘들었을 남한강이여. 

양평 갈산 나루터는 없어진지 오래 되는데

남한강는 말없이 흐르기만 하는구나.

무수한 산하의 구비구비 돌며 

인간 세상의 고된 삶을 보았으리라.

같이 울고, 같이 노래하기도 했으리라. 

수수만년을 흐르고 지나갈 남한강이여,

옛 길손들은 지금 어디에 가고 없느뇨?

두물머리에서 북한강을 만나 반갑고,

팔당을 지나 김포평야 아래에서

임진강을 만나 손잡고 

그대 한 삶을 마무리 하려는가. 

 

 

 

양강리 다리 잠수교

 

 

양근천

↗  4대강 국토종주 남한강 길, 이포보 방향

↗  양평전통시장 (양평5일장: 3일, 8일, 13일, 18일, 23일, 28일)

 

 

양근천 하류 남한강 유입부, 양근대교

 

 

양근천 남한강 유입부 이정표

 

<- 물소리길 

-> 이포보 14.4km, <- 양평역 0.9km, ↓ 남한강자전거길 (서울방향) 

양자산~백병산 코스 (현위치: 양근삼거리):

- 1코스 -   누적거리: 1.2km,  남은 거리: 24.7km
- 2코스 -  누적거리: 1.2km,  남은 거리: 24.5km

 

6.25 양민학살현장비

 

통곡의 그날

- 6.25 학살당한 영령의 명복을 빌며

이유도 없었어라 영문도 몰랐어라
고귀한 생면들이 철사로 꽁꽁 묶여
석유불 생지옥 속에 한 덩이로 어켰어라

선량한 수백명은 총성에 스러지고
비명은 공포 속에 지하로 스며드네
통분한 말 한마디 할 순간조차 없었어라

수중에 잠겨버린 시신들은 어디갔나
백사장 집어삼킨 강물만 출렁이네 
아직도 붉은 깃발은 북녘에서 날리는데

양평읍 남한강변 떠드렁산 또 백사장
생생한 학살 현장은 기억조차 흐려졌네
원혼은 강변을 돌며 통곡하고 있구나

지은이 장삼현 (경원대학 교수)

 

 

 

양평읍 남한강변 길 (자전거도로 & 산책로 )

 

 

양평 남한강변 길 동영상

 

 

<-  양평전통시장 (양평5일장: 3일, 8일, 13일, 18일, 23일, 28일)

 

 

한강 하구로 부터 102km

 

양평대교

 

 

양평대교

 

 

남한강 상류 방향

 

 

갈산 공원 입구

 

양자산~백병산 코스 (현위치: 양근삼거리):

- 1코스 -  누적거리: 24.7km, 남은 거리: 1.2km,  

- 2코스 -  누적거리: 24.5km,  남은 거리: 1.2km

제6길
거무내길

  양평역 1.1km  ||  훅천 4.1km  >>
제 6길 총 17.7km

양평역 - 현위치 - 5.2km -- 흑천 -- 5.0km -- 원덕역 -- 7.5km -- 용문역

 

 

<-  14km  이포보, <- 4대강 국토종주 한강자전거길, 

 -> 팔당대교 32.1km, -> 4대강 국토종주 한강자전거길,
<- 나루터 Ferry 120m

 

 

갈산공원

 

 

제6길


양근나루

갈산 남한강변에 있던 양근나루


양근나루양평읍 양근리 갈산 자락에 있던 남한강의 나루입니다. 양근나루 외에도 갈산나루, 읍내나루, 양평나루 여러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지요. 지금도 양평대교 바로 아래 쪽에 나루 표시석이 있고, 강변에는 콘크리트로 포장된 접안시설이 설치되어 잇어서 양평의 어부들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루터는 남아있는데 나룻배가 다니지 않는 셈이지요. 예전의 양근나루는 바로 읍내장과 연결되는 나루였으므로 강 건너 편에 있는 강상면 교평리을 비롯한 인근 주민들이 자주 이용하였고, 남한강 물길로 오르내리며 장삿배들이 실어 나르던 물류들이 집산되고 공급되는 양평 일대에서 가장 규모가 큰 나루습니다. 역사적으로도 유래가 깊어서 <신동국여지승람>에 '읍치의 남쪽에는 갈산진(葛山津)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대동여지도>에도 갈산진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갈산은 이 지역의 옛날 명칭으로 이 주변에 칡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 합니다. 그러나 이곳에는 여주로 가는 길과 원주나 횡성으로 가는 길이 갈라지므로 갈래길을 의미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강의 물길이 끊기기 이전에는 마포에서 소금과 새우젓 등을 실은 장삿배가 자주 들어왔지요. 장삿배가 이곳에 물건을 부려놓으면 행상인들이 우마차로 싣고 양평 내륙지방이나 강원도 원주, 홍천, 횡성까지 가서 판매를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70년대 팔당댐으로 한강 물길이 끊어지고 나루 자리에 양평대교가 건설되며 나루가 폐쇄되었지요.

평해길 안내 경기옛길센터 031.231.8524     

 

 

양근나루 터

 

토(兎)선생 과 헬멧

 

 

갈산공원 가는 길 동영상

 

 

아, 남한강!!

 

갈산공원 가는 길 동영상

 

 

 

" 하나부터

열까지 

오로지

감사할 

따름이니다 "

 

 

책 전망대

 

 

갈산공원 책 전망대 동영상

 

 

아, 유장히 흐르는 남한강 !!!

 

 

남한강  


남한강아리수라고도 불리는 한강(漢江)강원도 태백시의 검룡소에서 발원하여 서해로 흘러간다. 발원지부터 동대천과의 합류지점까지의 구간은 조양강, 동대천과의 합류지점부터 평창강과의 합류지점까지의 구간은 동강, 평창강과의 합류지점부터 양수리까지의 구간은 남한강이라고 불린다. 남한강은 총길이 514㎞, 유역면적 34,402㎢인 한강의 일부이다.

 

 

양평군 강상면 방향

 

 

무공수훈자 호국공적비

 

호국무공수훈자공적비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창대리 산23번지.


이곳에 건립된 호국무공수훈자 공적비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이후 1953년 7월 27일 휴전시까지 국가 운명이 위기에 처해 잇을 때 붉은 피 맨주먹으로 북한공산당의 침략을 막고 각 지구 전퉁서 혁혁한 전공을 세워 군인으로서는 최고의 여예인 무공훈장을 받은 용사 그리고 국가 안전 보장에 기여한 공로로 보국훈장을 받은 국가 유공자의 위훈을 기리기 위해 2009년 11월 25일 현재 양평군에 거주하고 있는 292명의 이름을 훈격별로 명각하여 후손이 이들의 고귀한 희생정신과 애국심을 고취 발전시키고 국민의 안보 의식과 애국애족 정신을 함양하여 나라의 위기와 세계 평화와 자유를 지킬 본보기를 자손만대에 길이 전하고자 이 공적비를 세웠노라.  공적비 건립일: 2009년 11월 25일

 

 

제6길 거무내길

충혼탑:

 

신사(神社)기 있던 갈산에 충혼탑이 들어서다.


양평읍사무소 뒤에는 양평읍의 옛 명칭인 갈산면의 이름이 유래된 갈산이 있습니다. 해발고도 64.5m 정도밖에 안 되는 야트막한 산이지만, 양평읍을 대표하는 산이랍니다. 정상에 오르면 남한강과 양평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지요. 이러한 전망과 대표송 때문인지 일제강점기에는 이 갈산 정상에 신사가 세워집니다. 갈산의 신사는 1915년에 측량된 지도에도 표기가 되어있고, 마을 어르신들의 제보를 통해서도 그 위치가 확인됩니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 전 지역에 신사를 세운뒤 조선인에게 참배를 하도록 강제합니다. 신사는 일본의 민간종교인 신도(神道)의 사원으로 일본 왕실의 조상신이나 국가공로자를 모셔놓은 사당이지요. 일제는 조선 강점후 '신사사원규칙'을 발표하고 서울에 조선신궁을 세우는 한편 각 지방마다 신사를 세웠습니다. 이후 일제는 1935년경부터 조선인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였지요. 갈산에 다른 지방보다 일찍 들어서는 것은 양평이 구한말 의병 봉기의 고장으로 유명하였으므로 이러한 민족정신을 억누루고 견제하려는 수단의 일환이었을 것입니다. 해방이 되자 갈산 신사는 철폐가 되었고 현재는 신사가 있던 자리에 영호정이라는 정자가 세워집니다. 또한 갈산에서 내려다 보이는 남한강변은 6.25동란 당시 반공인사를 살육했던 아픔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갈산에는 이러한 반공인사와 6.25동란 때의 전몰 애국청년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충혼탑, 반공지사 변종식 충혼비, 반공위령탑 등이 건립되었고, 갈산 일대에는 갈산공원이 조성되었지요.  - 평해길 안내 경기옛길센터 |  031.231.8524    

 
 

갈산공원

 

 

갈산공원  

갈산(葛山)

 

소재지 양평읍 양근리해발고도 64.5m갈산은 양평읍 지역의 옛 이름으로 칡이 많았다 하여 칡미라고도 부른다. 1747년(조선 영조23)에 군 소재지가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양평의 정치 경제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갈산면(양평읍)이 설치되고 갈산시장(양평시장)이 호황을 누리면서 양평 중심지를 일컫는 이름으로 자리잡았다.양강(楊江, 남한강)을 두르고 용문산으로 병풍을 삼은 갈산의 풍경은 예로 부터 유명하였다. 특히 "용문산을 감싸 안은 푸른께 형상의 구름"과 "양강의 금빛 모래밭에 쏟아지는 화살같은 햇살" 이라 묘사한 옛 싯구절은 갈산의 풍경을 잘 표현하는 말이라 하겠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 신사가 잇었다고 하나 해방후 파괴되었고, 현재는 조선시대 영호대(暎湖臺)를 재건한 영호정과 6.25 전몰 용사를 기리는 충혼탑, 반공지사 변종식 충혼비, 반공위령탑 등이 있다. 갈산 서남쪽에 양근나루가 있으며 주변 일대는 갈산공원으로 조성되었다. - 양평읍장. 

 

 

생태계교란 야생식물 안내

가시박 //  단풍잎 돼지풀 
돼지풀  //  서양등골나무

 

 

제6길
거무내길

<<  양평역 1.5km  ||  훅천 3.7km  >>
제 6길 총 17.7km

양평역 - 현위치 - 5.2km -- 흑천 -- 5.0km -- 원덕역 -- 7.5km -- 용문역

 

 

 

갈산공원에서 남한강변 나가는 길

 

 

 

夜到楊根_야도양근  

                    白軒 李景奭 先生詩_ 백헌 이경석 선생시

渡溪穿嶺到楊根 _ 도계천령도양근 
十月風寒日己昏 _ 시월풍한일기혼
處士新居何處洞 _ 처사신거하처동
小童遙指隔江村 _ 소동요지격강촌
孤舟催遺依沙待 _ 고주최유의사대
雙炬仍敎向路犇 _ 쌍거잉교향로분
官燭燒殘成獨坐 _ 관촉소잔성독좌
夜深猶未掩重門 _ 야심유미압엄문

밤에 양근에 도착하여

시내를 건너고 고개를 넘어 양근에 이르니
시월이라 바람은 차고 날은 이미 저물었네
처사의 새 거처는 어느 골짜기인가
아이가  멀리 강 건너 마을을 가리키네
배 한 척 서둘러 모래사장에서 기다리게 하니
두 개의 횃불 길을 향해 내달리게 하였네
관아 촛불 사그라들고 홀로 앉아서
밤이 깊었는데 아직 중문을 닫지 않았네

 


 

 

楊峡路中 - 양협로중

                   荷居 梁憲洙 先生詩 - 하거 양헌수 선생시

雪壓空山冷逼容  - 설압공산냉핍용
行人可手强提笻  - 행인가수강제공 
氷心己挫千江浪  - 빙심기좌천강랑
風勢俱鳴萬壑松  - 풍세구명만학송  
客夢楢餘靑鶴洞  - 객몽유여청학동
鄕心忽揷白雲峰  - 향심홀삽백운봉
村婆迎勸批寒物  - 촌파영권비한물
欵曲新醪滿酌濃  - 관곡신료만작농 

 


양근을 가는 길에

눈이 쌓인 빈산에
냉기가 얼굴을 스치고
행인은 손을 호호 불며
힘겹게 지팡이를 집고가네
얼음같은 마음은
이미 깊은 강물에 꺾이었고
세찬 바람은
온 골짜기의 소나무를 울리네
나그네의 꿈은 아직도
청학동에 남아있고
고향을 그리는 마음은
홀연히 백운봉을 바라보네
시골 노파가 손님을 맞아
추위를 녹일 것을 권하여
정성스레 새로 거른 막걸리를
걸쭉하게 가득 따르네

 

 

( 2021.10.16 사진 )

 

過葛山風日甚美

(과갈산풍일심미) 
                    三剛 金昌翁先生 詩

                   (삼강 김창옹선생 시)

 

水滑琉璃渼玉沙 (수활유리미옥사)
鳧鷺晞日踏輕霞 (부려희일답경하)
中流聞歇篙師手 (중류간헐고사수)
笑指龍門塔影斜 (소지용문탑영사)


갈산을 지나는데
풍광이 몹시 아름다웠다


유리처럼 맑은 강물이
하얀 모래에 넘실대고
오리와 갈매기는 햇빛을 쬐다가
옅은 노을로 날아가네
강 가운데서 뱃사공은
잠시 손을 멈추고
웃으면서 용문산을 가리키는데
탑 그림자 비키어 있네

 

 

갈산공원

 

양강정

 

 

갈산 오르는 계단 길

 

 

갈산공원 방향

 

 

갈산 충혼탑

 

 

충혼탑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1950년 6월 25일 북한공산당의 불법 남침으로 조국을 수호하다 호국의 신으로 산화한 호국용사 고 이기용 소령 외 620위인 등 양평 출신 호국용사의 거룩한 넋을 추모하고 그 얼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하여 1968년 6월 6일 양평 군민의 성금으로 충혼탑을 건립하였으며 1989년 새로운 충혼탑 건립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전군민의 뜻을 담아 재건립하였다. 
삼가 호국영령릐 명복을 빕니다.  

 

 

양평 3.1 독립항쟁사 &  서훈(敍勳) 독립운동가 66명 명단

 

양평 3.1 독립항쟁사

 

서종면3월 10일:   - 문호리에서 수백명이 참가한 가운데 양평지역 최초의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양서면4월1일/ 4월2일: - 4월 1일 양서면 도곡리 일대에서 2,000여명의 군중이 모여 대규모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날 시위는 전날 강하면 시위를 주도했던 최대현이 참가하여 2,000여명의 시위군중을 이끌고 헌병분견소 앞으로 나아가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튿날 4월 2일에는 여운형의 친척인 여운긍,  여광현 등이 주도하는 가운데 1,000여명의 군중들이 양서면사무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했다. 

강하면3월31일:  - 강하면에서는 진행된 만세시위는 한말 오위장(五衛將) 출신으로 1870년 군대해산 후 의병운동을 전개한 68세의 최대현이 주도했다. 최대현은 윤기영, 이보원, 신우균 등과 함께 면사무소 앞에서 태극기를 휘날리며 300여명의 군중과 함께 마세시위를 벌였다.

강상면3월 29일:  - 교평 나루터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는 양근리 장터에 가기 위해 모인 군중들에 의해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났다. 나루터에서 누군가가 " 조선의 독립은 세계각국에서 이미 승인했다"고  하는 말을 신석영이 태극기를 뽑아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자 약 100여명의 군중이 호응하여 만세를 부르면서 나루터는 시위장으로 바꿨다. 

갈산면3월24일:  - 갈산면은 장날을 진행된 만세시위는 연희전문학교 서기 이진규가 양평으로 오면서 시작되었다. 이진규는 장터에 모인 군중들에게 " 독립의 시기는 왔다. 이 시기를 놓치면 다시는 만나기 어렵다" 고 연설하고 서울에서 가지고 온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배포하면서 독립만세를 선창했다. 여기에 곽영준, 한창호, 김경석, 서상식, 김석봉, 한봉철 등이 적극 호응하여 시위를 이끌어 1,000여명의 군중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장 안을 행진하자, 헌병들이 출동하여 이진규와 곽영준을  체포.구금했다. 이에 군중들은 헌병 분소 앞으로 몰려가 이들의 석방을 요구했으며, 수백명의 군중들이 갈산면사무소, 양평군청, 양평우편소로 처들어가 서류, 장부 일부를 폐기하기도 했다. 

고읍면 (현재 옥천면), 4월 3일:  - 고읍면에서 고읍, 강상, 강하, 양서 4개 면민 4,000명이 운집한 대규모 연합만세시위가 일어났다. 강하면 시위를 주도했던 최대현, 윤기영, 이보원, 신우균 등이 다시 참가하여 군중들을 이끌고 헌병주재소 앞으로 나아가 독립만세를 연창했다. 시위 군중들이 양평읍내를 향해 행진하던 중 일본 헌병대와 마주쳐 최대현은 체포되고 시위대는 해산되었다. 

단월면, 청운면3월 23일:  - 용두리 장날을 기해 천도교인들이 주축이 되어 200여명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했다. 이날 시위는 단월면 덕수리의 신재원과 부안리의 김종학이 청운면 갈운리의 민주혁과 양동면 쌍학리의 정경시를 만나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조선독립기'라고 쓴 깃발을 만들어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선도했다. 시위 행진이 계속되자 일본 헌병이 출동하여  시위 주동자를 체포하여 재판에 회부했다.     

용문면3월30일:  - 광탄리에서 진행된 만세시위는 마룡리의 조용호, 오촌면의 김윤구, 신순근 등의 주도로 시작되었다. 조용호는 태극기를 높이  들고 "지금  우리는 일본과 쌍란 속에 들어있다. 이제 때가 되었으니 응당 두가지로 갈라져야 하지 않겠느나" 고 외치자 수백명의 군중이 만세행진에 나섰다. 시위 주도자들은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개군면, 지재면 (현재 지평면)4월3일/ 4월 11일:  - 4월 3일 지재면 곡수리에서 3,000여명의 군중들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시위가 치열한 양상으로 전개되면서 일본 경찰이 발포하여 6명이 피살되었다. 4월 11일에도 지재면 곡수장터에서 시위군중 3,000여명이 참가한 대대적인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 시위는 당시 여주군 개군면에 속했던 김영규, 이철영, 이호승,곽수영 등이 사전준비에 의해 진행되었다. 시위군중이 행진을 하던 도중 기마헌병대의 총격을 받아 김영구가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시위대는 해산했다. 시위 이후 헌병대가 마을을 수색하면서 이호승이 총격을 맞고 현장에서 사망했다. 

양동면, 4월 7일:  - 석곡리 일대에서 3,000여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 시위는 전석현이 동지를 규합하여 격문을 작성하고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전석현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이종성의 선창으로 독립만세를 외치자 장날에 모인 많은 군중들이 합세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시위 군중들이 앙평을 향해 행진하던 중 양평기마헌병대 수십명이 출동하여 무차별 발포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고 시위대는 해산되었다.    

 

 

양평읍사무소 우측의 차도로 갈산 충혼탑 주차장에 오를 수 있다.

만차시 다시 내려가 길 건너 양평읍공용주차장 (무료)에 주차.

 

 

-> 바리스타 교육장, 양평읍 주민자치센터 

 

양평읍내 방향

 

 

반공지사 변종식 충혼비

 

선생은 1906년 음력 4월 12일 이곳 양평에서 출생하시었다. 원래 성격이 강직하고 자유수호의 정신이 투철한 분으로 국민회의 양평지부장, 양평대한 청년단 등을  역임하여 조국재건을 위하여 반공정신 앙양과 청년지도에 투신하던 중 6.25전쟁 당시 남침한 북한공산군의 손에 피체되어 금오의 몸이 되자 그들이 투여하는 음식을 배격하며 불굴의 항거를 계속하다 잔인한  고문으로 인하여 마침내 1950년 7월 10일 옥사하시었다. 백세에 귀감이 될 선생의 행적을 새겨 길이 남기려하는 바이다.      

 

 

영호정

 

 

갈산 영호정 근처 동영상

 

 

영호정 映湖亭,  조선시대건립, 1991년 복원.


이 영호정은 조선시대에 건립된 정자이다. 조선후기에 제작된 <양근읍지(楊根邑誌)>에 의하면, 남한강변 갈산에 태허루(泰虛樓) 라는 객사가 있고, 그 아래 석축을 쌓아 영호대를 세워 지역주민과 방문객들이 남한강을 굽어보는 풍류의 장소로 활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후 오랜 세월 동안 페허로 남아있던 이 정자를 일제강점기 때인 1930년대에 지역유지들이 재건하였으나, 일제가 이 정자 자리에 신사(神祠) 를 세우고자 파괴하였다. 해방 직후 영호정건립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일제 잔재인 신사를 헐어내고 재건하였으나 6.25 사변으로 다시 소실되었다. 그 후 재건하지 못하다가 1991년 지역인사들의 건의와 주민 의견을 받들어 양평군청에서 고증을 받아 골기와를 얹었다.   

 

 

 

映湖亭(영호정)

 

 

갈산 정상의 영호정에서 바라보는 남한강

 

비목 (碑木) *

                 한명희

 

초연(硝煙) * 이 쓸고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모를 
이름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樵童) * 친구 
두고 온 하늘 가 
그리워 
마디 마디 이끼되어 맺혔네

궁노루 산울림 달빛 타고 
달빛 타고 흐르는 밤 
홀로 선 적막감에 울어지친 
울어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퍼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 한국자유총연맹 양평군지회

 

* 비목(碑木): 죽은 이의 신원 따위를 새겨 무덤 앞에 세우는, 나무로 만든 비(碑).

* 초연(硝煙): 화약의 연기.

* 초동(樵童): 땔나무를 하는 아이.

 


한명희 (1939~ ): 충북 충주 출생. 서울대 국악과, 동 대학원 졸업. 성균관대 대학원 동양철학 박사. 카자흐탄 알마타음악원 명예박사, 우즈베키스탄 타슈겐트 음악원 명예박사, 동양방송 프로듀서, 서울시립대 교수, 국립국악원 원장, 한국문화예술위원장(직무대행), 대한민국예술원 부회장 역임.

비목이란 노래는 한명희씨가 1964년 육균소위 임관 후 6.25 전쟁 격전지 7사단 백암산 계곡 부근 GOP에서 군복무시 어느 초가을날 훈련 중 마주한 잡초 우거진 양지바른 산모퉁이를 지나며 돌무덤들을 보면서 지은 시라고 한다. 그 후 1968년 작곡가 장일남씨으로 부터 노래말 의뢰를 받고, 그 당시를 떠올려 조국을 위해 죽어간 젊은이들을 기리는 내용의 비목의 가사를 지었다고 한다.  
 

 

 

六二五 彼虐殺 現場 

육이오피학살현장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양근리


이 곳으로 부터 1킬로 미터 떨어진 양평국민하교 앞 강변은 1950년 9월 하순 양평지역 반공인사 600여명이 북한 공산도당에 의하여 집단학살 당한 원통한 현장입니다. 인천 상륙작전으로 패색이 짙어지자 북한 공산도당은 공무원 가족, 지방유지들을 반공분자라는 굴레를 씌워 한가위 밝은 달빛 아래 이곳 남한강변으로 끌고와서 미친 듯이 몽둥이와 죽창을 휘둘러 대며 " 미리 파놓은 구덩이 속에 떼밀어 넣고 그 위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질러 집단학살을 하였읍니다. 오늘도 그날의 한을 머금은 강물은 출렁대고 밝기만 했던 그 빛의 달이 가장 정확한 증인이 되고 있읍니다. 이에 6.25동란 35주년을 맞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된 영령들을 추모하고 피흘림 없는 조국통일을 기원하면서 한국방송공사는 삼가 이 비를 세웁니다.   1985년 6월 25일 

 

 

 

"호국영령 되시어

조국품에 영원하소서 "

 

 

<- 제3산책로 0.135km

 

 

 

양평대교 방향

 

 


GALSAN PARK

 

 

->제2산책로

 

양평읍사무소 고객전용주차장 (무료)

 

 

양평읍사무소

 

 

"가르치고 전하고 섬기는 교회"

양평장로교회 백주년 기념

 

 

양평시장

 

양평시장 내부

 

양평5일장터

(양평5일장: 3일, 8일, 13일, 18일, 23일, 28일)

 

시간이 오후 5:44분으로 파장하고 잇었다. 무엇 하나 먹을 것이 없나 하였는데, 오늘은 끝났다. 

 

<- 양평군청, -> 양평역

양평믈맑은시장

 

양평오일장 순대국

배 고프니 먹을 것만 눈에 들어오네...

 

양근천,

양평의 랜드마크, 현대성우오스타코아루아파트 방향 

 

 

앗, 경의중앙선 양평역

 

 

현대성우오스타코아루아파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