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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구릅/일상들 ( life )

② 용산 전쟁기념관, 삼각지 대구탕골목 - ( 2024.01.27 )

by the road of Wind. 2024. 1. 29.

용산 전쟁기념관, 삼각지 대구탕골목 

- ( 2024.01.27 )

 

- 《 전쟁기념관-2 》:

 6.25 전쟁 연표:  

1950. 6. 25  -  북한군 남침.
1950. 6. 26  -  유엔안보리, 북한군 침공중지 결의
1950. 8. 1    -  미 제8군사령관 낙동강방어선으로 철수 명령.
1950. 8. 5    -  인민군 8월 공세 시작. 
1950. 8. 16  -  B-29 폭격기 융단폭격 시작. 
1950. 8. 31~ 9. 8 -  인민군의 9월 공세.
1950. 9. 15  -  인천상륙작전.
1950. 9. 28  -  수도 서울 탈환.
1950. 10. 1  -  국군, 38도선 돌파 북진.
1950. 10. 25 - 중공군, 제1차 공세 개시
1950. 10. 26 - 국군, 압록강 초산 도달
1950. 11. 21 -  미 제10군단, 두만강 해산 진입
1950. 12. 15~24 -  흥남철수 단행
1951.  1.  4  -   후퇴
1951.  3.  15 -  국군, 서울 재탈환 및 북진
1951.  4.  12 -  맥아더원수 해임, 리지웨이 유엔사령관 임명.
1951.  6.  23 -  말리크 소련 유엔대표, 휴전회담 제의.
1951.  7.  10 -  개성에서 휴전회담 개시
1951. 10. 25 -  휴전회담장 판문점으로 이동
1951. 10. 28 -  군사분계선 설정 합의
1951. 12. 18 -  쌍방 포로명단 교환
1953. 4. 20~26  - 부상병 포로 교환
1953. 6. 8     -  포로 송환문제 타결
1953. 6. 18    - 이승만 대통령, 전격적 반공포로 석방
1953. 7. 27    - 휴전협정 조인. 

 


참수리 357호정 (Patrol Killer, Medium (PKM0 357):  

 

한.일 월드컵이 한창이던 2002년 6월 29일 북한 경비정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함에 따라 제2의 연평해전이 발생하였고, 우리 고속정은 긴급 출동하여 경고방송과 함께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도록 차단 기동을 실시하였다. 이에 북한 경비정은 아무런 경고없이 우리 고속정에 대하여 기습공격을 가해왔으며 우리 해군함정들은 단호하게 대응하여 북한 경비정 2척을 대파하고, 30여명의 인명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과정에서 우리 해군은 북한군이 쏜 포탄 258발로 참수리 정장을 포함한 장병 6명이 선상에서 전사하고 이 고속정 참수리-357호정은 침몰되었다. 전시된 참-357호정은 국민안보의식 고취를 위해 선체는 실물과 동일하게 1:1로 제작한 것이며, 실물 해군제2함대사령부 안보공원에 전시되어 있다.  

 

 

 

참수리급 고속정

길이 37m, 폭 6.9m, 총 배수량 170t, 최대속도 68km/h, 항속거리 1,111km
무장: -40mm 보포스 단장포, - 20mm 벌칸포, - K6 중기관총


1967년 북한 명태잡이 어선의 월경을 막는 작전 중이던 해군의 소형 구축함(당포함)이 북한의 해안포 공격으로 침몰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대한민국 국군은 연안 방어를 위한 미사일 고속정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후 참수리급 고속정이 1978년에 개발되었다. 30여년간 대한민국의 연안을 지켜온 참수리급 고속정은 현재 기종의 노후로 인해 차세대 고속함정인 윤영하급 유도탄고속함과 검독수리급 고속정으로 점차 대체되고 있다.     

 

 

참수리 357호 갑판

 

 

참수리 조타실

 

천암함 조타실 동영상

 

 

 

천암함 갑판 동영상

 

 

6.25 전쟁 전사자 명비 (회랑)

 

6.25 전쟁 참전국 기념비

UN / 미국 / 호주 /  카나다 / 뉴잘랜드 / 터키 / 남아프리카공화국 / 벨기에 / 에티오피아 /  스웨덴 / 덴마크 / 독일 

 

6.25 전쟁 참전국 기념비

대한민국/ 영국 / 네델란드 / 프랑스 / 태국 / 그리스 / 룩셈부르크 / 인도 / 노르웨이 / 이탈리아

 

평화의 광장

 

월남전참전부대:

 

아라우부대 / 한빛부대/ 아크부대 / 오쉬노부대 / 단비부대 / 청해부대 / 동명부대 / 다이만부대 / 자이툰 부대 / 제마부대 / 서희부대 / 다산부대 / 동의부대 / 상록수부대 / 국군의료지원단 / 은마부대 / 십자성부대 / 비둘기부대 / 백마부대 / 맹호부대 / 청룡부대 / 주월한국군 사령부 

 

 

국방부 / 육군 / 해군 / 공군 / 해병대 / 수도사단 맹호부대 / 제1사단 전진부대 / 제2사단 노도부대 /  제3사단 백골부대 / 제5사단 열쇠부대 / 제6단 청성부대 / 제7사단 칠성부대 / 제8사단 오뚜기부대 / 제9사단 백마부대 / 제11사단 화랑부대 / 20기계화보병사단 결전부대 / 제21사단 백두부대 / 해군 제1함대 / 공군 제10전투비행단 / 제1해병사단 / 경찰청  

 

 

전쟁기념관

 

전쟁기념관 약도

 

내부 출입구 & 홀

 

층별안내:

 

3F:  1. 6.25전쟁실 3 (UN실),  2. 기증실, 3. 해외파병실,  4. 국군발전실
2F:  1. 호국추모실,  2. 6.25전쟁실1,  3. 6.25전쟁실2,  4. 기획전시실
1F:  1. 전쟁약사실1,  2. 전쟁역사실2,  3. 대형장비실,  4. 이병형홀
B1/B2: 주차장

 

6.25전쟁실1.

 

01. 상징존, 02. 전쟁의 배경과 원인, 03. 북한군의 기습남침, 04. 유엔의 참전과 지연작전, 05. 낙동강 방어전투, 

06. 학도의용군의 참전, 07. 인천상륙작전, 08. 4D 영상체험관, 09. 서울 수복, 10. 영상실

 

 

6.25 전쟁 일람표

 

전쟁지도자실

 

 

자유의 수호자들: 

 

1. 맥아더 원수, 2. 리지웨이 장군, 3. 클라크 장군, 4. 정일권 장군, 5. 이숭만 대통령, 6. 트루먼 대통령, 7. 아이젠하워 대통령, 8. 신현준 장군, 9.백선엽 장군, 10. 차일혁 경무관, 11. 이종찬 장군, 12. 김정렬 장군, 13. 손원일 제독, 14. 워커 장군, 15. 벤플리트 장군, 16. 김성은 장군, 17. 김종오 장구느 18. 송요찬 장군 
 

새벽의 침략자들:


1. 남일, 2. 최용건, 3. 모택동, 4. 김일성, 5. 김책, 6. 평덕회, 7. 스탈린

 

김일성, 스탈린, 모택동이 일으킨 전쟁


1949년 부터 김일성은 최고지도자인 스탈린에게 남한 침략을 승인해 줄 것을 여러 차례 요청했다. 미국과의 충돌을 원치 않았던 스탈린은 남한이 먼저 공격해 올 경우만 반격할 수 있다고 김일성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소련의 원폭실험 성공, 중국대륙의 공산화 등 국제환경의 변화에 따라 스탈린도 입장을 바꾸었고, 1950년 3월말 부터 한달 간 김일성과의 3차례 회담을 통해 남침전쟁을 승인하였다. 스탈린은 전쟁을 시작하기 전 중국 공산당 주석인 마오쩌뚱의 동의를 받도록 조건을 달았다. 이에 따라 1950년 5월 13일 마오쩌뚱을 방문한 김일성은 스탈린과 합의한 내용을 보고하고 협력을 요청하였다. 마오쩌뚱은 앞서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소련과 북한의 지원을 받은 바 있었기 때문에 결국 동의하고 미군이 참전할 경우 지원을 약속하였다. 

스탈린:

 

" 우리가 핵 개발에 성공하여 미국 내에서는 한국문제에 개입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고, 중국공산당이 승리하여 한국문제에 보다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남침을 적극 추진하기 바란다. 전쟁은 반드시 전격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한국군이 제정신 차릴 틈을 절대 허용해선 안된다." - 출처: 스탈린-김일성 모스크비 극비회담 (1950.3.30)- 당시 '회의록' 사본 발췌.       

 

김일성:

 

" 남한측이 수용할 수 없는 '평화통일방안'을 제의하고, 이를 거부하면 전투행위를 개시하여 누가 최초로 전투행동을 시작했는지 은폐하도록 하겠다. 참고로 우리가 남침하여 서울만 점령하면 남로당 20만 지하당원이 봉기에 참여할 것이다."   - 출처: 스탈린-김일성 모스크비 극비회담 (1950.3.30)- 당시 '회의록' 사본 발췌.   

" 스탈린 동지가 남침에 동의하면서, 최종 결정은 모택동 동지와 협의를 통해 하라고 했다. "     - 출처: 스탈린-김일성 모스크비 극비회담 (1950.3.30)- 당시 '회의록' 사본 발췌.       
    
모택동:

 

"조선의 통일은 평화로운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며 전쟁을 통하는 길 밖에 없다. 그리고 이렇게 작은 영토를 위해 미국은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만약 미군이 참전하면 우리가 지원하겠다. "   - 출처: 모택동-김일성 북경 회담 (1950.5.13)- '소련외교문서' 제3권.       

 

 

스탈린이 마오쩌뚱에게 보낸 암호 전문

 

북한군 제1사단 전투명령 1호

 

6.25전쟁 초기(전쟁발발~낙동강 방어)의 전쟁지도:

 

6.25전쟁이 발발 이후 유엔군이 참전하고 유엔군사령부가 창설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국군의 작전 통제권을 유엔군 사령관에게 이양함으로써 국군을 포함한 유엔군의 전쟁ㅈ;도는 미국을 포함한 유엔과 한국의 대통령에 의해 수행되었다. 북한은 미군 참전 이후 최고사령관에  김일성을 임명하고 그 아래  전ㅅ헌사령부를 설치함으호써 전쟁지도체제를 김일성 중심으로 강화해 나갔다. 

유엔군의 참전:


1050년 6월 25일 긴급소집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의 기습남침을  침략행위로 규정하고, 북한은 즉시 38도선 이북으로 군대를 철수시킬 것과 회원국들은 유엔에 원조를 제공할 것을 권고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미국의 참전 이후 유엔회원국들의 참전 제의가 잇따라 16개국의 전투부대와 5개국의 의료지원단이 참전하게 되었으며, 유엔군 사령관에는 맥아더 장군이 임명되었다.  

최후의 긴박한 상황...풍전등화같은 운명 앞에서 마지막 조금 남은 땅을 사수하고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전세를 역전 시킬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늘의 도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엔군의 전쟁 지도체계 (1951년 7월 기준)  &  북한군의 전쟁 지도체계 (1950년 12월 기준)

 

 

6.25 전쟁 중기(인천상륙작전~재반격)의 전쟁지도

 

국군과 유엔군은 미 합참으로 부터 전략지침을 받은 유엔군사령관의 작전지도하에 전쟁을 수행하였다. 북한은 중공군 개입 이후 소련의 동의를 얻은 후 조중연합사령부를 설치하고 전쟁지도체계를 일원화 하였다. 즉 모스크바와 베이징(북경)으로 부터 전략지시를 받은 조중연합사령관이 중공군과 북한군의 기존의 명령계통을 통해 전쟁을 지도하였다. 

국군 단독으로 38도선 돌파: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역전 시킨 국군과 유엔군은 전세를 역전시키고 북진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9월 29일 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이 38선을 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군 참모총장 정일권 장군을 부러 독자적인 38선 돌파를 지시했다. 10원 1일 한국군이 먼저 38선을 넘었고, 유엔군 사령부는 10월 2일 일반명령 2호로 북진을 승인했다.     

 

트루먼 대통령의 참전배경

트루먼 대통령은 에치슨 국무장관으로 부터 한국에서의 전쟁상황을 보고받고, '공산주의자들이 한국을 침략한 것은 과거 독일.이탈리아.일본이 인접 소국에게 향했던 것과 같은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북한의 남침을 방치하면 제3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도화선이 돨 뿐만 아니라 유엔의 평화 정신과 존립이 위태롭게 될 것으로 판단하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공산침략을 자유세계의 힘으로 단호히 응징하여 제3차 세계대전의 불길을 차단하고, 나아가유엔의 권위를 수호하겠다는 신념에 따라 한국 참전을 결정하였다

1950.6.26
트루먼 대통령의 최초조치:

트루먼 대통령은 한국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국방.외교 관련 참모들을 소집하여 대책회의를 주재하였다. 그는 "맥아더 장군에게 한국에 조사단 파견과 한국이 요구한 군수물자와 미 해,공군을 지원하고, 대만 해협에 미 제7함대를 파견" 하라고 지시하였다. 특히 "미국은 유엔의 권위 아래 행동할 것이며, 미국의 철수를 보호하기 위한 군사행동은 제한할 것"을 강조하였다.   

 

제2차 유엔결의안 투표 장면

 

유엔참전의 주역과 지도자들:

 

다그 함마셀드 제2대 유엔사무총장(재임 1953-1961),  트루먼 대통령 (1884-1972), 맥아더 원수(1880-1964),

아이젠하워 미국대통령(1890-1969), 이승만 대통령(1890-1969)

 

콜린스 장군으로 부터 유엔기를 인수하는 맥아더 장군

 

초대 유엔군 사령관  1950. 7~ 1951. 4


인천상륙작전의 영웅


더글라스 맥아더 육군 육군 원수 
1880.1. 26- 1964. 4. 5

1980. 1. 미극 아카소주 리틀록 출생
1903.     미국 육군사관학교(웨스트 포인트) 수석 졸업
1919.  육군사관학교 교장
1930.  육군참모총장, 육군 대장
1937.  퇴역
1941. 7. 현역 복귀, 육군 중장
1941. 12. 육군대장
1942. 4. 남서태평양지구 총사령관
1944. 12.  육군원수
1945. 8  연합군 최고사령관
1947. 1. 극동군사령관
1950. 7. 초대 유엔군 사령관
1954. 4. 퇴역 

 

 

전쟁과 우정

 

 

 

최후의 보루, 낙동강 방어선 전투

낙동강 방어선은 마산-왜관-영덕을 잇는 총 연장 길이 240km의  방어선이었다. 그 중 마산-왜관의 120km 구간미군 3개 사단이, 왜관-영덕까지 120km 구간국군 5개 사단이 담당했다. 이 때 워커 미8군사령관은 " 한 치의 땅이라도 적에게 빼앗기면 수많은 전우의 죽음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끝까지 싸워야 한다 (1950년 7월 29일)"며 " Stand or Die "라는 최후 방어명령을 하달하였다. 이로써 국군과 유엔군은 연결된 방어선을 구축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북한군을 막아내게 되었다. 

사진: 낙동강 방어선 전투 요도:

마산 (↑ 25사단) -  ( 2사단) 창녕 - ( 27여단) - ( 17사단) 대구 -  ( 1사단) - ( 6사단) 영천 - ( 8사단) - ( 수도사단) - 포항 (   3사단)   

 

 피해상황

3년간 지속된 6.25전쟁은 대한민국에게 막대한 인명 피해와 재산상 손실을 가져왔다. 사상자가 약 150만명에 달하였고, 20만명의 행방불명과 25만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재산상의 피해액은 약 18억 달러 내지 30억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전쟁으로 인해 공업시설은 42%, 발전시설은 41%, 탄광시설은 50%, 주택은 3분의 1이 파괴되었다. 국가의 기간시설 및 공공시설인 도로, 공공건물, 교량, 공항, 항만, 공장, 발전시설의 대부분이 파괴됨을써 정상적인 국가운영이 어렵게 되었다. 

 

물자 및 재정지원 (36개국):

 

물자 및 재정지원은 최초 개전 직후부터 1952년 5월까지 한국민간구제단(CRK)를 통해서 라이베리아, 레바논, 리히텐슈타인, 멕시코, 바티칸, 베네수엘라 등 19개국이 지원을 하였다. 1953년 12월 까지 유엔한국재건단(UNKRA)을 통해서 과테말라, 자유중귝(대만) 등 13개국이 지원하였다. 그리고, 1956년 6월 까지 추가로 리히텐슈타인 등 4개국이 전후 복구를 지원하였다. 기타 유엔 긴급구제계획(ERP)에 의거 1956년 6월 30일 까지 어이티.페류가 물자를 지원하였다. 결과적으로 개전 직후 부터 전후 복구 기간까지 우리나라에 물자를 지원한 국가는 총 38개국이었다. 당시 독립국가 93개국 중 63개국(68%)이 대한민국을 지지하거나 지원하였다. 

* 병력 지원 16개국 및 의료지원 6개국도 많은 물자와 재정을 지원하였으나, 본 현황에는 물자 및 재정을 지원한 국가만을 포함하였음. 

지원 의사 표명 (3개국) :

전쟁 지원국에는 지원 의사를 푬명한 3개국(니카라과, 볼리비아, 부라질)도 포함된다. 니코라과는 쌀과 주정을 지원하겠다고 제안하였으나 수송 문제로 인해 지원이 제한 되었고, 볼리비아는 구호 전문장교 30명의 파견을 제의하였으나 유엔군사령부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브라질은 유엔의 요청에 따라 270만 달러 상당의 물자를 지원하기로 하였으나 1958년 국내문제로 지원하지 못했다,  

 

 

 

받는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국제개발협력, 국제평화유지활동

 

유물은 지나간 역사를 바르게 알 수 있는 거울이며

후손에게 물려줄 훌륭한 문화유산입니다.

 

일본 항복 문서 조인식에서 서명하는 맥아더 장군 (미주리호 함상) 1945.09.02

 

장단지구 전투에서 머리에 박힌 파편

 

대한민국을 구한 영웅들

 

유광연 일등상사

 

평화의 광장

 

6.25 전쟁 전사자 명비 (회랑)

 

 

전쟁기념관 동영상

 

'평화통일을 갈망하는 시계'

" 통일이 이루어지는 날, 이 시계를 시계탑에 올려 통일의 시각을 표시할 것입니다. "

 

전쟁과 평화를 상징하는 쌍둥이 시계탑

50.6.25 0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