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응봉산 개나리는 아직 멀었습니다.
- ( 2024.03.20 )
《 응봉산 》
응봉산 개나리 축제가 내일(3.21)부터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분비는 날을 피하여 축제 하루 전날 응봉산을 가보았습니다. 갈 때는 노란 개나리 천국인 응봉산을 마음에 그리며 기대를 많이 하면서 갔습니다. 아, 그런데 응봉산 개나리는 방금 잠에서 깨어나 활짝 피어있지 않았습니다. 이게 뭔가? 하고 너무 실망이 컸습니다. 과연 내일 부터 개나리 축제에 개나리 보러 온 사람들에게 주최측은 무어라 말할까 궁금해 집니다. 개나리 개화 상태가 일기의 변화로 여의치 않았을 때는 축제일을 과감하게 변경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정상에서는 바닥에 자리를 설치한다 하며 축제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참으로 황당하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나는 오늘 너무 실망을 해서 한 일주일 정도 경과해서 다시 응봉산 개나리를 찾아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아, 온 산 전체에 개나리가 피어 서울 시민들에게 제일 먼저 봄소식을 알려준다는 응봉산 개나리는 어디 쯤 오고 있을까요?
( ▲ 2023.03.23: 지난해 응봉산 개나리 )
◆ 2024 응봉산 개나리축제
2024.3.21(목) ~ 24(일)
21(목):
- 개막공연 및 개막식
- 개나리 묘목 심기 행사
- 체험행사
- 개나리 포토존
22(금)~23(토)
- 체험행사 및 먹거리장터
- 개나리 포토존
24(일)
- 축하공연
- 백일장 및 그림 그리기 대회
- 체험행사 및 먹거리장터
- 개나리 포토존
시상식:
- 5월중 개최 (성동구청 3층 대강당)
문 의: 성동구청 문화체육과(02-2286-5203)
▶ 산 행 : 걸음수 10,638 steps, 거리 6.74 km, 소모열량 355 kcal, 소요시간 01:48 hrs, 속도 3.7 km/h.
▶ 코 스 : (경의중앙선) 응봉역 - 응봉산 ( 팔각정 ) - 용비교 - 서울 숲 - 성수구름다리 - 한강변 산책로 - 뚝도시장.
경의중앙선 응봉역
광희중학교
응봉산 가는 길......-> 755m 응봉산 팔각정
응봉은 산모양이 매처럼 보이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하며, 조선 시대 왕들이 매사냥을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한강과 중랑천의 합류부에 위치하여 경관이 수려하고 한강 조명 명소로서 매년 1월 1일에는 '해맞이축제, 봄철에는 '개나리축제'가 개최된다.
아주 가파른 길이다.
본격적인 개나리 구경을 기대해 본다.
아이쿠, 이게 쵀치 개화상태이다. 너무 실망. 1주일 정도 후에애 완전 만개할 것 같다.
붉은 매화가 아름답다.
중랑천 & 서울 숲 방향
중랑천...한양대학교 방향, 청계천 하류 방향
서울 숲, 용비교, 중랑천 하류, 한강, 강남 방향
참매
정자 쉼터
서울 성동구 응봉동 일대
성동의 역사. 문화 이야기
전통 매사냥 방법:
우리나라의 경우 가을 추수가 끝날 무렵부터 시작하여 이듬해 봄까지 야산이나 들판에서 꿩이나 토끼 등을 사냥했다. 이를 위해서 사냥철이 되면 야산에 그물을 쳐서 매를 잡는데, 처음 잡은 매는 야성이 강하여 난폭하기 때문에 숙달된 봉받이가 나서서 길을 들인다. (매를 다루는 사람을 봉받이 또는 매꾼이라 한다.) 봉받이가 자기와 함께 사냥을 나설 매를 복종 시키기 위해 방안에 가둬놓고 키운다. 여러 사람의 팔뚝에 번갈아 앉혀 가며 매가 사람과 친해질 수 있도록 길들이고 매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봉받이, 꿩을 모는 털이꾼, 매가 날아가는 방향을 보는 매꾼 등 5~6명이 한 팀을 이뤄 사냥에 나선다. 야산에서 털이꾼들이 우~우~우~ 소리와 함께 작대기로 땅을 치며 앞으로 나아가면, 수풀 속에 숨었던 꿩들이 날아오른다. 이때 털이 꾼은 애기야! 하고 목이 터져라 외쳐 봉받이가 매를 날릴 수 있도록 돕는다. 애기야! 소리가 들리면 봉받이는 매를 날려 보내며 매가 나간다! 라고 소리친다. 그러면 매는 쏜살같이 날아가 꿩을 덮쳐 잡는다. 그런데 매가 꿩을 잡으면 곧바로 꿩을 빼앗아야지, 그러지 않으면 꿩은 곧바로 매의 먹이가 되어 버린다. 또 마음껏 포식한 매는 주인에게 되돌아오지 않고 야생으로 날아가버린다. 그야말로 꿩 잃고 매 잃는 꼴이 되는 것이다. - 출처: 한국전통매사냥보전회,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왕들의 사냥과 독기:
조선 태조 때 부터 이곳 응봉산에 매를 사육하는 응방을 만들었고, 사냥할 때는 임금을 상징하는 독기(纛旗)를 꽂고 사냥을 즐겼다고 한다. 서울의 뚝섬이라는 지명도 역대 왕들이 독기를 꽂아 사냥을 했던 섬이라는 뜻에서 둑도 혹은 독도라 불리다 뚝도, 뚝섬으로 바뀌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여기에서 독이란, 장대에 소나 꿩의 꼬리털을 붙여 치우(중국의 전설 속 군신(軍神)으로 숭배된 인물)의 머리 형상 처럼 만든 깃발을 가리킨다. 이 독기는 왕의 사냥 뿐 아니라 국왕이 군대를 사열하거나 출병하기 전 군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도 쓰였다. 출정할 때는 군영을 대표하는 대장기로 사용되었다. 이렇게 조선의 왕들이 왕권을 상징하는 고유한 의장인 독기를 가지고 매사냥을 즐겼다는 사실은 왕들의 매사냥이 조선의 중요 행사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응방, 그리고 응봉산:
응방은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매의 사육과 매사냥을 맡았던 관청을 뜻하며, 응사는 그곳에 속하여 매를 부려 꿩을 잡는 일을 맡아보았던 벼슬을 뜻하는 칭호이다. 응봉산이라는 이름은 조선 시대 응방이 있던 산이라는 역사적 사실에서 유래되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나라를 세우기 전 부터 살곶이벌과 응봉산 일대에서 매사냥을 즐겼다. 매를 풀어놓고 꿩을 사냥하며, 한강의 아름다운 풍경까지 감상할 수 있으니 금상첨화였을 것이다. 결국 그토록 즐겨 찾던 곳이라 즉위 4년(1395)에는 매사냥을 관장하는 응방(사냥에 사용할 매를 사육하는 일을 맡아보던 정부 기구)까지 설치했다. 이후 태종과 세종도 응봉산에서 매사냥을 즐겼으며, 성종 때까지 100여년간 임금이 이곳에서 매사냥한 기록이 무려 151회에 달한다.
또한 응봉산의 남쪽 기슭에 아래 쪽 한강 연변은 조선 시대 때 한양의 경치 좋은 장소 10곳, 즉 경도십영(京都十詠)의 하나로 손꼽히던 명승지로 입석조어(立石釣魚)의 대상지인 입석포(立石浦), 중랑천과 한강이 합류하여 천연의 낚시터를 이루었기 때문에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고 한다. - 출처: 한국전통매사냥보전회, <조선왕조실록,> <고려사> 충렬왕 3년, KBS역사스페셜.
<- 응봉산 팔각정 225m, <- 모험놀이장 200m, <- 출렁다리 70m, -> 150m 암벽등반공원
노란 개나리는 아직도 소식이 그렇구나!
응봉공원 포토 아일랜드
서울의 남서 방향의 전망과 한강, 한국종합무역센터, 서울 숲, 청계산, 관악산 등의 경관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지역입니다. 또한 해돋이 장소 및 야경이 아름다운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시민들이 찾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한국종합무역센터 / 대모산 / 서울 숲/ 구룡산 / 성수대교 / 청계산 / 한강 / 올림픽대로 / 우면산 / 강변북로 / 동호대교 / 관악산
서울 숲 & 용비교, 멀리 성수대교
서울시 선정 우수조망명소 (응봉산 포토 아일랜드)
(경관특성) 서울의 남.서 방향의 전망과 한강, 롯데월드타워, 청계산, 관악산의 경관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지역입니다. 또한 해돋이 장소 및 야경이 아름다운 곳으로 널리 알려져 많은 시민들이 찾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롯데월드타워/ 동부간선도로 / 영동대교 / 한국종합무역센터 / 서울 숲/ 성수대교 / 한강 / 청계산 / 중랑천 / 올림픽대로 / 우면산 / 동호대교 / 관악산 / 강변북로 / 서달산
앗, 응봉산 정상....팔각정...
응봉역 590m ↘
응봉산 정상 전망대
응봉산 조망 지점...응봉산 서울 밤풍경
응봉공원 포토 아일랜드:
서울의 남.서 방향의 전망과 한강, 롯데월드타워, 청계산, 관악산의 경관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지역입니다. 또한 해돋이 장소 및 야경이 아름다운 곳으로 널리 알려져 많은 시민들이 찾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동부간선도로 / 남한산 / 롯데월드타워/ / 중랑천 / 청담대교 / 잠실종합운동장 / 영동대교 /
한국종합무역센터 / 대모산 / 서울 숲/ / 성수대교 / 구룡산 / 한강 / 청계산 / 올림픽대로 / 우면산 / 동호대교 / 관악산 / 강변북로 / 한남대교
'응봉산정' 팔각정
내일 (3.21) 응봉산 개나리 축제 개막식 준비 작업
성동의 역사.문화 이야기
살곶이 다리(제반교,전곶교,전관교):
살곶이 다리는 지금까지 남아있는 조선시대의 돌다리 가운데 가장 긴 다리(78m)이다. 이 다리가 놓이게 된 배경은 세종 때 노상왕(정종)과 상왕(태종)이 이곳에 전각을 짓고 자주 왔으며, 매를 놓아 사냥을 즐기는 일도 잦아 그때마다 수행하는 신하들이 살곶이 벌에 흐르는 내를 건너는 일이 몹시 힘들었다. 그리하여 세종 2년(1420년) 영의정 유정현과 공조판서 박자청에게 명하여 공사를 하도록 하였으나, 강의 너비가 너무 넓고 홍수를 이겨내지 못해 다리의 기초 부분만 세우고 중지하였다. 다리 공사가 오래도록 중지된 것은 상왕인 태종이 세종 4년에 죽은 뒤로는 왕이 나들이를 거의 하지않았고, 세종 3~4년 이후로는 도성 안 개천 공사 때문에 도성 밖의 다리 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엇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양과 지방을 여행하는 선비나 백성들이 살곶이다리가 필요하다고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성종6년(1475년)에 공사가 재개되어 성종 14년(1483년)에 다리가 완공되었다. 살곶이다리라는 이름은 이 일대를 살곶이벌로 부른데서 유래하였다. "한경식략" 권2 교량조에 보면 공식명칭은 제반교였다. 살곶이벌은 국왕의 군대 사열장과 매 사냥터로 이름이 났던 곳이며 살곶이다리는 태종과 순조가 모서져 있는 헌릉.인릉과 성종과 중종이 모셔진 선릉.정릉에 갈 수 있는 길목이어서 임금이 수시로 행차하였다. 또한 서울과 여주, 이천, 충주, 광주를 연결하는 교통상.통신상 중요한 구실을 하기도 하였다. 살곶이다리는 1967년 12월 15일 사적 160호로 지정되었다가 2011년 12월 23일에 보물 1738호 변경 지정되었다.
성동의 역사.문화 이야기
중랑천:
중랑천은 의정부시 수락산 북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성동구의 장안교 부근에서 청계천과 합치어 한강으로 유입된다. 중랑천의 총 길이는 36.5km이며, 총 13개 지류로 구성되어 있다. 중랑천은 한강의 제1지류로 의정부시 수락산 북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양주군에서 광사천, 어둔천과 합류되고 의정부에서는 부용천, 백석천, 회룡천, 호원천 등의 지류와 합류되어 서울시로 유입된다. 서울시에서는 도봉구, 노원구, 성북구, 중랑구, 동대문구, 성동구 등 6개 구를 거치는 동안 각 행정 자치지구의 자연스런 경계역할을 하고 있다. 하류에서는 장안교 부근 두모포 앞에서 합쳐지고 다시 한강으로 합류되므로 조선 시대에는 배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수량이 풍부한 강이었다. 따라서 이곳에는 풍류를 즐기는 사람이 자주 왕래하던 곳이었고, 오늘날에는 청계천의 복원과 중랑천의 수질 개선 등의 노력에 힘입어 하류는 각종 철새 도래지로서 각광을 받고 있다.
성동의 역사.문화 이야기
뚝섬의 유래와 옛 모습:
▷ 고려시대: 동교(東郊)로 불림. 강감찬 장군이 호랑이를 무찌른 이야기가 전래됨.
▷ 조선시대: 임금이 사냥을 하고 무예를 검열하던 곳.
▷ 근대:
. 1908년: 서울시 최초로 뚝도 정수장 준공. 뚝도수원지 제1정수장.
. 1954년: 뚝섬 서울 경마장 개장. 지금은 궁마장이 남아있슴.
. 1986년: 서울시 체육공원 개장.
이곳은 조선 태조 이성계 때부터 임금의 사냥터였다. 터조부터 성종 때 까지 100여년 동안 임금이 이곳에서 150차례나 사냥을 하였다. 또한 매년 봄 경칩(驚蟄)과 가을 상강(霜降) 때 왕이 군대를 몸소 사열하거나 싸움터로 내 보낼 때 이곳에 독 독기(纛旗: 소꼬리나 꿩꽁지로 장식한 큰 깃발)을 세우고 돋 독제(纛祭)를 지냈으며, 한강과 중랑천으로 둘러쌓인 섬같다 해서 '독기를 꼿은 섬'이란 뜻에서 '독도(纛島'라고 불리다 '뚝섬'으로 불린다.
뚝섬은 한강이 북서쪽에서 흘러오다 남서쪽으로 흘러가는 곳인 한강과 청계천이 만나는 지점에서 발달된 벌람원 지구로, 인공 둑(7,090m)을 쌓아 침수지를 공장과 주택지로 만든 곳이다. 뚝도의 제방은 크게 2열로 쌓았는데 하나는 현재 뚝섬 시가지가 형성된 뚝도정수장에서 유원지에 이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살곶이다리((箭串橋: 전건교)의 넓은 들판 남쪽 강변에 잇어서 현 자양동을 연결하는 곳이다. 뚝섬(둑도)은 전건평(箭串橋)의 넓은 들판 남쪽 강변에 있어서 주의의 풍광이 아름답고 강물이 맑고 잔잔하여 유원지로서 좋은 조건을 갖추었다. 전관평은 국왕이 군대를 검열하던 곳이자 현재의 강남 봉은사(奉恩寺)와 삼전도(三田渡) 가 있는 수도산(修道山) 쪽으로 건너는 나루터이기도 하였다.
성동의 역사.문화 이야기
입석포:
한강 본류와 중랑천이 합류하는 서울 성동구 응봉동 한강변에 있는 조선 시대의 작은 나루였다. "동국여지승람"에 입석포는 두모포 상류에 있다고 되어 잇는데 두모포는 지금의 옥수동 한강변 동호대교 북단에 있었던 포구를 가리킨다. 한강변 큰 바위들이 마치 사람이 서 있는 듯하다고 하여 입석포(立石浦)라 불렀으며, 우리 말로는 선돌개라 하였다. 뒤로는 응봉이 높이 솟아있고 강변 곳곳에 기암이 있어 경치가 뛰어났던 곳으로, 예부터 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풍광을 예찬했다. 입석포는 천연의 낚시터로도 이름이 높았다. 조선 초기 성종(재위 1469~1494) 때 성종의 형 월산 대군(月山 大君)을 비롯하여 강흐맹, 서거정, 이승소, 성임 등의 문신들이 한성의 아름다운 풍경 열 개를 정해 한도십영(漢都十詠)이라 칭하고 그에 관한 시(詩)를 남겼는데 한도십영 중 하나가 바로 입석조어(立石釣魚, 한강 입석에서의 낚시)이다. 입석포 앞 한강에는 저자도(楮子島) 라는 섬이 잇었다. 닥나무가 많아 저자도라 불렀던 이 섬은 절경을 자랑하는 유명한 명승지로, 유람객들이 많았다고 한다. 저자도에는 고려 말의 문신 한종유의 별장이 있었고 조선 세종은 이 섬을 둘째 딸 정의공주에게 주었고 공부의 아들 안빈세가 물려받았다. 1930년대만 해도 길이 2KM(동서)에 달했던 저자도는 1970년대의 강남 아파트 건설 때 무분별한 골재 채취로 지금은 형태만 겨우 남아있는 상태다. 입석포 동남쪽으로는 뚝섬과 광나루를 연결하는 드넓은 살곶이벌(전관평) 평야 지대가 펼쳐져 있어 그 풍치 또한 뛰어났다고 한다. 조선시대 입석포는 강 너머 지금의 압구정으로 건너가려는 행인과 저자도 유람객들, 입석포에서 낚시와 경치를 즐기려는 이들로 북적였으며ㅡ 여인들은 입석포의 입석(선돌. 선바위)에 치성을 들이고, 아이들은 놀이터로 삼앙ㅆ다 한다. 입석포의 수려했던 경관은 국철 1호선 경원선 철로 아래에 묻혀버렸다.
성동의 역사.문화 이야기
응봉산:
응봉은 산이 높지 않으나 경관이 빼어나고 임금이 사냥할 때 이곳에서 매를 놓아 꿩을 잡기도 해 매봉 또는 응봉(鷹峰, 매봉우리) 이라 불리기도 했다. 조선 태조가 살곶이벌에서 매사냥을 즐기기 위해 즉위 4년(1395년)에 매사냥을 관장하는 응방*을 한강 위, 곧 지금의 응봉산 기슭에 설치하였다.
* 응방: 고려와 조선시대에 사냥에 쓸 매를 사육하는 일을 맡아보던 정부기구.
응봉은 조선 태조가 한양에 도읍하기 전에더 동교(東郊)에서 매를 놓아 사냥을 했던 곳이고, 그 후 태종, 세종도 이곳에 나와 매사냥을 즐겨했다. 태조 때부터 성종 때가지 100여년간 151회나 매사냥을 했다는 기록이 고서에도 나와있다. 암반층의 지질로 구성되어 있으며,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개나리가 주종을 이루는 산으로 매년 4월이 되면 응봉산 일대에 개나리 꽃이 피어 장관을 이룬다. 4월 1일 부터 4월 10일경에는 산 전체에 노란 개나리가 만발하여 장관을 이루기 때문에 1997년 부터 성동구에서는 개나리 축제 한마당을 열고, 이에 따라 어린이 그림 그리기 대회, 글짓기 대회, 사진 전시회, 노래 자랑, 먹거리 장터 등이 열린다. 성동구에ㅐ서 여는 이 한마당 문화축제는 서울의 명물이다. 응봉산은 독서당 길을 따라 왕십리를 거쳐 응봉동과 금호4가의 고개에 있어 한강을 굽어보고 있다. 산 정상에는 팔각정이 있어 한강의 야경을 볼 수 잇으며, 건너편에는 달맞이봉이 있다. 또한 응봉산 자락에는 암벽등반 시설이 있어 체력 증진과 여가 선용도 할 수 있다.
성동의 역사.문화 이야기
동호독서당:
독서당 소재지: 옥수동 극동아파트 입구.
조선 시대에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젊은 관리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하는 '사가독서'라는 제도가 있었다. 세종 8년(1426년)에 최초로 집현전의 권채, 남수문, 신석조 등을 선발하여 사가독서를 하게한 데서 독서당이 비롯되엇다. 독서당의 전성기였던 중종 10년에 동호 월송암 서쪽 기슭에 독서당을 착공하여 붕종12년 동호독서당을 완공하였다. 동호(두뭇개 앞 강) 독서당의 현재 위치는 서울 옥수동 부근으로 선조 때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질 때까지 학문을 연구하고 도서를 열람하는 도서관 기능을 수행하였다. 각종 사화와 임진왜란으로 기능이 중단되기도 하였으나 사가독서제는 계속되었다. 학문에 전념할 사람을 선발하는 과정은 매우 까다로왔다. 과거에 급제한 젊고 똑똑한 하위품계(종6품 전후)의 사람으로 뽑았으며 과거제로 등용된 후 더 이상 학습하지 않는 관리의 재교육도 하였다. 인품이 높고 덕망이 높아 선발된 이들은 조정의 적극적인 권장과 관심 속에서 학문에 정진함으로써 이곳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이곳 출신으로는 조광조, 주세붕, 이황, 정철, 이이, 유성룡, 이항복, 이덕형 등을 들수 있으며 약 340여년간 304명을 배출하였다. 독서당계회도 (보물 제867호,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를 통해 독서당의 옛모습을 엿볼 수 있다.
성동의 역사.문화 이야기
두뭇개: 동호
지금의 성동구 옥수동을 옛적에는 두뭇개라고 하였다, "동국여지승람" 한성부 산천 조에 "두무포가 도성 동남쪽 5리쯤에 있다."라고 한 바로 그 마을이다. 양주 땅에서 흐르는 중랑천이 도성 안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청계천 물과 합쳐진 다음 다시 서남쪽으로 꺾여 마을 앞 저자도에 못 미쳐서 강 본류와 합수하는 형국이므로, 두 물이 흐르는 물가 곧 두물개가 되고 다시 그것이 변하여 두뭇개, 한자어로는 두모포라 하였다. 강 가운데를 저자도가 막고 잇으므로 물살이 급하지 않고 물결은 항상 잔잔하였다. "동국여지비고" 산천 조에, "두뭇개가 도성 동남쪽 10리에 잇는데 동호라고 한다." 라고 한 대로 두뭇개 앞 강을 일면 동호라고 하였다. 용산 앞을 흐르는 용산강을 남호, 마포 앞을 흐르는 서강을 서호라고 불렀듯이 경강구간에서 이 세곳은 아름다운 강호로 손꼽혔다. 경강의 동쪽에 있는 호수 곧 동호 가에는 낚시터로 유명한 입석포가 잇었고, 언더과 노밭과 백사장으로 이루어진 저자도는 고려 때 부터 별장지였다.
성동의 역사.문화 이야기
배수지공원:
면적 7만 5,570㎡의 대현산배수지 위 공간을 활용하여 조성한 공원으로 , 5만 2,724㎡는 서울특별시 성동구, 나머지 면적은 중구에 속해 있다. 1998년 착공하여 2002년 10월 30일에 완공한 대현산배수지 공사 때 서울특별시 상수도사업본부가 공원을 함께 조성 하엿으며, 2003년 5월 31일에 문을 열었다...( 이하 생략)...
성동의 역사.문화 이야기,
금호 명칭의 유래 및 무쇠막 고개:
옛날 이곳에서 선철을 녹여 무쇠솥, 농기구 등을 주조했으므로 무쇠막, 무시막 또는 무수막이라고 했으며, 한자 이름으로는 수철리(水鐵里)이다. 주민들이 수철리의 철(鐵)자에 금 (金)을, 수(水)자에 호(湖)를 따서 이곳을 금호 또는 동무수막이라고 하였다. 아울러 금호동 4가에서 옥수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무쇠막고개, 수철리고개라고 하였다. 또는 고개가 크므로 큰고개라고도 불리었다. 이 고개를 무쇠막고개라 부르게 된 연유는 조선 시대에 고개 일대에 선철을 녹여 무쇠솥과 농기구를 만들어 국가에 바치거나 시장에 내다파는 장인인 야장들이 무쇠 가마터 대장간을 중심으로 많이 살앗기 때문이다.
성동의 역사.문화 이야기
안정사 터 마애불. 명문. 약사불:
조선 태조 4년에(1395년) 제작된 안성사 터 마애불.명문.약사불은 2009년 12월 안정사 대웅전을 철거하는 과정에서 대웅전 뒷편 암벽 감실에서 발견되어 성동구 향토 유적으로 지정되었다, 안정사 마애불은 조선 말기 불교와 민간 신앙이 결합돼 나타난 전형적인 마애불 양식이며, 그 옆에 새겨진 "나무산왕대신지위(南無山王大神之位)"로 볼 때 산신각을 대체한 산신 신앙의 대상으로 조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마애불이 새겨진 감실은 가로 약 1m, 세로 약 40cm, 깊이 30cm 정도의 크기로 1943년 대웅전이지어진 뒤 66년 동안 가려져 있었다.
성동의 역사.문화 이야기,
쌍호정과 조대비 생가 터:
소재지: 옥수동 삼성 아파트 108동 앞 쌍호정은 조 대비의 아버지인 풍운부원군 조만영의 집이었다.
1960년대까지는 집의 일부가 남아있었고 사람들이 살았다고 하나 지금은 도시개발사업으로 없어졌다. 조만영은 글친구와 사귀기를 좋아해 오늘날 옥수동 한강변인 동호에 쌍호정을 지어 강의 풍취를 즐겼는데, 순조 8년(1808년) 12월 6일 조 대비가 이곳에서 태어났으며 그날 밤에 호랑이 두마리가 정자 앞뒤 문을 지켰다하여 쌍호정이라 하였다. 조대비(1808~1890)는 철종이 자녀가 없이 세상을 떠나자 대왕대비로서 흥선군의 둘째 아들을 고종으로 앉힌 풍운의 여걸이었다. 조대비의 생가 규모는 무척 커 대비가 어렸을 때 글을 읽던 독서당이 북쪽 뒤 높은 곳에 1958년 까지 남아 있어서 대지의 넓이를 가늠케 한다. 생가 동쪽에는 울창한 노송이, 그 옆에는 조그마한 정자인 쌍호정이 잇었다고 한다.
* 조대비: 신정왕후. 순조의 아들 효명세지비로서 헌종의 어머니이다. 정조 -순조-호명세자-헌종-철종-고종.
응봉산정에 올라....
포토존 # 응봉공원전망대 # 인생삿
응봉산정 鷹峰山亭
서울숲.남산 길
1코스: 서울숲 -응봉산- 팔각정, 1.4km.
2코스: 응봉산 팔각정 - 독서당공원 - 대현산공원, 0.8km.
3코스: 대현산 공원 - 응봉공원 (배수지공원) , 0.9km
4코스: 배수지공원- 금호산 맨발공원, 1.0km.
5코스: 금호산 맨발공원 - 매봉산 팔각정, 1.6km
6코스: 매봉산 팔각정 - 버티고개-장충고개- 국립극장, 1.5km
7코스: 국립극장 - 남산 N서울타워, 1.2km
서울의 대표적인 공원인 서울숲과 서울의 역사가 담겨있는 남산을 연결하는 서울숲-남산 길은 자연과 역사, 문화를 동시에 접할 수 있는 , <도심속 체험 산책로>입니다. 서울숲, 응봉산, 대현산, 금호산, 매봉산을 넘어 버티고개를 지나 남산까지 걸으면서 서울의 아름답고 역동적인 사계절과 함께 한강의 우수 경관을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 응봉산 하산 길 ( -> 서울 숲 ):
서울숲.남산길(서울 숲) 1.4km ↘, 서울숲.남산길(남산) 7.0km ->,
옥수역 방향 하산 길
느릅나무
서울 숲. 옥수역. 응봉산 정상 갈림길 쉼터..
<- 1300m 서울숲.남산길(서울숲), <- 900m서울숲, -> 응봉산 정상 350m, -> 서울숲. 남산 길 (남산) 710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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