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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구릅/일상들 ( life )

남한산성 - ( 2024.05.03 )

by the road of Wind. 2024. 5. 4.

남한산성 

- ( 2024.05.03 )

 

남한산성 길을 걸어보았습니다. 남한산성은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병자호란비극적인 역사를 간직한 곳입니다. 한 때 국왕이 피신했던 곳, 남한산성 행궁이 있는 곳, 산천은 푸르고 유난히 소나무가 많은 곳입니다. 성곽을 따라 걸으며 바라보는 아름다운 경치는 마음을 아득하게 하고 어딘지 모를 애잔함을 느끼게도 하였습니다. 지금은 행락객들이 아주 많은 곳입니다. 남한산성 둘레길이 좋아 많은 사람들이 산책하며 밥도 먹고 즐거운 한 때를 보내려 찾아오고 있는 곳입니다. 남한산성 주차장은 빼곡히 많은 차들로 덮여있는 듯 했습니다. 남한산성은 대중교통이 편리한 곳입니다. 8호선 산성역 2번 출구 앞 버스정류소에서 남한산성 가는 시내 버스가 많습니다. 특히 주말이나 공휴일에는 산성역에서 남한산성 로터리까지 직행 버스가 운행되고 있습니다. 

 

 남한산성(南漢山城): 

 

경기도 광주시, 성남시, 하남시에 걸쳐 남한산(480m) 을 중심으로 하는 산성(山城)이다. 병자호란 때 우리나라의 치욕적인 수난의 곳이기도 하다. 대외정세에 대한 오판으로 인한 국제정치의 실패의 결과이다. 남한산성의 역사는 백제의 수도 하남위례성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조선 시대에 인조 숙종 때에 산성을 증축하여 오늘날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남한산성의 성벽은 국가사적 제57호, 남한산성은 1971년 경기도립공원 제158호, 2014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남한산성에는 원성과 외성, 옹성, 4대문, 암문, 치, 장대, 포루, 수구, 단, 묘, 공해, 정, 사찰, 제당 등 많은 시설물과 행궁이 있으며 그 중 성곽 ,수어장대,숭렬전,청량당, 현절사, 침괘정, 연무관, 지수당, 장경사, 망월사지, 개원사지, 남한산성 행궁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주요 시설에 대한 간단한 개략을 알아본다.  

- 성곽 : 원성과 외성으로 나뉜다. 원성은 하나로 연결된 본성이며, 외성으로 봉암성과 한봉성, 신남성이 있으며, 두 개의 돈대가 있다.
- 성벽: 원성은 높이가 약 3~7m내외다.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 성문: 남한산성에는 남문(지화문_至和門), 북문(전승문_全勝門), 동문(좌익문_左翼門), 서문(우익문_右翼門) 의 4대문이 있다. 
- 외성: 외성은 봉암성, 한봉성, 신남성의 3성이 있다.
- 옹성: 주 성곽에서 돌출 작은 성곽으로, 적군을 옆에서도 공격할 수 있다. 연주봉옹성, 장경사 신지옹성 등 총 5개의 옹성이 있다.
- 여장: 성위에 낮게 쌓은 담이다. 몸을 숨겨 총이나 활을 쏠 수 있게 만든 시설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하부는 석재로, 상부는 전돌을 사용한다.   
- 암문: 암문은 적이 관측하기 어려운 곳에 만든 성루가 없는 성문이다. 남한산성에 16개가 있으며, 우리나라 성곽 중에서 가장 많다.
- 수어장대(守禦將臺): 장군의 지휘소다. 2층으로 되어있으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 남장대 터:  제2남옹성 바로 곁에 있다. 지금은 주춧돌만 남아있다. 
- 동장대 터: 남한산성의 동쪽에 있던 장대로 수어청에 소속된 5영 중 좌영장이 지휘하던 동장대가 있던 곳이다.
- 남한산성행궁: 광주 행궁이라고도 불린다. 유사시 왕이 피난할 수 있도록 준비된 예비 궁궐이다. 총융사 이서의 계책에 따라 완성되었다.
- 숭렬전: 백제의 시조 온조왕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드리던 사당이다.
- 청량당: 수어장대 담 밖 서쪽에 있는 당집이다. 남한산성의 동남쪽 부분 축성 책임자 이회와 그 부인, 그리고 서북성 축조 담당 벽암스님의 혼령을 모신 사당이다. 이회는 모함으로 참수를 당했으나 후에 누명이 풀렸으며 이곳에 봉안되었다.
- 연무관: 군사들이 무술을 연마하던 곳이다. 현재는 건물 복원 작업을 위한 주춧돌만을 남기고 있다.
- 장경사: 대한불교 조계종 조계사의 말사이다. 남한산성 내에 존재했던 9개의 사찰 가운데 당시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현존하는 유일한 절이다.
- 국청사: 남한산성 안의 산성리에 있는 절이다. 승군의 숙식과 훈련을 담당하고, 비밀리에 군기와 화약,군량미 등을 비축하였던 사찰이다

 

남한산성 탐방안내도   

 1코스 (거리 3.8Km / 소요시간 1시간 20분):
산성로터리 – 북문(0.4km) – 서문(1.1km) – 수어장대(0.6km) – 영춘정(0.3km) – 남문(0.7km) – 산성로터리(0.7km)
 2코스 (거리 : 2.9km / 소요시간 : 60분):
산성로터리 – 영월정(0.4km) – 숭렬전(0.2km) – 서문(0.7km) – 수어장대(0.6km) – 산성로터리(0.9km)
▶ 3코스 (거리 : 5.7km / 소요시간 : 2시간):
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 현절사(0.1km) – 벌봉(1.8km) – 장경사(1.5km) – 망월사(1.1km) – 동문(1.0km) – 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4코스 (거리 : 3.8km / 소요시간 : 1시간 20분):
산성로터리 – 남문(0.7km) – 남장대터(0.6km) – 동문(1.1km) – 지수당(0.5km) – 개원사(0.3km) – 산성로터리(0.6km)
▶ 5코스 (거리 : 7.7km / 소요시간 : 3시간 20분):
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 동문(0.6km) – 동장대터(1.1km) – 북문(1.6km) – 서문(1.1km) – 수어장대(0.6km) – 영춘정(0.3km) – 남문(0.7km) – 동문(1.7km) – 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산   책 : 걸음수 7,565 steps, 거리 4.6 km, 소모열량 247 kcal, 소요시간 01:21 hrs, 속도 3.4 km/h, 기온 22℃.

 코   스 : 남문정류장 - 남문(지화문) - 남한산성 길 (영춘정) - 수어장대 (청량산, 497.1m) - 서문(우익문) - 서문 전망대 - 북문(전승문) -  침괘정 - 산성로터리 버스정류장.

 

8호선 산성역 2번 출구 앞, '산성역.포레스티아동문' 버스 정류장:

 

9번: ( 남한산성 입구를 거쳐 돌아 올라감 )
주요노선: < 사송동종점 - 모란역2.3번 출구 - 산성역.포레스티아동문 - 남한산성입구 - 남문터널 - 남문매표소앞- 중앙주차장(종점)>,
-  배차간격20-30분, 6대 운행중

9-1번 (휴일):  ( ※ 직행 )
주요노선: < 산성역.포레스티아동문- 남문매표소 앞 - 남한산성도립공원(회차)>
배차간격7-10분.

53번 (주말):  ( ※ 직행 )
주요노선:  < 남위례역 - 산성역.포레스티아동문 - 남문터널 (회차) >
배차간격35-45분, 2대 운행 중.

 

 

포레스티아동문 아파트

 

 

남한산성 둘레길 산책:

 

남문터널 지나자 마자, 남문앞 버스정류장 하차. 평일이어서 9번 버스 이용.

 

남문터널 앞

비석숲

비석숲

 

남한산성 비석군

 

남한산성 비석은 역대 광주유수, 수어사, 부윤, 군수들의 선정*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비의 앞면에는 비석명, 뒷면에는 건립시기 및 관련자에 대한 내용이 새겨져 있다. 이곳 비석들의 원위치는 남한산성 행궁 주변이었다. 남한산성 행궁 복원 사업으로 현자리로 옮겼으며, 이 비들을 통해 세계유산 남한산성 통치경관의 한 요소를 엿볼 수 있다. 

* 선정; 백성을 바르고 어질게 다스림.

1. 흥선대원군영세불망비 (1863),   2. 전 군참사 이용식 거사비 (1932),  

3. 전 군수 강원달 영세불망비 (1911-1915),  4. 겸유수 수어사 민치구 영세불망비 (1868),  

5. 유수겸 수어사 홍학연 선정비 (1850),  6. 부윤 서리 양주군수 홍태윤 영세불망비 (1985)
7. 유수겸 수어사 심상규 거사비 (1818),  8. 유수겸 수어사 김이채  거사비 (1835)
9. 수어사 이조원 거사비 (1816), 10. 유수 겸 수어사 남병철 영세불망비 (1863)
11. 유수 겸 수어사 정기선 거사비 (1836), 12.  유수 겸 수어사 정기선 거사비 (1836)
13.  유수 겸 수어사 김교근 선정비 (1841), 14. 흥선 대원군 영세불망비 (1864)
15.  유수 겸 수어사 박희수 영세불망비 (1860), 16. 유수 겸 수어사 조경호 영세불망비 (1884)
17. 유수 겸 수어사 남정손 영세불망비 (1885), 18. 유수 겸 수어사 김윤식 영세불망비 (1888)
19. 유수 겸 수어사 민영소 영세불망비 (1891), 20. 유수 겸 수어사 박기수 선정비 (1837)
21. 유수 겸 수어사 서희순 선정비 (1846), 22. 유수 겸 수어사 조두순 선정비 (1851)
23. 유수 겸 수어사 이지연 거사비 (1829), 24. 유수 겸 수어사 이지연 거사비 (1829)
25. 유수 겸 수어사 이지연 거사비 (1829), 26. 부윤 김수홍 영세불망비 (1705)
27. 부윤 정지선 선정비 (1707), 28. 부윤 박태순 선정비 (1705), 29. 부윤 이제 선정비 (1705)

30. 유수 겸 수어사 조석우 영세불망비 (1873)

 

세계유산 남한산성 종합안내판


1코스: 산성로터리- 북문- 서문- 수어장대- 영춘정- 남문- 산성로타리 ( 3.8km, 1시간 20분 )
2코스: 산성로터리- 영월정- 숭렬전- 수어장대- 서문- 국청사- 산성로타리 ( 2.9km, 1시간 )
3코스: 남한산성 역사관주차장- 현절사- 벌봉- 장경사- 망월사- 지수당-  남한산성 역사관주차장 ( 5.7km, 2시간 )
4코스: 산성로터리- 남문- 남장대터- 동문- 지수당- 개원사- 산성로타리 ( 3.8km, 1시간 20분 )
5코스: 남한산성 역사관주차장- 동문- 동장대터- 북문- 서문- 수어장대- 영춘정- 남문- 동문 ( 7.7km, 3시간 20분 )

 

앗, 남문(지화문)

 

남문 앞 이정표:   <- 1.5km 수어장대, <- 2.1km 우악문(서문), -> 종로 0.7km.

 

남문  南門.至和門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남문은 남한산성에 있는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으로 현재에도 출입이 가장 많은 문이다. 선조 때의 기록을 보면 동문, 남문, 수구문의 세 문을 수축하였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남문은 인조 2년(1624)수축되기 이전 부터 이미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남문은 정조 3년(1779) 성곽을 보수할 때 개축하며, 지화문(至和門)으로 이름이 붙여졌으며 4대문 중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는 문이다.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처음 남한산성에 들어올 때 바로 이 문을 통해서 들어왔다.  

 

지화문:

정조3년 성곽을 보수 할 때 '지하문'이라 칭하였고 남한산성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이다.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다. 또한 현재는 성남으로 통하는 관문역할을 하고 있으며, 성문앞에 식재된 (350년 수령, 성남시 보호수) 느티나무와 함께 문화와 역사가 살아숨쉬는 시민의 역사터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 - 성남시.

 

보호수...느티나무, 수령 약 450년( 지정일자 2006.6.20), 수고 14~17m, 나무둘레 80~160m

남한산성 성곽은 인조 4년(1626년)에 준공되었으며, 느티나무(보호수)는 당시 성곽사면 토양유실 방지 및 차폐의 목적으로 식재된 것으로 추정된다. 남한산성 순환도로 터널이 개통된 후 폐도 부지가 된 남문 앞 느티나무 주변을 2006년 재정비하여 느티나무 생육환경개선 후 총 4주를 보호수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 성남시 중원구.

 

누비길.... 성남 누비길 노선 안내

검단산 길,   성남 누비길을 일주합시다.

울창한 숲에서의 등산은 신체리듬을 회복시키고 산소공급을 원할히 하여 운동시경을 단련시키는 등 인체건강에 유익합니다. 시민 여러분의 건강과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성남누비길을 일주해 봅시다.

누비길 코스:

1구간:  남한산성길 7.5km ( 4시간 )
2구간:  검단산 길  7.4km ( 3시간 30분 )
3구간:  영장산 길 9.7km ( 4시간 30분 )  
4구간:  불곡산 길 8.8km ( 4시간 )
5구간:  태봉산 길 10.7km  ( 4시간 30분 )  
6구간:  청계산 길 8.5km  ( 4시간 30분 )  
7구간:  인능산 길 9.5km ( 4시간 )

> 검단산 길:

검단산은 태백산맥의 철령(鐵嶺) 부근에서 분기하여 서울 부근에 이르는 광주산맥의 지맥으로서 남한산성과 연결되는 산줄기를 이루며, 높이는 534.7m이다. 경기도 성남시 동쪽으로 광주시와 경계를 이루며, 전체적으로 '凹(요)'자 모양의 산지를 형성한다. 이 산을 중심으로 하는 성남시의 동쪽 산지는 남쪽으로 갈 수록 해발고도가 낮아지며 완만한 산이라 하여 그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산성역 -  불망비 -  남문(지화문): 3,7km    

검단산길 2코스:   남문(지화문) - 1.0km- 산림초소 - 1.4km - 검단산 정상 (536.4m)  - 1.4km - 만수천 약수터 - 0.7km -  망덕산 정상 ( 500.3m ) - 0.5km - 형제봉 정상 ( 435m ) - 0.8km - 이배재고개 - 1.8km - 갈마치고개.

 

누비길 검단산길 구간...."여기부터 제2구간입니다. " 

호국정신과 선비정신이 깃든
남문 앞 역사터 안내

- 남한산성은 한성 백제시대의 성산이요 진산의 개념으로 백제의 시조 온조대왕의 사당 숭렬전(경기도유형문화재 제2호)이 있는 곳이다.


- 남한산성은 통일신라시대에는 주장성(晝長城) (일장(日長)산성)으로 불렀으며 한강유역의 중요 산성으로 발전하였다. 
- 고려시대에는 몽고군의 침입을 물리친 국방의 요새지 이었다.


- 조선왕조 제16대 인조임금 원년(1623)에 성의 축성을 시작하여 1826년에 완성 (본성의 둘레가 9.05km)하니 남한산성은 경도보장지(京都保障地)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 남한산성은 주봉인 청량산(497.8m) 을 중심으로 4대문과 18암문을 완성하고 성내에는 행궁을 비롯하여 수어장대 등 각종 문화유적이 남아있고, 현재는 경기도 도립공원(국가사적 제57호)으로 성남시, 하남시, 송파구, 광주시 등 4개 지방자치 단체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 특히 남문은 성의 서남쪽 곡저부의 해발 370M 지점에 위치하여 있으며 정조 3년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하여 지화눈(至和門)으로 칭하였고,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 문이며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으며 성남으로 통하는 관문 역할을 하는 문이다.


- 인조 14년에 청태종의 침공(병자호란)으로 인조 임금이 이곳으로 피신하여 45일간 항전한 유서 깊은 곳이다.


- <남문 앞 역사 터>는 성남시가 문화재청과 협의를 거쳐 2007. 5.15부터 약 6개월간의 공사로 2007.11.19 준공하였으며, 성문 앞에 식재된 380여년 된 느티나무와 원형이 가장 잘 보전된 것으로 평가받는 남문은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역사 공간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 


- 성남시 보호수인 느티나무(4주)는 성곽방어의 특성을 고려하여 남문을 시각적으로 차폐하기 위하여 식재하였을 가능성과 성문 주변이 평상시 왕래가 많고 지형상 경사가 심하여 우수 시에 토양유실을 막기 위해 식재하였을 것으로 추론되는 역사터다.   - 성남시

남문(지화문) -  백련사 - 주 등산로 - 산성유원지 입구 - 검단산 - 시계 등산로 -   남문 (지화문)      

 

 

 

남한산성 길 동영상

 

남문에서 성곽길 산행 시작....나는 이 코스를 너무 좋아한다. 성을 따라 올라가면서 바라보는 경치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통신탑이 있는 검단산(536.4m) 방향

 

 

성남시 방향

 

남한산성 길 동영상

왼쪽 성남시, 오른쪽 송파구 위례신도시 ...중간의 산성역 방향으로 능선이 진행된다.

 

 

남한산성 길 동영상

군포지 軍鋪址

군포(軍鋪)는 성을 지키기 위한 초소 건물이다. 중정남한지(重訂南漢誌,1847) 기록에 따르면 남한산성 내에 125개소의 군포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한군데도 남아있지 않다. 발굴조사결과 군포는 약간 높고 평탄한 대지 위에 있었고,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로 건축했다. 건물의 모양은 맞배지붕에 기와를 얹고 토석벽을 두른 형태로 초소기능에 맞게 정면이 트여 있다.    

 

 

119 현위치 영춘정...국가지점번호 다사 7131 4200

 

영춘정 이정표:

<- 1.0km 우익문(서문), <- 0.4km 수어장대, -> 지화문(남문) 0.7km

 

 

영춘정 남한산성 길 동영상

옛날 우리 애들이 고등학교, 중학교 다닐 때 가족이 이곳에 놀려왔다가 이 지점에서 집 사람이 발목을 다쳐 큰아이가 집사람을 업고 남문 방향으로 내려 갔던 생각이 난다. 기분 좋아 집사람 손잡고 내려 가다 발을 헛디뎌 사고난 것이다. 이 아래 에 있던 국수집에서 막걸리에 국수 한 그릇씩 먹으려던 계획이 완전히 틀어져 버렸다. 산길에서는 손 잡고 가면 안된 다는 것을 느꼈다. 그 당시에는 나도 허리가 좋지 않았다. 

 

남한산성 길 동영상

 

남한산성 길 동영상

제6암문(서암문)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의  비밀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도 설치하지 않았다. 이 암문은 성벽의 흐름 방향과 달리 입구가 북서쪽을 향하고 있어 외부에서 쉽게 관측되지 않도록 하였다. 또한 북동쪽의 성벽을 돌출하여 암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원성에 설치된 12개 암문의 외측 개구부는 대부분 홍예식이지만 제2암문과 더불어 이 암문의 개구부는 평거식이다. 인

 

보호수... 은행나무, 수령 360년 (지정일자 1983.03.10), 수고 2.6m, 나무둘레 250cm

청량당

앗, 수어장대

 

사적 제57호 남한산성  

남한산성 수어장대:  보물

장대란 지휘와 관측을 위해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누각 건물로 남한산성에는 5개의 장대가 있었다. 수어장대는 남한산성 서쪽에 있어 본래 '서장대' 라고 불렸다. 병자호란 당시에는 단층 누각이었고, 수어청 우영장이 서장대에 머물며 군사를 지휘하였다. 이후 영조 27년(1751)에 유수 이기진이 복층으로 중건하고, '수어장대'라는 편액을 달았다. 지금의 수어장대 현판은 헌종 2년(1836)에 유수 박기수가 수어장대를 증축하였는데, 그 형인 박주수가 쓴 것이다. 수어장대에서는 수어사가 수어청의 군사를 지휘하였는데, 정2품 상사에 해당하였다. 수어청은 한양을 수비하는 5군영의 하나로, 본래 한성부 북부 진장방 (오늘의 서울 종로구 삼청동, 팔판동,화동 일부)에 그 본청이 있고, 광주부윤을 부사로 삼아 남한산성을 관할케 하였다.  그러다 운영의 효율성을 도모하고자 정조19년에 본청을 완전히 남한산성으로 옮기고, 광주유수가 수어사를 겸하게 하였다. 남한산성 수어장대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로 관리되어 오다 2021년에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승격되었다. 또한, 수어장대는 세계문화유산 남한산성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 중 하나인 군사 경관 (장대)에 해당한다. 수어장대는 여러 문헌에 등장하는데,  그중 조선 숙종의 정비인 인경왕후의 아버지 김만기는 <서장대기>에서 아래와 같이 언급하였다.

" 비록 한강의 흐름을 기울여도 그날의 비린내는 씻지 못할 것이다. 만약에 혹시라도 풍경이나 구경하고 유람이나 탐하면서 다시는 감개하고 탄식하는 마음이 없다고 하면 이는 이른바 그 양심을 잃은 자이다. "    

 

 

※ 병자호란 주요 연표:

- 1598년 (선조 31년): 임진왜란 끝남.
- 1608년 (선조 41년): 광해군 즉위.
- 1616년 (광해군 9년): 누루하치 후금 건국.
- 1618년 (광해군 11년): 명과 후금의 전쟁, 명에 원병 파견함.
- 1619년 (광해군 12년): 강홍립 후금에 투항. -> (중립외교).
- 1622년 (광해군 15년): 명나라 장수 모문룡 가도에 주둔.
- 1623년 (광해군 16년): 인조반정으로 인조 즉위. -> ( 친명배금정책 )
- 1624년 (인조 2년): 이괄의 난.
- 1627년 (인조 5년): 정묘호란 발생.
- 1635년 (인조 13년): 후금 내몽고 점령.
- 1636년 (인조14년): 후금 청으로 국호 변경하고, 조선에 군신관계 요구 ( 척화론과 주화론 대립 ).
                                  12월 28일 병자호란 발생. 남한산성 전투.
- 1637년 (인조 15년): 2월 24일 인조 송파 삼전도에서 항복. 청과 사대관계 맺음. 
- 1644년 (인조 21년): 명나라 멸망. 청 중국 통일.

 

 

매바위, 그리고 '수어서대" 암각글씨.

청량당에 위폐가 모셔진 남한산성 공사 책임자 중 한사람이었던 이회가 공사비 횡령에 연류되어 억울하게 처단되자 죽 전에 자신의 죄가 없다면 매가 날아와 이 바위에 앉을 것이라고 유언을 했는데, 그 후 과연 매가 날아와 매바위에 구슬피 울었다고 하며, 다시 확인해 보니 죄가 없음이 드러났으며, 오히려 다른 구간보다 성이 더 견고히 축성되었음이 밝혀졌다. 예나 지금이나 모함은 한 인간을 파멸로 이끌기도 한다.

 

 

남한산성 수어장대 동영상

무망루

무망루

조선 영조27년(1751) 광주 유수 이기진이 증축한 수어장대 2층의 내편(內篇) 문루로서 그 편액(扁額)이 2층 누각에 있어 1989년 전각을 건립하고 이 안에 현판을 새로 설치 일반인이 볼 수 있게 하였다. 무망루는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혔다가 귀국 후 북벌을 꾀하다가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이믐지은 것이다.

 

이대통령각하행차기념식수

 

수어장대 내부

 

수어장대(守禦將臺) 와 청량당(淸凉堂)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 제3호):

수어장대는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목적으로 지은 누각이다. 남한산서에 있던 5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있으며, 성 안에 남아있는 건물중 화려하고 웅장하다...남한산성 축성때 단층으로 지어 서장대라 불리던 것을 영조 27년 유수 이기진이 왕명을 받아 이층으로 다시 짓고 '수어장대'라 편액을 달았다. 수어장대 2층 내부에는 '무망루'라는 편액이 달려 있었는데,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다가 귀국하여 북벌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지은 것이다. 현재 무망루 판액은 수어장대 오른편에 보호각을 지어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보관하고 있다.

청량당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 사당은 남한산성 쌓을 때 동남측 축성의 책임자였던 이회 장군과 그의 부인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이회는 공사비를 횡령했다는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고 이 소식을 들은 부인 송씨는 한강에 몸을 던져 따라죽었다. 이회는 죽을 때 자신의 죄가 없으면 매 한마리가 날아올 것이라 에언 했는데 과연 매가 날아와 그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한다. 후에 누명이 벗겨지고 그가 맡은 공사가 가장 잘된 것으로 알려지자 사당을 지어 초상을 안치하고 넋을 기렸다. 원래의 청량당은 6.25 전쟁때 소실 되어 다시지었다. 서장대가 있는 산 이름이 청량산이므로 청량당이라 이름 지었다.

 

남한산성 (사적 제57호):  

1 남한산성 행궁, 2 수어장대, 3 숭렬전, 4 청량당, 5 현절사, 6 침괘정, 7 연무관, 8 지수당, 9 장경사, 10 망월사, 11 개원사, 12 제1남옹성, 13 제2남옹성, 14 남문(지회문), 15 서문 (우익문), 16 연주봉옹성, 17 북문(전승문), 18 동문(좌익문), 19 장경사신지옹성, 20 동장대터, 21 봉암성, 22 벌봉   

남한산성은 조선시대 뿐 아니라 삼국시대부터 천연의 요새로 중요한 역할을 하던 곳이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의 욍성이었다는 기록이 있고, 나당전쟁이 한창이던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한산주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기록도 있다. 고려시대에는 몽고의 침입을 격퇴한 곳이기도 하고 일제강점기에는 항일운동의  거점이 되기고 한 곳이다. 그러나 남한산성은 주로 병자호란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조선 인조 14년(1636)에 청나라가 침략해 오자 왕은 이곳으로 피신하여 항전하였으나, 왕자들이 피신해 있던 강화도가 함락되고 패색이 짙어지자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 나가 치욕적인 항복을 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남한산성은 패배를 알지 못하는 곳이다. 성의 외부는 급경사를 이루어 적의 접근이 어렵고, 내부는 경사가 완만하여 넓은 경작지와 물을 갖춘 천혜의 전략적 요충이기 때문에, 병자호란 당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청군에 함락당하지 않고 47일간이나 항전할 수 있었던 곳이다. 이처럼 오랜 기간동안 우여곡절을 가진 성의 역사처럼 성곽의 형태 또한 단순하지 않아서 하나의 폐곡선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본성, 봉암성, 한봉성, 신남성과 5개의 옹성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조이다. 인조 4년(1636) 에 중앙부의 가장 큰 폐곡선인 본성이 완성되었고, 병자호란 이후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동쪽의 봉암성, 한봉성 등을 비롯하여 여러차례 증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서문 (우익문)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서문은 4개의 대문중 규모가 가장 작고, 산성을 처음 쌓았을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 3년(1799)에  다른 문과 같이 개축하며 우익문(右翼門)이라 칭하였다. 행궁을 중심으로 국왕은 남쪽을 바라보며 국정을 살피니, 서문이 행궁의 우측에 있어 우익문이라 하였다. 서문은 인조15년(1637) 1월 30일 왕이 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항복하기 위해 남한산성을 나간 바로 그 문이다. 남한산성의 서쪽 사면은 경사가 급해 물자수송이 어렵지만 광나루나 송파나루 방면에서 산성으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 위상이 남다른 4개의 문 " 

남한산성에는 4개의 문이 있습니다. 한양의 4대문 처럼 남한산성의 4개문은 좌익문(左翼門: 동문), 우익문(右翼門: 서문), 지화문(至和門: 남문), 전승문(全勝門: 북문) 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한양 도성의 문 이름과 비슷하지요? 가장 크고 넓은 문이 지화문입니다. 지화문은 좌익문과 함께 남한산성의 핵심 도로인  봉화로에 설치된 성문입니다. 왕의 행렬, 마차와 수레, 여러 장사치들과 주민들이 드나들었던 지화문은 남한산성 옛길을 따라 좌익문과 이어지게 됩니다. 이 길은 남한산성 옛길의 가장 핵심적인 루트입니다. 남한산성 옛길은 산성 로터리를 중심으로 북문, 서문, 남문을 일주하는 노선을 따라 이루어져 있습니다.

감이동  1.9km
감이동 - 성불사, 청운사 - 왕행길 - 현위치, 우익문(서문) -전승문(북문) / 지화문(남문).


서문노선 2.1km  

 

서문(우익문) 외부 이정표:  
<- 1.0km 수어장대, <- 일장천약수, ↘ 위례둘레길(벌봉) 3.2km, ↘  위례 둘레길(북문) 1.1km, ↗ 위례둘레길(덕골) 8.7km

 

서문 전망대

위례신도시

 

서문 전망대 동영상

송파구 마천동, 잠실 방향

 

북문 가는 길

하남시 방향

 

도시

" 한양 다음으로 큰 완전한 소비도시, 산성리 "

조선시대 한양은 20만 명이 넘는 인구를 가진 도시였습니다. 18세기 후반 산업혁명 시기 영국 런던의 인구가 5만 명이었다는 사실에 비교해 보면 가히 한양의 인구규모를 짐작할 만 합니다. 남한산성 옛길이 위치한 산성리 지역은 한양에 인접한 소비도시 였는데  토박이 주민의 제보에 따르면 산성내 주민들이 주변 마을 사람들을 촌놈 취급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을 정도 입니다. 1627년 (인조6년) 광주부 읍치(邑治: 행정중심지)를 산성 내부로 옮기면서 산성리 인구는 폭증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1895년 조선총독부에 의한 행정구획 통폐합까지 일어나 중심지로서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면서 그 규모가 서서히 줄어들게 됩니다. 일제에 의해 산성 내에 위치하고 있던 광주군청이 경안 등으로 이전하게 되면서 군사도시, 행정도시의 위용은 완전히 사라지고, 근대화 시기로 접어들며 주요 도로가 남한산성을 제외한 채 건설됩니다. 이후 한강 이남에서 가장 번성했던 지역 중 하나였던 남한산성은 한적한 마을로 점차 변화하여 잠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됩니다.   
 

하남시 고골방향


 고골:  하남의 지형은 낮은 야산과 구릉지대가 펼쳐져 있고, 북쪽으로 흐르는 한강에는 망월천, 덕풍천,산곡천 같은 작은 샛강이 흘러 들어가며 강줄기의 옆에는 평야가 형성되어 있어서 B.C 4000여년 전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였으며, 수로를 이용한 타 지역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여 문화가 융성했던 지역이다. 또한 남쪽으론 남한산, 동쪽은 검단산, 북쪽으론 한강이 흘러 군사의 요충지로서 더할 나위 없이 좋아 백제의 시조인 온조께서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470여 년간 한성백제의 수도로 위상을 떨치던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한수의 쟁패를 놓고 삼국이 각축을 벌이던 역사의 현장 이기도 하다. 고려시대에 접어들어선 후삼국을 통일하고 태조의 개국을 도와 새로운 나라의 기틀을 조성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광주의 대호족 왕규가 세거를 이루었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종때(983년)에 이르러서는 지방통제를 위한 지방관제를 실시하여 지방행정상 요지에 12목(광주,양주,충주,청주,공주,진주,상주,전주,나주,송주,해주,황주)을 설치하였는데 광주도 12목의 하나로서 읍치가 바로 하남의 춘궁동(고골) 이었다. - ( 하남시 )   

▶ 고골 지역에 들어서는 하남교산 신도시;
 
- 위치: 경기도 하남시 천현동, 항동, 하사창동 교산동, 상사창동, 춘궁동, 덕풍동, 창우동, 신장동 일원
면적:  6,314,121㎡ (1,910천평),
사업시행기간: 2019년 ~ 2028년
인구및 주택계획:  주택 33,000호, 인구 78,000인.  

남한산성 동영상

남한산성 금암산 능선

 

남한산성 동영상

 

남한산성 동영상

 

나무를 지키는 금림조합

" 남한산성의 귀중한 숲을 지켜 후손에게 "

남한산성의 산림은 매우 잘 보존되어온 아름다운 생태유산입니다. 이는 오래전부터 산성 내의 숲을 보호하고자 하는 산성 주민들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는데요, 일반적으로 근대화 이전의 생활연료는 나무였기에 20세기 초반 대부분 산들은 나무가 없는 민둥산이 도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나 산성 안의 나무들은 예외였는데, 마을 주민들이 '금림조합'을 만들어 순산원을 두고 도벌을 막아 보호한 덕택에 지금처럼 건강하게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금림조합은 남한산성의 숲을 보호하기 위해 산감(山監: 산림 감시원) 50명을 선출하여 매일 6명 씩 교대로 산림을 감시토록 하였습니다. 산감은 극빈자 계층에서 선발하였기 때문에 숲을 보호하는 것과 동시에 취약계층의 구제에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남한산성 금림조합의 노력은 이후 2016년까지 90년에 가깝게 지속되어 왔으며, 덕분에 남한산성은 귀중한 생태문화자원을 잘 보존하여 후손에게 전할 수 있게 되었답니다. 

<- 전승문 300m, -> 우익문 700m.

 

북문(전승문)

 

전승문(북문):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북문은 병자호란 당시 성문을 열고 나가 기습공격을 감행했던 문이다.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에서 '전승문'이라고도 하였다. 당시 영의정 김류의 주장에 의해 군사 300여명이 북문을 열고나가 청나라 군을 공격하였으나, 적의 계략에 빠져 전멸하고 말았다. 이를 '법화골 전투';라고 하는데,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있었던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였다. 정조3년(1779) 성곽을 개보수할 때 성문을 개축하고 이름을 붙여 전승문(全勝門)이라 한 것은 그 때의 패전을 잊지말자는 뜻이었을 것이다. 선조 때의 기록을 보면 산성 내에 동문과 남문, 수구문의 3개의 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북문은 인조2년(1624)에 신축된 성문이라고 생각된다.

 

 

전승문(북문):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북문은 병자호란 당시 성문을 열고 나가 기습공격을 감행했던 문이다.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에서 '전승문'이라고도 하였다. 당시 영의정 김류의 주장에 의해 군사 300여명이 북문을 열고나가 청나라 군을 공격하였으나, 적의 계략에 빠져 전멸하고 말았다. 이를 '법화골 전투';라고 하는데,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있었던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였다. 정조3년(1779) 성곽을 개보수할 때 성문을 개축하고 이름을 붙여 전승문(全勝門)이라 한 것은 그 때의 패전을 잊지말자는 뜻이었을 것이다. 선조 때의 기록을 보면 산성 내에 동문과 남문, 수구문의 3개의 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북문은 인조2년(1624)에 신축된 성문이라고 생각된다.

 

-> 800m 국청사

침괘정

 

보호수...은행나무, 수령 80년 (지정일자; 1983.03.10), 수고 19m, 나무둘레: 3.3m

 

보호수...느티나무, 수령 200년( 1983.03.10), 수고: 28m, 나무둘레: 5.4m

 

침괘정...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호

침괘정은 무기제작소라 알려져 왔으나 온돌과 마루방, 화랑처럼 된 툇마루 등 건물 구조로 보아 집무실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최초의 건립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주변에 있던 무기창고를 명나라 사신 정룡이 '총용무고'라 이름 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 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영조 27년(1751) 광주유수 이기진이 고쳐 짓고 '枕戈亭'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침과정'을 침괘정'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명확하지 않다. 무기 제작소와 무기창고는 침괘정 부근에 별도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한산성 종각

남한산성 종각의 천흥사 동종


남한산성의 천흥사 동종은 높이 170cm, 지름 100cm로 몸체에 세겨진 명문 ‘聖居山天興寺銅鐘總和二十八年庚戌二月日' (성거산 천흥사 동종 총화 이십팔년 경술이월일)’ 에 따르면 고려 현종1년(1010)에 주조된 것으로 원래는 태조4년(921)에 태조가 창건한 충청남도 천안시 성거읍 천흥리 천흥사에 있었다고 한다. 남한산성으로 언제 옮겼는지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 산성 내 시간을 알려주는 역할을 했으며 이후 일제강점기 이왕가박물관에 옮겨지고, 해방이후 덕수궁 미술관을 거쳐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었다. 현재 종은 원래의 모양 및 형태 그대로 재현 한 것으로 타종시 울림을 좋게하기 위하여 약 3배 정도 더 크게 제작하였다. 

 

 

산성마을 종로 로터리 

 

남한산성 행궁 방향

 

행궁(行宮):  

 

왕이 도성을 떠나 행행(行幸)할 때 임시로 머무는 곳으로, 전란시·능행시·휴양 등의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조선시대에는 수원행궁, 강화행궁, 전주행궁, 의주행궁, 양주행궁, 온양행궁 등 10여개 이상의 행궁이 있는데, 그 중 남한산성행궁은 전쟁이나 내란 등 유사시 후방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한양 도성의 궁궐을 대신할 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하여 인조 3년(1625) 남한산성 수축과 함께 건립되었다. 실제로 약 10년 후인 1636년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47일간(1636.12.14~1637.01.30) 항전하게 된다. 이후 숙종·영조·정조·철종·고종이 여주에 있던 효종릉(寧陵) 등의 능행길에 머물러 이용하였다. 남한산성행궁은 종묘(좌전)와 사직(우실)을 두고 있는 유일한 행궁으로 일반적인 행궁에 머물지 않고 유사시 임시수도의 중요한 역할을 하던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국가사적480호이다. - < 남한산성 도립공원 >

( 2023.04.14 사진 )

남한산성 남문주차장 & 버스정류소

 

남문 주차장 이용료금: ( 2023.04. )

1. 이륜차, 경형차 평일 1,500원 / 주말 2,500원 / 월정기 추차요금 25,000원
2. 승용차, 승합차, 1톤 이하 화물차:  평일 3,000원 / 주말 5,000원 / 월정기 추차요금 50,000원
3. 중.대형 승합차, 화물차: 이용 불가
4. 30분 이내 주차: 무료
5. 100% 감면자: 국가유공자, 장애인, 병역명문가, 친환경(경유차 등 제외), 3자녀.
6. 50% 감면자: 이륜차, 경형차, 2자녀.
7. 주차요금 징수시간09:00 - 20:00
8. 문의전화: 031-8008-5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