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수원화성, 화성행궁
- ( 2024.06.04 )
《 화성행궁 》
수원 화성행궁 과 팔달산 수원화성을 기보았습니다. 팔달산 수원화성 성곽길은 약 1/2 정도만 걸어보았으며, 화성행궁 탐방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조선 시대 정조와 다산 정약용과 인연이 깊은 수원 화성행궁을 돌아보니 역사적인 향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 수원화성 관람:
- 관람시간: 상시. 휴무일: 연중무휴.
- 요금 무료.
- 수원화성은 개방형이며 야간 관람 가능.
▶ 화성행궁 관람:
- 관람시간: 09:00 - 18:00 (입장마감: 관람시간 30분전)
* 휴무일: 연중 무휴.
- 야간개장 안내사항:
. 야간개장 기간: 2024.5.3(금)-10.27(일) 기간 중 매주 금-일요일.
. 야간개장 시간: 18:00-21:30 (입장마감: 21:00 )
- 요금표:
. 개인; 어른: 1,500원, 청소년 및 군인: 1,000원, 어린이: 700원.
. 단체(20인 이상): 개인; 어른: 1,200원, 청소년 및 군인: 800원, 어린이: 500원.
* 안내사항:
. 무료: 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 '문화가 있는 날' (화성행궁 야간개장은 제외)
. 면제: 한복 착용자, 만6세 이하의 미취학 아동, 만 65세 이상, 장애인, 국가유공자, 독립유공자 등.
학생 단체방문: 학생 20명 이상 인솔시 교사 1명 무료, 기초생활수급자 관람료 면제.
▶ 화성행궁 (華城行宮):
화성행궁은 조선 정조 13년(1789)에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부 읍치 자리로 옮기고, 원래 수원부 읍치를 팔달산 아래로 옮겨 오면서 관청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왕이 수원에 내려오면 머무는 행궁으로도 사용했다. 정조는 수원도호부를 화성유수부로 승격시켜 위상을 높인 한편, 1795년 화성행궁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치르기 위하여 건물의 이름을 바꾸거나 새로 지었다. 1796년에 전체 600여 칸 규모로 완공되었다. 행궁(行宮)은 왕이 지방에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물거나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 거처하는 곳을 말하며, 그 용도에 따라서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전쟁과 같은 비상시에 위급함을 피하고 국사(國事)를 계속 하기 위해 마련된 행궁으로는 강화행궁, 의주행궁, 남한산성행궁 등이 있고, 휴양을 목적으로 설치된 행궁으로는 온양행궁이 있다. 그리고 왕이 지방의 능원(陵園)에 참배할 때 머물던 행궁으로 화성행궁이 있다. 정조는 1790년 2월부터 1800년 1월까지 11년간 12차에 걸친 능행(陵幸)을 하였으며, 이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조가 승하한 뒤 순조(純祖) 1년(1801) 행궁 옆에 화령전(華寧殿)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眞影)을 봉안 하였고 그 뒤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머물렀다. 화성행궁은 조선 시대 전국에 조성한 행궁 가운데서 가장 돋보이는 규모와 격식을 갖추었으며, 건립 당시의 모습이 『화성성역의궤』와 『정리의궤』에 그림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화성행궁은 일제강점기인 1911년부터 병원과 경찰서로 쓰이기 시작했고, 1920년대 병원 건물이 신축되며 대부분 파괴되었다. 현재는 낙남헌과 노래당만 본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1919년 3월 29일에는 자혜의원에 검진을 받으러 가던 김향화를 비롯한 기생 30여 명이 경찰서(북군영) 앞에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불렀다. 1980년대 말 지역 시민들이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복원운동을 펼친 결과 1996년 복원공사가 시작되고, 2002년에 중심권역의 복원공사를 마쳤다.
신풍루(新豊樓)
1790년(정조 14) 창건 2002년 복원 신풍루는 화성행궁의 정문이다. 조선 정조 13년(1789)에 수원읍의 관청 건물을 세우면서 그 정문으로 지었다. 처음에는 진남루鎭南樓라 부르다가 1795년에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열면서 이름을 신풍루로 바꿨다. 신풍루는 중국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고향인 풍패豐沛에서 따온 이름으로 제왕의 고향 풍패지향豐沛之鄕으로서 화성을 자리매김하고자 했던 정조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건물은 2층의 누각 구조로 아래층은 출입문으로 쓰고, 위층에는 큰 북을 두어 군사들이 주변을 감시하고 신호를 보내는 용도로 사용했다.
봉수당(奉壽堂)
1789년(정조 13) 창건 1997년 복원 봉수당은 화성행궁에서 가장 위상이 높은 건물이다. 조선 정조 13년(1789)에 고을 수령이 나랏일을 살피는 동헌으로 지었다. 처음 이름은 장남헌壯南軒이었으나 1795년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계기로 봉수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궁궐에서는 대비나 상왕이 머무는 건물에 목숨 수壽 자나 길 장長 자를 붙이는 전통이 있어, 혜경궁 홍씨의 장수를 기원하며 이름을 바꾼 것이다. 건물은 정면 7칸으로 일반 동헌과 마찬가지로 대청과 방을 둔 구조이나, 마당 한가운데에는 왕이 지나는 길인 어로를 두었고 건물 앞에는 넓은 기단인 월대를 갖추었다.
장락당(長樂堂)
1794년(정조 18) 창건 1997년 복원 장락당은 조선 정조 19년(1795)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화성행궁에서 열면서 혜경궁 홍씨가 머물 처소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정조는 중국 한나라의 고조가 어머니를 위해 장락궁을 지은 것을 본받아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장락당을 짓고 현판의 글씨를 써서 내렸다. 장락당과 봉수당은 연결되어 있어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하다. 장락당은 임금이 화성에 내려오면 머무는 처소로도 사용되었다. 건물은 전체 13칸 규모이며, 삼면에 툇간을 두어 통행에 편하도록 했다. 온돌방은 매 칸마다 겹겹이 문을 달아 아늑하게 만들었고, 문을 모두 열어젖히면 실내가 트이도록 했다.
경룡관(景龍館)
1794년(정조 18) 창건 1997년 복원 경룡관은 장락당으로 들어가는 대문 상부에 지은 다락집이다. 당나라 태종 때 열여덟 명의 학사들이 임금의 시에 화답한 것을 본떠서 정조가 직접 이름을 지었다. 경룡관은 당 태종의 궁전 이름이기도 하다. 아래층 대문 이름은 지락문至樂門이다. 이는 즐거움에 이른다는 뜻으로 장락당으로 들어가는 것이 즐겁다는 의미이다. 문의 규모는 작으나 네모난 돌기둥 네 개를 우뚝 세워 위엄을 높였다.
복내당(福內堂)
1789년(정조 13) 창건 1997년 복원 복내당은 수원읍 고을 수령과 가족이 거처하는 건물이다. 조선 정조 18년(1794) 화성행궁에 장락당을 만들기 전까지는 왕의 숙소로도 쓰였다. 정조가 건물의 이름을 직접 짓고 현판의 글씨를 써서 내렸는데, 복내福內란 ‘모든 일이 밖에서 제대로 이루어지면 복이 안에서 생겨난다.’는 뜻이다. 그러나 정조가 쓴 현판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복내당은 처음에는 역ㄱ자 모양의 작은 건물이었으나 1794년에 북쪽으로 온돌방 4칸 반을 추가하면서 ㄷ자 모양으로 확장되었다. 서쪽으로 서별당이 들어서고, 동남쪽으로도 행각이 늘어나서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유여택(維與宅)
1790년(정조 14) 창건 1998년 복원 유여택은 수원읍을 옮긴 이듬해인 조선 정조 14년(1790)에 지은 건물로, 화성 축성을 시작하던 1794년 가을에 증축되었다. 처음 건물은 은약헌隱若軒으로 부르다가 증축 후 이름을 바꾸었다. 유여택이란 <시경>에서 주나라의 기산岐山을 가리켜 ‘하늘이 산을 만들고 주시어 거처하게 하였다此維與宅’라는 고사를 인용해서 지은 이름이다. 정조는 유여택에서 신하들의 보고를 받고 과거 시험에 합격한 무사들에게 상을 내리기도 했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한 뒤에는 화령전이 완성되기 전까지 현륭원 재실과 창덕궁 주합루에 있던 정조의 초상화를 모시는 공간으로도 사용되었다.
낙남헌(洛南轩)
1794년(정조 18) 창건 낙남헌은 화성행궁에서 공식 행사나 연회를 열 때 사용하는 건물이다. 중국 한나라를 세운 유방이 부하들 덕분에 나라를 세울 수 있었음을 감사하며 낙양洛陽의 남궁南宮에서 연회를 베풀었다는 이야기를 본떠서 이름을 지었다. 정조는 1795년 을묘원행 당시 낙남헌에서 수원의 백성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무과 시험을 치르고 상을 내리는 등 다양한 행사를 열었다. 낙남헌 건물은 벽이 없는 개방된 구조로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다. 연회를 베푸는 건물답게 건물 앞에는 넓은 월대를 두어 격식을 높였다. 월대로 오르는 계단 양 옆에는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득중정(得中亭)
1790년(정조 14) 창건 1998년 복원 득중정은 활을 쏘는 정자로서 조선 정조 14년(1790)에 지었다. ‘활을 쏘아 맞으면 제후가 될 수 있고, 맞지 않으면 제후가 될 수 없다射中 則得爲諸侯 射不中 則不得爲諸侯’ 라는 구절을 본떠서 이름을 지었다. 본래 낙남헌 터에 있었으며 정조가 글씨를 쓴 현판이 걸려 있었다. 1794년에 건물을 지금의 위치로 옮기고, 임금이 활을 쏘는 어사대를 특별히 마련했다. 정조는 수원에 올 때면 득중정에서 활을 쏘았다. 1795년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때 신하들과 활을 쏘고 매화포를 구경한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 있다.
노래당(老來堂)
1794년(정조 18) 창건 노래당은 낙남헌에 잇대어서 지은 화성행궁의 별당이다. 조선 정조 18년(1794)에 행궁을 증축하며 낙남헌과 함께 지었다. 정조는 화성에서 노년을 보내기 위해 ‘늙음이 찾아온다’라는 뜻을 지닌 노래당을 짓고, 그 뜻을 종종 신하들에게 말했다. 노래당은 아들의 나이가 15세가 되면 왕위를 물려주고 화성에서 내려와 지내려 했던 정조의 뜻이 담긴 건축물이다. 출입문은 길이 젊음을 보존한다는 의미로 난로문難老門이라 이름 지었다. 노래당은 건물의 원형이 잘 남아 있다.
미로한정(未老閒亭)
1791년(정조 15) 창건 2002년 복원 미로한정은 화성행궁 후원에 세운 소박한 정자이다. 조선 정조 13년(1789) 수원읍을 팔달산 아래로 이전한 이후에 지었다. 처음 이름은 육면정六面亭이었으나 1795년에 미로한정未老閑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는 ‘늙기 전에 한가로움을 얻어야 진정한 한가로움이다未老得閑方是閑’라는 시구를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아들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수원에 내려와 한가하게 노년을 즐기고자 했던 정조의 뜻이 담겨 있다. 화성 축성을 막 시작한 1794년 정월, 정조는 미로한정에 올라가 허허벌판이던 수원부에 1천여 집이 들어서 번성한 모습을 바라보며 관리들을 칭찬했다.
- 수원문화재단
▶ 수원화성 (水原華城) :
화성(華城)은 경기도 수원에 있는 조선 시대의 성곽이다. 정조(正祖)가 자신의 부친인 장헌세자의 묘를 옮기면서 읍치소를 이전하고 주민을 이주시킬 수 있는 신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방어 목적으로 조성하였다. 1794년 2월에 착공하여 2년 반에 걸친 공사 후 완공되었다. 성곽 전체 길이는 5.74Km이며, 높이 4~6m의 성벽이 130㏊의 면적을 에워싸고 있다. 처음부터 계획되어 신축된 성곽이라는 점, 거주지로서의 읍성과 방어용 산성을 합하여 하나의 성곽도시로 만들었다는 점, 전통적인 축성 기법에 동양과 서양의 새로운 과학적 지식과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는 점, 그 이전의 우리나라 성곽에 흔치 않았던 다양한 방어용 시설이 많이 첨가되었다는 점, 주변 지형에 따라 자연스러운 형태로 조성해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여 준다는 점 등의 특징이 있다. 1801년에 간행된 화성 준공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를 통해 공사의 자세한 전말을 알 수 있다. 사도세자는 조선왕조 제21대 왕인 영조의 둘째아들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아버지 영조의 명령으로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정조는 영조의 왕위를 계승한 후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의 화산으로 옮기고 화산 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의 팔달산 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화성을 축성했다. 수원 화성은 정조의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그 축성의 근본이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 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 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 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다. 또한 수도 남쪽의 국방 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원 화성은 규장각의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해 만든 『성화주략(城華籌略)』(1793)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 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되었다. 축성 당시 거중기 녹로(도르래 기구) 등 건축을 위한 새로운 기계를 고안해 큰 규모의 석재를 옮기고 쌓는 데 이용하였다. 수원 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 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 있다. 수원 화성은 축조 이후 일제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되어 없어졌으나 1975년~1979년까지 축성 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해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로 동쪽 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를 갖고 있다.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咆)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 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에서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4개 시설물이 아직 남아있다. 수원 화성은 축성할 때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 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남아 있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적, 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이었기 때문에 성곽 자체가 ‘효’ 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 외에도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지닌 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 화성에는 이러한 효 사상과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다.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 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 계산, 시공 기계, 재료 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화성이 성곽 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으며 동시에 기록으로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
수원 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보물 제403호), 장안문, 공심돈 등이 있다.
장안문(長安門)
1794년(정조 18) 창건 한국전쟁 때 문루 파괴 1975년 문루 복원 장안문은 수원 화성의 북문이다. 정조는 장안長安의 의미를 ‘북쪽으로 서울의 궁궐을 바라보고, 남쪽으로 현륭(융릉)을 바라보며 만년의 편안함을 길이 알린다.’라고 풀이했다. 문 밖에 항아리 모양의 옹성甕城을 만들고 방어를 위해 좌우에 적대를 세웠다. 장안문은 남문인 팔달문과 더불어 화성에서 가장 웅장하고 높은 격식을 갖춘 건물이다. 2층의 누각은 네 모서리 추녀가 길게 경사를 이루면서 용마루와 만나는 우진각 지붕 형태다. 길고 휘어진 목재를 구하기 힘든 조선 시대에 우진각 지붕은 궁궐이나 도성의 정문과 같은 건물에만 쓰였다.
북옹성(北甕城)
1795년(정조 19) 창건 1975년 수리 북옹성은 장안문 바깥에 반달 모양으로 쌓은 성으로, 성문을 이중으로 지키는 시설이다. 출입문을 옹성 한가운데 내서 출입하기 편하도록 했다. 조선 시대에 만든 여러 성곽에도 옹성이 설치되어 있지만 출입문을 중앙에 만든 있는 사례는 장안문과 팔달문이 드문 사례이다. 문 위에는 물을 저장하는 오성지를 설치하여 화공에 대비했다. 오성지는 화성에만 설치한 색다른 방어시설로서 정약용이 제안했으나 설계안대로 시공되지 못했다. *
북동적대(北東敵臺)
1795년(정조 19) 창건 1969년 수리 북동적대는 장안문 동쪽에서 성문에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방어 시설이다. 화성에서는 장안문과 팔달문 좌우에 적대를 설치했는데 현재 장안문에만 남아 있다. 안쪽은 성벽과 같은 높이로 대를 쌓아 군사들이 지키고, 바깥쪽에는 현안懸眼이라고 하는 세로 방향의 긴 홈을 냈다. 현안은 성벽 가까이 접근한 적의 동향을 살피고 동시에 공격도 가능한 시설이다. 동북적대는 우리나라 성곽 중 적대가 있는 경우로 드물다.
북서적대 (北西敵臺)
1795년(정조 19) 창건 1968년 수리 북서적대는 장안문 서쪽에서 성문에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방어 시설이다. 화성에서는 장안문과 팔달문 좌우에 적대를 설치했는데 현재 장안문에만 남아 있다. 장안문 좌우 적대에는 현안을 세 줄 설치한 반면 팔달문 적대에는 두 줄을 설치했다. 현안은 성벽 가까이 접근한 적의 동향을 살피고 동시에 공격도 가능한 시설이다. 적대는 우리나라 성곽 중 유일하게 화성에만 있다.
팔달문(八達門)
보물 제402호 1794년(정조 18) 창건 2013년 해체・수리 팔달문은 수원 화성의 남문이다. 정조는 팔달八達의 의미를 ‘산 이름이 팔달이어서 문도 팔달이며, 사방팔방에서 배와 수레가 모인다.’는 뜻으로 풀이했다. 팔달문 주변은 삼남 지방으로 통하는 길목이어서 화성 축성 전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잦았다. 장안문과 마찬가지로 문 밖에 항아리 모양의 옹성甕城을 만들고, 방어를 위해 좌우에 적대를 세웠다. 규모와 형식은 장안문과 같다. 1794년 2월 28일 장안문과 같은 날에 터 닦는 일을 시작했지만 대체로 장안문보다 공정별로 약 1주일 늦게 완성하였다.
창룡문(蒼龍門)
1795년(정조 19) 창건 한국전쟁 때 문루 파괴 1976년 문루 복원 창룡문은 수원 화성의 동문이다. 창蒼은 푸른색을 가리키므로 ‘동쪽 방향을 지키는 신령한 청룡’을 상징한다. 창룡문은 바깥쪽에서 보면 안쪽으로 휘어 들어가는 곳에 자리 잡고 있어, 돌출된 좌우 성벽이 자연스럽게 성문을 보호하는 치성 역할을 한다. 문 안쪽의 넓은 공터는 군사들의 훈련장으로 쓰였다. 조선 시대 건축에는 일정한 위계질서가 있다. 같은 성문이지만 장안문과 팔달문은 높은 격식을 갖춘 반면 창룡문과 화서문은 한 단계 격을 낮춘 형태이다.
화서문(華西門)
보물 제403호 1796년(정조 20) 창건 1848년(헌종 14) 수리 1975년 수리 화서문은 수원 화성의 서문이다. ‘화성의 서쪽’이란 뜻이지만 서쪽에는 팔달산이 있어 서북쪽에 문을 두었다. 문밖으로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어 주변을 감시하기 위해 높다란 서북공심돈을 함께 세웠다. 조선 시대 건축에는 일정한 위계질서가 있다. 같은 성문이지만 장안문과 팔달문은 높은 격식을 갖춘 반면 창룡문과 화서문은 한 단계 격을 낮춘 형태이다. 석축의 규모도 작고, 1층 문루에 팔작지붕으로 이루어졌다.
북암문(北暗門)
1796년(정조 20) 창건 1972년 수리 북암문은 화성 북쪽에 낸 비상 출입문이다. 암문이란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설치하여 적이 모르게 출입하고 군수품을 조달하던 문을 의미한다. 화성에는 5곳의 암문이 있었는데 모두 벽돌로 만들었다. 북암문은 지형에 맞춰 좌우 성벽까지 벽돌로 둥글게 만들었다. 문 위에는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기 위해 여장을 세웠는데 반원형은 원여장, 장방형은 비예라고 부른다.
동암문(東暗門)
1796년(정조 20) 창건 1976년 복원 동암문은 화성 동쪽에 낸 비상 출입문이다. 암문이란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설치하여 적이 모르게 출입하고 군수품을 조달하던 문을 의미한다. 화성에는 5곳의 암문이 있었는데 모두 벽돌로 만들었다. 동암문 상부에는 윗부분을 둥글게 만든 원여장을 설치했고, 좌우에는 네모난 비예睥睨를 세웠다. 비예는 암문 위에서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기 위해 만든 여장이다. 성 안쪽에 도로가 생기면서 지형이 높아져 1976년 동암문 복원 시 계단을 추가했다.
서암문(西暗門)
1796년(정조 20) 창건 1975년 수리 서암문은 화성 서쪽 팔달산 꼭대기 성벽에 설치한 비상 출입문이다. 암문이란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설치하여 적이 모르게 출입하고 군수품을 조달하던 문을 의미한다. 화성에는 5곳의 암문이 있는데 모두 벽돌로 만들었다. 서암문은 성벽을 안쪽으로 접혀 들어가도록 쌓고 그 사이에 문을 내서 바깥에서 알아차리기 어렵다. 화공에 대비하기 위한 오성지나 적을 감시하기 위한 비예 같은 별도의 방어 시설을 두지 않고 지형의 이점을 최대한 살렸다.
- 유네스코
◆ 화성행궁:
수원역 4번 출구
노보텔 앞 정류장: 13번 버스 승차 -> '팔달구청.화성행궁.수원성지' 버스 정류장 하차..
'팔달구청.화성행궁.수원성지' 버스 정류장 하차함.
길을 건너니 수원성지가 바라보임.
수원시립미술관
화성행궁 광장
수원시립미술관
신풍교(新豊橋)
화성행궁은 정궁의 형태로 만들어진 궁궐로 팔달산으로 부터 발원한 명당수가 정문 앞에 흐르고 있다. 명당수란 궁궐 앞에 맑은 물이 흘러내리게 하여 궁궐로 출근하는 관리들이 그 맑은 물을 보고 마음을 깨끗하게 하여 올바른 업무를 보게 하겠다는 의미로 만들어진 것이다. 명당수에는 악귀를 막기 위해 금천교(禁川橋) 라는 다리를 만드는데 화성행궁은 신풍루의 이름을 따사 신풍교라 하였다.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와 홍살문과 신풍교가 일직선이 아니 것은 국와의 존엄을 높이면서 자연의 흐름을 존중하기 위한 궁궐 건축 양식 때문이다.
<<화성성역의궤>>에 보이는 신풍교
누각을 나와 아래로 19보 가면 새로 놓은 돌다리가 있는데, 곧 홍살문 안에 있는 임금이 다니는 길이다. 길이가 14척(4.3m), 너비가 35(10.7m)척이며 역시 신풍교(新豊橋)라 이름지었다.
복원된 신풍교
- 2005. 3.23: 문화재현상변경허가
- 2006. 7. 16: 문화유적 발굴조사 완료
- 2007. 3: 복원(신풍교- 길이 4.3m, 폭 12m, 명당수- 길이 84.4m, 폭 3m)
신풍루(新豊樓):
1790년(정조 14) 창건 2002년 복원 신풍루는 화성행궁의 정문이다. 조선 정조 13년(1789)에 수원읍의 관청 건물을 세우면서 그 정문으로 지었다. 처음에는 진남루鎭南樓라 부르다가 1795년에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열면서 이름을 신풍루로 바꿨다. 신풍루는 중국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고향인 풍패豐沛에서 따온 이름으로 제왕의 고향 풍패지향豐沛之鄕으로서 화성을 자리매김하고자 했던 정조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건물은 2층의 누각 구조로 아래층은 출입문으로 쓰고, 위층에는 큰 북을 두어 군사들이 주변을 감시하고 신호를 보내는 용도로 사용했다.
보호수 느티나무, 수령 350년 (지정: 1982.10.15)
매표소...
화성행궁 관람 안내:
- 관람시간: 09:00 - 18:00 (입장마감: 관람종료 30분전)
* 휴무일: 연중 무휴.
- 일반권:
. 개인; 어른: 1,500원, 청소년 및 군인: 1,000원, 어린이: 700원.
. 단체(20인 이상): 개인; 어른: 1,200원, 청소년 및 군인: 800원, 어린이: 500원.
- 통합권: (화성행궁+수원박물관+수원화성박물관)
. 개인; 어른: 3,500원, 청소년 및 군인: 2,000원, 어린이: 800원.
. 단체(20인 이상): 개인; 어른: 2,000원, 청소년 및 군인: 1,200원, 어린이: 600원.
- 안내: 031-290-3600 / www.swcf.or.kr
2024 문화유산 특별관람 프로젝트
※ 풍류산책
2024. 5월 ~ 10월:
토요일 10회 운영
매월 2/4번째 토요일 16:00 - 17:30
혹서기인 7월 1번째, 8월 5번째 토요일: 19:00- 20:30
일정별 사전예약 50명
문의전화: 수원문화재단 031-290-3575
※ 화성행궁 야간 개장:
2024.05.03 금 - 10.27 일
매주 금~일요일 18:00 ~ 21:30 (공휴일포함)
신풍루 현판 글씨....서예가 조윤형(1725~1799)이 썼다.
화성행궁
달빛화담 ♠ 야간개장
좌익문
신풍루 빙향
중양문
봉수당 방향...봉수당은 화성행궁의 중추 건물이다. 우측으로 돌아들어가야 한다.
경룡관
진찬 모형 설명
봉수당
공신루
가리막이 쳐져 있는 봉수당
봉수당
봉수당(奉壽堂):
봉수당은 화성행궁에서 자장 위상이 높은 건물이다. . 1789년(정조 13) 창건 1997년 복원 봉수당은 화성행궁에서 가장 위상이 높은 건물이다. 처음 이름은 장남헌壯南軒이었으나 1795년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계기로 봉수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궁궐에서는 대비나 상왕이 머무는 건물에 목숨 수壽 자나 길 장長 자를 붙이는 전통이 있어, 혜경궁 홍씨의 장수를 기원하며 이름을 바꾼 것이다. 건물은 정면 7칸으로 일반 동헌과 마찬가지로 대청과 방을 둔 구조이나, 마당 한가운데는 왕이 지나는 길인 어로를 두었고 건물 앞에는 넓은 기단인 월대1)를 갖추었다. 어로와 월대는 일반 동헌에는 없고 임금이 머무는 공간에만 설치하는 시설이다. 1795년 윤 2월 13일,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가 열리던 날 봉수당 월대 앞에 넒은 무대를 설치하고 궁중연회가 펼쳐졌다. 당시 행사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있다.
1) 월대: 궁궐의 정전, 묘단, 향교 등 주요 건물 앞에 설치하는 넓은 기단.
정조대왕의 처소:
정조대왕이 화성행궁 행차시 신하를 접견하고 쉬던 장소를 연출한 공간이다. 원래는 유여택이 신하를 접견하고 쉬던 장소였으나 관람의 편의를 위해 이곳 봉수당에 연출하였다.
관람포인트: 특히 주부자시의도 병풍은 당대 최고 화원 단원 김홍도가 정조시대 정조를 위해 주자의 시를 그림으로 그려 진상한 것으로 정조는 이를 극찬하여 항상 곁ㅇ데 두고 보았다고 한다.
봉수당에서의 진찬연
1795년 을묘원행시 진찬연 장면을 부분 연출한 공간으로 정조대왕이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게 예를 드리고 있다. 여관女官들은 왕과 혜경궁 홍씨를 보좌하고 있다. 이날 진찬연에서 혜경궁 홍씨에게 12기의 소별미와 70가지 음식 그리고 42개의 상화가 바쳐졌다.
봉수당 현판...서예가 조윤형(1725~1799)이 썼다.
노래당:
노래당은 낙남헌에 잇대어서 지은 화성행궁의 별당이다. 조선 정조 18년(1794)에 행궁을 증축하여 낙남헌과 함께 지었다. 정조는 화성에서 노년을 보내기 위해 '늙음이 찾아온다'는 뜻을 지닌 노래당을 짓고, 그 뜻을 종종 신하들에게 말했다. 노래당은 아들의 나이가 15세가 되면 왕위를 물려주고 화성에 내려와 지내려 했던 정조의 뜻이 담긴 건축물이다. 출입문은 길이 젊음을 보존한다는 뜻으로 난로문(難老門)이라 지었다. 노래당은 건물의 원형이 잘 남아있다.
노래당 방향
낙남헌
낙남헌(洛南軒):
낙남헌은 화성행궁에서 공식 행사나 연회를 열 때 사용하는 건물이다. 중국 한나라를 세운 유방이 부하들 덕분에 나라를 세울 수 있었음을 감사하며 낙양(洛陽)의 남궁(南宮)에서 연회를 베풀었다는 이야기를 본떠서 이름을 지었다. 정조는 1795년 을묘원행 당시 낙남헌에서 수원의 백성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무과 시험을 치르고 상을 내리는 등 다양한 행사를 열었다. 낙남헌 건물은 벽이 없는 개방된 구조로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다. 연회를 베푸는 건물답게 건물 앞에는 넓은 월대1)를 두어 격식을 높였다. 월대로 오르는 계단 양 옆에는 구름무늬가 새겨져있다. 낙남헌은 궁궐 전각과 비슷해도 손색이 없는 아름다운 건물로 원형이 잘 남아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수원군청으로 사용되었고, 신풍국민학교 교무실로도 사용되었다.
1) 월대: 궁궐의정전, 묘단, 향교 등 주요 건물 앞에 설치하는 넓은 기단.
득중정
화령전 방향
왼쪽 화령전, 오른쪽 우화관
우화관
화령전 가는 길에 바라보는 낙남헌
화령전
운한각
운한각
정전(운한각) (正殿, 雲漢閣)
운한각은 정조의 어진1)을 모시고 제사지내는 건물이다. 중앙에는 정조 어진을 모신 합자(閤子)를 두고, 좌우에 있는 익실에는 정조가 편찬한 책과 제사에 쓰는 물품을 보관했다. 보통 어진을 모시는 공간은 화려하게 치장하지만 검소한 생활을 강조한 정조의 뜻을 받들어 소박하게 만들고, 학문을 좋아하던 왕을 기리기 위해 익실에 서책을 봉안한 것이다. 이런 사례는 다른 영전에서는 보기 어렵다. 합자와 익실 바닥에는 온돌을 설치하여 5일마다 불을 넣어 습기를 제거했다. 고종 9년(1872) 에 운한각 바닥을 마루로 개조하였지만 아궁이 흔적이 남아있다. 순조는 1804년에 처음 화령전에 와서 작헌례2)를 올렸다. 이때 건물 이름을 운한각(雲漢閣)이라 짓고 현판의 글씨를 직접 써서 내렸다. 운한의 많은 서적을 탐구한 학자를 지칭하는 '운한소회(雲漢昭回)' 에서 비롯된 표현으로 정조를 상징하는 말로도 종종 쓰였다. 현재 운한각에 보관되어 있는 어진은 2004년에 다시 그린 표준영정이다. 원래 모셔져 있던 정조어진은 1908년에 서울로 옮겨졌으나 1954년 부산 피난처에서 소실되고 말았다.
1) 어진; 임금의 초상회
2) 작헌례; 임금이 몸소 왕릉, 연전, 종묘, 문묘 등에 참배하고 잔을 올리던 제례
봉화당
재실( 齋室 ):
재실은 제사를 주관하는 헌관이 머물며 준비하는 건물이다. 국왕이 직접 제사를 지낼 때면 어재실1)로 쓰였다. 재실에서 전전 앞까지 임금이 지나가는 길인 어로와 잠시 대기하는 장소인 판위(版位) 가 설치되어있다. 1908년 정조 어전을 서울로 옮긴 뒤 비어있는 화령전 건물을 수원의 풍화당(風化堂) 어른들에게 관리하도록 했는데, 그 이후로 재실을 풍화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풍화당은 일종의 기로소(耆老所) 로 지금의 경로당과 유사한 친목 기구이다.
1) 어재실(御齋室): 임금이 능이나 묘에 나들이할 때 잠시 머물던 집.
화성행궁 야간개장
우화관
우화관(于華觀);
우화관은 화성유수부의 객사이다. 객사는 지방수령이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국왕에 대한 의례를 행하는 곳이면서 관아를 방문하는 관리나 사신들이 머물던 곳이다. 이를 위해 객사는 국왕을 상징하는전패(殿牌)를 모시는 정청(正廳)을 가운데 두고 온돌방과 마루로 구성된 건물을 좌우에 날개처럼 붙인 모습이 일반적이다. 우화관도 객사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우화관의 정청은 바닥에 벽돌을 깔아 특별히 벽대청(甓大廳)이라 불렀다. 객사의 전패가 국왕을 상징하기 때문에 화성행궁 전체가 동향으로 배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화관은 남향으로 건립되었다. 우화관은 건립 초기 팔달관(八達館)으로 불리었으나 1793년 수원부가 화성유수부로 승격된 이후 정조의 명에 따라 개명되었다. 우화관 이름에는 화(華) 지역을 살피러 다니던 요(堯)임금 시절 처럼 태평시대가 되기를 바라는 끗이 담겨있다.
우화관 내부
집사청
집사청 내부.....집사청에서 일하는 관리들의 모습
집사청(執事廳)
집사청은 관청에서 치르는 제사나 행사를 준비하는 집사들이 근무하는 건물로 조선 정조 14년(1790)에 건립되었다. 정조의 현륭원 행차를 비롯해서 왕이 화성에 내려와 진행하는 모든 행사를 준비했다. 평소에는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수령이 화성행궁의 객사1)인 우화관에서 올릴 의례를 준비하는 곳으로 쓰였다. 집사청은 우화관 가까이에 있어 효율성을 고려하여 배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1) 객사: 조선 시대에 왕의 위폐를 봉안하고 고익행사를 하던 곳.
화성행궁 구경 나온 어린이들
다시 화성행궁 정문, 신풍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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