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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구릅/일상들 ( life )

③ 북한강철교. 두물머리, 세미원- ( 2024.07.14 )

by the road of Wind. 2024. 7. 17.

 북한강철교. 두물머리, 세미원

- ( 2024.07.14 )

 

《  세미원  》 

 

 

두물머리

두물머리 느티나무 쉼터

연밭....지금 두물머리, 세미원, 용담호 등 이 지역은 아름다운 연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지금은 연꽃의 계절이다. 연분홍과 하얀 색깔의 꽃들이 깨끗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나는 어렸을 적에 우산 처럼 넓은 연밭을 바라보면 기분이 너무 좋았었다. 지금도 그런 감정은 남아있다. 

 

 

세미원 출입구

 

 

觀水洗心 물을 보며 마을을 씻고
觀花美心 꽃을 보며 마음을 아름답게 하라


세미원 관람안내도:

연꽃박물관,  국사원,  장독대분수, 페리기념연못, 백련지, 홍련지, 세계수련관(열린정원), 열대수련정원, 유상곡수, 세한정, 사라의 연못, 배다리, 상춘원, 두물머리 

사진:
불이문 / 장독대분수 / 연꽃박물관 / 국사원 / 배다리-열주수교 / 세한정 


물과 꽃의 정원
세미원(洗美苑):

세미원(洗美苑)의 명칭은 물을 보며 마음을 씻고 꽃을 보며 마음을 아름답게 하라는 옛 성현의 말씀에 기원했습니다. 한강 상류에 위치한 세미원은 수질정화 기능이 뛰어난 연꽃을 주로 식재하며 봄, 여름, 가을, 겨울 각 계절에 맞게 정원을 꾸며 사계절 언제나 아름답습니다. 또한 생태환경 교육과 체험교육, 전시활동을 겸하는 복합문화공간을 지향합니다.

** 사진찍기 좋은 코스:
연꽃 박물관-> 국사원-> 자옥대분수-> 페리기념연뭇-> 열대수련연못-> 세한정-> 배다리-> 상춘원-> 두물머리

** 휠체어로 이동하기 편한 코스:
연꽃박물관-> 메타세콰이어길-> 홍련지 및 백련지-> 고가다리 밑 
 

 

요금표:

- 일반:  5,000원 (19세 이상 성인)

- 우대:  3,000원  (6세 이상 어린이, 청소년, 65세 이상, 장애인 평점(4-6점)

- 단체:  3,000원 (50인 이상 (중복불가))

- 무료:  5세 이하, 양평군민(1인 1매 혜택), 장애인 중증(1-3급) 본인 및 동반 보호자 1인, 국가유공자 및 배우자, 현역병사, 기초생활수급 1종 대상자, 의사자 유족 및 의상자

반입금지물품: 반려동물 등 허가받지 않은 동.식물, 모든 음식물, 타인에 피해를 줄 수 있는 물품, 악기,앰프, 확성기 등 소    음을 발생시키는 물품.

   

 

 

세미원 배다리

세미원 세한정에서 두물머리 한강 구간에 선박 44척을 연결해 만든 주교(舟橋)로, 길이는 245m (교량구간 200m) 폭은 4m 임, 

세미원 배다리는 1795년 조선후기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 묘인 화성 현릉원을 참배하기 위해 서용보, 정약용에게 지시해 한강에 설치했던 주교(舟橋)를 재현해 만든 것으로, 물과 꽃의 정원으로 널리 알려진 세미원과 남.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를 선박 44척을 이어 다리형태로 연결했다. 제작 과정에는 역사 문헌인 주교사절목(舟橋節目)의 주교도와 노량주교도섭도를 최대한 재현하는데 주안점을 뒀다. 배 한척은 강의 상류를 향하고, 한 척은 하류를 향하도록 하여 서로 교차시켜가면서 늘여 세웠다. 강안 양끝에는 각각 홍살문을 세워 왕의 행차에 대한 권위와 경건함을 상징하는 문을 설치했다. 각 배에는 조선시대 군대를 지휘하는데 사용한 오방기 (五方旗)와 고초기(高招旗)가 걸려있다. 세미원 배다리는 정조대왕의 효심과 정약용 선생의 지혜로움을 상징하는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잇으며, 세미원과 두물머리를 잇는 중요한 통로로 관광객이 우회하는 불편함을 해소하고자 설치했다. 2012년 7월 21일에 처음 설치했고, 2024년 4월 12일에 재설치했다.   

 

배다리의 역사


<배다리>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중국 주나라 문왕(文王) 때이다. 우리나라에는 고려시대부터 다양한 사료들이 전해지고 있으며, 지금도 전국 곳곳에 배다리라는 지명이 전해지는 것을 미루어 볼 때 선조들이 세운 교량 가운데 배다리가 중요한 몫을 차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1789년, 정조께서 한강에 설치한 배다리로서 설치 규모의 웅장함과 화려함, 교량의 설치 기법 등에서 단연 세계 최고로 꼽힌다. 정조께서는 양주에 있던 부친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부로 이전하고 능호를 현릉원(顯陵園) 이라 이름하였다. 그리고 매년 한강에 배다리를 설치하여 현릉원을 참배하였는데 이를 위해 다산 정약용 선생 등이 참여하는 주교사(舟橋司) 를 설립토록 하여 배다리를 건설하고 관리하였다. 여기 세미원에 정조시대의 배다리를 재현하여 민족 고유 문화유산을 세계에 널리 알리고, 정성을 다하여 부모를 섬기고자 했던 정조의 효행과 설계에 참여했던 정약용 선생의 학덕을 기리고자 한다.   

 

배다리를 건너며(過舟橋) 

                                    - 다산 정약용

 

해마다 정월달이 돌아오면         _ 歲歲靑陽月 (세세청양월)
난여가 화성으로 거둥하시지      _ 鑾輿幸華城 (난여행화성)
가을이 지난 뒤에 배를 모아서    _ 船從秋後集 (선종추후집)
눈 내리기 이전에 다리 만드니    _ 橋向雪前成 (교향설전성)
새 나래 붉은 난간 두 줄로 서고  _ 鳥翼紅欄夾 (조익홍란협)
고기비늘 흰 널판자 가로로 깔려_ 魚鱗白板橫 (어린백판횡)
선창가의 저 바위 구르지 않아    _ 艙磯石不轉 (선기석불전)
천년토록 임금의 마음을 알리     _千載識宸情 (천재식신정)

 

 

* 조선 정조 때 임금의 수원 화성 행차를 위해 노량진의 한강 위에 설치됐던 열수주교(洌水舟橋)라고 불리는 배다리다산 정약용의 작품인데, 마침 근처 능내리에 살았던 다산 선생 다시 떠올리게 한다.

 

초의여! 양평에 삽시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이 글은 정약용 선생께서 해남 대흥사 초의스님에게 양평에 올라와 살 것을 제안하신 서한 중 두물머리에서 강물을 따라 오르내리며 시를 짓고 거문고를 타며 함께 즐기면서 살자고 권유하는 내용을 발췌한 것입니다. 아래 그림은 겸제 정선(謙齊 鄭敾, 1676-1759) 선생께서 두물머리 일대의 풍경을 그린 독백탄도(獨柏灘圖) 입니다. 

소설암(용문산에 있던 암자)에서 시내를 따라 몇 리 쯤 내려오면 녹효수(여주 쪽에서 올라오는 한강)와 만납니다. 여기서 작은 배를 타고 가울을 따라 20여리 내려오면 두 물줄기가 서로 합쳐지는 곳에 이르지요. 이곳이 바로 유산별서(酉山別墅)입니다. 그 사이의 물빛과 산빛, 삼각주와 모래톱의 자태는 모두 뼈에 저밀 듯 해맑아, 깨끗함이 눈길을 빼았는다오. 매년 3월 복사꽃이 할짝피면 강물을 따라 오르내리면서 시를 짓고 거문고를 타며 이 맑고 한가로운 경계에서 논다면 이 또한 인간세상의 지극한 즐거움이 아니겠소? 선만자(善男子)여!  뜻이 있으신가? 만약 뜻이 있다면 나를 따라오시오. 

- 늙은 초부 다산 씀 - 

 

 

추사 하루방

추사하루방


우리역사상 가장 위대한 서예가요 대학자이신 추사 김정희 선생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우리나라 맨 남쪽 제주도 끝자락 대정고을에서 귀양살이를 하게되었다. 가시울타리가 둘러진 외딴 초가집에서 외롭고 쓸쓸한 삶을 사셨던 추사 선생의 공허하고 텅빈  마음을 뻥 뚫린 가슴의 하루방을 통해 표현하고 추사하루방이라 명명하였다

 

세한정기...국보180호인 추사 김정희 선생(1786-1856)의 세한도를 기본으로 하여 세미원의 한부분에 소나무와 잣나무를 소재로 정원을 조성하고 그 이름을 세한정이라 명명하였다.

 

세한정기(歲寒庭記)

본 사업은 국보 180호인 추사 김정희 선생(1786~1856)의 세한도(歲寒圖)를 기본으로 하여 세미원의 한부분에 소나무와 잣나무를 소재로 정원을 조성하고 그 이름을 세한정(歲寒庭)이라 명명하였다. 그림 속에 담긴 송백의 늘 푸른 정신과 또한 스승과 제자 사이에 있었던 변치 않는 공경과 사랑과 신뢰의 장무상마방(長毋相忘) 정신을 배울 수 있는 인성 함양의 장을 만들고자 한다. 나아가, 오늘의; 세한도가 잇기까지 150여 년의다사다난했던 역정(歷程)을 살필 수 있도록 하여 우리 문화재들의 수난과 그를 지켜내려는 선조들의 노력도 함께 살필 수 있는 역사의 산 학습장을 조성하였다. '약속의 정원'은 청공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쓰고 세한정(歲寒庭)과 송백헌(松栢軒) 추사 선생의 글씨를 집자하였다. 


주최: 경기도. 양평군.
주관: (재) 세미원 (사) 우리문화가꾸기회  

 

 

세한도의 긴 여정

 

세한도는 200여년 동안 이리 저리 유랑의 길을 걸어왔다. 추사 김정희 선생이 제주도 유배 생활 중이던 1839년, 세한도를 완성하여 제자 이상적에게 보낸다. 제자 이상적은 스승이 보내준 세한도를 중국으로 가져가서 중국의 학자들에게 보여주고 제영을 받아 다시 제주도의 스승께 보여드린다. 그 후 세한도는 일제시대 때, 추사를 연구하던 경성제국대학의 일본인 후지츠카 교수의 손에 넘어가고 후지츠카 교수는 세한도를 일본 동경으로 가져간다. 이에 서예가 손재형 선생은 동경으로 건너가 후지츠카 교수에게 두 달여간의 끈질긴 설득 끝에 1944년, 세한도를 한국으로 되찾아온다. 굥교롭게도 그 해 후지츠카 교수의 집이 폭격을 맞아 많은 추사의 자료가 불타 버린다. '세한도의 긴 여정'은 세한도가 이렇듯 험난한 과정을 거쳐 오늘에 있기까지의 과정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림으로 그려 전하고자 제작되었다. 

 

1. 명문의 지집안에서 귀하게 태어나다. (1786년 (정조 10년), 1세)

 

추사는 1786년 충청남도 에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아버지 김노경과 어머니 기계 유씨 사이에서 장자로 태어났다.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내던 이름 난 명문 가문인 경주 김씨의 자손으로 태어낫으며 영조대와의 둘째 딸 화순옹주가 증조모로 왕실의 훈척이 있다.  

 

2. 어릴 때부터 글씨를 잘 써 세상을 놀라게 하다. (1792년 (정조 16년), 7세)

 

어릴 적 부터 글씨를 잘 써 세상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당시 73세였던 명재상 재재공이 추사가 쓴 입춘첩을 보고 글씨로 이름을 날릴 것을 예언하며 담소를 나누었다. 8세 때는 절손이 된 큰아버지 댁으로 양자를 가게 된 후 어린 나이에 쓴 것으로 보이지 않는 문안 편지를 남겨 사람들을 감동 시켰다. 

3. 중국에서 학문의 세계를 넓히다. (1809년 (순조 9년), 24세)

 

24세 젊은 나이로 사신으로 떠나는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가 평소에 만나고 싶던 대학자들을 찾아뵙고 학문을 토론하여 중국 학계를 놀라게 했다. 특히 중국의 원로학자인 옹방강(78세)과 학계에 떠오르는 학자인 완원(47세)은 추사에게 실학 고증학 등의 핵심을 알려주며 추사의 뛰어난 자질을 알아보고 제자로 삼았다.

 

4. 조선의 금석학을 발전시켰다. (1816년 (순조 16년), 31세)

 

추사의 학문 세계는 유교는 물론 불교, 노장, 실학 그리고 금석학, 고증학에 까지 다방면에 일가견을 이루었다. 31세에 북한산에 있는  이름 모르는 오래된 고비(古碑)가 진흥왕의 순순비라는 것을 처음 밝혔다. 추사는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를 고증하기 위해 여러 차례나 북한산 비봉에 올랐으며 우리나라의 옛 비문들을 연구하여 조선 금석학을 독립된 학문분야로 발전 시켰다. 

 

5.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다. (1819년 (순조 19년), 34세)

 

성균관 유생에게 치르는 시험에서 제술(製述, 글짓기)로 수석을 차지하였고 이듬해 4월 25일 문과에서 병과 8위로 급제하였다. 드디어 관직에 올라 정치에도 능력을 발휘하였다. 대리청정하던 효명세자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세자를 보좌하였으니 이로 인해 소인배들의 질투와 시기의 대상이 되는 시발점이 되기도 하였다.

 

추사 김정희 선생 글씨

 

7. 누명을 쓰고 제주도에 유배되다. (1840년 (현종 6년), 55세)

 

경주 김씨 가문 중에 특히 안동 김씨의 집중적인 모함을 받은 추사는 결국 억울한 누명을 쓰고 제주도 대정현에 위리안치(圍籬安置) 되었다. 귀양가는 뱃길 중간 쯤 갑자기 풍랑이 심하게 일어 모든 사람들이 죽었구나 하고 체념을 했지만 추사는 뱃전에 홀로 앉아 배의 방향을 정확히 알려주어 아침에 출발한 배가 저녁에 무사히 제주에 도착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8. 우연히 중국에서 책을 구해준다.   (1843년 (현종 9년), 58세)

 

추사의 타는 목마름을 채워 줄 한 모금의 시원한 냉수가 있었으니 바로 제자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의 책 선물이었다. 스승의 외로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우선 이상적은 직업이 대대로 통역관이었다. 사행(使行)으로 중국 북경에 갈 때 마다 새로 발간되는 명서들을 구해 추사에게 보내주었다. 북경에서 제주도 남쪽 끝까지 말에 실리고 배에 실리고 동침에 지워져 스승 추사에게 전달 되었다. 

 

세한도

9. 외롭고 쓸쓸하게 귀양살이 하다.  (1843년 (현종 9년), 58세)

 

제주도 남쪽 끝 바닷가의 조그마한 집 탱자나무 울타리. 감옥 아닌 감옥 속에서 허름한 잠자리, 보잘 것 없는 시골 음식,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외ㅗ움은 겹겹히 들려오는  모진 파도와 같았다. 그러나 이 모든 괴로움보다 더 모진 고통이 있었으니 손에 들고 읽을 마음의 양식인 책이 없다는 것이다. 독서에 대한 갈급함이 지식인으로서 가장 견디지 못할 고문이었다. 

 

11. 초선 최고의 문인화가 탄생하다.  (1844년 (현종 10년), 59세)

 

세한도를 완성한 후 추사는 무언가 허전하였다. 심심파적으로 돌 하나를 집어 들어 칼을 대기 시작하였다. 장무상망(長毋相忘) 은 온 정성과 심혈을 기울여 새긴 네 글자의 인장을 세한도의 한 귀퉁이에 찍으면서 추사는 마음 속으로 이렇게 부르짖었다. "여보게 우선! 우리 영원히 잊지마세! 고맙네! " 추사의 눈가에 이슬이 맺혀 있었다. 

 

12. 중국의 지성인들이 감동받다.  (1845년 (현종 11년), 60세)  

 

우선은 세한도를 가지고 중국 연경에 가서 추사와 교분이 있거나 홍보하던 중국 학자들을 모아 세한도를 펼쳐보였다. 중국 학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깊은 신믕소리 같은  찬사가 여기저기 쏟아졌다. " 추사 선생도 훌륭하고 이상적 당신도 훌륭하오. 이 세한도 또한 세상에 없는 보물이오!" 단전에 13명의 학자들이 제영(題詠)을 앞다퉈 썼다. 참여하지 못한 학자들의 제영도 후에 함께 하게 되어 16명의 제명이 세한도의 뒤를 장식하게 되었다. 

 

김정희, <세한도(歲寒圖)>, 1844, 수묵화
23.0X69.2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보 제180호.

추사 나이 59세 되던 1844년, 제주도에 유배온지 5년이 되었을 때, 추사는 생애 최고의 명작으로 꼽히는 <세한도(歲寒圖)>를 제자인 이상적에게 그려주었다. 제자인 역관 우선 이상적은 스승 추사가 귀양살이 하는 동안 연경에서 구해온 귀중한 책을 정성으로 보내주었다. 추사는 그 고마운 마음의  표시로 <세한도>를 그려 준 것이다. 

 

13. 손재형 나라의 보물을 되찾아오다.  ( 1944년 )

 

추사가 세한도를 그린 지 80여년 후 우여곡절과 잦은 풍상을 거치며 세한도는 흘러흘러 후지츠카 경성제국대학교수(1879~1948)에게로 넘어가게 된다. 전세가 불리해 짐을 깨닫고 고향인 동경으로 들어가면서 추사 선생의 모든 자료를 함께 가지고 갔다. 이 소식을 접하고 가장 놀란 사람은 서예가로 명망 높은 손재형(1903~1981)이었다. 추사 자료의 해외 반출이 안타까웠다.   

 

14. 민족의 보물이 불타버릴 뻔하다.  (1944년)

 

"돌려 주십시오. 우리 민족의 혼이 깃든 작품입니다. 돈은 제가 준비해 왔습니다. 세한도 하나 만이라도 돌여 주십시오." 두달여 무릅 끓고 끈질기게 간구한 손재형의 손에 드디어 세한도 작품이 돌려졌다. "좋소. 당신의 열정이면 이 세한도를 잘 보전 하리라 믿소. 조심해서 가지고 가시오. 세상이 온통 포화 속이도!" 세한도를 받아 든 손재형은 벅찬 가슴을 누르고 귀국했다. 우연일까? 얼마 후 후지츠카 교수의 집에 포탄이 떨어져 추사의 많은 자료들이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15. 잘했구나! 잘했어. (1949년 )

손재형은 상당 기간 동안 세한도 이야기를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일본의 패망과  그리고 좌우의 분열과 혼란 등이 이유였으리라. 대한민국이 탄생하고 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되어가는 1949년 애국심이 남다르고 학문의 세계가 당대 최고였던 정인보, 이시형, 오세창 선생을 찾아가 세한도에 대한 설명을 드리고 발문을 받았다. " 자네 같은 사람의 애국심 더택에 우리가 해방되고 독립이 된 것이네. 잘 했구나! 잘 했어! " 

 

세한도

자신의 처지를 예술로 승화시키다.

한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상록수 처럼 변하지 않고 의리를 지켜준 제자 우선에게 그려준 세한도에는 유배당한 김정희의 마르고 차디찬 마음 상태와 함께 간절한 하소연이 담겨있다. 나무 네 그루가 쓸쓸해 보인다. 소나무 한 그루는 추사 자신을 비유하였고 옆 세그루 나무는 잣나무라고 하는데 정확하진 않다. 최근에는 제주도에 자라는 곰솔나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어쨌든  반듯한 나무는 제자 이상적에 비유하여 그 믿음과 의를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이 분명하다. 초가집 한채는 소나무와 잣나무에 둘러쌓여 고독한함을 더하고 있다. 게다가 획을 표현하는데 있어서는 거칠고 메마른 기운을 담아내어 매우 ㅆ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절제된 화면 구성을 통해 드러난 텅 빈 여백은 추사의 외로운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 극한의 절망 끝에 이뤄낸 절제미의 완성이다. 절제된 표현의 극대화를 통해 선비의 검소하고 순박한 정신을 담담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거친 줄기를 메마른 붓질로 우려낸 일필휘지의 거침없는 표현은 아주 매력적이다, 붓질이 화폭에 살아 슈숨 쉬는 듯 하다. 조선 후기 세도정치의 폐해 속에 억울하게 유배생활을 해야했던 김정희! 그는 이 한폭의 그림을 통해 자신의 억울함과 외로운 처지를 호소하려 했던 것이다. 시린 한 겨울, 시린 내 마음을 쓸쓸함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렇듯 한 폭의 그림 속 붓질하나 하나 마다 자신고ㅢ 심경과 마음을 담고 있다. 추사는 절제된  화폭 속에 평생에 걸친 학예의 실천을 실현한 것이다. 그림에 담겨진 작가의  마음을 통해 세한도의 예술적 가치는 더 높아진다.

추사 김정희 선생의 제자, 우선 이상적 초상화

 

오른쪽의 추사 김정희 선생 전신상..... 제자 허련의  <완당선생 해천일립상>

 

추사 김정희 선생 연표;

1786 - 1800:
1986년 - (1세 정조 10):   김노경과 기계 유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
1793년 - (8세 정조 17):  백부 김노영의 양자로 들어감. 
1794년 - (9세 정조 18):  믹내 동생 김사희 출생
1797년 - (12세 정조 21):  조부 김이주와 양부 김노영의 사망으로 월성위 ㄱ문의 봉사손이 됨.
1800년 - (15세 정조 24):  한산 이씨와 혼인

1801 - 1832:
1801년 - (16세 순조 원년):  생모 기계 유씨 사망
1805년 - (20세 순조 5):  부인 한산 이씨 사망
1806년 - (21세 순조 6): 양모 남양 홍씨 사망
1808년 - (23세 순조 8): 예인 이씨와 재혼
1809년 - (24세 순조 9): 소과(생원시) 급제, 자제군관의 자격으로 동지부사 김노경의 연행 수핼,
1810년 - (25세 순조 10):  완원과 옹방강에게 사사
1816년 - (31세 순조 16): 김경연과 함께 북한산 진흥왕순수비 답사. ,실사구시설> 저술.
1817년 - (32세 순조 17): 서자 김상우 출생
1819년 - (34세 순조 19): 대과에 급제
1823년 - (38세 순조 23): 규장각 대교가 됨
1826년 - (41세 순조 26): 충청도 암행어사가 됨
1827년 - (42세 순조 27):  의정부 검상 및 예조 참의을 역임
1829년 - (44세 순조 29): 구장각 대교 겸 시강원 보덕이 됨
1830년 - (45세 순조 30): 동부승지가 됨. 친부 김노경이 고금도로 유배됨.
1832년 - (47세 순조 32): 김노경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격쟁함. <진흥아비고> 저술.

1836 - 1849:
1836년 - (51세 현종 2): 성균관 대사성 및 병조 참파를 역임
1837년 - (52세 현종 3): 친부 김노경 사망
1839년 - (54세 현종 5): 형조 참판이 됨
1840년 - (55세 현종 6): 동지부사로 임명되었으나 윤상도 옥사가 재론되어 제주도 대정현으로 위리안치됨.
1841년 - (56세 현종 7): 김상무를 양자로 들임
1842년 - (57세 현종 8): 부인 예안 이씨 사망
1845년 - (60세 현종 11): 제자 이상적이 <세한도>에 중국 청나라 16인 문인의 제찬을 받음.
1846년 - (61세 현종 12): <무량수각> <시경루>,<의문당>을 씀 
1848년 - (63세 현종 14): 제주도 유배에서 풀려남

1851- 1857:
1851년 - (66세 철종2): <예림갑을록> 시연회 개최. 예송논쟁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
1852년 - (67세 철종3): <석노시>와 <진흥북수고경>을 씀. 북청 유배에서 풀려나 경기도 과천의 과지초당에 머묾.
1856년 - (71세 철종7): <판전>을 씀. 과지초당에서 서거.
1857년 - (사후 1년, 철종8):  사면 및 복권

1867 - 1868;
1867년 - (사후 11년, 고종 4):  제자 남병길이 추사의 유고를 모아 <완당척독> 2권 2책과 <담연제시고> 7권 2책을 간행.
1868년 - (사후 12년, 고종 5):  제자 남병길과 민규호가 문집 <완당집> 5권 5책을 간행

塵俗遠凝初珀琥  籟靈添奏自黃笙 진속원응초박호 뢰령첨주자황생

' 먼지 속세 먼 곳에 호박 보석, 풍소소리 더하여 붉은 빛이 살아나네' 쯤의 뜻인가?

 

세미원 사랑의 연못

 

세족대...시원한 물에 발 담그고 있는 사람들. 세상에 찌든 마음도 씻고 가시길 바라오니다.  

홍련지

김장훈 정원사와 함께하는 빅토리아 관찰하기

2024.09.01 (일) 오후 1시~3시, 참가비용 무료

 

온대수련 / 개연꽃 / 가시연꽃 / 어리연꽃

풍기대

 

 

일심교

백련지

 

三代繼孝之家 삼세계효지가...삼대가 효도를 이어가는 집안. 어찌 아름다운 집이 아닌가! 효가 그리운 세상이 되었다.

페리기념연못

 

세계적인 연꽃 연구가 페리 슬로콤 (Ferry D. Slocum) 박사의 가족이 직접와서 심어 주신 다양한 연꽃이 피는 연못입니다.

 

목숨

        김남조 (1927 ~  )

 

아직 목숨을 목숨이라고 할 수 있는가
꼭 눈을 뽑힌 것처럼 불쌍한
사람과 가축과 신작로와 정든 장독까지  

누가 가랑잎 아닌 사람이 없고
누가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없고
불붙은 서울에서
금방 오무려 연꽃처럼 죽어갈 지구를

붙잡고 살면서 배운 가장 욕심없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반만년 유구한 세월에
가슴 틀어박고 매아미처럼 목태우다 태우다
끝내 헛되이 숨져간 이건
그 모두 하늘이 낸 선천(先天) 의 벌족(罰㵀)이더라도  

돌맹이처럼 어느 산야에고 굴러
그래도 죽지만 않는
그러한 목숨을 갖고 싶었습니다

 

장독대 분수

-> 나가는 길

연꽃 박물관

 不二門 불이문

물과 꽃의 정원 세미원 입구 

세미원 공용주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