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구릅/나의 산행

② 용문산 용문사, 은행나무 - ( 2024.11.09 )

by the road of Wind. 2024. 11. 15.

 용문산 용문사, 은행나무

- ( 2024.11.09 ) 

 

 용문산 용문사, 은행나무  》

 

사천왕문

 

cafe & 전통차,  미르 

 

앗, 저 유명한 용문사 은행나무!!!!  은행잎이 많이 떨어지고 빛깔도 조금 엷어진 것 같다.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제30호):

동양 최대의 은행나무에 얽힌 이야기는 많다. 신라시대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 927~935 재위)의 세자 마의태자(麻衣太子)가 나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사다가 심었다고도 하고,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았더니 이 지팡이가 뿌리를 내려 성장한 것이라고도 한다. 이 나무는 오랜 세월 전란 속에서도 불타지 않고 살아남은 나무라 하여 천왕목(天王木)이라고도 불렀으며, 조선 세종 때에는 정3품 이상에 해당하는 벼슬인 당상직첩(堂上職牒)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정미년 의병이 일어났을 때 일본군이 절을 불태웠으나 이 나무만은 화를 면했으며, 옛날에 어떤 사람이 이 나무를 자르려고 톱을 대는 순간 피가 쏟아지고 하늘에서는 천둥이 쳤다고 한다. 또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에는 이 나무가 소리를 내어 그것을 아렷으며, 조선 고종이 세상을 따낫을 때 큰 가지 하나가 부러져 떨어졌다고 한다.         
나이: 약 1,100~1,500년,   높이: 약 42m,    둘레: 뿌리 부분 약 15.2m.

 

탬플스테이 용문사 TEMPLESTAY

 

용문사 은행나무는 키가 커서 가까이서는 전체 나무를 찍을 수 없다.

 

<- 등산로 입구

 

범종루

 

 

용문사 안내도


01 대웅전, 02 지장전, 03 금동관음보살좌상 (보물 제1790호), 04 개금불사전, 05 삼층사리탑, 06 종무소, 07 심검당, 공양간, 08 취모검당, 09 다선향실, 10 설선당, 11 미소전, 12 칠성각, 13 산령각, 14 범종루, 15 템플스테이 달심원, 16 템플스테이 휴월당, 17템플스테이 선월당, 18템플스테이 수월당,  19   템플스테이 빛채움당, 템플스테이 사무실,  20 부도전, 21 사천왕문, 22 정지국사부도 (보물제531호),  23  정지국사비 (보물제531호), 24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제30호), 25 용문산 등산로 입구, 26 전통찻집 미르, 27 용유정, 28 물소리길, 29 석조약사여래좌상,  

 

용문사(龍門寺): 

신라 신덕왕 2년(913) 대경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일설에는 경순왕(927~935재위)이 친히 행차하여 창사 하였다고 한다. 고려 우왕 4년(1378) 지천대사가 개풍 경천사의 대장경을 옮겨 봉안하였고 조선 태조 4년(1395) 조안화상이 중창하였다. 세종 29년(1447) 수양대군이 모후 소헌왕후 심씨를 위하여 보전을 다시 지었고 세조 3년(1457) 왕명으로 중수하였다. 성종 11년(1480) 처안스님이 중수한 뒤 고종 30년(1893) 봉성 대사가 중창하였으나, 순종원년(1907) 의병의 근거지로 사용되자 일본군이 불태웠다. 1909년 취운스님이 큰방을 중건한 뒤 1938년 태욱스님이 대웅전, 어실각, 노전, 칠성각, 기념각, 요사등을 중건하였으며, 1982년부터 지금까지 대웅전, 삼성각, 범종각, 지장전, 관음전, 요사채, 일주문, 다원 등을 새로 중건하고 불사리탑, 미륵불을 조성하였다. 경내에는 권근이 지은 보물 제531호 정지국사부도 및 비와 지방유형문화재 제172호 금동관음보살좌상, 천연기념물 제 30호 은행나무가 있다.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제30호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의 나이는 약 1,100살 이상으로 추정되며, 높이가 42m이고, 뿌리 부분의 둘레는 약 15.2m이다. 우리나라 은행나무 가운데 가장 높고 오래되었다. 나무 줄기 아래쪽에 혹처럼 큰 돌기突起* 가 나있는 것이 특징이다. 나이가 많은 나무 임에도 불구하고 매년 약 350kg 정도의 열매를 맺는다. 용문사 은행나무가 오래된 만큼 여러 전설이 전해진다.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땅에 꽂았더니 뿌리를 내려 나무가 되었다고 하며, 신라 마지막 태자였던 마의태자가 나라를 잃은 슬픔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심었다고도 한다. 나라에 재앙이 있으면 용문사 은행나무가 소리를 내어 그것을 일렀다고 전한다.  조선 고종이 세상을 떠났을 때 큰 가지 하나가 부러져 떨어졌다고 한다. 정미의병 때(1907) 일본군이 용문사에 불을 질렀으나 용문사 은행나무만 타지 않았다. 오랜 세월 속에서도 불타지 않고 살아남아 용문사 입구를 지키고 있다하여 '천왕목 天王木'  이라고 불린다. 

* 돌기 突起: 도드라져 나온 부분.

 

 

양평 의병전투지 - 용문사

1907년 후기 의병 당시 양평의병의 근거지였던 곳이다. 일제가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 시키고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 시키면서 의병의 대일항전은 더욱 격화되었다. 이즈음 양평의병은 용문산의 용문사를 비롯하여 상원사, 사나사를 근거지로 삼아 활동하였다. 권득수 의병장은 의병을 모집하여 용문사에 식량과 무기를 비축해 놓고 항일활동을 펼쳤다. 조인환 의병장은 용문사를 근거지로 삼아 인근 지역의 관아와 파출소, 우편소 등을 습격하여 일제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양평의병이 활발하게 항일전을 전개하자, 일제는 의병을 탄압하기 위해 군대를 퍄견하였다. 양평의병은 1907년 8월 24일 일본군 보병 제52연대 제9중대와 용문사에서 격전을 벌였다. 이 때 용문사는 일본군에 의해 소실되었다가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복원되었다.  

 

소원 성취 팜플렛을 은행나무 울타리에 붙여놓았다. 오늘 이곳을 찾은 수많은 사람들도 수능일 등을 앞 두고 또는 사업 등의 소원 성취를 위해 이런 팜플렛을 신청하여 붙여놓으려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무병장수. 사업대박. 심신안정. 숙면최고" 라는 은행잎 모양의 팜플렛이 상단에 걸려있다. 이런 것을 위해 은행잎을 써 붙이라는 말로 들린다.

 

은행나무 밑단의 혹 같은 돌기 부분이 보인다. 

 

↖ 등산로, ↖ 마당바위,  ↖ 용각바위

 

慈悲無敵 자비무적.....

 

용문사 일주문 현판 글씨를 쓴 일중 김충현(金忠顯; 1921~2006) 선생의 글씨이다. 

자비(사랑)에는 대적이 없다는 뜻인가?  마음에 새겨둘 말인 것 같다. 사랑의 말이 가장 흔한 이 시대에 사랑도 자기 이익 앞에서, 자기 사랑 앞에서는 허무하게 무너지는 현상을 목도하게 된다.  "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즉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 - 고린도전서 13:13.

 

원응당 (종무소)

 

대웅전

 

삼층사리탑

 

지장전

 

관음전

 

범종루

 

 

범종루

 

단풍나무 있는 부분 뒤편으로 용문사 탬플스테이 건물들이 한 블럭을 형성하고 있다.  ( 탬플스테이 달심원, 휴월당, 수월당, 선월당, 빛채움당 & 사무실 )

 

정지국사 부도(보믈제531호) 및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