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천주교 절두산순교성지, 선유도공원
- ( 2025.05.23 )
《 천주교 절두산순교성지 》
합정역에 내려 천주교 절두산순교성지를 돌아본 후 양화대교를 걸어 한강을 건너보았습니다. 한강 중간 쯤에는 선유도공원이 있습니다. 선유도공원은 주변의 경치도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수질정화원에는 각종 수생식물이 푸르게 자라나 아름다웠습니다.
천주교 절두산 순교성지를 돌아보면서는 왜 죄없는 사람들이 자기 양심에 따라 믿는 믿음 때문에 순교 당하여야 하나? 하는 마음에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 주님이라 고백하는 순간 참수 당한 사람들을 생각해 봅니다. 2천여년전 예수님도 골도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밖혀 살을 찢기우면서 인간이 참을 수 없는 한계 상황의 고통 속에서 무고하게 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군중들은 병자들을 기적적으로 치료하시던 예수님을 따르다, 어느 순간 종교 권력, 정치 권력의 교모한 사술 속에서 돌변하여 예수님을 쳐죽여라고 외쳤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군중 속에 숨어서 자신의 죄책을 희석하며 죄의 길로 나가는 거대한 흐름에 자기를 내어 맡기는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독일의 나치 정권의 히틀러도 이러한 기만으로 인류에게 씻을 수 없는 죄과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통제 장치가 없는 인간을 정점에 두고 믿어버리면 슬픈 역사만 반복될 뿐입니다. 오월은 푸르고 아름다운데 슬픈 역사는 우리 마음에 지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선유도공원 개요
양화대교 중간에 위치한 선유도공원은 과거의 정수장 건축구조물을 재활용하여 국내 최초로 조성된 환경재생 생태공원이자 “물(水)의 공원”입니다. 선유도일대 11만㎡의 부지에 기존건물과 어우러진 수질정화원, 수생식물원, 환경물놀이터 등 다양한 수생식물과 생태숲을 감상할 수 있고 선유도이야기관과 시간의 정원 등 다양한 볼거리와 휴식의 장이 되고 있습니다.
- 면적: 110,407㎡
- 개원: 2003. 4. 26
- 주요시설: 녹색기둥의 정원, 시간의 정원, 수질정화원, 수생식물원, 선유정, 네개의 원형공간, 카페테리아나루, 선유교 전망데크.
- 개방시간: 06:00 ~ 24:00
- 프로그램 예약, 탐방안내 신청은 인터넷(서울시공공서비스예약)으로 이용 가능
▶ 산 책 : 걸음수 6,643 steps, 거리 4.6 km, 소모열량 228 kcal, 소요시간 01:12 hrs, 속도 3.6 km/h, 기온 19℃.
▶ 코 스 : 합정역 - 천주교 절두산순교성지 - 양화대교 - 선유도공원 - 구름다리 - 선유도역.
◆ 천주교 절두산순교성지:
6호선 합정역 7번 출입구 주변
2호선 전철 철교를 따라 남쪽 한강 방향으로 향한다.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한국기독교100주년 기념교회
양화진공원
서울 양화나루와 잠두봉유적, 절두산 순교성지,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안내문
꾸르실료회관...그리스도의 평화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 13, 34)
I give you a new commandment. As I loved you, so you also should love one another. John 13, 34
천주교 서울대교구 꾸르실료
" 10만 청년들이여 산티아고로 "
스페인은 로욜라의 성 아냐시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등 카톨릭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초부터 말까지 있었던 내전으로 혼란과 무질서에 쌓였고 수많은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이 목숨을 잃었다. 1930년대(1936년~1939년, 스페인 내전) 에 접어들면서, 스페인이 직면한 문제를 교회의 가르침 안에서 풀어내려는 젊은이들의 그룹이 나타났고 그들은 무질서 안에서 발생한 죄로 인해 비그리스도적인 환경이 생겨났으며, 그것이 사회적 모순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잘못을 바로잡고 새롭게 쇄신해 나가자는 각오와 결의를 다지기 위해 1939년 내전이 끝난 후 스페인 마요르카 주축의 카톨릭 청년연합회는 " 10만 청년들을 산티아고로! "라는 구호 아래 대규모 성지순례를 준비하여, 순례자들을 이끌고 갈 지도자들을 위한 교육을 실시했는데, 이 교육이 꾸르실료의 시작이었다.
강변의 성모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이 마지막으로 서 있던 절두산을 바라보시는 성모님
교황 바오로2세
이승훈 베드로 (1756 ~ 1801)
이승훈 베드로 (1756 ~ 1801)
이승훈은 1784년 북경에서 예수회 그라몽 신부로 부터 한국인 최초로 세례를 받고 천주교 서적 및 십자가고상, 상본 등 많은 성물을 국내로 들여와 이벽, 정약전, 정약용, 권일신 등과 신자 공동체를 형성하여 한국 천주교회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4월 8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꾸르실료 광장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 부터 광장은 많은 사람들이 모이며 정치, 경제, 문화 등 인간활동의 중심지였습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소통의 공간있던 광장!!!
꾸르실료 광장은 과거 스페인에서 신앙적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시작된 꾸르실료 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꾸르실료운동의 정체성을 알려 세상과 소통하고자 하는 우리 모두의 열린 공간입니다.
1. 이승훈 베드로 동상, 2.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좌, 3. 초봉헌대, 4. 강변의 성모상, 5. 꾸르실료 역사 zone, 6. 사도 바오로상,
7. 산티에고 포토 zone
한국순교성인시성기념교육관
절두산 순교성지
절두산 순교성지는 한국 천주교회를 대표하는 순교 사적지로 1865년 병인박해 당시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병인박해로 9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이 순교하자, 이에 댜한 책임을 묻겠다며 프랑스 함대가 1866년 9월과 10월에 조선을 침범하였다. 조선 정부는 프랑스 함대와의 교전 후 천주교 신자들을 이곳에서 주로 처형하였다. 그 이유는 프랑스 함대가 거슬러 올라왔던 한강의 양화진에서 신자들을 처형 함으로써 프랑스 함대의 조선 침범 책임을 신자들에게 돌림과 동시에 그 본보가를 보이려 한 것이다. 그로 인해 수많은 유명.무명 신자들이 처형된 양화진은 순교자들의 목이 베어진 곳이라 하여 신자들 사이에서 '절두산(切頭山)' 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곳에서 순교한 것으로 기록상 확인된 신자수는 29명(무명 5명 포함) 뿐이다. 1956년 전국의 천주교 신자들을 대상으로 전개된 순교터 확보 운동의 결과 같은 해 12월에 이곳의 부지를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확보하게 되었다. 이후 1962년에는 순교 기념탑을 세웠고, 1967년에는 병인박해 100주년을 맞아 순교자들의 신앙을 배우고 느끼며 고양하기 위해 이곳에 기념 성당과 박물관을 건립하였다. 1968년에는 병인박해 순교자 24위의 시복(諡福)을 맞이하여 기념성당 지하실에 순교자 유해 안치실을 설치하였다. 현재 이곳에는 순교성인 27위와 무명 순교자 1위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1984년 5월 3일에는 한국천주교 창설 200주년과 103위 순교자의 시성식((諡聖式)을 위해 한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이곳을 찾아 한국 순교자들에게 뜨거운 경의를 표하였다. 한편 1997년 11월 7일에는 성지가 위치해 있는 양화진.잠두봉이 국가 사적 제399호로 지정되었으며, 2008년 8월에는 정지내 박물관의 명칭을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으로 변경하였다.
1. 한국순교성인시성기념교회, 2. 승리의 팔마를 순교자들에게 주시는 예수님, 3. 절두산 순교 기념탑 십자가, 4. 성녀 마더 데레사상, 5. 형구, 6. 세상에 빛으로 오심, 7. 순교자를 기념상, 8. 루르드 성모상(초 봉헌), 9. 병인순교 100주년 기념 성당, 10. 성인유해실, 11. 한국 천주교 순교자박물관, 12. 성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상, 13. 오성바위, 척화비, 우리들의 친구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제대, 14. 십자가의 길(15처), 15. 병인 순교 100주년 기념 성당 건립 당시 십자가, 16. 성인 남종삼 세례자 요한상, 성인 남종상의 순교사적비, 남상교의 청덕비, 은언군과 송마리아 묘비, 한국천주교회의 증언자, 박순집의 묘와 일가족 16위 순교자 현양비, 17. 성요셉과 아기 예수상, 18. 현대의 성모상, 19. 성인 요한 바오로2세 교황상, 20. 절두산순교자기념탑, 21. 주차장
서울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
양화나루 잠두봉 일원은 지형과 풍광이 아름답고, 한양 도성과 가까이 자리하고 있었기에 사대부와 문인이 즐겨 찾던 명승지였습니다. 특히 양화나루 너머 석양의 노을지는 광경은 양진낙조라 불리던 마포팔경 중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이곳이 언제부터 나루역할을 했는지 알 수 없으나 공식적으로는 <고려사>에 처음 이름이 나타납니다. 이후 조선 왕조가 수도를 한강 유역에 정하고 난 후 한강의 5대 나루로 손꼽히게 되었는데 이는 남쪽으로 선유봉, 북쪽으로 잠두봉을 중심으로 비스듬한 모래톱이 형성되어 배를 대기 수월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양화나루. 잠두봉 일원은 통행의 길목이자 검문소, 운송기지로서의 역할을 해냈으며,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군사진영으로서도 크게 부각되어 피난경로로서도 뿐아니라 유사시 방어거점으로 활용되었습니다. 1866년 흥선대원군의 천죽됴 박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극동함대사령관 로즈 일행이 강화도에 침범하는 사건이 발단이 되면서 양화나루는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지로서도 이름을 알리게 되었습니다. 쇄국정책을 고수하던 대원군은 프랑스 함대가 정박했던 바로 이곳을 오랑캐에 의해 더럽혀졌기 때문에 천주교 신자들의 피로써 깨끗이 씻어내야만 한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1997년 11월 7일 문화재법에 의거하여 사적 제399호 '서울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으로 공고 되었습니다.
팔마를 든 예수상
죽음으로써 믿음을 증언한 순교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갔음을 상징하는 팔마를 손에 들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 상.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최봉자(레지나) 수녀의 작품이다.
우리 인류를 구원한 영원한 십자가....
예수님이 피 흘려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여 우리는 마침내 구원을 얻게 되었다.
-> 성당, 박물관, 초봉헌
성녀 마더 데레사
절두산 순교자 하느님의 종 13위 순교자화
1. 하느님의 종 박래호 요한 사도 ( ? ~ 1866)
2. 하느님의 종 김이쁜 마리아 ( 1812 ~ 1866)
3. 하느님의 종 이의송 프란치스코 ( 1821 ~ 1866)
4. 하느님의 종 이봉익 베드로 ( 1843 ~ 1866)
5. 하느님의 종 김한녀 베드로 ( 1808 ~ 1866)
6. 하느님의 종 김진구 안드레아 ( 1825 ~ 1866)
7. 하느님의 종 김큰아기 마리아 ( 1834 ~ 1866)
8. 하느님의 종 이기주 바오로 ( 1839 ~ 1866)
9. 하느님의 종 이용래 아우구스티노 ( 1822 ~ 1866)
10. 하느님의 종 박성운 바오로 ( 1843 ~ 1866)
11. 하느님의 종 원유철 요한 세례자 ( 1786 ~ 1866)
12. 하느님의 종 유 마오로 ( 1821 ~ 1866)
13. 하느님의 종 강 요한 ( 1800 ~ 1867)
예수님 상
성 요한 바오로 2세
순교자를 위한 기념상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성 김대건 안드레아는 최초의 한국인 신부로 한국 천주교 성직자들의 수호자이며 103의 성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김대건은 1821년 8월 21일 충청남도 솔뫼(현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김제준(이냐시오)과 고 우르술라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신앙깊은 순교자의 집안에서 성장한 그는, 하느님과 겨레에 전 생애를 바치고자 성직자의 길을 택하였다. 1836년 유학길에 오른 그는 한국인 최초로 마카오로 건너가 신학문(新學問)과 신학(神學)을 배웠으며, 1845년 8월 17일 상해 연안의 김가항(金家巷) 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이로써 그는 한국 천주교회가 1784년 설립된 이후 현지인 성직자를 기대하는 모든 천주교 신자들의 소망을 이루었다. 김대건 신부는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하기 까지 오직 천주교교 진리를 전하는데 최선을 다하였으며, 신자들에게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그분의 사랑을 일깨워 주고자 노력하였다. 순교 당시 그의 나이는 25세 였다. 김대건 신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984년 5월 6일 시성되었다. 1972년 5월 14일 애국선열 조상 건립위원회에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조국 근대화의 선구자로 받들어 이 동상을 건립하였다.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
척화비(斥和碑):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1820~1898)이 서양인을 배척하기 위하여 세운 비석이다. 이 비에는 "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 밖에 없고,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 된다. 우리의 만대자손에게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 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성모 마리아 상
절두산
한강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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