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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구릅/나의 산행

② 소요산 단풍 자재암, 공주봉 (526m) - ( 2017.11.01 )

by the road of Wind. 2017. 11. 2.

 소요산 단풍 자재암, 공주봉 (526m)  -  ( 2017.11.01 )


- 소요산 자제암:



자재암(自在庵): 654년(신라 무열왕 1년) 원효 스님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그 후의 연혁은 알 수 없으나, 전하는 바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974년(광종 25년) 각규대사(覺圭大師)가 태조의 명으로 중창하고 소요사라 했다. 그리고 1153년(의종 7년)에는 화재로 소실된 것을 이듬해 각령(覺玲)이 대웅전과 요사만을 복구하여 명맥만 이어왔다. 조선 초까지만 해도 자재암은 태조의 원당으로 왕실의 비호를 받아오다가 어느 시기엔가 폐허가 되다시피 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후기 들어서는 1872년(고종 9년) 원공(元空)과 제암(濟庵) 스님이 퇴락한 자재암을 중창하고 영원사(靈源寺)라 하였다. 근세에 들어 한국전쟁 당시 다시 소실된 것을 1961년 진정(眞精) 스님이 대웅전을, 1968년 성각(性覺) 스님이 요사채를, 1977년에는 삼성각을, 1982년에는 일주문을 각각 지었다. 이어 1984년에는 동두천 시내에 부설 연화유치원(현)이 개원하였고, 1983~1985년에 오래된 건물을 헐고 새로운 중창을 하여 지금의 사격을 갖추었다자재암에는 원효 스님이 관음보살을 만나 자신의 수행력을 인증 받았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원효 스님이 요석공주와의 세속의 인연을 맺은 뒤 오로지 수행일념으로 이곳을 찾아 초막을 짓고 용맹정진 하던 때였다.



"경기소금강....소요산자재암".....일주문..... 

 

일주문 지나 속리교...속리교는 속세와 멀어지는 다리란 듯이다... 자재암으로 본격적으로 등산하는 길...

세상의 일을 잊어야지....단풍과 함께 머리를 비우고 이 풍징 세상을 잊어야한다....


속리교 옆의 이정표.... <- 원효폭포, <- 원효굴, -> 공주봉, ->자재암, -> 원효대.


원효폭포와 원효굴.



소요산등산안내도...속리교 건너편에 있다.


소요산김시습(매월당)이 자주 거닐던 산이라 해서 소요산인 이 산은 그만큼 경관이 빼어나고 휴양하기 좋은 장소이다. 하백운대, 중백운대, 상백운대를 비롯해 나한대, 의상대, 공주봉의 여섯 개의 봉우리가 말발굽 모양으로 능선을 이루고 있다. '경기의 소금강'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소요산은 계곡과 폭포를 찾는 이들이 많고, 산 중턱에 있는 명사찰 자재암까지의 산행도 해 볼만 하다. 자재암 이후로는 본격적으로 길이 가파르지만 능선으로 접어들면 경사가 완만해 무리한 산행은 아니다. 진달래가 필 무렵인 4월초 부터 10월까지 특히 아름답다.   


<능선길, 원형으로 시계반대방향으로>....현위치-> 구절터-> 공주봉(526m)-> 샘터갈림길-> 의상대(587m)-> 나한대(571m)-> 하산로-> 하산로->칼바위(530m) -> 상백운대(560.5m)-> 선녀탕하산로-> 중백운대(510m)-> 하백운대(440m) -> 자재암 -> 현위치.




낙엽 산 비탈에 앉아있는 여심(女心)...


백팔계단...108가지 번뇌...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이다..계단 오르기도 쉽지 않다.



백팔계단 중간에서...



멋진 나무...인고의 세월을 견디고 단단해 진 것 같다.


해탈문...종이 매달려 있다. 사람들 중 어떤 사람은 이 종을 치고 들어간다...백팔계단을 오르며 백팔번뇌를 잊은 것인가?  이 해탈문을 통과하며 해탈할 수 잇을까? 진정한 해탈은 윤회가 다시 없는 극락에 태어나는 것이라고 한다.  


해탈문을 지나고 바라보는 전방의 산 암릉...



백팔계단과 해탈문...


* 108계단중생의 눈,귀,코,혀,몸, 뜻(마음) 등의 감각기관이 감관의 대상을 접할 때 저마다 좋다, 나쁘다, 그저 그렇다는 세가지가 서로 같지 않아서 18가지 번놔를 일으킵니다. 또 괴로움, 즐거움, 그저그런 것과 관련지어 18가지 번뇌를 갖게 된다. 이들을 합한 36가지 번뇌가 다시 각각 과거,현재,미래의 3세 때문에 108가지 번뇌가 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특별한 의미를 두어 목환자를 꿰어 만든 108 염주나 사찰에 가면 '108계단'을 만들어 일심을 잃지않도록 하고, 또 잃더라도 빠리 되찾는 것이 백팔번뇌를 끊는 길이라고 합니다. 백팔번뇌와 불교의 윤화와 불교의 가르침을 형상화한 해탈문을 통해 세속의 백팔번뇌에서 벗어남 해탈의 경지에 오르길 바라는 염원을 담았읍니다.    



 놓치기 쉬운 소요산 명소...


* 관음봉: 원효대사가 수도하던 중 관음보살을 친견하였다는 설화로 관음봉이라 불린다.
* 속리교: 원효폭포 가기 전 우측에 위치한 대리석 교량으로 속세와의 인연을 끊는다는 의미의 교량.
* 세심교: 원효대를 지나면 대리석 기둥을 여러개 놓은 다리가 있는데 마음을 씻는다(정하게 한다)는 의미의 다리.
* 극락교: 소요교라고도 불리며 자재암을 잇는 다리로 부처님의 공간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의 다리.
* 원효폭포: 일주문을 지나면 좌측에 아담한 폭포가 보이는데 원효대사가 원효대에서 고행 수도중 자주 내려와 휴식을 취하던 곳.
* 추담선사부도: 자재암에서 입적한 추담선사(1898-1978)의 공적을 기린 공덕비와 사리탑이 있다.
* 독성암: 자재암 맞은편에 우뚝 솟은 기암으로 옥녀봉, 옥로봉, 원효암, 약수암 등으로 불린다.
* 옥류폭포: 천연암굴인 나한전 오른쪽에 우물처럼 깊게패인 협곡으로 쏟아지는 물줄기가 한여름에 시원함과 경치를 자랑한다.



해탈문 아래 원효대.....이곳은 원효스님이 정진중에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머물며 좌정하고 수도하던 장소로 원효대로 불이눈 곳


원효대에서 바라보는 계곡 풍경...일주문 방향...


자재암으로..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 나옹선사 (懶翁禪師)(1320~1376)

 


나옹선사(懶翁) 선사: 고려말 고승. 경북 영덕 출생. 속성(俗性)은 아씨(牙氏). 법명은 혜근(惠勤). 인도의 고승 지옹스님의 제자이며, 조선건국에 기여한 이성계의 왕사인 무학대사의 스승이다. 세속 20세에 출가하여 요연선사 밑에서 정진하다가 25세 때 양주 회암사로가 4년 만에 대오(大悟)한다. 1371년 왕사가 됨. 1376년 세수 57세, 법랍 38세로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추담선사 부도탑...


정진중 ...출입금지...



아무리 비바람이 때린다 할지라도

반석은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어진 사람은 뜻이 굳세어

비방과 칭찬에도 움직이지 않는다.


앗, 멋진 집...그런데 화장실이다...





앗, 자재암...


자재암은 절터가 좁아 일렬로 가람이 배치되어 있다...


자재암의 특징은 절 경내에 커다란 불상이 없다는 것이다. 불교를 믿는사람들은 종교를 선창한다고 커다란 불상을 좋아할 지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자연 경관과 부조화되고 미관을 부자연스럽게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설악산 입구에서도 그렇고, 포천 등등 이루 사례를 열거하기 힘들다. 인도의 석가모니 부처도 일체를 법에 의지하라 했지 않는가?     


 

하백운대 방향...


자재암....무슨 양반가의 속가(俗家)처럼 보인다.......


원효 (元曉) (617-686):  신라시대 승려, 귀족으로 본명은 설사(薛思)이다. 신라의 개국공신이자 박혁거세를 추대한 사로 6촌의 촌장 중의 한사람인 설거백 또는 설호진의 후손이다. 원효는 15세(또는 28세) 때 어머니 조씨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삶과 죽음을 오래 고민하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출가 이후 영취산(靈鷲山)의 낭지(郎智), 흥륜사(興輪寺)의 연기(緣起)와 고구려 반룡산(盤龍山)의 보덕(普德) 등을 찾아다니며 불도를 닦으며 뛰어난 자질과 총명이 드러났다. 34세 때인 650년(진덕여왕 4년) 의상과 함께 당나라 고승 현장에게 불법을 배우러 가다가 요동 근처에서 고구려 순라군에게 잡혀 좌절되었으며, 661년(문무왕 1년) 다시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길에 올랐으며, 당항성 근처의 한 무덤에서 잠이 들었다가 잠결에 목이 말라 달게 마신 물이 다음날 아침에 깨어나 다시 보니 해골바가지에 담긴 더러운 물이었음을 알고 급히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진리를 깨달아 유학을 포기한다. 그 뒤 분황사에서 득도 통불교(通佛敎)를 제창하며 민중 속에 불교를 보급하기에 노력했다. 원효는 한국불교의 불멸의 성사(聖師)이며, 그는 대승불교의 건설자인 인도의 나가르주나(Nagarjuna, 용수龍樹)나 중국불교를 새롭게 열어간 천태지자(天台智者)대사에 비견되기도 한다. 한국불교에서만이 아니라 세계불교사에 있어서 원효의 위치는 그만큼 찬연하게 빛나고 있다. 원효는 실로 불교 사상의 종합과 실천에 노력한 정토교(淨土敎)의 선구이며 또한 으뜸가는 저술가이기도 하였다. 저서:《열반종요》,《대승기신론소》, 《금강삼매경론》,《 발심수행장 》등.

 

요석공주와 원효요석공주(瑤石公主)는 김춘추의 둘째누이며, 첫남편을 백제전투에서 잃고 홀로 된 여인으로, 당시 무열왕은 요석궁에 머무는 과부가 된 둘째 딸을 원효와 결혼시키려 하였다. 왕이 궁리(宮吏)에게 명하여 금성시내에서 춤추며 노래 부르는 원효를 찾아 데려오라 했으며, 궁리가 시내로 나가 원효를 찾자, 그는 이미 남산(南山)에서 내려와 문천교(蚊川橋)를 지나다가 관리를 만나게 되는데, 일부러 물에 빠져서 옷을 적셨다. 이후 무열왕은 옷을 말리고 쉬게 하도록 명을 내려 원효와 공주를 맺어주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원효는 과부공주인 요석과 만나 얼마후 설총을 낳았다고 한다. 이후 스스로 실계(失戒)한 원효는 소성거사(小性居士)라 하며 무애의 보살행을 행하였다 한다. 요석공주는 당대 최고의 학승을 파계시키고 3일간의 사랑으로 설총을 얻으며, 위대한 원효를 민중에게로 인도한 보살이었다고 평가할만 하다. 원효는 뒷날 설법에서 “고구려나 백제, 신라는 모두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했으며, 그는 진정한 미래를 내다본 선지자, 선각자이기도 하였다.  


대웅전...


자재암 코너에 대웅전 중건공적비가 서있다...


삼성각.......


대웅전...


자재암 뒤면...


삼성각과 대웅전 사이...


보원전...



나한전...


등산로....하백운대 등산로 입구...



계곡 사이를 석축을 쌓아 부지를 확보하여 절을 만들었다...그 옛날 원효스님이 이 절을 만들때는 정말 속세를 벗어난 절이었을 것이다.


옥류폭포....


만추의 경내에서 앉아 담소하는 사람들이 보기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