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숲 ( 법정스님 ) - ( 2020.01.17 )
겨울바람에 잎이랑 열매랑
훨훨 떨쳐버리고 빈 가지만 남은 잡목숲.
가랑잎을 밟으며 석양에 이런 숲길을 거닐면,
문득 나는 내 몫의 삶을 이끌고
지금 어디쯤에 와 있는가를 헤아리게 된다.
내게 주어진 시간을, 한번 지나가면
다시 돌려받을 수 없는 그 세월을
제대로 살아왔는가를 돌이켜볼 때 나는 우울하다.
바람, 눈에 보이지도 붙잡을 수도 없는 나그네.
보이지도 붙잡히지도 않기 때문에
그것은 영원히 살아서 움직인다.
그리고 그 손길이 닿는 것마다 생기를 돌게 한다.
이 세상에 만약 바람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살아 있는 것은 시들시들 질식하고 말 것이다.
모든 것은 빛이 바래져 재가 되고 말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손에 붙잡히지 않는다고 해서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보이지 않는 것을 바탕으로 보이는 것이 있게 되고,
들리지 않는 것을 의지해서 들리는 것이 있게 되는 것이다.
인도의 구루인 라즈니쉬는 이런 표현을 하고 있다.
한 방울 물을 잘못 엎지를 때
우주 전체가 목마를 것이다.
한 송이 꽃을 꺾는다면
그것은 우주의 한 부분을 꺾는 일
한 송이의 꽃을 피운다면
그것은 수만 개의 별을 반짝이게 함이어라.
아, 이 세상 모든 것은 이처럼
서로서로 밀접한 관계로 이루어졌느니.
<금강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 제상비상 즉견여래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 諸相非相 卽見如來)’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사물이나 현상은 모두가 허망한 것,
그러니 제상(諸相)과 비상(非想), 즉 현상과 본질을 함께 볼 수 있다면
비로소 우주의 실상(實相)을 바로 보게 될 거라는 뜻이다.
표현을 달리한다면,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바로 인식하려면
드러난 단면만 보지 말고 그 배후까지도 함께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 불일암 둘레의 숲 속에는 산토끼와 꿩들이 살고 있다.
자기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나를 믿어서인지, 나를 보고는 놀라 달아나는 일이 없다.
눈이 많이 내려 쌓일 때면 가끔 콩 같은 걸 뿌려주는데 그런 때는 가까이 다가와 마음 놓고 주워 먹는다.
이런 걸 지켜보고 있으면 가슴에 훈훈한 물기가 도는 것 같다.
겨울 숲은 부질없는 가식을 모조리 떨쳐버리고
본질적인 것으로만 집약된 나무들의 본래 면목.
숲은 침묵의 의미를 알고 있다.
침묵을 딛고 일어선다.
- < 법정스님, '말고 향기롭게' 중에서 >
♠ 법정스님( 1932~2010 ): 전남 해남군 우수영 출생. 전남대 상대를 다니던 법정스님은 한국 전쟁을 겪으며 심경의 변화를 겪고 3학년 때 대학을 중퇴하고, 1955년에 출가를 결심함. 그리고 오대산으로 가려다 눈길로 가지 못하자, 서울 안국동에 있던 효봉 스님을 만나게 되고, 그는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깎고 행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다음 해에 사미계를 받은 후 지리산 쌍계사에서 정진했다. 1959.3월에 양산 통도사에서 자운 율사를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으며, 1959.4월에 해인사 전문 강원에서 명봉 스님을 강주로 대교과를 졸업했다.1960년에는 통도사에서 <불교사전> 편찬 작업에 동참하였고, 1967년 서울 봉은사에서 운허스님과 더불어 불교 경전 번역을 하였다. 1972년에는 첫 에세이집 <영혼의 모음>을 출간하였다. 1973년 함석헌 선생 주도의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으로 참여하였고, 함석헌, 장준하 등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하여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다,1975년 인민혁명당 사건에 큰 충격을 받아 그 해 10월 본래의 수행자로 돌아가고자, 폐허같이 변한 송광사 자정암 터에 토굴을 지어 홀로 살았다. 그 과정에서 철저한 자기 질서 속에 무소유 사상을 설파하고, 1976년에 자신의 가르침을 담은 <무소유>를 발간하였다. 이후 17년간 불일암에서의 생활을 이어갔으나, 그곳에서의 수많은 저서 집필로 인해 세상에 명성이 알려지면서 사람의 발길이 잦아지게 되었다. 이에 법정은 1992년 4월 불일암을 떠나 강원도 산골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기고 홀로 수행 정진하였다. 2007년 폐암 발생 투병하다 2010년 성북구 길상사에서 입적(入寂)하였다. 저서: <무소유> <맑고 향기롭게> <서있는 사람들> <산장한담> 등 다수.
♠ 오늘밤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자정이 넘고 새벽 1시가 넘은 시간 법정 스님의 <맑고 향기롭게>를 읽어본다. 평소 무소유의 사상을 전파하고 그런 삶을 살다 간 법정 스님의 수필에 동감하며, 내 복잡한 마음도 정리되는 것 같다. 깊은 산중에서 홀로 생활하며 자연을 사랑하며, 자연과 일체가 되어 자유롭게 살다간 스님이 부럽기도 하다. 인간은 누구에게서도 간섭 받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살아갈 때 진정한 행복이라고 생각된다. 나이 먹을 수록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우리는 누구나 깊은 계곡의 물과 같이 맑게, 산 속 이름모를 꽃과 같이 향기롭게 살아가기를 원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만은 않다. 우리의 삶의 멍애다. 우리의 인생은 풀과 같고 한때의 꽃과 같다고 성경은 말하지 않는가? 유한한 시간을 살다가는 인간의 실상이며 한계일 것이다. 늦은 밤 법정 스님의 글에서 인생의 깊은 삶의 모습을 바라보게 된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 -( 베드로전서 1:24-25 )
For all flesh is as grass, and all the glory of man as the flower of grass. he grass withereth, and the flower thereof falleth a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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