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행궁
- ( 2021.03.02 ) -
남한산성 성곽 둘레길을 산책해보러 갔다. 오늘은 평일인데다, 오후에는 구름이 벗겨지며 날씨도 좋아지고 있었다. 이럴 때 < 전승문(북문) - 우익문(서문) - 수어장대(청량산) - 지화문(남문) > 코스로 걸어보면 약 1:20분 정도 소요되며 주변 경치도 감상하며 아주 좋으리라 상상하였다. 그런데, 막상 남한산성에 도착하여 북문으로 걸어가니 산책로가 차단되었다. 공사 중이었다. 지난 가을에 갔을 때는 2021년 2월말까지 공사라고 안내되어 있었는 데, 아직 공사가 끝나지 않았다. 참 난감하였다. 그냥 내려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북문 조금 아래 영락교회 수련원, 국청사 가는 길을 따라 조금 오르다 다시 내려와 남한산성 행궁을 향해 걸었다. 그런데, 불행 중 다행으로 행궁은 열고 있었다. 경로 무료표를 받아서, 행궁을 잘 감상하고 되돌아 왔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이 있다. 오늘 남한산성 산책로가 막혀 크게 실망했는데, 행궁 때문에 그런데로 남한산성 탐방을 잘 마쳤다고 생각했습니다.
● 1번 탐방로 출입통제 안내
남한산성 탐방로 재포장 사업이 추진중에 있습니다. 공사기간동안 탐방객의 안전사고 예방을 위하여 제1탐방로 구간을 출입 통제 하오니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폐쇄기간: 2020년 9월14일 ~ 2021년5월31일 (예정) * 동절기 공사중지 중( '20.12.21 )
- 폐쇄구간: 제1탐방로 (남문-수어장대-서문-북문)
- 연락처 010-5234-9054 / 031-8008-5184
* 참고: 현재 남한산성 산채로 핵심인 (제1 탐방로)가 공사 중 폐쇄되었으므로, (남문주차장 주차 -> 북문-> 벌봉) / (중앙주차장 주차-> 헌절사-> 벌봉) / (동문주차장 주차-> 망월사-> 벌봉) 또는 (동문주차장-> 동문-> 제1남옹성) 등 코스로 산책겸 등산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산 책: 걸음수 5,044steps, 소모열량 202kcal, 거리 3.1km, 소요시간 00:50hrs (3:18-4:26, pm), 속도 3.6 km/h.
○ 코 스: 남한산성 남문 주차장 - 북문(전승문) - 영락수련원 - 남한산성 행궁 - 남문 주차장.
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는
* 산성 내: 남문주차장(172면), 로터리주차장(55면), 중앙주차장(179면),, 세계유산센터 센터주차장(55면).
( 산성내 주차료는 시간과 관계없이 승용차 기준으로 평일 3000원, 주말 5000원이다 )
* 성곽외 주차장: 동문주차장 (산성리44-5) (면수 22), 하행선 주차장 (검복리24-1) (면수 66), 검복리주차장 (검복리41-1) (면수 91), 불당리 주차장 (불당리 26-7) (면수 94), 오전리주차장 (오전리308-7) (면수 22), 광지원리 주차장 (광지원리 8) (면수 41)
↖ 남한산성 행궁, ↖ 매표소, <- 인화관
남한산성 종각의 천흥사의 동종..
남한산성의 천흥사 동종은 높이 170cm, 입지름 100cm로 몸체에 세겨진 명문 ‘ 聖居山天興寺銅鐘總和二十八年庚戌二月日'_성거산 천흥사 동종 총화 이십팔년 경술이월일’ 에 따르면 고려 현종1년(1010)에 주조된 것으로 원래는 태조4년(921)에 태조가 창건한 충청남도 천안시 성거읍 천흥리 천흥사에 있었다고 한다. 남한산성으로 언제 옮겼는지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 산성 내 시간을 알려주는 역할을 했으며 이후 일제강점기 이왕가박물관에 옮겨지고, 해방이후 덕수궁 미술관을 거쳐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엇다. 현재 종은 원래의 모양및 형태 그대로 재현 한 것으로 타종시 울림을 좋게하기 위하여 약 3배 정도 더 크게 제작하였다.
<- 0.2km 남한산성 행궁, ↖ 0.3km 침괘정, ↘ 지화문 0.7km,
-> 상사창동 3.9km, -> 수어장대 2.1km, -> 우익문(서문) 1.3km, -> 전승문(북문) 0.4km
성기고터(城機庫址): 성기고는 성곽 건물을 수리하는데 부서로서 운영을 위해 처음에는 철과 숯을 받았으나 후에는 돈을 받았다. 이밖에 성 주변의 벌목과 경작을 관리하였다.
남한산성 산성리 마을 내력:
남한산성내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아주 먼 과거로 올라가겠지만, 본격적으로 대규모의 취락이 형성된 것은 인조5년(1627)에 광주부의 읍치를 산성으로 옮기고 나서부터라고 하겠다. 현재남한산성 내 마을의 행정구역은 ‘산성리’이며, 1914년 일제가 조선의 지방행정구역을 대대적으로 개편할 때부터 이처럼 불리기 시작하였다. 산성리 마을은 조선후기 광주유수부 시기에 두 개의행정 단위로 나누어져 있었다. 광주 행궁에서 동문에 이르는 도로를 경계로 하여 남쪽은 남동, 북쪽은 북동으로 나누어진 것이다. 그러다가 1910년경 산성내 마을은 군내면 광주읍에 속하게 되고, 마을은 광주읍 동부, 광주읍 서부, 광주읍 남부, 광주읍 북부, 광주읍 중부 등 5개의 행정단위로 나누어졌다. 그리고, 1914년 광주읍 5개 마을이 중부면 산성리로 통합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1917년 광주군청이 산성 안에서 경안으로 이전하면서, 300여 년간 화려한 군사·행정 중심지였던 남한산성내 산성리 마을은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산성리 마을은 풍부한 농경지가 있는 곳도 아니었고, 행정 중심지로서의 기능만을 수행한 곳이었다. 따라서 광주군청과 함께 치안·체신기관이떠난, 교통조차 불편한 산촌 마을인 산성리는 주민들이 생계조차 유지하기 어려웠다. 1,000여호 4,000여 인구를 자랑하는 산성리 마을 인구는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많은 주민들이서울과 광주, 여주, 이천, 양평 등지로 떠났고, 해방과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는 70∼80호로 줄어, 산성리는 한적한 산촌 벽지로 변하였다. 한편 산성리 마을에는 산성 내 소나무를 보호하기 위한 금림조합이 결성되어 1945년까지 활동하였다.
- 경기도 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남한산성 역사 테마길:
남한산성 역사 테마길은 세계유산이며 도립공원인 남한산성의 가치를 체험할 수 있도록 테마별로 구성된 탐방로입니다. 국가지정 사적 제57호인 남한산성과 제480호인 남한산성 행궁을 비롯한 수많은 문화재가 있으며, 백제 시조 온조왕, 병자호란 등 많은 역사적 으미를 간직한 장소입니다. 탐방객은 관심분야와 여건에 맞는 코스를 선택하여 체험 할 수 있습니다.
장수의 길 1코스, 국왕의 길 2코스, 승병의 길 3코스, 옹성의 길 4코스, 산성의 길 5코스.
남한산성.....↑ 전승문(북문), <- 송림정, 동촌, 국청사, 한경직목사 우거지, 숭렬전, 계곡산장, 카페 작은 숲, 영락수련원, 용마루, 석촌, 돌집, 먹거리창고, 백송식당, 카페 남한산성.
전승문 (북문)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북문은 병자호란 당시 성문을 열고 나가 기습공격을 감행했던 문이다.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에서 '전승문'이라고도 하였다. 당시 영의정 김류의 주장에 의해 군사 300여명이 북문을 열고나가 청나라 군을 공격하였으나, 적의 계략에 빠져 전멸하고 말았다. 이를 '법화골 전투';라고 하는데,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있었던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였다. 정조3년(1779) 성곽을 개보수할 때 성문을 개축하고 이름을 붙여 전승문(全勝門)이라 한 것은 그 때의 패전을 잊지말자는 뜻이었을 것이다. 선조 때의 기록을 보면 산성 내에 동문과 남문, 수구문의 3개의 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북문은 인조2년(1624)에 신축된 성문이라고 생각된다.
<- 1.1km 위례둘레길(서문), ↘ 위례둘레길(법화골) 2,2km, ↘ 먹거리촌(고골) 1.3km, -> 위례둘레길(벌봉) 2.1km.
○ 벌봉(512m): 그 곳의 바위가 벌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벌바위봉이라고도 부른다. 여기까지 성(봉암성)이 둘러쳐져 있지만 여기의 석성은 병자호란 때는 없었다. 뒤에(조선 숙종조) 광주유수 윤지선의 주장으로 축조된 것이다. 벌봉은 한쪽에서 보면 크나큰 두 쪽의 바위로 보이는 우뚝 솟은 암봉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병자호란 때 청나라 태종과 그 군사들이 이 벌봉에서 남한산성 안에 있는 우리편 군사들의 상황을 살폈다 한다. 벌봉이 당시의 산성에서 가장 높은 수어장대보다 높기 때문에 산성 안을 넘겨다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청군들이 이 벌봉에 머무를 때 새처럼 큰 벌들이 청군들을 괴롭혔다는 이야기도 있다. 벌봉은 남한산성에서 흔하지 않은 암봉으로, 바위틈에 굴도 있어서 기도터로도 이용되고 있다.
<- 1.4km 수어장대, <- 0.8km 우익문(서문), -> 종로 0.9km.
↖ 국청사, 한경직목사 우거처 가는 길, -> 계곡산장
국청사: 1625년(인조 3)에 각성(覺性)을 팔도도총섭총절제중군주장(八道都摠攝總節制中軍主將)에 임명하고, 팔도의 승군을 동원하여 남한산성의 축조를 담당하게 할 때 7개의 사찰을 창건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 국청사이다. 승군의 숙식과 훈련을 담당하여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고, 비밀리에 군기(軍器)와 화약·군량미 등을 비축하였던 사찰이다. 그 뒤 한말에 의병의 군기창고로 사용되다가 비밀이 누설되자 일본군이 불태워서 절터만 남아있던 것을 1968년에 보운(普運)이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성삼문(成三問)의 친필이라고 전하는 병풍 1점과 송시열(宋時烈)의 친필책자 3권이 전해오고 있다. 절 근처에는 국청사정(國淸寺井)이라고 하는 조그만 우물이 있는데, 금닭이 나와 홰를 치며 울었다는 전설이 있다.
한경직 목사님 우거처: 우거처는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 북문 입구와 국청사 중간쯤에 산 속에 있다. 우거처 앞마당에는 예배실인 팔복재와 관리실 건물이 있다. 팔복재는 마태복음 5장의 ‘팔복(八福)’을 의미한다는데, 한경직 목사의 삶과 정신을 느끼게 한다. 한경직 목사님은 “나는 내게 속한 집 한 칸, 땅 한 평도 없는 사람”이라며 “재산을 소유한다는 것은 어딘가 모르게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고 한다. 새로 짓기 전 한목사님이 계실 때의 우거처에는 좁고 허름한 거실 겸 주방, 주방 작업대, 의자를 세 개만 놓여있었다 한다. 한경직 목사님은 청빈한 삶의 대명사이다.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 한경직 목사 (1903-2000): 평남 간리 출생. 평안북도 정주 오산고등보통학교 졸업, 평안남도 평양 숭실전문학교 졸업, 미국 미국 엠포리아대학교(College of Emporia) 졸업,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신학석사), 미국 엠포리아 대학교 대학원 졸업 (신학박사). 평북 정주 오산학교에서 조만식 선생으로부터 학문을 배우며 민족에 눈을 떴다. 1945년 월남해 영락교회와 영락모자원, 영락노인복지센터, 영락보린원 등을 세우며 가난하고 힘든 자들을 아낌없이 도왔다. 1992년 종교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템플턴상을 수상했다. 그는 청빈하고 겸손하여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목회자로 칭송받고 있다. 1남1녀의 자손을 두었다. 저서: <창조적 생활의 비결>, <팔복>, <내일을 사는 인생>, <예수를 바라보자>, <사도 바울에게 배운다>, <열매맺는 신앙생활>, <나의 인생 길의 아름다운 명상>, <병상에서의 묵상>, <신랑 신부에게>, <나의 감사> <경직 구술 자서전> 등등 다수.
효자우물 (孝子井):
"한 소년의 지극한 효성 이야기를 담고 있는 우물이다. 산성 북문 안에 살던 정남이라는 열두살 난 아이가 있었다. 아이의 아버지가 병이나 눕자 지나던 사람이 잉어가 특효입네 하고 가버렸다. 정남이는 매일같이 잉어를 잡으러 여기저기를 다녔으나 잡지 못했다. 어느날 지친 몸으로 집으로 돌아오는데 우물가에 황금비늘 이어가 있어 잡아다 고아 드렸더니 아버지의 병환이 나았다는 이야기다. 그 후 이 우물은 효자정이라 불렀다고 한다. 원래는 3M정도 위쪽에 있었는데 일반 약수터로 개조하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 이용하고 있다. "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지 못하면 사람 노릇을 할 수 없으며, 부모를 따르지 않으면 자식 노릇을 할 수 없다.
不得乎親(부득호친),不可以爲人(불가이위인), 不順乎親(불순효친),不可以爲子(불가이위자).
- < 맹자, '이루 상 제28장' >
사업개요:
공사명: 남한산성 침괘정 해체보수 공사/ 공사기간: 2020.05.20-2021. 03.25/ 발주처: 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침괘정(枕戈亭): 침괘정은 무기제작소라 알려져 왔으나 온돌과 마루방, 회랑처럼 된 됫마루 등 건물 구조로 보아 집무실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최초 건립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주변에 있던 무기창고를 명나라 사신 정룡이 '총용무고'라 이름 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 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영조 27년(1751) 광주유수 이기진이 고쳐 짓고 '침과정'을 '침괘정' 이라 부르는 까닭은 명확하지 않다. 무기제작소와 무기 창고는 침괘정 부근에 별도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남한산성 행궁:
인화관(人和館): 남한산성 행궁 동쪽에 위치한 인화관은 사신 등 손님들이 머무는 객관(客館)이었다. 한양에 계신 왕을 위해 매월 2차례 예를 올리기도 하고, 중앙에서 관리가 오면 묵을수 있는 용도라고 한다. 인화관은 인조 2년(1624)에 세운 것을 순조 29년(1829)에 수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뒤 빈터만 남은 것을 새롭게 복원을 추진하여 2015년에 완공되었다.
행궁매표소:
* 관람시간: 하절기(4월~10월) 10:00- 18:00, 동절기(11월~3월) 10:00- 17:00.
* 행궁 입장료:
- 개인> 성인 2,000, 청소년(만 7세~18세) 1,000/
- 단체> 성인 1,600, 청소년(만 7세~18세) 800/
- 무료> 만65세 이상 경로 등.
행궁(行宮)이란 왕이 도성을 떠나 행행(行幸)할 때 임시로 머무는 곳으로, 전란시·능행시·휴양 등의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조선시대에는 수원행궁, 강화행궁, 전주행궁, 의주행궁, 양주행궁, 온양행궁 등 10여개 이상의 행궁이 있는데, 그 중 남한산성행궁은 전쟁이나 내란 등 유사시 후방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한양 도성의 궁궐을 대신할 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하여 인조 3년(1625) 남한산성 수축과 함께 건립되었다. 실제로 약 10년 후인 1636년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47일간(1636.12.14~1637.01.30) 항전하게 된다. 이후 숙종·영조·정조·철종·고종이 여주에 있던 효종릉(寧陵) 등의 능행길에 머물러 이용하였다. 남한산성행궁은 종묘(좌전)와 사직(우실)을 두고 있는 유일한 행궁으로 일반적인 행궁에 머물지 않고 유사시 임시수도의 중요한 역할을 하던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국가사적480호이다.
- < 남한산성 도립공원 >
漢南樓 (한남루)
한남루: 남한산성 한남루는 유수 홍억(洪憶)에 의해 정조 22년(1798)에 세워졌으며, 왕이 머무는 행궁의 하궐 앞에 자리한 외삼문 주 출입구이다.
2단의 석축 위에 긴 건물 남행각....대문(외삼문)을 중심으로 왼쪽을 외삼문 남행각, 오른쪽을 외삼문 북행각이라 부른다,
외행전...외행전은 하궐의 중심 건물로 인조3년(1625)에 준공되었다.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상궐 내행전과 동일한 전체 28칸의 건물이았다. 바닥면적이 142㎡로 내행전 167 ㎡ 보다 적고 내행전에 비해 6m정도 낮은 곳에 지었다. 병자호란 당시 병사들에게 음식물을 베푼 호궤를 이곳에서 행하였고, 한봉에서 청나라군이 홍이포를 쏘아 포환이 외행전 기둥을 맞혔다는 기록이 있다. 죄승당이 지어지기 전에는 광주부 유수 집무실로 사용되었다. 현재 외행전은 2010년에 중건 된 것으로, 건축 당시 통일 신라시대 유구가 확인되어 건물지와 기와를 쌓은 곳 일부를 보존하고 있다.
일장각: 행궁 하궐에 있던 광주부 유수가 사용하던 건물이다. 일장각은 수어장대가 위치하고 있는 청량산의 다른 이름인 일장산을 건물의 이름으로 한 것이다. 하궐 내부담장 밖에 있었던 여러 건물 중 하나로써, 조 29년에 광주부 유수 이지연이 세운 건물이다. 1900년대에 촬영한 사진에서 일장각의 모습은 확인되지만 행궁지에 있었던 광주군 청사가 철거되는 과정에서 함께 철거된 것으로 보인다. 발굴조사 과정에서 건물지의 일부를 확인하였으며 현재 일장각은 2010년에 중건되었다.
좌승당...좌승당은 광주유수의 집무용 건물이다. 순조 17년(1817) 광주유수 심상규가 건립하였다. 좌승당이란 이길만한 계책이 있으면 적을 앉아서도 물리칠 수 있는 의미이다.
내행전...상궐 내행전은 왕이 잠을 자고 생활하던 공간이다. 정면 7칸 측면 4칸 전체 28칸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간운데 4칸은 대청으로 되어있고 좌우 2칸은 온돌방과 마루방이다. 내행전 위 공포는 새의 날개처럼 된 부재를 두개 겹쳐쌓은 이익공 형식으로 행궁내 건물 중 가장 격식이 높다.
내행전 내부...일월오악도 병품이 둘러있다. 병풍은 평소에는 접어두었다가 임금이 주석할 때만 펴서 세운다. 혹시 자객이 숨어 있을 수도 있어서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궁궐이나 행궁에서 문을 3개 통과 해야만 임금의 얼굴을 볼 수 있는데, 이것도 침입자를 방어하기 위한 수단 아닌가 한다. 중국 황제의 경우 5개의 문을 통과해야 한다.
남한산성: -> 산성대가. 한마당. 연재석실. 일송정. 남한산성 한의원. ↓ 고구려. 산성갤러리. 장수촌. 만해기념관. 월성관. 밤나무집. 카페 사랑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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