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 (2021.11.15)
with wife
엇그제 도봉산 등산한 후 다리 근육에 무리가 가서 어제 하루는 쉬고 있다 오늘은 오히려 불편한 근육을 풀기 위하여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남한산성 둘레길은 보수가 끝나 보석처럼 잘 다듬어진 길이었습니다. 남한산성 남문주차장 ( 후불, 주차료: 3,000원 )에 주차를 하고 여기에서 부터 북문 방향으로 남한산성 둘레길을 걸었습니다. 남한산성 둘레길은 <남문주차장 - 남한산성 로터리 - 북문 - 서문 - 수어장대 - 남문 - 남문주차장 > 까지 만 일주하는데 딱 1:37분 걸렸습니다. 북문(전승문)은 새로 짓기 위하여 모두 헐어냈습니다. 그 튼튼하게 보이던 아치형 성곽 문의 안전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 같습니다. 보통 남한산성 산책시 처음 만나며 바라보는 북문이 사라져버려 너무 기분이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이 문의 복원은 다시 돌을 이용하여 건축하여야 할 텐데 어떻게 아치형으로 돌을 쌓아 문을 만들지 그 건축기법에 대한 호기심이 큽니다. 남한산성 가는 길은 계곡길의 단풍을 보기 위하여 하남시 산곡동을 지나고, 경기 광주시 은고개를 넘어 광지원 남한산성면사무소 앞에서 분기되어 오르는 아주 긴 계곡 길로 올라갔습니다. 이 길은 광주시 남한산성면 오전리, 불당리, 검복리를 거쳐 남한산성 동문까지 7km 의 긴 거리의 계곡길입니다. 이 길은 구불구불 편도 1차선으로 너무 운치있고 아름다운 길입니다. 오늘은 단풍 절정기를 이미 지나버려 단풍 구경은 할 수 없어도 조용하고 아름다운 계곡미를 드라이브 하며 느낄 수 있어 좋았습니다.
남한산성 같이 소나무가 많은 산은 드물 것입니다. 수어장대가 있는 청량산 일대의 남한산성 일원은 아름다운 오래된 소나무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사시사철 언제나 푸른 소나무는 그 꼿꼿한 기상을 느끼게 합니다. 아마 치톤피드도 많이 분비될 것 같은 기분입니다.
남한산성 가서 청량산 정상에 있는 수어장대를 보지 않으면 허사샅이 느껴지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도 수어장대를 보고 남문 방향으로 하산하였습니다. 1시간 30분 정도의 남한산성 둘레길 산책이 편하고 서울시내와 성남시 그리고 광주방향의 경치를 바라보는 재미와 함께 아주 좋은 산책이 되었습니다.
○산 책: 걸음수 8,458 steps, 거리 7.0 km, 소모열량 353 Kcal, 소요시간 01:37 hrs, 속도 4.3km/h.
○코 스: 남한산성 남문 주자장 - 북문(전승문) - 서문(우익문) - 수어장대 - 남문(지화문) - 남문주차장.
◆ 등산 (남문주차장 -> 수어장대):
남한산성 남문 주차장
1일주차료 후불, 3,000원
남문주차장 곁의 향토음식점 '아라리오' ( 031-749-6200 / 경기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1017 ).
산채비빔밥, 해물파전 등 좋은 메뉴로 가득하다.
↑만해기념관 가는 길
남한장 ( 031-743-6572 / 경기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1016 )
"3대를 이어온 전통 한정식집"
메뉴: 돌솥한정식, 불고기돌솥한정식, 오리요리 (오리백숙,전골,훈제 등 ),
토종닭 (백숙, 볶음탕 등), 토속음식( 생손두부, 도토리묵, 파전, 더덕구이 등)
별미류( 토끼탕, 꿩탕 등 ), 보신음식(전골, 수육 등) 등등.
인화관
오후 2:36분, 주차장에 차들은 많구나!
우리나라 좋은 나라다. 우리나라에 언제부터 이렇게 자가용이 많아지고 좋은 외제차들이 많아졌는가?
그 발전상에 놀라울 따름이다. 이 모든게 우리의 부모들의 노력의 결실이다.
'한강의 기적'을 가져오게 한 인류사의 놀라운 기적같은 일이다.
나는 위대한 지도자들과 놀라운 국민의 노력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지게 된다.
'여담'
남한산성 행궁 방향
침괘정
산성로터리 버스 정류장 & 남문주차장.
남한산성 산성로터리 이정표
<- 0.2km 남한산성 행궁, <- 0.3km 침괘정,
-> 상사창동 3.9km, ↘ 지화문(남문) 0.7km,
↗ 수어장대 2.1km, ↗ 우익문(서문) 1.3km, ↗ 전승문(북문) 0.4km.
문화관광해설사의 집
cafe 오로지 ( 031-743-6554 / 경기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590-1 )
산성로터리
남문터널을 지나 능선길로 성남시로 가는 버스들이 보인다.
백제장
석산정
coffee
청와정
청수가
<- 전승문 150m, 남한산성 행궁 500m ->
붉은 단풍, 송림정
세계유산 남한산성 종합안내판
사라져 버린 북문(전승문)
재건축 공사 중
헐리기 전의 북문 (전승문) 사진
오래되어 담장 넝쿨의 모습이 보기 좋다. 왜? 우리나라에는 수 백년, 천년 가는 튼튼한 건축룰이 거의 없는가?
왜 해체 복원하는지 그 사유를 일반인들이 알 수 있게 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새로 지으면 문화재의 전통미와 가치가 사라져 버릴까 염려된다.
사업개요
- 공사명: 남한산성 북문 헤체보수공사
- 공사내용: 북문 복원 및 주변 정리
- 문화재 명칭: 북문(전승문)
- 문화재 지정번호: 사적 제57호
- 공사기간: 2021.04.21 ~ 2022.04.15
- 발주자: 남한산성 세계유산 센터
- 시공자: 원택건설(주), 아정문화재(주)
-감리자: 서암건축사무소
- 설계자: 여유당건축사사무소
<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
1코스 남한산성 역사테마길
현위치: 전승문(북문)
1코스: 장수의 길 ->
2코스: 국왕의 길 <-
3코스: 산성의길 <->
다시 전승문 방향을 뒤돌아본다. 왠지 아름다웟던 옛 전승문(북문)이 눈에 어른거린다.
남한산성 성곽길을 보수하여 너무 걷기 좋아졌다. 비단길이 되었다.
성곽길이 이렇게 좋은 곳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모든 곳이 잘 정비되고 발전되고 있다.
청량산(수어장대) 방향
남한산성에 오면 푸르고 아름다운 자태의 소나무들이 너무 좋다. 자랑스럽다.
앞으로도 여러가지 소나무 병들을 잘 관리하여 오래도록 산림이 잘 관리되길 기원해 본다.
<- 1.3km 수어장대, <- 0.7km 우익문(서문), <- 2.1km 학암동,
-> 전승문(북문) 0.3km
" 나무를 지키는 금림조합 "
" 남한산성의 귀중한 숲을 지켜 후손에게 "
하남시 방면
왼쪽 중간쯤의 봉우리, 금암산 (321.2m)
아래 보이는 분지형태의 하남시 춘궁동, 상사창동 등 일대, 교산신도시가 들어서는 지역이다.
이곳은 왼쪽 남한산성, 금암산 능선을 터널로 연결하면 바로 서울 송파구 88올림픽공원, 위례신도시 등이 있는 지역과 바로 연결되게 된다. 그리고 신도시 앞에 중부고속도로, 왼쪽 산 줄기 너머에는 판교 등을 연결하는 수도권외관순환도로, 그리고 지금 건설 중인 세종-포천고속도로가 생겨난다. 교통의 관점에서도 사통팔달이다.
강남 접근성으로 보면 최고의 신도시가 될 것이다.
나는 그동안 지켜온 저 지역의 그린벨트가 무너지는 것이 제일 안타깝다.
저곳에 교산신도시의 아파트 숲을 건설하면서 얼마나 많은 백제유물이 쏟아져 나올까 조마조마하다.
국청사 방향
국청사
서문( 우익문)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서문은 4개의 대문중 규모가 가장 작고, 산성을 처음 쌓았을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 3년(1799)에 다른 문과 같이 개축하며 우익문(右翼門)이라 칭하였다. 행궁을 중심으로 국왕은 남쪽을 바라보며 국정을 살피니, 서문이 행궁의 우측에 있어 우익문이라 하였다. 서문은 인조15년(1637) 1월 30일 왕이 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항복하기 위해 남한산성을 나간 바로 그 문이다. 남한산성의 서쪽 사면은 경사가 급해 물자수송이 어렵지만 광나루나 송파나루 방면에서 산성으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 0.9km 수어장대, ↙ 0.3km 국청사, -> 전승문(북문) 1.0km.
↑ 수어장대 가는 길
" 소나무 재선충병 예방 나무 주사 "
1코스 남한산성 역사테마길
현위치: 서문(우익문 인근)
1코스: 장수의 길 ->
3코스: 산성의길 <->
9번 탐방로 일부구간 출입통제 안내
통제기간: 2020.08.01 ~ 2022.12.31
통제구간: 아래어정약수터 ~ 서문 화장실 사이 구간
연락처: 010-4997-3585/ 031-8008-5155
서어나무
송파, 강남 방향 경치, 날씨가 미세먼지로 흐릿하다.
중간의 멀리 강남의 구룡산, 대모산이 보이고 있다.
이렇게 소나무가 우거지고 걷기 좋은 성곽길의 테마 산채로는 보기 힘들 것이다.
성곽을 산책하는데 드는 경사와 거리 등을 생각하면 운동에도 아주 좋다고 생각한다.
송파 잠실의 롯데월드타워 빌딩
길과 길
남한산성의 옛길
" 왕들의 능행길, 민간의 상업루트 "
남한산성이 위치한 지금의 성남시, 광주시, 하남시는 옛날 조선시대 행정구역으로 보면 모두 광주유수부의 관할지역이었습니다. 광주수유부는 남한산성의 군사요충지적 특성 때문에 매우 중요한 행정중심지였습니다. 또 남한산성은 왕의 이동과 관련이 깊은 곳입니다. 조선시대 왕들은 반드시 선대와들의 능에 성묘를 가야 했으며 왕들의 이런 성묘행사를 능행이라고 불렀습니다. 후대의 왕들이 영녕릉(英寧陵)에 참배를 하려 가려면 일 년에도 몇 차례씩 남한산성 옛길을 이용해 여주까지 가야했습니다. 남한산성 옛길의 또 다른 특징은 조선후기 상거래가 활발해지면서 필요해진 내륙의 유통망으로 민간에서 이용했던 상업루트였다는 점입니다. 많은 보부상들이 바로 남한산성 옛길을 통해 상업유통의 한축을 담담하게 됩니다. 이렇게 이용된 남한산성 옛길은 목적지인 경상북도 봉화의 이름을 따 통칭 봉화로라고 불렀습니다.
수어장대 근처 쉼터
여기 의자에 앉아 집사람과 커피 한잔
성곽의 곡선미가 아름답다.
남한산성 (사적 제57호):
1 남한산성 행궁, 2 수어장대, 3 숭렬전, 4 청량당, 5 현절사, 6 침괘정, 7 연무관, 8 지수당, 9 장경사, 10 망월사, 11 개원사, 12 제1남옹성, 13 제2남옹성, 14 남문(지회문), 15 서문 (우익문), 16 연주봉옹성, 17 북문(전승문), 18 동문(좌익문), 19 장경사신지옹성, 20 동장대터, 21 봉암성, 22 벌봉
남한산성은 조선시대 뿐 아니라 삼국시대부터 천연의 요새로 중요한 역할을 하던 곳이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의 욍성이었다는 기록이 있고, 나당전쟁이 한창이던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한산주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기록도 있다. 고려시대에는 몽고의 침입을 격퇴한 곳이기도 하고 일제강점기에는 항일운동의 거점이 되기고 한 곳이다. 그러나 남한산성은 주로 병자호란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조선 인조 14년(1636)에 청나라가 침략해 오자 왕은 이곳으로 피신하여 항전하였으나, 왕자들이 피신해 있던 강화도가 함락되고 패색이 짙어지자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 나가 치욕적인 항복을 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남한산성은 패배를 알지 못하는 곳이다. 성의 외부는 급경사를 이루어 적의 접근이 어렵고, 내부는 경사가 완만하여 넓은 경작지와 물을 갖춘 천혜의 전략적 요충이기 때문에, 병자호란 당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청군에 함락당하지 않고 47일간이나 항전할 수 있었던 곳이다. 이처럼 오랜 기간동안 우여곡절을 가진 성의 역사처럼 성곽의 형태 또한 단순하지 않아서 하나의 폐곡선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본성, 봉암성, 한봉성, 신남성과 5개의 옹성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조이다. 인조 4년(1636) 에 중앙부의 가장 큰 폐곡선인 본성이 완성되었고, 병자호란 이후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동쪽의 봉암성, 한봉성 등을 비롯하여 여러차례 증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수어장대 앞 멋진 소나무
앗, 수어장대
남한산성 왔다하면 여기는 들러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핵심을 놓친 것 같이 생각된다.
기품있는 은행나무
청량당(淸凉堂)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호):
○ 청량당: 청량당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 사당은 남한산성 쌓을 때 동남측 축성의 책임자였던 이회 장군과 그의 부인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이회는 공사비를 횡령했다는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고 이 소식을 들은 부인 송씨는 한강에 몸을 던져 따라죽었다. 이회는 죽을 때 자신의 죄가 없으면 매 한마리가 날아올 것이라 에언 했는데 과연 매가 날아와 그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한다. 후에 누명이 벗겨지고 그가 맡은 공사가 가장 잘된 것으로 알려지자 사당을 지어 초상을 안치하고 넋을 기렸다. 원래의 청량당은 6.25 전쟁때 소실 되어 다시지었다. 서장대가 있는 산 이름이 청량산이므로 청량당이라 이름 지었다.
수어장대
1992~1893 | 경기도박물관 소장
장대란 지휘관이 올라서서 군대를 지휘하도록 높은 곳에 지은 건축물이다.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는 장대로서 남한산성에 세워졌던 5개의 장대 중 현존하는 유일한 건물이다. 이 사진은 1892~1893년 사이 이플리트 프랑뎅 (Hippolyte Frandin)이 찍은 수어장대 모습으로, 1900년 4월 14일 부터 11월 12일 까지 열린 파리 국제 만국박람회의 공식 엽서 이미지로 사용되기도 했다.
수어장대
守禦將臺_수어장대
수어장대는 임금을 보위하는 장군이 지휘하는 높은 장대를 말한다. 이곳에 오면 참혹한 역사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병자호란 때 10만여 청군의 남한산성 포위 속에서 1만3000명 정도의 조선의 병력으로, 한달 정도의 비축 군량만으로 어떻게 이를 견뎌내겠는가? 결국 인조는 전쟁 발발 후 2개월도 넘기지 못하고 추운 엄동설한에 말도 타지 못한 채 걸어서 송파 삼전도에 내려가 청 태종에게 머리를 땅에 아홉번 찍으면서 까지 굴욕의 三拜九叩頭禮(삼배구고두례)의 항복의식을 가져야 했다. 국제정세에 어두운 조정의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의 실수가 초래한 결과이다. 신하들은 이러한 절체절명의 시간 속에서도 주화론(主和論) (김명길) 과 척화론(斥和論) (김상헌) 으로 갈려 갑론을박 싸움이나 하고 있었다. 그 사이 죄없는 백성들만 굶주림과 추위에 떨고, 백성들 수십만명이 청에 끌려가는 고통을 당하였다. 나라가 잘 못 되면 백성만 죽고 고난을 당한다. 결국 한 나라의 지도자들의 지혜와 영도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는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1637년 (인조15년) 2월 24일 인조와 대신들이 송파 삼전도에 내려가서 홍타이지에게 항복하며, 삼배구고두례를 행하고, 의식이 끝난 후 창경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포로로 끌려가는 수많은 백성들이 울부짖는데 그 수가 만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 被擄子女望見, 號哭皆曰: "吾君、吾君, 捨我而去乎?" 挾路啼號者, 以萬數. ( 피노자녀망견. 호곡개왈: "오군, 오군, 사아이호?" 협로제호자, 이만수.) " 사로잡힌 자녀들이 바라보고 울부짖으며 모두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하였는데, 길을 끼고 울며 부르짖는 자가 만 명을 헤아렸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30일.
※ 병자호란 주요 연표:
- 1598년 (선조 31년): 임진왜란 끝남.
- 1608년 (선조 41년): 광해군 즉위.
- 1616년 (광해군 9년): 누루하치 후금 건국.
- 1618년 (광해군 11년): 명과 후금의 전쟁, 명에 원병 파견함.
- 1619년 (광해군 12년): 강홍립 후금에 투항. -> (중립외교).
- 1622년 (광해군 15년): 명나라 장수 모문룡 가도에 주둔.
- 1623년 (광해군 16년): 인조반정으로 인조 즉위. -> (친명배금정책)
- 1624년 (인조 2년): 이괄의 난.
- 1627년 (인조 5년): 정묘호란 발생.
- 1635년 (인조 13년): 후금 내몽고 점령.
- 1636년 (인조 14년): 후금 청으로 국호 변경하고, 조선에 군신관계 요구 (척화론과 주화론 대립).
12월 28일 병자호란 발생. 남한산성 전투.
- 1637년 (인조 15년): 2월 24일 인조 송파 삼전도에서 항복. 청과 사대관계 맺음.
- 1644년 (인조 21년): 명나라 멸망. 청 중국 통일.
무망루
조선 영조27년(1751) 광주 유수 이기진이 증축한 수어장대 2층의 내편(內篇) 문루로서 그 편액(扁額)이 2층 누각에 있어 1989년 전각을 건립하고 이 안에 현판을 새로 설치 일반인이 볼 수 있게 하였다. 무망루는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혔다가 귀국 후 북벌을 꾀하다가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이믐지은 것이다.
매바위, 그리고 '수어서대" 암각글씨.
청량당에 위폐가 모셔진 남한산성 공사 책임자 중 한사람이었던 이회가 공사비 횡령에 연류되어 억울하게 처단되자 죽 전에 자신의 죄가 없다면 매가 날아와 이 바위에 앉을 것이라고 유언을 했는데, 그 후 과연 매가 날아와 매바위에 구슬피 울었다고 하며, 다시 확인해 보니 죄가 없음이 드러났으며, 오히려 다른 구간보다 성이 더 견고히 축성되었음이 밝혀졌다. 예나 지금이나 모함은 한 인간을 파멸로 이끌기도 한다.
◆ 하산길 (수어장대-> 남문):
제6암문(서암문)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의 비밀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도 설치하지 않았다. 이 암문은 성벽의 흐름 방향과 달리 입구가 북서쪽을 향하고 있어 외부에서 쉽게 관측되지 않도록 하였다. 또한 북동쪽의 성벽을 돌출하여 암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원성에 설치된 12개 암문의 외측 개구부는 대부분 홍예식이지만 제2암문과 더불어 이 암문의 개구부는 평거식이다. 인조 15년(1637) 1월 23일, 한밤중에 습격해 온 청병을 크게 물리친 곳이라 하여 이 암문 부근을 '서암문 파적지'라 부른다.
<- 지화문 1.3KM, -> 수어장대 250M
이 계단길을 보니 옛날 생각이 난다. 바로 이 앞에서 나와 손잡고 내려오던 집사람이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발목을 삐였다. 그리하여 꼼짝을 못 하는데 우리 큰아들이 저 어머니를 업고 남산산성 남문 아래까지 내려가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간 적이 있는 곳이다. 이곳만 내려서면 지금은 없어졌지만 정자와 조그만 간이 건물을 지어 국수를 파는 집이 나오는데, 아, 나는 국수와 막걸리 먹을 생각에 너무 기대가 컸는데 이런 사고를 당하니 황망하기 그지 없었다. 만약 혼자 그런 사고를 당했으면, 또는 아들이 없었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항상 나는 그 일을 잊지 못하겠다 그래서 나는 단독 산행을 주로 하는데, 산행시 항상 극도로 조심한다.
지금 없어졌지만 정자와 간이건물이 있던 곳. 맛있는 막국수와 막걸리를 잊을 수 없네. 지금은 그런 낭만이 사라지고 없어 아쉽다. 옛날 것과 공존하는 세상이 되엇으면 한다.
병자호란
칼 쓴 십자가
" 천주교 비극의 역사, 남한산성 "
남한산성 성지성당 내부에는 순교자들의 옥에 갇혀있을 때 쓰고 있었던 칼이 채워져 있는 독특한 십자가상이 있습니다. 천주교 탄압의 본격적인 서막은 신유박해(1801년) 부터였는데요. 천주교에 대해 큰 반감이 없었던 정조가 승하하자 정순황후가 가혹한 탄압을 시작한 것이죠. 박해의 진짜 이유는 정조시기에 세력을 키운 남인을 숙청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이 신유박해 때 남한산성에서 첫 순교자가 발생하게 됩니다. 천주교 신자가 광주 및 인근 지역에서 잡히면 남한산성 포도청으로 이송되어 감옥에 갇혔습니다. 순교자들은 심문을 당하다 결국은 감옥에서 순교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교살형이나 교수형이 대부분 감옥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감옥이 곧 순교터가 되었습니다. 감옥에서 죽거나 고문 끝에 죽은 순교자들은 동문 밖으로 시신을 버렸는데 그 장소가 수구문이었습니다. 시체가 너무 많이 나가고 피가 물처럼 흘러 수구문은 시구문으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 만해기념관 0.4KM, <- 수어장대 0.9KM, <- 우익문(서문) 1.9KM, ->지화문(남문) 0.6KM
청량산
남한산성 행궁, 만해기념관 방향
지화문(남문)
남문 (지화문)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었는데, 남문은 남한산성에 있는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으로 현재에도 출입이 가장 많은 곳이다. 선조때 기록을 보면 동문. 남문. 수구문의 세문을 수축하였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남문은 인조2년(1624) 수축되기 이전 부터 이미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남문은 정조3년(1779) 성곽을 보수할 때 개축하여 지화문(至和門)으로 이름이 붙여졌으며 4대문 중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는 문이다.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처음 남한산성으로 들어올 때 바로 이 문을 통해 들어왔다.
지하문(남문) 밖의 보호수 느티나무 ........500년 수령, 둘레 160cm, 수고 16m
남한산 & 성남시 방향의 등.하산로
지화문
지화문
지하문(남문): 정조3년 성곽을 보수 할 때 '지하문'이라 칭하였고 남한산성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이다.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다. 또한 현재는 성남으로 통하는 관문역할을 하고 있으며, 성문앞에 식재된 (350년 수령, 성남시 보호수) 느티나무와 함께 문화와 역사가 살아숨쉬는 시민의 역사터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 - 성남시.
세계유산 남한산성 종합안내판
1코스: 산성로터리- 북문- 서문- 수어장대- 영춘정- 남문- 산성로타리 ( 3.8km, 1시간 20분 )
2코스: 산성로터리- 영월정- 숭렬전- 수어장대- 서문- 국청사- 산성로타리 ( 2.9km, 1시간 )
3코스: 남한산성 역사관주차장- 현절사- 벌봉- 장경사- 망월사- 지수당- 남한산성 역사관주차장 ( 5.7km, 2시간 )
4코스: 산성로터리- 남문- 남장대터- 동문- 지수당- 개원사- 산성로타리 ( 3.8km, 1시간 20분 )
5코스: 남한산성 역사관주차장- 동문- 동장대터- 북문- 서문- 수어장대- 영춘정- 남문- 동문 ( 7.7km, 3시간 20분 )
남문 간이매점
남한산성비석군
(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114-1번지 소재 )
성 내에는 18~20세기 무렵에 설치된 39여기의 비석이 있다. 이 중 본 부지(남문진입로)내로 남한산성 행궁 복원 사업에 따라 이전된 11기와 현 위치에 보존되어 있던 19기를 포함한 총30기의 비석을 한곳으로 모아 남한산성을 방문하는 탐방객들에게 옛 선현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후대에 소중히 전승될 수 있도록 비석을 한 곳으로 옮겨 정비해 놓았다. 이곳에 있는 비석은 역대 광주유수(廣州留守) 및 수어사(守禦使), 부윤(府尹), 군수(郡守)의 비로서 재직시 백성들을 정성스레 돌봐 치정을 잘 했거나 사랑을 베풀어 선정을 한 분들에게 백성들이 그들을 추념하여 새운 비로서 광주유수.영의정을 지낸 심상규(沈象奎)의 비를 포함 30기의 비석이 이곳에 위치하고 있다.
산성터널
청량산 (수어장대) 방향
남문약수터
앗, 남문주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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