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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구릅/길 (trekking)

① 대한제국의 황궁 덕수궁, 그리고 남산- ( 2021.11.26 )

by the road of Wind. 2021. 11. 26.

대한제국의 황궁 덕수궁, 그리고  남산

- ( 2021.11.26 ) 

 

   덕수궁  》: 

 

서울의 궁궐을 차례 차례 관람해 보고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은 서울시청덕수궁을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세종대로를 따라 남대문시장 숭례문(남대문)을 거쳐 남산 산행을 하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상당한 거리의 길을 걸었습니다. 남산은 서에서 동으로 길게 종주를 한 셈입니다. 남산 서울타워 조금 아래 있는 버스정류소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하산할까 생각하다 그래도 마지막 하산까지 걷기로 하였는데, 지금 생각하니 잘 한 것 같습니다. 덕수궁은 아주 작은 궁궐이지만 대한제국 마지막 황궁이었으며, 남산서울의 한강을 낀 도심의 중심부에 있는 상징성이 큰 산으로서 서울 시내를 모두 잘 조망할 수 있다는 것이 아주 큰 매력일 것입니다. 오늘 조금 힘을 들였지만 보람있는 하루였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는 길이 퇴근시간과 겹쳐서 전철이 복잡하여 난처하였습니다. 신문에서는 백신을 무력화 시키는 것으로 의심되는 코로나19 변종이 더 생겨나 세계 전문가들을 긴장시킨다는 뉴스와 함께, 우리나라의 코로나 감염상황도 매일 매일 더 악화되고 있다는 뉴스를 보고 걱정이 많이 되었습니다. 아, 코로나가 우리 인류에게 커다란 위험이며 위기구나 하는 불안의식이 커졌습니다. 핵무기, 온실가스 등 인류 멸망의 요인보다 더 큰 재앙이 되겠구나 하는 불길함이 엄습하는 것 같았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모이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면 큰 재앙이 될 것입니다. 필요한 것을 서로 주고 받는 가치의 교환인 경제가 마비되거나 파괴되면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산 책: 걸음수 15,227 steps, 거리 10.6 km, 소모열량 570 Kcal, 소요시간 02:26 hrs, 속도 4.4 km/h.

 코 스:  2호선 시청역 - 덕수궁 -  세종대로 -  남대문시장 - 숭례문(남대문) - 남산 산행  < 백범광장 -  남산도서관 - 남산 N서울타워 - 남산벚꽃길 - 국립극장 - 장충당공원 (동국대학교 입구) >  - 동대입구역.

 

 

덕수궁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크게 두 차례 궁궐로 사용되었다. 덕수궁이 처음 궁궐로 사용 된 것은 임진왜란 때 피난 갔다 돌아온 선조가 머물 궁궐이 마땅치 않아 월산대군의 집이었던 이곳을 임시 궁궐(정릉동 행궁)로 삼으면서 부터이다. 이후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정릉동 행궁에 새 이름을 붙여 경운궁이라고 불렀다. 경운궁이 다시 궁궐로 사용된 것은 조선 말기 러시아 공사관에 있던 고종이 이곳으로 옮겨 오면서부터이다.  조선 말기 정국은 몹시 혼란스러웠다. 개화 이후 물밀듯 들어온 서구 열강들이 조선에 대한 이권 다툼이 치열했기 때문이다. 고종러시아공사관에서 돌아와 조선의 국호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새로 환구단을 지어 하늘에 제사를 지낸 뒤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대한제국 선포는 조선이 자주 독립국임을 대외에 분명히 밝혀 정국을 주도해 나가고자 한 고종의 선택이자 강력한 의지였다. 대한제국의 위상에 맞게 경운궁 전각들을 다시 세워 일으킨 것도 이과 같은 맥락이다. 고종 당시의 궁궐은 현재 정동과 시청 앞 일대를 아우르는 규모로 현재 궁역의 3배 가까이 이르렀다. 그러나 고종의 의지와 시도는 일제에 의해 좌절되고, 고종은 결국 강압에 의해 왕위에서 물러났다. 이때부터 경운궁은 ‘덕수궁’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고종에게 왕위를 물려받은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고종에게 장수를 비는 뜻으로 ‘덕수’라는 궁호 (공덕을 칭송하여 올리는 칭호)를 올린 것이 그대로 궁궐 이름이 되었다. 고종은 승하할 때까지 덕수궁에서 지냈으며, 덕수궁은 고종 승하 이후 빠르게 해체, 축소되었다. 개화 이후 서구 열강의 외교관이나 선교사들이 정동 일대로 모여들면서 덕수궁도 빠른 속도로 근대 문물을 받아들였다. 덕수궁과 주변의 정동에는 지금도 개화 이후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건립된 교회와 학교, 외국 공관의 자취가 뚜렷이 남아 있다. 덕수궁이 다른 궁궐들과 달리 서양식 건축을 궐 안에 들인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고종 당시의 궁궐 면모에는 크게 못 미치지만, 덕수궁에는 저마다 사연을 안은 유서 깊은 전각들이 오순도순 자리하고 있다. 석어당에서 석조전에 이르는 뒤쪽에는 도심의 번잡함을 잊게 하는 호젓한 산책로도 있다. 파란만장한 근대사의 자취를 기억하는 덕수궁은 서울에서 손꼽히는 산책로인 정동길과 더불어 도심의 직장인과 연인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 ( 문화재청 )

 

 

덕수궁 연표:

 

1932년 (태조1) 조선개국
 

1500년대 (임시행궁):
1592 (선조25) 임진왜란 발발.

1593 (선조26) 의주까지 피난 갔던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와 옛 월산대군의 저택을 임시행궁으로 삼고, '정릉동 행궁'이라 부름.

1595 (선조28) 궁역의 동쪽과 서쪽에 문을 세움 
 

1600년대 (법궁):

1608 (선조 41) 선조 석어당(추정)에서 승하. 다음날 광해군 즉조당(추정)에서 즉위.

1611 (광해 3)  광해군 창덕궁으로 옮김. 정릉동 행궁을 ‘경운궁(慶運宮)’이라 칭함. 12월 광해군 다시 경운궁으로 옮김.

1615(광해 7)  광해군 창덕궁으로 다시 옮김.

1618(광해 10) 인목대비의 를 폐위하고 석어당에 유폐.  

1623 (인조 1) 인조, 반정에 성공한 뒤 즉조당(추정)에서 즉위, 창덕궁으로 옮김.

 

1800 - 1900년대 :(대한제국의 멸망)
1876 (고종13) 강화도 조약 체결, 문호개방 시작.

1896 (고종33) 고종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

1897 (고종34) 고종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돌아옴.

1897 (광무 1)  대한제국 선포. 고종 황제 즉위. 연호를 광무(光武)라 정함. 

1904 (광무 8)  러일전쟁 발발함. 대화재로 중화전, 석어당, 즉조당, 함녕전 등 전각 소실.

1905 (광무 9)  증명전에서 을사늑약 체결.

1906 (광무10)  대안문(大安門) 수리하고 대한문(大漢門)으로 개칭.

1907 (융희 1) 순종 창덕궁으로 옮김. 경운궁을 덕수궁으로 부르기 시작.
1910 (융희 4)  석조전 완공.

1919 고종,함녕전에서 승하함.

1938  석조전 서관 완공. 이왕가미술관(李王家美術館)으로 개관.

1945  광복

1946  석조전에서 미소공동위원회 열림.

 

2011 증명전 개관.

2014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 개관.

 

 

차량의 홍수가 밀려가는 것 같구나!

서울시청 앞 광장

 

나는 서울시청 신청사를 바라볼 때마다 왜 일제시대 건물을 그냥두어 보기 싫은지 이해할 수가 없다. 솔직히 짜증부터 난다. 구태어 일제시대 역사적 건물을 존치하려면 다른 곳으로 이전하여 그에 맞는 박물관 등으로 사용하면 될 일이다. 일제 강점기의 경성부청(京城府廳) 건물을 지금도 서울의 중심에 두고 두고 본다는 것이 여간 불편하지 않다. 발전되고 자랑스런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초현대식 랜드마크로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 그런 아름답고 실용적인 디자인의 건물이 되지 못한 것이 너무 안타깝다. 공간적인 측면에서도 새롭게 건축한 신청사의 실용성도 없게 보인다. 나의 눈에는 건물 뒤에서 무섭고 커다란 파도, 쓰나미가 몰려오는 형국으로 보인다. 나만 그런 마음일까?

 

 

 

대한문 앞이 공사중으로 어수선 하다.

덕수궁의 정문, 대한문(大漢門) 

 

 

 

덕수궁 매표 및 입장시간 안내:

매표 및 입장시간: 09:00 ~ 20:00. (휴궁일: 매주 월요일)
관람시간: 09:00 ~ 21:00.
입장요금:  

* (만 25세~만64세이하)>: 개인 1,000원, 단체(10인이상) 800원.

* 지역(중구)주민>:  50% 할인.

점심시간 관람권:  3,000원 (3개월 10회, 11:30- 13:30)
상시 관람권: 10,000원 (1개월).
종합관람권: 10,000원 (4대궁 및 종묘)
시간제 관람권: 30,000원 (12개월, 12:00-13:00, 덕수궁.창경궁),
 100,000원 (12개월, 12:00-13:00) (덕수궁.창경궁.경복궁. 14개능, 동반1인 무료)

- 무료 관람권: 만24세이하. 만65세이상, 한복을 착용한 자, 고엽제후유(의)증환자, 국가유공자 등등, '문화가 있는 날' (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 ).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   인터넷 사전 예약 관람으로 운영:

관람시간 안내

 

* 화요일 ( 5회 ): 09:30/ 11:00/ 13:00/ 15:00/ 16:30),  

* 수-금요일 ( 8회 ): 09:30/ 10:30/  11:00/ 11:30/ 13:00/ 14:30/ 16:00/ 16:30),    

* 토-일요일 ( 11회 ): 09:30/ 10:30/  11:00/ 11:30/ 13:00/ 13:30/ 14:00/ 14:30/ 15:00/ 15:30/  16:30),  

* 공휴일 ( 5회 ): 09:30/ 11:00/ 13:00/ 15:00/ 16:30), 

- 예약은 관람일 7일전 오전 10시부터 덕수궁 홈페이지에서 가능.
- 현장접수65세 이상과 외국인만 가능 (선착순 5명) * 09:30, 17:00 현장접수 없음
- 미취학 아동 및 초등학교 4학년 이하 단체참여 불가
- 관람시간 10분 전까지 대한제국역사관 안내데스크에서 예약확인 및 입장. ( 덕수궁 입장권 구입하여 입장 )

 

 

대한문(大漢門)

 

대한(大漢)’은 ‘ 한양이 창대해 진다 ’는 뜻이고, 한양(漢陽)한수(漢水), 곧 한강(漢江)에서 유래한 것으로, ‘한(漢)’은 ‘ '하늘’, ‘한수(漢水)’는 ‘은하수(銀河水)’를 뜻한다. 현판글씨는 특진관(特進官) 남정철(南廷哲)이 쓴 것이라한다. 

○ 남정철(南廷哲, 1840~1916) : 자는 치상(穉祥), 호는 하산(霞山), 본관은 의령(宜寧). 조선 후기 학자 유신환(兪莘煥, 1801~1859)의 문인이다. 1894년 특진관(特進官 : 궁내부에서 왕실 일을 보좌하던 벼슬)이 되었고, 1909년(융희 3) 나이 많은 문신들을 예우하기 위해 만든 기구인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일본 작위인 남작(男爵)을 받았다.   

 

 

금천교 옆의 비석,

" 大小人員皆下馬 (대소인원개하마) "

어른, 아이할 것 없이 모두 하마하시오

 

 

금천교(禁川橋)

 

덕수궁 입구 대한문(大漢門) 앞을 흐르는 조그만 개천 금천(禁川)을 건너는 다리이다. 

 

 

 

 

금천교 & 금천

 

 

* 스마트폰으로 듣는 덕수궁 오디오 가이드.

 

* 무료로 덕수궁을 안내해 드립니다.

국어 무료 안내:
- 화-금요일: 10:30, 11;15, 13:00, 14:15, 15:00, 16:30
토-일요일: 11;15, 13:00, 13:30, 14:15, 14:30, 15:00, 16:30
공휴일: 10:00, 11;15, 14:15,, 16:30

 

대한문 방향

 

 

 

덕수궁(德壽宮):

덕수궁 터에는 월산대군(1454~1488)의 후손을 비롯한 왕족들과 고관들의 저택들이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서울의 모든 궁궐이 불타 없어지자 선조는 이 집들을 수용하여 임시로 거처하는 행궁으로 사용하였다가, 광해군이 1611년에 재건한 창덕궁으로 어가를 옮기면서 별궁인 경운궁(慶運宮)이 되었다. 이후 19세기 중엽까지는 궁궐로서 역활이 없다가 1897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경운궁대한제국으뜸 궁궐로 삼았고, 많은 전각들을 새로 세워 궁궐의 격식을 갖추어 나갔다. 또한 근대화를 향한 고종의 의지에 따라 궁 안에 여러 서양식 건물들을 세웠다. 그러나 1880년대 정릉 일대는 각국 외교사절공관선교사들의 주택이 밀집해 있어서 경운궁의 공역을 확장하기 어려웠다. 결국 기존의 미국.영국.러시아 영사관 사이로 궁역을 확장하다보니 대지의 모양이 불규칙하게 된 것이다. 1907고종퇴위하면서 선황제의 거처가 되어 궁의 이름을 덕수궁으로 바꾸었으며, 태평로를 확장하면서 궁역이 축소되었다. 고종이 승하한 후에는 북쪽 선원전과 서쪽 증명전 일대도 매각되어 원래 넓이의 1/3만 남게 되었다. 1933년에는 중심 부분과 몇개의 양관(洋館)만 남고 대부분 전각들이 철거된 후에 공원으로 조성되어 일반에 개방되었다. 현재는 중심부인 중화전 일원과 정관헌석조전과 같은 양관들이 남아있다. 덕수궁은 임진왜란구한말이라는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으뜸 궁궐로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던 상징적 공간이었다. 또한 전통 규범 속에 서양식 건축을 수용한 근대적 궁궐이며, 주변 상황의 공간적 맥락에 맞추어 조성한 도시적 궁궐이었다.



    

광명문(光明門)

 

함녕전, 덕흥전 ↑  중화전 <-   석조전 <-   덕수궁 미술관 <-   

나가는 곳 -> 

 

 

덕수궁 돌담 곁에 아직 단풍은 있구나!

 

 

덕수궁 프로젝트 2021,

'상상의 정원', 意 園

 

 

덕수궁은 시대에 따라 변화를 거듭해 왔습니다. 덕수궁이 대한제국의 황궁이 되기전에 이 터는 왕족의 사저(私邸)였고 임진왜란 때에는 행궁(行宫)이었으며 대한제국이 막을 내린 후 덕수궁은 시민을 위한 공원이 되었다가 1963년에 사적(史蹟)으로 지정되어 현재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석조전 앞 기하학적 형식의 서양식 정원을 포함한 덕수궁 정원에 고스란히 반영되었습니다. 네번째로 개최되는 이번 덕수궁 프로젝트는 '정원'을 매개로 덕수궁의 지나간 시간을 돌이키고 정원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부재 "상상의 정원"은 조선 후기 '의원(意園)'문화에서 가죠왔습니다. 18~19세기 조선의 문인들은 외부 조건에 제한 받지 않고 풍류를 즐길 수 있는 의원, 즉 "상상 속 정원"을 경영했습니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작가들은 덕수궁의 역사를 떠오리며 상상의 정원을 만들어 냅니다. 정원을 산책하 듯 덕수궁을 느긋하게 거닐며 작품을 감상하시길 바람니다. 

전시기간: 2021.9.10-11.28
관람시간; 화요일~일요일: 오전 9시 ~ 오후 9시. ( 입장마감 오후 8시 )
* 매주일 월요일 휴궁.

* 공동주최: 국립미술관 

 

 

 

광명문

 

 

 

음악과 이야기로 듣는 

덕수궁 음악회

2021.11.26 (금) PM 4:00

덕수궁 야외무대 ( 함녕전 야외무대 )

 

 

 

오늘 함녕전 음악회를 기다리는 사람들

 

 

함녕전

 

함녕전 :1897년 건립되었으며, 내전의 주요 전각으로, 고종의 편전이자 침전으로 사용되었다. 1904년 4월 함녕전 온돌 수리 공사 중 일어난 화재로 함녕전은 물론 덕수궁 내 주요 전각들이 모두  소실되었고 함녕전은 같은 해 12월에 중건되었다. 1919년 1월 21일 고종께서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보물 제820호.

 

 

덕흥전 &amp;amp;amp; 함녕전

 

함녕전과 덕홍전 |  咸寧殿. 德弘殿


함녕전은 고종이 거처하던 침전으로 1919년에서 승하하셨다. 1904년에 화재로 소실된 후에 다시 지어졌다. 대청마루 양 옆으로 온돌방을 드렸고, 사방 툇간에 방을 두른 전형적인 침전건물이다. 함년전 뒤편에는 계단식 정원을 꾸몄고, 전돌로 만든 유현문(唯賢門)과 정식적인 굴뚝들을 설치했다. 
덕흥전은 고위 관료와 외교사절들을 접견하던 곳으로 1911년에 건립한 전통 양식의 건축물이지만, 내부는 천장에 샹들리에를 설치하는 등 서양풍으로 장식했다.   

 

 

 

덕홍전 & 함녕전

 

 

 

중화전 측면

 

 

덕홍전

 

덕홍전: 1906년 건립한 후 1911년에 개조하였다. 덕홍전은 주로 황제가 외국 사신이나, 대신들을 만나던 접견실로 쓰였다고 알려져 있다. 건물은 겹처마 팔작지붕의 단층 건물이다. 이 건물 주위에는 행각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행각 일부만 함녕전 남행각에 연접되어있다.

 

 

 

 

석어당

 

 

 

 

정광헌↑   즉조당 <-   석조전 <- 

 

 

석어당 방향

 

함녕전 과 덕홍전, 야외 음악회 방향

 

 

정광헌

 

 

중화전 과 석어당

 

 

정광헌

 

 

정관헌 |  靜觀軒


○ 궁궐 후원의 언덕 위에 세운 유식용 건물로 이름에 걸맞게 조용히 궁궐을 내려보고 있다. 한국과 서양의 건축 양식이 혼합된 건축물로, 1900년경 러시아 건축가 샤바찐(A. I. Sabatin)이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인조석 기둥을 줄지어 내부 공간을 감쌌고, 동남서 세 방향에 베란다를 마련하였다. 베란다의 기둥은 목조이며 기둥 상부에 청룡, 황룡, 박쥐, 꽃병 등 한국의 전통 문양을 새겼다. 이 한양(韓洋) 절충의 이국적 건물 안에서 고종은 커피를 마시며 외교 사절들과 연회를 즐겼다 한다.  

 

 

 

정광전 내부

 

 

정광헌 출입문

 

 

 

석어당 

 

 

즉조당, 준명당 후면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

 

 

 

평성문 

미국대사관저, 구 미국공사관과 덕수궁 사잇 길로 나가는 문 

 

 

중화전 ↑   덕수궁사무실 <-   미술관 사무실 -> 

나가는 길  ↑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

 

석조전: 덕수궁 석조전 은 1910년에 완성된 대한제국의 대표적인 서양식 건물입니다. 고종[광무황제]에 의해  황제국이 선포된 후 대한제국 황궁의 정전으로 만들어졌으며, 엄격한 비례와 좌우대칭이 돋보이는  신고전주의양식으로 내부에는 접견실과 대식당, 침실, 서재 등을 갖춘 근대 건축물입니다. 대한제국 황실의 품격이 살아 있는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은 ‘지층-1층-2층’의 총 3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지층은 시종들의 공간으로 사용이 되던 곳을 대한제국의 근대 개혁과 신물문의 도입, 석조전 복원 기록을 담은 전시실로 되어있습니다. 1층은 접견실과 대식당 등 대한제국 황실의 공적인  업무를 보던 공간으로 재현실과 대한제국의 정치, 외교 의례 등에 관한 전시실로 되어 있으며, 2층은 황실 소개와 함께 대한제국 황실의 사적인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 < 문화재청 >

석조전의 주요 연혁:

1910년 : - 경운궁[현 덕수궁] 석조전 준공
1911년~1922년:-  영친왕 방문시 임시 숙소
1933~1945년:-  덕수궁미술관과 이왕가미술관
1946~1947년:- 미소공동위원회 회의장
1955~2004년:-  국립박물관, 궁중유물전시관 등

 

 

분수대

 

 

앙부일구 (仰釜日晷, 해시계 )

 

 1434년(세종 16)에 제작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해시계이다.

 

 

 

 

 

준명당

 

 

즉조당석어당

 

 

석어당

 

○ 석어당:  창건 연대 미상. 1904년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같은 해에  중건하였다. 덕수궁의 유일한 중층의 목조 건물로 선조가 임진왜란 중 의주로 갔다가 환도한 후 이곳에서 거처하였고, 1608년 2월 선조가  승하한 곳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또한 인목왕후가 광해군에 의해 유폐되었던  곳이기도 하며, 인조반정이 성공한 뒤 광해군을 석어당 뜰 아래 꿇어 앉히고 광해군의 죄를 문책한 곳 이기도하다. 단청을 하지 않은 "백골집"으로 아래층은 정면 8칸, 측면 4칸이며 위층은 정면 6칸, 측면 1칸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중화전(中和殿)

 

 

중화문 & 품계석

 

 

 

답도의 화려하고 정교한 용 무늬 

 

중화전(中和殿)

 

 중화전: 덕수궁의 중심 건물로 임금님이 하례(賀禮)를 받거나 국가 행사를 거행하던 곳이다. 광무 6년(1902)에 지었으나 1904년 불에 타 버려 지금 있는 건물은 1906년에 다시 지은 것들이다.

 

 

 

임금님 용상

 

 

중화전의 정문, 중화문

 

 

 

 

 

 

주목((朱木):

 

' 살아 천년, 죽어 천년' 이라는 말의 주목이다. 그만큼 성장 속도가 느린 상록침엽수로 주로 고산지대에서 서식하며, 일반적으로 높이 17m, 지름 1m에 달한다. 큰가지와 원대는 홍갈색이며 껍질이 얕게 띠 모양으로 벗겨진다. 

 

 

 

 

 

중화전 & 중화문

 

 

중화문

 

 

 

 

아름다운 건축미의 중화전

 

 

 

붉은 단풍

가을아 가지마라, 가지마라

 

 

 

 

덕수궁 돌담

 

 

 

 

 

 

 

Art Shop & Cafe

 

 

다시 대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