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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구릅/일상들 ( life )

다산 정약용 유적지 산책- ( 2022.09.19 )

by the road of Wind. 2022. 9. 19.

다산 정약용 유적지 산책

- ( 2022.09.19 )

 

오랜만에 집사람과 함께 바깥 나들이를 해보았습니다. 그동안 한달 이상을 허리 통증으로 고생하다 오늘은 상태가 좋아져서 집에서 가까운 정약용유적지다산생태공원을 산책하고 돌아왔습니다. 정약용유적지는 월요일 휴관으로 들어가보지 못하고, 담 너머로 유적지 경치만 보고, 다산생태공원 산책으로 만족하였습니다.  다산생태공원에서 바라보는 팔당호수의 경치는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언제 보아도 아름답고, 마음이 뻥 뚤리는 것을 느낍니다. 갑자기 찾아온 요통, 건강은 갑자기 어느날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우리의 행복한 삶은 건강에서 온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끼게 됩니다.  

 

나는 다산 정약용 선생 유적지를 찾을 때 마다, 다산 어록을 생각하게 되며  큰 감명을 받게 됩니다. 만약 내 자신이 다산 선생님의 말씀과 같이 살 수만 있다면, 나는 얼마나 가치있는 일생을 살 게 될까 되새겨보게 됩니다. 인생에 있어 이와 같이 아름답고 중요한 명심사항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산 어록:

 

권학(勸學) : 끊임없이 배우고 깨쳐라
수신(修身) : 몸과 마음을 돌아보라
치가(治家) : 집안과 부모형제를 보살펴라
이재(理財) : 재물과 이익 앞에서 겸손하라
정도(正道) : 도리에 맞는 생활을 하라
위정(爲政) : 이웃의 어려움을 살펴라
용인(庸人) : 사람을 아끼고 귀히 여겨라
교우(交友) : 진심을 다해 사람을 사귀어라

 

 

 산   책 : 걸음수 3,881steps, 거리 3.4 km, 소모열량 152 kcal, 소요시간 00:40 hrs, 속도 4.2 km/h, 기온 28℃.

 코   스 : 정약용유적지 p1 주차장 - 문화관 - 유적지 정문 (실학연수) - 거중기 -  밤나무집 -  실학정원  - 대가농원-  전망대 -  수변소내길 -  다산생태공원 -  수변쉼터 - 연꽃단지 - p1 주차장.

 

 

 

p1 주차장

 

 

장약용유적지 입구

 

 

 

2022 여유당 수국과 함께 달빛 산책

 

여유당 야행
5월 그리고 9월 매일 저녁 8시까지
정약용유적지 & 생태공원

야경(夜景) : 정약용유적지와 다산생태공원의 산책로를 따라 달 조형물, LED수국조명, 정약용 선생의 시구 등 은은한 빛의 포토죤 조성.
야사(夜史): 배우 장해인의 목소리로 듣는 오디오 가이드 셀프 역사 투어.
   
- 문의처: 남양주시 문화교육국 정약용과 590-2591.   

 

 

 

'꺼지지 않는 불',  2001,  박철우   


" 다산 정약용 선생께서 저술한  약 500여권에 이르는 서책과 그 속에서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타오르는 실학사상의 정신을 조형물로 형상화 하였습니다. 2001년 11월. "

 

 

 

 

다산문화관...월요일 휴관

 

 

다산 정약용 선생 생가 '여유당'이 보이고 있다.

 

여유당(與猶堂):  


생가 여유당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유실되었던 것을 1986년 복원한 것이로 집 앞으로 내(川)가 흐르고 집 뒤로 낮은 언덕이 있는 지형에 자리잡고 있어 선생은 수각(水閣) 이라고도 표현하였다. 당호(堂號)인 여유(與猶)는 선생이 1800년(정조24년) 봄에 모든 관직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서 지은 것으로 여유당기(與猶堂記)를 통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하였다. 나는 나의 약점을 스스로 알고있다. 용기는 있으나 일을 처리하는 지모(智謀)가 없고 착한 일을 좋아는 하나 선택하여 할 줄을 모르고, 정에 끌려서는 의심도 아니하고 두려움도 없이 곧장 행동해 버리기도 한다. 일을 그만두어야 할 것도 참으로 마음에 내키기만 하면 그만 두지를 못하고, 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마음 속에 담겨있어 개운치 않으면 기필코 그만 두지를 못한다. ...(중략) ...이러했기 때문에 무한히 착한 일만 좋아하다가 남의 욕만 혼자서 실컷 얻어먹게 되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 또한 운명일까. 성격 탓이겠으니 내 감히 또 운명이랴 말하랴. 노자(老子)의 밀에 "여(與) 여! 겨울의 냇물을 건너는 듯 하고, 유(猶) 여! 사방을 두려워 하는 듯 하거라"라는 말을 내가 보았다. 안타깝도다. 이 두마디 말이 내 성격의 약점을 치유해 줄 치료제가 아니겠는가. 무릇 겨울에 내를 건너는 사람은 차가움이 파고들어와 뼈를 깍는 듯 할 터이니 몹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며, 온 사방이 두려운 사람은 자기를 감시하는 눈길이 몸에 닿을 것이니 참으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다. ....(중략).... 내가 이러한 의미를 해독해 낸지가 6,7년이나 된다. 당(堂)의 이름으로 하고 싶었지만 이윽고 다시 생각해 보고 그만 두어버렸었다. 초천(苕川)으로 돌아옴에 이르러 비로소 써가지고 문미(門梶)에 붙여놓고 아울러 그 아름 붙인 이유를 기록해서 이이들에게 보도록 하였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삶:  

1762년 (영조38년)  -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출생
1789년 (정조 13년) - 문과급제
1794년 (정조18년)  - 성균관 직장, 경기도 암행어사의 명을 받들고, 이어서 홍문관 부교리에 임명됨.
1795년 (정조19년)  - 주문모 신부 사건에 형 약전의 연루로 충청도 금정찰방으로 좌천.
1801년 (순조1년)    -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 이후 18년의 유배 기간 고난의 세월을 보냄.
1818년 (순조 18년) - 다산 초당에서 저술을 시작함
1836년 (현종 2년)   - 75세로 이곳 조안면 능내리에서 세상을 떠남.  

다산의 사상(思想)

- 政治思想(정치사상)....임금은 백성을 위하고 (爲民思想), 군자는 자신을 바로 세운 후에 남을 다스리는 수기치인(修己治人) 정신을 실현해야 한다는 선생의 정치사상은 오늘날 지도자가 걸어야할 바른 길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 經濟思想(경제사상)....기술 발달과 상공업 진흥을 통한 부국강병을 제시하고 농업생산성 제고를 위한 정책인 여전제, 정전제를 제안, 토지 공개념을 도입하고 조세 부담의 공평성을 기하는 등 능률적인 경제운영의 지혜를 가르쳐 줍니다.
- 社會思想(사회사상)....폐단과 부폐로 어지러운 봉건시대에 핍박받는 민생의 편에서 사회제도를 백성을 위한 혁명적 개혁으로 주창하고 신분제 개혁, 서얼제도(庶孼制度) 철폐 등 근대적인 의미의 평등사회, 능력위주의 사회를 주장한 다산의 모습 속에서 모순의 벽에 끊임없이 부딪히며 고뇌했던 참 지식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 科學思想(과학사상)....서양의 철물, 지리, 농사정책, 수리 기술, 측량법 등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학문을 연구하기도 하였습니다. 과학이 민생에 실제적인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실용론을 주장하였으며 실제로 거중기, 프리즘, 종두법을 발전시키는 등 과학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오늘날 과학발전에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 文學思想(문학사상)....진실은 삶의 맥락에서 권력에 저항하고 학대받는 사람들의 편에 설 때 아름답습니다. 참된 지식인은 진실을 추구하는 인물이기에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과, 사회의 폐해들을 비판하고 개혁하려는 경륜의 정신이 담긴 다산의 문학은 이 시대 문학이 나아가야할 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敎育思想(교육사상)....개혁은 치산(발전)을 위함인가 제산(평등)을 위함인가의 물음에 다산은 결론적으로 치산을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현실적인 것을 연구하자는 실사구시(實事求是), 경세치요(經世致用)의 실학(實學)교육을 주장, 민생과 사회, 국가에 도움이 되는 학문교육으로 교육의 정도(定道)를 일러주고 있습니다.

 

 

 

 

거중기(擧重機)

 

1792년(정조 16) 다산 정약용(丁若鏞)이 왕명에 따라 1627년 독일인 선교사 슈레크(Schreck J.)가 저술한 기기도설(奇器圖說)에 실린 그림을 보고 고안한 운반도구로 밧줄과 도르레를 이용하여 물건을 들어올리는데 사용하였다.  원리는 비교적 간단하여 위에 네개의 도르래를 연결하고 아래 도르래 밑으로 물건을 달아매고, 위 도르래 양쪽으로 잡아 당길 수 있는 끈을 연결하여 이 끈을 물레에 감아 동시에 물레를 돌림에 따라 연결된 끈을 통해 물건이 위로 들어 올려 지도록 한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수원화성 축조에 사용하였으며 다산 선생의 과학사상과 앞선 시대정신을 엿 볼 수 있다. 

 

 

 

경세유표 (經世遺表)


내가 살펴보건데, 마음을 분발하고 이을 일으켜서 천하 사람을 바쁘고 시끄럽게 노역(勞役)시키면서, 일찍이 한번 숨 쉴 틈에도 안일하지 못하도록 한 이는 요순이요, 또한 정밀하고 엄격하고 각박하여 천하 사람으로 하여금 조심하고 송구하여 털끝만큼이라도 감히 거짓을 꾸미지 못하도록 한 이도 요순이었다. 천하에 요순보다 더 부지런한 사람이 없었건마는 하는 일이 없다고 속이고, 천하에 요순보다 더 정밀한 사람이 없었건마는 엉성하고 오활하다고 속인다. 그래서 임금이 언제나 일을 하고자 하면 반드시 요순을 생각하여 스스로 중지하도록 한다. 이것이 천하가 나날이 부패해져서 새로워 지지 못하는 까닭이다. 잘 정비된 수레를 잘 길들여진 말에다가 멍에를 메우고도 좌우로 옹위하고 수백 보쯤 전진시켜 보아 그 장치가 잘 되었는지를 시험한 뒤에야 동여매고 몰아가는 것이다. 임금이 법을 제정하여 세상을 이끌어가는 것이 이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것이 곧 초본(艸本)이라 이름하는 까닭이다. 아아, 이것이 어찌 초본이 아니겠는가. < 경세유표 서문, 1917년 >

 

 

 

정약용 선생 (1762~1836)의 묘
                                              경기도 기념물 제7호


정약용(丁若鏞) 선생은 이곳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당시의 광주군 초부면 마현)에서 아버지 나주정(丁)씨 재원(載遠)과 어머니 해남 윤(尹)씨 (고산 윤선도의 후손) 사이의 막내마들로 태어나셨다. 이곳 마현(마재)마을은 선생이 태어나시고 묻히신 곳이다. 위로 이복 맏형인 약현(若鉉) 과 동복형인 약전(若銓).약종(若鍾) 그리고 누이(먀형이 이승훈)가 계셨다. 서울에서 관직생활(1783~1800)과 전라남도 강진에서의 유배생활(1801~1818)을 제외하고는 주로 이곳에서 생활하셨다. 
선생은 반계(磻溪) 우형원. 성호(星湖) 이익 선생의 뒤를 이어 조선 시대 실학사상(實學思想)을 집대성한 분으로 조선 후기 개화사상가들 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고 문도공(文度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선생은 1표 2서(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신서)로 대표되는 500여권의 경집(經集)과 문집(文集)을 저술하셨을 뿐만 아니라 세계문화유산의 하나인 수원의 화성을 설계하셨고 거중기 등의 과학기구를 제작하셨으며 마과회통 등의 의학서적도 남기셨다. 선생의 학문적 관심은 오로지 <수기안인(修己安人)> 즉 " 어떻게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아 백성들의 삶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가? " 에 있었다. 현재 국립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로비에는 선생의 초상화가 걸려있는데 <한국 최대의 사회과학자>라고 적혀 있다. 

 

 

 

'실학연수', 정약용유적지 출입문.
실학연수 (實學淵數)란 실학의 모든 것이 모여있다는 뜻이다.

 

 

 

< 2020.4.25 사진>  자찬묘비명(自撰墓碑銘) - 광중본(壙中本):

정약용 선생이 회갑이 되던(1882년, 선생의 생애와 사상.업적을 묘지명이라는 문채를 빌어 사실대로 적은 것으로, 문집에 넣기 위한 집중본(集中本)과 무덤 속에 넣기 위한 광중본(壙中本)이 있으며, 아래 명(銘)은 광중본으로 민족문화추진회의 국역글이다.


이는 열수(烈水) 정약용의 묘이다. 본명은 약용(若鏞), 자를 미용(美鏞), 호를 사암(俟菴)이라 한다. 아버지 휘(諱)는 재원(載遠)이다. 음직(蔭職)으로 진주목사에 이르렀다. 어머니 숙인(淑人)은 해남윤씨(海南尹氏)이다. 영조 임오년(1762) 6월 16일에 용(鏞)을 열수(烈水 한강의 별칭) 가의 마현리(馬峴里)에서 낳았다.


용(鏞)은 어려서 매우 총명하였고 자라서는 학문을 좋아하였다. 22세(정조7,1783)에 경의(經義)로 생원(生員)이 되고 여문(儷文)을 전공하여 28세(정조13, 1789)에 갑과(甲科)의 제2인으로 합격하였다. 대신(大臣)의 선계(選啓)로 규장각에 배속되어 월과문신(月科文臣)에 들었다가 곧 한림(翰林)에 선입(選入)되어 예문관 검열(檢閱)이 되고 승진하여 사헌부 지평(持平), 사간원 정언(正言), 홍문관의 수찬(修撰)과 교리(校理), 성균관 직강(直講), 비변사 낭관(郎官)을 지내고, 외직으로 나가 경기 암행어사가 되었다. 을묘년(정조19, 1795) 봄에 경모궁 상호도감 낭관의 공로로 시간(司諫)에서 발탁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재수되고, 우부승지를 거쳐 좌부승지에 이르고 병조 참의(參議)가 되었다.


가경 정사년(정조21, 1797)에 곡산부사(谷山副使)로 나가서 혜정(惠政)이 많았다. 기미년(정조23, 1799)에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서 승지를 거쳐 형조참의가 되어 원옥(寃獄)을 다스렀다. 경신년(정조24, 1800) 6월달에 '한서선(漢書選)'을 하사받았다. 이달에 정조대왕(正朝大王)이 승하하니 이에 화(禍)가 일어났다.

15세(영조52, 1776)에 풍산홍씨(豊山洪氏)에 장가드니 무승지(武承旨) 화보(和輔)의 딸이다. 장가들고 나서 서울에 노닐 때 성호(星湖) 이익 선생(李瀷先生)의 학행이 순수하고 독실함을 듣고  이가환.이승훈 등을 따라 그의 유저(遺著)를 보게되어 이로부터 경적(經籍)에 마음을 두었다.

상상(上庠)하여 이벽(李蘗)을 따라 노닐면서 서교(西敎)의 교리를 듣고 서교의 서적을 보았다. 정미년(정조11, 1787) 이후 4~5년 동안 자못 마음을 기울렸는데, 신해년(정조15, 1791) 이래로 국가의 금령이 엄하여 마침내 생각을 아주 끊어버렸다. 을묘년(정조19, 1795) 여름에 중국의 소주(蘇州)사람 주문모(周文謨)가 오니 국내가 흉흉해졌다. 이에 금정도 찰방(察訪)으로 보임되어 나가 왕지(王旨)를 받아 서교에 젖은 지방의 호족(豪族) 을 달래어 중지시켰다.

신유년(순조1, 1801) 봄에 대신(臺臣) 민명혁(閔命赫)등이 서교 일로써 발계(發啓)하여, 이가환, 이승훈 등과 함께 하옥되었다. 얼만 뒤에  두 형 약전(若銓) 과 약종(若鐘)도 용(鏞)과 함께 체포되어 하나는 죽고 둘은 살았다. 모든 대신(大臣)들이 백방(白放)의 의(議)를 올렸으나 오직 서용보(徐龍輔)만이 불가함을 고집하여, 용(鏞)은 장기현으로 정배되고, 전(銓)은 신지도(薪智島) 로 정배되었다.

가을에 황사영(黃嗣永)이 체포되자, 악인 홍희운.이기경 등이 갖은 계책으로 용(鏞)을 죽이기를 도모하여 조지(朝旨) 를 얻으니,  용(鏞)과  전(銓)이 또 체포되었다. 일을 안찰한 결과, 황사영과 관련된 정상이 없으므로 옥사가 또 성립되지 않았다. 태비(太妃) 작처(酌處)를 입어 용(鏞)은 강진현(康津縣)으로, 전(銓)은 흑산도(黑山島)로 정배되었다.

계해년(순조3, 1803) 겨울에 태비가 용을 석방하도록 명하였는데, 상신(相信) 서용보가 그를 저지하였다. 경오년(순조10, 1810) 가을에 아들 학연(學淵)의 명원(鳴寃)으로 방축 향리(放逐 鄕里)를 명하였으나 당시 대계(臺啓)가 있음으로 인하여 금부(禁府)에서 이를 시행하지 않았다. 그 뒤 9년만인 무인년(순조18, 1818) 가을에 비로소 향리로 돌아왔다. 기묘년 가을에 조정 논의가 다시 용을 등용하여 백성을 편안히 하려 하였는데, 서용보가 또 저지하였다.

용(鏞)이 적소(謫所)에 있은지 18년 동안 경전에 전심하여 <시(詩)>.<서(書)>.<예(禮)>..<악(樂)>..<역(易)>. <춘추(春秋)> 및 사서(四書)의 제설(諸說)에 대해 저술한 것이 모두 2백30권이니, 정밀히 연구하고 오묘하게 깨쳐서 성인의 본지(本旨)를 얻었으며, 시문(詩文)을 역은 것이 모두 70권이니 조정에 있을 때의 작품이 많았다. 국가의 전장(典章)및 목민(牧民). 안옥(按獄).무비.(武備).강역(疆域)의 일과 의약(醫藥).문자(文字)의 분변 등을 잡찬(雜纂)한 것이 거의 2백권이니, 모두 성인의 경(經)에 근본하였으되 시의(時宜) 에 적합하도록 힘썼다. 이것이 없어지지 않으면 혹 채용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내가 포의(布衣)로 임금의 지우(知遇)를 입어, 정조대왕의 총애와 가장(嘉漿) 이 동열에서 특이하였다. 그래서 전포에 상사(償賜)로 받은 서적.내구마(內廐馬)문피(文被) 및 진귀하고 기이한 물건 등은 이루다 적을 수 없을 정도다. 기밀에 참여하여 소회가 있으면 필찰(筆札)로 조진하도록 하여 모두 즉석에서 들어주셨다. 항상 규장각.홍문관에 있으면서 사적을 교정하였는데 직무의 일로 독려하고 꾸짖지 않으셨다. 밤마다 진차(珍饌) 을 내려 배불리 먹여주시고 무릇 내부의 비장된 전적을 각감(閣監)을 통하여 보기를 청하면 허락해 주셨으니, 모두 특이한 예우다.

그 사람됨이 선(善)을 즐기고 옛것을 좋아하며 행위에 과단성이 있었는데 마침내 화를 당하였으니 운명이다. 평생 죄가 하도 많아 허물과 뉘우침이 마음 속에 쌓였었다. 금년에 이르러 임오녀(순조22, 1822년)을 다시 만나니 세상에서 이른바 회갑으로 다시 태어난 듯한 느낌이다. 마침내 긴치 않은 일을 씻어버리고 밤낮으로 성찰하여 하늘이 부여한 본성을 회복한다면 지금부터 죽을 때 까지는 거의 어그러짐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정씨(丁氏)는 본관이 압해(押海)이다. 고려 말기 백천에 살았는데 우리 조정이 개국한 뒤로 한양에 살았다. 처음 벼슬한 할아버지는 교리(敎理) 자급(子伋)이다. 이로부터 계승하여 부재학 수강(壽崗), 병조판서 옥형(玉亨), 좌찬성 용두, 대사헌 윤복, 관찰사 호선, 교리 언벽, 병참의 시윤이 모두 옥당에 들어갔다. 그 뒤로는 시운이 비색하여 마현(馬縣)으로 옮겨 거주하였는데 3대를 모두 포의로 마쳤다. 고조의 휘는 도태, 증조의 휘는 향신, 조부의 휘는 지해인데 오직 중조께만 진사를 하였다.

홍씨(洪氏)는 6남3녀를 날았는데 3분의 2가 요사(夭死)하였고 오직 2남 1녀만 성장하였다. 아들은 학연(學淵)과 학유(學遊) 이고, 딸은 윤창모(尹昌謨) 에게 출가하였다.

집 동산의 북쪽 언덕에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자리를 잡으니 평소 바라던 대로였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임금의 총애를 입어 금밀(近密)에 들어갔네
임금의 복심(腹心)이 되어 조석으로 모셨도다
하늘의 총애를 입어 우충(愚衷)이 열리었네
육경(六經)을 정연(精硏)하여 미묘한 이치를 깨치고 통했도다
소인이 해성 해치니 하늘이 너를 옥성(玉成)시켰네
거두어 간직하고 장차 훨훨 노닌다. 

 

 

 

목민심서 (牧民心書)


군자의 학(學)은 수신이 그 반이요 나머지 반은 목민인 것이다. 성인의 시대가 이미 멀어졌고 그 말씀도 없어져서 그 도가 점점 어두워 졌으니, 오늘날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은 오직 거두어 들이는데만 급급하고, 백성을 기를 바는 알지 못한다. 이 때문에 하민(下民)들은 여위고 시달리고, 시들고 병들어 서로 쓰러져 진구렁을 메우는데, 그들을 기른다는 자는 바야흐로 고운 옷과 맛있는 음식으로 자기만 살찌우고 있으니 어찌 슬프지아니한가. 이것은 진실로 내 덕을 쌓기 위한 것이요, 어찌 꼭 목민에만 한정한 것이겠는가. '심서(心書)'라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목민할 마음은 있으나 몸소 싱행할 수 없기 때문에 '심서'라 이름한 것이다.  < 목민심서 서문, 1321년 > 

 

 

 

여유당 수국과 함께 달빛 산책

 

P1주차장 -> 달, 수국(꽃) 조명  (현위치)  ->  정약용선생의 시구 -> 한강전망대 -> 수국(꽃) 조명-> 강변조명 -> 정자 쉼터 -> 달, 수국(꽃) 조명 -> P2 주차장.

 

 

 

밤나무집

 

 

언덕cafe, 대가농원

 

 

다산정원

 

 

인류세

기후변화의 시대

2022. 05. 04 WED ~ 09.12 MON,

 

 

 

 

대가농원

 

 

↑  언덕CAFE 주차장

 

 

다산생태공원

 

 

" 여보게 달을 보고

술을 마시고 싶으면,

달이 뜬 오늘밤을

놓치지 말게 "

 

< 달밤에 술마시기 > 중

 

 

 

" 도시락 밥 표주박 물

넉넉하지는 않지만

이 인생 그래도 

즐길만 하네"

 

< 셋집에 살면서 짓다> 중.

 

 

" 어찌 바람이

일부러 그랬겠는가

바람이 글고 나는 옳다

따지지 말자 "

 

< 뱃사공의 탄식 > 중.

 

 

 

한강전망대

 

 

호수 건너  경기 광주시 남종면 귀여리 팔당물안개공원,

중앙의  높은 산 해협산(527.7m), 왼쪽 높은 봉우리, 정암산(406.4m).

 

 

 

호수 건너 경기 광주시 남종면 귀여리 방향

 

 

오른쪽 하얀 경기도 수자원본부 건물 ( 9F, 팔당전망대)

 

 

다산생태공원 전망대 동영상

 

 

하얀 건물은 팔당전망대, 그리고 호수 가운데 오른쪽의  소내섬.

 

 

 

 

다산생태공원 전망대 동영상

 

 

그네타기

 

 

가을 억새

 

 

배다리를 건너며  過舟橋
across the bridge

작가: 방인군
크기: 4,500(가로) X 2,600(세로) X  2,900(높이) mm
재료: 슽[인레스, 우레탄페닝트, 고홍석, 화강암


정조를 위해 고안한 배다리(조운선)의 역사적 가치와 그의 사상 및 업적을 심미적으로 재구성하였다. 배다리를 건너는 듯한 이미지를 통해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고, 카메라 프레임 속 우리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게 작품으로 표현하였다.  

 

 

 

수월정

 

 

 

 

팔당호 동영상

 

 

다산 정약용 일대기

 

 

1762년( 1세)  - 남양주 마제마을에서 태어나다

1768년( 7)  - 4살 때에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고 7살 때부터 시를 지어 '신동'으로 이름을 날리다.
1777년(16) - 성호 이익의 <성호집>을 읽고 실학자가 되기로 마음 먹다.

 

 

 

 

1783년(22) - 성균관에 들어가 정조임금을 뵙다. 정약용의 학문과 사람됨을 알아본 정조가 그를 매우 총애하다.
1789년(28) - 정조임금이 아버지(사도세자) 묘소에 참배하러 가기 편리하도록 한강에 배다리(배를 나란히 엮어 강을 건널 수 있게 만든 다리)를 설계하다.  

 

 

 

 

1792년(31) - 거중기를 이용하여 화성을 쌓다. 공사비 4만냥을 아껴 백성들의 칭송을 받다.  
1794년(33) - 경기도의 암행어사가 되어 고통받는 백성들을 위해 탐관오리들을 잡아내다.

 

 

 

 

1799년(38) - 형참의가 되어, 과학수사관으로 활약하다.  

1801년(40) - 신유박해 때 모함에 빠져 모진 고문을 받고, 전라남도 강진으로 귀양가다.

 

 

 

 

1801~1818년(40~57) - 강진에서의 귀양생활. 제자를 가르치고, 학문을 연구하며, 국가 개혁을 주장하는 책을 펴내다.  
1822년(61) - 스스로 묘지명 (자신의 일생을 정리한 글)을 짓고, 여유당집 500권을 펴내다.
1836년(75) - 결혼한지 60년 되는 날에 고향 마재에서 눈을 감다.

 

 

 

둥근 달 모형

 

 

우천리 건너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 그리고

오른쪽 중간은 경안천 하류 팔당유입부

 

 

 

다산 정약용 선생의 저술

 

삼미자집(三眉子集): 
- 다산은 태어나면서 영특하여 4세에 한자를 익히고, 7세에 '산'이라는 한시를 지었다. 10세 이전에 지은 <삼미자집>이라는 문집이 잇었다고는 하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삼미는 정약용의 호이다. 어렸을 때 천연두를 앓아 오른쪽 눈썹에 흉터가 남아 눈썹이 세 개로 보인다 하여 삼미(三眉)라고 부렸다. 
마과회통(麻科會通):  
- 1798년(정조22)에 마진(홍역)을 다룬 의학서로 이헌길의 <마진기방>을 중심으로 중국의 많은 마진 전문서를 참고하여 저술하였다. 우리나라에 유행한 마진을 중심으로 하여 그 병증을 관찰하고 치료방법을 기술하였고 부록에 제너의 우두방을 소개하고 있다. 6권 6책.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
- 1811년 (순조11), 우리나라 강역에 관한 역사 지리서이다. 이 책은 고조선에서 발해에 이르기 까지 우리나라 강역의 역사를 각종 문헌에서 기록을 뽑아 고증하고, 자신의 견해를 첨부하여 그 내력을 자세히 밝히고 있다. 10권 3책.
역학서언(易學緖言):
- 주선 후기 강진에서의 유배생활을 할때 쓴 책으로 역학에 관한 여러 이론을 모아 해명하였다. 모두 22항목으로 이루어졌는데 <주역사전(周易四箋)>의 서론 구실을 하는 것으로 이를 '역학서언'이라는 제명으로 포괄하여 편집해 놓은 것이다. 1937년에 나온 <여유당전서( 與猶堂全書)> 에는 제45~48권까지 실려 있다. 4권2책.
민보의(民堡議):
- 1812년(순조12), 국토 방위 전략에 관해 자신의 견해를 밝힌 책으로, 조선 후기 속오군제(束五軍制)가 무노져 복원하기 힘든 상황에서  민간자치의 상비적인 방위체계를 구상한 자료이다. 민보군(民堡軍)이 민간을 주도한다는 점에서 관군과 구분되고, 전략요충지에 민보(民堡)를 설치하여 유사시에 대비해야 한다는 점에서 방위 체제의 새로운 구상이었다. 원래표지에는 <사암별집(俟蓭別集> 이라 되어있다. 5권.

악서고존(樂書孤存):
- 조선후기 우리나라의 음악이론과 악기에 대한 기록을 문헌적으로 고증한 이론서이다. 다섯갈래의 논문에서 율의 본질에 대한 해명으로부터 시작하여 율관제작에 관한 이론, 5음과 6율, 12율에 관한 이론, 악기 제작 사용법 등 넓은 범위에서 해박한 지식과 실천적 경험에 기초하여 음악이론의 과학적 입장을 천명하였다.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 전하고 있다. 12권 3책.
경세유표(經世遺表):
- 1817년 (순조17) 해배 1년 전에 지은 책으로, 원래 제목은 <방례초본>이다. 1표2서의 첫번째 작품으로 행정기구의 개편을 비롯하여 관제, 토지제도, 부세제도 등 조선의 모든 제도의 계획 원리를 제시한 책으로 부국강병을 이루는 것에 목표를 두고 저술하였다 44권 15책.
상의절요(喪儀節要):
- 1815~1817년에 상례(喪禮)를 간편하게 치르는데 필요한 중요사항을 엮은 책이다.  중국과 우리나라가 풍속이 다르고 성품이 달라서 회통(會通)하기가 어려움을 느껴 상례를 행하는데 손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요점을 추렸다. 1815년 겨울에 일가인 학가(學稼)가 아버지의 병환에 대한 처방을 부탁하여 이를 계기로 일가(一家)에 유용하게 쓰이게 바라면서 저술한 자료이다. 6권 2책.
목민심서(牧民心書):
- 1818년 (순조18) 목민관 , 수령이 지켜야할 지침을 밝히면서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한 책으로 48권 16책이다. 각 편은 6조로 나누어 72조로 편제되어 있다. 목민할 마음은 있으나 행할 수 없어서 마음에 둔다하여 '심서(心書)' 라고 하였다. 48권 16책.
아언각비(雅言覺非):
- 1819년(순조19), 국민의 언어.문자 생활을 바로 잡기 위하여 지은 책이다. 우리나라 어휘 450여개를 대상으로 중국의 고전이나 시문등을 상고 하여 그 변화와 잘못을 고증하고 있다. 치책은 총 200여 항목으로 나뉘어 바른 말로써, 그릇된 점을 깨닫게 한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3권 1책.   
흠흠신서(欽欽新書):
- 1822년(순조22)에 간행된 책으로 형사사건을 다루는 관리들의 자세에 관하여 적고 있다. 조선은 물론 청나라이 역대 모범적인 판례를 선별하여 해설과 비평을 담고 있으며, 살인사건 심리의 실무 지침서라 할 수 있다. 30권 10책.
여유당집(與猶堂集):
- 여유당이란, 다산이 마현에 있는 고향집에 건 당호(堂號)이다. 1800년(정조24) 국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고향으로 돌아와 형제들과 경전을 공부하며, 그곳의 당호를 '여유당'이라고 하였다. '여유'란 "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것처럼 신중하게 하고, 사방에서  나를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 듯 경계하라" 뜻으로 노자의 도덕경 15장에 나오는 말이다. 세상사와 자신에 대한 경계의 뜻이 담겨 있다. 다산이 자신의 문집을 '여유당집'이라고 한 것은 이때부터 경학에 관한 공부를 시작하였고, 강진 유배 시절 이에 대한 연구에 전심하였으며 , 고향으로 돌아온 이후 이를 다시 정리하였기 때문이다.   

 

 

 

 

멀리 하얀 경기도 수자원본부 건물, 팔당전망대 (9F)

 

팔당호 중간의  소내섬

 

 

팔당호 동영상

 

 

 

다산생태공원 동영상

 

 

멀리 뾰족한 봉우리, 예빈산

 

 

소내섬, 분원리, 퇴촌의 경안천 방향

 

 

<- 230m 조망대C, -> 수생식물원 100m, ↑ 조망대 A 30m

 

 

 

다산생태공원 동영상

 

 

앞의 쇠말산,  팔당댐 방향

이 산 넘어 토끼섬이 있으며, 팔당댐이 보인다. 

 

 

 

멀리 검단산, 이석리 방향

 

 

다산생태공원 동영상

 

 

호수 건너편 검단산(657M)
경기 하남시 윗배알미동 k-WATER 방향. 검단산 등산로가 있음.

 

 

 

다산길 
시점 <- 1.66km   ||   -> 1.59km  종점

 

 

다산길 안내도

 

 

<- 30m 연꽃단지,  조망대A 500m ↘,  생태습지 160m ,  숲속쉼터 130m  ->

 

 

연밭

 

 

 

 

 

P1 주차장 방향, &  새로 조성한 주차장

 

 

다산대학 & 토마당

 

 

 

P1 주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