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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안산(295.9m, 봉수대)- ( 2023.03.02 )

by the road of Wind. 2023. 3. 2.

①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안산 (295.9m, 봉수대)

- ( 2023.03.02 )

 

-  < 서대문형무소역사관 >:

 

어제는 삼일절이었다. 1919년 3월 1일 정오를 기하여 3·1운동독립 정신을 세계만방에 선언하고 온 민족이 총궐기하여 평화적인 시위를 전개한 날이다. 그래서 오늘은 그날의 독립투사들이 갇혀 처절한 고문과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민족 앞에 장렬히 산화한 장소인 일제 치하의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돌아보았다. 서대문형무소를 돌아볼 때는 고문 도구들을 보면서 몸서리가 쳐졌다. 잔혹한 고문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죽어간 선열들의 고귀한 정신에 머리가 숙여졌다.

 

서대문형무소 안내도

 

< 상하, 좌우 순서 >

 

시구문  사형장  추모공간  우물  한센병사 공작사
옥사터   격벽장  9옥사  중앙사  12옥사
창고  전시관(보안과청사)  취사장(뮤지엄삽)

 여옥사 망루

담장  정문  출구

 

 

서대문형무소

1908년 일제에 의해 경성감옥으로 개소되어 1945년 해방까지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된 식민지 근대 감옥이다. 해방 이후에도 1987년까지 서울구치소로 이용되면서 민주화 인사들이 수감되어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을 안고 있는 공간이다. 1987년,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하면서 서대문구에서 성역화 사업을 거쳐 1998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개관했다 (국가사적 제324호). 과거의 역사를 교훈으로 삼고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가의 자유와 평화를 향한 신념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역사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의 어제와 오늘:

 

1908.10.19: - 경성감옥 개소

1912.09.03: - 서대문감옥

1923.05.05: - 서대문형무소

1945.11.21: - 서울형무소

1961.12.23: - 서울교도소

1967.07.07: - 서울구치소

1998.11.05: -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개관

 

- 서대문형무소역사관.

 

 

●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서대문형무소역사관

 

* 전시관(보안과청사) 1층:   보안과청사, 형무소역사실, 영상실. 

* 전시관 2층: 민족저항실 1, 민족저항실 2, 민족저항실 3. 

* 전시관 지하: 조사실, 취조실.

* 중앙사: 파놉티콘(panoticon), 간수사무소형무소의 의-식-주.

* 옥사: 12옥사, 11옥사, 10옥사.

* 공작사: 공장노역, 노역영상, 노역전시.

* 추모공간, * 사형장, * 시구문, *격벽장, * 창고,

* 여옥사, * 망루, * 담장, * 취사장, * 뮤지엄샵, * 독립관

 

 

서울 구 서대문형무소

지정번호: 사적 제324호


옛 서대문형무소는 1907년 일제가 한국의 애국지사들을 투옥하기 위해 만든 감옥이다. 옛 서울 서대문형무소의 처음 이름은 경성감옥이었는데, 서대문감옥, 서대문형무소, 경성형무소, 서울형무소,  서울교도소 등으로 바뀌다가 1967년에 서울구치소가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를 비롯하여 애국시민, 학생들이 투옥되었고, 광복 후에는 반민족행위자와 친일 세력들이 대거 수용되었다. 이후 4.9, 5.16, 군사정군 시기를 거치면서 많은 시국사범들이 수감되었다.  1987년에 옛 서울 구치소를 경기도 의왕시로 옮길 때 옥사는 모두 15개 동이었다. 이 가운데 역사성과 보존가치를 고려하여 제9~13옥사, 나병사(癩病舍), 사형장 등을 남겨 두었다. 1988년 부터 공원 만들기 시작하여 1992년 '서대문 독립공원'으로 부르고 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서대문형무소 역사전시관

 

 

아, 태극기만 보아도 마음이 설랜다.

 

붉은 벽돌의 색갈에서 유대인 학살의 저 악명 높은 독일의 아우스비츠 수용소 같은 이미지가 느껴진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출입문

 

> 관람시간:

- 여름철 (3월 - 10월): 9:30 ~ 18:00.

- 겨울철 (11월 - 2월): 9:30 ~ 17:00.

* 정기휴관: 매주 월요일 (공휴일인 경우 그 다음날), 1월 1일, 설날, 추석날.

 

>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관람료:

일반:  개인 3,000원,  단체(20인이상) 2,400원.  ( 19세~64세 )
청소년,군인(병장이하):  개인 1,500원,  단체(20인이상) 1,200원. ( 13세~18세 )
어린이:  개인 1,000원,  단체(20인이상) 800원. ( 7세~12세 )
무료:  6세이하, 65세 이상, 장애인 및 국가유공자 (장애인수처첩 및 국가유공자 소지자).


* 군인 경우 병자 이하(의무복무자)의 제복착용자(전투경찰,의무경찰 포함)에 한합니다.
* 서대문 거주 주민(신분증 소지자), 관내학교(초.중.고)는 50% 할인됩니다. (중복할인 불가)
* 서대문자연사박물관 입장권 소지자는 20% 할인됩니다. (단, 개인관람객에 한함)

 

전시해설: 선착순 예약제 운영 (회차당 20인)
주차안내: 공간협소, 대중교통 이용 권장.

 

 

자유와 평화를 향한 80년

1908 ~ 1987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고문과 테러 공포의 상징


서대문형무소


서대문형무소는 대한제국 말기, 일제에 의해 1908년 10월 21일 경성감옥으로 개소되었다. 개소 당시 전국 최대 규모의 근대식 감옥으로, 국권을 회복하고자 맞서 싸운 한국인을 저지하고 탄압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일제강점기에는 한국민에 대한 억압과 처벌의 장소로 이용되어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수감.순국하였으며,  광복 이후에는  독재정권에 의해 많은 민주화 운동가들이 수감되어 고난을 치렀던 곳이다. 이곳 서대문형무소는 1908년 부터 1987년까지 80여년의 감옥 운영기간 동안 식민 권력과 독재정권에 항거하여 자유와 평화를 위해 수많은 희생이 있었던 역사의 현장이다.

 

 

서대문형무소의 독립운동

 

개소 초기 경성감옥의 수감인원은 500여 명으로, 일제 침략에 무력으로 맞섰던 의병들이 주로 수감되었고, 1910년 강제합방 이후에는 의열투쟁과 비밀 결사 요인들이 주로 수감되었다. 1919년 3.1독립마세운동으로 수감자가 급격히 늘어나 민족대표 33인을 비롯하여 3,000여 명에 육박하는 독립운동가가 수감되었다. 이후 1945년 광복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내비밀결사, 각종 의열투쟁, 해외 무장 투쟁, 사회.문화.노동.농민.학생운동 등의 활동을 펼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되었고 그 가운데 상당수가 순국하여 대한민국 독립운동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 

 

연도말 전국 재감자 총수 (단위: 명)


1908- 2,424 (경성감옥 개소) /  1909- 6,026 / 1910- 7,021 (강제합병)/ 1911- 9,599 (105인 사건)/ 1912- 9,581/ 1913- 9,914/  1914- 9,474/  1915- 9,800/  1916- 10,869/  1917-12,261/  1918- 11,609/  1919- 15,161 (3.1 독립만세운동)/  1920- 14,428/  1921- 16,695/ 1922- 15,091/   1923- 13,709/  1924- 12,825/  1925- 13,106/  1926- 13,963 (6.10만세운동)/  1927- 13,751/ 1928- 14,257/  1929- 15,866/  1930- 17,215 (간도공산당운동)/ 1931- 18,353/ 1932- 18,864/ 1933- 19,090/ 1934- 19,939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1935- 18,414/ 1936- 18,540/ 1937- 19,358/ 1938- 19,328/ 1939- 19,398/ 1940- 19,254/  1941- 20,206 (조선사상범 예방구금령)/ 1942- 22,722/  1943- 23,532.

 

 

 

일제강점기 서대문형무소배치도

 

 

거대한 감옥, 식민지

 

일제는 한국의 식민 지배를 위해 한국민을 감금하고 탄압할 시설을 필요로 하였다. 이에 1908년 전국의 8개 주요 도시에 본감옥과 그 산하 8개 도시에 분감옥을 설치하여 전국 16개소의 감옥을 설치 운영하였다. 1910년 강제합병 직후 21개소, 1920년 이후에는 평균 30여 개소 내외의 감옥을 설치 운영하였다. 이들 감옥은 전국 철도.도로망을 따라 주요 도시에 설치되었고, 이를 통해 일제는 식민지 한국 전역을 거대한 하나의 감옥으로 만들고 폭압적인 식민지배를 자행하였다. 

본감. 분감 설치 현황 (1908년):

본감(1908.4.11) 경성  공주 함흥 평양 해주 대구 진주 광주
분감(1908.11.20)  인천/춘천 청주 경성/원산 의주     부산 전주

 

 

 

애자(일제강점기),   창문 추(1920년대),  용마루 기와 (1920년대

 

 

망루 계단 부재

 

 

전국 형무소 배치도 (1936)

 

청진, 함흥, 원산, 신의주, 평양, 진남포, 굴산포, 서흥, 해주, 개성, 춘천, 

서대문, 경성, 인천, 공주, 청주, 대전, 전주, 군산, 광주, 목포, 

김천, 안동, 대구, 부산, 마산, 진주, 소록도

 

서대문감옥 청사 신축설계도 (1919년)

 

 

민족저항실 1

 

민족의 저항,

독립운동

 

대한제국 말기 우리 민족은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을 전개하여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였고, 1910년 강제합병으로 나라를 잃은 후에도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거세게 전 민족이 독립운동을 펼쳤다. 1910-1945년에 걸친 일제강점기 동안 한국민은 의열투쟁, 비밀결사 조직, 해외 독립군 기지 창건, 독립군 양성, 3.1독립만세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6.10만세운동, 대일 무력투쟁 및 사회.문화.노동.농민.학생운동 등 다양한 방법의 독립운동으로 나라를 되찾기 위해 싸웠다. 이곳 민족저항실에서는  이 과정 속에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또는 순국하였던 독립운동가들과 관련된 주요사건 및 활동을 중심으로 전시하였다.

 

 

이강년 의병장 옥중서신 (1908년)

 

 

순국 의병장

 

이강년 의병장 (1858-1908)- 1896년 1월 문경에서 거의. 유인석 의병부대 유격장으로 활약.
허위 의병장(1854-1908)- 1896년 김산(현 김천)에서 의병 거의.
이인영 의병장(1867-1909)- 1895년 춘천.양구 지역에서 의병 거의.
이은진 의병장 (1878-1909): 1907년 9월 원주 일대에서 의병 거의.

 

 

의병 부대 주활동 지역 을미의병(1895) 봉기지,  을사의병(1905) 봉기지,   정미의병(1907) 봉기지

 

 

13도 창의군
서울진공작전 (1908년)
이인영.  허휘.  이강년.  이은찬

** 지역별 -- 의병장:
강계-- 김이연. 김봉헌. 김창수
의주-- 조상학
신아산-- 이범윤
삼수-- 홍범도
갑산--차도선
장연--이진용
한성-- 의병 연합부대의 서울진공 작전 (1908)
춘천--이소응
원주--이인영
여주--민긍호
홍성--민종식.김복한
제천--유인석
제천 이춘영
평해--신돌석
문경--이강년
영천--정용기
성주--허위
진주--노응규
태인--최익현.임병찬
광주--기우만


곽한일 의병장 칼 (일제강점기)

 

 

목숨으로 지킨, 민족정신

 

 

민족저항실 2

 

 

유관순 열사

 

 

한민족의 독립선언

3.1독립만세운동

 

민족저항실 3

 

 

대한민국임시정부 &  군자금모집

 

 

제2의 만세운동

6.10 만세운동

 

신간회

 

 

수형기록표

 

 

유관순

 

조선어학회사건 & 성서조선

 

 

되찾은 조국, 광목의 환희

 

 

시구문- 시체 나가는 문

 

 

물고문 모습

 

물고문

 

강제로 수조에 머리를 집어넣거나, 코나 입에 물을 마구 들이 부어 호흡을 곤란하게 하여 고통을 주었던 고문 방법. 심지어는 폐에 물이 차서 흉막염에 걸려 매우 고통스럽게 사망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다.

 

  

지하고문실

 

 

임시구금실

 

손톱찌르기 고문

 

가늘고 날카로운 꼬챙이를 손톱 밑으로 찔러 고통을 주었던 고문 방법. 심할 경우 손톱 뿐 아니라 입 속 까지 마구 찔러 고통을 주기도 했으며. 심지어 그 고통으로 기절하는 경우도 있었다. 

 

 

고문의 흔적과 고통

 

 

고문의 기록

 

권영준, <형정반세기>

...(전략) 얼마 뒤 잡혀 들어온 공산당원 송봉우는 이른바 '베행기 태우기'를 당했다. 비행기를 태운다는 말은 두손을 뒤로 수갑을 채워 묶고 여기에 밧줄을 이어 천정에 매어다는 것으로 보통 한두 시간씩  계속하곤 하였다. 이렇게 하고난 뒤 뒤로 묶여 굳어진 팔을 잘못 내리면 곧장 부러지곤 했기 때문에 이 때에는 두팔을 전문으로 내려주는 잡역이 옆에서 거들어 주었다. 이 밖에도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된 것으로 벗겨놀고 가죽채찍으로 매질하는 것, 의자에 묶어놓고 고개를 뒤로 젖힌 뒤 코에 고춧물을 붓는다든가,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끌리고 구둣발로 짓밟는 등의 방법이 있었다. (후략) ...

고문경관 고소 사건 (1927년)

6.10 만세 운동과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있던
권오설, 강달영 등은 1927년 10월 16일 종로경찰서에서 취조를 받는 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아 이에 항의하여 고등계 주임 미와를 고소하였다. 일본의 식민통치기관 가운데 하나인 종로경찰서의 주요간부를 고소한 이 사건은 큰 화재가 되엇으나 일제는 부당한 재판 끝에 증거불충분으로 미와에게 무죄를 선고하였다.   

 

 

쇠도리깨, 태(1912녀)

 

 

지하독방

 

취조 후 옥사로 이동하기 전 감금했던 곳. 곳곳에서 들려오는 고통의 비명 소리와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고문의 공포로 휩싸인 공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지하독방에서도 독립운동가는 만세 소리를 멈추지 않았고 독립의 다짐을 되새겼다. 

 

 

벽관고문

 

올짝달싸할 수 엇이 좁은 공간에 사람을 감금하여 앉을 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고통을 주었던 고문도구. 벽에 서있는 관이라하여 '벽관'이라 이름 붙여졌다.

 

아, 태극기!!!

 

 

한센병사

 

 

사각연못 

 

 

1945 -- 기억 -- 1987

 

 

기억 1945 - 1987

 

1945. 8. 15 광복 /   1945. 11. 21 서울형무소 /  1961.12.23  서울교도소 /  1967. 7. 7 서울교도소 

1987. 11. 15 서울구치소 이전/  1988. 2.27 국가사적지정 /  1992.8.15 독립공원 개장 / 

1998.11.5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개관

 

독립지사

기억공간

박상진

 

 

감방환기구

 

 

옥사 내벽마감 흔적

 

 

서대문형무소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