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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구릅/일상들 ( life )

① 인천 차이나타운, 자유공원, 월미도- ( 2023.03.10 )

by the road of Wind. 2023. 3. 11.

인천 차이나타운, 자유공원, 월미도

- ( 2023.03.10 )

 

- 《 차이나타운, 자유공원 》: 

 

차이나타운

 

인천 차이나타운은 인천역 앞 자유공원 (응봉산) 주변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1884년 최초 조계지가 설정될 당시 현재의 1패루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기 때문에 무역업을 하기 가장 좋은 조건인 무역항 인근에 자리를 잡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1884년 당시 조성된 조계지 경계 계단을 중심으로 오른쪽은 일본 조계지, 왼쪽은 중국 조계지로 구획하였다. 그 구획선을 따라 건물의 양식도 판이하게 다르다. 일본 조계지 쪽으로는 일본 양식의 은행건물, (구)창고건물 등이 있으며 이를 활용한 박물관 전시관 등이 자리 잡고 있다. 반면에 조계지 경계 계단의 좌측에 위치한 청국 조계지 구역은 중국 느낌이 물씬 난다. 과거 청국영사관 터인천 화교협회 건물이 자리 잡고 있으며, 뒷편에는 구 영사관의 회의청중화회관이 위치해 있다. 또한 언제나 대만 국기가 나부끼는 화교학교가 있고, 중국음식점, 중국빵집, 만두집, 잡화점, 의선당 등이 위치한 중화가가 자리잡고 있다. 청국 조계지 내에는 또한 3개의 패루한중문화회관, 중국어마을 문화체험관, 그리고 짜장면 박물관 등이 위치해 있다. 이 구역에는 화교들도 많이 거주하고 있다. 이렇듯 인천 차이나타운 130년을 살아온 화교들의 이야기가 있고, 건물 등의 흔적도 여전히 남아 있으며, 현재까지도 과거의 공간을 활용하고 해당 공간에서 거주하며 생업을 이어가고 있는 이른바 생태박물관이다.

 

1882년 - 임오군란때, 조선정부의 참전요청에 의한 청국 군인의 입국 (군함 3척, 상선 2척, 청국군인 3천 명 주둔. 군수보급품 위한 상인 40명; 한국 화교의 시작)
1883년 - 인천 개항. 일본조계지 설정
1884년 - 청국조계지 설정. 돈벌이가 잘되는 곳으로 소문이 퍼져 많은 산동인들이 서해를 건너옴.
1883년 - 48명이던 화교가 1년 후에는 5배에 가까운 235명으로 급증함. 중국의 비단, 광목, 농수산품 및 경공업품 등을 수입, 조선의 사금 등을 중국에 보내어 큰 이득을 거둠. 장기 거주를 목적으로 인천에 상가 건물이나 주거할 집을 짓기 위해 중국식 건축에 필요한 목수, 기와공, 미장공들도 인천에 들어옴.
1887년 - 농공화교 이주 시작. 조선에 없던 양파, 홍당무, 토마토 등 재배. 경동, 신포동, 용현동, 주안, 부평지역까지 영역을 확대해감
1896년 - 청일전쟁 패전 후, 군인 무역업자를 비롯한 많은 화교들 귀국.
1940년대 - 정치적 혼란. 이 시기에 산둥지역 농민들 인천으로 대거 이주. ‘생계형 화교(농공화교)
1948년 - 광복, 대한민국 정부 수립. 화교 견제정책 실시. 외국인 출입 규제 (중국행 차질 무역업 타격), 외국인 외환거래 규제(은행가의 3배가 넘는 가격으로 암시장에서 외환거래)
1950년대 - 외래상품 불법수입 규제를 목적으로 창고 봉쇄 조치. 물건을 대량으로 구입하여 적절 한 시기에 시장에 내놓아 이득을 취하던 화교 무역업에 큰 타격. 한국전쟁 발발. 종전 후, 중공군의 전쟁참여로 인해 화교민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 확대. 종전 후, 공산국가인 중국의 국적을 인정하지 않아, 대만 국적으로 전환
1961년 - 외국인 토지 소유 금지: 채소농사를 하던 농토, 음식점을 운영하던 점포를 본인 명의로 소유할 수 없게 됨. 한국인의 명의를 빌리거나 한국인 부인의 명의로 재산 등록. 사기 및 배신 등으로 재산을 잃은 경우도 있음.
1962년 - 화폐 개혁. 1953년에 이은 두번째 화폐 개혁. 화교들은 언제든 본국으로 떠날 생각으로 재산을 현금으로 보유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음. 일정액 이상은 새 돈으로 교환해 주지 않아, 손실을 입기도 함.
1968년 - 외국인 토지소유 제한. 1961년의 금지에서 완화. 주거용 200평, 상업용 50평 이내의 토지를 취득허락 후 소유할 수 있게 되었음.
1970년대 - 짜장면 값 동결. 절미운동. 중국집에서만 쌀밥을 못팔게 함. 볶음밥 없는 중국집들 성행
1992년 - 대만과의 단교, 중국과의 수교. 중국 보따리 장사의 활로가 열림.
1998년 - 외국인 토지 소유 제한 해제.
2002년 - 영주비자(F5) 발급: 영주권을 인정받게 됨.
2005년 - 선거법 개정: 화교들 지방선거권 부여. 2000년 대, 인천 차이나타운 활성화 계획 수립.

- 국립민속박물관

 

 

 자유공원:   

 

자유공원인천항 개항 뒤인 1888년 외국인 거류민단에서 관리·운영하여 당시 시민들은 이를 ‘각국공원‘ 이라 불렀고, 그 뒤 일본의 세력이 커지면서 1914년 각국 거류지의 철폐와 함께 공원 관리권이 인천부로 이관되자 그때부터는 서공원으로 불렸습니다. 1945년 해방 후에는 만국공원으로 불렸으며,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한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세워진 1957년 10월 3일부터 자유공원으로 개칭되었습니다.

응봉산 전체를 자유공원이라 부르며, 맥아더 장군 동상과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을 비롯해 자연보호헌장탑, 충혼탑, 석정루 등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석정루에 오르면 인천항과 월미산 북성포구 등이 한 눈에 들어오는 장관이 펼쳐집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인 자유공원은 인천시민뿐만 아니라 각 지역에서 찾아올 만큼 사계절 늘 아름다운 풍경으로 시민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인천 중구 시가지와 인천항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시민의 휴식·위락 장소이며 4월에는 ‘자유공원 벚꽃축제’가 열리고, 미술대회·글짓기대회 같은 각종 행사도 자주 열리는 인천의 명소입니다.

- 인천시 중구 

 

 

 산   행 : 걸음수 4,294 steps, 거리 3.0km, 소모열량 142 kcal, 소요시간 00:50 hrs, 속도 3.6 km/h, 기온 16

 코   스 (1호선) 인천역 - 차이나타운 - 중화가(1패루)  -  황제의 계단 -  선린문 - 자유공원 ( 한미수교100년 탑 - 맥아더장군 동상 ) - 인천시민애집 -  공자상 - 청일조계지 경계계단 - 인천개항박물관 - 인천아트 플렛폼 -- 인화문 - (기독교) 선교100년기념탑 - 월미바다역 (인천역).

 

 

 

1호선 인천역

 

한국철도 탄생역

 

 

파란 건물, 월미바다열차역 (출발점)

 

 

 차이나타운

 

중화가 ( 1패루 )

 

옛날에는 여기까지 바다물이 들어왔으며, 중국에서 청국 군인들과 함께 들어온 화교들이

무역상을 하기 위하여 이곳에 둥지를 잡아 오늘날 화교들이 밀집한 인천 차이나타운이 형성되었다. 

 

 

中華街 중화가...." 차이나타운 거리"

 

 

차이나타운 거리,  ↑ 자유공원 가는 길

 

앗,  中華苑(중화원), 032-777-8630

 

SBS 생활의 달인, 200회 특집 최강달인, 유명한 쉐프 

 

이 집에서 착한 가격의 맛있는 짜장면으로 점심 식사.
( 짜장 6,000원, 짬뽕 7,000원 )

 

 

중화원 

자장면 6,000, 짬뽕 7,000, 잡탕밥 15,000, 삼선짬뽕 9,500, 삼선볶음밥 9,000

 

 

중화원 내부 고량주 등..

 

 福納財拾(복납재습)

" 복이 들어와 재산이 모이다 "

 

"召財進寶(소재진보)" 의 합성(合成) 글씨

" 재물을 불러 보배로 나아간다 (만든다)  "

 

 

이 짜장면 가격 착하고 맛 아주 좋습니다!!!

 

C27 cheese cake & coffee

인천역(월미바다역) 차이나타운, 월미도 주변 지도

 

경성 의상실 흑백사진관

셀프스튜디오 무료 이용

 

 

共和春 (공화춘)

함께 화합을 이루어 따뜻한 봄을 만들자는 뜻일까?

 

연경대반점

앗, 낮 익은 태런트들...귀여운 아이들...예쁜 청춘남여...

 

차이나타운 황제의 계단

 

차이나타운에서 조성한 관광체험형 계단으로서 중국의 절경을 체험하며 복을 얻어가는 시민 체험형 계단

 

1F - 왕의 길
2F - 황제의 알형
3F - 무릉도원의 여행
4F - 만리장성의 여정
5F - 도화원의 복숭아

즐거운이 가득한 차이나타운에서 황실의 기운과 복을 얻어가시길 기원합니다. 

 

As a tourist experience-type staircase built in ChiaTown, it is a citizen-participating staircase where you can experience Chinese attaractions and get good fortune.

1f - King's Road
2f - Meeting the emperor
3f - Jouney of the fantasy valley
4f - Journey of the Gteat Wall
5f - Peach in Flower garden

We hope thal you will receive the impoerial energt and good foutune im ChiaTown, which is full of joy.

 

 

善隣門 선린문 

 

자유공원 가는 계단 길

 

차이나타운 방향

 

삼국지 설명 벽화  

 

초한지 설명 벽화

 

 

▶ 자유공원:

 

자유공원 가는 길

 

자유공원:   인천 중구 응봉산 전체가 자유공원이다. 자유공원은 고종 25년(1888)에 조성된 대한민국 최초 서구식 공원이다. 공원설계도에는 미.영.러.청.일 등 각 국 외교관들이 공동 서명하고 러시아 토목기사가 측량하여 조성된 공원이다. 처음에는 만국공원이라 불렀다가 1957년 개천절 맥아더 동상을 세우고 '자유공원'으로 부르게 되었다. 자유공원에는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의 동상, 한미수교 100주년 탑, 인천학도의용대호국기념탑, 제물포구락부 등이 있다. 자유공원 석정루 2층 누각에 올라 인천항과 월미도가 조망되는데 한 폭의 수채화다. 그 풍광이 청명한 하늘과 함께 어우러져 시원스럽다. 자유공원에는 차이나타운일제강점기 시대의 일본식 건물들이 그대로 보전되어 있다. 지하철(1호선) 종점 인천역에서 하차하여 접근성이 좋다. 

 

 

<- 240,m 삼국지 벽화,   <- 80m 자유공원, 

↗ 월미바다역 500m, 인천역 350m,  

↙ 353m 인천기상대, ↙ 200m 송월동 동화마을 

 

 

숲속 도서관, 월미공원 정상 가는 길

 

 팔각정 쉼터

 

운동 쉼터

 

한미수교 100주년 탑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


한미수호통상조약은 1882년 5월 22일 대조선국 전권대관 신헌 대미국 전권대신 로버트 윌슨 슈펠트와의 사이에 제물포 화도진 언덕에서 조인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그로부터 전개되는 모든 한미 양국관계의 발전에 가장 기본적이며 역사적인 시발점이 되었다. 과거 100년 동안 한미 양국은 여러 내외 정세의 변화와 굴절에 대응하면서 정치 외교 걍제 군사 문화에 걸쳐 양국간의 우호 친선과 공동의 이익을 위한 협력관계를 추구 유지해 왔고 발전 시켜 왔다. 


특히 자유와 평화 정의와 인도 신의와 평등의 추구를 통한 세계 인류 공통의 이상과 목표의 실현을 위해서 보다 더 긴밀하고 공고한 유대와 협력을 위해서 양국은 뜨거운 혈맹의 관계를 맺기에 이르렀다. 한미수호조약 체결100주년을 맞이하여 그 역사적 의의를 재음미하고 앞으로의 양국 국민의 상호 신뢰와 우호 협력관계의 계속적인 발전과 전진을 희구하는 표징으로서 여기 유서깊은 이 고장에 기념탑을 탑을 세웠다.    

 

1982년 12월 14일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cafe 023, 편의점

 

자유공원 광장

 

자유공원 광장 동영상

 

인천 내항 & 월미도

 

배의 정박에 사용하는 앵커(Anchor) 조형물

 

 

자유수호의 등대인가?

 

앗, 우리나라 구국의 영웅, 맥아더 장군

 

 

세계 전사에 빛나는 인천상륙작전 맥아더 장군

 

'

맥아더장군 동상 건립문

 

정의에는 국경이 없고 투쟁에는 산도 물도 거침이 없다. 이러한 정의로써 이러한 투쟁을 감행하여 자유세계의 노선 위에 승리를 가져오고 그리하여 만인의 감격과  찬양을 한 몸에 두른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여기 이 동상의 주인공 다그라스 맥아더 장군이다. 그는 1880년 1월 26일 아-더 맥아더 장군의 둘때 아들로 미국에서 태어나서 소위로 출발하여 오성장군의 칭호를 받음에 이르기 까지 무릇 반세기에 걸쳐 가지가지 혁혁한 무공을 세운 이로서 일본의 항복을 받음과 동시에 점령군 총사령관으로 패전 일본에 주재케 되었다. 일본이 이같이 항복함으로써 한국은 해방되었으나 불행히 국토가 비참하게 양단되었으며 설상가상으로 1950년 6월 25일 공산도배가 북으로 부터 대한민국을 침입하였을 때 즉시 미국 정부는 한국 구원을 결정하고 맥아더 장군에게 공산침략 항전에 참가한 모든 군대를 지휘하도록 명령하였다. 그의 탁월한 천재가 발휘된 것은 바로 이곳 인천에서 였다. 그 호매한 식견으로 안출된 거의 기적적인 인천상륙작전1950년 9월15일에 장군의 진두지휘 아래 결행하여 그 결과로 전세가 일전하여 자유의 승리와 대한민국의 구원을 가져왔었으니 이것은 영원히 기념할 일이며 이것은 영원히 기념할 사람인 것이다. 그리하여 감격에 넘치는 우리 국민의 명의와 의연으로 각계각층 대표를 망라한 맥아더 장군 동상 건립위원회가 김경승 교수의 손에 의하여 비져진 장군의 용자가 영겁을 통하여 이 거룩한 지역을 부감하도록 이 동상을 세운 것이다. 장군과 그 휘하 용감한 유엔군 장병들이 우리와 자유를 위하여 이곳에서 취한 행동을 우리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공산주의의 유독한 침투에 대한 최후의 투쟁에 승리를 거둘 때 까지 전쟁에는 승리에 대신 할 것은 없다 라고 한 분이 역시 장군이었다는 사실을 영원히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1957년 9월 15일 맥아더장군 동상건립위원회             

 

 

 

세계전사에 빛나는 인천상륙작전,

월미도로 상륙하는 맥아더를 위시한 당시 유엔군 지휘부



 인천상륙작전:   6∙25 전쟁시 1950년 9월 맥아더장군의 지휘 아래 감행한  ‘인천상륙작전’ 은 전쟁을 역전 시킬 수 있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6∙25 전쟁 초기 기습공격과 엄청난 전투력으로 낙동강 전선까지 진격한 북한군은 유엔군의 참전과 국군의 반격으로 교착상태에 빠져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은 이러한 상황에서 전개되었다. 인천은 서울에서 32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서울로 접근할 수 있는 최단거리 항구며, 북한군의 보급선을 차단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런데 난점이 있었다. 인천항은 수로가 좁아 큰 함정의 진입이 불가능했고, 인천이 지리적으로 멀어 작전지원이 어렵고 조수∙간만등 자연조건이 불리해 당시 합동참모본부와 해군은 반대하였다고 한다. 낙동강 전선에 주력한 북한군도 이런 요소 때문에 위험성을 간과하여 허를 찔리게 되었다.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맥아더 장군의 탁월한 지모와 전략, 용감성으로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대승리를 이루었다. 지도자의 중요성과 역할이 다시 돋보이게 된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인천지역 북한군의 병력규모는 약 2,000여명, 서울, 인천에서 활동중인 병력은 약 10,000명이었다고 한다. 이에 미군은 상륙부대로 미 제10군단이 창설하였고 병력이 75,0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9월 15일 새벽, 제 7합동기동부대 스트러블 해군제독의 지휘아래 8개국 261척의 함정과 제 10군단으로 편성된 대규모선단이 인천앞바다에 집결하고, 월미도에 상륙해 돌격을 감행할 미 제 5해병연대 제 3대대 상륙단의 선견공격대가 인천항에 도착했다. 새벽 5시부터 유엔군은 북한군의 방어진지에 폭격을 가하기 시작하고 17척의 상륙용 주정으로 월미도 녹색해안에 도착한 상륙 부대도 돌격을 시작하여 마침내 유엔군의 화력 앞에 북한군은 투항하기 시작했다. 미 제 5해병연대 제 3대대의 월미도 일대 녹색해안 상륙작전은 적 사살 108명, 포로 136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어 인천항이 만조가 된 오후 5시경부터 유엔 해군과 공군의 엄호사격이 다시 시작되면서 미 제 5해병연대의 2개 대대가 인천항 북반의 적색해안에, 미 제 1해병연대는 인천항 남쪽의 청색해안에 각각 상륙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은 이렇게 진행되었고, 상륙작전 이후 우리 국군은 15일만에 38선까지 탈환하였다. 위대한 작전의 성공이다. 

 

맥아더 장군 상 동영상

 

인천시민헌장비

 

 

미해군기념재단 헌정비.

맥아더장군과 상륙작전 광경이 부조되어 있다.  

 " ...the most masterly and audacious startegic stroke in all history...
...dedicated honor all U.S army personnel who served in the korean war, june 25, 1950 to july 27, 1953."  
...모든 역사에서 가장 위대하고 담대한 전략적 타격...

1950.6.25~1953.7.27 근무한 미해병에 대한 존경으로 헌납하다...

 

placed june 22, 2000 by the united states navy memorial foundation,  washington D.C.   
워싱턴 D.C. 소재 미해군기념재단이 2000.6.22 설치함.

 

 

인천시민애 집 방향으로 하산

 

인천제일교회

 

 

이음1977 

 

무료관람
운영시간: 10:00-12:00, 13:00-17:00
점심시간: 12:00-13:00
휴관일: 매주 월요일

 


제물포구락부,

각국조계표시석 ->

 

 

各國地界 각국지계

 

   각국조계석

 

조계란 영토의 일정한 범위를 한정하여 외국인의 거주를 허가한 지역으로 거류지라고도 부른다. 인천에는 1883년 일본전관조계를 시작으로 같은 해 12월 청국전관조계, 1884년 10월에 각국조계가 설치되었다. 조계석은 조계의 경계를 나타내 주는 표시석으로 각 조계의 경계 지점에 세웠던 것이다. 이 각국조계석에는 '각국지계(各國地界)'와 '조선지계(朝鮮地界)'라는 명문이 있어 인천의 각국조계와 조선인 마을이 맞닫는 개항장의 외곽 지점 어딘가에 서 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2007년 제물포구락부 보수 중에 발견되어 현재 인천시립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다. 

 

 

인천시민愛(애)집, 옛 시장관사

 

 

시민애집 내부 전시실

 

나무인천

06.22 - 08.31

전시장소: 제물포구락부 전관

 

 

제물포시대

김광성의 개항장 이야기

 

비망록: 고여 우문국으로 기억하다

2021.10.5 화 - 11.30 화

 

 

담쟁이, 한정식. 커피 

 

대복사

 

공자 상

 

공자 상

공자는 위대한 인류의 스승이다.

 

子曰(자왈),

學而時習之, 不亦說呼 -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有朋自遠方來, 不亦樂呼 -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呼 - (인불지이불온, 불역군자호)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니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섭섭해하지 않으니 어찌 군자가 아니랴. "


- < 공자, 논어 학이편 제1장 >

 

 

* 공자 (BC 551~BC479) 의 일생: 공자(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 노나라 출생 (魯國 出生)는 中國春秋(중국춘추) 시대의 위대한 정치가, 교육가이며, 儒家(유가)의 創始者(창시자)이다. 공자는 일생에 걸쳐 많은 고전 명작 고시, 에악, 춘추, 역경 등을 정리 출판하여 중화민족 역사에 탁월한 공헌을 하였다. 그의 주요 사상과 언행은 論語集(논어집)에 기재되어 있다. 공자는 중국봉건사회의 철학, 교육, 문학, 예술등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을 뿐만아니라, 그의 유가사상은 중화민족문화를 대표함과 아울러 인류 역사상 중요한 유산으로 전 세계에 영향을 주고 있다.

 

 

청일조계지 경계 계단

 

<- 600m 신포패션문화의 거리, <- 130m 중구청, 
-> 월미바다역 420m, -> 짜장면박물관 220m, -> 인천근대박물관 90m, 

-> 인천화교역사문화관 30m.
↙ 70m 삼국지 벽화거리, 자유공원  

 

 

대불호텔전시관

 

관람시간안내: 09:00 - 18:00 (입장마감 17:30)
정기휴관: 매주 월요일 (단, 공휴일이 월요일인 경우 다음날 휴관)

 

관람요금 안내:

* 대불호텔전시관: 
개인> 성인 1,000원, 군인 500원, 청소년 700원 어린이 무료.
단체> 성인 800원, 군인 400원, 청소년 500원 어린이 무료.

* 5개관 통합관람시:
개인> 성인 3,400원, 군인 2,100원, 청소년 2,300원 어린이 무료.
단체> 성인 2,800원, 군인 500원, 청소년 700원 어린이 무료.

- 무료관람대상:
국가유공자, 독립유공자, 참전유공자, 고엽제후유증 등 환자 등등
장애인, 한부모가족의 아동,
만65세 이상인 자.
국민기초생활 수급자, 등등 

 

 

300만 대도시, 인천의 도약을 이끌어온 원동력 중구

생활사 전시관

 

조선은행

 

 

인천개항 박물관

 

구) 인천일본제1은행지점

1883년 인천개항 후 일본제1은행 부산지점의 인천출장소로 개설된 근대적 금융기관이다. 1888년 인천지점으로 승격되었고, 초기에는 해관 통관세를 취급하였다. 1911년 조선은행 인천지점, 1950년 한국은행 인천지점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조달청  인천사무소, 법원 등기소 등으로 활용되다가 2010년 인천개항 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1899년 신축된 지상 1층 건물로 석재 기단부와 수평 줄눈의 안정되고 견고한 외관을 지니고 있다. 돌출된 출입문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으로 구성된 석조 건축물이다. 현관 상부는 아치 구조이며 지붕에는 중앙 돔과 작은 천정을 설치 하였다. 처마 부분에는 동그란 ㄱ구멍이 뚫린 석조 난간을 올렸다. 

 

 

인천아트 플렛폼

 

 

"대한통운"

 

차이나타운

INCHEON CHINA TOWN

 

1883 개항장

 

개항장 지개꾼


1883년 제풀포항이 개항되면서 인천개항장은 서구 문물 유입의 길목인 동시에 활발한 상업 활동이 이루어지던 국제무역항이 되었다. 본 조형물은 근대 사진자료를 기초로 하여 개항장 일대에서 화물 선적 작업을 하던 지게꾼의 모습을 재현하였다. 

 

 

청일조계지, 자유공원 방향

 

 

인천 아트플렛폼  INCHEON ART FLATFORM

 

 

 

인천아트플렛폼 주변 동영상

 

 

문화가 숨쉬는 인천을 만들어 가는 인천 아트 플렛폼

 

 

인천아트플렛폼 주변 동영상

 

仁華門 인화문

 

 

선교100년 기념탑

 

1885년 4월 5일 부활절,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 목사 부부언더우드 목사가 진리의 큰 빛,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생명을 걸고 이곳에 상륙하였습니다. 그로부터 100년, 한국 개신교회는 신도 1천만을 헤아리는 놀라운 성장을 이룩하였으며, 고난 속에서 민족에게 구원의 안식처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 백주년을 맞아 세 선교사의 뜻을 기리며, 이곳에서 발원한 복음의 물결이 온 나라와 바다 건너 땅 끝까지 파도치기를 기원하면서 이 자리에 기념탑을 세웁니다.   선교백주년기념보존회

 

 

인천 제8 부두 방향

 

70년 전통의 어머니 손맛!  백반전문 동방식당

앗, 이곳에서 백반에 막걸리 한잔 하고 싶어라.

 

선교사기념관,  기독교 대한 감리회  기념탑교회 

 

" 회개 " 란 글씨가 무섭게 다가온다. 

우리 인간은 모두 회개할 사람들일 것이다. '죄-회개-믿음' 이란 선상에서 죄사함을 받고 구원이 이루어진다. 

구원은 값없이 이루어지는 선물이다. 그것이 기독교의 복음이다. 복된 소리란 뜻이다.

 

 

이 곳은 1883년 개항 이후 예수복음을 전하기 위해 
배타고 오신 선교사님들이 도착한 곳입니다.


** 선교사 상륙지점에 세워진 기념탑교회-  
1883년 인천개항으로 선교사들이 입국이 가능해 지자 1884년 6월 이후 한국에 예수를 전하기 위해 선교사들이 배타고 왔다. 그 선교사들의 첫 상륙지를 기념하기 위해 기도교대한감리회 중부연합 기념탑교회를 2013년 6월 24일 이전하여 세웠다. 

** 1885년 4월 5일-
선교사 도착 모습을 김학수 화백이 동양화풍으로 묘사 했다.

**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탑
1885년 4월 5일, 한국에 공식적으로 도착한 감리교회의 아펜젤러선교사 부부와 장로교회 언더우드 선교사를 기리기 위해 그 상륙지점 근처에 한국기도교 100주년 기념사업회와 인천기독교 연합회가 모금하여 1986년 3월 30일 세웠다. 

 

 

 

인천 월미도 바다열차 모노 레일 

 

다시 인천역 으로

 

매주 월요일정기휴일

(인터넷에매: www.wolmiseatrain.or.kr) 

월미바다역

 

이제 월미도로 가보겠습니다. 인천역에서 차이나타운을 거쳐, 월미산을 넘어, 청일조계지경계계단을 지나

인천 8부두 앞을 거쳐 이곳에 걸어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