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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구릅/나의 산행

하남 객산(292m), 광주향교 - ( 2023.06.02 )

by the road of Wind. 2023. 6. 2.

하남 객산(292m), 광주향교

- ( 2023.06.02 )

 

날씨가 무덥습니다. 이런 날씨에 바깥 운동하기가 꺼려집니다. 그렇지만 운동을 안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한남의 객산(292m)을 등산해 보았습니다. 이곳은 등산로가 짧고, 길가에 숲이 우거져 있어 여름철 그늘 산행이 가능하여 이곳을 선택하여 보았습니다. 객산은 남한산성 북문(전승문)에서 성곽을 따라 오르면 500m 고지에 동장대터가 나오며 여기에서 성곽을 벗어나 남한산(522.1m), 벌봉(515m)을 지나 하남시 방향의 능선 길 내려서다 보면 나오는 야트막한 높이의 산으로 하남시의 전경(全景)을 잘 바라볼 수 있는 산입니다. 객산 정상에서 하산 길은 객산 바로 아래 계곡 끝 지점에 있는 선법사를 거쳐, 하남 고골 입구에 있는 유서깊은 광주향교를 거쳐 집에 돌아왔습니다. 오늘 등산시에는 새로 생겨난 임도를 따라 오르다 나중에 등산로가 없어져 묘지들이 많은 능선을 지나 산길이 없는 아주 가파른 숲을 헤치고 오르기도 했습니다. 결국 샘재에서 오르는 정규 능선 등산로를 만나 객산을 오르게 되었습니다.  산행시는 모르는 길로 들어서는 모험을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옛날 광덕사를 거쳐 절 뒷산 임도를 따라 오르다 이번 처럼 묘지들이 나오는 능선에서 산길이 희미하면서 없어져 곤란했던 기억이 다시 떠오릅니다.   

 

 산   책 : 걸음수 9,527 steps, 거리 5.62 km, 소모열량 379 kcal, 소요시간 01:56 hrs, 속도 3.3 km/h, 기온 26℃. 

 코   스 : 하남경찰서 버스 장류장 -  마루공원 - 능선쉼터 - 선법사 갈림길 - 객산 정상 (292m) - 선법사 - 광주향교 -

- 서부농협.

 

 

▶ 등산 길:

마루공원 입구 이정표

<- 6.4km 위례둘레길(남한산성), <- 1.9km 위례둘레길(객산)

 

↑ 하남경찰서 방향

 

↑ 마루공원,  <- 광덕사 (031-792-5266)

 

 

< ▲ 2021.05.10 광덕사 사진 > 옛날 이 절 뒷편의 임도를 따라 객산에 오르다 능선에서

길이 희미하게 되어 풀숲을 헤치고 오른 기억이 떠오른다. 

 

 

<- 6.3km 위례둘레길(남한산성), <- 1.8km 위례둘레길(객산)

 

* 이곳에서 왼쪽 산비탈로 아주 넓은 신작로 같은 임도가 가파르게 보이며 이 임도를 따라 올라야 남한산성과 객산을 갈 수 있다. 오늘 나는 이 길을 지나쳐 새로 생겨난 임도를 따라 오르다 길이 없어져 낭패를 당했다. 새로 생긴 임도는 산 능선의 묘지들로 가는 길이었음을 몰랐다. 

 

 

잘못 들어선 길...이 길 시작 전 왼쪽의 가파르고 넓은 임도를 따라 올라야 정규 등산로이다. 

 

등산로는 이 길이 아니다. 오른쪽 능선길인 것 같은 데, 들머리가 보이지 않는다. 옛날 이 쪽으로 하산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왜 보이지 않지? 그래서 계속 이 길을 따라오른다. 

 

이 길을 따라가면 등산로가 나오나? 일말의 의구심을 갖고 진행해 본다. 

실제 정규 등산로는 오른쪽 눙선을 타고 오르게 된다.  

 

아무래도 길이 없을 것 같은 예감이다.

 

아이쿠, 길이 없어졌네?

 

앗, 왼쪽 능선으로 오르는 길이 보인다.

 

마루공원 방향...

 

능선으로 오르기는 하였으나, 이곳은 묘지들이 많았다. 주변은 숲이 우거지고 관리가 잘 되지 않은 공동묘지 같았다. 나는 산길을 찾지 못하고 묘지들 사이로 계속 오르기 시작하였다.  

 

주변은 온통 묘지들이다. 숲 속에 묘들이 산재하여 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길이 없어졌으며, 측면으로 나가보니 여기도 길이 없고 더는 진행할 수 었었다. 다시 내려갈 수도 없고 난감하였다. 아주 가파른 낙엽이 수북한 비탈을 나무를 붙잡고 겨우  올라섰다. 능선으로 오르면 경사가 완만해 지고 풀을 헤치고라도 객산 능선길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 것이다. 뱀도 무섭고 오늘 나는 참 난감한 경우에 처해보았다. 지세를 잘 알고 있으니 가능했지 무엇을 모르는 상태에서는 온 길을 다시 내려가는 것이 상책이다. 

 

앗, 능선길을 만났다.

 

마루공원 갈림목 이정표
<- 0.9km 위례 둘레길(마루공원), <- 1.0km 먹거리촌(등기소),

↓ 위례 둘레길 (샘재).

 

* 원래는 마루공원과 광덕사 갈림길의 등산로 입구에서 왼쪽 넓은 가파른 임도로 오르면 이 고개가 나오는데, 나는 입구 들머리를 지나쳐서 엉뚱한 길로 오르다 나중에 산길을 잃고 공동묘지들이 나오는 능선에서 풀숲을 헤치며 아주 가파른 길을 올라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걷기 좋은 소나무 숲 길

 

객산 정상이 보인다.

 

앗, 능선 쉼터

 

 

객산 능선길 쉼터 동영상

 

쉼터에서 바라보는 팔당대교 방향 경치

 

검단산 방향

 

객산, 선법사 갈림목....↑ 객산,  ↘ 선법사

 

선법사

 

선법사에는 국가지정 보물 제981호인 '하남 교산동 마애약사여래좌상'이 있으며, 그 옆에는 객산폭포와 온조왕이 마셨다는 전설이 있는 온조왕 어용(御用) 샘이 있다.

 

 

 <- 2.0km 위례 둘레길 (샘재), ->  위례 둘레길 (남한산성)  4.8km, ->  위례 둘레길 (객산)  0.3km, 
↘ 0.7km 위례 둘레길(선법사).

팔당대교 방향....바로 아래 하얀 건물은 마루공원 건물. 객산 들머리

 

객산 정상 아래 고개 이정표 

<- 2.1km 위례 둘레길 (샘재), 
->  위례 둘레길 (남한산성)  4.7km, ->  위례 둘레길 (객산)  0.2km, 

 

 

▶ 객산 정상:

객산, 해발 292m

 

하남시 전경

 

 

객산 정상 동영상

 

 

객산 정상 이정표

↙ 2.3km 위례 둘레길 (샘재), ↑ 4.5km  위례 둘레길 (남한산성)

 

 

남한산성 방향

 

객산 정상의 삼각점

 

 

▶ 하산 길 (-> 선법사):

↙ 선법사 가는 길

 

  

앗, 선법사....

절로 올라가서 사진 몇 장을 찍으며 여러가지 구경을 하려 했으나, 목줄 풀린 진도개가 지키면서 경계를 하는 것 같아 무서워서 다시 내려오고 말았다. 가는 곳 마다 개녀석들 때문에 골치가 아파죽겠어용. 

 

 

==(  ▼ 2021.05.10 사진:  선법사  )==

뒷편 객산

온조왕 어용샘, 선법사 약수터,  수질: 적합

 '하남 교산동 마애약사여래좌상', 국가지정 보물 제 981호.

하남 교산동 마애약사여래좌상,  보물 제 981호

 

바위 남쪽면에 새겨져 있으며, 노이가 93cm이고 광배* 와 받침대인 대좌가 있다.

'약사여래'는 질병에서 모든 중생을 주제해 준다는 부처를 말한다. 얼굴 표정이 부드럽고

옷은 왼쪽 어깨만 걸쳤다. 왼손 손바닥은 위로 하여 약그릇을 들고 있으며, 오른손은

손바닥이 정면을 향하고 손가락을 위로 하고 있다. 몸 뒤편에는 머리 광배와 몸 광배를

계단식으로 새겼으며, 주위에는 불꽃부늬가 있다. 대좌는 연꽃잎이 아래로 향한 모양의

하대석 위에 짧은 기둥 4개로 이루어진 중대석이 있으며, 그 위에 쏯잎이 다섯 장으로 된

연꽃이 불신을 떠받치고 있다. 불상오른쪽에는 '태평이년정축칠월이십구일고석불재여사을

중수위금상황제만세원  (太平二年丁丑七月二十九日古石佛在如賜乙重修爲今上皇帝萬世願)' 

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태평 고려 경종 2년(977)임을 알 수 있다. 조각 기법이 섬세하고

보존 상태가 양호하여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 광배:  회화나 조각에서 인물의 성스러움을 드러내기 위하여 머리나 등 뒤에 광명을 표시한 것.  

 

대웅전

 

==(  ▲ 2021.05.10 사진 end  )==

 

 

선법사 입구 이정표:

↑ 5.5km 위례 둘레길 (남한산성), 1.0km  위례 둘레길 (객산) , 
<- 1.2km 위례 역사길(광주향교), ->0.1km 위례 역사길(선법사)  

하남 위례길 안내도

 

- 위례 사랑길 (5.0KM):  산곡천 - 닭바위 - 연리목- 도미나루 - 두껍바위 - 철새도래지 - 팔당댐.
위례 강변길( 13.5 KM): 산곡천 - 억새밭 - 덕풍천- 미사리경정공원- 미사리선사유적지 - 나무고아원- 선동축구장.
- 위례 역사길 (5.8km): 광주향교- 이성산성 - 춘궁동 동사지- 선법사.
위례 둘레길 (39.7km): 시청- 샘재- 객산- 남한산성 - 금암산- 이성산성 - 덕풍골. 

객산 방향

 

안샘재 영농회, 교산동청년회

 

선법사 입구 이정표:

<- 0.6km 위례역사길 (선법사),  -> 위례역사길 (광주향교) 0.7km

 

-> 700m 하남 교산동 마애약사여래좌상

 

덕풍천...남한산성 방향

 

 

광주향교:

 

광주향교 대성전

 

대성전 출입문,  서무, 동무 

 

명륜당과 서제, 동제

 

광주향교 경관광장 종합안내도

 

 

광주향교의 수호목

 

'향교의 수호목'


보호수 은행나무, 나무나이 약500년  
이 나무는 수나무로 향교 주위에 4그루의 암나무를 거느리고 있다.

 

 

 

광주향교 |  廣州鄕校  

향교는 성현에게 제사를 올리고 지방민을 교육.교화하고자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현재는 교육은 하지 않고 제사만 올리고 있다. 광주향교를 처음 지은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숙종 29년(1703)에  고읍(古邑) 서쪽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향교의 가장 뒤쪽에는 제사 공간인 대성전과 동무.서무가 있으며 그 앞으로 교육 공간인 명륜당과 동재.서재가 있어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 구성으로 배치되어 있다.  대성전은 앞면 3칸, 옆면 4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려고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공포가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안쪽에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의 위폐를 모셨다. 명륜당은 앞면 5칸. 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명륜당은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당이고, 동재.서재는 학생들의 기숙사이다.  

광주향교 전체 배치도:

1. 대성전(大成殿), 2. 동무(東廡), 3. 서무(西廡), 4. 내삼문(內三門), 5. 명륜당(明倫堂), 6. 동제(東齊), 7. 서재(西齊), 8. 외삼문(外三門), 9. 수복사(守僕舍), 10. 협문(夾門), 11. 전사청, 제기고 터(典祀廳, 祭器庫 址) 

 

 

 

 

廣州鄕校_ 광주향교

 

 공자 (BC 551~ BC 479):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정치가, 사상가, 교육자이다.  예수, 석가, 소크라테스와 함께 세계 4대 성인 중 한 사람이다. 

탄생

노나라 시대 산동성 추읍(郰邑)에서 아버지 숙량홀이 64세에 세째 아내 안씨와의 사이에 늦둥이로 태어나다. 공자의 어머니는 아들을 얻기 위해 니구산(尼丘山)에 가서 신령님께 기도를 올리고 공자를 낳았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공자의 이름의 니구산의 구(丘) 자에서 따왔다고 하는 설이 있다. 


성장: 

공자 3세 아버지 타계하고, 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함. 공자는 성장하면서 15세 이전 학문에 열중하고, 어릴 때 부터 예(禮)에 뛰어났다고 한다. 


결혼생활: 

공자 19세에 어머니 권유로 노나라 거주 송나라 사람 계관씨의 딸과 결혼함. 결혼후 1년만에 아들을 얻었으나 부인에 대하여는 별로 알려진 게 없다. 


교육활동: 

공자 나이 24세에 어머니 돌아가심. 그 후 자기집을 서당으로 젊을 때부터 교육활동을 하여 수십년 동안 무려 3,000명이 넘는 제자를 양성함. 제자 중 특히 안연, 자공, 자로, 자장, 자하 등이 유명하다. 


관리생활: 

나이 50세에 고향의 관리가 되다. 이듬해 노나라 정공의 제나라와의 화해조약 행차시 대동함. 54세에 재상의 실권을 득함. 그 후 정공이 제나라에서 보내온 여자들 때문에 정사를 돌보지 않자 관직을 사임함.


생의 마감

56세에 모국인 노나라를 떠나 약 14년 동안 천하를 주유하며 인(仁)에 기초한 정치를 펼치려 했으나 실패하여 유가 경전을 정리, 편찬하는 데 전념하고, 제자 양성에 힘썼다. 공자 나이 68세에 아들을 먼저 떠나보냄. 제자 중 70세에 도(道)의 계승자로 여기던 안연이 타계하고, 71세에 재아, 72세에 가장 믿었던 자로 마저 세상을 떠남. 그후 공자는 73세에 타계함. 


- 공자의 사상:  

공자는 인(仁)을 인간의 최고의 도(道)와 덕(德)임을 주창하였다. 공자는 인을 근본으로 예를 실천하는 사람이 군자라고 설파앴다. 《논어》는 그의 제자들이 스승이 죽은 후 편찬한 것으로 공자의 사상이 집대성 되어있다. 
  

▶ 공자 년표:

BC551년 ( 1세)노나라 창평향 추읍에서 출생
BC549년 ( 3세): 아버지 숙량흘 여의다. 
BC537년 (15세): 배움에 뜻을 두다. - < 논어>
BC535년 (17세): 이 무렵 어머니 안씨를 여의다.  
BC533년 (19세): 송나라 견관씨와 결혼하다.
BC532년 (20세): 아들 공리가 태어나다. 계씨의 창고지기가 되다.
BC531년 (21세): 가축사육하는 일을 맡다. 
BC525년 (27세): 노나라에 온 담자에게서 고대 관제를 배우다. 
BC522년 (30세): 자립하다. -<논어>
BC518년 (34세): 노나라 대부 맹희자가 아들 맹의자와 남궁경숙에게 공자를 스승으로 삼아 예를 배우라로 유언하여 공자에 입문함.
BC516년 (36세): 제나라 경공이 정치를 묻다. 
BC516년 (36세): 소악(韶樂)을 듣고 음악에 심취하다.
BC515년 (37세): 제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오다.  
BC512년 (40세): 의혹되지 아니하다 -<논어>  
BC509년 (43세): 노나라 정공 즉위하다.
BC502년 (50세): 천명을 알다. -<논어>  
BC501년 (51세): 정공9년 노나라 정공이 중도(中都)의 제(帝)로 삼다. 중도의 제에서 사공(司空), 대사구(大司寇)로 승진하다.
BC500년 (52세): 정공10년. 노정공과 제경공의 협곡회담에 참여하다. 제경공으로 부터 노나라 따을 돌려받다. 
BC497년 (55세): 정공13년. 제나라로 부터 여악(女樂)받고 정사를 돌보지 않자 위나라로 떠나다. 
BC497년 (55세): 위나라에서 10개월을 머물다 진나라로 가는 도중 광(匡)에서 포위되는 재난을 당하다. 
BC492년 (60세): 귀가 순하게 되다. - <논어>
BC490년 (62세): 섭나라의 섭공과 정치를 이야기하다.
BC489년 (63세): 초나라로 가는 도중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식량이 떨어져 곤경에 처하다.
BC484년 (68세): 노나라의 계강자가 예를 갖추어 공자를 부르니 14년(BC497-484) 만에 노나라에 돌아오다.  
BC483년 (69세): 악(樂)을 바로 잡다. 아들 공공리가 50세로 죽다. 
BC482년 (70세): 마음이 하는 대로 따라도 정도를 지나치지 않게 되다. - <논어>. 노나라가 공자를 정치에 쓰지 않자 제자를 가르치고 문헌을 정리하는일에 힘쓰다. 제자 안희 죽다. 
BC481년 (71세): 춘추를 짓다.
BC480년 (72세): 위나라 정변으로 제자 자로 죽다. 자로의 시체를 소금에 절였다는 말을 듣다.
BC479년 (73세): 애공 16년 하(夏) 사월에 공자 세상을 떠나다. 노나라 도성 북쪽 사수(泗水) 강 언덕에 묻히다. 

 

 

문화재자료 제13호  광주향교

 

명륜당, 서재, 동재

 

 

공자 어록 》:

 

 子曰 由아誨女知之乎인저. 知之爲知之오 不知爲不知 是知也니라. ( 자왈 유 회여지지호 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 ) - 유야 너에게 안다는 것을 가르쳐 주마, 아는 것을 안다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다.

 成事라 不說하며 遂事라 不諫하며 旣往이라 不咎로다. ( 성사 불설 수사 불간 기왕 불구 )
- 이미 이루어진 일은 말하지 않으며, 끝난 일은 간하지 않으며, 지난 일은 탓하지 않는다.

 子曰 不仁者는 不可以久處約이며 不可以長處樂이니 仁者는 安仁하고 知者는 利仁이니라. ( 불인자 불가이구처약 불가이장처락 인자 안인 지자 이인 )
- 어질지 못한 사람은 역경에 오래 있지 못하며 행복도 오래 누리지 못한다. 그리고 어진 사람은 仁(인)을 편안하게 여기고 지혜로운 사람은 인을 이롭게 생각한다.

 子曰 德不孤라 必有隣이니라. ( 덕불고 필유린 )
- 덕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으며 반드시 이웃이 있다.

 子曰 人之生也 直하니 罔之生也는 幸而免이니라. ( 인지생야 직 망지생야 행이면 )
- 인간의 삶은 원래 정직한 것이다, 정직하지 않으면서도 살 수 있는 것은 요행히 화를 면하고 있는 것이다.

 子 絶四러시니 毋意毋必毋固毋我러시다. ( 자 절사 무의무필무고무아 _
- 공자께서 네 가지를 근절 하셨으니 자의대로 하는 일이 없었고, 집착하지 아니하고, 고집을 안부리고, 자기만을 내 세우는일 (생각하는 일) 은 없으셨다.

 過猶不及이니라. ( 과유불급 ) - 지나친 것은 모자란 것과 같다.

 子曰 不患人之不己知오 患不知人也니라. ( 불환인지불기지 환부지인야 )

-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탓하라.

 子曰 人無遠慮 必有近憂니라. ( 인무원려 필유근우 )

- 사람이 먼 앞날을 걱정하지 않으면 반드시 가까운 시일에 근심이 생긴다.

 子曰 躬自厚而薄責於人이면 則遠怨矣니라. ( 궁자후이박책어인 즉원원의 )
- 자신을 꾸짖기는 엄하게 하고 남을 책망하길 가볍게 하면 남의 원망하는 소리를 멀리할 수 있다

 子曰 唯女子與小人이 爲難養也 近之則不孫하고 遠之則怨이니라 
( 유녀자여소인 위난양야 근지즉불손 원지즉원 )
- 여자와 소인은 다루기 어렵다. 가까이 하면 불손하게 굴고 멀리 하면 원망을 한다.


 子曰 年四十而見惡焉이면 其終也已니라. ( 연사십이견오언 기종야이 )
- 나이 사십이 되어서도 남에게 미움을 받는다면 그것은 끝장이 난 것이다.

 子貢이 問曰 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者乎이까 子曰 其恕乎인저 己所不欲을 勿施於人이니라. 
( 자공 문왈 유일언이가이종신행지자호 기서호 기소불욕 물시어인 )
- 자공이 한마디의 말로 평생토록 행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 묻자 그것은 오직 서(용서) 이니라.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 것이니라.

 子曰 君子 求諸己오 小人은 求諸人이니라. ( 군자 구저기 소인 구저인 )
- 군자는 모든 책임의 소재를 자신에서 구하나 소인은 남에게서 구한다.

 

 

 

광주향교사적비

 

보호수 은행나무:  (1981.1.13 지정)
나무 나이 약 450년, 높이 32m, 둘레 670cm.

 

보호수 은행나무:  (1981.3.11 지정)
나무 나이 약 450년, 높이 30m, 둘레 290cm.

 

 

보호수 은행나무:  (1981.3.11 지정)
나무 나이 약 500년, 높이 31m, 둘레 810cm.

 

대성전

 

궁안마을,  춘궁동 2통

 

궁안 마을의 유래:

우리 마을의 이름은 "궁안(宮內)" 또는 "궁촌(宮村)"이다. 궁안은 고골 안의 12개 자연마을 (행길이, 성산동, 버구리, 나무길,법화골,샘골,중촌말,끌말,샘재) 중의 하나이며 이 지역(고골)이 백제의 도읍지 (하남 위례성)였을 때 왕궁이 있었던 곳이 이 마을이기 때문에 마을 명칭이 궁안(宮內)이다. 궁안은 행정동으로는 춘궁동에 속하며 춘궁동은 일제 강점기 춘장리와 궁촌을 합치면서 만든 명칭이고 춘궁동을 포함한 항동, 상사창동, 하사창동, 교산동 등을 통틀어 고골이라 부른다.

고골은 한자로는 古邑(고읍)이라고 쓰며, 조선 초기 광주(廣州)의 읍치(邑治)가 잇었던 곳이라 불여진 명칭이다. 지금의 광주향교 서편 일대에 있던 광주읍치는 1626년(인조4년) 남한산성 안으로 옮겨가고 1703년 (숙종20년) 구 광주읍치 위치에서 서쪽으로 2리 떨어진 곳에 있던 광주향교를 현재의 고읍터(향교마을)로 이건(移建)하였다. 다산의 비정에 따라 고골의 지명변경 역사를 살펴보면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 한성(漢城), 한산군(漢山郡), 한산주(漢山州), 한주( 漢州), 광주고읍(廣州古邑), 고골의 순으로 변하였다.   - 조성국 교수 (고골향토사 연구가) 

 

 

 

* 현재 이곳에는 광주향교를 제외한 고골 지역 전체하남교산신도시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하남교산신도시 : 경기도 하남시 천현동, 교산동, 춘궁동, 덕풍동 일원에 제3기 신도시인  '하남 교산 싣도시' 가 들어서는 지역이다. 하남교산 공공주택지구는 면적 6,314,121m2 (191만평) 으로 주택 3만3천호가 들어서며 인구 7만8천명이 유입된다. 사업기간: 2019년 ~2028년이다. 비야흐로 풍광이 청정 수려한 하남위례성의 역사적인 고골 일대에 쌍전백해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고골:  하남의 지형은 낮은 야산과 구릉지대가 펼쳐져 있고, 북쪽으로 흐르는 한강에는 망월천, 덕풍천,산곡천 같은 작은 샛강이 흘러 들어가며 강줄기의 옆에는 평야가 형성되어 있어서 B.C 4000여년 전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였으며, 수로를 이용한 타 지역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여 문화가 융성했던 지역이다. 또한 남쪽으론 남한산, 동쪽은 검단산, 북쪽으론 한강이 흘러 군사의 요충지로서 더할 나위 없이 좋아 백제의 시조인 온조께서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470여 년간 한성백제의 수도로 위상을 떨치던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한수의 쟁패를 놓고 삼국이 각축을 벌이던 역사의 현장 이기도 하다. 고려시대에 접어들어선 후삼국을 통일하고 태조의 개국을 도와 새로운 나라의 기틀을 조성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광주의 대호족 왕규가 세거를 이루었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종때(983년)에 이르러서는 지방통제를 위한 지방관제를 실시하여 지방행정상 요지에 12목(광주,양주,충주,청주,공주,진주,상주,전주,나주,송주,해주,황주)을 설치하였는데 광주도 12목의 하나로서 읍치가 바로 하남의 춘궁동(고골) 이었다. - ( 하남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