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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구릅/나의 산행

① 남한산성- ( 2023.12.01 )

by the road of Wind. 2023. 12. 2.

남한산성

- ( 2023.12.01 )

 

- 《 남문(지화문) ~ 수어장대 》:

 

오늘 오후 남한산성을 등산해 보있습니다. 남한산성은 교통이 편리하여 자주 가게 됩니다. 오늘은 평일이고 날씨마저 춥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토.일요일 주말이나, 공휴일에는 늦게 가면 주차당 만차의 상태로 주차할 곳을 을 찾지 못해 힘든 곳입니다. 그런데 지금 주차장 중 가장 큰 남문주차장 보수로 이를 사용할 수 없으니 매우 혼잡할 것은 분명합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8호선 복정역이나 산성역 등 전철역 주변에 차를 파킹하고, 전철을 타고 산성역에 내려 버스를 이용하여 산성마을로 가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 참고 >

 

주차장 보수공사로 남문주차장 이용이 불가하오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공사기간: 2023.09.18.(월) ~ 12.29.(금)

 

무료주차장: 동문 ~ 광주방향  (7km 이내에 7개소)

무료셔틀버스 운행: 8월 26일(토) ~ 11월 26일(금), 평일 제외.

 

 

 남한산성(南漢山城): 경기도 광주시, 성남시, 하남시에 걸쳐 남한산(480m) 을 중심으로 하는 산성(山城)이다. 병자호란 때 우리나라의 치욕적인 수난의 곳이기도 하다. 대외정세에 대한 오판으로 인한 국제정치의 실패의 결과이다. 남한산성의 역사는 백제의 수도 하남위례성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조선 시대에 인조숙종 때에 산성을 증축하여 오늘날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남한산성의 성벽은 국가사적 제57호, 남한산성은 1971년 경기도립공원 제158호, 2014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남한산성에는 원성과 외성, 옹성, 4대문, 암문, 치, 장대, 포루, 수구, 단, 묘, 공해, 정, 사찰, 제당 등 많은 시설물과 행궁이 있으며 그 중 성곽 ,수어장대,숭렬전,청량당, 현절사, 침괘정, 연무관, 지수당, 장경사, 망월사지, 개원사지, 남한산성 행궁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주요 시설에 대한 간단한 개략을 알아본다.  

- 성곽 : 원성과 외성으로 나뉜다. 원성은 하나로 연결된 본성이며, 외성으로 봉암성과 한봉성, 신남성이 있으며, 두 개의 돈대가 있다.
- 성벽: 원성은 높이가 약 3~7m내외다.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 성문: 남한산성에는 남문(지화문_至和門), 북문(전승문_全勝門), 동문(좌익문_左翼門), 서문(우익문_右翼門) 의 4대문이 있다. 
- 외성: 외성은 봉암성, 한봉성, 신남성의 3성이 있다.
- 옹성: 주 성곽에서 돌출 작은 성곽으로, 적군을 옆에서도 공격할 수 있다. 연주봉옹성, 장경사 신지옹성 등 총 5개의 옹성이 있다.
- 여장: 성위에 낮게 쌓은 담이다. 몸을 숨겨 총이나 활을 쏠 수 있게 만든 시설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하부는 석재로, 상부는 전돌을 사용한다.   
- 암문: 암문은 적이 관측하기 어려운 곳에 만든 성루가 없는 성문이다. 남한산성에 16개가 있으며, 우리나라 성곽 중에서 가장 많다.
- 수어장대(守禦將臺): 장군의 지휘소다. 2층으로 되어있으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 남장대 터:  제2남옹성 바로 곁에 있다. 지금은 주춧돌만 남아있다. 
- 동장대 터: 남한산성의 동쪽에 있던 장대로 수어청에 소속된 5영 중 좌영장이 지휘하던 동장대가 있던 곳이다.
- 남한산성행궁: 광주 행궁이라고도 불린다. 유사시 왕이 피난할 수 있도록 준비된 예비 궁궐이다. 총융사 이서의 계책에 따라 완성되었다.
- 숭렬전: 백제의 시조 온조왕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드리던 사당이다.
- 청량당: 수어장대 담 밖 서쪽에 있는 당집이다. 남한산성의 동남쪽 부분 축성 책임자 이회와 그 부인, 그리고 서북성 축조 담당 벽암스님의 혼령을 모신 사당이다. 이회는 모함으로 참수를 당했으나 후에 누명이 풀렸으며 이곳에 봉안되었다.
- 연무관: 군사들이 무술을 연마하던 곳이다. 현재는 건물 복원 작업을 위한 주춧돌만을 남기고 있다.
- 장경사: 대한불교 조계종 조계사의 말사이다. 남한산성 내에 존재했던 9개의 사찰 가운데 당시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현존하는 유일한 절이다.
- 국청사: 남한산성 안의 산성리에 있는 절이다. 승군의 숙식과 훈련을 담당하고, 비밀리에 군기와 화약,군량미 등을 비축하였던 사찰이다

 

남한산성 탐방안내도   

 1코스 (거리 3.8Km / 소요시간 1시간 20분):
산성로터리 – 북문(0.4km) – 서문(1.1km) – 수어장대(0.6km) – 영춘정(0.3km) – 남문(0.7km) – 산성로터리(0.7km)
 2코스 (거리 : 2.9km / 소요시간 : 60분):
산성로터리 – 영월정(0.4km) – 숭렬전(0.2km) – 서문(0.7km) – 수어장대(0.6km) – 산성로터리(0.9km)
▶ 3코스 (거리 : 5.7km / 소요시간 : 2시간):
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 현절사(0.1km) – 벌봉(1.8km) – 장경사(1.5km) – 망월사(1.1km) – 동문(1.0km) – 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4코스 (거리 : 3.8km / 소요시간 : 1시간 20분):
산성로터리 – 남문(0.7km) – 남장대터(0.6km) – 동문(1.1km) – 지수당(0.5km) – 개원사(0.3km) – 산성로터리(0.6km)
▶ 5코스 (거리 : 7.7km / 소요시간 : 3시간 20분):
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 동문(0.6km) – 동장대터(1.1km) – 북문(1.6km) – 서문(1.1km) – 수어장대(0.6km) – 영춘정(0.3km) – 남문(0.7km) – 동문(1.7km) – 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산   행 : 걸음수 7,851 steps, 거리 4.64 km, 소모열량 270 kcal, 소요시간 01:18 hrs, 속도 3.5 km/h, 기온 0 (맑음)

 코   스 :  남문 정류장 -  남문(지화문) -  수어장대 (청량산; 483m) - 서문(우익문) -  남한산성 전망대 - 북문(전승문) -  종로 로터리. 

 

 

● 남한산성 가는 길:

 

8호선 산성역 2번 출구 앞 

 

'산성역.포레스티아동문' 버스 정류장:

 

남한산성 운행 버스 안내:


9번:  (사송동종점<- 남한산성 입구 -  산성역 -> 중앙주차장(남한산성) / 배차간격: 10~20분.

9-1번 (휴일): (산성역 <-> 남한산성(종점) / 배차간격7~10분.

52번: (성남동대형주차장<- 산성역 - > 남한산성 (종점) / 배차간격; 90~100분.
53번: ( 남위례역<- 산성역 -> 남한산성(종점) / 배차간격 35~45분.

 

 

한국폴리택대학 성남캠퍼스

 

단대동 닭죽촌

 

남한산성 산 길 도로에서

 

남한산성 오르는 길은 지그재그 길이다. 주말, 공휴일 분비는 시간대에는 차량이 꼬리를 물고 오르는 코스이다.

 

 

● 남한산성 둘레길 산책 (남문->수어장대):

 

남문 터널 앞 남문 정류장.... <- (종점) 남문, ↑ 성남

 

비석숲...

남한산성(사적 제57호)은 문화재보호법에 의해 보존.관리되는 소중한 우리 문화유산입니다.

 

남한산성비석군  (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114-1번지 소재 )

성 내에는 18~20세기 무렵에 설치된 39여기의 비석이 있다. 이 중 본 부지(남문진입로)내로 남한산성 행궁 복원 사업에 따라 이전된 11기와 현 위치에 보존되어 있던 19기를 포함한 총30기의 비석을 한곳으로 모아 남한산성을 방문하는 탐방객들에게 옛 선현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후대에 소중히 전승될 수 있도록 비석을 한 곳으로 옮겨 정비해 놓았다. 이곳에 있는 비석은 역대 광주유수(廣州留守) 및 수어사(守禦使), 부윤(府尹), 군수(郡守)의 비로서 재직시 백성들을 정성스레 돌봐 치정을 잘 했거나 사랑을 베풀어 선정을 한 분들에게 백성들이 그들을 추념하여 새운 비로서 광주유수.영의정을 지낸 심상규(沈象奎)의 비를 포함 30기의 비석이 이곳에 위치하고 있다.  

 

 

앗, 남문....평일 추운날이므로 간이매점도 휴업인 것 같다.

 

세계유산 남한산성 종합안내판


1코스: 산성로터리- 북문- 서문- 수어장대- 영춘정- 남문- 산성로타리 ( 3.8km, 1시간 20분 )
2코스: 산성로터리- 영월정- 숭렬전- 수어장대- 서문- 국청사- 산성로타리 ( 2.9km, 1시간 )
3코스: 남한산성 역사관주차장- 현절사- 벌봉- 장경사- 망월사- 지수당-  남한산성 역사관주차장 ( 5.7km, 2시간 )
4코스: 산성로터리- 남문- 남장대터- 동문- 지수당- 개원사- 산성로타리 ( 3.8km, 1시간 20분 )
5코스: 남한산성 역사관주차장- 동문- 동장대터- 북문- 서문- 수어장대- 영춘정- 남문- 동문 ( 7.7km, 3시간 20분 )

 

지화문 (남문)

 

남한산성 옛길 종합안내

 

남문 밖으로 나가본다.

 

성 외곽으로 검단산(536.4m) 가는 길

 

지화문 (남문):

정조3년 성곽을 보수 할 때 '지하문'이라 칭하였고 남한산성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이다.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다. 또한 현재는 성남으로 통하는 관문역할을 하고 있으며, 성문앞에 식재된 (350년 수령, 성남시 보호수) 느티나무와 함께 문화와 역사가 살아숨쉬는 시민의 역사터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 - 성남시.

 

 

누비길

성남 누비길 노선 안내

검단산 길


성남 누비길을 일주합시다.

울창한 숲에서의 등산은 신체리듬을 회복시키고 산소공급을 원할히 하여 운동시경을 단련시키는 등 인체건강에 유익합니다. 시민 여러분의 건강과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성남누비길을 일주해 봅시다.

누비길 코스:

1구간:  남한산성길 7.5km ( 4시간 )
2구간:  검단산 길  7.4km ( 3시간 30분 )
3구간:  영장산 길 9.7km ( 4시간 30분 )  
4구간:  불곡산 길 8.8km ( 4시간 )
5구간:  태봉산 길 10.7km  ( 4시간 30분 )  
6구간:  청계산 길 8.5km  ( 4시간 30분 )  
7구간:  인능산 길 9.5km ( 4시간 )

> 검단산 길:

검단산은 태백산맥의 철령(鐵嶺) 부근에서 분기하여 서울 부근에 이르는 광주산맥의 지맥으로서 남한산성과 연결되는 산줄기를 이루며, 높이는 534.7m이다. 경기도 성남시 동쪽으로 광주시와 경계를 이루며, 전체적으로 '凹(요)'자 모양의 산지를 형성한다. 이 산을 중심으로 하는 성남시의 동쪽 산지는 남쪽으로 갈 수록 해발고도가 낮아지며 완만한 산이라 하여 그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  산성역 -  불망비 -  남문(지화문): 3,7km    

검단산길 2코스:


남문(지화문) - 1.0km- 산림초소 - 1.4km - 검단산 정상 (536.4m)  - 1.4km - 만수천 약수터 - 0.7km -  망덕산 정상 ( 500.3m ) - 0.5km - 형제봉 정상 ( 435m ) - 0.8km - 이배재고개 - 1.8km - 갈마치고개.

 

 

( ▲ 2023.05.24 사진

누비길 검단산길 구간...."여기부터 제2구간입니다. " 

호국정신과 선비정신이 깃든
남문 앞 역사터 안내

- 남한산성은 한성 백제시대의 성산이요 진산의 개념으로 백제의 시조 온조대왕의 사당 숭렬전(경기도유형문화재 제2호)이 있는 곳이다.
- 남한산성은 통일신라시대에는 주장성(晝長城) (일장(日長)산성)으로 불렀으며 한강유역의 중요 산성으로 발전하였다. 
- 고려시대에는 몽고군의 침입을 물리친 국방의 요새지 이었다.
- 조선왕조 제16대 인조임금 원년(1623)에 성의 축성을 시작하여 1826년에 완성 (본성의 둘레가 9.05km)하니 남한산성은 경도보장지(京都保障地)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 남한산성은 주봉인 청량산(497.8m) 을 중심으로 4대문과 18암문을 완성하고 성내에는 행궁을 비롯하여 수어장대 등 각종 문화유적이 남아있고, 현재는 경기도 도립공원(국가사적 제57호)으로 성남시, 하남시, 송파구, 광주시 등 4개 지방자치 단체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 특히 남문은 성의 서남쪽 곡저부의 해발 370M 지점에 위치하여 있으며 정조 3년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하여 지화눈(至和門)으로 칭하였고,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 문이며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으며 성남으로 통하는 관문 역할을 하는 문이다.
- 인조 14년에 청태종의 침공(병자호란)으로 인조 임금이 이곳으로 피신하여 45일간 항전한 유서 깊은 곳이다.
- <남문 앞 역사 터>는 성남시가 문화재청과 협의를 거쳐 2007. 5.15부터 약 6개월간의 공사로 2007.11.19 준공하였으며, 성문 앞에 식재된 380여년 된 느티나무와 원형이 가장 잘 보전된 것으로 평가받는 남문은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역사 공간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 
- 성남시 보호수인 느티나무(4주)는 성곽방어의 특성을 고려하여 남문을 시각적으로 차폐하기 위하여 식재하였을 가능성과 성문 주변이 평상시 왕래가 많고 지형상 경사가 심하여 우수 시에 토양유실을 막기 위해 식재하였을 것으로 추론되는 역사터다.   - 성남시

남문(지화문) -  백련사 - 주 등산로 - 산성유원지 입구 - 검단산 - 시계 등산로 -   남문 (지화문)      

 

 

보호수...느티나무, 수령 약 450년( 지정일자 2006.6.20), 수고 14~17m, 나무둘레 80~160m

남한산성 성곽은 인조 4년(1626년)에 준공되었으며, 느티나무(보호수)는 당시 성곽사면 토양유실 방지 및 차폐의 목적으로 식재된 것으로 추정된다. 남한산성 순환도로 터널이 개통된 후 폐도 부지가 된 남문 앞 느티나무 주변을 2006년 재정비하여 느티나무 생육환경개선 후 총 4주를 보호수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 성남시 중원구.

 

 

오늘은 전면의 성곽을 따라 청량산 수어장대로 등산해 보려 한다.

 

느티나무 보호수 2그루가 보인다.

 

 

남문 앞 이정표:   <- 1.5km 수어장대, <- 2.1km 우악문(서문), -> 종로 0.7km.

 

남문  南門.至和門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남문은 남한산성에 있는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으로 현재에도 출입이 가장 많은 문이다. 선조 때의 기록을 보면 동문, 남문, 수구문의 세 문을 수축하였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남문은 인조 2년(1624)수축되기 이전 부터 이미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남문은 정조 3년(1779) 성곽을 보수할 때 개축하며, 지화문(至和門)으로 이름이 붙여졌으며 4대문 중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는 문이다.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처음 남한산성에 들어올 때 바로 이 문을 통해서 들어왔다.  

 

 

남문 상부

 

검단산(536.4m) 방향 경치

 

 

검단산, 분당 방향

 

성남시내 방향

 

영춘정 봉우리 방향

 

수어장대가 있는 청량산 방향

 

앗, 영춘정

 

현위치:  영춘정

 

 

서울 강남, 잠실 방향...롯데월드타워 (555m)

 

마지막 수어장대 가는 성곽 길

 

 

제6암문 (서암문)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의 비밀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도 설치하지 않았다. 이 암문은 성벽의 흐름 방향과 달리 입구가 북서쪽을 향하고 있어 외부에서 쉽게 관측되지 않도록 하였다. 또한 북동쪽의 성벽을 돌출하여 암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원성에 설치된 12개 암문의 외측 개구부는 대부분 홍예식이지만 제2암문과 더불어 이 암문의 개구부는 평거식이다. 인조 15년(1637) 1월 23일, 한밤중에 습격해 온 청병을 크게 물리친 곳이라 하여 이 암문 부근을 '서암문 파적지'라 부른다. 

 

 

↗ 수어장대

 

 

수어장대:

 

 

청량당(淸凉堂)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호):  


청량당청량당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 사당은 남한산성 쌓을 때 동남측 축성의 책임자였던 이회 장군과 그의 부인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이회는 공사비를 횡령했다는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고 이 소식을 들은 부인 송씨는 한강에 몸을 던져 따라죽었다. 이회는 죽을 때 자신의 죄가 없으면 매 한마리가 날아올 것이라 에언 했는데 과연 매가 날아와 그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한다. 후에 누명이 벗겨지고 그가 맡은 공사가 가장 잘된 것으로 알려지자 사당을 지어 초상을 안치하고 넋을 기렸다. 원래의 청량당은 6.25 전쟁때 소실 되어 다시지었다. 서장대가 있는 산 이름이 청량산이므로 청량당이라 이름 지었다.  


 

보호수 은행나무 ..... 수령 360년, 수고 2.5m, (지정일자 1983. 03. 10)

 

앗, 수어장대

 

사적 제57호 남한산성  

남한산성 수어장대:  보물

장대란 지휘와 관측을 위해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누각 건물로 남한산성에는 5개의 장대가 있었다. 수어장대는 남한산성 서쪽에 있어 본래 '서장대' 라고 불렸다. 병자호란 당시에는 단층 누각이었고, 수어청 우영장이 서장대에 머물며 군사를 지휘하였다. 조선 영조27년(1751) 광주 유수 이기진이 수어장대를 증축하였다. 수어장대에서는 수어사가 수어청의 군사를 지휘하였는데, 정2품 상사에 해당하였다. 수어청은 한양을 수비하는 5군영의 하나로, 본래 한성부 북부 진장방 (오늘의 서울 종로구 삼청동, 팔판동,화동 일부)에 그 본청이 있고, 광주부윤을 부사로 삼아 남한산성을 관할케 하였다.  그러다 운영의 효율성을 도모하고자 정조19년에 본청을 완전히 남한산성으로 옮기고, 광주유수가 수어사를 겸하게 하였다. 남한산성 수어장대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로 관리되어 오다 2021년에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승격되었다. 또한, 수어장대는 세계문화유산 남한산성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 중 하나인 군사 경관 (장대)에 해당한다. 수어장대는 여러 문헌에 등장하는데,  그중 조선 숙종의 정비인 인경왕후의 아버지 김만기는 <서장대기>에서 아래와 같이 언급하였다.

" 비록 한강의 흐름을 기울여도 그날의 비린내는 씻지 못할 것이다. 만약에 혹시라도 풍경이나 구경하고 유람이나 탐하면서 다시는 감개하고 탄식하는 마음이 없다고 하면 이는 이른바 그 양심을 잃은 자이다. "    

 

 

수어장대.

 

병자호란:

 

우리 민족의 삶을 바꿔놓은 전쟁 "


병자호란 조선 청나라가 군사력으로 부딪힌 동아시아의 대사건입니다. 이 전쟁을 계기로 동아시아의 질서는 급격하게 청나라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우리 민족 역시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됩니다. 이 병자호란의 중심에는 바로 남한산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산성에서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각지의 근왕병과 지원병이 청군의 남한산성 포위를 풀지 못 한채 모두 격퇴되고 말았고, 설상가상으로 두 달 분의 비축물자가 바닥나자 결국 인조는 항복을 결심하기에 이릅니다. 패배의 결과로 인조 송파에 위치한 삼전도로 걸어 내려가 '삼배구고두례'(*)를 행하고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습니다. 이로 인해 조선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고 이후 수많은 변화를 맞게됩니다. 패배를 씻기 위해 북벌론이 대두되기도 하고, 명분만을 중시하던 사상체게의 변화가 일어나 수많은 실학자들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민중 계층에서도 패배한 전쟁의 결과를 극복하기 위한 수많은 민담과 설화들이 창작되었습니다. 병자호란 시대의 변화를 알리는 기폭제였으며 동시에 우리 민족의 사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역사의 분기점이 된 사건이었습니다

 

(*)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삼배구고두례'는 중국 청나라 시대에 황제나 대신을 만났을 때 머리를 조아려 절하는 예법이다. 삼궤구고두례를 행하는 방식은 “”(跪)의 명령을 듣고 무릎을 꿇는다. “일고두(一叩頭)", “재고두(再叩頭)", “삼고두(三叩頭)"의 호령에 따라 양 손을 땅에 댄 다음에 이마가 땅에 닿을 듯 머리를 조아리는 행동을 3차례 하고, “기(起)"의 호령에 따라 일어선다. 이와 같은 행동을 3회 반복한다. 인조는 삼전도에서 겨울 얼어붙은 맨 땅에 머리를 9번이나 찧으면서  나라 숭덕제(崇德帝(1592 ~ 1643; 태종太宗) 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말았다.역사적인 치욕이다. 

청나라의 강요로 세원진 삼전도비가 지금도 잠실 롯데백화점 곁에 있는 석천호수 서호 대로변 방향 코너에 설치되어 있다. 

 

※ 병자호란 주요 연표:

1598년 (선조 31년): 임진왜란 끝남.
1608년 (선조 41년): 광해군 즉위.
1616년 (광해군 9년): 누루하치 후금 건국.
1618년 (광해군 11년): 명과 후금의 전쟁, 명에 원병 파견함.
1619년 (광해군 12년): 강홍립 후금에 투항. -> (중립외교).
1622년 (광해군 15년): 명나라 장수 모문룡 가도에 주둔.
1623년 (광해군 16년): 인조반정으로 인조 즉위. -> ( 친명배금정책 )
- 1624년 (인조 2년): 이괄의 난.
1627년 (인조 5년): 정묘호란 발생.
1635년 (인조 13년): 후금 내몽고 점령.

- 1636년 (인조14년): 후금 청으로 국호 변경하고, 조선에 군신관계 요구 ( 척화론과 주화론 대립 ).

                                  12월 28일 병자호란 발생. 남한산성 전투.
1637년 (인조 15년): 2월 24일 인조 송파 삼전도에서 항복. 청과 사대관계 맺음. 
- 1644년 (인조 21년): 명나라 멸망. 청 중국 통일.

 

 

무망루

 

매바위, 그리고 '수어서대" 암각글씨.

청량당에 위폐가 모셔진 남한산성 공사 책임자 중 한사람이었던 이회가 공사비 횡령에 연류되어 억울하게 처단되자 죽 전에 자신의 죄가 없다면 매가 날아와 이 바위에 앉을 것이라고 유언을 했는데, 그 후 과연 매가 날아와 매바위에 구슬피 울었다고 하며, 다시 확인해 보니 죄가 없음이 드러났으며, 오히려 다른 구간보다 성이 더 견고히 축성되었음이 밝혀졌다. 예나 지금이나 모함은 한 인간을 파멸로 이끌기도 한다.

 

 

무망루


조선 영조27년(1751) 광주 유수 이기진이 증축한 수어장대 2층의 내편(內篇) 문루로서 그 편액(扁額)이 2층 누각에 있어 1989년 전각을 건립하고 이 안에 현판을 새로 설치 일반인이 볼 수 있게 하였다. 무망루는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혔다가 귀국 후 북벌을 꾀하다가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이믐지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