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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구릅/나의 산행

① 고골 남한산성, 남한산성 행궁 - ( 2024.02.13 )

by the road of Wind. 2024. 2. 14.

고골 남한산성, 남한산성 행궁 

- ( 2024.02.13 )

 

- 《  하남 고골 ~ 전승문 ~ 종로  》:

 

하남 고골계곡을 거쳐 남한산성 북문(전승문)까지 등산한 후, 산성마을로 내려가서 남한산성 행궁을 돌아보고 왔습니다. 봄 날씨 같이 따뜻한 날씨였습니다. 그런데, 고골 계곡길을 걸으면서 얼음이 완전히 녹지 않고 있는 곳들이 있어 음지인 북문 근처 조금 가파른 길을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등산하는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아직은 아이젠을 비상으로 챙겨 가방에 가지고 다녀야 함을 절실히 느꼈읍니다. 산행시 예기치 않은 미끄러운 얼음, 눈길 구간에서는 아이젠 없이는 아주 위험합니다. 설 전날 부터 배탈을 만나 그동안 죽만 먹으며 지나서 몸에 힘이 조금 빠져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오늘은 북문에서 수어장대까지의 성곽길 산책은 생략하였습니다. 그 대신 남한산성 행궁을 둘러보는 것으로 오늘의 산행을 끝냈습니다.  

 

▶ 등   산:  걸음수 5,999 steps, 소모열량 255 kcal, 거리 4.13 km, 소요시간 01:51 hrs, 속도 3.4 km/h.

 코   스: 하남 고골계곡 길 -  남한산성 북문(전승문) - 남한산성 행궁 - 침괘정 - 종로로터리 (버스정류장).

 

 

이곳 산불감시초소 있는 부분까지 차로 점프하여 (아들이 협조해 줌) 등산 시작...

 

 고골:  

하남의 지형은 낮은 야산과 구릉지대가 펼쳐져 있고, 북쪽으로 흐르는 한강에는 망월천, 덕풍천,산곡천 같은 작은 샛강이 흘러 들어가며 강줄기의 옆에는 평야가 형성되어 있어서 B.C 4000여년 전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였으며, 수로를 이용한 타 지역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여 문화가 융성했던 지역이다. 또한 남쪽으론 남한산, 동쪽은 검단산, 북쪽으론 한강이 흘러 군사의 요충지로서 더할 나위 없이 좋아 백제의 시조온조께서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470여 년간 한성백제의 수도로 위상을 떨치던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한수의 쟁패를 놓고 삼국이 각축을 벌이던 역사의 현장 이기도 하다. 고려시대에 접어들어선 후삼국을 통일하고 태조의 개국을 도와 새로운 나라의 기틀을 조성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광주의 대호족 왕규가 세력을 이루었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종때(983년)에 이르러서는 지방통제를 위한 지방관제를 실시하여 지방행정상 요지에 12목 (광주,양주,충주,청주,공주,진주,상주,전주,나주,송주,해주,황주)을 설치하였는데 광주도 12목의 하나로서 읍치가 바로 하남의 춘궁동(고골) 이었다. - ( 하남시 )

 

 

-> LATTENT(라땅드), 토박이, ↑ 물레방아, 고골산장.

 

( ▲ 2022.03.04 사진 )

빨간 깃발, 산불감시초소

 

덕풍천...

 

전승문(북문) - (1.4km) -  <현위치> -   (4.4km)  - 광주향교  

토지 활용

" 지급자족으로 부족한 땅, 상업으로 눈을 돌릴 수 밖에 "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남한산성의 토지활용 규모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선시대 토지규모는 보통 결이라는 단위를 사용하였는데 이 결은 오늘날의 미터법처럼 즉정값에 따를 절대규모가 아닌 토지의 소출량에 따를 상대적 규모였습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성내 토지규모가 124결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현재 미곡단위로 환산해 보면 남한산성에 속한 토지에서 1년간 생산되는 곡식은 22톤이었는데, 사실 이것은 매우 부족한 양이었습니다. 모민정책을 추진하여 일정 수 이상 (4,000명)의 주민이 살아가기 시작한 인조 이후에는 산성내의 경작지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산성 내부에는 행궁 및 관아를 포함한 각종 관청과 기관, 또 거주하는 주민들의 가옥이 들어서기에도 부족한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농사지을 땅은 없었다고 보아도 무방하겠습니다. 따라서 산성 외부에 경작지를 마련하였고, 이마저도 부족하여 주변 지역에서 식량을 수급해야 했으니, 남한산성이 상업지의 중심지가 되고 소비도시화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겠지요.  

 

라땅스 COFFEE....간판이 보이지 않는 것같아, 영업중인지 아닌지 그 상태를 알 수가 없다. 

 

 

마무리를 못한 집

 

토박이 ( 9031-793-5220/ 경기 하남시 고골로 398번길 71 (상사창동 388-2)...고골계곡 마지막 음식점

 

고골토박이

장닭(산지직송): 
능이전복장닭 90,000, 한방장닭백숙 80,000, 옻장닭 80,000, 
장닭볶음탕 80,000,

오리(한마리당 3인기준)
능이전복오리백숙 85,000, 옻오리 80,000, 한방오리백숙 80,000, 오리구이(주물럭/로스) 75,000, 

삼겹살,목살(1인분 200g, 2인분 이상 주문가능)  싯가.

토종닭(한마리당 3인기준)
능이전복닭백숙 80,000, 옻닭 75,000, 한방닭백숙 75,000, 닭볶음탕 75,000,

안주류:
감자전 18,000, 헤물파전 18,000, 도토리묵 15,000, 메밀전병 15,000, 마른안주 20,000

 

 

<- 전승문 1.2km, -> 광주향교 4.6km

 

세미길(稅米)

 

한강 수로를 이용하여 전국 각지에서 세곡, 군량미, 둔전세 등을 둔지나루 창모루

하역하여 그곳에 있던 창고에 보관하였다가 마차, 소, 등짐을 이용하여 골짜기에 있던 

상사창, 하사창으로 운반 보관하였고, 여기에서 다시 등짐으로 산비탈을 올라 산성 안

의 여러 창고로 옮길 때 다니던 길이라 한다. 

 

↑ 전승문 0.8km, ↓ 광주향교 5.0km

로마의 길
조선의 길

세계관의 특징을 보여주는 조선의 길 "

로마의 길과 조산의 길은 해당 국가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의 특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로마인들에게 로마 주위의 세계는 정복과 문명화의 대상으로 사유되었습니다. 반면 조선인의 세계관에서 조선은 중세 동아시아와 세계의 중심이 아니었습니다. 조선의 대외관계를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단어는 바로 사대교린이었는데 명나라를 우러르고 다른 민족과는 교제를 한다는 의미로 정복과는 거리가 먼 태도였습니다. 조선은 초기를 제외하고는 해양이든 대륙이든 외부로의 진출을 모색하는데 매우 소극적이었습니다. 외부와의 투쟁에서 소극적이었던 조선, 주변 세계의 정복에 적극적이었던 로마, 두 민족의 세계관의 차이는 두 민족이 가지고 있는 좁은 길과 넓은 길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119 국가지점번호 다사 7249 4288

 

남한산성 북문입구 이정표:

 

<- 0.8km 고골계곡, <- 0.5km 반딧불이서식지, <- 1.4km 위례둘레길(법화골),
->   위례둘레길(남한산성) 0.8km, -> 전승문(북문) 0.5km 

 

* 법화골 (法華谷_법화곡)....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태종의 매부인 양고리가 조선의 원두표 장군에게 패하여 전사하자 전쟁이 끝난 후 그의 영혼을 달래기 위하여 남한산성 밖에 앙고리의 고향인 법화둔의 지명을 따서 세운법화암이라는 암자가 있었던 골짜기라 하여 법화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지금도 옛 절터에는 부도(浮屠) 3기가 남아있다.  

 

 

북문 가는 계단 길 시작

 

<- 0.6km 전승문(북문) , -> 0.9km 고골계곡, -> 0.6km 반딧불이서식지

 

마패....."공무여행 중의 말 이용증 "

 

역에는 말을 대기시키는 마방이 있어 공무 여행을 하는 관리들이 조정으로 부터 발급 받은 마패를 제시하면 지친 말을 새 말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각 역마다 역마를 사용하려면 마패라는 증명이 잇어야 하는데, 마패 한 면에는 품위에 따라 탈 수 있는 말의 수가 새겨져 있고 다른 면에는 연호(년,월,일)와 상서원인(尙書院印)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긴급한 경우 수시로 말을 지급하는 수시급마(隨時給馬) 규정도 있었는데요, 능행차가 잇는 경우 각 임금의 능에 바칠 제사물품을 운반할 때나 각 진영의 대장, 통역사인 역관, 징병 장교인 압공인에게 말을 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수시급마 규정은 결국 역마를 남용하는 폐단을 불러 역마제도가 문란해지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한편 마패를 파손하거나 분실하면 곤장 90대에 2년 동안 걸어 다녀야 하는 형벌이 내려졌습니다.

 

미끄러운 길

 

벌봉 방향

 

<- 0.2km 전승문(북문), -> 위례둘레길(남한산성) 0.2km, -> 위례둘레길(법화골) 2.0km

↘ 위례둘레길(고골계곡) 1.4km, ↘ 반딧불서식지 1.1km

 

마방


사신이나 관리들의 발이 되는 말을 키우는 곳 "

마방은 말을 키우는 곳간이라는 의미로, 일종의 마구간을 말합니다. 오가는 사신이나 국가 관리들에게 상서원에서 발급하는 마패에 따라 마필을 제공하였습니다. 이 마필을 사육하기 위해서 각에서 마방(마구간)을 설치하였던 것입니다. 간략하게 마방의 규모를 살펴보면 적게는 두세마리 부터 많게는 수십 마리까지 말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준비된 말의 수와 역참의 마방 크기는 해당 옛길의 중요성에 따라 달라졌습니다. 역참제가 폐지된 1895년 이후 전국 대부분의 역참을 헐려 사라졌기 때문에 큰 규모의 역참마방을 확인 할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내부가 개조되는 하였으나  중대 규모의 역할의 크기를 실제 남아있는 건물로 짐작할 수 있는 곳은 '하남마방집' 식당이 거의 유일한 곳으로 보입니다.   

 

( ▲ 2024.02.09 사진: 하남시 천현동 428-4 소재 마방집 식당 (왼쪽 기와대문),

하남-광주간 국도변 ) 

 

산벛나무.....4월에 연홍색 또는 백색 꽃이 피며, 해인사 팔만대장경의 일부가 산벛나무로 만들어졌다.

 

앗, 전숭문(북문)

 

벌봉 방향

 

북문 앞 이정표:

<- 2.1km 위례둘레길(벌봉), <- 1.1km 위례둘레길(서문), 
-> 위례둘레길(법화골) 2.2km, -> 위례둘레길(고골) 1.3km, 

 

남한산성

 

오른쪽 멀리 청량산 수어장대...
-> 서문, 수어장대 

 

새로 재건축 복원된 북문(전승문)

 

1코스 "남한산성 역사 테마길",  (현위치) 전승문(북문) 

 

1코스 장수의 길 ->

2코스 국왕의 길<-

5코스 산성의 길 <->

 

북문, 全勝門전승문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북문은 병자호란 당시 성문을 열고 나가 기습공격을 감행했던 문이다.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에서 '전승문'이라고도 하였다. 당시 영의정 김류의 주장에 의해 군사 300여명이 북문을 열고나가 청나라 군을 공격하였으나, 적의 계략에 빠져 전멸하고 말았다. 이를 '법화골 전투' 라고 하는데,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있었던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였다. 정조3년(1779) 성곽을 개보수할 때 성문을 개축하고 이름을 붙여 전승문(全勝門)이라 한 것은 그 때의 패전을 잊지말자는 뜻이었을 것이다. 선조 때의 기록을 보면 산성 내에 동문과 남문, 수구문의 3개의 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북문인조2년(1624)신축된 성문이라고 생각된다.  

 

 

수어장대 방향

 

남한산성 마을, 행궁 가는 길

 

세계유산 남한산성 종합안내판

 

소풍

<- 2.9km 지화문(남문), <- 0.1km 전승문(북문), ↑ 종로 0.3km, -> 숭렬전 0.35km 

-> 국청사 800m

 

닭죽

" 40년 전통의 닭죽 "

근대로 접어들면서 남한산성이 행정.군사도시로서의 위상을 잃는 동시소비도시로서의 특성마저 약화되면서 산성 안에 있던 장시도 점차 약화됩니다. 이러한 변화의 시기에 남한산성에서 삶을 지속하고자 했던 주민들새로운 생계수단을 모색해야 했습니다. 이 와중에 남한산성은 수려한 자연경관과 유서 깊은 역사문화 자원을 가진, 서울에서 멀지 않은 '놀려 가기 좋은 곳'이라는 이미지가 생겨났습니다. 이후 남한산성은 관광지로 주목 받게 되며 일제도 이러한 현상을 장려합니다. 이 때 산성 인근에 거주하며 남한산성을 떠나지 않았던 주민들은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음식장사를 시작하게 됩니다. 특히 쉽게 잡아 빠르게 조리할 수 있는 닭죽, 닭백숙 등의 음식이 인기를 끌었고 점차 관광객들 사이에서도 남한산성의 숲과 계곡을 즐기며 먹는 닭 요리가 유명세를 치르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옛위치에서 옮겨 새로 문을 연 닭죽촌에서 영업을 하는 식당들은 너도 나도 남한산성 40년 전통의 닭죽이라는 이름을 걸고 푸짐한 인심과 정성스러운 음식으로 여전히 많은 손님들을 모으고 있답니다. 

<- 150m 전승문, -> 남한산성 행궁 500m   

 

남한산성

전승문(북문) ↑, 송림정 ↑, 동촌 ↑,  국청사 <-, 한경직목사 우거지 <-, 숭렬전 <-, 계곡산장 <-, 카페 작은 숲 <-,

영락수련원 <-, 용마루 <-,  석촌 <-, 돌집 <-, 먹거리창고 <-, 백송식당 <-, 카페 남한산성 <-

 

단팥죽, 대추차

 

cafe,,,"환희와 긍정의 청룡 ", 윤향 제1회 개인전

 

청와정...cafe & 팬션

 

종로 가는 길

 

집 지키고 있는 커다란 진돗개 한 마리

 

석산정

 

백제장....불고기와 산나물

 

CAFE 오로지

 

산성 마을 종로 로터리

 

▶ 남한산성 산성리 마을 내력:

남한산성내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아주 먼 과거로 올라가겠지만, 본격적으로 대규모의 취락이 형성된 것은 인조5년(1627)에 광주부의 읍치산성으로 옮기고 나서부터 라고 하겠다. 현재 남한산성 내 마을의 행정구역은 ‘산성리’이며, 1914년 일제가 조선의 지방행정구역을 대대적으로 개편할 때부터 이처럼 불리기 시작하였다. 산성리 마을조선후기 광주 유수부 시기에 두 개의행정 단위로 나누어져 있었다. 광주 행궁에서 동문에 이르는 도로를 경계로 하여 남쪽은 남동, 북쪽은 북동으로 나누어진 것이다. 그러다가 1910년경 산성내 마을군내면 광주읍에 속하게 되고, 마을은 광주읍 동부, 광주읍 서부, 광주읍 남부, 광주읍 북부, 광주읍 중부5개의 행정단위로 나누어졌다. 그리고, 1914년 광주읍 5개 마을이 중부면 산성리로 통합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1917년 광주군청이 산성 안에서 경안으로 이전하면서, 300여 년간 화려한 군사·행정 중심지였던 남한산성내 산성리 마을은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산성리 마을은 풍부한 농경지가 있는 곳도 아니었고, 행정 중심지로서의 기능만을 수행한 곳이었다. 따라서 광주군청과 함께 치안·체신기관이 떠난, 교통조차 불편한 산촌 마을인 산성리는 주민들이 생계조차 유지하기 어려웠다. 1,000여호 4,000여 인구를 자랑하는 산성리 마을 인구는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많은 주민들이서울과 광주, 여주, 이천, 양평 등지로 떠났고, 해방과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는 70∼80호로 줄어, 산성리는 한적한 산촌 벽지로 변하였다. 한편 산성리 마을에는 산성 내 소나무를 보호하기 위한 금림조합이 결성되어 1945년까지 활동하였다.  - 경기도 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남한산성 역사 테마길:

남한산성 역사 테마길은 세계유산이며 도립공원인 남한산성의 가치를 체험할 수 있도록 테마별로 구성된 탐방로입니다. 국가지정 사적 제57호인 남한산성과 제480호인 남한산성 행궁을 비롯한 수많은 문화재가 있으며, 백제 시조 온조왕, 병자호란 등 많은 역사적 으미를 간직한 장소입니다. 탐방객은 관심분야와 여건에 맞는 코스를 선택하여 체험 할 수 있습니다.  

장수의 길  1코스, 국왕의 길 2코스,  승병의 길 3코스, 옹성의 길 4코스, 산성의 길 5코스.

 

 

문화관광 해설사의 집

 

중부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남한산성로 784-29 일원

중부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광주군 중부면 주민 200여 명이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한 곳이다.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에서 시위는 1919년 3월 27일 새벽 남한산에 횃불이 오르는 것을  신호로 시작되었다. 이날 오전에 중부면 단대리, 탄리, 수진리 주민 300여 명이 남한산성 남문 아래에 있는 옛 중부면사무소(현재 남한산성 행궁) 앞까지 들어갔다. 시위대 중 일부는 일본에 적극적으로 협력해 온 중부면장을 사무소에서 끌어내 면장의 머리를 곤봉으로 내리쳐서 실신시키기도 하였다.  

 

 

<- 500m 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