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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구릅/나의 산행

② 고골 남한산성, 남한산성 행궁 - ( 2024.02.13 )

by the road of Wind. 2024. 2. 14.

 고골 남한산성, 남한산성 행궁 

- ( 2024.02.13 )

 

- 《  남한산성 행궁 》:

 

국왕의 길 2코스


국왕이 행차하여 머물던 남한산성 행궁, 백제 온조왕 사당숭렬전, 인조가 항복하러 성을 나간 우익문(右翼門; 서문)을 볼 수 있습니다. 국왕의 길에서 울창한 소나무 숲길과 함께 세계유산 남한산성의 자연환경을 체험해 보세요.

 

 

천흥사 동종

 

남한산성 종각의 천흥사의 동종..

종각은 아침과 저녁 일정한 시각에 종을 치던 곳으로 조선 시대 때 주요한 지방에는 시내 한가운데 종을 매달아두고 쳤다. 남한산성 종각에는 천흥사 동종이 있었는데, 남한산성으로 언제 옮겼는지 알 수 없다. 천흥사 동종 몸체에 새겨진 글귀에 따르면 고려 현종1년(1010)에 주조된 것으로 원래는 태조4년(921)에 태조가 창건한 충청남도 천안시 성거읍 천흥리 천흥사에 있었다. 이 도옹은 고려시대의 동종을 대표할 수 있는 우수한 작품으로 높이 170cm, 입지름 100cm의 크기이다. 천흥사 동종은 일제강점기 이왕가박물관으로 옮겨졌다가 해방이후 덕수궁 미술관을 거쳐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남한산성 종각의 종은 2012년에 원형의 문양 및 형태를 그대로 재현하되 타종시 종 울림을 좋게 하기 위해 약 3배 정도 더 크게 제작한 것이다. 남한산성 종각은 세계유산 남한산성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 중 하나인 통치경관(읍치요소)에 해당한다.  
      

* 참고: 천흥사 동종 몸체에 세겨진 명문 ‘ 聖居山天興寺銅鐘總和二十八年庚戌二月日_(성거산 천흥사 동종 총화 이십팔년 경술이월일)’ 에 따르면 고려 현종1년(1010)에 주조된 것 으로 원래는 태조4년(921)에 태조가 창건한 충청남도 천안시 성거읍 천흥리 천흥사에 있었다고 한다.

 

남한산성 남문 주차장 방향

 

인화관(人和館): 

 

남한산성 행궁 동쪽에 위치한 인화관은 사신 등 손님들이 머무는 객관(客館)이었다. 한양에 계신 왕을 위해 매월 2차례 예를 올리기도 하고, 중앙에서 관리가 오면 묵을수 있는 용도라고 한다. 인화관은 인조 2년(1624)에 세운 것을 순조 29년(1829)에 수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뒤 빈터만 남은 것을 새롭게 복원을 추진하여 2015년에 완공되었다. 

 

 

남한산성 행궁 가는 길

 

행궁 매표소

 

관람안내:

하절기: 04월~10월:  10:00 ~ 18:00

동절기: 11월~03월:  10:00 ~ 17:00

 

* 매주 월요일은 휴궁일입니다. (공휴일 제외)

* 종료 30분 전까지 매표가능.

 

  남한산성 행궁 입장료

- 개인:  성인(만19세~만64세)  2,000원, 청소년(만7세~만18세) 1,000원
- 단체:  성인(만19세~만64세)  1,600원, 청소년(만7세~만18세) 800원

  관람료 무료 대상자:

1. 경기도민(신분증 필수)
2. 만 6세 이하, 만 84세 이상 노인(외국인 제외)
3.. 장애인(1~3급 동반 보호자 1인 포함)
3. 독립운동자, 국가유공자, 5.18민주유공자, 특수임무 수행자 및 그 유족
5. 고엽제 후유증 환자 및 고엽제후유증 2세
6. 한복을 착용한 사람
7. 군복을 입은 현역 군인
8. 학생 인솔 등 교육활동으로 입장하는 초,중,고 교원
9. 그 밖에 도지사가 인정하는 자.

상시 해설안내:  ( 성수기 04월 ~ 06월, 09월~10월, 비수기 11월 ~ 03월, 07월~08월 )

1회:  성수기 평일 -,         휴일(공휴일) 10:00 / 비수기 평일 - , 휴일(공휴일) -
2회:  성수기 평일 11:00,  휴일(공휴일) 11:00 / 비수기 평일 11:00 , 휴일(공휴일) 11:00.
3회:  성수기 평일 -,         휴일(공휴일) 13:00 / 비수기 평일 - , 휴일(공휴일) 13:00.
4회:  성수기 평일 13:00, 휴일(공휴일) -         / 비수기 평일 - , 휴일(공휴일) -.
5회:  성수기 평일 14:00, 휴일(공휴일) 14:00 / 비수기 평일 14:00 , 휴일(공휴일) 14:00.
6회:  성수기 평일 -,         휴일(공휴일) 15:00 / 비수기 평일 - , 휴일(공휴일) 15:00.
7회:  성수기 평일 16:00, 휴일(공휴일) 16:00  / 비수기 평일 - , 휴일(공휴일) -.

 

한남루

 

한남루는 상, 하궐을 포괄하는 행궁 외곽 담장의 정문에 해당하는 행궁 외삼문 누각이다. 정조 22년에 광주 유수 홍억이 행궁 입구에 한남루라는 누문을 대문으로 세웠으나 20세기 초반에 붕괴되었다. 한남루란 한강 남쪽 성진(城鎭)의 누대라는 뜻이며 프랑스 영사 프랑뎅(Hippolyte Frandin)이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2011년 같은 위치에 한남루를 복원하였다.

남한산성 행궁


행궁(行宮)이란 임금이 서울의 궁궐을 떠나 행차하면 임시로 머무는 곳을 말한다. 남한산성 행궁은 전쟁이나 내란 등 유사시에 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하여 종묘사직을 갖춘 전국 유일의 행궁으로 건립되었으며, '광주행궁' 또는 '남한산성 행궁'이라 불렀다. 산성을 가로지르는 길에서는 볼 수 없도록 낮은 언덕에 가려진 곳에 자리를 잡은 남한산성 행궁은 지형의 높낮이에 의해 상궐과 하궐로 구분한다. 상궐내행전으로 1625년에 준공한 70여칸의 건물이며, 서쪽 담에 문이 있어 좌승당으로 통하였다. 하궐외행전으로서 154칸 규모로 상궐과 동시에 지었고, 상궐 삼문 밖에 있으며, 서쪽 담의 문으로는 일장각과 통한다. 남한산성 행궁이 지어지고 10년 후인조14년(1636년)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인조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47일간 항전하였다. 전쟁 중 청군이 쏜 대포의 탄환이 외행전 기둥에 맞기도 하였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남한산성 행궁에는 숙종.영조.정조.철종. 고종 등이 여주 영릉서울 현릉.인릉으로의 능행길에 머물렀다. 제 역할을 다하던 남한산성 행궁은 한일신협약(1907년) 이후 일제에 의해 훼손되었다. 오가는 사람없이 방치된 채로 남아있던 몇몇 건물들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인해 완전히 멸실되었다. 그 후 1999년에 와서야 남한산성 행궁 터는 1차 발굴 조사를 시작으로 2002년에 상궐 복원 공사를 완료하였다. 2004년에는 하궐지의 발굴 조사와 좌전의 복원 공사를 완료하였고, 2012년에 하궐 복원공사를 완료하였다. 2014년 남한산성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과정에서, 남한산성 행궁은 남한산성의 통치경관으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조선 정조 때 유수 홍억에 의해 지어진 한남루의 주련에는 아래와 같은 글귀가 적혀있다.

"....비록 원수를 갚아 부끄러움을 씻지 못할지라도 / 縱未能復讐雪恥 (종미능복수설치)    
항상 그 아픔을 참고 원통한 생각을 잊지 말지어다 / 恒存着忍痛含寃 (항존착인통항원) "

남한산성행궁  국가사적 제480호

 

남한산성 행궁 안내도


후원                                                  영녕전
        이위정                                                    좌전
                                                              정전
           재덕당                
내행전           좌승당
외행전          일장각
              통일신라건물지

외삼문 남행각  외삼문 북행각
                   한남루

 

한남루 전면

한남루 후면

 

한남루 주련의 글씨

守一城講龍虎韜(수일 성강용 호도)  - 한성을 지킴에 용호(龍虎)의 도략(韜略)을 강(講)하고,
鎭百里閱貔貅士(진백리 열비 휴사)  - 백리(百里)를 누르니 범 같은 용사를 훑어 보도다.
大將軍御下威信(대장군 어하 위신)  - 대장군은 아랫사람을 위엄과 신의로 다스리고,
養刺史宣上恩德(양자 사선상 은덕)  - 좋은 원님은 임금님의 은덕을 선양하네.
是地兼繭絲保障(시지 사선 상보장)  - 이 땅은 길쌈과 보장을 겸하지만
暇日則雅歌投壺(가일 칙아가 투호)  - 한가한 날에는 노래하며 투호하기도 한다네.
縱未能復讐雪耻(종미능 복수 설치)  - 비록 원수를 갚아 부끄러움을 씻지 못할지라도
恒存着忍痛含寃(항존 착인 통 함원)  - 항상 아픔을  참고 원통한 생각을 잊지 말지니라. 

 * 한남루 주련은 서예가 정도준 선생의 글끼를 받아,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40호 서각장 이규남 선생이 제작한 것으로 <重訂漢南誌 중정한남지> 헌종 13년(1847년)에 홍경모가 편찬한 경기도 광주군 광주읍지로 <규장각본>, <장서각본>이 있다.    

 

해설 안내:

1회

2회  평일 11:00 ,  주말.공휴일 11:00

3회

4회                       주말.공휴일 13:00        

5회  평일 14:00 ,  주말.공휴일 14:00

6회                        주말.공휴일 15:00 

7회

 

관람안내:

하절기: 04월~10월:  10:00 ~ 18:00

동절기: 11월~03월:  10:00 ~ 17:00

 

* 매주 월요일은 휴궁일입니다. (공휴일 제외)

* 종료 30분 전까지 매표가능.

 

외삼문 북행각

 

한남루

 

 

외삼문

외행전

 

외행전 外行殿

외행전은 하궐의 중심건물로 인조3년(1625년)에 준공되었다.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상궐 내행전과 동일한 전체 28칸 건물이지만 바닥면적 142m2이 내행전 167m2보다 작고, 내행전에 비해 6m정도 낮은 곳에 지었다. 병자호란 당시 왕이 병사들에게 음식을 베푸는 호궤(犒饋)를 이곳에서 행하였으며, 한봉(漢峯)에서 청나라 군이 홍이포(紅夷砲)를 쏘아 포환이 외행전 기둥을 맞추었다는 기록이 있다. 좌승당이 지어지기 전에는 광주부 유수의 집무실로 사용되었다. 현재 외행전은 2010년에 중건(重建)된 것으로, 발굴과정에서 통일신라 관련 유구들이 확인되어 건물지와 기와를 쌓은 곳 일부를 보존하고 있다.  

 

 

오른쪽 일장각

 

하궐 남행각 방향

 

외삼문 방향

 

통일신라 건물지

외행전 측면

 

외행전

 

일장각 日長閣:

 

행궁 하궐에 있던 광주부 유수가 사용하던 건물이다. 일장각은 수어장대가 위치하고 있는 청량산의 다른 이름인 일장산을 건물의 이름으로 한 것이다. 하궐 내부담장 밖에 있었던 여러 건물 중 하나로써, 인조 29년에 광주부 유수 이지연이 세운 건물이다. 1900년대에 촬영한 사진에서 일장각의 모습은 확인되지만 행궁지에 있었던 광주군 청사가 철거되는 과정에서 함께 철거된 것으로 보인다. 발굴조사 과정에서 건물지의 일부를 확인하였으며 현재 일장각은 2010년에 중건되었다.

 

 

의청문

 

내행전과 재덕당 사이 통로

 

재덕당으로 통하는 문

 

좌승당

 

좌승당 坐勝堂

상궐 내행전의 북쪽, 담장 밖에 있었던 좌승당은 광주부 유수의 집무용 건물이다. 순조 17년(1817년) 광주부 유수 심상규(沈象奎)가 건립하였다. '좌승坐勝'이란 '앉아서 이긴다'는 의미로 반드시 이길만 한 계책을 써서 적을 물리친다는 군사적 의지가 담겨있다. 좌승당은 발굴조사를 거쳐 정면 6칸, 측면 3칸으로 된 겹처마 팔작지붕의 건물로 2002년에 중건(重建)되었다.  

 

내행전 內行殿

상궐 내행전은 왕이 잠을 자고 생활하던  공간이다. 인조 2년(1624년)에 처음 지어졌으며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전체 28칸(167m2)의 건물이다. 가운데 3칸은 대청으로 되어있고, 좌우 2칸은 온돌방과 마루방이다. 대청을 제외한 3면에는 퇴칸을 두었다. 내행전의 기둥 위쪽 공포는 새의 날개처럼 생긴 부재를 두 개 겹쳐 쌓은 이익공 형식으로 행궁 내 건물 중 가장 격식이 높다. 기단은 장방형으로 가동한 돌을 3단 쌓아 경사가 급하고 평지가 협소한 약점을 보완하면서 동시에 장엄한 외관과 안정감을 주도록 하였다. 팔작지붕에는 용문양과 봉황문양의 막새기와를 사용하였다. 현재 내행전은 2002년에 중건(重建) 되었다. 

 

(2017.3.1) 내행전 임금님 용상

 

내행전 내부...일월오악도 병품이 둘러있다. 병풍은 평소에는 접어두었다가 임금이 주석할 때만 펴서 세운다. 혹시 자객이 숨어 있을 수도 있어서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궁궐이나 행궁에서 문을 3개 통과 해야만 임금의 얼굴을 볼 수 있는데, 이것도 침입자를 방어하기 위한 수단 아닌가 한다. 중국 황제의 경우 5개의 문을 통과해야 한다. 

 

내행전 내부 일월오악도 &  임금님 옥좌

 

( 2018.06.02 사진: 내행전 )

 

내삼문 뒤에 외행전 

 

재덕당 방향

 

在德堂 재덕당

 

明威門 명위문

 

이위정

이위정 以威亭 

이위정은 현재 좌승당 뒤편 후원(後園)에 2010년 중건(重建)되었다. 순조 17년(1817년) 광주부 유수 심상규가 활을 쏘기 위해 세운 정자(射亭)다. 건축 당시에 지은 '이위정기(以威亭記)'가 탁본과 함께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에 그 내용이 전해지고 있는데, 기문(記文)은 심상규가 짓고 글씨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썼다. '이위以威'란 '활로써 천하를 위압할 만하지만, 활과 화살이 아닌 인의(仁義) 와 충용(忠勇)으로써 능히 천하를 위압할 수 있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위정

 

* 남한산성 행궁 초고 지점에 있는 이위정을 보고 다시 한남루 방향으로 되돌아 나간다. 

 

좌전 ( 영녕전 & 정전 ).....

 

좌전권역은 유사시 종묘에 모셔져 있는 역대 왕의 신주를 옮겨 보관하도록 한 공간이다. 좌전은 행궁 창건 당시에는 없었으나 숙종 37년(1711년)에 세운 것이다. 

 

정전

정전은 조선 왕조 임금의 신위를 모신 건물로 영녕전과 구분하여 태묘라 부르기도 한다. 정전은 당시 재위하던 왕의 4대조와 조선시대 역대 왕 가운데 공덕이 있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례를 지내는 곳이다.

영녕전
영녕전은 태조의 4대조와 정전에서 계속 모실 수 없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옮겨 모신 곳으로, 영년전의 제례는 정전 보다 한 단계 낮게 행해졌다.

 

왼쪽 좌승당...오른쪽 재덕당, 내행전, 외행전

 

재덕당 & 내행전

 

재덕당 오른쪽에 조그만 문이 있어 이 문을 지나 아래 지점의 한남루 방향으로 내려 갔다.

 

왼쪽 내행전 & 오른쪽 상궐 남행각

 

상궐 남행각 오른쪽 담장, 그리고 담장 밖 오래되어 잘려나간 고사목 

 

외행전

 

외행전

 

뒷편 내행전, 그리고 외행전

 

 

 

침괘정 가는 길:

침괘정

 

보호수 느티나무...수령 210년, 수고 28m, 나무둘레 3.4m, 지정일자 1983.03.10

 

침괘정 뒷 모습

 

침괘정: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5호


무기제작소라 알려져 왔으나 온돌과 마루방, 회랑처럼 된 툇마루 등 건물 구조로 보아 집무실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건물은 영조 27년(1751)에 광주유수 이기진이 고쳐 짓고 ‘침괘정’이라 명명하였다. ‘枕戈'(침과)란 戈,즉 ‘창을 베개삼는다’는 뜻이다. 현재는 침괘정으로 통용되고 있으나 정확한 표기는 ‘침과정’ 이 옳다. 왜냐하면 ‘戈’ 는 ‘괘’ 로 읽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지의 호칭대로 적는 지명관례상 ‘침괘정’ 이라 표기 하였다. 화약을 찧었던 돌절구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것으로 보아 무기제작소의 사무를 관장하던 곳으로 추정된다.

 

 

보호수 은행나무...수령 80년, 수고19m, 나무둘레 3.3m, 지정일자 1983.03.10

 

전승문(북문) 방향

 

남한산성 종각 방향

 

남한산성 산성마을 종로 버스 정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