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인천 차이나타운, 자유공원, 월미도
- ( 2024.06.14 )
《 차이나타운, 자유공원 》
인천 바다가 보고싶었습니다. 그리고 6월 보훈의 달을 맞아하여 인천역 앞 응봉산 자유공원을 가보고 싶었습니다. 6.25 전쟁시 대구,포항,부산 낙동강 일대만 겨우 남은 백척간두의 위기의 상황에서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우리나라를 구해낸 위대한 영웅 맥아더장군을 보고싶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은 세계 전사에 빛나는 쾌거입니다.
인천 차이나타운, 자유공원을 구경한 후 인천중구청 방면으로 하산하면서 일제시대의 옛 역사적인 건물들을 구경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 개항지 인천은 우리나라 처음으로 란 말이 붙은 수많은 건물들이 있습니다. 참 볼만 핸 곳입니다. 드리고 월미도로 나가서 물범카를 타고 월미산 정상과 정상의 월미전망타워에서 인천항을 잘 전망하여 보았습니다.
월미산 정상에서 다시 물범카를 타고 내려와 월미도 바닷가로 나가서 월미 문화의 거리를 잘 구경하여 보앗습니다. 아름다운 서해 바다와 영종도가 눈 앞에서 너무 감동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월미도 이곳은 참으로 볼 것도 많고, 아름다운 곳입니다.
▶ 산 책: 걸음수 7,196 steps, 거리 4.73 km, 소모열량 227 kcal, 소요시간 01:15 hrs, 속도 3.8 km/h, 기온: 26-28℃.
▶ 코 스:
1. (1호선) 인천역 - 인천 차이나타운 - 자유공원 (한미수교100주년탑- 맥아더장군 상) - 인천시민애집- 각국조계지 계단- 생활사전시관 - 옛 조선은행 -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장 - 한중문화관 -1883제물포개항장 - 인천아트플렛폼.
2. 월미자유공원 - (물범카) - 월미전망타워 - (물범카) - 월미문화의 거리 - 월미역(월미모노레일).
◆ 인천 차이나타운:
인천 차이나타운은 인천역 앞 자유공원 (응봉산) 주변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1884년 최초 조계지가 설정될 당시 현재의 1패루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기 때문에 무역업을 하기 가장 좋은 조건인 무역항 인근에 자리를 잡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1884년 당시 조성된 조계지 경계 계단을 중심으로 오른쪽은 일본 조계지, 왼쪽은 중국 조계지로 구획하였다. 그 구획선을 따라 건물의 양식도 판이하게 다르다. 일본 조계지 쪽으로는 일본 양식의 은행건물, (구)창고건물 등이 있으며 이를 활용한 박물관과 전시관 등이 자리 잡고 있다. 반면에 조계지 경계 계단의 좌측에 위치한 청국 조계지 구역은 중국 느낌이 물씬 난다. 과거 청국영사관 터에 인천 화교협회 건물이 자리 잡고 있으며, 뒷편에는 구 영사관의 회의청인 중화회관이 위치해 있다. 또한 언제나 대만 국기가 나부끼는 화교학교가 있고, 중국음식점, 중국빵집, 만두집, 잡화점, 의선당 등이 위치한 중화가가 자리잡고 있다. 청국 조계지 내에는 또한 3개의 패루와 한중문화회관, 중국어마을 문화체험관, 그리고 짜장면 박물관 등이 위치해 있다. 이 구역에는 화교들도 많이 거주하고 있다. 이렇듯 인천 차이나타운은 130년을 살아온 화교들의 이야기가 있고, 건물 등의 흔적도 여전히 남아 있으며, 현재까지도 과거의 공간을 활용하고 해당 공간에서 거주하며 생업을 이어가고 있는 이른바 생태박물관이다.
1882년 - 임오군란때, 조선정부의 참전요청에 의한 청국 군인의 입국 (군함 3척, 상선 2척, 청국군인 3천 명 주둔. 군수보급품 위한 상인 40명; 한국 화교의 시작)
1883년 - 인천 개항. 일본조계지 설정
1884년 - 청국조계지 설정. 돈벌이가 잘되는 곳으로 소문이 퍼져 많은 산동인들이 서해를 건너옴.
1883년 - 48명이던 화교가 1년 후에는 5배에 가까운 235명으로 급증함. 중국의 비단, 광목, 농수산품 및 경공업품 등을 수입, 조선의 사금 등을 중국에 보내어 큰 이득을 거둠. 장기 거주를 목적으로 인천에 상가 건물이나 주거할 집을 짓기 위해 중국식 건축에 필요한 목수, 기와공, 미장공들도 인천에 들어옴.
1887년 - 농공화교 이주 시작. 조선에 없던 양파, 홍당무, 토마토 등 재배. 경동, 신포동, 용현동, 주안, 부평지역까지 영역을 확대해감
1896년 - 청일전쟁 패전 후, 군인 무역업자를 비롯한 많은 화교들 귀국.
1940년대 - 정치적 혼란. 이 시기에 산둥지역 농민들 인천으로 대거 이주. ‘생계형 화교(농공화교)’
1948년 - 광복, 대한민국 정부 수립. 화교 견제정책 실시. 외국인 출입 규제 (중국행 차질 무역업 타격), 외국인 외환거래 규제(은행가의 3배가 넘는 가격으로 암시장에서 외환거래)
1950년대 - 외래상품 불법수입 규제를 목적으로 창고 봉쇄 조치. 물건을 대량으로 구입하여 적절 한 시기에 시장에 내놓아 이득을 취하던 화교 무역업에 큰 타격. 한국전쟁 발발. 종전 후, 중공군의 전쟁참여로 인해 화교민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 확대. 종전 후, 공산국가인 중국의 국적을 인정하지 않아, 대만 국적으로 전환
1961년 - 외국인 토지 소유 금지: 채소농사를 하던 농토, 음식점을 운영하던 점포를 본인 명의로 소유할 수 없게 됨. 한국인의 명의를 빌리거나 한국인 부인의 명의로 재산 등록. 사기 및 배신 등으로 재산을 잃은 경우도 있음.
1962년 - 화폐 개혁. 1953년에 이은 두번째 화폐 개혁. 화교들은 언제든 본국으로 떠날 생각으로 재산을 현금으로 보유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음. 일정액 이상은 새 돈으로 교환해 주지 않아, 손실을 입기도 함.
1968년 - 외국인 토지소유 제한. 1961년의 금지에서 완화됨. 주거용 200평, 상업용 50평 이내의 토지를 취득허락 후 소유할 수 있게 되었음.
1970년대 - 짜장면 값 동결. 절미운동. 중국집에서만 쌀밥을 못팔게 함. 볶음밥 없는 중국집들 성행
1992년 - 대만과의 단교, 중국과의 수교. 중국 보따리 장사의 활로가 열림.
1998년 - 외국인 토지 소유 제한 해제.
2002년 - 영주비자(F5) 발급: 영주권을 인정받게 됨.
2005년 - 선거법 개정: 화교들 지방선거권 부여. 2000년 대, 인천 차이나타운 활성화 계획 수립.
- 국립민속박물관
1호선 인천역
한국철도 탄생역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는 1897년 3월 22일 인천에서 착공하여 1899년 9월 18일 노량진-인천역 까지 8KM가 개통된 경인철도이다. 도보로 12시간 걸리던 서울과 인천 간을 1시간 30분으로 줄이면서 서울과 인천이 1일 생활권으로 변하는 계기가 되었다. 최초의 기관차 모갈1호: 모갈1호는 철도 개통시 사용된 열차를 견인한 증기기관차로 미국 브룩스회사에서 총 4대가 제작된 후 반제품으로 운송하여 1899년 인천에서 조립되었다. "
월미바다열차역 (모노레일) 출발,종착역.
< 참고 >: 월마바다열차:
월미바다열차 관광안내 지도
월미바다열차 모노레일 노선 개요:
(1호선 인천역) 월미바다역 -> < (인천제8부두) -> (인천제7부두, 사일로벽화 (세계최대) > -> 월미공원역, 월미도 물범카승차장 -> < (해양경찰선, 만남의 광장) -> (공영주차장) -> (월미공원제1주차장) > -> 월미문화의 거리역-> < (공영주차장) -> 월미문화의 거리 《 ( 그린비치, 인천상륙작전 표지석) -> 영종도행 매표소, 월미도유람선매표소)-> (월미도관광안내소) -> (월미달빛 음악분수)-> (친수공간) -> (인천상륙작전기념비) -> (야외무대) -> (월미테마파크)-> 월미물놀이장)->(국립인천해양박물관 예정부지,(임시주차장) 》 -> (시티투어버스정류장, 공여주차장) -> 박물관역 -> < 월미제2주차장, 이민사박물관)-> 국립인천해사고등학교)-> (갑문홍보전시관 )-> (어울미센터)-> (대형버스주차장)-> (전통정원 양진당) > -> (인천제6부두) -> 월미공원역 -> 월미바다역 (1호선 인천역).
▶ 월미바다열차 이용안내:
- 운행거리는 6.1km이며 평균 시속 9km의 속도로 운행합니다.
- 월미도를 한바퀴 순환하며 운행시간은 40~45분 정도 소요됩니다.
- 열차의 배차간격은 11~15분입니다.
* 이용요금; 어른 8,000원, 노인/청소년 6,000원, 어린이 5,000원, 국가유공자/장애인 등 4,000원.
( 비고: 승차권 구매당일 노선 구간내 2회 재승차 가능. )
* 운영시간:
- 성수기(4~10월): 주말 (금.토.일 및 공휴일): 10:00 - 21:00, 주중 (화.수.목): 19:00 - 18:00.
- 비수기(11~3월): 주말 (금.토.일 및 공휴일), 주중 (화.수.목): 10:00 - 18:00.
- ( 정기휴일: 매주 월요일 )
* 인터넷 예매서비스 운영: www.wolmiseatrain.or.kr
'중화가' 패루 ( 1패루 )
옛날에는 여기까지 바다물이 들어왔으며, 중국에서 청국 군인들과 함께 들어온 화교들이 무역상을 하기 위하여 이곳에 둥지를 잡아 오늘날 화교들이 밀집한 인천 차이나타운이 형성되었다.
중화가
차이나타운 거리
중화원...SBS 생활의 달인, 200회 특집 최강달인
식당 내부
앗, 나의 짜장 (7,000원)
"福納財拾(복납재습)" 복이 들어와 재산이 모이다. 그리고,
"召財進寶(소재진보)" 재물을 불러 보배로 나아간다 (만든다) 의 합성(合成) 글씨 모양.
cup of coffee..."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 하다 "
개항동행복복지센터
경성의상실 흑백사진관
골갈빵. 월병. 화덕만두..
연경대반점 & 청빈
연경대반점
공화춘
그 유명한 '공화국의 봄' 이란 뜻의 '공화춘(共和春)'이란 상표를 사용한 중화식당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짜장면 개발자로 알려진 '공화촌 '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근대 공원인 자유공원 중턱에 문을 열었고, 당시 인근 인천항에서 일하던 부두 노동자, 중국인 등이 중국요리의 맛에 이끌려 이곳을 자주 찾게 되었으며, 한국인의 입맛에 맛게 달콤한 캐러멜을 첨가하고 물기를 적당히 유지한 음식인 짜장면을 개발하게 되었느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공화춘이 처음 인천 차이나타운에 문을 열게 된 것은 1908년으로 중국 산동지역 출신인 우희광 선생이 22살의 젊은 나이에 ‘산동회관’(山東會館)이란 이름으로 첫 영업을 하기 시작하면서 부터라고 한다. ‘공화춘’은 차이나타운을 대표하는 중국요리집으로 호황을 누렸으나 화교들의 재산권 행사를 제한한 정부의 화교정책에 밀려 1983년 폐업하고 말았으며, 지금은 인천시 중구에서 2010년 매입하여 짜장면을 주제로 한 국내 최초유일의 짜장면박물관으로 2012년 4월 개관하였다. 지금 이 집은 짜장면박물관으로 쓰이는 원래의 옛 '공화촌'의 인근에 문을 연 이름이 같은 '공화춘'이란 중화식당이라고 한다.
↑ 인천 응봉산 자유공원 가는 계단....
무척 많은 학생들이 이 곳을 탐방 중이다. 6월 보훈의 달을 맍이하여 인천의 학생들이 자연학습 탐방나왔다고 한다. 6.25전쟁, 인천상륙작전과 맥아더장군에 대한 설명은 학생들에게 소중한 역사를 일깨워 줄 것이다.
인천개항장 문화유산
옛날짜장
중화기독교 인천교회
선린문
삼국지 & 초한지 벽화거리
선린문에서 바라보는 차이나타운
◆ 인천 응봉산 자유공원:
자유공원은 인천항 개항 뒤인 1888년 외국인 거류민단에서 관리·운영하여 당시 시민들은 이를 ‘각국공원‘ 이라 불렀고, 그 뒤 일본의 세력이 커지면서 1914년 각국 거류지의 철폐와 함께 공원 관리권이 인천부로 이관되자 그때부터는 서공원으로 불렸습니다. 1945년 해방 후에는 만국공원으로 불렸으며,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한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세워진 1957년 10월 3일부터 자유공원으로 개칭되었습니다.
응봉산 전체를 자유공원이라 부르며, 맥아더 장군 동상과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을 비롯해 자연보호헌장탑, 충혼탑, 석정루 등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석정루에 오르면 인천항과 월미산 북성포구 등이 한 눈에 들어오는 장관이 펼쳐집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인 자유공원은 인천시민뿐만 아니라 각 지역에서 찾아올 만큼 사계절 늘 아름다운 풍경으로 시민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인천 중구 시가지와 인천항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시민의 휴식·위락 장소이며 4월에는 ‘자유공원 벚꽃축제’가 열리고, 미술대회·글짓기대회 같은 각종 행사도 자주 열리는 인천의 명소입니다.
- 인천시 중구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
자유공원 광장
야외무대
인천 내항 방향...오른쪽은 월미도
즉석사진 3,000
맥아더장군 동상
불세출의 영웅, 맥아더장군 상
맥아더장군 동상 건립문
정의에는 국경이 없고 투쟁에는 산도 물도 거침이 없다. 이러한 정의로써 이러한 투쟁을 감행하여 자유세계의 노선 위에 승리를 가져오고 그리하여 만인의 감격과 찬양을 한 몸에 두른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여기 이 동상의 주인공 다그라스 맥아더 장군이다. 그는 1880년 1월 26일 아-더 맥아더 장군의 둘때 아들로 미국에서 태어나서 소위로 출발하여 오성장군의 칭호를 받음에 이르기 까지 무릇 반세기에 걸쳐 가지가지 혁혁한 무공을 세운 이로서 일본의 항복을 받음과 동시에 점령군 총사령관으로 패전 일본에 주재케 되었다. 일본이 이같이 항복함으로써 한국은 해방되었으나 불행히 국토가 비참하게 양단되었으며 설상가상으로 1950년 6월 25일 공산도배가 북으로 부터 대한민국을 침입하였을 때 즉시 미국 정부는 한국 구원을 결정하고 맥아더 장군에게 공산침략 항전에 참가한 모든 군대를 지휘하도록 명령하였다. 그의 탁월한 천재가 발휘된 것은 바로 이곳 인천에서 였다. 그 호매한 식견으로 안출된 거의 기적적인 인천상륙작전을 1950년 9월15일에 장군의 진두지휘 아래 결행하여 그 결과로 전세가 일전하여 자유의 승리와 대한민국의 구원을 가져왔었으니 이것은 영원히 기념할 일이며 이것은 영원히 기념할 사람인 것이다. 그리하여 감격에 넘치는 우리 국민의 명의와 의연으로 각계각층 대표를 망라한 맥아더 장군 동상 건립위원회가 김경승 교수의 손에 의하여 비져진 장군의 용자가 영겁을 통하여 이 거룩한 지역을 부감하도록 이 동상을 세운 것이다. 장군과 그 휘하 용감한 유엔군 장병들이 우리와 자유를 위하여 이곳에서 취한 행동을 우리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공산주의의 유독한 침투에 대한 최후의 투쟁에 승리를 거둘 때 까지 전쟁에는 승리에 대신 할 것은 없다 라고 한 분이 역시 장군이었다는 사실을 영원히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1957년 9월 15일 맥아더장군 동상건립위원회
세계 전사에 길이 빛나는 명장면이다.
세계전사에 빛나는 인천상륙작전,
월미도로 상륙하는 맥아더를 위시한 당시 유엔군 지휘부
◎ 인천상륙작전: 6∙25 전쟁시 1950년 9월 맥아더장군의 지휘 아래 감행한 ‘인천상륙작전’ 은 전쟁을 역전 시킬 수 있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6∙25 전쟁 초기 기습공격과 엄청난 전투력으로 낙동강 전선까지 진격한 북한군은 유엔군의 참전과 국군의 반격으로 교착상태에 빠져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은 이러한 상황에서 전개되었다. 인천은 서울에서 32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서울로 접근할 수 있는 최단거리 항구며, 북한군의 보급선을 차단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런데 난점이 있었다. 인천항은 수로가 좁아 큰 함정의 진입이 불가능했고, 인천이 지리적으로 멀어 작전지원이 어렵고 조수∙간만등 자연조건이 불리해 당시 합동참모본부와 해군은 반대하였다고 한다. 낙동강 전선에 주력한 북한군도 이런 요소 때문에 위험성을 간과하여 허를 찔리게 되었다.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맥아더 장군의 탁월한 지모와 전략, 용감성으로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대승리를 이루었다. 지도자의 중요성과 역할이 다시 돋보이게 된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인천지역 북한군의 병력규모는 약 2,000여명, 서울, 인천에서 활동중인 병력은 약 10,000명이었다고 한다. 이에 미군은 상륙부대로 미 제10군단이 창설하였고 병력이 75,0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9월 15일 새벽, 제 7합동기동부대 스트러블 해군제독의 지휘아래 8개국 261척의 함정과 제 10군단으로 편성된 대규모선단이 인천앞바다에 집결하고, 월미도에 상륙해 돌격을 감행할 미 제 5해병연대 제 3대대 상륙단의 선견공격대가 인천항에 도착했다. 새벽 5시부터 유엔군은 북한군의 방어진지에 폭격을 가하기 시작하고 17척의 상륙용 주정으로 월미도 녹색해안에 도착한 상륙 부대도 돌격을 시작하여 마침내 유엔군의 화력 앞에 북한군은 투항하기 시작했다. 미 제 5해병연대 제 3대대의 월미도 일대 녹색해안 상륙작전은 적 사살 108명, 포로 136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어 인천항이 만조가 된 오후 5시경부터 유엔 해군과 공군의 엄호사격이 다시 시작되면서 미 제 5해병연대의 2개 대대가 인천항 북반의 적색해안에, 미 제 1해병연대는 인천항 남쪽의 청색해안에 각각 상륙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은 이렇게 진행되었고, 상륙작전 이후 우리 국군은 15일만에 38선까지 탈환하였다. 위대한 작전의 성공이다.
미해군기념재단 헌정비.
맥아더장군과 상륙작전 광경이 부조되어 있다.
" ...the most masterly and audacious startegic stroke in all history...
...dedicated honor all U.S army personnel who served in the korean war, june 25, 1950 to july 27, 1953." ...모든 역사에서 가장 위대하고 담대한 전략적 타격...
1950.6.25~1953.7.27 근무한 미해병에 대한 존경으로 헌납하다...
placed june 22, 2000 by the united states navy memorial foundation, washington D.C.
워싱턴 D.C. 소재 미해군기념재단이 2000.6.22 설치함.
인천시민헌장비
인천제일교회
개항장 이음 1977...근대건축문화자산 재생사업
구) 제물포구락부..... -> 각국조계표지석
"각국지계'
각국조계석 (General Foreign Settlement Board Stone)
조계란 영토의 일정한 범위를 한정하여 외국인의 거주를 허가한 지역으로 거류지라고도 부른다. 인천에는 1883년 일본전관조계를 시작으로 같은 해 12월 청국전관조계, 1884년 10월에 각국공동조계가 설치되었다. 조계석은 조계의 경계를 나타내 주는 표지석으로 각 조계의 경계 지점에 세웠던 것이다. 이 각국조계석에는 '각국지계(各國地界)' 와 '조선지계(朝鮮地界)'라는 명문이 있어 인천의 각국조계와 조선인의 마을에 맞닿는 개항장의 외곽 지점 어딘가에 서 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2007년 제물포구락부 보수 공사 중에 발견되어 현재 인천시립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디.
인천시민애집
송정동 옛 시장관사
중구 응봉산 기슭에 있는 옛 시장관사는 1883년 인천 개항 후 한세기의 역사적 흔적을 간직한 곳이다. 이곳은 인천항이 내려다 보이는 수려한 경관과 장원으로 이름이 나 있다. 송정동 옛 시장관사는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었다. 1900년 쯤에는 일본인 사업가의 일본식 저택으로사용되었다. 그리고 광복 후애는 동양장이라는 서구식 레스토랑과 송학장이라는 사교클럽으로 활용되었다. 또한 1965년 인천시에서 부지를 매입하여 한옥 건물을 신축하고 1966년 부터는 35년간 인천 시장공관으로 사용하였다. 이곳에서 총 17명의 시장이 생활했다. 2001년 부터는 인천 역사 자료를 모으는 역사자료관으로 20여년 활용되었다. 2021년에는 인천직할시 승격 40주년을 기념하면서 재단장 하여 시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으로 탄생하였다.
구 시장관사에서 배려다 보이는 인천 내항
인천시민애집
내부에는 쇼파도 갖추어져 있어 사람들이 앉아 쉬고 있었다.
무료개방>
운영시간: 09:30 - 12:00, 13:00-17:30, 점심시간: 12:00-13:00
로스엔젤레스 한인미술협회 초대전: JUNE 1 TO JULY 31, 9:30 AM - 5:30 PM
인천시민애집 입구
CAFE & 한정식, 담쟁이
인천교육 남부교육지원청
HOTEL ATTI
F.M Music Live Club...7080 live club
아, 일본식 거리 풍경....내가 지금 일본 여행 중인가?
"커피에 반하다"
인천직할시 중구청
관동교회
<- 860m 상상플렛폼, <- 410m 월미바다역, <- 190m 짜장면박물관, -> 인천문화재단 550m, -> 인천관광공사 하버파크호텔 350m, -> 인천아트플랫폼 190m, -> 대불호텔전시관 60m, <- 100m 삼국지벽화거리
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
==== < ▲ 2018.12.05 photo: 공자상, 조계계단 상부에 있다 > ====
공자는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다.
子曰(자왈),
學而時習之, 不亦說呼 -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有朋自遠方來, 不亦樂呼 -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呼 - (인불지이불온, 불역군자호)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니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섭섭해하지 않으니 어찌 군자가 아니랴. "
- < 공자, 논어 학이편 제1장 >
* 공자 (BC 551~BC479) 의 일생...공자(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 노나라 출생 (魯國 出生)는 中國春秋(춘추시대) 시대의 위대한 정치가, 교육가이며, 儒家(유가)의 創始者(창시자)이다. 공자는 일생에 걸쳐 많은 고전 명작 고시, 에악, 춘추, 역경 등을 정리 출판하여 중화민족 역사에 탁월한 공헌을 하였다. 그의 주요 사상과 언행은 論語集(논어집)에 기재되어 있다. 공자는 중국봉건사회의 철학, 교육, 문학, 예술등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을 뿐만아니라, 그의 유가사상은 중화민족문화를 대표함과 아울러 인류 역사상 중요한 유산으로 전 세계에 영향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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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
이 지역은 1883년 일본 조계를 시작으로 1884년 청국 조계가 설정되는 경계지역으로,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으로 연결되어 계단과 조경이 마련된 공간이다. 약 130년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이 조계지 경계계단은 중앙에 석초 계단이 형성되어 있고 양단을 중심으로 급한 경사인 점을 감안하여 계단참을 두고 있다. 이곳에 조경 식대 공간을 마련하여 인천항 경관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자유공원의 서남쪽 가파른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이 계단을 중심으로 청국과 일본의 건물들이 확연하게 서로 다른 양식들로 번화하게 들어서 있다. 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은 계단 자체의 가치보다 역사성 및 장소작 측면의 가치가 높다.
차이나타운 입구
인천차이나타운
↑ 인천차이나타운, ↖ 한중문화원, ↙ 대불호텔전시관, ↙ 인천아트플랫폼
" 공간 속 시간을 담은 문화 놀이터 "
DAIBUTSU...대불호텔전시관
생활사 전시관
조선은행
구) 인천일본제1은행지점:
1883년 인천 개항 후 일본제1은행 부산지점의 인천출장소로 개설된 근대적 금융기관이다. 1888년 인천지점으로 승격되었고, 초기에는 해관통관세를 취급하였다. 1911년 조선은행 인천지점으로, 1950년 한국은행 인천지점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조달청 인천사무소, 법원 등기소 등으로 활용되다가 2010년 인천개항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1899년 신축된 지상 1층 건물로 석재 기단부와 수평 줄눈의 안정되고 견고한 외관을 지니고 있다. 돌출된 출입문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으로 구성된 석조건축물이다. 현관 상부는 아치 구조이며 지붕에는 중앙 돔과 작은 천장을 설치하였다. 처마 부분에는 동그란 구멍이 뚫린 석조 난간을 올렸다.
최초의 우편배달부
최초의 우편배달부
우리나라의 우편 제도는 1884년 11월 18일 서울과 인천 간에 우편물이
교환되기 시작하면서 그 막이 올랐다. 본 조형물은 근대 사진자료에 남
아있는 우체부와 우체통(1912년식)의 모습에 기초하여 제작하였다.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
구) 인천일본제58은행지점
구) 인천일본제58은행지점:
일본 오사카에 본점을 둔 일본 제58은행은 인천 전환국(典圓局)에서 주조되는 신화폐와 구화폐의 교환을 목적으로 1892년 인천에 지점을 설치하였다, 이어 1893년 부산, 1895년 서울에 지점을 설치하였고 양국에서 송금한 상품 대금의 결재와 무역 금융에도 주력하였다. 후에 야스다(安田) 은행으로 개편되었으며, 광복 후 조흥은행 인천지머, 대한적십자 경기도지사 사옥으로 사용되었다가 현재는 인천광역시 요식업조합이 사용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프랑스 벽돌조 2층 건축물로 1층은 석조 기단으로 되어있고, 2층은 발코니와 아랫방을 밝게하기 위하여 설치한 돌출창으로 되어있는 것이 특징이다. 내부 일부는 개보수로 변경되었으나 오르내림식의 창문을 비롯하여 벽체와 기둥은 아직까지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인천의 근대문학을 읽는다
1883개항살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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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타운
한중문화관
서성 왕희지
※ 왕희지(王羲之 321~379): 진나라 사람으로서 중국 역사상 최고의 서예가(書藝家)이다. '서성(書聖)'이라 불리며 각 서체에 두루 능하였다. 해서(楷書)ㆍ행서(行書)ㆍ초서(草書)의 3체(體)를 전아(典雅)한 귀족적(貴族的)인 서체(書體)로 완성(完成)했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왕희지의 진적(眞跡)은 없으나 손꼽을 정도로 몇개의 모본(模本)만이 세계적으로 존재할 뿐이리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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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 제물포개항장
대한통운
개항장지갯꾼
개항장 지개꾼:
1883년 제물포항이 개항되면서 인천개항장은 서구 문물 유입의 길목인
동시에 활발한 상업활동이 이루어지던 국제무역항이 되었다. 본 조형물
은 근대 사진자료를 기초로 하여 개항장 일대에서 화물 선적작업을 하던
지게꾼의 모습을 재현하였다.
개항장 지개꾼:
1883년 제물포항이 개항되면서 인천개항장은 서구 문물 유입의 길목인 동시에 활발한 상업활동이 이루어지던 국제무역항이 되었다. 본 조형물은 근대 사진자료를 기초로 하여 개항장 일대에서 화물 선적작업을 하던 지게꾼의 모습을 재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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