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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구릅/일상들 ( life )

남한산성( 2024.06.23)

by the road of Wind. 2024. 6. 23.

남한산성

( 2024.06.23)

 

오전에 비오고 하더니 오후에는 비가 개이고 폭염도 잠깐 물러간 듯 하였습니다. 그래서 비 온 뒤 산책하기 가장 좋은 코스가 있는 남한산성을 찾아보았습니다. 집에서 점심을 먹고 출발 했더니 남한산성 남문 정류장에 2시 30분 정도에 도착하였습니다. 길은 비가 와서 그친 뒤라 촉촉하게 젖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멘트 산책로이기 때문에 오히려 시원하고 걷는 데  전혀 불편함이 없었습니다. 

 

남한산성의 푸른 신록이 한 여름의 아름다움을 더했습니다. 산책객들도 많앗습니다. 주말에는 산성역에서 출발하는 직행버스가 많아 너무 편리합니다. 구태어 자가용을 가지고 남한산성에 올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나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둘레길을 걸어 수어장대를 돌아보고 서문을 거쳐 국청사 방향의 하산로를 따라 산성마을 종로 로터리로 내려 왔습니다. 여기에서 산성역으로 직행하는 시내버스를 타고 하산할 수 있었습니다. 

 

집에서 가까운 남한산성이 나에게는 뒷동산 처럼 여겨지는 산입니다. 힘들이지 않고 쉽게 산 정상에 오를 수 있고 주변의 탁월한 조망을 감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오늘 수어장대에서 못볼 꼴을 보았습니다. 명색이 이곳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데 이곳에서 양발 벗고 누워 잠자는 사람들이 있였다. 어린이들, 부녀자들, 외국인 탐방객들이 많은 곳인데, 창피해서 보기 힘들었다. cctv와 스피커를 설치하여 이러한 형태는 원격으로 라도 지적하여 시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 같다. 먼저 내부 바닥에 조그만 안내문을 만들어서 세워두어야 겠다고 생각하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기것은 너무 심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이제 선진국이다. 시민의식도 달라져야 한다고 맏는다. 자기 집 거실도아니고 정말 너무 하십니다.

 

 

 산   행 : 걸음수 7,550 steps, 거리 4.58 km, 소모열량 268 kcal, 소요시간 01:21 hrs, 속도 3.7 km/h, 기온 28 (맑음)

 코   스 :  남문 정류장 -  남문(지화문) -  수어장대 (청량산; 483m) - 서문(우익문) -  남한산성 전망대 - 국청사 - 한경직목사 우거지 - 종로 로터리.

 

8호선 산성역 2번 출구 앞 '산성역.포레스티아 동문' 버스 정류장  

 

남한산성 가는 버스:

 

9번: < 사동종점 - 남한산성 입구 - 중앙주차장 >, 배차간격: 10-20분.
9-1번 (휴일): <산성역.포레스티아동문 - 남한산성도립공원>, 배차간격: 7-10분.
53번(주말): <남위례역- 남문터널>, 배차간격: 35-45분.
52번: < 성남동대형주차장- 남한산성도립공원>, 배차간격: 90-100분

 

산성역 포레스티아 아파트

 

◆ 남한산성:

남문 터널 앞 버스정류장 하차. 등산 시작.

주말 및 공휴일 주차장 만차 시 무료주차장 (서틀버스 운행)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무료주차장: 동문 <-> 광주방향 (7km 내에 7개소). 

무료 셔틀버스 운행: 3월 16일(토) ~ 11월 30일 (토) / 평일 제외 

미운행: 7월, 8월.

 

남문터널

비석숲...남한산성 사적 제57호

 

남한산성 비석숲...불망비, 선정비 등.

세계유산 남한산성 종합안내판


1코스: 산성로터리- 북문- 서문- 수어장대- 영춘정- 남문- 산성로타리 ( 3.8km, 1시간 20분 )
2코스: 산성로터리- 영월정- 숭렬전- 수어장대- 서문- 국청사- 산성로타리 ( 2.9km, 1시간 )
3코스: 남한산성 역사관주차장- 현절사- 벌봉- 장경사- 망월사- 지수당-  남한산성 역사관주차장 ( 5.7km, 2시간 )
4코스: 산성로터리- 남문- 남장대터- 동문- 지수당- 개원사- 산성로타리 ( 3.8km, 1시간 20분 )
5코스: 남한산성 역사관주차장- 동문- 동장대터- 북문- 서문- 수어장대- 영춘정- 남문- 동문 ( 7.7km, 3시간 20분 )

 

남문 앞 비석군

지화문 (남문)

 

장수의 길 1코스

<- 1.5km 수어장대, <- 2.1km 우익문(서문), -> 종로 0.7km

 

남문  南門.至和門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남문은 남한산성에 있는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으로 현재에도 출입이 가장 많은 문이다. 선조 때의 기록을 보면 동문, 남문, 수구문의 세 문을 수축하였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남문은 인조 2년(1624)수축되기 이전 부터 이미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남문은 정조 3년(1779) 성곽을 보수할 때 개축하며, 지화문(至和門)으로 이름이 붙여졌으며 4대문 중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는 문이다.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처음 남한산성에 들어올 때 바로 이 문을 통해서 들어왔다.  

 

 

남한산성 옛길 종합안내

 

성곽길:
지화문(남문) (현위치) /  우익문(서문) / 전승문(북문) / 봉함성 / 좌익문(동문) / 제3남옹성 / 제2남옹성 / 제1남옹성.

성곽 내부:
청량당 / 수어장대 / 숭렬전 / 남한산성 행궁 / 연무관 / 현절사 / 남한산성 세계유산센터 / 망월사 / 장경사   

 

- 동문노선: 9.5km

- 북문노선: 5.8km

- 서문노선: 2.1km

- 남문노선: 6.5km

 

남문 외곽으로 나가본다. 

아, 싱그러운 숲과 남한산성

지화문 (남문)

 

남한산성 남문 동영상

지화문:

정조3년 성곽을 보수 할 때 '지하문'이라 칭하였고 남한산성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이다.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다. 또한 현재는 성남으로 통하는 관문역할을 하고 있으며, 성문앞에 식재된 (350년 수령, 성남시 보호수) 느티나무와 함께 문화와 역사가 살아숨쉬는 시민의 역사터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 - 성남시.

 

성남누비길, 검단산길 구간...여기부터 제2구간입니다. 

 

호국정신과 선비정신이 깃든
남문 앞 역사터 안내

- 남한산성은 한성 백제시대의 성산이요 진산의 개념으로 백제의 시조 온조대왕의 사당 숭렬전(경기도유형문화재 제2호)이 있는 곳이다.


- 남한산성은 통일신라시대에는 주장성(晝長城) (일장(日長)산성)으로 불렀으며 한강유역의 중요 산성으로 발전하였다. 
- 고려시대에는 몽고군의 침입을 물리친 국방의 요새지 이었다.


- 조선왕조 제16대 인조임금 원년(1623)에 성의 축성을 시작하여 1826년에 완성 (본성의 둘레가 9.05km)하니 남한산성은 경도보장지(京都保障地)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 남한산성은 주봉인 청량산(497.8m) 을 중심으로 4대문과 18암문을 완성하고 성내에는 행궁을 비롯하여 수어장대 등 각종 문화유적이 남아있고, 현재는 경기도 도립공원(국가사적 제57호)으로 성남시, 하남시, 송파구, 광주시 등 4개 지방자치 단체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 특히 남문은 성의 서남쪽 곡저부의 해발 370M 지점에 위치하여 있으며 정조 3년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하여 지화눈(至和門)으로 칭하였고,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 문이며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으며 성남으로 통하는 관문 역할을 하는 문이다.


- 인조 14년에 청태종의 침공(병자호란)으로 인조 임금이 이곳으로 피신하여 45일간 항전한 유서 깊은 곳이다.


- <남문 앞 역사 터>는 성남시가 문화재청과 협의를 거쳐 2007. 5.15부터 약 6개월간의 공사로 2007.11.19 준공하였으며, 성문 앞에 식재된 380여년 된 느티나무와 원형이 가장 잘 보전된 것으로 평가받는 남문은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역사 공간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 


- 성남시 보호수인 느티나무(4주)는 성곽방어의 특성을 고려하여 남문을 시각적으로 차폐하기 위하여 식재하였을 가능성과 성문 주변이 평상시 왕래가 많고 지형상 경사가 심하여 우수 시에 토양유실을 막기 위해 식재하였을 것으로 추론되는 역사터다.   - 성남시

남문(지화문) -  백련사 - 주 등산로 - 산성유원지 입구 - 검단산 - 시계 등산로 -   남문 (지화문)      

 

 

누비길.... 성남 누비길 노선 안내

검단산 길,   성남 누비길을 일주합시다.

울창한 숲에서의 등산은 신체리듬을 회복시키고 산소공급을 원할히 하여 운동시경을 단련시키는 등 인체건강에 유익합니다. 시민 여러분의 건강과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성남누비길을 일주해 봅시다.

누비길 코스:

1구간:  남한산성길 7.5km ( 4시간 )
2구간:  검단산 길  7.4km ( 3시간 30분 )
3구간:  영장산 길 9.7km ( 4시간 30분 )  
4구간:  불곡산 길 8.8km ( 4시간 )
5구간:  태봉산 길 10.7km  ( 4시간 30분 )  
6구간:  청계산 길 8.5km  ( 4시간 30분 )  
7구간:  인능산 길 9.5km ( 4시간 )

> 검단산 길:

검단산은 태백산맥의 철령(鐵嶺) 부근에서 분기하여 서울 부근에 이르는 광주산맥의 지맥으로서 남한산성과 연결되는 산줄기를 이루며, 높이는 534.7m이다. 경기도 성남시 동쪽으로 광주시와 경계를 이루며, 전체적으로 '凹(요)'자 모양의 산지를 형성한다. 이 산을 중심으로 하는 성남시의 동쪽 산지는 남쪽으로 갈 수록 해발고도가 낮아지며 완만한 산이라 하여 그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산성역 -  불망비 -  남문(지화문): 3,7km    

검단산길 2코스:   남문(지화문) - 1.0km- 산림초소 - 1.4km - 검단산 정상 (536.4m)  - 1.4km - 만수천 약수터 - 0.7km -  망덕산 정상 ( 500.3m ) - 0.5km - 형제봉 정상 ( 435m ) - 0.8km - 이배재고개 - 1.8km - 갈마치고개.

 

보호수...느티나무수령 약 450년( 지정일자 2006.6.20), 수고 14~17m, 나무둘레 80~160m

남한산성 성곽은 인조 4년(1626년)에 준공되었으며, 느티나무(보호수)는 당시 성곽사면 토양유실 방지 및 차폐의 목적으로 식재된 것으로 추정된다. 남한산성 순환도로 터널이 개통된 후 폐도 부지가 된 남문 앞 느티나무 주변을 2006년 재정비하여 느티나무 생육환경개선 후 총 4주를 보호수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 성남시 중원구.

 

 

남한산성 동영상

칼 쓴 십자가  

 

" 천주교 비극의 역사, 남한산성 "


남한산성 성지성당 내부에는 순교자들의 옥에 갇혀있을 때 쓰고 있었던 칼이 채워져 있는 독특한 십자가상이 있습니다. 천주교 탄압의 본격적인 서막은 신유박해(1801년) 부터였는데요. 천주교에 대해 큰 반감이 없었던 정조가  승하하자 정순황후가 가혹한 탄압을 시작한 것이죠. 박해의 진짜 이유는 정조시기에 세력을 키운 남인을 숙청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이 신유박해 때 남한산성에서 첫 순교자가 발생하게 됩니다. 천주교 신자가 광주 및 인근 지역에서 잡히면 남한산성 포도청으로 이송되어 감옥에 갇혔습니다. 순교자들은 심문을 당하다 결국은 감옥에서 순교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교살형이나 교수형이 대부분 감옥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감옥이 곧 순교터가 되었습니다. 감옥에서 죽거나 고문 끝에 죽은 순교자들은 동문 밖으로 시신을 버렸는데 그 장소가 수구문이었습니다. 시체가 너무 많이 나가고 피가 물처럼 흘러 수구문은 시구문으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남한산성 동영상 

 

남한산성 동영상

 

남한산성 동영상

 

 

남한산성 동영상

 

제6암문(서암문)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의 비밀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도 설치하지 않았다. 이 암문은 성벽의 흐름 방향과 달리 입구가 북서쪽을 향하고 있어 외부에서 쉽게 관측되지 않도록 하였다. 또한 북동쪽의 성벽을 돌출하여 암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원성에 설치된 12개 암문의 외측 개구부는 대부분 홍예식이지만 제2암문과 더불어 이 암문의 개구부는 평거식이다. 인조 15년(1637) 1월 23일, 한밤중에 습격해 온 청병을 크게 물리친 곳이라 하여 이 암문 부근을 '서암문 파적지'라 부른다.  

 

암문 밖 풍경

<- 0.1km 수어장대, -> 유일천약수 1.5km

 

오랜만에 보는 뱀 딸기

 

◆  청량산 수어장대:

수어장대 출입문 

 

청량당

보호수 향나무, 수령 360년, 수고 2.5m, 지정일자 1983. 03. 10

 

수어장대

 

사적 제57호 남한산성  

남한산성 수어장대:  보물

장대란 지휘와 관측을 위해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누각 건물로 남한산성에는 5개의 장대가 있었다. 수어장대는 남한산성 서쪽에 있어 본래 '서장대' 라고 불렸다. 병자호란 당시에는 단층 누각이었고, 수어청 우영장이 서장대에 머물며 군사를 지휘하였다. 이후 영조 27년(1751)에 유수 이기진이 복층으로 중건하고, '수어장대'라는 편액을 달았다. 지금의 수어장대 현판은 헌종 2년(1836)에 유수 박기수가 수어장대를 증축하였는데, 그 형인 박주수가 쓴 것이다. 수어장대에서는 수어사가 수어청의 군사를 지휘하였는데, 정2품 상사에 해당하였다. 수어청은 한양을 수비하는 5군영의 하나로, 본래 한성부 북부 진장방 (오늘의 서울 종로구 삼청동, 팔판동,화동 일부)에 그 본청이 있고, 광주부윤을 부사로 삼아 남한산성을 관할케 하였다.  그러다 운영의 효율성을 도모하고자 정조19년에 본청을 완전히 남한산성으로 옮기고, 광주유수가 수어사를 겸하게 하였다. 남한산성 수어장대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로 관리되어 오다 2021년에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승격되었다. 또한, 수어장대는 세계문화유산 남한산성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 중 하나인 군사 경관 (장대)에 해당한다. 수어장대는 여러 문헌에 등장하는데,  그중 조선 숙종의 정비인 인경왕후의 아버지 김만기는 <서장대기>에서 아래와 같이 언급하였다.

비록 한강의 흐름을 기울여도 그날의 비린내는 씻지 못할 것이다. 만약에 혹시라도 풍경이나 구경하고 유람이나 탐하면서 다시는 감개하고 탄식하는 마음이 없다고 하면 이는 이른바 그 양심을 잃은 자이다. "    

 

 

수어장대

 

※ 병자호란 주요 연표:

1598년 (선조 31년):    임진왜란 끝남.
1608년 (선조 41년):    광해군 즉위.
1616년 (광해군 9년):  누루하치 후금 건국.
1618년 (광해군 11년): 명과 후금의 전쟁, 명에 원병 파견함.
1619년 (광해군 12년): 강홍립 후금에 투항. -> (중립외교).
1622년 (광해군 15년): 명나라 장수 모문룡 가도에 주둔.
1623년 (광해군 16년): 인조반정으로 인조 즉위. -> (친명배금정책)
1624년 (인조 2년):  이괄의 난.
1627년 (인조 5년):  정묘호란 발생.
1635년 (인조 13년): 후금 내몽고 점령.
1636년 (인조 14년):  후금 청으로 국호 변경하고,  조선에 군신관계 요구 (척화론과 주화론 대립). 
                              12월 28일 병자호란 발생. 남한산성 전투.
1637년 (인조 15년):  2월 24일 인조 송파 삼전도에서 항복. 청과 사대관계 맺음. 
1644년 (인조 21년):  명나라 멸망. 청 중국 통일.

 

 

매바위, 그리고 '수어서대" 암각글씨.

청량당에 위폐가 모셔진 남한산성 공사 책임자 중 한사람이었던 이회가 공사비 횡령에 연류되어 억울하게 처단되자 죽 전에 자신의 죄가 없다면 매가 날아와 이 바위에 앉을 것이라고 유언을 했는데, 그 후 과연 매가 날아와 매바위에 구슬피 울었다고 하며, 다시 확인해 보니 죄가 없음이 드러났으며, 오히려 다른 구간보다 성이 더 견고히 축성되었음이 밝혀졌다. 예나 지금이나 모함은 한 인간을 파멸로 이끌기도 한다.

 

무망루

조선 영조27년(1751) 광주 유수 이기진이 증축한 수어장대 2층의 내편(內篇) 문루로서 그 편액(扁額)이 2층 누각에 있어 1989년 전각을 건립하고 이 안에 현판을 새로 설치 일반인이 볼 수 있게 하였다. 무망루는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혔다가 귀국 후 북벌을 꾀하다가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이믐지은 것이다. 

 

수어장대에서 바라보는 벌봉 방향

 

수어장대 동영상

양말까지 벗고 낮잠자는 사람들....부끄러운 줄 알아야...

어린이, 외국인 등 탐방객들이 많은데 이 광경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이런 것은 적극 단속하여야 한다. cctv와 마이크를 설치하고 원격으로 감시하고 제지하는 메세지를 방송해서 이런 형태를 막을 수는 없을까? 

 

 

남한산성 (사적 제57호): 

1 남한산성 행궁, 2 수어장대, 3 숭렬전, 4 청량당, 5 현절사, 6 침괘정, 7 연무관, 8 지수당, 9 장경사, 10 망월사, 11 개원사, 12 제1남옹성, 13 제2남옹성, 14 남문(지회문), 15 서문 (우익문), 16 연주봉옹성, 17 북문(전승문), 18 동문(좌익문), 19 장경사신지옹성, 20 동장대터, 21 봉암성, 22 벌봉   

남한산성은 조선시대 뿐 아니라 삼국시대부터 천연의 요새로 중요한 역할을 하던 곳이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의 욍성이었다는 기록이 있고, 나당전쟁이 한창이던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한산주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기록도 있다. 고려시대에는 몽고의 침입을 격퇴한 곳이기도 하고 일제강점기에는 항일운동의  거점이 되기고 한 곳이다. 그러나 남한산성은 주로 병자호란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조선 인조 14년(1636)에 청나라가 침략해 오자 왕은 이곳으로 피신하여 항전하였으나, 왕자들이 피신해 있던 강화도가 함락되고 패색이 짙어지자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 나가 치욕적인 항복을 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남한산성은 패배를 알지 못하는 곳이다. 성의 외부는 급경사를 이루어 적의 접근이 어렵고, 내부는 경사가 완만하여 넓은 경작지와 물을 갖춘 천혜의 전략적 요충이기 때문에, 병자호란 당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청군에 함락당하지 않고 47일간이나 항전할 수 있었던 곳이다. 이처럼 오랜 기간동안 우여곡절을 가진 성의 역사처럼 성곽의 형태 또한 단순하지 않아서 하나의 폐곡선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본성, 봉암성, 한봉성, 신남성과 5개의 옹성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조이다. 인조 4년(1636) 에 중앙부의 가장 큰 폐곡선인 본성이 완성되었고, 병자호란 이후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동쪽의 봉암성, 한봉성 등을 비롯하여 여러차례 증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 하산 길:

 

 

남한산성 동영상

<- 0.6km 수어장대, ↙ 0.1km 국청사, ↘ 1.0km 전승문(북문), ↑ 학암동 1.4km

 

** 불법노점상에 대한 경각심을 주려는 플래카드 인 것 같다. 이곳에는 아이스케익 아이스통을 두고 목마른 등산객들이 돈을 놓고 얼음과자를 꺼내 가지고 가도록 하고 있었다. 나는 이런 것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어려운 경제난에 먹고 살기 위해 얼음통 하나 두고 있는 것이 등산객들에게는 너무 고마운 일이다. 이렇게 무더울 때는 시원한 것이 너무 반가운 것이다. 무질서하게 난립하는 것은 도저히 방치할 수 없지만 한 두고 아주 조그만 얼음과자통 하나 두고 있는 것은 모는채 눈감아 주는게 좋겠다는 생각이다. 오히려 커다란 플래카드가 눈에 거슬린다. 사람이 굶어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없는 사람들의 심정도 이해해 주어야 한다.  오히려 문화재 훼손이나, 수어장대 처럼 귀중한 문화재에서 맨발로 누워 자는 형태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문 (우익문)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서문은 4개의 대문중 규모가 가장 작고, 산성을 처음 쌓았을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 3년(1799)에  다른 문과 같이 개축하며 우익문(右翼門)이라 칭하였다. 행궁을 중심으로 국왕은 남쪽을 바라보며 국정을 살피니, 서문이 행궁의 우측에 있어 우익문이라 하였다. 서문은 인조15년(1637) 1월 30일 왕이 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항복하기 위해 남한산성을 나간 바로 그 문이다. 남한산성의 서쪽 사면은 경사가 급해 물자수송이 어렵지만 광나루나 송파나루 방면에서 산성으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서문(우익문) 외부 이정표:  
<- 1.0km 수어장대, <- 일장천약수, ↘ 위례둘레길(벌봉) 3.2km, ↘  위례 둘레길(북문) 1.1km, ↗ 위례둘레길(덕골) 8.7km

 



" 위상이 남다른 4개의 문 " 

남한산성에는 4개의 문이 있습니다. 한양의 4대문 처럼 남한산성의 4개문은 좌익문(左翼門: 동문), 우익문(右翼門: 서문), 지화문(至和門: 남문), 전승문(全勝門: 북문) 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한양 도성의 문 이름과 비슷하지요? 가장 크고 넓은 문이 지화문입니다. 지화문은 좌익문과 함께 남한산성의 핵심 도로인  봉화로에 설치된 성문입니다. 왕의 행렬, 마차와 수레, 여러 장사치들과 주민들이 드나들었던 지화문은 남한산성 옛길을 따라 좌익문과 이어지게 됩니다. 이 길은 남한산성 옛길의 가장 핵심적인 루트입니다. 남한산성 옛길은 산성 로터리를 중심으로 북문, 서문, 남문을 일주하는 노선을 따라 이루어져 있습니다.

감이동  1.9km
감이동 - 성불사, 청운사 - 왕행길 - 현위치, 우익문(서문) -전승문(북문) / 지화문(남문).


서문노선 2.1km  

 

서문 전망대

 

발 아래 위례신도시, 멀리 잠실 지역, 롯데월드타워

 

 

서문 전망대 동영상

통제안내판

 

 

국청사

남한산성 국청사 연혁  

본 도장은 조선인조3년(서기1625년) 각성대사에 의하여 창건되었다. 각성대사는 인조대왕으로 부터 팔도총섭총절제중군주장으로 임명을 받은 후 전국팔도에서 승군을 모아 남한산에 성을 축성하시고 9개사찰을 창건하시었다. 병자호란으로 인한 수모를 또 다시 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승군을 훈련하고 군기며 화약, 군량미를 비축하였으니 그 중 하나인 국청사이다. 선사의 유시로 국난에 대비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든바, 일제침략시 일본군에 의하여 방화소진되었던 것을 서기 1968년 중건되었으나 서기 1986년 불자 최계순(불명, 원만행)께서 부지 1,003평(대웅전 요사채)를 기증 하시었으며, 이 모든 것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 국태민안 광도중생을 기원하기 위하여 현주지 선걸 스님께서 삼성각 요사채를 신축하시고 서기 1998년 대웅전을 중건중수 하시었다. 본 도장의 삼존불은 신라 헌안왕 3년(서가 859년) 강원도 철원 보개산 심원사에 조성 봉안하였던 천불 중 서기 1393년 심원사 화재와 임진왜란 때 소실 도난 되었던 바 그 중 삼존불중 한분만 본도장 국청사에 모시었다

불기 2543년 4월, 서기 1999년 5월
대한불교조계종 국청사   
 

대웅전 & 삼성각

영락교회 고 한경직 목사님 우거처

벽면에 십자가가 보인다.

철문에 세겨진 말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심이라. "

 (요 3:16 )

 

한경직목사 우거처 寓居處

이곳은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상을 수상한 목회자이자 교육자이며 사회사업가이었던 한경직목사님이 머무셨던 곳입니다. 남의 집에 임시로 몸을 붙여 산다는 뜻으로 우거처(寓居處)라 이름지었습니다. 자신의 이름으로 된 어떤 것도 가지기를 원치 않으셨던 청빈과 겸손, 하루도 거르지 않고 민족통일을 위해 기도한 나라 사랑의 숨결이 배어있습니다. 방문하는 모든 분들께 주의 평안을 빕니다.

관람시간: 오전 10:00 ~ 12:00,  오후 1:00 ~ 3:00 (첫째, 셋째 수요일은 휴관)
문의:  방문:  031-747-0493  /  사전예약:  031-743-6537

 

일몰 후 바이크 출입금지, 

차량출입 통제 안내: 국청사 주차장 개방 시간 외 차량 진입 금지 18:00(17:00)~ 익일 08:00

야간차량 진입시 회차로 없음.  

 

차량회차 구간. 이면도로 주차금지. 사전예고 없이 단속합니다. 

↑ 국청사

주차공간이 부족하여 이런 곳까지 찾아와 주차하고 있다.

백제의 시조
온조왕과 숭렬전  

" 혼자 있기가 쓸쓸하니 명망있는 신하와 함께 "

초기 남한산성 발굴에서 나온 유물의 고고학적인 분석을 통해 남한산성의 최초 축성연대가 삼국시대임이 밝혀졌습니다.삼국시대 백제가 쌓았다는 견해를 받아들인 다면 남한산성 안에 백제 시조 온조왕의 사당 숭렬전이 있는 것이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남한산성 행궁에서 수어장대로 오르는 옛길을 따라가다보면  초입을 조금 지나 수어장대와 숭렬전으로 가는 길이 나뉘어져 있습니다. 숭렬전은 1638년(인조 16년)에 지은 사당으로 온조왕 뿐 아니라 남한산성 축성에 공이 큰 이서 장군의 위폐가 함께 모셔져 잇는데. 전설에 따르면 인조의 꿈에 온조왕이 나타나 인조의 인품과 성업을 칭찬하면서 혼자 있기가 쓸쓸하니 죽은 사람 중에서 명망있는 신하를 같이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인조는 남한산성을 쌓은 공로자인 이서를 같이 모시게 했다고 합니다. 이서는 남한산성을 쌓을 당시 총책임자였고 병자호란 때 순직한 장군입니다. 

 

 

영락수련원이 보이고 있다.

 

cafe 작은 숲

약수터

영락수련원

 

이곳은 고요 속에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1969년에 한경직 목사님께서 세우신 영락여자신학교가 1973년 9월에 이곳으로 교사를 이전해 왔고, 2014년 12월에는 영락교회 창립 70주년을 맞아 이곳을 리모델링하여 영락수련원으로 새롭게 시작하였습니다. 이루 침묵 가운데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영성수련과 가족의 회복을 위한 가족 수련이 이곳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주소: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남한산성로 780번지길 12

전화: 031-743-6537  

 

 

용마루

석촌

먹러리창고 031)744-2594...능이누릉지오리백숙, 능이누릉지닭백숙, 단호박훈제,옻닭

돌집 031-742-8960

백송....산채정식

남한산성 cafe

"북문으로 들었소"

<- 0.33km 숭렬전, ↑ 0.1km 전승문(북문), ↓ 종로 0.3km,  ↓ 지화문(남문) 0.9km 

 

-> 800m 국청사

↓ 전승문(북문), 송림정, 동촌, -> 국청사, 한경직목사 우거처, 숭렬전, 계곡산장, 가페 작은 숲, 영락수련원, 용마루, 석촌, 돌집, 먹거리창고, 백송식당, 카페 남한사성

 

닭죽

 

40년 전통의 닭죽 "

근대로 접어들면서 남한산성이 행정.군사도시로서 위상을 잃는 동시에 소비도시로서의 특성마저 약화되면서 산성 안에 있던 장시도 점차 약화됩니다. 이러한 변화의 시기에 남한산성에서 삶을 지속하고자 했던 주민들은 새로운 생계수단을 모색해야 했습니다. 이 와중에 남한산성은 수려한 자연환경과 유서깊은 역사문화 자원을 가진, 서울에서 멀지 않은 '놀러가기 좋은 곳'이라는 이미지가 생겨났습니다. 이후 남한산성은 관광지로 주목받게 되며 일제도 이러한 현상을 장려합니다. 이때 산성 인근에 거주하며 남한산성을 떠나지 않았던 주민들은 관광객을 대상으로 음식장사를 시작하게 됩니다. 특히 쉽게 잡아 빠르게 조리할 수 있는 닭죽, 닭백숙 등의 음식이 인기를 끌었고 점차 관광객들 사이에서도 남한산성의 숲괴  계곡을 즐기며 먹는 닭 요리가 유명세를 치르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옛위치에서 옮겨 새로 문을 연 닭죽촌에서 영업을 하는 식당들은 너도나도 남한산성 40년 전통의 닭죽이라는 이름을 걸고 푸짐한 인심과 정성스러운 음식으로 여전히 많은 손님들을 모으고 있답니다. 

<- 150m 전승문(북문)
-> 남한산성 행궁 500m

  

수수정원

온암갤러리

청와정

숲속으로...cafe 베이커리

반월카페

침괘정

침괘정...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호

침괘정은 무기제작소라 알려져 왔으나 온돌과 마루방, 화랑처럼 된 툇마루 등 건물 구조로 보아 집무실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최초의 건립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주변에 있던 무기창고를 명나라 사신 정룡이 '총용무고'라 이름 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 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영조 27년(1751) 광주유수 이기진이 고쳐 짓고 '枕戈亭'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침과정'을 침괘정'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명확하지 않다. 무기 제작소와 무기창고는 침괘정 부근에 별도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보호수 느티나무...수령 200년 (1985,03.10 지정일)

보호수 느티나무...수령 210년 (1985,03.10 지정일)

 

남한산성 종각

남한산성 종각의 천흥사 동종


남한산성의 천흥사 동종은 높이 170cm, 지름 100cm로 몸체에 세겨진 명문 ‘聖居山天興寺銅鐘總和二十八年庚戌二月日' (성거산 천흥사 동종 총화 이십팔년 경술이월일)’ 에 따르면 고려 현종1년(1010)에 주조된 것으로 원래는 태조4년(921)에 태조가 창건한 충청남도 천안시 성거읍 천흥리 천흥사에 있었다고 한다. 남한산성으로 언제 옮겼는지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 산성 내 시간을 알려주는 역할을 했으며 이후 일제강점기 이왕가박물관에 옮겨지고, 해방이후 덕수궁 미술관을 거쳐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었다. 현재 종은 원래의 모양 및 형태 그대로 재현 한 것으로 타종시 울림을 좋게하기 위하여 약 3배 정도 더 크게 제작하였다. 

 

산성마을 로타리

남한산성 옛길 종합안내  

로터리

남한산성 내의 기준점 "

남한산성 안에는 핵심 간선 도로망이있던 봉화로가 남문과 동문을 통해 이어져 있으며, 남한산성  중심지에서 한양도성의 동쪽(현재 하남시)과 남쪽 (송파, 마천)으로 바로 이어지는 중요 노선들이 한 점을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산성 로터리입니다. 남한산성에서 동으로 몇리, 남으로 몇리 이렇게 이렇게 거리를 측정하는 것도 바로 이 로터리를 기준으로 정하게 됩니다. 행궁의 바로 옆에 위치한 일종의 랜드마크와도 같아서 이곳을 왕래하는 주민들의 심리적 중심적 역할을 합니다. 남한산성 내에 위치한 마을이 산성리인데, 산성리 주민들은 로터리에서 우(북 또는 서)로 얼마를 가면 행궁이 있고 아래(동 또는 남)로 얼마를 가면 관아가 있고 방앗간이 있고 장터가 있다는 식으로 심리적 위치를 정하곤 합니다. 주민들 뿐만 아니라  남한산성을 찾는 많은 시민들은 지금도 남한산성 안에서 특정 지점을 말할 때 이 로터리를 기준으로 이여기를 하곤 합니다. 

<- 지화문 700m,  전승문 400m ->

 

산성역 가는 버스를 타려는 사람들...

 

남한산성 로터리 주차장:  

 

주차장 이용요금 (후불):  ( 남한산성 로터리 주차장, 남한산성 남문 주차장, 남한산성 중앙주차장 ) 

- 이륜차, 1000cc 미만 승용차 ( * 스파크, 레이, 모닝 등 ):
  평일:  1,500원, 공휴일 2,500원, 월정기료: 25,000원.
100cc이상 승용차. 소형 승합차(15인승 이하), 소형화물차(1톤이하)
  평일:  3,000원, 공휴일 5,000원, 월정기료: 50,000원.
- 중.대형 승합차, 화물차 (공휴일은 주차불가):
  평일:  6,000원, 10,000원.

* 20:00 - 09:00 무료.
30분 이내 출차 무료.

* 남한산성 주차장 감면규정;


무료: 국빈 및 외교사절단과 그 수행자/ 공무수행 출입자/ 국가유동자 등/ 한복 등 전통의상 착용자/ 군인 등.
- 주차사용료 50% 감면: 18세 미만 아동인 자녀 2명 이상 가족/ 성실납세자 선정된자. 남한산성 상가 중 주민자치평가위원회 선정 상가 이용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