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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구릅/일상들 ( life )

② 용산 전쟁기념관- ( 2024.06.27 )

by the road of Wind. 2024. 6. 28.

 용산 전쟁기념관

- (  2024.06.27 )

 

전쟁기념관 내부 전시실 

 

전사자명비 회랑

전사자명비

우리는 이곳에 창군기, 6.25전쟁, 배트남전쟁, 대침투작전 등에서 전사한 국군과 경찰관, 그리고 6.25전쟁에 참전했던 유엔군 전사자의이름을 새겨 그들의 희생을 추모하며 뜻을 기리고저 합니다.

국군:

170,478 / 1945,6,15~1950.6.24: 8,824 /  1950,6,25~1953.7.23:(6.25전쟁): 152,279 / 1964~1973(베트남전쟁): 4,663 / 1953.7.28 이후: 4,712. 

 

육군: 156,856/ 1945,6,15~1950.6.24: 7,459/ 1950,6,25~1953.7.23:(6.25전쟁): 141,793 / 1964~1973(베트남전쟁): 3,476 / 1953.7.28 이후: 4,128. 
해군 386 /  1945,6,15~1950.6.24: 25 /  1950,6,25~1953.7.23:(6.25전쟁): 273 / 1964~1973(베트남전): 30 / 1953.7.28 이후: 58. 
공군 127 / 1945,6,15~1950.6.24: (-) / 1950,6,25~1953.7.23:(6.25전쟁): 111 / 1964~1973(베트남전쟁): (-) / 1953.7.28 이후: 16. 
해병대 3.051 /  1945,6,15~1950.6.24:  8 / 1950,6,25~1953.7.23:(6.25전쟁): 1,820 / 1964~1973(베트남전): 1,157 / 1953.7.28 이후: 66. 
경찰 10,058 /  1945,6,15~1950.6.24: 1,332  / 1950,6,25~1953.7.23:(6.25전쟁): 8,282 / 1964~1973(베트남전쟁): - / 1953.7.28 이후: 444. 

유엔군: 

: 40,790
미국 36,574, 영국 1,108, 터키 892, 캐나다 516, 호주 340, 프랑스 269, 콜롬비아 213, 그리스 187, 태국 136, 네델란드 124, 에티오피아 122, 필리핀 113, 벨기에 106, 뉴질랜드 45, 남아공 37, 인도 3, 노르웨이 3, 룩셈부르크 2

* 전사자 현황은 참전국 대사관과  국방부 국사편찬연구소의 자료를 제공 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전쟁기념관 현관

MAP

 

3F: 1. 6.25전쟁실 III / 2. 기증실 /  3. 해외파병실 / 4. 국군발전실

2F: 1. 호국추모실 /  2. 6.25전쟁실 I  /  3. 6.25전쟁실 II / 4. 기획전시실

1F: 1.전쟁역사실 /  2.전쟁역사실 /  3. 대형장비실 / 4. 이병형 홀

B1/ B2: 주차장

 

6.25 전쟁실 I

 

01 상징촌, 02 전쟁의 배경과 원인, 03. 북한군의 기습남침, 04, 유엔군의 참전과 지연작전, 05. 낙동강 방어전투, 06. 학도의용군의 참전, 07. 인천상륙작전, 08. 4D 영상체험관, 09. 서울수복, 10. 영상실

 

 

6.25 전쟁 직전 국군의 상황

1) 개릴라 소탕작전으로 인한 전력의 분산
2) 대규모 군사훈련 부족
3) 6월 24일 비상경계령 해제와 대규모 휴가
4) 주요 지휘관들의 육군회관 개관 축하연 참석

  6,25 전쟁 발발 당시 남한과 북한의 군사력 비교:

< 병력 > :   남한  105,752   |    북한 198,380
< 전차 >  :  남한             0   |    북한 242
< 곡사포 >: 남한           91   |    북한 552
< 박격포 >: 남한         960   |    북한 1,728
< 항공기 > : 남한  연습기/연락기 22   |   북한 전투기 등 226
< 함정 > :   남한           71   |    북한 110

  북한의 전쟁모의. 남한 침략 증거 문서

러시아 증거물:


1) 구 소련 기밀문서
- 1994년 6월 러시아 옐친 대총령이 남한에 전달한 구 소련의 기밀문서 216건
- 김일성의 무력 남침요청, 스탈린의 승인, 모택동의 지원 약속 등 남침 준비 과정 기록.


2) 소련 공산당 서기장 흐루쵸프 회고록
- 김일성이 1949년 스탈린을 방문하여 남침에 대한 허락과 지원을 요청한 사실을 폭로


3) 러시아 중학교 역사 교과서(1992년)
- 6.25전쟁은 북한의 김일성이 주도하여 일어났음을 명시함

북한군의 남침 명령


1) 선제타격작전계획
- 1950년 5월 29일 북한군 총참모장과 소련 군사고문단장이 작성
- 38선 돌파 후 서울을 점령하고 남한 주력부대를 섬멸하여 남해안까지 진출한나든 3단계 남한 정복 계획


2) 정찰명령 제1호
- 1950년 6월 18일 북한 민족보위성이 각 사단에 남침 개시 전후의 정보 수집을 명령한 문서


3) 전투명령 제1호
- 1950년 6월 22일 북한군 총참모부가 각 사단에 남한을 침략할 태세를 갖추도록 지시한 북한군의 전면적인 남침계획서
- 공격개시 암호문 '폭풍' 등이 기재되어 있음.   

김일성.스탈린.마오쩌둥의 남침 모의

 

1949년 부터 김일성은 소련의 최고지도자인 스탈린에게 남한 침략을 승인해  줄 것을 여러 차례 요청하였다. 미국과의 충돌을 원치 않았던 스탈린은 남한이 먼저 공격해 올 경우에만 반격할 수 있다고 김일성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나 소련의 원폭 실험 성공, 중국대륙의 공산화 등 국제환경의 변화에 따라 스탈린도 입장을 바꾸었고, 1950년 3월 말 부터 한달 간 김일성과의 3차례 회담을 통해 남침전쟁을 승인하였다.  스탈린은 전쟁을 시작하기 전 중국 공산당 주석인 마오쩌둥의 동의를 받도록 조건을 달았다. 1950년 5월 13일 마오쩌둥을 방문한 김일성은 스탈린과 합의한 내용을 보고하고 협력을 요청하였다. 마오쩌둥은 앞서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소련과 북한의 지원을 받은 바 있었기 때문에  동의하고 미군이 참전할 경우 지원을 약속하였다.   

 

스티코프가 스탈린에게 보낸 암호전문

스탈린이 마오쩌둥에게 보낸 암호전문

주중 소련대사 보고 전문

6.25전쟁에 관한 러시아 중학교 '조국사' 교과서

흐루시쵸프 회고록

북한군을 무장시킨 소련

5만명 이상의 정예전투병을 지원한 중국

 

중국은 내전이 마무리된 1949년 8월 중공군에 소속된 조선인민부대 1만여 명을 북한으로 돌려보냈다. 이어 1950년 5월까지 5만 명 이상의 조선인 출신 병사를 북한군에 편입시켰다. 이들 조선인 병력은 중국 내전을 통해 풍부한 전투경험을 쌓은 자들로, 그 규모도 북한군 전체 병력의 1/3이나 되었다.  이들은 북한군 제5.6.12사단의 주력으로 편성되어 남한을 침략하는데 앞장 섰다.   

 

전쟁 이전의 전쟁, 북한군의 잦은 무력도발

 

6.25 이전 남한 내의 무려충돌 과 국군의 전력 약화

1946년 신탁총치 논쟁으로 본격화된 남한 내의 이념 대립은 점차 격렬해져 좌익세력의 무장 투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1948년 4월 제주도에서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가 발생하였고, 같은 해 10월에는 남로당의 선동으로 여수와 순천에서 제주도 출동을 준비하던 육군 제14연대 내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와같은 무력 충돌과 진압과정에서 군경은 물론 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되었다. 한편 지리산 일대로 숨어든 반란군의 잔여 병력은 1948년 11월 부터 1950년 3월까지 북한이 침투시킨 인민유격대 2,400명과 함께 국군의 후방을 어지럽혔다. 이들의 대부분은 6.25전쟁 발발 이전까지 군경에 의해 진압되었으나 그 과정에서 국군의 전력이 전 후방으로 분산되어 38도선  방어의 약화를 초래하였다.  

 

육본작전명령 38호 국군방어계획

북한군의 전면 공격에 대비하여 1950년 1월말 경 수립한 작전 계획. 1단계에는 38선 경계진지에서 적의 남하를 지연하고, 2단계에는 주진지선에 전 화력을 집중해 적을 섬멸하도록 계획했었다. 그러나 이에 따른 방어준비를 마치기도 전에 전방사단들은 북한군의 공격을 받았다.  

 

중무장한 북한군의 포성이 평화롭던 새벽을 깨우다.

 

북한군 제4사단 전투명령 1호

 

북한의 기습 공격으로 전쟁이 일어나다.

 

1950. 6. 22 북한군 남침 명령 하달

          6.25  38선 전역에서 기습 남침

          6.28  북한군, 서울 점령

          7. 3   국군 한강 방어선 철수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은 38선 전체에서 대대적인 무력 남침을 시작했다. 국군은 최선을 다해 맞섰지만 최신형 T-34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먕렬한 공격으로 수도 서울은 3일만에 점령 당하고 말았다. 국군은 한강 남쪽으로 철수해 방어선을 구축하고 유엔군이 도착할 때까지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히였다.  

 

북한군의 공격으로 3일만에 서울이 함락되다. 

1. 개성.문산 전투:
- 북한군 제1.6사단은 전차연대를 앞세워 25일 아침 개성을 기습 점령하고 각각 문산 방향과 김포 반도를 공략하였다. 국군 제1사단은 임진강선에서 북한군에 맞섰으며, 옹진반도의 국군 제17연대는 부족한 병력으로 최대한 적의 진격을 저지하면서 해상을 통해 김포, 인천으로 퇴각하였다.

2. 포천, 동두천 전투:
- 북한군은 제3.4사단과 전차여단을 의정부 방향으로 투입해 공격해 왔다. 이에 맞선 국군 제7사단의 초기 병력은 2개 연대에 불과했다. 후방의 수도경비사령부, 제2사단 등이 급히 증원되었으나 150여 대의 T-34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진격을 막아내지는 못하였다.

3. 춘천.홍천 전투:
- 북한군 제2.12사단과 모터싸이클연대는 춘천. 홍천을 점령한 후 수원으로 진격해 서울 후방을 차단하려 하였다. 그러나 국군 제6사단의 성공적인 방어로 27일까지 춘천을 점령하지 못하면서 북한군의 서울 포위 계획은 좌절되었다. 이로 인해 국군은 한강 남쪽에 방어선을 형성할 여유를 얻게 되었다. 

4. 동해안 전투:
- 북한군 제5사단과 제1경비여단이 동해안을 따라 공격하고 제549육전대와 제766유격연대가 해상으로 임원진에 상륙하였다. 배후가 차단된 국군 제8사단은 27일까지 강릉을 지키며 주민과 주요 기관을 피난시킨 뒤 전력을 보존해 내륙으로 철수하였다.  

 

소련제 T-34 전차를 격파한  105mm 곡사포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결의한 유엔군 참전 

6월 26일 11시 북한의 남침 소식을 전해들은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소집을 요청하였다. 같은 날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닌 안보리 제1차 회의에서 미국이 제안한 "북한군의 적대행위 즉각 중지와 38선 이북으로 복귀"를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그러나 북한이 이를 무시하자, 6월 28일 제2차 회의에서는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회원국에 남한을 도와 무력 공격을 격퇴할 것을 권고하는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미국이 가장 먼저 해 공군과 지상군을 지원하고, 다른 유엔 회원국들도 잇따라 지원을 시작했다. 7월 7일 개최된 제3차 회의에서는 유엔군 사령부 설치에 관한 결의안을 채택하고 유엔군 사령관의 선임과 지휘를 미국 대통령에게 위임하였다. 초대 유엔군사령관으로 미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가 임명되었다.      

 

유엔 제2차 결의안 투표 장면

 

주한 미 대사 보고 전문 제925호, 미국 트루먼 대통령의 군사지원 성명서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제1차 결의문,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제2차 결의문

 

콜린스 장군으로 부터 유엔기를 인수하는 맥아더 장군

 

유엔회원국들의 군사행동에 통일성과 집단성을 유지하기 위해  '유엔군사령부의 설치' 가 결의되고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에게 안전보장이사회를 대신하여 권한이 위임되었다. 이에 따라 유엔사무총장은 주미 유엔대사를 통해 유엔기를 미국에 전달하고, 1950년 7월 14일 초대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미 육군 참모총장 콜린스 대장으로 부터 유엔기를  전달받았다.   

 

초대 유엔군 사령관, 1950. 7  ~ 1951. 4

인천상륙작전의 영웅

더글러스 맥아더 육군 원수

1880.1. 26- 1964. 4. 5

1980. 1. 미극 아카소주 리틀록 출생
1903.     미국 육군사관학교(웨스트 포인트) 수석 졸업
1919.  육군사관학교 교장
1930.  육군참모총장, 육군 대장
1937.  퇴역
1941. 7. 현역 복귀, 육군 중장
1941. 12. 육군대장
1942. 4. 남서태평양지구 총사령관
1944. 12.  육군원수
1945. 8  연합군 최고사령관
1947. 1. 극동군사령관
1950. 7. 초대 유엔군 사령관
1954. 4. 퇴역  

 

무장 수송선을 격침시켜 부산항을 지켜낸 해군의 활약

 

북한해군은 개전 당일 무장병력을 부산에 상륙시켜 국군을 배후에서 위협하고, 차후 있을 미군의 지원을 차단하려 하였다. 그러나 한국 해군의 유일한 전함 백두산함이 대한해협에서 600명의 병력이 승선한 북한 수송선을 격침시킴으로써 부산을 안전하게 지켜낼 수 있었다. 한국 해군은 옥계.삼척에 상륙을 시도하는 적의 선단도 격퇴하였을 뿐만 아니라, 옹진반도의 제17연대를 철수시키고, 한국은행에서 보관 중이던 금괴와 은괴를 수송하는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부대 재편성과 
국군의 동부지역 지연작전

미 지상군의 참전으로 겨우 한숨을 돌리게 된 국군은 철수한 부대들을 재편성하여 중동부 전선을 관할하게 되었다. 그 중 제1군단에 편성된 수도사단, 제1사단, 제2사단이 청주 괴산 일대를 담당하고 제2군단에 편성된 제6사단과 제8사단이 중부전선의 충주.단양 일대를 맡았다. 동해안은  육군본부 직속으로 편성된 제3사단 제23연대가 담당하였다. 2개 군단이라 해도 사실 병력으로 보면 보잘 것 없었지만, 각 부대는 재편성을 계속해 가며 북한군의 남진을 지연시켰다. 특히 7월 7일 음성 동락리 전투와 7월 17일 경 경북 상주 화령장 전투의 승리는 계속되는 후퇴에 지친 아군과 국민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었다.     

 

6.25전쟁에 참전한 
최초의 미 지상군 스미스부대

6월 30일 미국 정부가 지상군 투입을 승인하자 맥아더 원수는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제24사단에 출동을 명령했다. 스미스 중령이 지휘하는 제21연대 제1대대가 특수임무부대로 편성되어 7월 1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북한군을 저지하기에는 턱없이 적은 병력이었지만 지휘부는 북한이 미군의 참전을 알면 스스로 물러갈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스미스부대는 뒤이어 도착한 제52포병대대와 함류해 7월 4일 오산 북쪽 죽미령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그러나 5일 북한군 제4사단이 제107전차연대를 앞세워 공격해 오면서 스미스부대와 포병대대는 겨우 6시간을 버티다 붕괴되었다. 그 결과 571명 중 181명이 전사하거나 행방불명되는 비운을 맞았다.    

 

미 제24사단의 회생으로 성공한 
서부지역 지연작전

스미스부대에 이어 도착한 미 제24사단 본대는 평택-천안-공주-대전을 잇는 경부 국도를 따라 지연전을 수행했다. 7월 12일 오후에 금강 남쪽으로 철수한 제24사단은 방어를 시작했지만 금강 방어선도 북한군의 후방 침투로 인해 무너지고 말았다. 다음 방어지역은 중부지역 요충지인 대전이었다. 북한군의 공격은 7월 19일 아침부터 시작되었다. 갑천을 따라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측방으로 우회한 북한군이 후방의 금산과 옥천 방향으로 진출하면서 대전은 7월 20일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금강과 대전 전투에서 미 제24사단은 북한군의 공격을 지연시켜 미 제1기병사단이 영동에 투입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벌었다. 그러나 2천여 명의 병력과 대부분의 장비를 잃었으며, 사단장 딘 소장은 철수 중 북한군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후 미 제1기병사단이 영동에 투입되어 왜관을 거쳐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 하였다.      

 

 

최후의 보루,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라

1950. 8.  1   아군, 낙동강 방어선 점령
          8.  3   북한군 8월 공세 개시
          8.16   B-29 폭격기 왜관 융단폭격
          8.31   북한군 9월 공세 개시

낙동강까지 후퇴한 국군과 유엔군은 8월 초, 총 240km의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그것은 유엔군의 증원과 물자 하역에 필수적인 부산을 지켜내기 위한 마지막 보루였다. 국군과 유엔군은 경찰, 학도병, 노무자 등 모든 국민과 함께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였다. 

 

북한군:  6사단/ (진주) /  7사단/  9사단/  4사단/  2사단/  6사단/ (고령) /  10사단/  3사단/ (왜관) / 13사단/ (다부동) / 1사단/ 8사단/ 15사단/ 12사단/  (안강) / 5사단/  (포항)

미군: (마산) / 25사단 / 2사단/ (창녕) / 27사단/ (대구) 1기병사단 /  국군: (대구) / 1사단 / 6사단 / (영천) / 6사단 / 8사단 /  수도사단 / (포항) / 3사단

 

 

피로 물든 낙동강,
후퇴는 곧 죽음이다.

낙동강 방어선은 마산-왜관-영덕을 잇는 총 연장 길이 240km의 방어선이었다. 그 중 마산-왜관의 120km 구간을 미군 3개 사단이, 왜관-영덕까지 120km 구간을 국군 5개 사단이 담당하였다. 국군과 유엔군은 연결된 방어선을 구축해 어께깨를 나란히 하고 북한군을 막아내게 되었다. 북한군8.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한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14만여 명의 벙력을 동원해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다. 그리하여 8월 5일 부터 진행된 낙동강 방어전투에서는 국군과 북한군 사이에 국가의 운명을 건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북한군은 최후의 발악으로 9월 공세를 감행하여, 영산. 다부동. 영천. 안강.포항까지 점령하면서 낙동강 방어선을 위협하였다. 그러나 국군과 유엔군우세한 공군력과 지상화력으로 북한군의 8월 공세와 9월 공세를 막아내면서 낙동강 교두보를 확보하고, 전세 역전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낙동강 방어 전투는 군인, 경찰, 학생, 노무자, 여성들도 참전한 국민 총력전이었다. 

 

B-29

대한민국의 하늘을 지킨
USAF B-29

6월 28일 부터 B-29폭격기 4대가 괌에서 출격하여 종중작전에 참가하였다. B-29는 의정부-서울, 개성-서울을 잇는 도로상의 북한군을 맹폭겨하였다. 낙동강 벙어선 작전에서는 왜관 일대에 융단폭격을 감행하여 북한군에게 많은 타격을 가하였다.     

 

인천상륙작전  1950. 9. 15 06:33

반대를 무릅쓰고 감행한
인천상륙작전:

맥아더 장군은 6월 29일 한강 방어선을 시찰하면서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하였다. 인천항은 서울에 인접해 있어 그 중요성이 매우 컸으나, 수로가 좁고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여 대규모 함대의 이동이 어려운 조건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이유를 들어 미 합동참모부의 극동해군은 작전을 반대했으나, 맥아더 장군은 전략적, 심리적, 정치적인 이유로 서울을 단시일 내 탈환하기 위해서 인천에 상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합동참모본부는 8월 28일 인천상륙작전인 <크로마이트(Chromite)작전 계획>을 승인하였다. 9월 12일 부터 적을 교란하고 고립시키기 ㅜ이ㅙ 인천과 주요 항구에 폭격이 가해지는 가운데, 7만5천명의 싱륙병력을 탑승시킨 261척의 함정이 부산항 및 일본을 출발하였다. 9월 14일 밤 모든 함대가 인천 외항에 집결하였고, 9월 15일 새벽 2시 팔미도 등대가 밝혀지면서 드디어 상륙작전이 결행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팔미도 등대...(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0호)

팔미도는 인천항에서 서남쪽으로 15km 정도 떨어져 있는 작은 섬이다. 이 섬에 있는 팔미도 등대는 1903년에 점등된 한국 최초의 근대식 둥대로, 해안선이 복잡한 인천항로를 오가는 선박들의 길잡이 역할을 해오고 있었다. 미 극동사령부 클라크(Eugene F. Clark) 미 해군 대위는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하기 2주 전 연정 해군소령, 계인주 육군대령 등 한국군 동료와 함께 상륙작전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팔미도를 탐사했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팔미도 등대를 상륙부대의 길잡이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미 극동사령부로 부터 9월 15일 정각에 이 등대를 점등하라는 명령을 받은 이들은 상륙작전 하루 전날인 9월 14일 팔미도에 잠입하여 임무를 완수하였다. 클라크 일행의 활약으로 유엔군 상륙함대는 원할하게 인천항에 진입할 수 있었고, 이후 서울찰환작전과 대규모 반격으로 이어지는 전세의 전환점을 열었다.  

 

인천상륙작전,
완벽한 가습작전의 성공

1950년 9월 15일 새벽 6시 30분미 제5해병대 17개 대대가 녹색해안를 점령하였다. 오후 5시 33분, 다시 만조가 돠면서 유엔의 엄호 사격과 함께 주력부대들이 상륙을 시작하였다.  미 제5해병연대와 국군 해병대 제1연대 제3대대는 적색해안(현재 동구 만석동 대한제분 입구)을, 미 제1해병 연대는 청색해안(남구 용현5동 해안도로 입구)을 향해 상륙 돌격하였다. 국군 해병대 제1연대는 15일 오후 8시 무렵, 적색해안에 상륙하여 시가지에 남은 적을 소탕하고 외곽 경비를 담당하였다. 해상에서 대기 중이던 미 제7사단9월 17일 부터 상륙을 시작해 수원, 오산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 탈환의 길을 열었을 뿐 아니라, 낙동강 방어선에 투입된 북한군 주력 부대의 병참선을 일시에 끊고 공세를 취할 수 있게 되었다.    

 

인천상륙작전 지원 경로:


1.인천 <-  2. 포인트캘리포니아 <-  3. 포인트아칸시스 ( <- 부산 ( 미 제5해병연대)    <-  4.포인트아이오와  ( <- 일본 사세호 (기함, 호위함정 및 함포사격지원대)   / <- 일본 고오베 (미 제1해병사단)  / <- 일본 요코하마 (미 제7보병사단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맥아더 장군 (Gen. McArthur's Incheon Landings)

더글러스 맥아더는 제2차 세게대전 때 남서태평양지역 연합군 사령관으로서 태평양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지휘관이었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한 후에는 미 극동군사령관으로 일본을 통치했으며, 6.25전쟁이 발발하자 초대 유엔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 장군의 확고한 신념이 없었다면 결행되기 어려운 작전이었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맥아더 장군은, 북한군이 3개월 동안에 얻은 승리를 15일 만에 뒤집는 대 역전극을 펼쳤다.  

 

다시 찾은 수도,

서울

 

1950. 9. 18  김포비행장 탈환

         9. 24  연희고지 점령

         9. 25  서울 시가전 개시

         9. 28  국군.유엔군, 서울 탈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서울 탈환의 교두보를 마련한 국군과 유엔군은 진격을 계속해 9월 28일, 3개월 만에 수도 서울을 되찾았다. 그러나 수세에 몰린 북한군은 철수하면서 10만 명에 달하는 시민을 이북으로 잡아가고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였다.  

 

서울을 되찾기 위한 
한.미 연합군의 수도 탈환기

인천에 상륙한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향해 진군해 오자 북한군은 크게 당황하였다. 그들은 가까이 위치한 부대를 총동원하고 시민들까지 끌여들여 서울을 방어하게 하였다. 미 해병 제1사단과 국군 해병대는 1950년 9월 18일 김포비행장을 탈환한 뒤 행주나루와 여의도.서강 방향에서 한강을 건너, 일부는 서울 북쪽을 차단하고 중앙청 방향으로 공격하였다. 한강 남쪽으로 이동한 미 제7사단과 구군 제17연대는 서빙고에서 강을 건너 남산과 서울 동쪽 지역을 점령하였다. 북한군은 완강하게 저항하였으나, 아군은 항공기와 포병의 압도적인 화력 지원 덕분에 적을 제압할 수 있었다. 서울을 포위한 한.미 연합군은  9월 25일 오후부터 시가전에 돌입하였다.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는 가운데 9월 27일 오전 6시 국군 해병대가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마침내 9월 28일 아군은 석 달만에 수도 서울을 되찾았고, 다음날 정오 국회의사당에서 수도 탈환식을 거행하였다.     

 

중앙청에 다시 게양하는 태극기  

 

공산치하 3개월
북한군의 폭정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기간 동안 시민들은 인민재판, 장제 징용, 납북 등으로 고통을 받으며 공포에 떨어야 했다. 그 결과 일반 시민은 물론 공산주의를 동경했던 좌익들 까지도 반공산주의로 돌아서게 되었다.  

끌려가는 납북자 모습/ 전주공동묘지에서 집단학살된 신원 확인하는 모습/  

서울의 첫번째 인민재판 / 학살당한 여성들 / 납북 중 낙오자를 살해하는 모습

 


 

< ▲ 2024.01.27 사진 >

 

6.25 전쟁 중기(인천상륙작전~재반격)의 전쟁지도

 

국군과 유엔군은 미 합참으로 부터 전략지침을 받은 유엔군사령관의 작전지도하에 전쟁을 수행하였다. 북한은 중공군 개입 이후 소련의 동의를 얻은 후 조중연합사령부를 설치하고 전쟁지도체계를 일원화 하였다. 즉 모스크바와 베이징(북경)으로 부터 전략지시를 받은 조중연합사령관이 중공군과 북한군의 기존의 명령계통을 통해 전쟁을 지도하였다. 

국군 단독으로 38도선 돌파: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역전 시킨 국군과 유엔군은 전세를 역전시키고 북진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9월 29일 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이 38선을 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군 참모총장 정일권 장군을 부러 독자적인 38선 돌파를 지시했다. 10원 1일 한국군이 먼저 38선을 넘었고, 유엔군 사령부는 10월 2일 일반명령 2호로 북진을 승인했다.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긴급 지원을 요청한 편지 (1950년 9월 29일)

 

" 전 세계근로인민의 수령이신 당신에게 충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현재 미군의 인찬상륙작전으로 전황이 부리하여, 우리 자체의 힘만으로는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소련군의 직접 출동 또는 중국에서 의용군을 조직하여 지원해 줄 것을 급히 요창하오니, 이에 대한 당신의 지시가 있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 조선노동당 중앙위원장 김일성

 

중공군의 개입 (1950.10.19)

1. 북한군 남침, 2. 북한군 최대남침선, 3. 유엔군 최대 북진선, 4. 중공군 최대 남침선, 5. 휴전협정조인 

 

---> 북한군의 남침

----> 국군,유엔군의 진

 

 

6.25 전쟁 후기
( 휴전협상 ~  정전)의 전쟁지도


국군과 유엔군은 미 합참으로 부터 전략지침을 받은 유엔군사령관의 작전지도하에 전쟁을 수행하였으나 한국정부는 유엔군이 추진하고 있는 휴전회담에 반대함으로써 갈등이 있었다. 공산군측은 스탈린 사망 이후 조중연합사 체제에 의한 작전지도는 계속되었으나, 소련의 영향력이 감소됨으로써 이후 휴전하는 방향으로 전쟁을 지도하였다. 

이승만 대통령 반공포로 석방:

반공포로 27,000명 석방은 미국과의 협의 없이 이 대통령의 결단으로 이루어져 세계를 놀라게 했다.    

 

휴전회담 중의 주요 전투지역 (1951. 6. 23 ~ 1953. 7. 27 )


(개성) - 네바다 전초( Nevada Cities) - 후크 고지 (The Hook)- 빅 혼 고지(Big&Liyyle Hill) - 불모 고지 (Old Baldy)-  폭찹 고지 (Porkchop Hill)- 티본 고지(T-Bone) - 백마 고지 (White Horse Hill ) - (철원) - 잭슨 고지(Jackson Heights) - 철의 삼각지(Triangle Hill) - 러셀 고지 (Jane Russel Hill)- 번개 고지 (Lightening Hill) - (금화) - 수도 고지 ( Capital Hill ) -  단장의 능선 ( Heart Break Ridge) - 펀치볼(Punch Bowl) - 제이 능선(J Ridge)  - 앵커 고지 (Anchor Hill)

 

한국측 서명없는 정전협정 조인서

 

한.미상호방위조약

 

1953년 10월 1일 워싱턴에서 한국과 미국간에 체결된 조약 문서이다. 이 조약은 1954년 1월 양국의 국회에서 승인되어 비준절차를 거쳐 11월 17일 비준서가 교환되었다. 11월 18일 조약 제34호로 정식 발효되었다.  

 

평양환영대회


1950년 10월 19일 국군이 평양을 탈환한 후 같은 달 30일 평양시청에서는 이승만 대통령과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평양입성 환영대회가 열렸다. 당시 촬영한 사진을 토대로 제작되었다.  작가 신중섭. 

 

맥아더 장군 과 이승만 대통령

 

6.25 참전 국제연합군 국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