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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구릅/일상들 ( life )

덕수궁- ( 2024.09.17 )

by the road of Wind. 2024. 9. 17.

덕수궁

- ( 2024.09.17 )

 

추석 전날인데도 날씨는 여름같이 여전히 무덥습니다. 운동도 할 겸 어디를 조금 가보나 생각하다 전철역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 위치한 2호선 서울시청역 덕수궁을 다녀왔습니다. 덕수궁은 시청역 전철 2번 출구로 나오면 바로 덕수궁 정문인 대한문입니다. 도심지에 있는 고궁에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추석을 기해 서울시 고궁은 무료 입장입니다. 달랑 물 한병만 가지고 덕수궁 이곳저곳을 다니며 사진을 찍어 보았습니다. 날씨가 선선하였다면,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경희궁서울시립역사박물관도 구경해 보고 왔을 것입니다.  오늘은 너무 더워 이를 생략하고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을 관람해 본 후, 팽성문을 통해 덕수궁을 나와 구세군본영을 지나 5호선 광화문역에서 산책을 마쳤습니다. 명절 무렵 서울의 고궁 하나를 탐방해 보았다는데 커다란 만족감을 느꼈습니다. 무엇보다 고궁을 방문하면서 가이드 설명문을 읽어보면서 역사 공부를 하게 된다는 이점이 좋았습니다.  

 

 산   책 : 걸음수 4,526 steps, 거리 3.15 km, 소모열량 147 kcal, 소요시간 00:48 hrs, 속도 3.9 km/h, 기온 32℃. (맑음)

 코   스 :  2호선 시청역 (2번 출구) -  덕수궁  ( 대한문 - 광명문 - 함녕전 - 덕홍전 - 중화전 - 중화문 - 준명당 - 측조당- 석어당 - 정광현 -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 - 국립현대미술관 - 돈덕전 - 팽성문 ) - 구세군서울제일교회- 서울덕수초교 - 새문안교회 - 포시즌즈호텔 서울 - 광화문역(세종문화회관).  

 

 

● 덕수궁:

 

덕수궁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크게 두 차례 궁궐로 사용되었다. 덕수궁이 처음 궁궐로 사용 된 것은 임진왜란 때 피난 갔다 돌아온 선조가 머물 궁궐이 마땅치 않아 월산대군의 집이었던 이곳을 임시 궁궐(정릉동 행궁)로 삼으면서 부터이다. 이후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정릉동 행궁에 새 이름을 붙여 경운궁이라고 불렀다. 경운궁이 다시 궁궐로 사용된 것은 조선 말기 러시아 공사관에 있던 고종이 이곳으로 옮겨 오면서부터이다.  조선 말기 정국은 몹시 혼란스러웠다. 개화 이후 물밀듯 들어온 서구 열강들이 조선에 대한 이권 다툼이 치열했기 때문이다.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서 돌아와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새로 환구단을 지어 하늘에 제사를 지낸 뒤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대한제국 선포는 조선이 자주 독립국임을 대외에 분명히 밝혀 정국을 주도해 나가고자 한 고종의 선택이자 강력한 의지였다. 대한제국의 위상에 맞게 경운궁 전각들을 다시 세워 일으킨 것도 이과 같은 맥락이다. 고종 당시의 궁궐은 현재 정동과 시청 앞 일대를 아우르는 규모로 현재 궁역의 3배 가까이 이르렀다. 그러나 고종의 의지와 시도는 일제에 의해 좌절되고, 고종은 결국 강압에 의해 왕위에서 물러났다. 이때부터 경운궁 ‘덕수궁’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고종에게 왕위를 물려받은 순종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고종에게 장수를 비는 뜻으로 ‘덕수’라는 궁호 (공덕을 칭송하여 올리는 칭호)를 올린 것이 그대로 궁궐 이름이 되었다. 고종은 승하할 때까지 덕수궁에서 지냈으며, 덕수궁은 고종 승하 이후 빠르게 해체, 축소되었다. 개화 이후 서구 열강의 외교관이나 선교사들이 정동 일대로 모여들면서 덕수궁도 빠른 속도로 근대 문물을 받아들였다. 덕수궁과 주변의 정동에는 지금도 개화 이후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건립된 교회와 학교, 외국 공관의 자취가 뚜렷이 남아 있다. 덕수궁이 다른 궁궐들과 달리 서양식 건축을 궐 안에 들인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고종 당시의 궁궐 면모에는 크게 못 미치지만, 덕수궁에는 저마다 사연을 안은 유서 깊은 전각들이 오순도순 자리하고 있다. 석어당에서 석조전에 이르는 뒤쪽에는 도심의 번잡함을 잊게 하는 호젓한 산책로도 있다. 파란만장한 근대사의 자취를 기억하는 덕수궁은 서울에서 손꼽히는 산책로인 정동길과 더불어 도심의 직장인과 연인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 ( 문화재청 )

 

 

덕수궁 연표:

 

1932년 (태조1) 조선개국 

 

1500년대 (임시행궁):
1592 (선조25) - 임진왜란 발발.

1593 (선조26) - 의주로 피난갔던 선조가 한양에 돌아와 옛 월산대군의 저택을 임시행궁으로 삼고, '정릉동 행궁'이라 부름.

1595 (선조28) - 궁역의 동쪽과 서쪽에 문을 세움  

 

1600년대 (법궁):

1608 (선조 41) - 선조 석어당(추정)에서 승하. 다음날 광해군 즉조당(추정)에서 즉위.

1611 (광해 3)   - 광해군 창덕궁으로 옮김. 정릉동 행궁을 ‘경운궁(慶運宮)’이라 칭함. 12월 광해군 다시 경운궁으로 옮김.

1615 (광해 7)    - 광해군 창덕궁으로 다시 옮김.

1618 (광해 10)  - 인목대비의 를 폐위하고 석어당에 유폐.  

1623 (인조 1)   - 인조, 반정에 성공한 뒤 즉조당(추정)에서 즉위, 창덕궁으로 옮김. 

 

1800 - 1900년대 (대한제국의 멸망):
1876 (고종13) - 강화도 조약 체결, 문호개방 시작.

1896 (고종33) - 고종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

1897 (고종34) - 고종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돌아옴.

1897 (광무 1)  - 대한제국 선포. 고종 황제 즉위. 연호를 광무(光武)라 정함. 

1904 (광무 8)  - 러일전쟁 발발함. 대화재로 중화전, 석어당, 즉조당, 함녕전 등 전각 소실.

1905 (광무 9)  - 증명전에서 을사늑약 체결.

1906 (광무10) - 대안문(大安門) 수리하고 대한문(大漢門)으로 개칭.

1907 (융희 1)  - 순종 창덕궁으로 옮김. 경운궁을 덕수궁으로 부르기 시작.
1910 (융희 4)  - 석조전 완공.

1919  - 고종,함녕전에서 승하함.

1938  - 석조전 서관 완공. 이왕가미술관(李王家美術館)으로 개관.

1945  - 광복

1946  - 석조전에서 미소공동위원회 열림.

 

2011  - 증명전 개관.

2014  -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 개관.

 

 

서울시청....

 

인구 약 1,000만 명의 거대 도시를 관할하는 서울특별시 청사의 구청사는 일제의 경성부청 청사였다. 현 서울시청 신청사는  구청사 곁에 거대한 쓰나미가 덮치는 형태의 기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나는 건축에 대해서는 실로 아무 것도 모르는 문외한이지만 아무리 보아도 이 신.구 건축물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기존의 전체 부지 위에 우리나라의 행정기관을 상징 할 수 있는 멋진 신새대 건축물을 구축하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해 보게 된다. 역사적인 가치의 보존을 전제로 일제의 잔존 건축물을 보게 되는 것이 좋게 생각되지 않는다.

 

 

더 플라자호텔 & 한화 사옥

 

대한문(大漢門).... 덕수궁의 정문  

대한(大漢)’은 ‘ 한양이 창대해 진다 ’는 뜻이고, 한양(漢陽)은 한수(漢水), 곧 한강(漢江)에서 유래한 것으로, ‘한(漢)’은 ‘ '하늘’, ‘한수(漢水)’는 ‘은하수(銀河水)’를 뜻한다. 현판글씨는 특진관(特進官) 남정철(南廷哲)이 쓴 것이라한다. 

남정철(南廷哲, 1840~1916) : 자는 치상(穉祥), 호는 하산(霞山), 본관은 의령(宜寧). 조선 후기 학자 유신환(兪莘煥, 1801~1859)의 문인이다. 1894년 특진관(特進官 : 궁내부에서 왕실 일을 보좌하던 벼슬)이 되었고, 1909년(융희 3) 나이 많은 문신들을 예우하기 위해 만든 기구인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일본 작위인 남작(男爵)을 받았다.   

 

덕수궁 관람 안내:

매주 월요일은 휴궁일입니다. 

 관람시간:

매표 및 입장시간: 09:00 ~ 20:00.
관람시간: 09:00 ~ 21:00. ( 야간개방: 오후 21시까지 )

▶ 관람 요금:  

일반권 ( 만 25세~만64세 ): 개인 1,000원, 단체 (10인이상)  800원.

점심시간관람권: 3,000원 ( 3개월 10회, 11:30-13:30
상시관람권: 관람시간내 10,000원 (1개월)  
통합관람권: 6,000원 (4대궁 및 종묘)
시간제관람권
    .  30,000원  ( 12개월, (12:00 - 13:00, 덕수궁.창경궁)  
    . 100,000원 ( 12개월, (12:00 - 13:00 ) ( 덕수궁, 창경궁, 경복궁, 14개능 , 동반1인 무료)
 
무료 ( 내국인 ): 


만 24세 이하, 만 65세 이상 / 한복착용자 / 문화재위원,전문위원 / 독립유공자 / 군복을 입은 현역군인/ 참전유공자 / 고엽제후유증환자/ 병역전문가 / 국가유공자.그 배우자(3급) / 특수임무유공자 / 장애인.보호자 1인(3급이상) / 5.18민주유공자 / 즁요뮤형문화재보유자.전수교육조교 / 차상위계층 / 학생을 인솔한 보육시설,유치원,조.중.고 교원 / 기초생활수급자 / 관광객을 인솔한 관광통역.문화관광해설사/ 다둥이 / 문화유산국민신탁 회원 / 임산부(동반1인)/  문화가 있는 날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

 

대한문 수문장

 

하마비(下馬碑)

 

 

덕수궁  

덕수궁 터에는 원산군(1454~1488)의 후손을 비롯한 왕족들과 고관들의 저택들이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서울의 모든 궁궐이 불타 없어지자 선조는 이 집들을 수용하여 임시로 거처하는 행궁으로 사용하다가, 광해군이 1611년 재건한 창덕궁으로 어가를 옮기면서 별궁인 경운궁(慶運宮)이 되었다. 이후 19세기 중엽까지는 궁궐로서 큰 역할이 없다가 1897년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경운궁을 대한제국의 궁궐로 삼았고 많은 전각들을 새로 세워 궁궐의 격식을 갖추어 나갔다. 또한 근대화를 향한 고종의 의지에 따라 궁 안에 여러 서양식 건물을 세웠다. 그러나 1880년대 정릉동 일대는 각국의 외교사절의 공관과 선교사들의 주택이 밀집해 있어 경운궁의 궁역을 확장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기존의 미국, 영국, 러시아 영사관 사이로 궁역을 확장하다 보니 대지의 모양이 불규칙하게 된 것이다. 1907년 고종이 퇴위하면서 선황제 거처가 되어 궁의 이름을 덕수궁으로 바꾸었으며, 태평로를 확장하면서 궁역이 축소되었다. 고종이 승하한 후에는 북쪽 선원전과 서쪽 증명전 일대도 매각되어 원래 넓이의 1/3만 남게 되었다. 1933년에는 중심 부분과 몇 개의 양관(洋館) 만 남고 대부분의 전각들이 철거된 후에 공원으로 조성되어 일반에 개방되었다. 현재는 중심부인 중화전 일원과 정광헌 및 석조전과 같은 양관들만 남아있다.   덕수궁은 임진왜란 및 구한말이라는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으뜸 궁궐로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던 상징적 공간이었다. 또한 전통 규범 속에 서양식 건축을 수용한 근대적 궁궐이며, 주변 상황의 공간적 맥락에 맞추어 조성한 도시적 궁궐이었다.    

 

광명문

 

광명문:

광명문은 고종이 기거하던 함녕전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대한제국 시기에 건립되었다. 1919년 고종이 함녕전에서 승하하자, 국장 때 고종의 관(재궁 梓宮)이 광명문을 통해 나갔다. 일제강점기에 덕수궁이 크게 훼손되면서 광명문 좌우에 있던 행각이 철거되었고, 1930년대 광명문도 중화문의 서남쪽으로 옮겨졌다. 나중에는 광명문 안에 물시계인 자격루와 홍천사명 동종을 보관하기도 하였다. 덕수궁 권역의 복원을 진행하면서 2018년 12월, 광명문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게 되었다.

 

 


함녕전과 덕홍전 |  咸寧殿. 德弘殿


함녕전은 고종이 거처하던 침전으로 1919년에서 승하하셨다. 1904년에 화재로 소실된 후에 다시 지어졌다. 대청마루 양 옆으로 온돌방을 드렸고, 사방 툇간에 방을 두른 전형적인 침전건물이다. 함년전 뒤편에는 계단식 정원을 꾸몄고, 전돌로 만든 유현문(唯賢門)과 정식적인 굴뚝들을 설치했다. 

덕홍전은 고위 관료와 외교사절들을 접견하던 곳으로 1911년에 건립한 전통 양식의 건축물이지만, 내부는 천장에 샹들리에를 설치하는 등 서양풍으로 장식했다.   

 

 

함녕전

 

고종의 침전인 함녕전의 어좌...일월오악도가 선명하다.

 

덕홍전

 

덕홍전 전시물

석어당 방향

 

중화전....덕수궁의 정전

 

중화문과 품계석

 

중화전

 

중화전 일원

중화전과 그 앞마당은 국기 행사를 치르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중화전 앞에는 2단으로 된 월대가 있고 마당에는 넓적한 돌을 깔았으며 벼슬의 등급을 나타내는 품계석과 임금이 다니는 어도(御道)를 설치하는 등 전통 궁궐의 격식을 갖추었다. 1902년에 임시 정전으로 쓰던 즉조당(卽阼堂) 남쪽에 행각을 두르고 중화전을 지어 궁궐의 중심 영역으로 삼았다. 중화전은 원래 중층 건물이었으나, 1904년에 큰 화재가 나 건물들이 모두 불에 탔다. 이에, 1906년 단층으로 규모를 줄여 다시 세운 것이 지금의 중화전이다. 중화문과 행각도 함께 다시 세웠는데. 현재 행각은 동남쪽 모퉁이의 일부만 남아 있다.   

 

 

중화전 용상

 

 

중화문

 

중화전 행각

 

중화전 행각:

 

1902년 덕수궁의 중심 건물(정전)인 중화전을 건립하였을 때 중화전은 128칸의 행각으로 둘러쌓여 있었다. 1904년 덕수궁 대화재로 중화전을 비롯한 많ㅇ은 전각들이 불탄 후 다시 지으면서 행각 역시 108칸의 규모로 새로 지었다. 1910년 국권을 상실한 후 일제 강점기에 덕수궁 내 여러 전각들이 훼손되었는데, 중화전 행각도 이때 대부분 철거된 것으로 보인다. 현존하는 행각은 1905년 중건된 행각의 일부가 남겨진 모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 &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

 

준명당 & 즉조당


준명당 (浚眀堂)은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1904년 화재 때에 소실되었으며, 같은 해에 건물을 다시 짓고, 1905년 8월 현판을 걸어 중건하였다. 목조 건물로 즉조당과는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고종께서 신하나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곳으로, 함녕전이 지어지기 전까지 고종의 침전으로 쓰였다고 한다. 이 건물은 높은 기단 위에 세워졌고, 정면 6칸, 측면 5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만들어졌다. 또한 좌우 툇간에는 쪽마루가 있다. 이후 1916년 4월에는 덕혜옹주 교육을 위한 유치원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즉조당 (卽阼堂)은 준명당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는 이 건물은 15대 광해군과 16대 인조가 즉위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1897년 고종의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한 직후 정전으로 이용하였으며, 이때 즉조전의 이름을 태극전, 중화전으로 불렀다. 이후 1902년 새로운 정전이 세워지자 다시 즉조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1904년 덕수궁 대화재 때에 소실되었던 즉조당은 그 해에 석어당, 준명당과 함께 건물을 다시 짓고, 1905년 9월 현판을 걸어 완전히 중건하였다. 이 곳은 고종의 후비인 순헌황귀비가 1907년부터 1911년 7월 승하할 때까지 생활하던 공간이기도 하며,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즉조당 & 석어당 & 중화전

 

 

석어당


창건 연대 미상. 1904년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같은 해에  중건하였다. 덕수궁의 유일한 중층의 목조 건물로 선조가 임진왜란 중 의주로 갔다가 환도한 후 이곳에서 거처하였고, 1608년 2월 선조가  승하한 곳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또한 인목왕후가 광해군에 의해 유폐되었던  곳이기도 하며, 인조반정이 성공한 뒤 광해군을 석어당 뜰 아래 꿇어 앉히고 광해군의 죄를 문책한 곳 이기도하다. 단청을 하지 않은 "백골집"으로 아래층은 정면 8칸, 측면 4칸이며 위층은 정면 6칸, 측면 1칸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석어당 내부

 

정관헌

 

정관헌 내부

 

정관헌
 
정광헌은 러시아 건축가 사바찐이 설계했으며 '조용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공간'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정세 속에서 잠시나마 여유를 가지고 생각에 잠겼을 고종의 모습이 짐작되는 곳이다. 한식과 양식을 절충해 설게한 건물이다. 지금은 여기 잠시 앉았다 갈 수도 있다. 일반인들도 잠시 잠깐이라도 덕수궁 정관헌에서 세상을 조용히 바라볼 수 있으며 좋을 것이다.

 

함녕전, 덕홍전 방향

 

석어당 후면

 

즉조당

 

즉조당 내부

 

중화전 후면

 

준명당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오늘은 지나친다.

 

국립현대미술관

 

현대미술관  MMCA 소장품전:  작품의 이력서

 

" 대한민국예술원 개원 70년: 지금, 잇다 " 

 

이신자, <무제>

 

박광진, <자연의 소리 2021-10-A>

 

조정현, <키질하는 즐거움>

 

이철주, <꽃보다 아름다원라 002>, <꽃보다 아름다원라 001>

 

" 지금, 잇다  예술원 "

 

이종우, <풍경>

 

김인승, <들장미>

김경승, <여인와상>

 

류경채, <산길>

 

유영국, <작품>

 

김원, <설악산>

 

민경갑, <자연과의 공존 99-01>

 

2. 시대의 기록

 

김정현, <농촌풍경>

 

박광진, <팔당호수>

 

 

돈덕전

 

돈덕전은 고종 즉위 40주년 칭경예식* 에 맞추어 서양열강과 대등한 근대국가로서의 면모와 주권 수호 의지를 세계에 보여주고자 1902년~1903년에 걸쳐 황궁에 지은 서양식 영빈관으로, 1921년~1926년 훼철되었다.


* 칭경예식: 1902년 고종의 즉위 40주년을 경축하기 위해 대규모 국제행사로 기획한 예식(전통식과 서양식이 혼합된 예식)으로서, 돈덕전은 이 행사를 위한 서양식 영빈관으로 지어졌다. 대한제국은 이 행사를 통해 황제의 위상을 높이고, 나아가 냉엄한 국제 사회에서 중립국으로 인정받는 계기를 마련하려 하였다. 그러나, 콜레라의 창궐로 국제행사는 무산되고, 같은 해 11월 국내행사로 축소되어 전통방식의 예식만 경운궁(덕수궁)내에서 거행되었다. - 국가문화재청.

 

 

=== < ▼ 2023.10.29 사진 START:  돈덕전 내부 > ====

=== < ▲ 2023.10.29 사진 END > ====

 

팽성문

 

광화문광장 방향 가는 길

 

구세군 제일교회

 

덕수궁 선원전 영역

 

구세군 서울제일교회


100주년 비젼선언문

 

구세군영

 

"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꺽는 것이 아니겠느냐 "  (이사야 56:6)

 

구세군대한본영(救世軍大韓本營) 연표:

< 구세군의 형성 >::
- 1865년:  영국의 위리암 부스((William Booth) 목사에 의해 창립된 기독교회이다.
- 1858년:  부스  29세에 감리교 개혁파 목사가 됨.
- 1861년:  감리교 개혁파의 리버풀 연회에서 전국적 순회 부흥사로 임명요청 거절되자, 부스는 감리교를 떠나 런던의 동부 빈민가 선교에 나섬.
- 1865년:  동부 런던 부흥협회가 조직되어 세계적인 조직을 갖추게 됨.
- 1869년:  영국 전역을 선교 대상으로 하는 기독교 선교회로 발전.
- 1878년:  기독교 선교회는 구세군(The Salvation Army)으로 확대 개편되어 기독교(개신교)의교파로 출범하였다.

< 한국 선교 >:
- 1908년: 영국 선교사 로버트 하기드(Robert Hoggard) 사관 일행이 일본을 거쳐 서울에 도착하여, 서대문구 평동에 본영 설치.  
- 1909년:  <구세신문> 창간호 발행.
- 1910년: 구세군사관학교 설립하여 한국인 사관 양성 시작.
- 1925년: 170개 영문(교회), 218명의 사관, 9,000명의 병사로 교세 급성장함.
- 1928년: 자선남비운동과 고아원.병원.학교 등 다양한 사회사업을 벌였으나, 일제 강압으로 구세군이 구세단으로 개편됨.
- 1944년: 모든교회가 '합동교단'으로 편입되어 명맥을 잃기도 함.
- 1945년: 광복후 구세군은 다시 6.25 전쟁으로 무려 78개 교회와 많은 사회사업시설들을 북한에 남겨두었고, 노영수 참령 등 많은 사관이 순교하였다. 
- 2009년: 현재 220여개 영문(교회)와 10만명의 교인, 지역사회복지 시설 220개, 전문 사회사업시설 47개 등 운영. 

- 2018년: 61,023명의 교인 ( 2018년 문화체육관광부) 및 국내 사업기관 146개소.  

 

 

100주년 비젼 선언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여 영혼을 구원하며
신자들을 양육하여 성결한 삶을 살게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돌봄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며
복음 사역자들과 성격적인 교회를 배출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 시킨다.

2008년 11월 11일 
구세군 서울제일교회 

 

구세군 중앙회관

 

구세군의 탄생:

위리엄 부스(William B00th)와 캐서린 부스(Catherine Booth)

구세군이 탄생한 19세기 영국사회는 산업혁명 이후 급속한 도시화로 인해 실업, 질병, 가난, 기아, 무주택 등 많은 사회문제들로 도시마다 속수무책인 상황이었다. 또한 사회적 양극화의 심화로 경제적 불평등이 극한에 다다르고 있었다. 감리교 목사였던 윌리엄 부스 (1829~1912)와 그의 아내 캐서린 부스(1829~1890)는 그 당시 가장 가난한 지역이었던 영국의 런던 동부에서 자신들의 사명을 발견하고 평생 그곳에서 사역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되었다. 윌리엄 부스는 오직 교회 밖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아무런 조건과 형편, 환경에 구애 받지 않고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다. 윌리엄이 복음 선포와 행동하는 선교적 교회로 구세군을 시작했다면, 캐서린은 말씀과 교육, 그리고 여성의 선교참여를 이끌어 내는 시대적 사명을 감당했다. 의리엄 부스가 동부 런던에서 부유한 지식계층의 사람들에게 성서강의를 하며 지성과 영성을 겸비한 체험적 기독교 신앙을 가르쳤다. (....)  

 

 

덕수초등학교

 

새문안교회

 

조선 말 언더우드학당(경신중고등학교),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 등을 세운 미국의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가 1887년에 설립한 대한민국 최초의 장로교회이며, '대한민국 개신교의 어머니교회'로 불리고 있다.

 

포시즌즈 호텔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주변 음식점들

 

배가 고프니 눈에 먹는 것만 보인다. 이곳 음식점이 모여있는 골목은 흥미가 진진하다.

 

5호선 광화문역,  세종문화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