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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구릅/일상들 ( life )

① 다산 정약용 유적지, 생태공원- ( 2025.01.02 )

by the road of Wind. 2025. 1. 3.

다산 정약용 유적지, 생태공원

- ( 2025.01.02 )

 

《  다산 정약용 유적지  》

 

다산 정약용 선생 생가  유적지 그리고 수변 생태공원이 있는 남양주시 능내리 팔당호반을 산책하여 보았습니다. 다산 선생의 위대하신 어록과 일대기를 보며, 검소한 선생의 생가를 보며 감명을 받았습니다. 또한 남양주 능내리 일원에서 바라보는 팔당호수의 경치는 너무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팔당호를 파노라마 처럼 감상할 수 있는 호반의 경치가 나를 사로잡았습니다. 다산 선생께서는 우리 민족의 위대한 스승이라 할 것입니다. 

 

다산 어록:

 

권학(勸學) : 끊임없이 배우고 깨쳐라
수신(修身) : 몸과 마음을 돌아보라
치가(治家) : 집안과 부모형제를 보살펴라
이재(理財) : 재물과 이익 앞에서 겸손하라
정도(正道) : 도리에 맞는 생활을 하라
위정(爲政) : 이웃의 어려움을 살펴라
용인(庸人) : 사람을 아끼고 귀히 여겨라
교우(交友) : 진심을 다해 사람을 사귀어라

 

 

 산   책 : 걸음수 4,612 steps, 거리 3.28 km, 소모열량 159 kcal, 소요시간 00:47 hrs, 속도 4.1 km/h, 기온 7℃. 

 코   스 :  다산유적지 주차장-  다산 문화의 거리 - 장약용유적지 - 다산 생가 -  실학박물관 - 감나무집 - 옛나루터 - 전망대 - 수변소내길 - 수월정 -  수변쉼터 - 수생식물원 - 연꽃단지 - 생태연못 - 주차장.

 

 

정약용 생가 다목적 광장 주차장:

  유료운영시간: 월요일 ~ 일요일, 08:00 ~ 20:00 

  주차요금:
최초 30분: 600원, 추가 10분당: 300원, 일 최대: 7,000원

  기준요금 2배 차량:
- 15인승 이상 25인승 이하 승합차 및 2.5톤 이상 4.5톤 미만 화물자동차.
  기준요금 3배 차량:
-  25인승 초과 승합차 및 4.5톤 초과 화물자동차.

  주차요금 감면 안내:


면제: 공무수행자동차, 모범.유공납세자, 성실납세자(남양주시장), 주차장이용시간 10분 이내 자동차, 긴급자동차.
60% 감면: 경형자동차
최초 2시간 면제 후 50%: 장애인, 국가유공자, 유족 또는 가족, 고엽증후유증환자, 2세환자, 5.18민주유공자, 유족 또는 가족,  전기자동차플러그인하이브리드자동차, 다자녀(2명이상)
50% 감면: 장기기증자, 철도환승, 경로우대(65세 이상), 남양주사랑상품권(지역화폐), 저공해자동차, 병역명문가, 자원봉사자

- 주차장 이용문의: 주차운영부 ( 031-560~1217~8) 

다산길 

시점 <- 2.35km  ||  0.90km ->  종점

 

제3길 정약용길 (마재옛길)

마재마을의 정약용 유적지

 

정약용의 일대기, 상심낙사(常心樂事)의 마음으로 느끼다.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의 마재마을은 정약용 선생이 태어나 유년기를 보냈고 오랜 벼슬과 유배생활 끝에 다시 돌아와 여생을 마친 곳입니다. 남양주시에서는 이를 기념하여 마재마을에 정약용 유적지를 조성하고 매년 10월 중순경에는 사흘 동안 축제도 거행하고 있습니다. 정약용 유적지는 다산기념관, 여유당, 문도사, 묘역, 문화의 거리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다산 기념관은 정약용 선생의 실학정신을 배울 수 있는 교육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조성된 건물로 선생의 일대기와 삶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전시공간으로 꾸며져 있지요.  여유당은 선생의 생가로 원래는 현재 주차장이 있는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소실되고 말았답니다. 하지만 선생의 삶을 느낄 수 있도록 옛 여유당의 모습을 재현하여 현위치에 복원한 것입니다. 소박한 모습이기는 해도 사랑채와 안채로 구성된 중부지방의 전형적인 양반집의 면모를 지니고 있지요. 문도사는 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실학의 선구자였던 선생의 얼을 기리고 있습니다. 기념관 앞에 조성된 문화의 거리에는 수원화성을 축조 할 때 선생이 설계하여 사용되었던 거중기를 비롯하여 선생이 집필하신 <경세유표>와 <목민심서>에서 마음에 새길만한 글귀가 적힌 동판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또한 유적지 인근에는 실학박물관이 건립되어 다양한 실학자들의 활약상을 배울 수 있는 자료가 존시되고 있습니다. 정약용 선생이 태어나고 여생을 마친 이곳이 실학의 메카로 자리매김 한 것이지요.    

 

" 꺼지지 않는 불"  

다산 정약용 선생께서 저술한 약 500여권에 이르는 서책과 그 속에서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타오르는 실학사상의 정신을 조형물로 형상화 하였습니다
2001년 11월
작품명: 꺼지지 않는 불
작가: 박철우

 

언덕 cafe, 대가농원

 

다산문화관

 

정약용 유적지 안내도

 

1. 문화관, 2. 기념관, 3. 문도사, 4. 정약용 선생 묘, 5. 여유당(정약용 생가), 6. 서화관, 7. 주차장, 8. 천일각, 9. 기념탑, 10. 조형물 (꺼지지 않는 불), 11. 거중기, 12. 실학박물관

 

정약용 유적지 문화의 거리

 

밤나무집...추어탕, 옻닭, 빠가매운탕, 파전 등등

 

 

목민심서 (牧民心書)

군자의 학(學)은 수신이 그 반이요 나머지 반은 목민인 것이다. 성인의 시대가 이미 멀어졌고 그 말씀도 없어져서 그 도가 점점 어두워 졌으니, 오늘날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은 오직 거두어 들이는데만 급급하고, 백성을 기를 바는 알지 못한다. 이 때문에 하민(下民)들은 여위고 시달리고, 시들고 병들어 서로 쓰러져 진구렁을 메우는데, 그들을 기른다는 자는 바야흐로 고운 옷과 맛있는 음식으로 자기만 살찌우고 있으니 어찌 슬프지아니한가. 이것은 진실로 내 덕을 쌓기 위한 것이요, 어찌 꼭 목민에만 한정한 것이겠는가. '심서(心書)'라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목민할 마음은 있으나 몸소 싱행할 수 없기 때문에 '심서'라 이름한 것이다.  < 목민심서 서문, 1321년 > 

 

경세유표 (經世遺表)

내가 살펴보건데, 마음을 분발하고 이을 일으켜서 천하 사람을 바쁘고 시끄럽게 노역(勞役)시키면서, 일찍이 한번 숨 쉴 틈에도 안일하지 못하도록 한 이는 요순이요, 또한 정밀하고 엄격하고 각박하여 천하 사람으로 하여금 조심하고 송구하여 털끝만큼이라도 감히 거짓을 꾸미지 못하도록 한 이도 요순이었다. 천하에 요순보다 더 부지런한 사람이 없었건마는 하는 일이 없다고 속이고, 천하에 요순보다 더 정밀한 사람이 없었건마는 엉성하고 오활하다고 속인다. 그래서 임금이 언제나 일을 하고자 하면 반드시 요순을 생각하여 스스로 중지하도록 한다. 이것이 천하가 나날이 부패해져서 새로워 지지 못하는 까닭이다. 잘 정비된 수레를 잘 길들여진 말에다가 멍에를 메우고도 좌우로 옹위하고 수백 보쯤 전진시켜 보아 그 장치가 잘 되었는지를 시험한 뒤에야 동여매고 몰아가는 것이다. 임금이 법을 제정하여 세상을 이끌어가는 것이 이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것이 곧 초본(艸本)이라 이름하는 까닭이다. 아아, 이것이 어찌 초본이 아니겠는가. < 경세유표 서문, 1917년 >

 

흠흠신서(欽欽新書)

오직 하늘만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또 죽이기도 하니 사람의 생명은 하늘에 매여 있는 것이다. 그런데 목민관이 그 중간에서 선량한 사람은 편히 살게 해주고, 죄지은 사람은 잡아다 죽이는 것이니, 이는 하늘의 궈난을 드러내 보이는 것일 뿐이다. 사람이 하늘의 권한을 대신 쥐고서 삼가고 두려워 할 줄 몰라 털끝 만한 일도 세밀히 분별해서 처리하지 않고서 소홀히 하고 흐릿게 하여, 살려야 되는 사람을 죽게 하기도 하고, 죽여야 할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태연하고 편안하게 지낸다. 더구나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얻고 부인(婦人) 들을 호리기도 하면서, 백성들의 비참하게 울부짓는 소리를 듣고도 그것을 구출할 줄 모르니, 이는 매우 큰 죄악이 된다. '흠흠( 欽欽)'이라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삼가고 삼가는 것( 欽欽 )은 본디 형벌을 다스리는 근본인 것이다. < 흠흠신서 서문, 1822년 > 

 

거중기(擧重器):  

1792년(정조 16) 다산 정약용(丁若鏞)이 왕명에 따라 1627년 독일인 선교사 슈레크(Schreck J.)가 저술한 기기도설(奇器圖說)에 실린 그림을 보고 고안한 운반도구로 밧줄과 도르레를 이용하여 물건을 들어올리는데 사용하였다.  원리는 비교적 간단하여 위에 네개의 도르래를 연결하고 아래 도르래 밑으로 물건을 달아매고, 위 도르래 양쪽으로 잡아 당길 수 있는 끈을 연결하여 이 끈을 물레에 감아 동시에 물레를 돌림에 따라 연결된 끈을 통해 물건이 위로 들어 올려 지도록 한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수원화성 축조에 사용하였으며 다산 선생의 과학사상과 앞선 시대정신을 엿 볼 수 있다.
 

정약용 선생 (1762~1836)의 묘.... 경기도 기념물 제7호

정약용(丁若鏞) 선생은 이곳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당시의 광주군 초부면 마현)에서 아버지 나주정(丁)씨 재원(載遠)과 어머니 해남 윤(尹)씨 (고산 윤선도의 후손) 사이의 막내마들로 태어나셨다. 이곳 마현(마재)마을은 선생이 태어나시고 묻히신 곳이다. 위로 이복 맏형인 약현(若鉉) 과 동복형인 약전(若銓).약종(若鍾) 그리고 누이(먀형이 이승훈)가 계셨다. 서울에서 관직생활(1783~1800)과 전라남도 강진에서의 유배생활(1801~1818)을 제외하고는 주로 이곳에서 생활하셨다.  선생은 반계(磻溪) 우형원. 성호(星湖) 이익 선생의 뒤를 이어 조선 시대 실학사상(實學思想)을 집대성한 분으로 조선 후기 개화사상가들 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고 문도공(文度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선생은 1표 2서(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신서)로 대표되는 500여권의 경집(經集)과 문집(文集)을 저술하셨을 뿐만 아니라 세계문화유산의 하나인 수원의 화성을 설계하셨고 거중기 등의 과학기구를 제작하셨으며 마과회통 등의 의학서적도 남기셨다. 선생의 학문적 관심은 오로지 <수기안인(修己安人)> 즉 " 어떻게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아 백성들의 삶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가? " 에 있었다. 현재 국립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로비에는 선생의 초상화가 걸려있는데 <한국 최대의 사회과학자>라고 적혀 있다. 

실학연수....정약용유적지 (문화원, 생가, 묘역 등) 출입문.  
실학연수 (實學淵數)란 실학의 모든 것이 모여있다는 뜻이다.
 

 

다산기념관

 

다산 생가...여유당

 

다산기념관 방향의 일단의 탐방객들이 보이고 있다. 

 

정약용 선생 묘소가 있는 야산과 여유당 생가가 보이고 있다.

 

정약용 선생 영정을 모신 사당, 문도사 방향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사당인 문도사(文度祀)

 

문도사

다산 정약용 선생 상

 

 다산 정약용 선생의 삶...

 

1762년 (영조38년) -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출생

1789년 (정조 13년) - 문과급제

1794년 (정조18년) - 성균관 직장, 경기도 암행어사의 명을 받들고, 이어서 홍문관 부교리에 임명됨.

1795년 (정조19년) - 주문모 신부건에 형 약전의 연루로 충청도 금정찰방으로 좌천.

1801년 (순조1년) -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

1818년 (순조 18년) - 다산 초당에서 저술을 시작함

1836년 (현종 2년0 - 75세로 이곳에서 세상을 떠남.

 

政治思想(정치사상):
임금은 백성을 위하고 (爲民思想), 군자는 자신을 바로 세운 후에 남을 다스리는 수기치인(修己治人) ㅠ정신을 실현해야 한다는 선생의 정치사상은 오늘날 지도자가 걸어야할 바른 길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經濟思想(경제사상):
기술 발달과 상공업 진흥을 통한 부국강병을 제시하고 농업생산성 제고를 위한 정책인 여전제, 정전제를 제안, 토지 공개념을 도입하고 조세 부담의 공평성을 기하는 등 능률적인 경제운영의 지혜를 가르쳐 줍니다.

 

社會思想(사회사상):
폐단과 부폐로 어지러운 봉건시대에 핍박받는 민생의 편에서 사회제도를 백성을 위한 혁명적 개혁으로 주창하고 신분제 개혁, 서얼제도(庶孼制度) 철폐 등 근대적인 의미의 평등사회, 능력위주의 사회를 주장한 다산의 모습 속에서 모순의 벽에 끊임없이 부딪히며 고뇌했던 참 지식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科學思想(과학사상):
서양의 철물, 지리, 농사정책, 수리 기술, 측량법 등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학문을 연구하기도 하였습니다. 과학이 민생에 실제적인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실용론을 주장하였으며 실제로 거중기, 프리즘, 종두법을 발전시키는 등 과학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오늘날 과학발전에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文學思想(문학사상):
진실은 삶의 맥락에서 권력에 저항하고 학대받는 사람들의 편에 설 때 아름답습니다. 참된 지식인은 진실을 추구하는 인물이기에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과, 사회의 폐해들을 비판하고 개혁하려는 경륜의 정신이 담긴 다산의 문학은 이 시대 문학이 나아가야할 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敎育思想(교육사상):
개혁은 치산(발전)을 위함인가 제산(평등)을 위함인가의 물음에 다산은 결론적으로 치산을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현실적인 것을 연구하자는 실사구시(實事求是), 경세치요(經世致用)의 실학(實學)교육을 주장, 민생과 사회, 국가에 도움이 되는 학문교육으로 교육의 정도(定道)를 일러주고 있습니다.

 

 

 

           淑夫人 豊山洪氏 文度茶山 丁若鏞先生 之 墓 

          (숙부인 풍산홍씨 문도다산 정약용선생 지 묘).

 

자찬묘비명(自撰墓碑銘) - 광중본(壙中本):

정약용 선생이 회갑이 되던(1882년, 선생의 생애와 사상.업적을 묘지명이라는 문채를 빌어 사실대로 적은 것으로, 문집에 넣기 위한 집중본(集中本)과 무덤 속에 넣기 위한 광중본(壙中本)이 있으며, 아래 명(銘)은 광중본으로 민족문화추진회의 국역글이다.

이는 열수(烈水) 정약용의 묘이다. 본명은 약용(若鏞), 자를 미용(美鏞), 호를 사암(俟菴)이라 한다. 아버지 휘(諱)는 재원(載遠)이다. 음직(蔭職)으로 진주목사에 이르렀다. 어머니 숙인(淑人)은 해남윤씨(海南尹氏)이다. 영조 임오년(1762) 6월 16일에 용(鏞)을 열수(烈水 한강의 별칭) 가의 마현리(馬峴里)에서 낳았다.

용(鏞)은 어려서 매우 총명하였고 자라서는 학문을 좋아하였다. 22세(정조7,1783)에 경의(經義)로 생원(生員)이 되고 여문(儷文)을 전공하여 28세(정조13, 1789)에 갑과(甲科)의 제2인으로 합격하였다. 대신(大臣)의 선계(選啓)로 규장각에 배속되어 월과문신(月科文臣)에 들었다가 곧 한림(翰林)에 선입(選入)되어 예문관 검열(檢閱)이 되고 승진하여 사헌부 지평(持平), 사간원 정언(正言), 홍문관의 수찬(修撰)과 교리(校理), 성균관 직강(直講), 비변사 낭관(郎官)을 지내고, 외직으로 나가 경기 암행어사가 되었다. 을묘년(정조19, 1795) 봄에 경모궁 상호도감 낭관의 공로로 시간(司諫)에서 발탁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재수되고, 우부승지를 거쳐 좌부승지에 이르고 병조 참의(參議)가 되었다.

가경 정사년(정조21, 1797)에 곡산부사(谷山副使)로 나가서 혜정(惠政)이 많았다. 기미년(정조23, 1799)에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서 승지를 거쳐 형조참의가 되어 원옥(寃獄)을 다스렀다. 경신년(정조24, 1800) 6월달에 '한서선(漢書選)'을 하사받았다. 이달에 정조대왕(正朝大王)이 승하하니 이에 화(禍)가 일어났다.

15세(영조52, 1776)에 풍산홍씨(豊山洪氏)에 장가드니 무승지(武承旨) 화보(和輔)의 딸이다. 장가들고 나서 서울에 노닐 때 성호(星湖) 이익 선생(李瀷先生)의 학행이 순수하고 독실함을 듣고  이가환.이승훈 등을 따라 그의 유저(遺著)를 보게되어 이로부터 경적(經籍)에 마음을 두었다.

상상(上庠)하여 이벽(李蘗)을 따라 노닐면서 서교(西敎)의 교리를 듣고 서교의 서적을 보았다. 정미년(정조11, 1787) 이후 4~5년 동안 자못 마음을 기울렸는데, 신해년(정조15, 1791) 이래로 국가의 금령이 엄하여 마침내 생각을 아주 끊어버렸다. 을묘년(정조19, 1795) 여름에 중국의 소주(蘇州)사람 주문모(周文謨)가 오니 국내가 흉흉해졌다. 이에 금정도 찰방(察訪)으로 보임되어 나가 왕지(王旨)를 받아 서교에 젖은 지방의 호족(豪族) 을 달래어 중지시켰다.

신유년(순조1, 1801) 봄에 대신(臺臣) 민명혁(閔命赫)등이 서교 일로써 발계(發啓)하여, 이가환, 이승훈 등과 함께 하옥되었다. 얼만 뒤에  두 형 약전(若銓) 과 약종(若鐘)도 용(鏞)과 함께 체포되어 하나는 죽고 둘은 살았다. 모든 대신(大臣)들이 백방(白放)의 의(議)를 올렸으나 오직 서용보(徐龍輔)만이 불가함을 고집하여, 용(鏞)은 장기현으로 정배되고, 전(銓)은 신지도(薪智島) 로 정배되었다.

가을에 황사영(黃嗣永)이 체포되자, 악인 홍희운.이기경 등이 갖은 계책으로 용(鏞)을 죽이기를 도모하여 조지(朝旨) 를 얻으니,  용(鏞)과  전(銓)이 또 체포되었다. 일을 안찰한 결과, 황사영과 관련된 정상이 없으므로 옥사가 또 성립되지 않았다. 태비(太妃) 작처(酌處)를 입어 용(鏞)은 강진현(康津縣)으로, 전(銓)은 흑산도(黑山島)로 정배되었다.

계해년(순조3, 1803) 겨울에 태비가 용을 석방하도록 명하였는데, 상신(相信) 서용보가 그를 저지하였다. 경오년(순조10, 1810) 가을에 아들 학연(學淵)의 명원(鳴寃)으로 방축 향리(放逐 鄕里)를 명하였으나 당시 대계(臺啓)가 있음으로 인하여 금부(禁府)에서 이를 시행하지 않았다. 그 뒤 9년만인 무인년(순조18, 1818) 가을에 비로소 향리로 돌아왔다. 기묘년 가을에 조정 논의가 다시 용을 등용하여 백성을 편안히 하려 하였는데, 서용보가 또 저지하였다.

용(鏞)이 적소(謫所)에 있은지 18년 동안 경전에 전심하여 <시(詩)>.<서(書)>.<예(禮)>..<악(樂)>..<역(易)>. <춘추(春秋)> 및 사서(四書)의 제설(諸說)에 대해 저술한 것이 모두 2백30권이니, 정밀히 연구하고 오묘하게 깨쳐서 성인의 본지(本旨)를 얻었으며, 시문(詩文)을 역은 것이 모두 70권이니 조정에 있을 때의 작품이 많았다. 국가의 전장(典章)및 목민(牧民). 안옥(按獄).무비.(武備).강역(疆域)의 일과 의약(醫藥).문자(文字)의 분변 등을 잡찬(雜纂)한 것이 거의 2백권이니, 모두 성인의 경(經)에 근본하였으되 시의(時宜) 에 적합하도록 힘썼다. 이것이 없어지지 않으면 혹 채용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내가 포의(布衣)로 임금의 지우(知遇)를 입어, 정조대왕의 총애와 가장(嘉漿) 이 동열에서 특이하였다. 그래서 전포에 상사(償賜)로 받은 서적.내구마(內廐馬)문피(文被) 및 진귀하고 기이한 물건 등은 이루다 적을 수 없을 정도다. 기밀에 참여하여 소회가 있으면 필찰(筆札)로 조진하도록 하여 모두 즉석에서 들어주셨다. 항상 규장각.홍문관에 있으면서 사적을 교정하였는데 직무의 일로 독려하고 꾸짖지 않으셨다. 밤마다 진차(珍饌) 을 내려 배불리 먹여주시고 무릇 내부의 비장된 전적을 각감(閣監)을 통하여 보기를 청하면 허락해 주셨으니, 모두 특이한 예우다.

그 사람됨이 선(善)을 즐기고 옛것을 좋아하며 행위에 과단성이 있었는데 마침내 화를 당하였으니 운명이다. 평생 죄가 하도 많아 허물과 뉘우침이 마음 속에 쌓였었다. 금년에 이르러 임오녀(순조22, 1822년)을 다시 만나니 세상에서 이른바 회갑으로 다시 태어난 듯한 느낌이다. 마침내 긴치 않은 일을 씻어버리고 밤낮으로 성찰하여 하늘이 부여한 본성을 회복한다면 지금부터 죽을 때 까지는 거의 어그러짐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정씨(丁氏)는 본관이 압해(押海)이다. 고려 말기 백천에 살았는데 우리 조정이 개국한 뒤로 한양에 살았다. 처음 벼슬한 할아버지는 교리(敎理) 자급(子伋)이다. 이로부터 계승하여 부재학 수강(壽崗), 병조판서 옥형(玉亨), 좌찬성 용두, 대사헌 윤복, 관찰사 호선, 교리 언벽, 병참의 시윤이 모두 옥당에 들어갔다. 그 뒤로는 시운이 비색하여 마현(馬縣)으로 옮겨 거주하였는데 3대를 모두 포의로 마쳤다. 고조의 휘는 도태, 증조의 휘는 향신, 조부의 휘는 지해인데 오직 중조께만 진사를 하였다.

홍씨(洪氏)는 6남3녀를 날았는데 3분의 2가 요사(夭死)하였고 오직 2남 1녀만 성장하였다. 아들은 학연(學淵)과 학유(學遊) 이고, 딸은 윤창모(尹昌謨) 에게 출가하였다.

집 동산의 북쪽 언덕에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자리를 잡으니 평소 바라던 대로였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임금의 총애를 입어 금밀(近密)에 들어갔네
임금의 복심(腹心)이 되어 조석으로 모셨도다
하늘의 총애를 입어 우충(愚衷)이 열리었네
육경(六經)을 정연(精硏)하여 미묘한 이치를 깨치고 통했도다
소인이 해성 해치니 하늘이 너를 옥성(玉成)시켰네
거두어 간직하고 장차 훨훨 노닌다.   
 

여유당(與猶堂):  

생가 여유당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유실되었던 것을 1986년 복원한 것이로 집 앞으로 내(川)가 흐르고 집 뒤로 낮은 언덕이 있는 지형에 자리잡고 있어 선생은 수각(水閣) 이라고도 표현하였다. 

당호(堂號)인 여유(與猶)는 선생이 1800년(정조24년) 봄에 모든 관직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서 지은 것으로 여유당기(與猶堂記)를 통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하였다.

 나는 나의 약점을 스스로 알고있다. 용기는 있으나 일을 처리하는 지모(智謀)가 없고 착한 일을 좋아는 하나 선택하여 할 줄을 모르고, 정에 끌려서는 으심도 아니하고 두려움도 없이 곧장 행동해 버리기도 한다. 일을 그만두어야 할 것도 참으로 마음에 내키기만 하면 그만 두지를 못하고, 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마음 속에 담겨있어 개운치 않으면 기필코 그만 두지를 못한다.  (중략) .

이러했기 때문에 무한히 착한 일만 좋아하다가 남의 욕만 혼자서 실컷 얻어먹게 되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 또한 운명일까. 성격 탓이겠으니 내 같히 또 운명이랴 말하랴. 

노자(老子)의 밀에 "여(與) 여! 겨울의 냇물을 건너는 듯 하고, 유(猶) 여! 사방을 두려워 하는 듯 하거라"라는 말을 내가 보았다. 

안타깝도다. 이 두마디 말이 내 성격의 약점을 치유해 줄 치료제가 아니겠는가. 무릇 겨울에 내를 건너는 사람은 차가움이 파고들어와 뼈를 깍는 듯 할 터이니 몹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며, 온 사방이 두려운 사람은 자기를 감시하는 눈길이 몸에 닿을 것이니 참으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다. (중략).

 내가 이러한 의미를 해독해 낸지가 6,7년이나 된다. 당(堂)의 이름으로 하고 싶었지만 이윽고 다시 생각해 보고 그만 두어버렸었다. 초천(苕川)으로 돌아옴에 이르러 비로소 써가지고 문미(門梶)에 붙여놓고 아울러 그 아름 붙인 이유를 기록해서 아이들에게 보도록 하였다. 

(배경설명)


정약용 선생이 형조참의(刑曹參議)로 있던 1799년(정조23년)에는 선생에 대한 노론(老論)의 공격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그 해는 정약용 선생을 비롯한 남인의 정치적 스승이었으며 정조의 충직한 신하였던 번암 채제공 선생이 돌아가신 해이기도 했는데, 이무렵 정조는 정약용 선생을 무한히 신뢰하고 있었으며 밤 늦게 까지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흔한 광경으로 선생이 판서(判書)가 되고 재상(宰相)이 되어 제2의 채제공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노론 벽파는 선생을 제거하려 하였으나 방법이 없었다. 이는 1797년 <동부승지를 사직하는 상소>에서 천주교와의 관계를 모두 고백하였고, 그 뒤 곡산부사로 외직(外職)에 나가 선정을 베풀고 돌아온 터였기 때문이다. 이에 노론은 교활하게도 형 약전을 공격해서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였는데, 가족이 물러나면 벼슬자리에 있는 다른 가족도 사직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었다. 

선생은 분노했고 세상이 혐오스러웠다. 벼슬을 그만두기로 결심한 선생은 자명소(自明疏)를 올려 관직을 그만 두기로 청하였다.  정조는 계속 만류하였지만 선생이 벼슬을 거부하자 할 수 없이 그 해 7월 26일 이를 허락하였다. 


그리고 다음해 1800년(정조24년) 봄에 아버지 정재원이 낙향했던 것 처럼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 마현으로 돌아와서 집의 문미(門梶)에 "여유당"이라는 현판을 붙이고 은신하였다. 


그 해 6월 12일 달밤에 정조의 유시를 전하려 규장각 아전이 한서선(漢書選)  10질을 가지고 찾아왔다. "5질은 남겨서 가전(家傳)의 물건으로 삼도록 하고, 나머니 5질은 제목의 글씨를 써서 돌려보내도록 하라. 그리고 그대를 부르리라." 선생은 가슴이 벅차 눈물을 흘렸다. 노론 틈에 정조를 홀로 남겨놓고 온 것이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어 선생은 돌아가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나 6월 28일 정조는 노론에 둘러싸여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된다.   
 

여유당
 

서화관

 

실학(實學)에 뜻을 두거라

반드시 처음에는 경학(經學) 공부를 ㅏ여 밑바탕을 다진 후에 옛날의 역사책을 섭렵하여 옛 정치의 득실과 잘 다스려진 이유와 어지러웠던 이유 등의 근원을 캐볼 뿐 아니라 또 모름지기 실용의 학문,곧 실학(實學)에 마음을 두고 옛사람들이 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구했던 글들을 즐겨 읽도록 해야 한다. 마음에 항상 만백성에게 혜택을 주어야겠다는 생각과 만물을 자라게 해야겠다는 뜻을 가지고 있은 뒤라야만 바야흐로 참다운 독서를 한 군자라 할 수 있다.  < 두 아들에게 부치노라(奇二兒), 1802년 12월 22일 강진에서 >

 

 

수령은 백성을 위해서 있다

수령이 백성을 위해서 있는 것인가. 백성이 수령을 위해서 생겨난 것인가? 백성이 곡식과 옷감을 바쳐 수령을 섬기고 또 수레와 말과 하인들을 내어 수령을 맞아들이고 떠나보내며, 또는 기름과 피와 진액과 골수를 다 없애서 그 수령을 살찌우고 있으니, 백성이 과연 수령을 위하여 생겨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수령이 백성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여유당 집 원목(原牧) >  

 

실학박물관

 

 

 

홍이포

1637년, 중국
복제, 길이 214cm, 구경 40cm, 사정거리 700m

'홍이(紅夷)'는 '붉은 오랑케' 라는 의미로, 머리털이 붉은 네델란드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또는 네델란드의 옛 이름인 '홀랜드'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라도 한다. 홍이포는 16세기 네델란드 선교사들에 의해 중국 명나라에 전해진 서양 대포를 말한다. 17세기 초 정두원이  서양 선교사로부터 받아 조선에 전했다. 

< 홍이포 발사방법 >


1) 포구를 통해 화약과 포탄을 밀어넣어 장전하고 사격 각도를 조절한다.
2) 포 뒤쪽 구멍에서 포 안쪽 화약까지 이어져 있는 심지에 불을 붙인다.
3) 심지를 타고 들어간 불이 화약에 붙으면 탄환이 발사된다. 

홍이포는 한 몸체로 청동이나 철로 만들었고, 포선의 중앙에는 돌기가 있으며 이 부분을 포 받침대나 포차에 올려놓고 사격을 하였다. 포탄이 지면에 다으면서 탄환이 여러 조각으로 폭발하는 산발식이 아니라 둥그런 철환으로 목표물을 부수는 형식이다.

실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