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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구릅/일상들 ( life )

① 종로3가 탑골공원, 종묘- ( 2025.01.20 )

by the road of Wind. 2025. 1. 21.

종로3가 탑골공원, 종묘

- ( 2025.01.20 )

 

《  종로3가 낙원상가, 탑골공원    》

 

▶ 탑골 공원:  탑골 공원은 고종 때 원각사 터에 조성한 최초의 공원으로 서울 종로구 종로2가에 있는 공원이다. 뼈모양의 탑이 있어 탑골(塔骨)공원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곳은 일제에 항거하는 3·1운동이 일어났던 곳으로, 이곳에서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다. 그리고 요원의 불길 같이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하는 운동이 일어났던 곳이다. 이곳에는 고려시대 흥복사(興福寺)라는 사찰이 있었는데, 1464년 (세조10) 불심이 깊었던 세조가 원각사(圓覺寺)로 개명하고 중건하였다고 한다. 지금 중앙에 팔각정이 있고 주변으로 원각사지 십층석탑이 있다.  그외에 3·1 운동 부조서판, 의암 손병희 선생 동상, 한용운 선생 기념비 등이 있다. 원래는 파고다 공원으로 불렸다. 공원내에 있는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현존하는 대한민국 국보지정 석탑 가운데 가장 후대에 속하는 것으로 그 형태와 평면이 특수하며, 모두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사적 제354호). 조그만 도심의 공원에서 깊은 역사의 숨결을 느낀다. 특히 민족대표 33인에 대한 깊은 존경심과 유관순 같은 젊은 열혈의 우국충정을 생각하게 된다. 

 

▶ 산 책 : 걸음수 3,781 steps, 거리 2.64 km, 소모열량 133 kcal, 소요시간 00:36 hrs, 속도 4.3 km/h, 기온 7℃.

▶ 코   스 종묘 일원

 

종로3가역, 낙원악기상가 주변:

5호선 종로3가역 ...송해 선생 "나팔꽃 인생"

 

송해 길

 

'송해 길'의 도로명은 수표로입니다. 송해 선생은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나셨고, 험난했던 역사의 풍랑을 넘어 국민 희극인으로, 대중 예술의 산증인으로, 오랜 세월 우리를 웃고 울게 한 한국연예계의 살아있는 역사입니다. 종로구 낙원동은 송해 선생이 50년 넘게 방송과 행사를 하시면서 생활의 근거지로 활동하였던 지역이며, 주민들과의 강한 유대감과 낙원동에 대한 남다른 애착으로 실향민 송해 선생의 제2고향이 되었습니다. 이에 종로구는 지역주민들의 명예도로 지정 요청과 40년 가까운 세월동안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하며, 전 국민을 사로잡은 대중문화계의 거목의 업적을 기려, 종로2가에서 낙원상가 앞까지의 구간을 도로면주소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명예도로 '송해 길' 로 지정하였습니다. 명예도로 '송해 길' 지정으로 이곳 수표로가 활력과 생기가 넘치는 아름다운 도로로 가꾸어지길 소망합니다.  - 종로구.

 

낙원상가 ....기타 쇼 2024 낙원

 

한국통닭...1마리 5,500, 2마리 10,000, 3마리 14,500

 

원조 소문난집 국밥전문....60년 전통 송해의 집,  시래기국밥 3,000, 막걸리 한잔 1,000

 

응답한다 1988 뽁기집....극장에서 나온 일단의 사람들이 길가에서 떡볶이 맛보기를 먹고 있다

 

▶ 낙원시장:

"입춘대길, 건양다경"

 

엄마김밥....김밤 3,000, 라면 4,000, 잔치국수 4,000, 열무국수 5,000, 비빔국수 5,000, 떡(만두)국 5,000, 칼국수 6,000, 콩국수 7,000, 카레밥 5,000, 도토리묵(무침) 10,000, 오징어볶음15,000, 돼지김치볶음 15,000, 두부김치 12,000, 동태찌개 20,000, 닭도리탕 25,000, 열무비빔밥 5,000 등.  소주 3,000, 맥주 4,000, 막걸리 3,000 

 

정육점

 

그릇가게

 

일미식당 02-766-6588....착한식당 1호점, 수요미식회 35회 백반편

 

수건 가게

 

수산물 판매점

 

반찬가게

 

쌀가게

 

동원집.....옛날순대국, 곤지암소머리국밥, 선지해장국 등

 

대박집...... 내장국밥, 돼지국밥, 소머리국밥, 수육 술국 등

 

합천돼지국밥

 

3.1운동의 발상지, 탑골공원을 아껴주세요

 

낙원악기상가 지하상가...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다. 장기, 바둑 등 소일...

 

 

 

 탑골공원:

3.1독립운동 부조

 

원각사지 십층석탑: 국보제2호, 시댸: 1467년(세조 13)

이 탑은 세조가 세운 원각사(圓覺寺) 터에 남아있는 높이 12m의 십층 석탑이다. 원각사는 1465년(세조11)에 조계종의 본산이었던 흥복서 터를 확장하여 세운 사찰인데, 이 탑은 2년 뒤인 1467년(세조 13)에 완성했다. 세조는 사리분신(舍利分身) 하는 경이로운 일을 겪은 뒤  원각사를 짓기로 결정하였는데,  공사 도중 사리분신하고 서기가 나타났다 전해진다. 지금 견해로는 <원각경(圓覺經)>을 모셔 두었다고 한다. 亞(아)자 모양의 기단은 세겹인데, 아래에는 용과 연꽃 같은 무늬를 새겼고, 중간에는 삼장법사(三藏法師)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일행이 인도에서 불법(佛法)을 구해 오는 과정을 그려 새겼다. 위에는 부처님 전생 설화와 일생을 조각하였다. 법회 장면을 새긴 탑의 몸체에는 현판, 용을 휘감은 기둥, 목조 구조, 지붕을 두었는데, 마치 하나의 건물같다. 탑을 만든 재료는 흔치 않은 대리석이며, 독특한 형태와 조각 솜씨는 조선시대 석탑의 백미로 꼽힌다. 이 석탑은 고려시대에 제작한 경천사 십층석탑(국보 제86호)과 여러 면에서 비슷하다.  

 

탑골공원 팔각정: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73호, 시대: 광무 1902년(광무 6)

팔각정은 1902년 (광무 6)에 탑골 공원 안에 지은 팔각정이다. 이곳은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곳이다. 팔각정은 장대석 기단 위에 둥근 기둥을 세우고 기둥 머리 부분은 물익공을 짠 후 기와지붕을 덮었다. 전통과 근대의 건축 기술을 두루 사용했던 건축가 심의석(沈宜碩: 1854-1924)이 주도하여 공사를 진행하였다. 탑골공원은 서울에 만들어진 최초의 근대식 공원이다. 이 공원이 만들어진 시기에 대해 이견이 있으나, 1890년대로 알려져 있다. 이공원은 고종 대 총세무사로 활약한 브라운(Jhone Mcleavy Brown, 柏卓安(백탁안))이 건의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탑동공원, 파고다공원 등으로 불리다가 1991년 부터 공식적으로 탑골공원이 되었다. 

 

원각사지 대원각사비

 

대원각사비: 보물 제3호, 시대 1471년(성종2)

대원각사비는 1471년 (성종 2)에 원각사를 창건한 경위를 적어 세운 비석이다. 불심이 돈독했던 세조는 양주 회암사에서 분신(分身) 한 사리를  보고 감동하여 1465년(세조 11) 흥복사 터에다 원각사를 지었다. 이어 146년(세조13)에 13층 석탑이 완성되자 연등회를 열고 낙성식을 거행하였으며 그 전후 사정을 적은 비석을 조성하게 하였다. 거북이 모양의 받침돌을 만들고  그 등 위에 연잎을 새겨 비석 몸돌을 세울 자리를 만들었다. 몸돌은 머릿돌인 이수(螭首)와 한 돌로 만들었다. 비석 전체 높이는 494cm이며 거북은 화강암으로, 몸돌과 머릿돌은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당대 문장과 글씨로 이름난 사람들이 비문을 맡았다. 김수온이 앞면의 글을 짓고, 성임이 그 글을 썼으며, 서거장이 뒷면의 글을 짓고, 정난종이 그 글을 썼다. 연산군 대 궁궐에 인접한 민가를 철거하면서 원각사는 빈 절이 되었다.  근대에 들어 공원으로 변모한 이곳에는 십층석탑(국보 제2호)과 이 비석만 남아 원각사의 옛 흔적을 보여 주고 있다.  

 

동문

 

용훈당대선사비

 

동문 밖 풍경

 

의암 손병희 선생 동상

의암 손병희 선생:

호는 의암(義菴), 동학.천도교 지도자, 교육가, 독립운동가

1861년:  4월 8일 충북 청주 출생, 본관은 밀양, 초명은 응구(應九)ㅡ 부친은 두홍, 모친은 최씨.
1882년:  동학(東學)에 입도
1883년: 동학의 제2세 교조 해월 최시형의 수제자로 수도에 전념.
1894년: 동학군 통령(統領)으로 경기충청 지역 동학군을 이끌고 전봉준과 합세한 뒤 공주 이인에서 관군 격파, 우금치 전투에서 현대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의 개입으로 혁명이 좌절되자 함경도.평안도로 은신.
1897년: 쵯형으로 부터 도통을 이어받아 동학의 제3세 교조가 됨.
1901년: 일본으로 망명, 이듬해 이상헌(李祥憲)이라는 이름으로 오세창, 권동진, 박영효 등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
1902년: 일시 귀국 이후 두 차례에 걸쳐 이광수 등 청년 64명을 선발하여 일본으로 유학 시킴.
1904년; 동학 교인들로 하여금 진보회를 조직케 하고 갑진(甲辰)개화운동 지도.
1905년: 12월 1일을 기햐 교단의 명칭을 천도교(天道敎)로 바꿈.
1906년 1월 귀국. 천도교중앙총부 설립, 일간지 마넷보 창간, 이용구 둥과 친일 교인 60여명을 출교 시킴.
1910년: 보성전문학교 인수. 이후 전국적으로 30여개의 학교를 인수,. 운영하거나 지원. 
1912년: 우이동에 봉황각을 짓고 483명의 중견굥역자를 양성.
1919년: 민족대표 33인의 대표로 3.1독립선언을 주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름.
1920년: 10월 병보석으로 출감.
1922년: 5월 19일 상춘원에서 옥고 후유증으로 순국.
1962년: 정부에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독립 선언문  

우리는 여기에 우리 조선이 독립된 나라인 것과 조선 사람이 자주하는 국민인 것을 선언하노라. 이것으로써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가 평등하다는 큰 뜻을 밝히며, 이것으로써, 자손 만대에 알려 겨레가 스스로 존재하는 마땅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도록 하노라. 반만년 역사의 권위를 의지하고 이것을 선언하는 터이며, 이천만 민중의 충성을 모아 이것을 널리 알리는 터이며, 겨레의 한결같은 자유 발전을 위하여 이것을 주장하는 터이며, 사람 된 양심의 발로로 말미암은 세계 개조의 큰 기운에 순응해 나가기 위하여 이것을 드러내는 터이니, 이는 하늘의 명령이며, 시대의 대세이며, 온 인류가 더불어 같이 살아갈 권리의 정당한 발동이므로, 하늘 아래 그 무엇도 이것을 막고 누르지 못할 것이라. 낡은 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 강권주의의 희생을 당하여, 역사 있은 지 여러 천 년에 처음으로 다른 민족에게 억눌려 고통을 겪은 지 이제 십 년이 되도다. 우리가 생존권마저 빼앗긴 일이 무릇 얼마며, 정신의 발전이 지장을 입은 일이 무릇 얼마며, 겨레의 존엄성이 손상된 일이 무릇 얼마며, 새롭고 날카로운 기백과 독창성을 가지고 세계문화의 큰 물결에 이바지할 기회를 잃은 일이 무릇 얼마인가! 오호, 예로부터의 억울함을 풀어보려면, 지금의 괴로움을 벗어나려면, 앞으로의 두려움을 없이하려면, 겨레의 양심과 나라의 도의가 짓눌려 시든 것을 다시 살려 키우려면, 사람마다 제 인격을 옳게 가꾸어 나가려면 불쌍한 아들. 딸에게 부끄러운 유산을 물려주지 않으려면, 자자손손이 길이 완전한 행복을 누리게 하려면, 우선 급한 일이 겨레의 독립인 것을 뚜렷하게 하려는 것이라. 이천만 각자가 사람마다 마음 속에 칼날을 품으니, 인류의 공통된 성품과 시대의 양심이 정의의 군대가 되고, 인륜과 도덕이 무기가 되어 우리를 지켜주는 오늘, 우리가 나아가 이것을 얻고자 하는 데 어떤 힘인들 꺾지 못하며, 골라서 계획을 세우는 데 무슨 뜻인들 펴지 못할까! 병자수호조약 이후, 시시때때로 굳게 맺은 약속을 저버렸다 하여 일본의 신의 이루어진 부자연스럽고 불합리한 이 그릇된 현실을 고쳐서 바로 잡아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올바른 바탕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이라. 처음부터 이 겨레가 원해서 된 일이 아닌 두 나라의 합병의 결과는 마침내 억압으로 이뤄진 당장의 편안함과, 차별에서 오는 고르지 못함과 거짓된 통계숫자 때문에, 이해가 서로 엇갈린 두 민족 사이에 화합할 수 없는 원한의 도랑이 날로 갈수록 깊이 패이는 지금까지의 사정을 한 번 살펴보라. 용감하게 옛 잘못을 고쳐 잡고, 참된 이해와 동정에 바탕 한 우호적인 새 시대를 마련하는 것이, 서로 화를 멀리하고 복을 불러들이는 가까운 길인 것을 밝혀 알아야 할 것이 아니냐! 또한 울분과 원한이 쌓이고 쌓인 이천만 국민을, 힘으로 붙잡아 묶어둔다는 것은 다만 동양의 영원한 평화를 보장하는 노릇이 아닐 뿐 아니라, 이것이 동양의 평안함과 위대함을 좌우하는 사억 중국사람들의 일본에 대한 두려움과 새암을 갈수록 짙어지게 하여, 그 결과로 동양전체가 함께 쓰러져 망하는 비운을 초래할 것이 뻔한터에 오늘 우리의 조선독립은 조선사람으로 하여금 정당한 삶과 번영을 이루게 하는 동시에, 일본으로 하여금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 동양을 버티고 나갈 이로서의 무거운 책임을 다하게 하는 것이며, 중국으로 하여금 꿈에도 피하지 못할 불안과 공포로부터 떠나게 하는 것이며, 또 동양의 평화가 중요한 일부가 되는 세계평화와 인류복지에 꼭 있어야 할 단계가 되게 하는 것이라, 이것이 어찌 구구한 감정상의 문제이겠느냐! 아아 새 하늘과 새 땅이 눈 앞에 펼쳐지누나, 힘의 시대는 가고 도의의 시대가 오누나, 지나간 세계를 통하여 깎고 다듬어 키워온 안도적 정신이, 바야흐로 새 문명의 서광을 인류의 역사 위에 던지기 시작하누나, 새 봄이 온 누리에 찾아 들어 만물의 소생을 재촉하누나, 얼음과 찬 눈 때문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것이 저 한 때의 시세였다면, 온화한 바람, 따뜻한 햇볕에 서로 통하는 낌새가 다시 움직이는것은 이 한 때의 시세이니, 하늘과 땅에 새 기운이 되돌아오는 이 마당에 세계의 변하는 물결을 타는우리는 아무 주저할 것도 없고 거리낄 것도 없도다. 우리가 본디 타고난 자유권을 지켜 풍성한 삶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것이며, 우리가 넉넉히 지닌 바 독창적 능력을 발휘하여 봄기운이 가득한 온 누리에 겨레의 뛰어남을 꽃피우리라. 우리는 그래서 분발하는 바이라. 양심이 우리와 함께 있고, 진리가 우리와 더불어 전진하나니, 남자, 여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음침한 옛집에서 힘차게 뛰쳐나와 삼라만상과 더불어 즐거운 부활을 이룩하게 되누나. 천만세 조상들의 넋이 우리를 안으로 지키고, 전 세계의 움직임이 우리를 밖으로 보호하나니, 일에 손을 대면 곧 성공을 이룩할 것이라. 다만 저 앞의 빛을 따라 전진할 따름이로다.  

공약 삼장:   

(하나) 오늘 우리들의 이 거사는 정의, 인도, 생존, 번영을 찾는 겨레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의 정신을 발휘할 것이고,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치닫지 말라.  
(하나) 마지막 순간에 다다를 때까지, 민족의 올바른 의사를 시원스럽게 발표하라.  
(하나) 모든 행동은 먼저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들의 주장과 태도가 어디까지나 공명 정당하게 하라.


나라를 세운지 사천이백오십이 년 되는 해 삼월 초하루  
조선 민족 대표:  손병희. 김선주. 이필주. 백용성. 김완규. 김병조 김창준. 권동진. 권병덕 나용환. 나인협. 양전백. 양한묵. 유여대. 이갑성. 이명룡. 이승훈. 이종훈. 이종일. 임예환. 박준승. 박희도. 박동완. 신흥식. 신석구. 오세창. 오화영. 정춘수. 최성모. 최린. 한용운. 홍병기. 홍기조.

 

삼일문

 

종로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