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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차이나타운, 자유공원, 인천항제2국제여객터미널, 인천종합어시장 - ( 2018.12.05 )

by the road of Wind. 2018. 12. 5.

인천 차이나타운, 자유공원, 인천항 제2국제여객터미널, 인천종합어시장 - ( 2018.12.05 )



    




너무 단조로운 요즈음의 일상이다. 그래서 오후 시간 비교적 손쉽게 다녀올 수 있는 인천 자유공원 주변을 다녀왔다. 옛날 인천에 살았다고는 하지만 인천항 여객부두인천종합어시장이 궁금하였다. 그래서 해 질 때까지의 짧은 시간이면서도 기어코 이들 지역을 다녀보았다. 인천 차이나타운에서는 중회민족이 좋아하는 울긋불긋한 화려한 색채의 골목 분위기에 이국풍의 호기심이 더하고, 자유공원에서는 맥아더 장군 동상을 바라보며 수많은 생각에 잠기기도 하였다. 불세출의 영웅 앞에서 그 옛날 6.25 전쟁시의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의 운명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자유공원을 내려 오면서 만나는 일본 제국 시대의 건물들에서 내가 마치 일제시대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일본은 1895년 청일전쟁의 승리, 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를 기반으로 여세를 몰아 1910.8.29 대한제국을 병합 함으로서 우리는 국권을 잃고 일제에 혹독한 압제에 시달리며 민족의 고난이 시작되었다. 1945.8.14 나사사키 원자폭탄 투하로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함께 세계제2차대전이 종료되고, 우리나라는 그 다음날 8.15일 고대하던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참으로 감격스런 날이다. 이런 일련의 역사가 주마등 같이 지나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해방후 5년뒤 1950.6.25 새벽 미명에 동족상잔의 6.25 전쟁이 발발하고 수많은 고귀한 인명이 살상되었다. 통탄할 일이다. 북한은 6.25일 38도선과 동해안 연선(沿線) 등 11개소에서 경계를 넘어 38선 이남으로 전격 진격하였다. 그 해 7월 7일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를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하는 유엔군이 조직되었으나, 공산군은 무방비 상태였던 우리나라 중부지방과 호남지방을 삽시간에 휩쓸고, 이제 마지막 낙동강 방어선만 남아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절체절명, 존망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불세출의 영웅,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전광석화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 을 감행하여 성공 시킴으로서 우라의 대대적인 반격이 개시되어 비관적인 전쟁 상황을 일순 반전시키게 되었다. 참으로 아찔한 상황이다. 백척간두의 상황에서, 절망의 순간에서 우리나라를 구해준 맥아더 장군이야 말로 이순신 장군과 함께 우리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위대한 영웅이다.  세계전사에 유래가 없을 빛나는 전과를 올린 우리의 영웅 맥아더장군의 동상을 보면서 만감이 교차하는 것 같았다. 앞으로는 다시는 이런 비극적 전쟁이 없어야 겠다. 국방력의 강화와 국력의 신장만이 이것을 담보하여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이시여, 우리나라를 보호하사 한강의 기적을 내려 주신 것 같이 이제 어려움에 처한 우리들을 보호하여 주옵소서. 악한 무리들이 우리 나라를 유린하는 일이 없도록 보호하여 주옵소서, 다시는 우리 동포끼리 서로 죽이는 비극만은 없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젊은 세대들이 부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국토 방위를 위해 자신의 몸을 버릴 불꽃같은 각오를 가질 수 있도록 하여주옵소서, 다시 6.25와 같은 전쟁이 발발하면 젊은이, 늙은이,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두가 희생되며, 찬란히 쌓아올린 이 나라 경제의 탑은 무너지고 돌이킬 수 없는 페허가 될 것입니다. 국토를 지키는 젊은이들의 희생적인 정신과 피와 땀으로 우리 부모들은 후방에서 단잠을 자며 생업을 지속할 수 있도록 우리나라를 보호하여 주옵소서. 지금 우리나라 경제사정이 어려워져 가고 있읍니다. 국가부도의 위기에 처한 IMF 사태 같은 경제적인 고난의 길이 다시는 없도록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간절히 두 손모아 비옵니다. 아멘.   


산책 코스: 1호선 인천역 - 차이나타운- 자유공원 - 인천제2국제여객텀비널- 인천종합어시장- (버스)- 인천역.  

 

  

 

인천시 중구 관광안내도. 위의 좌측 섬이 영종도, 우측으로 월미도, 그 다음 우측에 인천역, 차이나타운, 자유공원, 인천항 부두.. ... 

 

차이나타운 관광안내도...

 

차이나타운:  인천의 차이나타운은 다른 나라와 달리 우리나라 근대화 과정에서 주로 상업을 위해 이곳에 안주를 사람들로 형성되었다. 인천 화교1882년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의 군인과 함께 온 40여명군역상인들이 이 땅에 정착하면서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들은 주로 저장성 등 남방인들로 청나라 군대에 물자를 공급하면서 조선 상인들과의 무역도 하였다. 그 후 1884년 4월 "인천화상조계장정(仁川華商租界章程)"이 체결되고 지금의 인천시 선린동 일대의 5천평 토지에 중국 조계지 와  청국 영사관 이곳에 세워지면서, 중국의 건축 방식을 본뜬 건물이 많이 세워져 차이나타운의 시초가 되었다. 인천 조계지의 화교의 수는 급증하여 1883년 48명이던 화교가 1년 후에는 5배에 가까운 235명으로 늘어났고 1890년에는 화교가 약 1천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당시 화교의 대부분은 인천을 상업 활동의 중심으로 삼고 사업 수완을 발휘하여 중국에서 수입한 식료 잡화를 팔고 다시 조선의 사금 등을 중국에 보내어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장의 전반적인 상권을 장악하였다. 또한 1898년 의화단 (義和團)의 북청사변(北淸事變)으로 산동성 일대가 전란에 휘말리자, 이 일대 중국인들이 피난차 대거 건너와 주로 인천을 집결지로 삼았기 때문에 인천은 화교들의 근거지가 되었으며 서울과 함께 화교들의 양대 세력권이 되었다. 그러던 것이 6.25 전쟁 후 화교 사회는 한국에서 외면을 당하고 외국인 부동산 소유제한으로 거의 반수 이상의 화교들이 이 땅을 떠났다. 이제 인천 차이나타운은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중국의 급부상으로 새로운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인천역...역이 화려하지 않고 인천역 답다. 역사의 어떤 단면을 느끼게 한다.......3:34분이다...해 질 때 까지 약 1;30분 동안 가보고 싶은 곳을 빨리 돌아다녀야 한다.  


'한국철도의 탄생역'....인천역의 역사를 말해 준다.


인천역관광안내소....


차이나타운 방향.....


차이나타운:

'중화가(中和街)' 페루......


인천차이나 타운에는 총 3개의 패루가 세워져있다. 이것도 그 중 하나이다. 패루 재료는 모두 중국에서 직접 만들어 들여왔다고 한다. 

기둥에 세긴 문양이 참 정교하고 대단하다.  

 

패루(牌樓): 중국에 있어서 기념비적인 문형(門形)의 건축. 패방(牌坊)이라고도 한다. 충신, 절부, 효자 등의 현창시설로 시작된 것으로 근세에는 주로 묘(廟)와 사(祠)의 앞에 세워 장엄한 분위기를 조성하며 도시의 중요거리 장식으로도 활용하고 때로는 기념비 건축으로도 이용하고 있다. 주간(柱間)의 수에 따라 한간(一間)패루, 삼간패루, 오간패루 등이 있다. 목조가 가장 많으나 석조도 있다. 지붕은 유리와(瓦) 등으로 덮고 문짝은 없으며 채색과 조각으로 외형을 장식한다. 

 

차이나타운 거리....자유공원을 향해 걸어 올라간다...


차이나타운...궁... 명물 먹거리...사탕수수, 탕후루...양꼬치...


복성동 행정복지센터...


복성동관내안내도...


club of coffee...."커피를 마시며 이야기하다"....



共和春(공화춘)....


그 유명한 '공화국의 봄' 이란 뜻의 '공화춘(共和春)'이란 상표를 사용한 중화식당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짜장면 개발자로 알려진 '공화촌 '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근대 공원인 자유공원 중턱에 문을 열었고, 당시 인근 인천항에서 일하던 부두 노동자, 중국인 등이 중국요리의 맛에 이끌려 이곳을 자주 찾게 되었으며, 한국인의 입맛에 맛게 달콤한 캐러멜을 첨가하고 물기를 적당히 유지한 음식인 짜장면을 개발하게 되었느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공화춘이 처음 인천 차이나타운에 문을 열게 된 것은 1908년으로 중국 산동지역 출신인 우희광 선생이 22살의 젊은 나이에 ‘산동회관’(山東會館)이란 이름으로 첫 영업을 하기 시작하면서 부터라고 한다. 공화춘’은 차이나타운을 대표하는 중국요리집으로 호황을 누렸으나 화교들의 재산권 행사를 제한한 정부의 화교정책에 밀려 1983년 폐업하고 말았으며, 지금은 인천시 중구에서 2010년 매입하여 짜장면을 주제로 한 국내 최초유일의 짜장면박물관으로 2012년 4월 개관하였다. 지금 이 집은 짜장면박물관으로 쓰이는 원래의 옛 '공화촌'의 인근에 문을 연 이름이 같은 '공화춘'이란 중화식당이라고 한다.  

 


중화식품...공갈빵, 월병......


화덕만두, 수제월병, 공갈빵....


청관...연경...


연경....



자유공원 오르는 계단...








선린문...


삼국지 스토리 텔러 벽화...


선린문을 통하여 바라보는 인천항 방향.....



자유공원 (自由公園):

 

인천시 중구에 있는 공원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며, 인천 차이나타운이 붙어있다. 응봉산 전역을 아우르며 정상에는 한미수교백주년기념탑 과 맥아더 장군 동상이 있다. 러시아 토목기사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이 설게한 인천 소재 외국인 거주자들을 위한 공원으로서 만국공원(萬國公園)이라는 이름으로 개설되었다. 일제 시기에는 서공원(西公園)으로 불리다가, 해방 후에는 원래 이름인 만국공원으로 불렸다. 1957년 김정렬 인천시장이 취임하면서 자유공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인천항과 서해 바다,일출 조망처이다.



앗, 단풍이다...


단풍 사이로 바라보이는 월미도...



자유공원 쉼터 정자...


효도권장비...."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 효도하여 本(본)을 세우자 ...."



'한미수교백주년 기념탑' ........


 날카로움이 하늘을 향하고 있다. 이곳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우리나라를 구한 위대한 전략가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있는 곳이다. 자유공원은 맥아더 장군 동상으로 더욱 유명하고 뜻있는 곳이다. '자유"라고 발음하니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지 다시 느껴지는 듯 하다. 자유가 없는 삶은 노예의 삶, 죄수의 삶이다.


 



자유공원...공원 이름이 너무 좋다. 의미심장하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1736~1799) 


패트릭 헨리는 미국의 정치가, 독립운동가이다. 독학으로 변호사가 된 그는 1765년 버지니아 식민지 회의 의원이 되어 미국의 독립 운동에 앞장섰다. 그 후 대륙 회의 대표, 버지니아 주 지사 등을 지내고, 독립 혁명 후에는 버지니아 주에서 종교의 자유를 법률로 제정하는 데 힘썼다. 또한 민주적인 헌법을 실현시키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다. 특히 오뎅에서 그가 한 연설 가운데 독립을 주장하면서 외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는 말은 우리의 심혈을 영원히 울리게 될 것이다.  


자유공원 보람마트....


자유공원 광장....전망대....






인천항....월미도...








불세출의 영웅...맥아더 장군...


맥아더장군 동상 건립문..." 정의에는 국경이 없고 투쟁에는 산도 물도 거침없다...."로 시작되고 있다. 1957년 9월 15일 맥아더장군 동상건립위원회.

 

월미도로 상륙하는 맥아더를 위시한 당시 유엔군 지휘부...자유 해방의 행군이 되었다. 세계전사에 빛나고 있다.


◎ 인천상륙작전:   6∙25 전쟁시 1950년 9월 맥아더장군의 지휘 아래 감행한  ‘인천상륙작전’ 은 전쟁을 역전 시킬 수 있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6∙25 전쟁 초기 기습공격과 엄청난 전투력으로 낙동강 전선까지 진격한 북한군은 유엔군의 참전과 국군의 반격으로 교착상태에 빠져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은 이러한 상황에서 전개되었다. 인천은 서울에서 32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서울로 접근할 수 있는 최단거리 항구며, 북한군의 보급선을 차단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런데 난점이 있었다. 인천항은 수로가 좁아 큰 함정의 진입이 불가능했고, 인천이 지리적으로 멀어 작전지원이 어렵고 조수∙간만등 자연조건이 불리해 당시 합동참모본부와 해군은 반대하였다고 한다. 낙동강 전선에 주력한 북한군도 이런 요소 때문에 위험성을 간과하여 허를 찔리게 되었다.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맥아더 장군의 탁월한 지모와 전략, 용감성으로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대승리를 이루었다. 지도자의 중요성과 역할이 다시 돋보이게 된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인천지역 북한군의 병력규모는 약 2,000여명, 서울, 인천에서 활동중인 병력은 약 10,000명이었다고 한다. 이에 미군은 상륙부대로 미 제10군단이 창설하였고 병력이 75,0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9월 15일 새벽, 제 7합동기동부대 스트러블 해군제독의 지휘아래 8개국 261척의 함정과 제 10군단으로 편성된 대규모선단이 인천앞바다에 집결하고, 월미도에 상륙해 돌격을 감행할 미 제 5해병연대 제 3대대 상륙단의 선견공격대가 인천항에 도착했다. 새벽 5시부터 유엔군은 북한군의 방어진지에 폭격을 가하기 시작하고 17척의 상륙용 주정으로 월미도 녹색해안에 도착한 상륙 부대도 돌격을 시작하여 마침내 유엔군의 화력 앞에 북한군은 투항하기 시작했다. 미 제 5해병연대 제 3대대의 월미도 일대 녹색해안 상륙작전은 적 사살 108명, 포로 136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어 인천항이 만조가 된 오후 5시경부터 유엔 해군과 공군의 엄호사격이 다시 시작되면서 미 제 5해병연대의 2개 대대가 인천항 북반의 적색해안에, 미 제 1해병연대는 인천항 남쪽의 청색해안에 각각 상륙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은 이렇게 진행되었고, 상륙작전 이후 우리 국군은 15일만에 38선까지 탈환하였다. 위대한 작전의 성공이다. 맥아더장군 브라보! 우리나라 만세!

 

 

미해군기념재단 헌정비. 맥아더장군과 상륙작전 광경이 부조되어 있다.

 

 " ...the most masterly and audacious startegic stroke in all history...

...dedicated honor all U.S army personnel who served in the korean war, june 25, 1950 to july 27, 1953."

 

placed june 22, 2000 by the united states navy memorial foundation,  washington D.C.   

 

...모든 역사적에서 가장 위대하고 대담한 전략적 타격...1950.6.25~1953.7.27 근무한 미해병에 대한 존경으로 헌납하다...

워싱턴 D.C. 소재 미해군기념재단이 2000.6.22 설치함.

 

 

인천시민헌장비....



평화역사이야기여행...


자유공원새우리....


제물포고등학교...




-> 무료공영주차장...인성중.고교 위....


인천제일장로교회...


인천학도의용대 6.25참전 기념비...



안내문(INFORMATION)....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아군은 거듭되는 후퇴로 낙동강이 최후의 전선이 되었다. 1950년 9월 15일 UN군의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되자 우리 학도들은 의용대를 조직, 강화하여 치안유지에 힘쓰던 중 승전을 눈앞에 두었던 전선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나라가 또다시 위기에 처하자, 1950년 12월 18일 남녀대원 3,000명은 축현초등하교에 집결, 출정식을 갖고 마산까지 남하하여 1951년 1월 5일 600명은 해병대로 1300여명은 1월 10일 부산에서 육군에 자원 입대하였다. 그 후 그들은 수많은 전투에서 200여명의 전사자와 많은 부상자가 조국에 젊읆을 바쳤다. 우리는 그들의 호국정신을 기리고 넋을 추모하고자 여기에 기념탑을 세운다.     인천학도의용대 6.25참전회.

 





구)제물포구락부...


인천항 방향...




황혼의 인천항...


-> 각국조계석....


각국조계석...


조계 (General Foreign Settlement Board Stone) 란 영토의 읿정한 범위를 한정하여 외국인의 거주를 허가한 지역으로 거류지라고도 부른다. 1883년 일본전관조계를 시작으로 같은 해 12월 청국전관조계, 1884년 10월에 각국공동조계가 설치되었다. 조계석은 조계의 경계를 나타내 주는 표시석으로 각 조계의 경계지점에 세웠던 것이다.... (이하 생략)


역사자료관...


구)제물포구락부...




대단한 집이다...





아슬한 은행나무....


역사자료원...


담쟁이 음식점...



노을밥상...


구)제물포구락부 방향...


리움 커페...웨딩...





삼국지 벽화거리...


공자 상...위대한 인류의 스승이다.


子曰(자왈),


學而時習之, 不亦說呼 -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有朋自遠方來, 不亦樂呼 -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呼 - (인불지이불온, 불역군자호)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니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섭섭해하지 않으니 어찌 군자가 아니랴. "


- < 공자, 논어 학이편 제1장 >



* 공자 (BC 551~BC479) 의 일생...공자(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 노나라 출생 (魯國 出生)는 中國春秋(춘추시대) 시대의 위대한 정치가, 교육가이며, 儒家(유가)의 創始者(창시자)이다. 공자는 일생에 걸쳐 많은 고전 명작 고시, 에악, 춘추, 역경 등을 정리 출판하여 중화민족 역사에 탁월한 공헌을 하였다. 그의 주요 사상과 언행은 論語集(논어집)에 기재되어 있다. 공자는 중국봉건사회의 철학, 교육, 문학, 예술등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을 뿐만아니라, 그의 유가사상은 중화민족문화를 대표함과 아울러 인류 역사상 중요한 유산으로 전 세계에 영향을 주고 있다.



인천항 부두 방향... 







근대역사안내...


대불호텔 전시관


생활사전시관...


구)일본 제1은행 인천지점.......인천 개항박물관.....


최초의 우편배달부....


우리나라의 우편제도는 1884년 11월 18일 서울과 인천간에 우편물이 교환되기 시작하면서 그 막이 올랐다. 본 조형물은 근대 사진자료에 남아있는 우체부와 우체통(1912년식)의 모습에 기초하여 제작되었다.



<- 800m 송월동 동화마을, <- 370m 짜장면박물관, <- 280m 제물진두 순교지, <- 40m 구)일본제1은행 인천지점, 인천문화재단 150m,
인천아트플렛폼 80m



인천중구청...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


한국근대문학관....


당신이 오기로 한 골목마다
폭설로 길이 막혔다
딱 한번 당신에게
반짝이는 눈의 영혼을 주고 싶었다
가슴 찔리는 얼음의 영혼도 함께 주고 싶었다
그 얼음의 뾰족한 끝으로 내가 먼저 찔리고 싶었다


이설아 '겨울의 감정' 중에서




인천항 제2국제여객터미널 가는 길.... 바다와 대형 여객선을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인천에서 한번도 이런 광경을 제대로 본적이 없다.


인천아트플렛폼....


인천일보....저 앞의 연안부두 길을 좌측으로 걸어가야 한다...



119 인천중부소방서...


<- 신포문화거리, ↑ 수인사거리, -> 1부두....


1부두 방향으로 나가본다...바다 구경이 간절하기 때문이다...


인천세관 제1세관검사장...


제1부두 출입문....그러나 민간인 출입금지...되돌아 나온다..........아마트 방향의 길을 가다 우회전 하여야 한다고 한다.


수인선 신포역...



인천 제2국제여객터미널:

인천 제2국제여객터미널...인천항 바다와 대형 여객선 한번 보려고 여기까지 걸어왔다... 


주차요금....


기본 소형 1,000원, 대형 1,500원, 최초10분 무료..초과 15분당 소형 500원, 대형 750원, 일일최고요금 소형 10,000원, 대형 15,000원....




어서 오십시오...제2국제여객터미널입니다.....단둥, 스다오, 칭다오, 웨이하이, 친황다오, 잉커우...


소요시간.....인천- 웨이하이 위동항운 14시간/ 인천-칭다오 위동항운 17시간, 인천-텐진 진천훼리 26시간, 인천-렌윈항 24시간


출국장에는 수많은 중국교포 같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출국수속을 위해...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다. 바다 구경도 할 수 없다. 허무하다...


그래도 바다는 꼭 보고 싶어 주차장 방향으로 나가본다... 


부두 펜스를 통하여 바라보는 인천항....월미도 방향....


제2국제여객터미널 버스 정류소....한길가로 다시 나왔다. 연안부두종ㄴ합어시장으로 향하려한다. 24번 버스를 타고 가야 한다...7분 남았다.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연안부두 인천종합어시장:

어시장사거리....밤이 되었네...


인천종합어시장....


삶의 치열한 현장이다....푸른 바다가 넘실대고, 비옷을 입고 추위와 싸우며 일하는 어부가 있고,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는 시장 바닥의 우리들 어머니가 있는 아름다운 그러면서 고통스러운 삶의 현장이다.   


앗, 광어, 방어...


우럭...


회를 떠놓고 10,000원, 10,000원 한다...


앗, 먹음직스러운 사랑스런 게....



국내산 꽃게....


꼬막이다....소라고동이다...


홍어다..크다...


개불, 싱싱한 수족관 활어들..고 녀석들 사라스럽네......나는 떠 놓은 광어, 방어 회를 8,000원에 준다고 하여 하나를 덮석 잡아버렸다. 그리고 양념집으로 고고...그냥 집에 가려다가 도저히 그냥 갈 수 없다.  


양념집...


그런데, 내가 시켜온 회가 식감이 그리 싱싱하지 못하다. 후회를 한다. 활어를 떠서 먹어야 하는데 혼자이므로 쉽게 결정한 것을 후회하였다. 1/3정도 먹다 소주와 야채만 먹고 끝냈다. 다시는 미리 따놓은 회는 사지말아야지...다짐에 다짐을 해본다. 

 

양념집 상차림....1인 3,000원, 매운탕 중 15,000, 대 20,000.....


오늘 연아부두어시장을 구경해 보고 다시 나와 동인천역으로 나가는 24번 버스르 타고 1호선 전철을 타고 온구역에서 7호선으로 환승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오니 밤 9시가 넘었다. 집 사람이 끓여놓은 조기매운탕으로 저녁을 먹는다. 오늘 하루는 이렇게 넘어갔다. 인천 자유공원 일대는 그야말로 근대역사의 보고이다. 한번 가볼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