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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구릅/나의 밥한끼

남한산성(전승문), 벌봉 등산, 풍납동 '화로숯불구이' - ( 2020.07.04 )

by the road of Wind. 2020. 7. 4.

남한산성(전승문), 벌봉 등산, 풍납동 '화로숯불구이' - ( 2020.07.04 )

 

산 책: 걸음수 15,987 steps, 소모열량 893 kcal, 거리 14.33 km, 소요시간 04:04 ( 10:30 am ~ 2:57 pm ), 속도 3.6 km/h.

코 스: 하남 상사창동 고골공영주차장- 고골 - 남한산성 (전승문) - 동장대터 - 동장대암문- 벌봉 - 법화골 - 상사창동 연자마 - 고골공영주차장.

 

남한산성 동장대터에서 경기광주 방향

오늘 오랜만에 등산을 해보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자전거 전철 승차가 가능한 주말을 이용하여 춘천이나 용문산 방향, 또는 여주 방향으로 가서 자전거를 조금 타볼까 생각하며, 혼자 냉장고를 열어 이것 저것 꺼내 아침부터 고추장에 비빔밥을 만들어 먹고 집을 나서려 준비를 서두르는데, 왠지 마음이 내키지 읺았다. 자전거를 끌고 전철역으로 가서 2시간 정도를 전철을 타고 가야 드디어 자전거 라이딩이 시작되는데, 오늘은 코로나 때문인지 왠지 번거롭고 귀찮게만 느껴졌다. 몸 상태도 피곤한 것 같다. 아침 5시경 일찍 일어나서 그런가? 그러면서 시간은 째깍째깍 가고 해는 떠올라 더운 날씨가 느껴진다. 이상하게 졸음이 온다. 왜 이러지? 결국 자전거는 포기하고 머뭇거리다 결국 집 근처의 하남 고골계곡으로 가서 남한산성 등산을 조금 해보려 하였다.

아침 10:30분경에 고골공영주차장에 도착하니 벌써 차들이 많았다. 조금만 지나면 만차 상태가 될 것 같다. 하남시 남한산성 아래 깊은 고골계곡은 숲이 우거지고 녹음이 짙어져 너무 좋았다. 공기도 상쾌하였다. 오늘은 그동안 쓰지 않던 등산 스틱도 휴대하고 갔다. 이곳으로 등산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처음부터 계곡길을 이용하여 남한산성 벌봉으로 바로 등산하여 동장대터까지 갈 생각이었으나, 가보지 않았던 길이어서 등산로 입구를 지나쳐 옛날처럼 남한산성 북문(전승문)으로 향하는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고골계곡의 우거진 여름 숲이 계곡의 깊음을 느끼게 한다. 이 계곡에서의 등산객은 많지 않다. 가물에 콩 나듯 한다. 무더위에 전승문으로 오르니 여기에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전승문 곁의 의자에 앉아 음료 캔 하나와 빵 하나를 점심으로 먹는다. 준비없이 온 산행은 먹거리가 부실하다. 산에 갈 때는 항상 먹을 거리가 풍성해야 한다. 처음엔 무더운 날씨에 그냥 원점회귀로 다시 왔던 길로 내려갈까 생각했으나, 벌봉에의 미련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벌봉으로 향한다. 벌봉 가기전의 동장대터 를 가보고 싶었다. 이곳의 동장대터 주변의 경치는 아스라하니 너무 아름답다. 서실 이 경치를 바라보고 싶어서 벌봉 방향으로 오르는 것이다. 

성곽을 따라 등산하여 동장대터에 서니 경기 광주 방향의 아름다운 경치가 눈 앞서 펼쳐진다. 이곳에서의 경치는 남한 산성에서의 경치 중 가장 아름답다고 말 할 수 있다. 사실 벌봉의 정상은 작은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 한번도 올라보지 못 했다. 이 곳에 오르는 길도 보이지 않고 올라도 별 조망이 바라보일 것 같지 않다. 나는 동장대터에서 음료 한잔을 마시고 동장대암문을 지나 남한산성 외곽으로 나와 벌봉으로 향했다. 벌봉은 사실 가보면 이름 값을 하지 못한다. 아무런 볼 것이 없다.

나는 벌봉 아래에서 바로 고골계곡으로 가는 길로 하산하려다 조금 내려가니  잔디밭에 길이 아주 좁아지고 불안하여 다시 벌봉 곁으로 나와 산 중턱을 지나 나가다 법화사 가는 길을 따라 법화사 계곡으로 하산하였다. 이 길도 등하산로는 좋았으나 길이 멀어 만만치가 않았다. 배는 고프고, 음료수는 냉수 조금 밖에 없는 상태가 되어 고골공영주치장에 도착하였다. 오늘 먹거리 준비 없이 무더운 날씨에 벌봉까지 조금 무리한 것 같다. 그렇지만 마음은 뿌듯하다. 오랜만의 등산에 기분이 좋다.          

 

        

 남한산성(南漢山城)조선시대(1392~1910)에 유사시를 대비하여 임시 수도로서 역할을 담당하도록 경기도(京畿道) 광주시(廣州市)·성남시(城南市)·하남시(河南市) 일원의 해발 480m가 넘는 험준한 지형을 따라 건설된 산성이다. 남한산성의 초기 유적에는 7세기의 것들도 있지만 이후 수차례 축성되었다. 후금(後金)의 위협을 받고 이괄(李适)의 난을 겪은 인조는 1624년 총융사 이서(李曙, 1580∼1637)에게 산성의 축성을 명령하여, 2년 뒤에 둘레 6,297보, 여장(女墻) 1,897개, 옹성(甕城) 3개, 성랑(城廊) 115개, 문 4곳, 암문(暗門) 16곳, 우물 80곳, 샘 45곳 등을 설치하고서 광주읍의 치소(治所)를 산성 안으로 옮겼다. 축성 공사에는 각성(覺性)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삼아 전국 8도의 승군을 동원하였는데, 승군의 사역과 보호를 위하여 현재 남아 있는 장경사(長慶寺)를 비롯한 7곳의 사찰을 새로 건립하기도 하였다. 남한산성은 건립된 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성관 안에는 많은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둘레의 길이는 약 8㎞ 정도이며, 면적도  약 528,460㎡ 에 달한다. 2014.6.22 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벌봉(512m): 그 곳의 바위가 벌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벌바위봉이라고도 부른다. 여기까지 성(봉암성)이 둘러쳐져 있지만 여기의 석성은 병자호란 때는 없었다. 뒤에(조선 숙종조) 광주유수 윤지선의 주장으로 축조된 것이다.  벌봉은 한쪽에서 보면 크나큰 두 쪽의 바위로 보이는 우뚝 솟은 암봉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병자호란 때 청나라 태종과 그 군사들이 이 벌봉에서 남한산성 안에 있는 우리편 군사들의 상황을 살폈다 한다. 벌봉이 당시의 산성에서 가장 높은 수어장대보다 높기 때문에 산성 안을 넘겨다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청군들이 이 벌봉에 머무를 때 새처럼 큰 벌들이 청군들을 괴롭혔다는 이야기도 있다. 벌봉은 남한산성에서 흔하지 않은 암봉으로, 바위틈에 굴도 있어서 기도터로도 이용되고 있다

 

등산후 집에 돌아가서 돼지갈비를 먹으러 나갔다. 긴급재난지원금이 아직 남아있어 그것으로 외식을 하려는 것이다. 공짜 돈으로 먹는 음식은 맛있다. 그런데, 지난번 하남수산시장에서 난생 처음으로 킹크랩을 잘 먹었는데, 재나지원금 해당이 아니다. 서울을 벗어나면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오늘은 남아잇는 금액으로 서울의 맛집을 찾아간다. 집식구와 아들도 좋아한다. 우리집은 이곳으로 이사와서 새로이 단골로 다니던 명일역 근처 '명일참숯불갈비' (02-3426-3588/ 서울 강동구 명일동 312-75) 가보았다. 그런데, 단체손님으로 내부 홀이 기득하다.  이 집은 돼지갈비 1인분(300g) 12,000원, 매운등갈비찜 13,000원으로 가격도 착하고, 양도 많고, 숯불 돼지갈비 맛은 매우 탁월하여 엄지척이다. 아주 잘한다. 돼지갈비하면 그 맛을 잘 알 수 있을 정도로 외식했다하면 돼지갈비집인데, 이곳은 식당 규모는 작아도 내가 먹어본 돼지갈비 중 최고의 맛을 자랑한다. 주인의 서비스 정신도 좋고 맘에 드는 집이다. 그래서 이곳에 오기전에 가끔 단골로 다니던 송파구 풍납동 영파여교 곁의 단골로 다니던  '화로숯불구이' ( 02-488-3737/ 서울 송파구 풍납동 504 ) 을 찾아갔다. 이집은 돼지갈비집으로는 규모가 최대라 생각된다. 엄청 큰 규모의 건물 1,2층을 모두 사용한다. 이집의 돼지갈비 맛도 발군이다. 명일참숯불갈비나 화로숯불구이 모두 냉면 실력도 전문식당에 뒤지지 않는다. 화로숯불구이는 식당이 아주 커서 지금 같은 거리두기가 중요할 때 안성맞춤의 식당이다. 이곳에서 오랜만에 집식구들과 외식을 맛있게 잘하였다. 고골 벌봉 등산에서 삼립식품의 조그만 꿀호떡 서너개로 배가 고파서 오늘 저녁은 아주 최고의 맛으로 잘 먹었다. 긴급재난자금으로 먹으니 맛도 배가 되는 것 같았다. 인간 심리는 묘하다.  

 

 

고골계곡 등산 (-> 전승문):

 

고골공용주차장...

 

남한산성도립공워원 탐방안내도

 

* 현위치에서 북문까지의 거리는 1.5km로 약 30분 소요됩니다.

1코스: 산성로터리- 북문- 서문- 수어장대- 영춘정- 남문- 산성로터리 ( 3.8km, 약 1:20분 소요)
2코스: 산성로터리- 영원정- 숭렬전-국청사 - 서문- 수어장대- 산성로터리 ( 2.9km, 약 1:00시간 소요)
3코스: 남한산성 사무소- 현절사- 벌봉- 장경사- 망월사- 지수당- 남한산성사무소. ( 5.7km, 약 2:00시간 소요)
4코스: 산성로터리- 남문- 남장대터- 동문-지수당- 개원사- 산성로터리 ( 3.8km, 약 1:20분 소요)
5코스: 남한산성사무소- 동문- 동장대터- 북문- 서문- 수어장대- 영춘정- 남문- 동문 ( 7.7km, 약 3:20분 소요)

 

하비비 Habibi..

 

산불감시초소..

 

<- 물레방아, <- 고골산장, -> 항아리가든, -> 토박이.

벌봉 가는 길은 왼쪽인데, 오른쪽으로 진입하여 남한산성 북문(전승문)으로 등산하게 되었다.   

 

덕풍천...항아리가든...

 

토박이...

 

차량진입금지..

 

앗, 본격적인 나무계단길 시작...

 

북문(전승문) 오르는 계단길 초입의 이정표....

<- 0.8km 고골계곡, <- 0.5km 빈딧불서식지, <- 1.4km 위례둘레길(법화골), -> 0.8km 님한산성, -> 0.8km 전승문(북문)

 

세미길(稅米).....한강 수로를 이용하여 전국 각지에서 거둔 세곡, 군량미, 둔전세 등등을 둔지나루와 창모루에 하역하여 그곳에 있던 창고에 보괂관하였다가 마차, 소, 등짐을 이용하여 골짜기에 있던 상사창, 하사창으로 운반 보관히였고, 여기에서 다시 등짐으로 산 비탈을 올라 산성 안의 여러창고로 옮길 때 다니던 길이라 한다. 

 

* 민초들이 등짐 져 이 험한 산 길을 오르느라 얼마나 많은 고초를 당했을까? 그러면서, 조정에서는 국제질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무능으로 병자호란을 불러와 또 얼마나 많은 민초들의 희생이 따랐는지 역사적인 사실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마패....."공무여행 중의 말 이용증 "

 

역에는 말을 대기시키는 마방이 있어 공무 여행을 하는 관리들이 조정으로 부터 발급 받은 마패를 제시하면 지친 말을 새 말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각 역마다 역마를 사용하려면 마패라는 증명이 잇어야 하는데, 마패 한 면에는 품위에 따라 탈 수 있는 말의 수가 새겨져 있고 다른 면에는 연호(년,월,일)와 상서원인(尙書院印)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긴급한 경우 수시로 말을 지급하는 수시급마(隨時給馬) 규정도 있었는데요, 능행차가 잇는 경우 각 임금의 능에 바칠 제사물품을 운반할 때나 각 진영의 대장, 통역사인 역관, 징병 장교인 압공인에게 말을 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수시급마 규정은 결국 역마를 남용하는 폐단을 불러 역마제도가 문란해지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한편 마패를 파손하거나 분실하면 곤장 90대에 2년 동안 걸어 다녀야 하는 형벌이 내려졌습니다.

 

 

앗, 전승문...

전승문(全勝門)...북문(北門)...

 

전승문(북문)...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북문은 병자호란 당시 성문을 열고 나가 기습공격을 감행했던 문이다.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에서 '전승문'이라고도 하였다. 당시 영의정 김류의 주장에 의해 군사 300여명이 북문을 열고나가 청나라 군을 공격하였으나, 적의 계략에 빠져 전멸하고 말았다. 이를 '법화골 전투';라고 하는데,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있었던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였다. 정조3년(1779) 성곽을 개보수할 때 성문을 개축하고 이름을 붙여 전승문(全勝門)이라 한 것은 그 때의 패전을 잊지말자는 뜻이었을 것이다. 선조 때의 기록을 보면 산성 내에 동문과 남문, 수구문의 3개의 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북문은 인조2년(1624)에 신축된 성문이라고 생각된다.

 

 

 

동장대터 가는 길:

 

앗, 하남시 고골 전경.....얼마 후면 3기 신도시 건설에 들어갈 예정지이다. 입지 여건이 아주 탁월하다. 남한산성 능선 줄기를 사이에 두고 서울 송파구와 인잡하고 있다. 자연환경이 우수한 하남시는 도시 전체가 재탄생하게 되는 형국이다. 

 

남한산성 청량산에서 뻗어내리는 능선...

 

벌봉에서 흘러네리는 능선....

 

고골 왼쪽으로 남한산성 청량산이 금암산, 이성산을 솟구치며 흘러내리고 있다. 앞으로 고골제3기 신도시로 확정되어 건설될 것이며, 금암산, 이성산 왼쪽에 있는 감북동, 초이동 일대도 빈 공간으로 남아있어 미니 신도시 최적지로 예상되고 있다. 하남이 새로운 주거지로 급부상할 것이다. 반면 녹지는 사라지고 천혜의 자연은 파괴되는 것이다. 앞으로 한강  건너 구리와 덕소 사이의 경의중앙선 전철 양정역 주변의 남양주 양정역역세권도시개발구역과 함께 한강 상류에 개발 바람이 거세게 불 것이다. 

 

제1군포터....군포는 성을 지키기 위한 초소 건물이다. 

 

동장대암문....<- 1.4km 전승문(북문), <- 0.6km 벌봉(蜂峰(봉봉), -> 1.5km 좌익문(동문)

 

남한산성 여장(女墻)....여장은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으로 이곳에 몸을 숨겨 적을 향해 효과적으로 총이나 활을 쏠 수 있게 만든 시설이다. 남한산성 여장은 다른 성곽에서 보기 힘든 잔돌로 축조한 평여장(平女墻)이다. 그러나 여장은 축조시기와 위치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 여장재료는 일반적으로 하부는 석재로, 상부는 잔돌을 사용한다. 

 

벌봉 가는 길....보이는 길 옆의 낡은 성이 남한산성 외성인 봉암성이다.

 

경기 광주시 방향 경치....

 

남한산성....동문 가는 길...

 

동장대터(東將臺址_동장대지).........장대란 지휘와 관측을 위해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누각 건물로 남한산성에는 5개의 장대가 있었다. 이곳은 동장대가 있던 곳으로 성 동쪽에 있다하여 동장대라 불린다. 이곳에는 남한산성에 주둔하던 수어청에 소속된 5명 중 좌영장을 지휘하던 자리다. 동장대는 인조 2년 산성 수축시에 설치되엇고 누각도 함께 건립되었으나  18세기 초에 붕괴된 것으로 보인다. 18세기 중엽에 납자대와 서장대는 다시 수축되었으나 북장대와 동장대는 다시 짓지 않았다. 한봉성과 연주봉옹성의 축성으로 동장대나 북장대는 상징적인 의미만 있을 뿐 군사적인 실효성이 없어졌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벌봉 가는 길:

잠깐! 남한산성 (사적 제57호)은 문화재보호법에 의해 보존.관리되는 소중한 유네스코 세계유산입니다.

 

남한산성의 외성(봉암성.한봉성)은 숙종12년(1686)에 축성하여 영조20년(1744)대의 변천모습을 현재까지 간직한 구간으로 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에서는 외성구간의 보존관리를 위하여 정비를 진행 중에 있습니다. 체계적인 남한산성 정비를 통하여 민족 자존의 역사.문화유적으로 걷ㅂ나고자 하오니 탐방객 여러분들의 많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봉암성...

 

남한산성은 단순한 하나의 성곽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본성, 봉암성, 한봉성, 신남성과 5개의 옹성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조이다. 이 중에서 봉암성은 본성의 동쪽인 동장대 부근에서 북동쪽의 능선을 따라 벌봉 일대를 포괄하여 쌓은 외성이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 내부의 동태를 훤히 조망할 수 있는 벌봉을 청군에 빼앗겨 곤란을 겪는데,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숙종 12년 (1686)에 부윤 윤지선으로 하여금 성을 쌓게 하였고, 이 후에도 치성과 포대 등을 증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봉암성은 남한산성 본성에 대하여 새로 쌓은 성이므로 '신성' 이라고도 하며, 동쪽의 성이므로 '동성'이라고도 하였다. 성의 길이는 2,120m이다. 

 

 

동장대터 방향...

 

봉암성

 

벌봉.....암문 밖에서 이 바위를 보면 벌처럼 생겼다하여 벌봉이라 한다. 병자호란 때 청 태종이 정기가 서려잇는 벌봉을 깨뜨려야 산성을 함락 시킬 수 있다하여 이 바위를 깨뜨리고 산성을 굴복시켰다는 전설이 있다. 벌봉은 해발 512.2m로 남한산성 수어징대(497m)보다 높기 때문에 남한산성 매부와 동쪽 성벽이 훤히 내려다 보인다. 병자호란 당시 이 지역을 청나라 군에 빼았겨 적이 성 내부의 동태를 쉽게 파악할 수 있었으며, 화포로 성안까지 포격할 수 잇었다. 

 

 

벌봉 정상.....바위 하나만 잇는 것 같다. 지금 생각하니 저 바위 위로 올라가지 않은 것이 후회된다. 남한산성 수어장대보다 높다고 하며 성안을 훤히 내려다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앗, 나의 실수다. 

 

 

하산 길 (법화골): 

 

벌봉 암문...

 

벌봉 암문 앞 이정표........<- 2.0km 먹거리촌 (고골).

 

이 정표를 보고 등산객에 무물어 왼쪽 고골계곡길로 내려간다. 

 

엇, 농작물 재배하는 곳도 보이고...길을 잘 들어왔다 생각.... 

 

아차, 이게 아닌 것 같은데.....길이 풀로 희미해 지는 것 같았다. 독사가 떠오른다....불확실한 길은 가지 않으려 한다. 다시 벌봉 암문으로 오른다. 아르바이트만 한셈이다.

 

벌봉 암문을 지나 조금 산 중턱을 걸어 가니 법화골 하산 이정표가 나온다....법화골 하산은 처음이다.

<- 2.2km 법화골<- 0.2km 법화사지, ↘ 남한산성 0.2km, 벌봉 0.2km   

 

법화골 (法華谷_법화곡)....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태종의 매부인 양고리가 조선의 원두표 장군에게 패하여 전사하자 전쟁이 끝난 후 그의 영혼을 달래기 위하여 남한산성 밖에 앙고리의 고향인 법화둔의 지명을 따서 세운법화암이라는 암자가 있었던 골짜기라 하여 법화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지금도 옛 절터에는 부도(浮屠) 3기가 남아있다.  

 

법화사지....

 

법화사 부도 3기...

 

법화골 계곡도 등산로는 괜찮았지만 거리가 멀고 만만치 않았다. 

 

하산의 끝이 보이는 것 같다..

 

<- 0.9km 법화골, -> 남한산성 1.5km, -> 법화사지 1.1km 

 

멋진 기와집...울타리 담장이 없어 시원하다......
법화골 방향...
나팔꽃 당신...

 

남한산성 전승문 방향..
앗, 연자방아..

하남시 사창동 연자방아.........상사창동 연자마는 굴리는 돌인 동그란 숫돌과 받치는 돌인 암돌로 되어있다. 숫돌에는 나무로 만든 사각형 방아틀이 숫돌을 감싸듯 부착되어 있어서 소나 말이 이 돌을 끌어 돌리면서 방아를 찧도록 되어있다. 방앗간은 원래 여덟개의 기둥 위로 볏집으로 짠 지붕을 올린 팔각정자 모양의 건물이었으나 현재는 새로 보수해 놓은 모습이다. 마을에서 공동으로 사용해 오던 것으로 거의 원상태로 잘 보존되어 있으며 제작년대는 1930년대로 짐작된다.     

 

-> 북문, 벌봉....성문사, 물레방아, 고골산장, 토박이, 항아리가든, 하비비, 상록수.....모든 음식점이 거거되어 있다.
고골 커피...주차장...

 

'화로숯불구이' ( 02-488-3737/ 서울 송파구 풍납동 504 ): 

돼지갈비(230g) 1인분 17,000원, 한우꽃등심, 한우갈비(100g) 24,000원, 한우살치살 (100g) 29,000원....

돼지갈비 맛은 아주 탁월한데 가격이 조금 거시기(?)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