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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구릅/나의 산행

남한산성- ( 2021.06.25 )

by the road of Wind. 2021. 6. 25.

남한산성

- ( 2021.06.25 ) 

 

그동안 남한산성 둘레길 산책을 할 수 없었다. 등산로 정비 공사 때문이었다. 갈 때마다 공사 팻말이 산책로를 차단하고 있었고, 공사는 언제 끝날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공사가 끝났을 것 같아 늦은 오후 별안간 전철을 타고 성남 산성역에 하차하였다. 그리고 2번 출구를 나와 '산성역.포레스티아 동문' 정류소에서 남한산성 마을 가는 유일한 버스인 9번 버스를 타고 지그재그 산길의 차도를 올라갔다. 그리고 남문터널을 통과하자마자 있는 ''남문터널'정류소에 하차하여 드디어 남한산성 산책을 시작하였다. 평일 오후이어서 남한산성 둘레길은 한가하였다. 오랜만에 보는 남한산성 지화문(남문)이 아름답게 보인다. 남문 밖으로 나가 느티나무 보호수와 산성의 뻗어나가는 고색 창연한 모습을 인상깊게 바라보았다. 남한산성 성곽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산새들이 우는 조용한 산책로를 걸어 올라 수어장대에 이른다. 남한산성 구경 가서 수어장대를 보지 않고 오면 안된다. 오늘 보니 남한산성 정비 공사는 청량산 주변의 둘레길의 경우는 거의 끝났다. 일부분 전승문(북문) 등의 보수 공사는 진행되고 잇었다. 북문을 통과해야 하는 하남시 고골계곡 방향으로 또는 고골 방향에서 산행을 하는 사람들은 성곽외곽의 산길을 타고 돌다 암문이나 서문 등을 통해 성 안으로 들어서야 한다. 모처럼의 남한산성 둘레길 산책은 재미있았다. 그리고, 수난의 역사적 현장을 걷고 있다는 기분으로 산행을 하니 힘들지가 얺았다. 나는 생각해 본다. 남한산성은 왜 축조했는가? 이렇게 작은 규모의 산성 하나로 압도적 침략군을 방어할 수 있다고 판단했는가? 그런데도 수많은 민초를 동원하고, 국고를 낭비하며 혈세를 거두어 이런 무가치한 일을 벌인 왕을 위시한 국가 지도자들의 한심한 작태에 놀랄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왜 평상시에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지 못 했는가?  대신들을 비롯한 상류층 정치인들만 호위호식하며 정쟁만 일삼고 있었을 것 아닌가? 막상 위기가 닦치자 황급히 이런 조그만 성 안으로 대피하고, 항쟁을 할 것인지 아니면 협상을 할 것인지 논란에 논란을 거듭한 왕과 조정 대신들에게 어떤 분모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국가적 위기상황을 외교적 수단으로 미리 해결하지 못한 국제정세에 어두운 국가 지도자들에 분노가 치미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지만 외교는 국방의 힘을 전제로 한 것이어야 한다. 힘이 없으면 적의 밥이 될 수 밖에 없다. 이런 일은 언제나 다시 발생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도 국방을 튼튼히 하고,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야 국가적 전쟁 재난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듣기 좋은 미사여구로 평화만 외친다고 해결 될 일이 아니다. 언제 적의 발톱 앞에 쓰러져 밥이 될지 모를 일이다. 인류사애 찬연한 경제 기적은 물거품 처럼 사라지고 저 남미의 잉카문명 처럼 역사 속에서 회자되는 그런 일이 벌어질 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은 개인이나 국가나 한번 무너지면 다시 일어서기 어려운 시대가 되어버렸다. 

 

 산 행:  걸음수 8,353steps,  거리 5.85 km,  소모열량 320 Kcal, 소요시간 01:22 hrs (4:50-6:32, pm). 

○ 코 스: 8호선 산성역(2번출입구) - '산성역.포레스티아동문' 정류소 - ( 9번 버스 탑승) - '남문터널' 정류소하차  - 남한산성 지화문(남문) - 영춘정- 수어장대 (청량산 497.1m) - 남한산성 우익문(서문) - 남한산성 전승문(북분) - 침괘정 - 산성로터리( 9번 버스 탑승) - '민속마을 닭죽촌' 정류소 하차 - 창성중. 한국폴리텍대학 성남캠퍼스 - 경기시민예술학교 - 산성역 》.

 

 

 남한산성(南漢山城): 조선시대(1392~1910)에 유사시를 대비하여 임시 수도로서 역할을 담당하도록 경기도(京畿道) 광주시(廣州市)·성남시(城南市)·하남시(河南市) 일원의 해발 480m가 넘는 험준한 지형을 따라 건설된 산성이다. 남한산성의 초기 유적에는 7세기의 것들도 있지만 이후 수차례 축성되었다. 후금(後金)의 위협을 받고 이괄(李适)의 난을 겪은 인조는 1624년 총융사 이서(李曙, 1580∼1637)에게 산성의 축성을 명령하여, 2년 뒤에 둘레 6,297보, 여장(女墻) 1,897개, 옹성(甕城) 3개, 성랑(城廊) 115개, 문 4곳, 암문(暗門) 16곳, 우물 80곳, 샘 45곳 등을 설치하고서 광주읍의 치소(治所)를 산성 안으로 옮겼다. 축성 공사에는 각성(覺性)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삼아 전국 8도의 승군을 동원하였는데, 승군의 사역과 보호를 위하여 현재 남아 있는 장경사(長慶寺)를 비롯한 7곳의 사찰을 새로 건립하기도 하였다. 남한산성은 건립된 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성관 안에는 많은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둘레의 길이는 약 8㎞ 정도이며, 면적도  약 528,460㎡ 에 달한다. 2014.6.22 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남한산성 문화재 남한산성, 남한산성 행궁, 수어장대, 숭렬전, 청량당, 현절사, 침괘정, 연무관, 지수당, 남한산성 사찰 ( 망월사터, 장경사, 개원사터, 장경사 동종)

 

 

산성역 2번 출구 앞 정소 가는 길...이곳에서 남한산성 가는  90번 버스를 20분 정도 기다리다 탄다. 왠지 오늘은 버스 간격이 긴 것 같다.  
길 건너 포레스티아 아파트....옛 5층의 산성주공아파트를 재건축하였다. 
성남시 은행2동 남한산성공원 입구에서 바라보는 남한산성 능선....여기에서 공원의 계곡을 타고 오르면 남문이 나온다.
'남문터널' 버스 정류소 하자.
남문터널
비석의 숲

남한산성비석군

                                             (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114-1번지 소재 )

성 내에는 18~20세기 무렵에 설치된 39여기의 비석이 있다. 이 중 본 부지(남문진입로)내로 남한산성 행궁 복원 사업에 따라 이전된 11기와 현 위치에 보존되어 있던 19기를 포함한 총30기의 비석을 한곳으로 모아 남한산성을 방문하는 탐방객들에게 옛 선현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후대에 소중히 전승될 수 있도록 비석을 한 곳으로 옮겨 정비해 놓았다. 이곳에 있는 비석은 역대 광주유수(廣州留守) 및 수어사(守禦使), 부윤(府尹), 군수(郡守)의 비로서 재직시 백성들을 정성스레 돌봐 치정을 잘 했거나 사랑을 베풀어 선정을 한 분들에게 백성들이 그들을 추념하여 새운 비로서 광주유수.영의정을 지낸 심상규(沈象奎)의 비를 포함 30기의 비석이 이곳에 위치하고 있다.  

 

 

간이 판매대 & '태원' 이란 간판이 붙어있는 개인 건물.

세계유산 남한산성 종합안내판


1코스: 산성로터리- 북문- 서문- 수어장대- 영춘정- 남문- 산성로토리 ( 3.8km, 1시간 20분 )
2코스: 산성로터리- 영월정- 숭렬전- 수어장대- 서문- 국청사- 산성로토리 ( 2.9km, 1시간 )
3코스: 남한산성 역사관주차장- 현절사- 벌봉- 장경사- 망월사- 지수당-  남한산성 역사관주차장 ( 5.7km, 2시간 )
4코스: 산성로터리- 남문- 남장대터- 동문- 지수당- 개원사- 산성로토리 ( 3.8km, 1시간 20분 )
5코스: 남한산성 역사관주차장- 동문- 동장대터- 북문- 서문- 수어장대- 영춘정- 남문- 동문 ( 7.7km, 3시간 20분 )

 

남한산성 (사적 제57호):

 

1 남한산성 행궁, 2 수어장대, 3 숭렬전, 4 청량당, 5 현절사, 6 침괘정, 7 연무관, 8 지수당, 9 장경사, 10 망월사, 11 개원사, 12 제1남옹성, 13 제2남옹성, 14 남문(지회문), 15 서문 (우익문), 16 연주봉옹성, 17 북문(전승문), 18 동문(좌익문), 19 장경사신지옹성, 20 동장대터, 21 봉암성, 22 벌봉 

 

남한산성은 조선시대 뿐 아니라 삼국시대부터 천연의 요새로 중요한 역할을 하던 곳이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의 욍성이었다는 기록이 있고, 나당전쟁이 한창이던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한산주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기록도 있다. 고려시대에는 몽고의 침입을 격퇴한 곳이기도 하고 일제강점기에는 항일운동의  거점이 되기고 한 곳이다. 그러나 남한산성은 주로 병자호란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조선 인조 14년(1636)에 청나라가 침략해 오자 왕은 이곳으로 피신하여 항전하였으나, 왕자들이 피신해 있던 강화도가 함락되고 패색이 짙어지자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 나가 치욕적인 항복을 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남한산성은 패배를 알지 못하는 곳이다. 성의 외부는 급경사를 이루어 적의 접근이 어렵고, 내부는 경사가 완만하여 넓은 경작지와 물을 갖춘 천혜의 전략적 요충이기 때문에, 병자호란 당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청군에 함락당하지 않고 47일간이나 항전할 수 있었던 곳이다. 이처럼 오랜 기간동안 우여곡절을 가진 성의 역사처럼 성곽의 형태 또한 단순하지 않아서 하나의 폐곡선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본성, 봉암성, 한봉성, 신남성 5개 옹성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조이다. 인조 4년(1636) 에 중앙부의 가장 큰 폐곡선인 본성이 완성되었고, 병자호란 이후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동쪽의 봉암성, 한봉성 등을 비롯하여 여러차례 증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남한산성 지화문 (남문)

 

<- 1.5km 수어장대, <- 2.1km 우익문(서문), -> 종로 0.7km. 

남문: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었는데, 남문은 남한산성에 있는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으로 현재에도 출입이 가장 많은 곳이다. 선조때 기록을 보면 동문. 남문. 수구문의 세문을 수축하였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남문은 인조2년(1624) 수축되기 이전 부터 이미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남문은 정조3년(1779) 성곽을 보수할 때 개축하여 지화문(至和門)으로 이름이 붙여졌으며 4대문 중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는 문이다.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처음 남한산성으로 들어올 때 바로 이 문을 통해 들어왔다.

 

 

지하문(남문) 밖의 보호수 느티나무 ........500년 수령, 둘레 160cm, 수고 16m

 

지화문 

 

지하문(남문):  정조3년 성곽을 보수 할 때 '지하문'이라 칭하였고 남한산성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이다.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다. 또한 현재는 성남으로 통하는 관문역할을 하고 있으며, 성문앞에 식재된 (350년 수령, 성남시 보호수) 느티나무와 함께 문화와 역사가 살아숨쉬는 시민의 역사터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 - 성남시.

 

   

수어장대(청량산)

검단산(536.4m) 방향

중간 멀리 통신탑 있는 봉우리, 남한산성 최고봉 검단산(536.1m)

 

검단산 아래 성남시 중원구 금광동, 은행동 방향
영춘정
잠실 롯데월드타워 방향

 

암문

 

수어장대:

청량당(淸凉堂)...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호):

 

 청량당: 청량당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 사당은 남한산성 쌓을 때 동남측 축성의 책임자였던 이회 장군과 그의 부인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이회는 공사비를 횡령했다는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고 이 소식을 들은 부인 송씨는 한강에 몸을 던져 따라죽었다. 이회는 죽을 때 자신의 죄가 없으면 매 한마리가 날아올 것이라 에언 했는데 과연 매가 날아와 그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한다. 후에 누명이 벗겨지고 그가 맡은 공사가 가장 잘된 것으로 알려지자 사당을 지어 초상을 안치하고 넋을 기렸다. 원래의 청량당은 6.25 전쟁때 소실 되어 다시지었다. 서장대가 있는 산 이름이 청량산이므로 청량당이라 이름 지었다.  

 

 

수어장대

守禦將臺_수어장대

 

임금을 보위하는 장군이 지휘하는 높은 장대, 굳건한 의자는 당당한데, 참혹한 역사를 보면 안타깝다는 생각만 든다. 10만여의 청군의 남한산성 포위 속에서 1만3000명 정도의 조선의 병력으로, 한달 정도의 비축 군량만으로 어떻게 이를 견뎌내겠는가? 결국 인조는 송파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머리를 땅에 아홉번 찍으면서 까지 굴욕의 항복의식을 가져야 했다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국제정세에 어두웠고, 급격한 친명배금 정책을 변경시행이라는 대외정책의 실수가 초래한 결과이다. 신하들은 이러한 절체절명의 시간 속에서도 주화론이니 척화론이니 하는 갑론을박 싸움이나 하고 있었으니.....죄없는 백성들만 굶주림과  추위에 떨고...나라가 잘 못 되면 백성만 죽고 고난을 당한다. 결국 백성들 수십만명이 청에 끌려가는 고통을 당하였다. 한 나라의 지도자들의 지혜와 영도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는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 被擄子女望見, 號哭皆曰: "吾君、吾君, 捨我而去乎?" 挾路啼號者, 以萬數._( 피노자녀망견. 호곡개왈:  "오군, 오군, 사아이호?" 협로제호자, 이만수) ......" 

사로잡힌 자녀들이 바라보고 울부짖으며 모두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하였는데, 길을 끼고 울며 부르짖는 자가 만 명을 헤아렸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30일.

 

 

무망루

 

매바위, 그리고 '수어서대" 암각글씨...청량당에 위폐가 모셔진 남한산성 공사 책임자 중 한사람이었던 이회가 공사비 횡령에 연류되어 억울하게 처단되자 죽 전에 자신의 죄가 없다면 매가 날아와 이 바위에 앉을 것이라고 유언을 했는데, 그 후 과연 매가 날아와 매바위에 구슬피 울었다고 하며, 다시 확인해 보니 죄가 없음이 드러났으며, 오히려 다른 구간보다 성이 더 견고히 축성되었음이 밝혀졌다. 예나 지금이나 모함은 한 인간을 파멸로 이끌기도 한다.

 

"이대통령각하행사기념식수"

무망루


조선 영조27년(1751) 광주 유수 이기진이 증축한 수어장대 2층의 내편(內篇) 문루로서 그 편액(扁額)이 2층 누각에 있어 1989년 전각을 건립하고 이 안에 현판을 새로 설치 일반인이 볼 수 있게 하였다. 무망루는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혔다가 귀국 후 북벌을 꾀하다가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이믐지은 것이다.

 

 

청량산 정상 (497.1m) & 수어장대

수어장대(守禦將臺) 와 청량당(淸凉堂)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 제3호):

수어장대는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목적으로 지은 누각이다. 남한산ㅅㅇ에 있던 5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있으며, 성 안에 남아있는 건물중 화려하고 웅장하다...남한산성 축성때 단층으로 지어 서장대라 불리던 것을 영조 27년 유수 이기진이 왕명을 받아 이층으로 다시 짓고 '수어장대'라 편액을 달았다...수어장대 2층 내부에는 '무망루'라는 편액이 달려 있었는데,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다가 귀국하여 북벌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지은 것이다. 현재 무망루 판액은 수어장대 오른편에 보호각을 지어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보관하고 있다.

청량당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 사당은 남한산성 쌓을 때 동남측 축성의 책임자였던 이회 장군과 그의 부인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이회는 공사비를 횡령했다는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고 이 소식을 들은 부인 송씨는 한강에 몸을 던져 따라죽었다. 이회는 죽을 때 자신의 죄가 없으면 매 한마리가 날아올 것이라 에언 했는데 과연 매가 날아와 그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한다. 후에 누명이 벗겨지고 그가 맡은 공사가 가장 잘된 것으로 알려지자 사당을 지어 초상을 안치하고 넋을 기렸다. 원래의 청량당은 6.25 전쟁때 소실 되어 다시지었다. 서장대가 있는 산 이름이 청량산이므로 청량당이라 이름 지었다.  



서문 (우익문)

 

<- 0.6km 수어장대, ↙ 0.1km 국청사, ↑ 학암동 1.4km, -> 전승문(북문) 1.0km 

 

 

○ 서문 (우익문) :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서문은 4개의 대문중  규모가 가장 작고, 산성을 처음 쌓았을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 3년(1799)에  다른 문과 같이 개축하며 우익문(右翼門)이라 칭하였다. 행궁을 중심으로 국왕은 남쪽을 바라보며 국정을 살피니, 서문이 행궁의 유측에 있어 우익문이라 하였다. 서문은 인조15년(1637) 1월 30일 왕이 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항복하기 위해 남한산성을 나간 바로 그 문이다. 남한산성의 서쪽 사면은 경사가 급해 물자수송이 어렵지만 광나루나 송파나루 방면에서 산성으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서문 밖
서문 밖 전망대
송파....위례신도시 일대
잠실 방향...롯데월드타워
서울 마천동에서 오르는 산길이 있는 능선이 보인다.  
통제안내판..출입 금지
전승문(북문) 가는길
하남시 고골방향
하남 고골...앞으로 교산신도시가 들어설 예정이다.
고골 & 검암산
청량산 방향
보수 중인 전승문(북문)
청와정
석산정

 

coffee & desert
남한산성 종로거리

남한산성 역사 테마길

장수의 길 1코스/ 국왕의 길 2코스/ 승병의 길 3코스/ 옹성의 길 4코스/ 산성의 길 5코스

 

침괘정

 

국왕의 길 |  2코스

 

산성역 가는 9번 버스 명동로터리 정류장
성남 중원구 단대동 남한산성 입구 '닭죽촌 정류소' 하차....9번은 이곳을 좌회전 하여 성남 중원구 은행동 남한산성공원 입구를 돌아서 산성역으로 가기 때문에 여기에서 하차하여 산성역을 걸어가보려 하였다. <닭죽촌 정류소 ->  산성역 사거리> 도보 11분, 755m 거리임. 물론 도로 건너편의 정류소에서 다른 버스로 환승하여 산성역 정류소로 가면 더욱 편할 것입니다. 
닭죽촌 입구 '가야식당'
정겨운 개나리
산성역 가는 길......너무 복잡한, 변전시설
창성중학교

 

. 한국폴리텍대학 성남캠퍼스 
 경기시민예술학교
앗, 산성역 사거리
산성 사철탕.삼계탕....이 집엔 삼겹살, 한우고기 등 음식 먹으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수육(1인분 200g) 24,000, 무침(1인분 200g) 25,000, 전골(2인분 기준) 36,000 , 특탕 15,000, 탕 13,000, 한방삼계탕 13,000,  생삼겹(200g) 13,000, 왕갈비 (200g) 13,000  등등
보신탕 (13,000)...정갈하고 맛이 아주 좋았습니다. 구태여 보신탕 먹으러  모란시장으로 갈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오늘 아주 좋은 맛집을 발견하였습니다. 삼겹살이나 왕갈비,  소고기 등심 등도 많이 먹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