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 ( 2022.07.07 )
오늘은 오후에 폭우가 집중적으로 쏟아진다는 기상 예보만 믿고 집안에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OBS 경인TV에서 < 인천, 어디까지 가봤니?> 란 프로그램을 시청하다 갑자기 인천을 가보고 싶었습니다. 인천은 내가 젊은 날 잠깐 살았던 곳이기도 하여 제2의 고향같이 생각되는 곳입니다. 일단 늦었지만 출발하여 <인천역-> 월미도-> 영종도-> 영종역-> 집> 코스로 생각하고 나섰으나, 서울에서 인천역까지 전철 소요시간이 2시간이 넘는 데다 인천역에 3시가 넘어 도착하면 도저히 무리다는 생각에 행선지를 남한산성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성남 산성역에 내려 9번 버스를 타고 산성터널을 지나자 마자 남문정류소에 내려 등산을 시작하였습니다. 아, 그런데 비가 오기 시작합니다. 예보가 맞는 것 같습니다. 이걸 어쩌나? 어쨌든 남문으로 가보고 다시 집으로 갈까 생각을 정리해 보기로 하였습니다. 남문 근처 매점도 오늘은 쉬고 있습니다. 남문을 통과하여 남한산성을 구경하고 있는데, 우산이 있으므로 운동화 차림이지만 남문에서 수어장대를 거쳐 성곽 둘레길을 걸어보려 했습니다. 결국 수어장대 까지 1/3쯤 갔을 떄 비는 그쳤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비는 오지 않고 오늘 남한산성 산책을 잘 하고 돌아왔습니다. 남한산성 산책은 5개의 남한산성 역사 테마길을 다섯번에 걸쳐 무리하지 않고 산책하는 것이 아주 좋은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나는 장수의 길 제1코스를 시계 방향으로 걸은 셈입니다.
▶남한산성(南漢山城): 조선시대(1392~1910)에 유사시를 대비하여 임시 수도로서 역할을 담당하도록 경기도(京畿道) 광주시(廣州市)·성남시(城南市)·하남시(河南市) 일원의 해발 480m가 넘는 험준한 지형을 따라 건설된 산성이다. 남한산성의 초기 유적에는 7세기의 것들도 있지만 이후 수차례 축성되었다. 후금(後金)의 위협을 받고 이괄(李适)의 난을 겪은 인조는 1624년 총융사 이서(李曙, 1580∼1637)에게 산성의 축성을 명령하여, 2년 뒤에 둘레 6,297보, 여장(女墻) 1,897개, 옹성(甕城) 3개, 성랑(城廊) 115개, 문 4곳, 암문(暗門) 16곳, 우물 80곳, 샘 45곳 등을 설치하고서 광주읍의 치소(治所)를 산성 안으로 옮겼다. 축성 공사에는 각성(覺性)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삼아 전국 8도의 승군을 동원하였는데, 승군의 사역과 보호를 위하여 현재 남아 있는 장경사(長慶寺)를 비롯한 7곳의 사찰을 새로 건립하기도 하였다. 남한산성은 건립된 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성관 안에는 많은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둘레 길이는 약 8㎞ 정도이며, 면적도 약 528,460㎡ 에 달한다. 2014.6.22 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남한산성 문화재: 남한산성, 남한산성 행궁, 수어장대, 숭렬전, 청량당, 현절사, 침괘정, 연무관, 지수당, 남한산성 사찰 ( 망월사터, 장경사, 개원사터, 장경사 동종)
남한산성 탐방안내도
▶ 1코스 (거리 3.8Km / 소요시간 1시간 20분):
산성로터리 – 북문(0.4km) – 서문(1.1km) – 수어장대(0.6km) – 영춘정(0.3km) – 남문(0.7km) – 산성로터리(0.7km)
▶ 2코스 (거리 : 2.9km / 소요시간 : 60분):
산성로터리 – 영월정(0.4km) – 숭렬전(0.2km) – 서문(0.7km) – 수어장대(0.6km) – 산성로터리(0.9km)
▶ 3코스 (거리 : 5.7km / 소요시간 : 2시간):
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 현절사(0.1km) – 벌봉(1.8km) – 장경사(1.5km) – 망월사(1.1km) – 동문(1.0km) – 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 4코스 (거리 : 3.8km / 소요시간 : 1시간 20분):
산성로터리 – 남문(0.7km) – 남장대터(0.6km) – 동문(1.1km) – 지수당(0.5km) – 개원사(0.3km) – 산성로터리(0.6km)
▶ 5코스 (거리 : 7.7km / 소요시간 : 3시간 20분):
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 동문(0.6km) – 동장대터(1.1km) – 북문(1.6km) – 서문(1.1km) – 수어장대(0.6km) – 영춘정(0.3km) – 남문(0.7km) – 동문(1.7km) – 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남한산성 소감
남한산성 당도하니 산천은 의구(依舊)한데
옛 사람 어디가고 산성(山城)만 남았는가?
근엄하게 보이는 행궁을 찾아보니
모든 것이 한 때라는 것을 알겠다.
병자호란, 20만 적군,
겹겹이 둘러싼 오랑케들 앞에서
중과부적(衆寡不敵)
통탄하던 산성 안 사람들...
그들의 흔적도 어디에 없구나.
3000명의 군사, 한달치 양식...
그것 가지고 어떻게 해 볼 것인가?
비극적 패전의 결과는 비참한데,
머나먼 북방 오랑케 땅에 끌려가서
종살이 첩살이 죽임을 당한 선조들
그 한(恨)을 어디에다 두고 갔을까?
치욕(恥辱)의 역사를 지켜봤을 소나무들,
이 겨울에도 푸르게 서 있구나.
나라가 선다는 것 그리 쉬운 일인가?
흥망성쇠(興亡盛衰)의 반복은 세계사가 보여주는데
이 땅에서 삶을 마친 가난했던 우리 선조들
지금 잘 살고 있는 후손들을 바라본다면
얼마나 감격에 젖을 것인가?
그런데,
작금(昨今)의 우리 사정은 침울하고.
역사의 현장 남한산성에 와서
느끼는 것은 많은데 할 말을 잊었다.
그저 후손들이 정신차리고
나라가 잘 되기만을 빌어 볼 뿐이다.
산천은 조용하고 무심한 것 같은데
잔디밭 어린이들의 웃음 소리가
내 등뒤에서 자꾸 나를 따라온다.
- ( 2017.03.01 )
▶ 산 책 : 걸음수 7,601 steps, 거리 5.0 km, 소모열량 282 kcal, 소요시간 01:20 hrs, 속도 3.7 km/h, 기온 31℃.
▶ 코 스 : 남한산성 남문 (지화문) - 수어장대 (청량산, 497.1m) - 서문 (우익문) - 북문 (전승문) - (산성 마을) 종로 로터리.
산성역 2번 출구 앞 ' 산성역.포레스티아 동문' 버스 정류소:
9번 버스: < 산성역 - 남한산성입구- 남문터널 - 중앙주차장 (회차) >, 배차간격 10~20분.
9-1번 버스 (휴일): < 산성역 - 남문터널 - 남한산성(종점) >, 배차간격: 7~10분.
산성터널 앞
↑ 남문 가는 길, 비석 숲
남한산성비석군
(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114-1번지 소재 )
성 내에는 18~20세기 무렵에 설치된 39여기의 비석이 있다. 이 중 본 부지(남문진입로)내로 남한산성 행궁 복원 사업에 따라 이전된 11기와 현 위치에 보존되어 있던 19기를 포함한 총30기의 비석을 한곳으로 모아 남한산성을 방문하는 탐방객들에게 옛 선현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후대에 소중히 전승될 수 있도록 비석을 한 곳으로 옮겨 정비해 놓았다. 이곳에 있는 비석은 역대 광주유수(廣州留守) 및 수어사(守禦使), 부윤(府尹), 군수(郡守)의 비로서 재직시 백성들을 정성스레 돌봐 치정을 잘 했거나 사랑을 베풀어 선정을 한 분들에게 백성들이 그들을 추념하여 새운 비로서 광주유수.영의정을 지낸 심상규(沈象奎)의 비를 포함 30기의 비석이 이곳에 위치하고 있다.
많은 비를 예상하여 매점도 쉬는구나!
세계유산 남한산성 종합안내판
1코스: 산성로터리- 북문- 서문- 수어장대- 영춘정- 남문- 산성로타리 ( 3.8km, 1시간 20분 )
2코스: 산성로터리- 영월정- 숭렬전- 수어장대- 서문- 국청사- 산성로타리 ( 2.9km, 1시간 )
3코스: 남한산성 역사관주차장- 현절사- 벌봉- 장경사- 망월사- 지수당- 남한산성 역사관주차장 ( 5.7km, 2시간 )
4코스: 산성로터리- 남문- 남장대터- 동문- 지수당- 개원사- 산성로타리 ( 3.8km, 1시간 20분 )
5코스: 남한산성 역사관주차장- 동문- 동장대터- 북문- 서문- 수어장대- 영춘정- 남문- 동문 ( 7.7km, 3시간 20분 )
지화문 (남문)
남한산성 성곽 외부
보호수 느티나무
수종: 느티나무 (약 360년), 지정일자: 2006.6.20
수고: 14~16m, 나무둘레 0.9~1.37m
소재지: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은행동 산 132-2
연혁 및 전설: 남한산성 성곽은 인조 4년 (1626년)에 준공되었으며 느티나무(보호수)는 당시 성곽사면 토양유실 방지 및 차폐의 목적으로 식재된 것으로 추정된다. 남한산성 순환도로 터널이 개통 된 후 폐도 부지가 된 남문 앞 느티나무 주변을 2006년 재정비 및 느티나무 생육환경 개선 후 4주를 보호수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 성남시.
지화문
지화문 (남문)
정조3년 성곽을 보수 할 때 '지하문'이라 칭하였고 남한산성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이다.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다. 또한 현재는 성남으로 통하는 관문역할을 하고 있으며, 성문앞에 식재된 (350년 수령, 성남시 보호수) 느티나무와 함께 문화와 역사가 살아숨쉬는 시민의 역사터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 - 성남시.
남문 (지화문)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었는데, 남문은 남한산성에 있는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으로 현재에도 출입이 가장 많은 곳이다. 선조때 기록을 보면 동문. 남문. 수구문의 세문을 수축하였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남문은 인조2년(1624) 수축되기 이전 부터 이미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남문은 정조3년(1779) 성곽을 보수할 때 개축하여 지화문(至和門)으로 이름이 붙여졌으며 4대문 중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는 문이다.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처음 남한산성으로 들어올 때 바로 이 문을 통해 들어왔다.
장수의 길 1코스:
1코스 장수의 길: 1코스 장수의 길은 세계유산 남한산성이 가지고 있는 방어요새의 특징들을 살펴볼 수 있는 탐방코스입니다. 방어시설의 중심이었던 전승문(북문), 우익문(서문), 지화문(남문)을 거닐며 전쟁시 비상 연락 및 적정 탐색을 위한 암문과 지휘를 했던 수어장대를 볼 수 있습니다. 장수의 길에서 세계유산 남한산성의 굳건한 모습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남문 앞 이정표:
↖ 1.5km 수어장대, ↖ 2.1km 우익문(서문), -> 종로 0.7km
수어장대 가는 길
칼 쓴 십자가
" 천주교 비극의 역사, 남한산성 "
남한산성 성지성당 내부에는 순교자들의 옥에 갇혀있을 때 쓰고 있었던 칼이 채워져 있는 독특한 십자가상이 있습니다. 천주교 탄압의 본격적인 서막은 신유박해(1801년) 부터였는데요. 천주교에 대해 큰 반감이 없었던 정조가 승하하자 정순황후가 가혹한 탄압을 시작한 것이죠. 박해의 진짜 이유는 정조시기에 세력을 키운 남인을 숙청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이 신유박해 때 남한산성에서 첫 순교자가 발생하게 됩니다. 천주교 신자가 광주 및 인근 지역에서 잡히면 남한산성 포도청으로 이송되어 감옥에 갇혔습니다. 순교자들은 심문을 당하다 결국은 감옥에서 순교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교살형이나 교수형이 대부분 감옥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감옥이 곧 순교터가 되었습니다. 감옥에서 죽거나 고문 끝에 죽은 순교자들은 동문 밖으로 시신을 버렸는데 그 장소가 수구문이었습니다. 시체가 너무 많이 나가고 피가 물처럼 흘러 수구문은 시구문으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송파, 강남 방향
왼쪽 청계산, 중간 뾰족한 대모산, 구룡산, 멀리 관악산
보수 중인 성곽
이 성곽 계단길은 공사중으로 진행 불가. 다시 돌아 나가 지그재그 산책로로 올라감.
<- 지화문 1.3km, -> 수어장대 230m
제6암문(서암문)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의 비밀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도 설치하지 않았다. 이 암문은 성벽의 흐름 방향과 달리 입구가 북서쪽을 향하고 있어 외부에서 쉽게 관측되지 않도록 하였다. 또한 북동쪽의 성벽을 돌출하여 암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원성에 설치된 12개 암문의 외측 개구부는 대부분 홍예식이지만 제2암문과 더불어 이 암문의 개구부는 평거식이다. 인조 15년(1637) 1월 23일, 한밤중에 습격해 온 청병을 크게 물리친 곳이라 하여 이 암문 부근을 '서암문 파적지'라 부른다.
수어장대 맞은 편의 쉼터
잠실 롯데월드타워, & 아차산, 용마산
수어장대
청량당(淸凉堂)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호):
청량당: 청량당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 사당은 남한산성 쌓을 때 동남측 축성의 책임자였던 이회 장군과 그의 부인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이회는 공사비를 횡령했다는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고 이 소식을 들은 부인 송씨는 한강에 몸을 던져 따라죽었다. 이회는 죽을 때 자신의 죄가 없으면 매 한마리가 날아올 것이라 에언 했는데 과연 매가 날아와 그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한다. 후에 누명이 벗겨지고 그가 맡은 공사가 가장 잘된 것으로 알려지자 사당을 지어 초상을 안치하고 넋을 기렸다. 원래의 청량당은 6.25 전쟁때 소실 되어 다시지었다. 서장대가 있는 산 이름이 청량산이므로 청량당이라 이름 지었다.
수어장대
사적 제57호 남한산성
남한산성 수어장대: 보물
장대란 지휘와 관측을 위해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누각 건물로 남한산성에는 5개의 장대가 있었다. 수어장대는 남한산성 서쪽에 있어 본래 '서장대' 라고 불렸다. 병자호란 당시에는 단층 누각이었고, 수어청 우영장이 서장대에 머물며 군사를 지휘하였다. 이후 영조 27년(1751)에 유수 이기진이 복층으로 중건하고, '수어장대'라는 편액을 달았다. 지금의 수어장대 현판은 헌종 2년(1836)에 유수 박기수가 수어장대를 증축하였는데, 그 형인 박주수가 쓴 것이다. 수어장대에서는 수어사가 수어청의 군사를 지휘하였는데, 정2품 상사에 해당하였다. 수어청은 한양을 수비하는 5군영의 하나로, 본래 한성부 북부 진장방 (오늘의 서울 종로구 삼청동, 팔판동,화동 일부)에 그 본청이 있고, 광주부윤을 부사로 삼아 남한산성을 관할케 하였다. 그러다 운영의 효율성을 도모하고자 정조19년에 본청을 완전히 남한산성으로 옮기고, 광주유수가 수어사를 겸하게 하였다. 남한산성 수어장대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로 관리되어 오다 2021년에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승격되었다. 또한, 수어장대는 세계문화유산 남한산성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 중 하나인 군사 경관 (장대)에 해당한다. 수어장대는 여러 문헌에 등장하는데, 그중 조선 숙종의 정비인 인경왕후의 아버지 김만기는 <서장대기>에서 아래와 같이 언급하였다.
" 비록 한강의 흐름을 기울여도 그날의 비린내는 씻지 못할 것이다. 만약에 혹시라도 풍경이나 구경하고 유람이나 탐하면서 다시는 감개하고 탄식하는 마음이 없다고 하면 이는 이른바 그 양심을 잃은 자이다. "
守禦將臺_수어장대
수어장대는 임금을 보위하는 장군이 지휘하는 높은 장대를 말한다. 병자호란 때 10만여 청군의 남한산성 포위 속에서 1만3000명 정도의 조선의 병력으로, 한달 정도의 비축 군량만으로 어떻게 이를 견뎌내겠는가? 결국 인조는 전쟁 발발 후 2개월도 넘기지 못하고 추운 엄동설한에 말도 타지 못한 채 걸어서 송파 삼전도에 내려가 청 태종에게 머리를 땅에 아홉번 찍으면서 까지 굴욕의 三拜九叩頭禮(삼배구고두례)의 항복의식을 가져야 했다. 국제정세에 어두운 조정의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의 실수가 초래한 결과이다. 신하들은 이러한 절체절명의 시간 속에서도 주화론(主和論) (김명길) 과 척화론(斥和論) (김상헌) 으로 갈려 갑론을박 싸움이나 하고 있었다. 그 사이 죄없는 백성들만 굶주림과 추위에 떨고, 백성들 수십만명이 청에 끌려가는 고통을 당하였다. 나라가 잘 못 되면 백성만 죽고 고난을 당한다. 결국 한 나라의 지도자들의 지혜와 영도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는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1637년 (인조15년) 2월 24일 인조와 대신들이 송파 삼전도에 내려가서 홍타이지에게 항복하며, 삼배구고두례를 행하고, 의식이 끝난 후 창경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포로로 끌려가는 수많은 백성들이 울부짖는데 그 수가 만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 被擄子女望見, 號哭皆曰: "吾君、吾君, 捨我而去乎?" 挾路啼號者, 以萬數.
( 피노자녀망견. 호곡개왈: "오군, 오군, 사아이호?" 협로제호자, 이만수.) "
사로잡힌 자녀들이 바라보고 울부짖으며 모두 말하기를,
“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하였는데,
길을 끼고 울며 부르짖는 자가 만 명을 헤아렸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30일.
※ 병자호란 주요 연표:
- 1598년 (선조 31년): 임진왜란 끝남.
- 1608년 (선조 41년): 광해군 즉위.
- 1616년 (광해군 9년): 누루하치 후금 건국.
- 1618년 (광해군 11년): 명과 후금의 전쟁, 명에 원병 파견함.
- 1619년 (광해군 12년): 강홍립 후금에 투항. -> (중립외교).
- 1622년 (광해군 15년): 명나라 장수 모문룡 가도에 주둔.
- 1623년 (광해군 16년): 인조반정으로 인조 즉위. -> (친명배금정책)
- 1624년 (인조 2년): 이괄의 난.
- 1627년 (인조 5년): 정묘호란 발생.
- 1635년 (인조 13년): 후금 내몽고 점령.
- 1636년 (인조 14년): 후금 청으로 국호 변경하고, 조선에 군신관계 요구 (척화론과 주화론 대립). 12월 28일 병자호란 발생. 남한산성 전투.
- 1637년 (인조 15년): 2월 24일 인조 송파 삼전도에서 항복. 청과 사대관계 맺음.
- 1644년 (인조 21년): 명나라 멸망. 청 중국 통일.
매바위, 그리고 '수어서대" 암각글씨.
청량당에 위폐가 모셔진 남한산성 공사 책임자 중 한사람이었던 이회가 공사비 횡령에 연류되어 억울하게 처단되자 죽 전에 자신의 죄가 없다면 매가 날아와 이 바위에 앉을 것이라고 유언을 했는데, 그 후 과연 매가 날아와 매바위에 구슬피 울었다고 하며, 다시 확인해 보니 죄가 없음이 드러났으며, 오히려 다른 구간보다 성이 더 견고히 축성되었음이 밝혀졌다. 예나 지금이나 모함은 한 인간을 파멸로 이끌기도 한다.
무망루
조선 영조27년(1751) 광주 유수 이기진이 증축한 수어장대 2층의 내편(內篇) 문루로서 그 편액(扁額)이 2층 누각에 있어 1989년 전각을 건립하고 이 안에 현판을 새로 설치 일반인이 볼 수 있게 하였다. 무망루는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혔다가 귀국 후 북벌을 꾀하다가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이믐지은 것이다.
수어장대 동영상
청량산 (493.1m, 수어장대) 에서 바라본 벌봉 방향
벌봉(512m): 그 곳의 바위가 벌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벌바위봉이라고도 부른다. 여기까지 성(봉암성)이 둘러쳐져 있지만 여기의 석성은 병자호란 때는 없었다. 뒤에(조선 숙종조) 광주유수 윤지선의 주장으로 축조된 것이다. 벌봉은 한쪽에서 보면 크나큰 두 쪽의 바위로 보이는 우뚝 솟은 암봉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병자호란 때 청나라 태종과 그 군사들이 이 벌봉에서 남한산성 안에 있는 우리편 군사들의 상황을 살폈다 한다. 벌봉이 당시의 산성에서 가장 높은 수어장대보다 높기 때문에 산성 안을 넘겨다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청군들이 이 벌봉에 머무를 때 새처럼 큰 벌들이 청군들을 괴롭혔다는 이야기도 있다. 벌봉은 남한산성에서 흔하지 않은 암봉으로, 바위틈에 굴도 있어서 기도터로도 이용되고 있다.
남한산성 (사적 제57호):
1 남한산성 행궁, 2 수어장대, 3 숭렬전, 4 청량당, 5 현절사, 6 침괘정, 7 연무관, 8 지수당, 9 장경사, 10 망월사, 11 개원사, 12 제1남옹성, 13 제2남옹성, 14 남문(지회문), 15 서문 (우익문), 16 연주봉옹성, 17 북문(전승문), 18 동문(좌익문), 19 장경사신지옹성, 20 동장대터, 21 봉암성, 22 벌봉
남한산성은 조선시대 뿐 아니라 삼국시대부터 천연의 요새로 중요한 역할을 하던 곳이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의 욍성이었다는 기록이 있고, 나당전쟁이 한창이던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한산주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기록도 있다. 고려시대에는 몽고의 침입을 격퇴한 곳이기도 하고 일제강점기에는 항일운동의 거점이 되기고 한 곳이다. 그러나 남한산성은 주로 병자호란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조선 인조 14년(1636)에 청나라가 침략해 오자 왕은 이곳으로 피신하여 항전하였으나, 왕자들이 피신해 있던 강화도가 함락되고 패색이 짙어지자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 나가 치욕적인 항복을 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남한산성은 패배를 알지 못하는 곳이다. 성의 외부는 급경사를 이루어 적의 접근이 어렵고, 내부는 경사가 완만하여 넓은 경작지와 물을 갖춘 천혜의 전략적 요충이기 때문에, 병자호란 당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청군에 함락당하지 않고 47일간이나 항전할 수 있었던 곳이다. 이처럼 오랜 기간동안 우여곡절을 가진 성의 역사처럼 성곽의 형태 또한 단순하지 않아서 하나의 폐곡선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본성, 봉암성, 한봉성, 신남성과 5개의 옹성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조이다. 인조 4년(1636) 에 중앙부의 가장 큰 폐곡선인 본성이 완성되었고, 병자호란 이후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동쪽의 봉암성, 한봉성 등을 비롯하여 여러차례 증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길과 길
남한산성 옛길
" 왕들의 능행길, 민간의 상업루트 "
남한산성이 위치한 지금의 성남시, 광주시, 하남시는 옛날 조선시대 행정구역으로 보면 모두 광주유수부의 관할지역이었습니다. 광주수유부는 남한산성의 군사요충지적 특성 때문에 매우 중요한 행정중심지였습니다. 또 남한산성은 왕의 이동과 관련이 깊은 곳입니다. 조선시대 왕들은 반드시 선대와들의 능에 성묘를 가야 했으며 왕들의 이런 성묘행사를 능행이라고 불렀습니다. 후대의 왕들이 영녕릉(英寧陵)에 참배를 하려 가려면 일 년에도 몇 차례씩 남한산성 옛길을 이용해 여주까지 가야했습니다. 남한산성 옛길의 또 다른 특징은 조선후기 상거래가 활발해지면서 필요해진 내륙의 유통망으로 민간에서 이용했던 상업루트였다는 점입니다. 많은 보부상들이 바로 남한산성 옛길을 통해 상업유통의 한축을 담담하게 됩니다. 이렇게 이용된 남한산성 옛길은 목적지인 경상북도 봉화의 이름을 따 통칭 봉화로라고 불렀습니다.
남한산성 동영상
서문 (우익문)
서문 (우익문)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서문은 4개의 대문중 규모가 가장 작고, 산성을 처음 쌓았을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 3년(1799)에 다른 문과 같이 개축하며 우익문(右翼門)이라 칭하였다. 행궁을 중심으로 국왕은 남쪽을 바라보며 국정을 살피니, 서문이 행궁의 우측에 있어 우익문이라 하였다. 서문은 인조15년(1637) 1월 30일 왕이 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항복하기 위해 남한산성을 나간 바로 그 문이다. 남한산성의 서쪽 사면은 경사가 급해 물자수송이 어렵지만 광나루나 송파나루 방면에서 산성으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서문 이정표
<- 1.0km 수어장대, <- 일장천약수, -> 위례둘레길 (벌봉) 3.2km, -> 위례둘레길 (북문) 1.1km
우익문
전망대
남한산성 서문 전망대 동영상
강남 방향
바로 아래 위례신도시
잠실방향
롯데월드타워 & 한강
우익문
국청사
남한산성 하산 길 동영상
하남시 방향
<- 0.5km 전승문(북문), -> 학암동 1.9km, -> 수어장대 1.1km, -> 우익문 (서문) 0.5km
하남시 전경
멀리 아파트군이 있는 지역은 한강변 미사리 신도시 지역이며,
바로 아래는 하남시 춘궁동, 교산동 일대로 흔히 고골로 지칭되며, 하남교산신도시가 들어서는 지역이다.
하남 교산 싣도시 : 경기도 하남시 천현동, 교산동, 춘궁동, 덕풍동 일원에 제3기 신도시인 '하남 교산 싣도시' 가 들어서는 지역이다. 하남교산 공공주택지구는 면적 6,314,121m2 (191만평) 으로 주택 3만3천호가 들어서며 인구 7만8천명이 유입된다. 사업기간: 2019년 ~2028년이다. 비야흐로 이 풍광이 청정 수려한 고골 일대에 쌍전백해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고골: 하남의 지형은 낮은 야산과 구릉지대가 펼쳐져 있고, 북쪽으로 흐르는 한강에는 망월천, 덕풍천,산곡천 같은 작은 샛강이 흘러 들어가며 강줄기의 옆에는 평야가 형성되어 있어서 B.C 4000여년 전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였으며, 수로를 이용한 타 지역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여 문화가 융성했던 지역이다. 또한 남쪽으론 남한산, 동쪽은 검단산, 북쪽으론 한강이 흘러 군사의 요충지로서 더할 나위 없이 좋아 백제의 시조인 온조께서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470여 년간 한성백제의 수도로 위상을 떨치던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한수의 쟁패를 놓고 삼국이 각축을 벌이던 역사의 현장 이기도 하다. 고려시대에 접어들어선 후삼국을 통일하고 태조의 개국을 도와 새로운 나라의 기틀을 조성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광주의 대호족 왕규가 세거를 이루었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종때(983년)에 이르러서는 지방통제를 위한 지방관제를 실시하여 지방행정상 요지에 12목(광주,양주,충주,청주,공주,진주,상주,전주,나주,송주,해주,황주)을 설치하였는데 광주도 12목의 하나로서 읍치가 바로 하남의 춘궁동(고골) 이었다. - ( 하남시 )
남한산성 하산 길 동영상
재건축 중인 북문(전승문)
< 2020.07.04 사진 - 전승문 >
전승문(북문):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북문은 병자호란 당시 성문을 열고 나가 기습공격을 감행했던 문이다.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에서 '전승문'이라고도 하였다. 당시 영의정 김류의 주장에 의해 군사 300여명이 북문을 열고나가 청나라 군을 공격하였으나, 적의 계략에 빠져 전멸하고 말았다. 이를 '법화골 전투';라고 하는데,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있었던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였다. 정조3년(1779) 성곽을 개보수할 때 성문을 개축하고 이름을 붙여 전승문(全勝門)이라 한 것은 그 때의 패전을 잊지말자는 뜻이었을 것이다. 선조 때의 기록을 보면 산성 내에 동문과 남문, 수구문의 3개의 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북문은 인조2년(1624)에 신축된 성문이라고 생각된다.
소풍
<- 2.9km 지화문(남문), <- 0.1km 전승문(북문), -> 숭렬전 0.5km, ↑ 종로 0.3km
남한산성 근처 음식점:
전승문(북문) 150m ↓, 송림정 30m ↓ , 동촌 10m ↓ , 국청사 800m ->, 한경직목사 우거지 650m ->, 숭렬전 500m ->, 계곡산장 300m ->, 카페 작은 숲 250m ->, 영락수녀원 200m ->, 용마루 140m ->, 석촌 100m ->, 돌집 50m ->, 먹거리창고 30m ->, 백송식당 20m ->, 카페 남한산성 ->
석산정
백제장
cafe 오로지
산성마을 명동 로터리
남한산성 역사 테마길:
남한산성 역사 테마길은 세계유산이며 도립공원인 남한산성의 가치를 체험할 수 있도록 테마별로 구성된 탐방로입니다. 국가지정 사적 제57호인 남한산성과 제480호인 남한산성 행궁을 비롯한 수많은 문화재가 잇으며, 백제 시조 온조왕, 병자호란 등 많은 역사적 의미를 간직한 장소입니다. 탐방객은 관심분야와 여건에 맞는 코스를 선택하여 체험할 수 있습니다.
- 장수의 길 1코스:
1코스 장수의 길은 세계유산 남한산성이 가지고 있는 방어요새의 특징들을 살펴볼 수 있는 탐방코스입니다. 방어시설의 중심이었던 존승문(북문), 우익문(서문), 자화문(남문)을 거닐며, 전쟁시 비상연락 및 적정 탐색을 위한 암문과 지휘를 했던 수어장대를 볼 수 있습니다. 장수의 길에서 세계유산 남한산성의 굳건한 모습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제1코스 (3.8km, 80분): 산성로터리- 북문(0.4km)- 서문(1.1km)- 수어장대(0.6km- 무궁화동산(0.3km- 남문(0.7km)- 산성로타리(0.7km)
- 국왕의 길 2코스:
2코스 국왕의 길은 조선시대 국왕의 공간이었던 행궁에서 시작되어, 침괘정을 지나 병자호란 시기 인조가 항복하러 성문을 나간 서문을 아우르는 탐방코스 입니다. 국왕이 행차하여 머물렀던 남한산성 행궁, 백제시조 온조왕 사당인 숭렬전, 인조 관련 이야기가 전해지는 침괘정과 우익문(서문)을 볼 수 있습니다. 국와의길에서 잘 가꾸어진 소나무 숲길을 거닐며 세계유산 남한산성의 시원한 자연환경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2코스(2.9km, 60분): 산성로터리- 영월정(0.4km)- 숭렬전(0.2km)- 수어장대-(0.6km) 서문(0.7km)- 국청사(0.1km)- 산성로타리(0.9km)
- 승병의 길 3코스:
3코스승병의 길은 남한산성을 만들 때 부터 전쟁시기 남한산성을 지켰던 승병들의 생활을 알아볼 수 있는 탐방코스 입니다. 산성의 수축과 유지를 위해 승병이 머물렀던 장경사와 망월사와 남한산성의 외성인 봉암성을 볼 수 있습니다. 승병의 기레서 사찰을 거닐며 세계유산 남한산성 사찰의 고즈넉한 모습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3코스(5.7km,120분): 남한산성 세계유산센터- 현절사(0.1km)- 벌봉(1.8km)- 장경사(1.5km)- 망월사(1.1km)- 지수당(1.0km)- 남한산성 세계유산센터 (0.2km)
- 옹성의 길 4코스:
4코스 옹성의 길은 남한산성의 약점을 보완하고자 했던 선조들의 고민을 느낄 수 있는 탐방코스입니다. 적 대포에 대응한 방어시설이었던 제1남옹성, 제2남옹성, 제3남옹성을 볼 수 있습니다. 옹성의 길에서는 굳건한 남한산성의 성벽과 양생화를 비롯한 아름다운 자연황경이 어우러져 있어 세계유산 남한산성의 평화로운 모습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4코스(3.8km, 80분): 산성로터리- 남문(0.7km)- 남장대터(0.6km)- 동문(1.1km)- 지수당(0.5km)- 개원사(0.3km)- 산성로타리 (0.6km)
- 산성의 길 5코스:
5코스 산성의 길은 '하늘이 만든 성'으로 알려진 남한산성의 성벽을 두루 볼 수 있는 탐방코스 입니다. 남한산성을 지키는 성벽을 따라 암문과 치성 등 방어시설물을 볼 수 있습니다. 산성의 길에서 남한산성 성벽의 경관과 성남, 하남, 광주의 경관을 모두 볼 수 있어 세계유산 남한산성의 다채로운 모습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5코스(7.7km, 200분): 남한산성 역사관주차장- 동문(0.6km)- 동장대터(1.1km)- 북문(1.6km)- 서문(1.1km)- 수어장대(0.6km)- 영춘정(0.3km)- 남문(0.7km)- 동문 ( 1.7km)
세계유산 남한산성
World Heritage
9번, 9-1번 정류장
9-1번은 공휴일에만 운행한다.
남한산성 행궁 방향
행궁(行宮): 왕이 도성을 떠나 행행(行幸)할 때 임시로 머무는 곳으로, 전란시·능행시·휴양 등의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조선시대에는 수원행궁, 강화행궁, 전주행궁, 의주행궁, 양주행궁, 온양행궁 등 10여개 이상의 행궁이 있는데, 그 중 남한산성행궁은 전쟁이나 내란 등 유사시 후방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한양 도성의 궁궐을 대신할 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하여 인조 3년(1625) 남한산성 수축과 함께 건립되었다. 실제로 약 10년 후인 1636년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47일간(1636.12.14~1637.01.30) 항전하게 된다. 이후 숙종·영조·정조·철종·고종이 여주에 있던 효종릉(寧陵) 등의 능행길에 머물러 이용하였다. 남한산성행궁은 종묘(좌전)와 사직(우실)을 두고 있는 유일한 행궁으로 일반적인 행궁에 머물지 않고 유사시 임시수도의 중요한 역할을 하던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국가사적480호이다. - < 남한산성 도립공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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