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종로3가 탑골공원
- ( 2024.03.17 )
일이 있어 시내 나갔다가 탑골공원(파고다공원)과 종묘, 그리고 청계천을 걸어보았습니다. 종묘도 오랜만이요, 청계천 산책도 오랜만이었습니다. 옛날 종묘나 청계천 다닐 때는 그래도 힘이 어느 정도는 남아있던 때 였는데. 이제 노년에 종묘나 청계천 등을 와보니 마음에 느끼는 점이 많았으며,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세월이 이렇게 빠르구나 인생의 짧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우리네 인생은 잠깐입니다. 그러므로, 하루 하루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느낍니다. 타인에게 폐를 끼치도 말고, 가족을 사랑하고 진지하게 살아야 한다는 점을 깨닫습니다. 인생에서 후회할 일을 만들지도 말아야 겠습니다. 자신과 가족을 사랑하며, 이웃을 존중할 줄 아는 인간이 되어 하늘을 우러러 죽을 때 편히 눈 감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이 겠습니까?
▶ 탑골 공원: 탑골 공원은 고종 때 원각사 터에 조성한 최초의 공원으로 서울 종로구 종로2가에 있는 공원이다. 뼈모양의 탑이 있어 탑골(塔骨)공원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곳은 일제에 항거하는 3·1운동이 일어났던 곳으로, 이곳에서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다. 그리고 요원의 불길 같이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하는 운동이 일어났던 곳이다. 이곳에는 고려시대 흥복사(興福寺)라는 사찰이 있었는데, 1464년 (세조10) 불심이 깊었던 세조가 원각사(圓覺寺)로 개명하고 중건하였다고 한다. 지금 중앙에 팔각정이 있고 주변으로 원각사지 십층석탑이 있다. 그외에 3·1 운동 부조서판, 의암 손병희 선생 동상, 한용운 선생 기념비 등이 있다. 원래는 파고다 공원으로 불렸다. 공원내에 있는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현존하는 대한민국 국보지정 석탑 가운데 가장 후대에 속하는 것으로 그 형태와 평면이 특수하며, 모두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사적 제354호). 조그만 도심의 공원에서 깊은 역사의 숨결을 느낀다. 특히 민족대표 33인에 대한 깊은 존경심과 유관순 같은 젊은 열혈의 우국충정을 생각하게 된다.
▶ 산 책 : 걸음수 10,622 steps, 거리 7.05 km, 소모열량 362 kcal, 소요시간 01:50 hrs, 속도 3.8 km/h, 기온 12℃ .
▶ 코 스 : 종로3가역 - 파고다공원 - 종묘 - 세운상가 - 청계천 ( 세운교~ 다산교 ) - 신당역.
◆ 탑골공원:
< 2016.03.04 사진 > 탑골공원 정문...삼일문 ( 지금은 보수 공사 중 )
의암 손병희 선생 동상
손병희(孫秉熙) (1861~1922): 천도교(동학)지도자,독립운동가.충북 청원군에서 출생. 1882년 동학에 입도, 3년 뒤 최시형을 만나 그의 수제자가 되었다. 1894년 동학혁면 당시에는 북접통령으로 동학군을 이끌었다. 1897년 해월 최시형으로부터 도통을 이어받아 제3대 교주가 되었다. 한편 관에 자수한 최시형은 이듬해 혹세무민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함으로써 순도한다. 이후 손병희는 동학운동의 지도자만이 아닌 근대화 운동의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1904년에는 갑진개혁운동(문명개화운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에 동학을 천도교로 선포하고 교육과 출판문화 운동으로 300만 교도를 이끌었다. 수운, 해월의 교리를 심화하여 법설(의암성사법설)을 저술 편찬하였다. 1906년 일본에서 귀국했다. 1910년 한일병탐 이후 봉황각을 중심으로 조국독립과 민중개몽을 위해 헌신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대표로서 3·1 운동을 총 지휘했다. 기미독립선언서 낭독 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병보석으로 출옥한 후 1922년 가족들이 보는 가운데 별세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 저서: 삼전론(三戰論), 명리전(明理傳), 수수명실록(授受明實錄), 대종정의설(大宗正義說) 등 다수.
의암 손병희 선생:
호는 의암(義菴), 동학.천도교 지도자, 교육가, 독립운동가
1861년: 4월 8일 충북 청주 출생, 본관은 밀양, 초명은 응구(應九)ㅡ 부친은 두홍, 모친은 최씨.
1882년: 동학(東學)에 입도
1883년: 동학의 제2세 교조 해월 최시형의 수제자로 수도에 전념.
1894년: 동학군 통령(統領)으로 경기충청 지역 동학군을 이끌고 전봉준과 합세한 뒤 공주 이인에서 관군 격파, 우금치 전투에서 현대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의 개입으로 혁명이 좌절되자 함경도.평안도로 은신.
1897년: 쵯형으로 부터 도통을 이어받아 동학의 제3세 교조가 됨.
1901년: 일본으로 망명, 이듬해 이상헌(李祥憲)이라는 이름으로 오세창, 권동진, 박영효 등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
1902년: 일시 귀국 이후 두 차례에 걸쳐 이광수 등 청년 64명을 선발하여 일본으로 유학 시킴.
1904년; 동학 교인들로 하여금 진보회를 조직케 하고 갑진(甲辰)개화운동 지도.
1905년: 12월 1일을 기햐 교단의 명칭을 천도교(天道敎)로 바꿈.
1906년 1월 귀국. 천도교중앙총부 설립, 일간지 마넷보 창간, 이용구 둥과 친일 교인 60여명을 출교 시킴.
1910년: 보성전문학교 인수. 이후 전국적으로 30여개의 학교를 인수,. 운영하거나 지원.
1912년: 우이동에 봉황각을 짓고 483명의 중견굥역자를 양성.
1919년: 민족대표 33인의 대표로 3.1독립선언을 주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름.
1920년: 10월 병보석으로 출감.
1922년: 5월 19일 상춘원에서 옥고 후유증으로 순국.
1962년: 정부에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독립 선언문
우리는 여기에 우리 조선이 독립된 나라인 것과 조선 사람이 자주하는 국민인 것을 선언하노라. 이것으로써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가 평등하다는 큰 뜻을 밝히며, 이것으로써, 자손 만대에 알려 겨레가 스스로 존재하는 마땅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도록 하노라. 반만년 역사의 권위를 의지하고 이것을 선언하는 터이며, 이천만 민중의 충성을 모아 이것을 널리 알리는 터이며, 겨레의 한결같은 자유 발전을 위하여 이것을 주장하는 터이며, 사람 된 양심의 발로로 말미암은 세계 개조의 큰 기운에 순응해 나가기 위하여 이것을 드러내는 터이니, 이는 하늘의 명령이며, 시대의 대세이며, 온 인류가 더불어 같이 살아갈 권리의 정당한 발동이므로, 하늘 아래 그 무엇도 이것을 막고 누르지 못할 것이라. 낡은 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 강권주의의 희생을 당하여, 역사 있은 지 여러 천 년에 처음으로 다른 민족에게 억눌려 고통을 겪은 지 이제 십 년이 되도다. 우리가 생존권마저 빼앗긴 일이 무릇 얼마며, 정신의 발전이 지장을 입은 일이 무릇 얼마며, 겨레의 존엄성이 손상된 일이 무릇 얼마며, 새롭고 날카로운 기백과 독창성을 가지고 세계문화의 큰 물결에 이바지할 기회를 잃은 일이 무릇 얼마인가! 오호, 예로부터의 억울함을 풀어보려면, 지금의 괴로움을 벗어나려면, 앞으로의 두려움을 없이하려면, 겨레의 양심과 나라의 도의가 짓눌려 시든 것을 다시 살려 키우려면, 사람마다 제 인격을 옳게 가꾸어 나가려면 불쌍한 아들. 딸에게 부끄러운 유산을 물려주지 않으려면, 자자손손이 길이 완전한 행복을 누리게 하려면, 우선 급한 일이 겨레의 독립인 것을 뚜렷하게 하려는 것이라. 이천만 각자가 사람마다 마음 속에 칼날을 품으니, 인류의 공통된 성품과 시대의 양심이 정의의 군대가 되고, 인륜과 도덕이 무기가 되어 우리를 지켜주는 오늘, 우리가 나아가 이것을 얻고자 하는 데 어떤 힘인들 꺾지 못하며, 골라서 계획을 세우는 데 무슨 뜻인들 펴지 못할까! 병자수호조약 이후, 시시때때로 굳게 맺은 약속을 저버렸다 하여 일본의 신의 이루어진 부자연스럽고 불합리한 이 그릇된 현실을 고쳐서 바로 잡아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올바른 바탕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이라. 처음부터 이 겨레가 원해서 된 일이 아닌 두 나라의 합병의 결과는 마침내 억압으로 이뤄진 당장의 편안함과, 차별에서 오는 고르지 못함과 거짓된 통계숫자 때문에, 이해가 서로 엇갈린 두 민족 사이에 화합할 수 없는 원한의 도랑이 날로 갈수록 깊이 패이는 지금까지의 사정을 한 번 살펴보라. 용감하게 옛 잘못을 고쳐 잡고, 참된 이해와 동정에 바탕 한 우호적인 새 시대를 마련하는 것이, 서로 화를 멀리하고 복을 불러들이는 가까운 길인 것을 밝혀 알아야 할 것이 아니냐! 또한 울분과 원한이 쌓이고 쌓인 이천만 국민을, 힘으로 붙잡아 묶어둔다는 것은 다만 동양의 영원한 평화를 보장하는 노릇이 아닐 뿐 아니라, 이것이 동양의 평안함과 위대함을 좌우하는 사억 중국사람들의 일본에 대한 두려움과 새암을 갈수록 짙어지게 하여, 그 결과로 동양전체가 함께 쓰러져 망하는 비운을 초래할 것이 뻔한터에 오늘 우리의 조선독립은 조선사람으로 하여금 정당한 삶과 번영을 이루게 하는 동시에, 일본으로 하여금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 동양을 버티고 나갈 이로서의 무거운 책임을 다하게 하는 것이며, 중국으로 하여금 꿈에도 피하지 못할 불안과 공포로부터 떠나게 하는 것이며, 또 동양의 평화가 중요한 일부가 되는 세계평화와 인류복지에 꼭 있어야 할 단계가 되게 하는 것이라, 이것이 어찌 구구한 감정상의 문제이겠느냐! 아아 새 하늘과 새 땅이 눈 앞에 펼쳐지누나, 힘의 시대는 가고 도의의 시대가 오누나, 지나간 세계를 통하여 깎고 다듬어 키워온 안도적 정신이, 바야흐로 새 문명의 서광을 인류의 역사 위에 던지기 시작하누나, 새 봄이 온 누리에 찾아 들어 만물의 소생을 재촉하누나, 얼음과 찬 눈 때문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것이 저 한 때의 시세였다면, 온화한 바람, 따뜻한 햇볕에 서로 통하는 낌새가 다시 움직이는것은 이 한 때의 시세이니, 하늘과 땅에 새 기운이 되돌아오는 이 마당에 세계의 변하는 물결을 타는우리는 아무 주저할 것도 없고 거리낄 것도 없도다. 우리가 본디 타고난 자유권을 지켜 풍성한 삶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것이며, 우리가 넉넉히 지닌 바 독창적 능력을 발휘하여 봄기운이 가득한 온 누리에 겨레의 뛰어남을 꽃피우리라. 우리는 그래서 분발하는 바이라. 양심이 우리와 함께 있고, 진리가 우리와 더불어 전진하나니, 남자, 여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음침한 옛집에서 힘차게 뛰쳐나와 삼라만상과 더불어 즐거운 부활을 이룩하게 되누나. 천만세 조상들의 넋이 우리를 안으로 지키고, 전 세계의 움직임이 우리를 밖으로 보호하나니, 일에 손을 대면 곧 성공을 이룩할 것이라. 다만 저 앞의 빛을 따라 전진할 따름이로다.
공약 삼장:
(하나) 오늘 우리들의 이 거사는 정의, 인도, 생존, 번영을 찾는 겨레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의 정신을 발휘할 것이고,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치닫지 말라.
(하나) 마지막 순간에 다다를 때까지, 민족의 올바른 의사를 시원스럽게 발표하라.
(하나) 모든 행동은 먼저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들의 주장과 태도가 어디까지나 공명 정당하게 하라.
나라를 세운지 사천이백오십이 년 되는 해 삼월 초하루
조선 민족 대표: 손병희. 김선주. 이필주. 백용성. 김완규. 김병조 김창준. 권동진. 권병덕 나용환. 나인협. 양전백. 양한묵. 유여대. 이갑성. 이명룡. 이승훈. 이종훈. 이종일. 임예환. 박준승. 박희도. 박동완. 신흥식. 신석구. 오세창. 오화영. 정춘수. 최성모. 최린. 한용운. 홍병기. 홍기조.
탑골공원석재유구:
탑골공원 한 쪽에 보관 전시되어 있는 석재 유구들은 이 일대의 도시개발 과정에서 출토된 부재들이다. 대리석 인물상(3점)은 원각사 탑 주위를 호위했던 신장상이나 보살상으로 추정되며 연화문이 새겨진 난간석은 원각사 탑 외곽을 돌렸던 부재로 추정된다.
탑골공원 팔각정
탑골공원 팔각정: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73호, 시대: 광무 1902년(광무 6)
팔각정은 1902년 (광무 6)에 탑골 공원 안에 지은 팔각정이다. 이곳은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곳이다. 팔각정은 장대석 기단 위에 둥근 기둥을 세우고 기둥 머리 부분은 물익공을 짠 후 기와지붕을 덮었다. 전통과 근대의 건축 기술을 두루 사용했던 건축가 심의석(沈宜碩: 1854-1924)이 주도하여 공사를 진행하였다. 탑골공원은 서울에 만들어진 최초의 근대식 공원이다. 이 공원이 만들어진 시기에 대해 이견이 있으나, 1890년대로 알려져 있다. 이공원은 고종 대 총세무사로 활약한 브라운(Jhone Mcleavy Brown, 柏卓安(백탁안))이 건의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탑동공원, 파고다공원 등으로 불리다가 1991년 부터 공식적으로 탑골공원이 되었다.
원각사지 십층석탑
원각사지 십층석탑: 국보제2호, 시댸: 1467년(세조 13)
이 탑은 세조가 세운 원각사(圓覺寺) 터에 남아있는 높이 12m의 십층 석탑이다. 원각사는 1465년(세조11)에 조계종의 본산이었던 흥복서 터를 확장하여 세운 사찰인데, 이 탑은 2년 뒤인 1467년(세조 13)에 완성했다. 세조는 사리분신(舍利分身) 하는 경이로운 일을 겪은 뒤 원각사를 짓기로 결정하였는데, 공사 도중 사리분신하고 서기가 나타났다 전해진다. 지금 견해로는 <원각경(圓覺經)>을 모셔 두었다고 한다. 亞(아)자 모양의 기단은 세겹인데, 아래에는 용과 연꽃 같은 무늬를 새겼고, 중간에는 삼장법사(三藏法師)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일행이 인도에서 불법(佛法)을 구해 오는 과정을 그려 새겼다. 위에는 부처님 전생 설화와 일생을 조각하였다. 법회 장면을 새긴 탑의 몸체에는 현판, 용을 휘감은 기둥, 목조 구조, 지붕을 두었는데, 마치 하나의 건물같다. 탑을 만든 재료는 흔치 않은 대리석이며, 독특한 형태와 조각 솜씨는 조선시대 석탑의 백미로 꼽힌다. 이 석탑은 고려시대에 제작한 경천사 십층석탑(국보 제86호)과 여러 면에서 비슷하다.
보물3호 원각사 비 ...
대원각사비: 보물 제3호, 시대 1471년(성종2)
대원각사비는 1471년 (성종 2)에 원각사를 창건한 경위를 적어 세운 비석이다. 불심이 돈독했던 세조는 양주 회암사에서 분신(分身) 한 사리를 보고 감동하여 1465년(세조 11) 흥복사 터에다 원각사를 지었다. 이어 146년(세조13)에 13층 석탑이 완성되자 연등회를 열고 낙성식을 거행하였으며 그 전후 사정을 적은 비석을 조성하게 하였다. 거북이 모양의 받침돌을 만들고 그 등 위에 연잎을 새겨 비석 몸돌을 세울 자리를 만들었다. 몸돌은 머릿돌인 이수(螭首)와 한 돌로 만들었다. 비석 전체 높이는 494cm이며 거북은 화강암으로, 몸돌과 머릿돌은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당대 문장과 글씨로 이름난 사람들이 비문을 맡았다. 김수온이 앞면의 글을 짓고, 성임이 그 글을 썼으며, 서거장이 뒷면의 글을 짓고, 정난종이 그 글을 썼다. 연산군 대 궁궐에 인접한 민가를 철거하면서 원각사는 빈 절이 되었다. 근대에 들어 공원으로 변모한 이곳에는 십층석탑(국보 제2호)과 이 비석만 남아 원각사의 옛 흔적을 보여 주고 있다.
( 2022.10.30 사진 ): 동문 & 용운당 대선사 비(龍雲堂大禪師碑)
한용운(韓龍雲: 1879~1944): 시인, 승려, 독립운동가. 법명 용운(龍雲), 호는 만해(萬海). 충청남도 홍성군 출생. 어릴 적 고향에서 한학을 배웠고, 1896년 고향을 떠나 백담사 등을 전전하며 불교서적을 읽었다고 한다. 1905년 영제(永濟) 스님에 의해 수계(受戒)하고 출가함. 법명은 용운(龍雲). 1910년 일제에 의한 국권 피탈시 만주, 시베리아 등지에서 방랑. 1913년 귀국 불교학원 교편. 1912년 양산 통도사에서 팔만대장경 열람. 1914년 부산 범어사에서 <불교대전(佛敎大典)> 을 간행하고, 불교개혁 참여 주장. 이후 설악산 오세암에서 수행정진.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중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선언 및 자진체포. 3년 복역후 출소 <님의 침묵> 발표. 1944년 광복 1년전 향년 65세로 입적하고, 망우리공동묘지에 묻힘. 작품: 님의침묵, 알수 없어요, 이별은 미의 창조, 사랑하는 까닭 등 다수.
님의 침묵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의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앗, 산수유!!!
3.1정신찬양비...월탄 박종화 선생 지음
3.1독립만세운동 진행 과정 부조물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탑골공원에 서는 수천명 학생들이 정재용의 선언서 낭독이 끝난 뒤 대한독립만세를 높이 외치며 거리로 달려나가니 서울은 순식간에 감격과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고 그대로 파도와 같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1919년 3월2일 함경도 함흥고을 민중들은 역사깊은 만세교 위를 달리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왜경의 총칼이 번뜩일 수록 만세소리는 더높았고 그 중에서도 조영신이란 소년의 입을 찢었을 적에 더욱 더 거센 만세소리는 천지를 흔들었다.
1919년 3월1일 정오 평양기독교 신자들은 종소리가 울리자 쟁댓재 예배당으로 모여들었다. 고종황제 추도식을 마치고 이어 거리로 달려나가 천도교인들과 합세하여 모두 태극기를 들고 왜경의 총탄을 무릅쓰고 만세 시위를 했다.
1919년 3월 10일 오후에 황해도 해주에서는 문월선 등 기생들이 선동이 되어 만세 시위를 하자 잔악한 기마경찰관들은 우리 민중을 마구 짓밟고 여자의 머리채를 말꼬리에 잡아 매어 끌었지만은 그들은 왜경 앞에 조금도 굴하지 아니했다.
1919년 3월 10일 강원도 철원고을 민중들은 학생들을 선두로 모두들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물밀듯 거리로 몰려나와 독립만세를 높이 쳤다. 악독한 왜경들은 총을 마구쏘며 칼을 휘둘렀으나 죽음을 무릅쓰고 앞으로 행진할 뿐이었다.
1919년 4월 15일 오후 일본군 1개 소대가 수원 제암리에 와서 예수교인들과 천도교인들을 교회당에 몰아넣고 총으로 난사하며 불을 질렀다. 불을 피해 나오는 부인은 칼로 잔인하게 죽이고 창문으로 내어보내는 아기들 마저 죽였다.
1919년 3월 1일 천안고을 병천시장에 수천명의 군중이 독립선언식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주모자 유중천 등 20여명은 현장에서 참살되고 유관순 처녀는 일경에 체포되어 감옥으로 넘어가 혹독한 고문에 항쟁하다 마침내 옥사했다.
1919년 3월 23일 걍상남도 진주에서는 기생 수백명이 만세를 부르며 남강가를 행진했다. 일본 경찰과 헌병들이 총검을 들고 찌르러 했으나 그들은 아우성 치며 우리는 논개의 후신이라 하고 애국가를 부르며 앞으로 용감히 달려갔다.
1919년 4월 3일 남원에서 일어난 일이 있다. 수천명 군민들이 질서정연하게 만세를 부르다가 방 모씨 등 10여명이 일본 경찰의 칼 아래 쓰러지자 그의 아내와 어머니 마저 달려와 거기서 자결하며 독립을 이루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1919년 3월 23일 저 멀리 제주도에서도 남ㄴ여 군중과 학생들이 함께 일어나 만세를 불렀다. 한나산 정기를 타고 난 그들은 맨손으로 달려나가 일본 경찰의 무서운 총칼과 싸워 피를 흘리면서서도 행진을 계속하며 한사람도 굽힘이 없었다.
탑골공원사적비....노산 이은상 선생 글
낙원 악기상가, 지하시장
종로3가 거리
종로1번가 귀금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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