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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구릅/일상들 ( life )

남한산성- ( 2024.03.14 )

by the road of Wind. 2024. 3. 14.

남한산성

- ( 2024.03.14 )

 

오랜만에 집사람과 같이 남한산성을 산책하여 보았습니다. 겨울 동안 집에만 갇혀있던 집사람을 대리고 집 가까운 명승지 남한산성을 걸어보니 날씨도 따뜻하고 쾌청한데 좋았습니다. 나의 집사람은 돌아다니기 싫어하는 스타일이고, 나는 싸돌아 다니는 것을 좋아하다보니 가끔 귀가 시간 때문에 불협화음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 마다 저가 죄인입니다 하고 꼬리를 내리고 사는 형편입니다. 그러다 오늘은 집사람을 남한산성으로 초대(?)한 것입니다. 집사람 기분도 좋아 보입니다. 그런데 좋은 곳에 가니 멋진 음식을 한번 먹어보려는데, 한사코 김밥 두 줄만 사가지고 커피 끓이고 간다고 합니다. 아마 식당에 마땅한 먹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또한 고기류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집사람이 이런 것도 내키지 않고 하여 그런 것 같은데, 아무튼 나도 동의하고 차를 몰고 행차를 하였습니다.

 

( * 그런데 평소에 혼자 운동다니는 나는 혼자서는 무슨 음식을 단품으로 제대로 시켜 먹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집사람을 모시고 가기 때문에 닭이나 오리백숙 등을 시켜 잘 먹어보려 했는데 허사가 되었습니다. 오늘 느낀 점은 놀러가서는 무엇보다 현지에서 아주 잘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금강산이면 무엇이고 설악산이면 무엇입니까?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는데...식구들과 나들이시는 돈 아끼지 말고 최고로 잘 먹어야 한다는 진실을 깨달았습니다. )

 

남한산성 산책시 평소에는 주로  < 종로 로터리 - 남한산성 북문 - 서문 - 수어장대 - 남문 - 주차장> 코스를 걷곤 했는데, 오늘은 북문 근처에서 영락수련원 방향으로 길을 잡았습니다. 잘 가보지 않은 코스를 걸어보려 하였습니다. 이 코스도 대만족입니다. 

 

병자호란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남한산성은 언제 와보아도 마음에 깊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특히 남한산성에는 온통 키 크고 푸른 소나무들이 많아 겨울철에도 그 푸르름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 봄은 어디에 있을 텐데요, 언제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을까요? 목련화로, 개나리로, 산수유로, 진달래로 회색의 이 세상을 밝게 하는 봄의 마술을 어서 보고 싶습니다.   

 

 산   책 : 걸음수 9,647 steps, 거리 6.01 km, 소모열량 328 kcal, 소요시간 01:46 hrs, 속도 3.4 km/h, 기온 12℃ . 

 코   스 :  남한산성 중앙주차장 - 천주교 순교자현양비 - 남한산성 종로 로터리 - 영락수련원 - 한경직목사 우거처 - 국청사 - 서문(우익문) - 수어장대 - 남문(지화문) -  남문주차장 - 종로 로터리 - 남한산성순교성지 - 남한산성 중앙주차장.

 

 

남한산성 중앙주차장....추차료 후불 3,000원

 

남문주차장이 가장 크고 중심에 있는 것인데, 지금은 주차장 보수 공사로 주차 불가. 만약 주말이나 공휴일의 경우는 주차난 때문에 가능한한 일찍 오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만약 주차공간을 찾지 못했를 때는 그 다음 행선지를 반드시 미리 생각해 두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여기에서 가까운 팔당호수 곁의 경기 광주시의 퇴촌 분원리, 앵자봉 아래 천주교성지 드라이브, 그리고 퇴촌 곁의 경안천생태공원 등등... 

 

하얀 조화가 너무 아름답다. 마치 봄날의 만개한 벚꽃같다.

 

중앙주차장 모습

 

순교자현양비

 

 

순교자 명단

신유박해 한덕운 토마스 1801.12.27 참수 병인박해 이종이 1866.02(?) 장사
기해박해 김덕심 아우구스티노 1841.01.28 옥사   이종이의 장인 1866 장사
김준원 아니세도 1845.12(혹은 1866)     홍성국 모친 1867.04  
병인박해 성이심 바오로 1866.10 옥사(?)   김윤심 베드로 1868.02.15  
이화실 1866.10 옥사(?)   김성희 암브로시오 1868.02.15  
윤(尹)서방 1866.11 옥사(?)    김차희 1868.02.15  
정 은  바오로 1866.12.08 백지사   김경희 1868.02.15  
정   베드로 1866.12.08 백지사   김윤희 1868.02.15  
이   요한 1866 교수   이  요한 1869.02  
오  안드레아 1866 교수   이지재 1871.09.06  
서 아우구스티노 1866.02(?) 장사   서 바오로 미상  

(1867.01.09 이전 옥사자 10인과 1868.01.04 이전 옥사자 6인 광주부 명단): 이학목, 이정현, 임쾌걸, 서상걸, 이기좌, 권경보, 김준원, 오신장, 김하상, 한동원, 이재금, 한경조, 윤재현, 김상희, 송일자, 송창지 외 무명 300여분

 

'남한산성의 피에타'

 

 

남한산성의 피에타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 한덕운 토마스는 위험을 무릅쓰고 교우들의 시신을 찾아 수습하여 장례를 치러주었다. 그 일로 체포되어 남한산성 동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었다. 순교복자와 함께 오늘 애써 찾아 손을 잡아 주어야 할 다양한 처지의 사람들 얼굴도 떠올릴 수 있기를 소망한다. 

" 우리는 타인에 대한 책임을 지니고 있습니다." 
순교자를 기억하는 것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남한산성 순교성지

 

그 녀석 표정이 오묘하군! 

 

서도면옥.....숯불이동갈비. 굳이 포천까지 가지 않아도 되겠군!

 

EMART24

남한산성 종로 로터리 이정표:

<- 1.1km 좌익문(동문), <- 0.5km 지수당, <- 2.1km 검복리주차장,

-> 남한산성 행궁 0.4km, -> 수어장대 1.2km

 

로터리,   " 남한산성 내의 기준점 "

남한산성 안에는 핵심 간선 도로망이있던 봉화로가 남문과 동문을 통해 이어져 있으며, 남한산성  중심지에서 한양도성의 동쪽(현재 하남시)과 남쪽 (송파, 마천)으로 바로 이어지는 중요 노선들이 한 점을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산성 로터리입니다. 남한산성에서 동으로 몇리, 남으로 몇리 이렇게 이렇게 거리를 측정하는 것도 바로 이 로터리를 기준으로 정하게 됩니다. 행궁의 바로 옆에 위치한 일종의 랜드마크와도 같아서 이곳을 왕래하는 주민들의 심리적 중심적 역할을 합니다. 남한산성 내에 위치한 마을이 산성리인데, 산성리 주민들은 로터리에서 우(북 또는 서)로 얼마를 가면 행궁이 있고 아래(동 또는 남)로 얼마를 가면 관아가 있고 방앗간이 있고 장터가 있다는 식으로 심리적 위치를 정하곤 합니다. 주민들 뿐만 아니라  남한산성을 찾는 많은 시민들은 지금도 남한산성 안에서 특정 지점을 말할 때 이 로터리를 기준으로 이여기를 하곤 합니다. 

남한산성 행궁 방향

 

북문 방향 가는 길

 

남한산성 북문자역:

국청사, 카페 작은 숲, 용마루, 석촌, 돌집, 카페 남한산성, 청수가, 온암갤러리, 숲속으로, 카페반월, 오로지

한경직목사 우거지, 계곡산장, 영락수련원, 먹거리창고, 백송, 동촌, 송림정, 카페 아말피, 청와정 카페팬션, 석산정, 백제정

 

백제장

cafe

 

나른한 견공 두마리

 

청와정 cafe

아말피....단팥죽, 대추차...

청수가

<- 국청사,  ↑ 북문(전승문) 가는 길

 

영락수련원, 한경직목사우거지, 국청사 가는 길

 

백송

돌집

먹거리창고

석촌

용마루

영락수련원

한경직목사 우거지, 국청사, 계곡산장 가는 길

 

<- 국청사, -> 계곡산장...중간의 푸른 지붕이 계곡산장 음식점이다. 계곡산장 앞에 공터 주차장이 있다.

 

백제의 시조

온조왕과 숭렬전

 

" 혼자 있기가 쓸쓸하니 명망있는 신하와 함께 "

초기 남한산성 발굴에서 나온 유물의 고고학적인 분석을 통해 남한산성의 최초 축성연대가 삼국시대임이 밝혀졌습니다.삼국시대 백제가 쌓았다는 견해를 받아들인 다면 남한산성 안에 백제 시조 온조왕의 사당 숭렬전이 있는 것이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남한산성 행궁에서 수어장대로 오르는 옛길을 따라가다보면  초입을 조금 지나 수어장대와 숭렬전으로 가는 길이 나뉘어져 있습니다. 숭렬전은 1638년(인조 16년)에 지은 사당으로 온조왕 뿐 아니라 남한산성 축성에 공이 큰 이서 장군의 위폐가 함께 모셔져 잇는데. 전설에 따르면 인조의 꿈에 온조왕이 나타나 인조의 인품과 성업을 칭찬하면서 혼자 있기가 쓸쓸하니 죽은 사람 중에서 명망있는 신하를 같이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인조는 남한산성을 쌓은 공로자인 이서를 같이 모시게 했다고 합니다. 이서는 남한산성을 쌓을 당시 총책임자였고 병자호란 때 순직한 장군입니다. 

 

차 돌려 나오는 공터....이곳에 주차하면 안된다고 간곡한 플래카드가 걸려있다.

차 단기 앞 절대 주차 절대금지. 차돌리는 곳 주차 절대금지.

 

지금 남한산성 남문 주차장 공사로 인하여 주차공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니 국청사 가는 길가 공터에 주차하려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은데, 한번 길을 들어서면 시멘트 산길 도로 폭이 좁아 이곳 외에는 돌려 나갈 방법이 없으므로, 이곳에 처음부터 올라오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잘 알아야 할 것이다. 잘 못 하면 오도 가도 못하고 도로에 갇히게 되어있다.      

 

영락교회 고 한경직목사 우거처....

옛날에는 아주 작은 소박한 시골집 같은 집 한 채였으나, 지금은 여러 채를 신축한 것 같다. 한경직 목사 청빈의 삶을 실천하신 분으로 유명하다. 특히 지금 한국 종교계는 이런 훌륭하신 분을 귀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인간은 죽을 때 결국은 공수래 공수거 (空手來 空手去) 아니겠는가? 

   

철문에 세겨진 말씀...."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심이라 (요 3:16 )  "

 

한경직목사 우거처 寓居處

이곳은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상을 수상한 목회자이자 교육자이며 사회사업가이었던 한경직목사님이 머무셨던 곳입니다. 남의 집에 임시로 몸을 붙여 산다는 뜻으로 우거처(寓居處)라 이름지었습니다. 자신의 이름으로 된 어떤 것도 가지기를 원치 않으셨던 청빈과 겸손, 하루도 거르지 않고 민족통일을 위해 기도한 나라 사랑의 숨결이 배어있습니다. 방문하는 모든 분들께 주의 평안을 빕니다.

관람시간: 오전 10:00 ~ 12:00,  오후 1:00 ~ 3:00 (첫째, 셋째 수요일은 휴관)
문의:  방문:  031-747-0493  /  사전예약:  031-743-6537

 

 

보이는 집이 옛날 은퇴하여 마지막 때를 보내며 지내신 한경직 목사님의 우거처인 것으로 보인다. 목사님 사후 새 건물 신축시 이전해 놓은 것 같다.  

 

국청사: 

남한산성 안의 산성리에 있는 절이다. 승군의 숙식과 훈련을 담당하고, 비밀리에 군기와 화약,군량미 등을 비축하였던 사찰이다.

 

<- 국청사 대웅전, ↑ 서문. 수어장대

 

 

남한산성 국청사 연혁

 

본 도장은 조선인조3년(서기1625년) 각성대사에 의하여 창건되었다. 각성대사는 인조대왕으로 부터 팔도총섭총절제중군주장으로 임명을 받은 후 전국팔도에서 승군을 모아 남한산에 성을 축성하시고 9개사찰을 창건하시었다. 병자호란으로 인한 수모를 또 다시 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승군을 훈련하고 군기며 화약, 군량미를 비축하였으니 그 중 하나인 국청사이다. 선사의 유시로 국난에 대비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든바, 일제침략시 일본군에 의하여 방화소진되었던 것을 서기 1968년 중건되었으나 서기 1986년 불자 최계순(불명, 원만행)께서 부지 1,003평(대웅전 요사채)를 기증 하시었으며, 이 모든 것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 국태민안 광도중생을 기원하기 위하여 현주지 선걸 스님께서 삼성각 요사채를 신축하시고 서기 1998년 대웅전을 중건중수 하시었다. 본 도장의 삼존불은 신라 헌안왕 3년(서가 859년) 강원도 철원 보개산 심원사에 조성 봉안하였던 천불 중 서기 1393년 심원사 화재와 임진왜란 때 소실 도난 되었던 바 그 중 삼존불중 한분만 본도장 국청사에 모시었다

불기 2543년 4월, 서기 1999년 5월
대한불교조계종 국청사   

 

 

국청사 대웅전

 

앗, 서문 (우익문)...

 

<- 0.6km 수어장대, ↙ 0.1km 국청사, ↓ 1.0km 전승문(북문), ↑ 1.4km 학암동  

 

서문 (우익문)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서문은 4개의 대문중 규모가 가장 작고, 산성을 처음 쌓았을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 3년(1799)에  다른 문과 같이 개축하며 우익문(右翼門)이라 칭하였다. 행궁을 중심으로 국왕은 남쪽을 바라보며 국정을 살피니, 서문이 행궁의 우측에 있어 우익문이라 하였다. 서문은 인조15년(1637) 1월 30일 왕이 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항복하기 위해 남한산성을 나간 바로 그 문이다. 남한산성의 서쪽 사면은 경사가 급해 물자수송이 어렵지만 광나루나 송파나루 방면에서 산성으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서문

서문(우익문) 외부 이정표:  

<- 1.0km 수어장대, <- 일장천약수, ↘ 위례둘레길(벌봉) 3.2km,   위례 둘레길(북문) 1.1km, ↗ 위례둘레길(덕풍골) 8.7km

 

* 보이는 성곽 코너에 송파, 강남 일대를 바라볼 수 있는 서문 전망대가 있다. 오늘은 무릅상태가 좋지 않은 집사람 때문에 가는 것을 생략한다. 이곳이 서울 시내 방향을 바라볼 수 있는 남한산성의 유일한 곳이다. 왠만하면 꼭 들러보고 수어장대로 향해야 한다.

 

=== < ▼ 2023.12.01 사진 start : 서문 전망대 > ===

오른쪽의 연주봉옹성 방향

서울 송파, 강남 방향

=== < 2023.12.01 사진 end > ===

 

 


" 위상이 남다른 4개의 문 " 

남한산성에는 4개의 문이 있습니다. 한양의 4대문 처럼 남한산성의 4개문은 좌익문(左翼門: 동문), 우익문(右翼門: 서문), 지화문(至和門: 남문), 전승문(全勝門: 북문) 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한양 도성의 문 이름과 비슷하지요? 가장 크고 넓은 문이 지화문입니다. 지화문은 좌익문과 함께 남한산성의 핵심 도로인  봉화로에 설치된 성문입니다. 왕의 행렬, 마차와 수레, 여러 장사치들과 주민들이 드나들었던 지화문은 남한산성 옛길을 따라 좌익문과 이어지게 됩니다. 이 길은 남한산성 옛길의 가장 핵심적인 루트입니다. 남한산성 옛길은 산성 로터리를 중심으로 북문, 서문, 남문을 일주하는 노선을 따라 이루어져 있습니다.

감이동  1.9km


감이동 - 성불사, 청운사 - 왕행길 - 현위치, 우익문(서문) -전승문(북문) / 지화문(남문)-.

서문노선 2.1km  

 

우익문

 

수어장대 가는 길

 

1코스

남한산성 역사 테마길

현위치 서문 (우익문 인근)

 

1코스 장수의 길 <-->

5코스 산성의 길 <-->

 

남한산성의 흐름

 

<- 1.0km 전승문(북문), <- 0.3km 유익문(서문), <-  1.2km종로, -> 지화문(남문) 1.8km

 

송파, 탄천, 대모산 방향

 

<- 1.3km 전승문(북문), <- 0.6km 유익문(서문), -> 수어장대 0.3km,  -> 지화문(남문) 1.6m

 

남한산성 (사적 제57호):

 

1 남한산성 행궁, 2 수어장대, 3 숭렬전, 4 청량당, 5 현절사, 6 침괘정, 7 연무관, 8 지수당, 9 장경사, 10 망월사, 11 개원사, 12 제1남옹성, 13 제2남옹성, 14 남문(지회문), 15 서문 (우익문), 16 연주봉옹성, 17 북문(전승문), 18 동문(좌익문), 19 장경사신지옹성, 20 동장대터, 21 봉암성, 22 벌봉 

 

남한산성은 조선시대 뿐 아니라 삼국시대부터 천연의 요새로 중요한 역할을 하던 곳이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의 욍성이었다는 기록이 있고, 나당전쟁이 한창이던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한산주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기록도 있다. 고려시대에는 몽고의 침입을 격퇴한 곳이기도 하고 일제강점기에는 항일운동의  거점이 되기고 한 곳이다. 그러나 남한산성은 주로 병자호란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조선 인조 14년(1636)에 청나라가 침략해 오자 왕은 이곳으로 피신하여 항전하였으나, 왕자들이 피신해 있던 강화도가 함락되고 패색이 짙어지자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 나가 치욕적인 항복을 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남한산성은 패배를 알지 못하는 곳이다. 성의 외부는 급경사를 이루어 적의 접근이 어렵고, 내부는 경사가 완만하여 넓은 경작지와 물을 갖춘 천혜의 전략적 요충이기 때문에, 병자호란 당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청군에 함락당하지 않고 47일간이나 항전할 수 있었던 곳이다. 이처럼 오랜 기간동안 우여곡절을 가진 성의 역사처럼 성곽의 형태 또한 단순하지 않아서 하나의 폐곡선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본성, 봉암성, 한봉성, 신남성 5개 옹성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조이다. 인조 4년(1636) 에 중앙부의 가장 큰 폐곡선인 본성이 완성되었고, 병자호란 이후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동쪽의 봉암성, 한봉성 등을 비롯하여 여러차례 증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수어장대

 

수어장대(守禦將臺) 와 청량당(淸凉堂)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 제3호):


수어장대는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목적으로 지은 누각이다. 남한산서에 있던 5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있으며, 성 안에 남아있는 건물중 화려하고 웅장하다...남한산성 축성때 단층으로 지어 서장대라 불리던 것을 영조 27년 유수 이기진이 왕명을 받아 이층으로 다시 짓고 '수어장대'라 편액을 달았다. 수어장대 2층 내부에는 '무망루'라는 편액이 달려 있었는데,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다가 귀국하여 북벌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지은 것이다. 현재 무망루 판액은 수어장대 오른편에 보호각을 지어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보관하고 있다.

청량당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 사당은 남한산성 쌓을 때 동남측 축성의 책임자였던 이회 장군과 그의 부인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이회는 공사비를 횡령했다는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고 이 소식을 들은 부인 송씨는 한강에 몸을 던져 따라죽었다. 이회는 죽을 때 자신의 죄가 없으면 매 한마리가 날아올 것이라 에언 했는데 과연 매가 날아와 그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한다. 후에 누명이 벗겨지고 그가 맡은 공사가 가장 잘된 것으로 알려지자 사당을 지어 초상을 안치하고 넋을 기렸다. 원래의 청량당은 6.25 전쟁때 소실 되어 다시지었다. 서장대가 있는 산 이름이 청량산이므로 청량당이라 이름 지었다.

 

 

청량당(淸凉堂)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호):  

청량당: 청량당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 사당은 남한산성 쌓을 때 동남측 축성의 책임자였던 이회 장군과 그의 부인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이회는 공사비를 횡령했다는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고 이 소식을 들은 부인 송씨는 한강에 몸을 던져 따라죽었다. 이회는 죽을 때 자신의 죄가 없으면 매 한마리가 날아올 것이라 에언 했는데 과연 매가 날아와 그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한다. 후에 누명이 벗겨지고 그가 맡은 공사가 가장 잘된 것으로 알려지자 사당을 지어 초상을 안치하고 넋을 기렸다. 원래의 청량당은 6.25 전쟁때 소실 되어 다시지었다. 서장대가 있는 산 이름이 청량산이므로 청량당이라 이름 지었다.  

 

사적 제57호 남한산성  

남한산성 수어장대:  보물

장대란 지휘와 관측을 위해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누각 건물로 남한산성에는 5개의 장대가 있었다. 수어장대는 남한산성 서쪽에 있어 본래 '서장대' 라고 불렸다. 병자호란 당시에는 단층 누각이었고, 수어청 우영장이 서장대에 머물며 군사를 지휘하였다. 이후 영조 27년(1751)에 유수 이기진이 복층으로 중건하고, '수어장대'라는 편액을 달았다. 지금의 수어장대 현판은 헌종 2년(1836)에 유수 박기수가 수어장대를 증축하였는데, 그 형인 박주수가 쓴 것이다. 수어장대에서는 수어사가 수어청의 군사를 지휘하였는데, 정2품 상사에 해당하였다. 수어청은 한양을 수비하는 5군영의 하나로, 본래 한성부 북부 진장방 (오늘의 서울 종로구 삼청동, 팔판동,화동 일부)에 그 본청이 있고, 광주부윤을 부사로 삼아 남한산성을 관할케 하였다.  그러다 운영의 효율성을 도모하고자 정조19년에 본청을 완전히 남한산성으로 옮기고, 광주유수가 수어사를 겸하게 하였다. 남한산성 수어장대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로 관리되어 오다 2021년에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승격되었다. 또한, 수어장대는 세계문화유산 남한산성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 중 하나인 군사 경관 (장대)에 해당한다. 수어장대는 여러 문헌에 등장하는데,  그중 조선 숙종의 정비인 인경왕후의 아버지 김만기는 <서장대기>에서 아래와 같이 언급하였다.

" 비록 한강의 흐름을 기울여도 그날의 비린내는 씻지 못할 것이다. 만약에 혹시라도 풍경이나 구경하고 유람이나 탐하면서 다시는 감개하고 탄식하는 마음이 없다고 하면 이는 이른바 그 양심을 잃은 자이다. "    

 

 

수어장대.

 

※ 병자호란 주요 연표:

1598년 (선조 31년): 임진왜란 끝남.
1608년 (선조 41년): 광해군 즉위.
1616년 (광해군 9년): 누루하치 후금 건국.
1618년 (광해군 11년): 명과 후금의 전쟁, 명에 원병 파견함.
1619년 (광해군 12년): 강홍립 후금에 투항. -> (중립외교).
1622년 (광해군 15년): 명나라 장수 모문룡 가도에 주둔.
1623년 (광해군 16년): 인조반정으로 인조 즉위. -> ( 친명배금정책 )
- 1624년 (인조 2년): 이괄의 난.
1627년 (인조 5년): 정묘호란 발생.
1635년 (인조 13년): 후금 내몽고 점령.

- 1636년 (인조14년): 후금 청으로 국호 변경하고, 조선에 군신관계 요구 ( 척화론과 주화론 대립 ).

                                  12월 28일 병자호란 발생. 남한산성 전투.
1637년 (인조 15년): 2월 24일 인조 송파 삼전도에서 항복. 청과 사대관계 맺음. 
- 1644년 (인조 21년): 명나라 멸망. 청 중국 통일.

 

수어장대에 올 때마다 민족의 아픈 수난을 생각하게 된다. 왜 이러한 처참한 전쟁이 벌어졌는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역사를 돌아보며 앞으로는 이러한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힘없는 민족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갈 뿐이다. 

 

 

무망루

조선 영조27년(1751) 광주 유수 이기진이 증축한 수어장대 2층의 내편(內篇) 문루로서 그 편액(扁額)이 2층 누각에 있어 1989년 전각을 건립하고 이 안에 현판을 새로 설치 일반인이 볼 수 있게 하였다. 무망루는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혔다가 귀국 후 북벌을 꾀하다가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이믐지은 것이다.

매바위, 그리고 '수어서대" 암각글씨.

청량당에 위폐가 모셔진 남한산성 공사 책임자 중 한사람이었던 이회가 공사비 횡령에 연류되어 억울하게 처단되자 죽 전에 자신의 죄가 없다면 매가 날아와 이 바위에 앉을 것이라고 유언을 했는데, 그 후 과연 매가 날아와 매바위에 구슬피 울었다고 하며, 다시 확인해 보니 죄가 없음이 드러났으며, 오히려 다른 구간보다 성이 더 견고히 축성되었음이 밝혀졌다. 예나 지금이나 모함은 한 인간을 파멸로 이끌기도 한다.

 

수어장대에서 바라보는 벌봉 방향

 

 

▶ 하산길:

제6암문(서암문)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의  비밀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도 설치하지 않았다. 이 암문은 성벽의 흐름 방향과 달리 입구가 북서쪽을 향하고 있어 외부에서 쉽게 관측되지 않도록 하였다. 또한 북동쪽의 성벽을 돌출하여 암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원성에 설치된 12개 암문의 외측 개구부는 대부분 홍예식이지만 제2암문과 더불어 이 암문의 개구부는 평거식이다. 인조 15년(1637) 1월 23일, 한밤중에 습격해 온 청병을 크게 물리친 곳이라 하여 이 암문 부근을 '서암문 파적지'라 부른다.  

 

 

 

<- 900m 수어장대,  지화문 700m ->                  

 

병자호란:

 

우리 민족의 삶을 바꿔놓은 전쟁 "


병자호란은 조선과 청나라가 군사력으로 부딪힌 동아시아의 대사건입니다. 이 전쟁을 계기로 동아시아의 질서는 급격하게 청나라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우리 민족 역시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됩니다. 이 병자호란의 중심에는 바로 남한산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산성에서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각지의 근왕병과 지원병이 청군의 남한산성 포위를 풀지 못 한채 모두 격퇴되고 말았고, 설상가상으로 두 달 분의 비축물자가 바닥나자 결국 인조는 항복을 결심하기에 이릅니다. 패배의 결과로 인조는 송파에 위치한 삼전도로 걸어 내려가 '삼배구고두례'(*) 를 행하고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습니다. 이로 인해 조선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고 이후 수많은 변화를 맞게됩니다. 패배를 씻기 위해 북벌론이 대두되기도 하고, 명분만을 중시하던 사상체게의 변화가 일어나 수많은 실학자들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민중 계층에서도 패배한 전쟁의 결과를 극복하기 위한 수많은 민담과 설화들이 창작되었습니다. 병자호란은 시대의 변화를 알리는 기폭제였으며 동시에 우리 민족의 사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역사의 분기점이 된 사건이었습니다. 

 

(*)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삼배구고두례'는 중국 청나라 시대에 황제나 대신을 만났을 때 머리를 조아려 절하는 예법이다. 삼궤구고두례를 행하는 방식은 “”(跪)의 명령을 듣고 무릎을 꿇는다. “일고두(一叩頭)", “재고두(再叩頭)", “삼고두(三叩頭)"의 호령에 따라 양 손을 땅에 댄 다음에 이마가 땅에 닿을 듯 머리를 조아리는 행동을 3차례 하고, “기(起)"의 호령에 따라 일어선다. 이와 같은 행동을 3회 반복한다. 인조는 삼전도에서 겨울 얼어붙은 맨 땅에 머리를 9번이나 찧으면서  나라 숭덕제(崇德帝(1592 ~ 1643; 태종太宗) 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말았다.역사적인 치욕이다. 청나라의 강요로 세원진 삼전도비가 지금도 잠실 롯데백화점 곁에 있는 석천호수 서호 대로변 방향 코너에 설치되어 있다. 

 

남한산성 하산 길 동영상

 

 

칼 쓴 십자가  

" 천주교 비극의 역사, 남한산성 "

남한산성 성지성당 내부에는 순교자들의 옥에 갇혀있을 때 쓰고 있었던 칼이 채워져 있는 독특한 십자가상이 있습니다. 천주교 탄압의 본격적인 서막은 신유박해(1801년) 부터였는데요. 천주교에 대해 큰 반감이 없었던 정조가  승하하자 정순황후가 가혹한 탄압을 시작한 것이죠. 박해의 진짜 이유는 정조시기에 세력을 키운 남인을 숙청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이 신유박해 때 남한산성에서 첫 순교자가 발생하게 됩니다. 천주교 신자가 광주 및 인근 지역에서 잡히면 남한산성 포도청으로 이송되어 감옥에 갇혔습니다. 순교자들은 심문을 당하다 결국은 감옥에서 순교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교살형이나 교수형이 대부분 감옥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감옥이 곧 순교터가 되었습니다. 감옥에서 죽거나 고문 끝에 죽은 순교자들은 동문 밖으로 시신을 버렸는데 그 장소가 수구문이었습니다. 시체가 너무 많이 나가고 피가 물처럼 흘러 수구문은 시구문으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 종교의 자유를 말살하는 사회는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 그런 관점에서 보면 지금의 우리 나라는 얼마나 살기 좋은 나라인지 알 수 있다. 이 세상에서 종교를 억압하거나, 하나의 종교만을 강요하는 나라가 얼마나 많은가?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제일 척도는 종교의  자유일 것이다.  인간의 천부적인 권리인 자유를 말살하는 나라는 얼마나 악한 나라인가를 알 수 있다. 

 

 

남한산성 행궁 방향

 

 

앗, 남문(지화문)...남한산성에서 가장 큰 성문이다.

 

남한산성이 아름답다.

 

지화문

지화문:

정조3년 성곽을 보수 할 때 '지하문'이라 칭하였고 남한산성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이다.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다. 또한 현재는 성남으로 통하는 관문역할을 하고 있으며, 성문앞에 식재된 (350년 수령, 성남시 보호수) 느티나무와 함께 문화와 역사가 살아숨쉬는 시민의 역사터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 - 성남시.
 

보호수...느티나무, 수령 약 450년( 지정일자 2006.6.20), 수고 14~17m, 나무둘레 80~160m

남한산성 성곽은 인조 4년(1626년)에 준공되었으며, 느티나무(보호수)는 당시 성곽사면 토양유실 방지 및 차폐의 목적으로 식재된 것으로 추정된다. 남한산성 순환도로 터널이 개통된 후 폐도 부지가 된 남문 앞 느티나무 주변을 2006년 재정비하여 느티나무 생육환경개선 후 총 4주를 보호수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 성남시 중원구.

 

 

 

남한산성 남문 밖 동영상

 

누비길.... 성남 누비길 노선 안내

검단산 길,   성남 누비길을 일주합시다.

울창한 숲에서의 등산은 신체리듬을 회복시키고 산소공급을 원할히 하여 운동시경을 단련시키는 등 인체건강에 유익합니다. 시민 여러분의 건강과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성남누비길을 일주해 봅시다.

누비길 코스:

1구간:  남한산성길 7.5km ( 4시간 )
2구간:  검단산 길  7.4km ( 3시간 30분 )
3구간:  영장산 길 9.7km ( 4시간 30분 )  
4구간:  불곡산 길 8.8km ( 4시간 )
5구간:  태봉산 길 10.7km  ( 4시간 30분 )  
6구간:  청계산 길 8.5km  ( 4시간 30분 )  
7구간:  인능산 길 9.5km ( 4시간 )

> 검단산 길:

검단산은 태백산맥의 철령(鐵嶺) 부근에서 분기하여 서울 부근에 이르는 광주산맥의 지맥으로서 남한산성과 연결되는 산줄기를 이루며, 높이는 534.7m이다. 경기도 성남시 동쪽으로 광주시와 경계를 이루며, 전체적으로 '凹(요)'자 모양의 산지를 형성한다. 이 산을 중심으로 하는 성남시의 동쪽 산지는 남쪽으로 갈 수록 해발고도가 낮아지며 완만한 산이라 하여 그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  산성역 -  불망비 -  남문(지화문): 3,7km    

검단산길 2코스:   남문(지화문) - 1.0km- 산림초소 - 1.4km - 검단산 정상 (536.4m)  - 1.4km - 만수천 약수터 - 0.7km -  망덕산 정상 ( 500.3m ) - 0.5km - 형제봉 정상 ( 435m ) - 0.8km - 이배재고개 - 1.8km - 갈마치고개.

누비길 검단산길 구간...."여기부터 제2구간입니다. " 

호국정신과 선비정신이 깃든
남문 앞 역사터 안내

- 남한산성은 한성 백제시대의 성산이요 진산의 개념으로 백제의 시조 온조대왕의 사당 숭렬전(경기도유형문화재 제2호)이 있는 곳이다.
- 남한산성은 통일신라시대에는 주장성(晝長城) (일장(日長)산성)으로 불렀으며 한강유역의 중요 산성으로 발전하였다. 
- 고려시대에는 몽고군의 침입을 물리친 국방의 요새지 이었다.
- 조선왕조 제16대 인조임금 원년(1623)에 성의 축성을 시작하여 1826년에 완성 (본성의 둘레가 9.05km)하니 남한산성은 경도보장지(京都保障地)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 남한산성은 주봉인 청량산(497.8m) 을 중심으로 4대문과 18암문을 완성하고 성내에는 행궁을 비롯하여 수어장대 등 각종 문화유적이 남아있고, 현재는 경기도 도립공원(국가사적 제57호)으로 성남시, 하남시, 송파구, 광주시 등 4개 지방자치 단체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 특히 남문은 성의 서남쪽 곡저부의 해발 370M 지점에 위치하여 있으며 정조 3년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하여 지화눈(至和門)으로 칭하였고,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 문이며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으며 성남으로 통하는 관문 역할을 하는 문이다.
- 인조 14년에 청태종의 침공(병자호란)으로 인조 임금이 이곳으로 피신하여 45일간 항전한 유서 깊은 곳이다.
- <남문 앞 역사 터>는 성남시가 문화재청과 협의를 거쳐 2007. 5.15부터 약 6개월간의 공사로 2007.11.19 준공하였으며, 성문 앞에 식재된 380여년 된 느티나무와 원형이 가장 잘 보전된 것으로 평가받는 남문은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역사 공간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 
- 성남시 보호수인 느티나무(4주)는 성곽방어의 특성을 고려하여 남문을 시각적으로 차폐하기 위하여 식재하였을 가능성과 성문 주변이 평상시 왕래가 많고 지형상 경사가 심하여 우수 시에 토양유실을 막기 위해 식재하였을 것으로 추론되는 역사터다.   - 성남시

남문(지화문) -  백련사 - 주 등산로 - 산성유원지 입구 - 검단산 - 시계 등산로 -   남문 (지화문)      

남문 앞 이정표:   <- 1.5km 수어장대, <- 2.1km 우악문(서문), -> 종로 0.7km.

남문  南門.至和門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남문은 남한산성에 있는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으로 현재에도 출입이 가장 많은 문이다. 선조 때의 기록을 보면 동문, 남문, 수구문의 세 문을 수축하였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남문은 인조 2년(1624)수축되기 이전 부터 이미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남문은 정조 3년(1779) 성곽을 보수할 때 개축하며, 지화문(至和門)으로 이름이 붙여졌으며 4대문 중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는 문이다.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처음 남한산성에 들어올 때 바로 이 문을 통해서 들어왔다.  

 

세계유산 남한산성 종합안내판


1코스: 산성로터리- 북문- 서문- 수어장대- 영춘정- 남문- 산성로타리 ( 3.8km, 1시간 20분 )
2코스: 산성로터리- 영월정- 숭렬전- 수어장대- 서문- 국청사- 산성로타리 ( 2.9km, 1시간 )
3코스: 남한산성 역사관주차장- 현절사- 벌봉- 장경사- 망월사- 지수당-  남한산성 역사관주차장 ( 5.7km, 2시간 )
4코스: 산성로터리- 남문- 남장대터- 동문- 지수당- 개원사- 산성로타리 ( 3.8km, 1시간 20분 )
5코스: 남한산성 역사관주차장- 동문- 동장대터- 북문- 서문- 수어장대- 영춘정- 남문- 동문 ( 7.7km, 3시간 20분 )

 

 

남한산성 비석군

 

남한산성 비석은 역대 광주유수, 수어사, 부윤, 군수들의 선정*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비의 앞면에는 비석명, 뒷면에는 건립시기 및 관련자에 대한 내용이 새겨져 있다. 이곳 비석들의 원위치는 남한산성 행궁 주변이었다. 남한산성 행궁 복원 사업으로 현자리로 옮겼으며, 이 비들을 통해 세계유산 남한산성 통치경관의 한 요소를 엿볼 수 있다. 

* 선정; 백성을 바르고 어질게 다스림.

1. 흥선대원군영세불망비 (1863),   2. 전 군참사 이용식 거사비 (1932),  

3. 전 군수 강원달 영세불망비 (1911-1915),  4. 겸유수 수어사 민치구 영세불망비 (1868),  

5. 유수겸 수어사 홍학연 선정비 (1850),  6. 부윤 서리 양주군수 홍태윤 영세불망비 (1985)
7. 유수겸 수어사 심상규 거사비 (1818),  8. 유수겸 수어사 김이채  거사비 (1835)
9. 수어사 이조원 거사비 (1816), 10. 유수 겸 수어사 남병철 영세불망비 (1863)
11. 유수 겸 수어사 정기선 거사비-1 (1836), 12.  유수 겸 수어사 정기선 거사비-2 (1836)
13.  유수 겸 수어사 김교근 선정비 (1841), 14. 흥선 대원군 영세불망비 (1864)
15.  유수 겸 수어사 박희수 영세불망비 (1860), 16. 유수 겸 수어사 조경호 영세불망비 (1884)
17. 유수 겸 수어사 남정손 영세불망비 (1885), 18. 유수 겸 수어사 김윤식 영세불망비 (1888)
19. 유수 겸 수어사 민영소 영세불망비 (1891), 20. 유수 겸 수어사 박기수 선정비 (1837)
21. 유수 겸 수어사 서희순 선정비 (1846), 22. 유수 겸 수어사 조두순 선정비 (1851)
23. 유수 겸 수어사 이지연 거사비-1 (1829), 24. 유수 겸 수어사 이지연 거사비-2 (1829)
25. 유수 겸 수어사 이지연 거사비-3 (1829), 26. 부윤 김수홍 영세불망비 (1705)
27. 부윤 정지선 선정비 (1707), 28. 부윤 박태순 선정비 (1705), 29. 부윤 이제 선정비 (1705)

30. 유수 겸 수어사 조석우 영세불망비 (1873)

 

남문터널 앞....시내버스가 자주 있다. 대중교통이 편리하다. 지하철 산성역 2번 출구 앞에서 승차하면 남한산성에 쉽게 올 수 있다. 

 

8호선 산성역 2번 출구 앞 버스 정류장 -> 남한산성 행. 

9번:  사송동 - 산성역 -  을지대학교 - 남한산성입구 - 남한산성  ( 배차간격: 20-30분 )
9-1번: 산성역 - 남한산성 (휴일 운행, 남한산성 직행 ) (배차간격: 7-10분
53번: 남위례역 - 산성역 - 남한산성 (주말운행, 남한산성 직행(배차간격: 35-45분) 1대 운행중.
52번: 모란시장 - 산성역- 남한산성 (남한산성 직행 ( 배차간격: 130-150분)

 

남문주차장은 지금 공사 중...
 

남한산성 행궁 방향


행궁(行宮):  왕이 도성을 떠나 행행(行幸)할 때 임시로 머무는 곳으로, 전란시·능행시·휴양 등의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조선시대에는 수원행궁, 강화행궁, 전주행궁, 의주행궁, 양주행궁, 온양행궁 등 10여개 이상의 행궁이 있는데, 그 중 남한산성행궁은 전쟁이나 내란 등 유사시 후방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한양 도성의 궁궐을 대신할 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하여 인조 3년(1625) 남한산성 수축과 함께 건립되었다. 실제로 약 10년 후인 1636년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47일간(1636.12.14~1637.01.30) 항전하게 된다. 이후 숙종·영조·정조·철종·고종이 여주에 있던 효종릉(寧陵) 등의 능행길에 머물러 이용하였다. 남한산성행궁은 종묘(좌전)와 사직(우실)을 두고 있는 유일한 행궁으로 일반적인 행궁에 머물지 않고 유사시 임시수도의 중요한 역할을 하던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국가사적480호이다. - < 남한산성 도립공원 >
 

천흥사 동종 종각 방향

남한산성 종각의 천흥사 동종  

남한산성의 천흥사 동종은 높이 170cm, 지름 100cm로 몸체에 세겨진 명문 ‘聖居山天興寺銅鐘總和二十八年庚戌二月日' (성거산 천흥사 동종 총화 이십팔년 경술이월일)’ 에 따르면 고려 현종1년(1010)에 주조된 것으로 원래는 태조4년(921)에 태조가 창건한 충청남도 천안시 성거읍 천흥리 천흥사에 있었다고 한다. 남한산성으로 언제 옮겼는지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 산성 내 시간을 알려주는 역할을 했으며 이후 일제강점기 이왕가박물관에 옮겨지고, 해방이후 덕수궁 미술관을 거쳐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엇다. 현재 종은 원래의 모양 및 형태 그대로 재현 한 것으로 타종시 울림을 좋게하기 위하여 약 3배 정도 더 크게 제작하였다. 

 

종로 로터리 옆 공영주차장

 

종로 로터리

 

 

제2길 한양삼십리길

남한산성에 이르는 길봉화로:

사람들은 예로부터 자신이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가장 빠르고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왔습니다. 현대의 길 역시 똑같은 목적으로 길을 만들지만 옛길과 가장 큰 차이점은 자연에 순응하기 보다는 현대의 공법과 기술을 동원하여 차량이 다닐 수 있는 대로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옛길은 자연에 순응하면서도 가장 합리적인 길이고,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쉬는 길이자 자동차가 아닌 사람이 걷는 길이기 때문에 가장 인간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봉화로 역시 마찬가지로 한양에서 행궁인 남한산성으로 가는 가장 빠르고 안전한 길을 만든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는 한양에서 율목창리(현재 성남 일원)를 거쳐 남한산성에 이르는 옛길을 가장 많이 이용하였고, 광진나루를 거쳐 하남시를 통과해 오는 길도 이용되었습니다. 특히, 봉하길 구간의 노선은 삼국시대 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화유산과 이야기가 산재되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봉화길 안내 경기옛길센터 031.231.8524       

 

남한산성 로터리 소공원

cafe 여담

다시 순교자현양비

 

천주교 성당

 

개방시간: 09:00 - 16:45

 

* 주님 만찬 성 목요일(3/28):  미사 20:00 (11:00 미사는 없습니다)

* 주님 수난 성 금요일(3/29) 미사: 십자가의 길 14:00, 수난 예식 15:00  

* 성 토요일 파스카 성야(3/30): 미사 20:00 (11:00 미사는 없습니다)

* 주님 부활 대축일(3/31): 미사 11:00

 

성모 마리아 상

 

성모송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Hail Mary,
full of grace, the Lord is with thee.
Blessed art thou amongst women
and blessed is the fruit of thy womb, Jesus.

Holy Mary, Mother of God,
pray for us sinners,
now, and in the hour of our death.


Amen.

 

" 하느님의 어린 양 "   말 구유에서 탄생하신 예수님...

 

↖ 야외제대, -> 야외제대, -> 순례자의 집

 

성지순례지도

 

남문(지화문) / 남문주차장 / 행궁(좌승당)
포도청과 옥터 / 순교현양비 / 남한산성순교성지 / 야외미사터 / 성당 / 시구문(제11암문) / 동문(좌익문) / 순교자 시신이 버려진 계곡 / 동문밖 형장/ 복자 한덕운 토마스 순교터 

 

개방시간: 09:00 - 16:45

미사시간: 화요일~주일: 오전 11:00

 

* 후원가족을 위한 미사

 

남한산성 순교성지의 성역화를 위하여 후원해 주시는 후원가족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기도가 필요한 지향을 성지 사무실로 알려주시면 화보에 게재후 성지의 사제와 봉사자들이 특별히 기억하며 기도할 것입니다. 또한 성지의 후원회원들을 위한 마사가 매주 토요일 11:00 (첫째주 샘미사, 둘째주 연미사, 셋째주 가정미사, 넥째주 축일미사에 지향대로 봉헌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