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창덕궁, 창경궁
- ( 2024.09.01 )
《 창경궁 》
창경궁 (昌慶宮):
본래 창경궁 터에는 1418년 세운 수강궁(壽康宮)이 있었다. 수강궁은 세종 때 상왕(上王) 태종을 위해 창덕궁 동편에 창건한 궁이었다. 1483년 성종이 3명의 대비를 위해 이 터에 크게 궁궐을 다시 짓고 창경궁이라 불렀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사실상 하나의 궁궐을 이루어 이 둘을 합쳐 동궐(東闕)이 라 하였고, 후원의 정원도 공동으로 이용했다. 창경궁은 창덕궁의 부족한 생활공간을 보충하여 왕과 왕비뿐 아니라 후궁, 공주, 궁인의 처소로도 사용해했다. 경복궁처럼 일정한 원칙을 좇아 경영된 궁궐과 달리 창경궁은 건축형식과 재도 면애서 자유롭게 세워지고 이용된 궁궐이었다. 궁궐은 남향이 원칙이지만 창경궁 중심부분은 특이하게도 동향으로 배치되어있다. 동쪽애 왕실 동산인 함춘원(含椿苑)과 낙산이 자리잡고 있어 그곳을 바라볼 수 있도록 지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생활 공간들은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창경궁은 자연지형을 따르면서도 생활의 편의를 추구하여 궁궐을 조성했기 때문에 아름다움과 친근함을 두루갖춘 궁궐이 되었다. 임진왜란(1592년) 때 서울의 다른 궁궐과 함께 불에 탔다가 1616년에 재건되었다 이 때 다시 세운 명전전, 홍화문 등은 창경궁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궁궐 건물들에 속한다. 창경궁의 전성기는 1830년대였다 동궐도(東闕圖)에는 여러 대비궁, 후궁과 공주들의 처소, 궐내각사들이 촘촘하게 들어서고 곳곳에 정원시설이 조화를 이룬 당시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에 창경궁 안의 건물들을 대부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여 시민공원으로 바꾸고 이르마저 창경원(昌慶苑)으로 격하시켰다. 또한 종묘와 연결된 땅의 맥을 끊고 그 사이에 도로를 개설하여 궁궐의 품격을 훼손했다. 1983년 부터 동물원을 이전하고 본래의 궁궐모습을 되살리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비록 아직 많은 유적들을 복원하지 못했지만, 아름다운 자연과 어우러진 창경궁의 모습에서 왕실 생활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통명전
통명전 내부
양화당
통명당과 양화당 (通明殿, 養和堂)
통명전(보물 818호)은 1834년에 다시 세운 일상 생활공간인 내전의 중심 건물답게 넓은 월대를 쌓고 지붕 가운데 용마루가 없다. 가운데 세간은 대청마루를 두고 양 옆에 온돌방을 두어 왕과 왕비의 침실로 썼다. 서쪽 마당에는 동그란 샘과 네모난 연못이 있고, 그 사이의 물길을 둘로 공들여 만든 정원이 있다. 1834년에 다시 지은 양화당은 대비의 침전이지만,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던 인조 임금이 돌아와 거처하기도 했다.
집복헌 & 영춘헌
이 일대는 생활공간이 밀집된 영역이었다. 현재 집복헌은 마치 영춘헌의 서쪽 행각처럼 붙어 있으나 원래는 두 집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1983년에 다시 세우면서 지금처럼 바뀐 것으로 보인다. 사도세자와 순조가 집복헌에서 탄생했다. 정조는 영춘헌에서 독서를 즐겼으며 이곳에서 돌아가셨다. 이 건물의 동쪽에 궁녀들의 생활공간으로 추정되는 건물들이 많았으나, 지금은 빈터이다.
정면의 양화당
통명전
경춘전(景春殿)
경춘전의 '경춘(景春)'은 '햇볕 따뜻한 봄'이라는 뜻이다. 1484년(성종 15) 창건 당시에 건립된 침전 건물로 주로 왕대비, 왕비 또는 세자빈 등이 거처했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이괄의 난 등으로 여러 차례 소실되었다가, 1834년(순조 34)에 중건되었다. 편액의 글씨는 순조의 어필이다. 이곳에서는 22대 정조와 24대 헌종이 태어났고, 성종의 생모 소혜왕후, 즉, 인수대비 한씨와 숙종비 인현왕후 민씨, 정조의 생모 헌경왕후, 즉 혜경궁 홍씨 등이 승하하였다. 사도세자는 정조를 낳기 전에 용이 이곳 경춘전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경춘전 동쪽 벽에 용 그림을 그려두었다. 정조는 본인의 탄생을 기념해 경춘전 내부에 ‘誕生殿(탄생전)’이라 쓴 현판을 걸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환경전(歡慶殿)
환경전은 창경궁의 내전(內殿) 건물 중 하나로 세자나 국왕이 생활하던 곳이며, 중종과 소현세자가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성종 때(1484년) 창건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지고, 1616년(광해군 8)에 중건되었다가, 1830년(순조 30)에 화재를 당한 후 1834년(순조 34)에 다시 중건되었다. 이 건물은 빈전과 혼전으로 사용된 예가 많았는데, 빈전은 왕 또는 왕족의 시신이 들어 있는 재궁(관)을 모신 건물을 말한다.
함인정
함인정 (涵仁亭):
함인정은 햇볕이 잘 드는 남향에, 넓은 뜰이 전면에 있어 임금이 많이 사용한 곳이다. 이곳에서 임금은 과거에 합격한 인재들을 만나고, 신하들과 중용∙심경과 같은 고전을 읽으며 경연을 자주 나눴다. 특히 영조와 정조 때 많이 사용되었다. 지금의 함인정은 사방이 트여있지만 19세기 초 궁궐그림인 동궐도에서는 함인정의 삼면이 막혀 있었다.
함인정 내부 현판 글씨...
" 春水滿四澤(춘수만사택) " ... 봄 물은 가득차고
" 夏雲多奇峯(하운다기봉)" ... 여름 구름 묘한 봉우리 많기도 하다
" 秋月揚明輝(추월양명휘)" ... 가을 달은 높이 떠 밝게 비취고
" 冬嶺秀孤松(동령수고송)" ... 겨울 고개 소나무 한 그루 아름답구나
6층 석탑
빈양문 (賓陽門):
빈양문은 명정전에서 뒤편의 문으로, 왕의 공적 공간인 명정전과 사적 공간인 내전을 연결하는 문이다. '빈양(賓陽)'은 ‘밝음을 공경히 맞이한다’라는 뜻으로, 밝음은 국왕을 상징한다. 지금의 빈양문은 일제에 의해 강제 철거되었던 것을 1984년 발굴을 통해 1986년 중건 공사 때 재건한 것이다.
주목(朱木).
주목은 나무줄기와 가지가 붉은 빛을 띠어 붙여진 이름이다. '살아 천 년 죽어 천년' 이라는 말대로 천년을 훌쩍 념겨 살고, 죽은 다음에도 천년이 넘도록 썪지 나무로 알려져 있다. 이 주목은 18세기 초에 심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2023년 고사하였으나 역사적 가치를 인정하여 방부처리 과정을 겨쳐 지금 여기에 서있다.
숭문당 & 문정전
문정전
문정문
문정전
문정전(文政殿) 일원:
문정전은 임금이 신하들과 회의를 열고, 국가정책의 의견을 나누던 창경궁의 편전(便殿: 집무실)으로, 동향인 명전전과 달리 남향 건물이다. 편전이면서도 왕실의 혼전(魂殿: 죽은 사람의 이름 등을 적은 신주를 모시는 곳)으로도 자주 쓰였다. 아버지 영조의 손에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의 비극도 문정전이 혼전으로 쓰이던 것과 관련이 있다. 문정전 일원은 일제 강점기 때 훼손되었고 1986년에 건물을 다시 세웠으나, 서쪽에 있던 담장과 화계정원은 아직 다시 짓지 못하고 있다.
문정전 내부
숭문당(崇文堂):
숭문당은 명정전의 후전(後殿)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숭문당은 임금님이 신하들과 경연을 열어 정사와 학문을 토론하던 곳으로 1830년 다시 세웠다. 앞쪽에 설치한 누각형 툇마루로 출입하였고, 영조 임금의 친필 현판이 현재까지 남아있다.
명전전(明政殿):
명정전은 조선 중기에 세워진 창경궁의 정전(正殿)이다. 돌로 된 월대 위에 목조건물로 세워졌으며, 정면 5칸, 측면 3칸, 단층 다포계 팔작지붕이다. 정전은 왕이 문무백관과 왕세자, 척신에게 조하를 받고 정령(政令)을 반포하며 외국의 사신을 맞이하는 등 국가의 가장 공식적인 의례가 행해지는 전각을 가리킨다. 모든 궁궐 건축에 있어서 정전은 규모와 형태 등의 측면에서 최상위에 위치하며 전체의 배치도 정전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 대한민국의 국보 제226호 )
명전전 앞 뜨락...신하들 품계석이 보인다.
명전전 용상
명전문
명정전
옥천교
옥천
▶ 창경궁 춘당지, 식물원:
춘당지(春塘池) 일원:
춘당지는 창덕궁 쪽 절벽인 춘당대와 짝을 이룬 연못이었으나 지금은 담장으로 나뉘어 있다. 현재 소춘당지가 원래의 춘당지이고, 대춘당지는 1909년에 내농도(內農圖)에 속한 11개 논을 하나의 연못으로 만든 것이다. 내농포는 임금과 왕비가 각기 농사와 양잠을 체험할 수 있도록 궁궐안에 둔 논과 뽕밭이다. 대춘당지의 섬은 1984년에 만들었다.
창경궁 춘당지 동영상
펄각칠층석탑:
보물로 지정된 이 탑의 기단부는 4각형 받침돌과 8면에 안상을 새긴 2단 고임돌과 8면에 안상과 꽃을 새긴 연화대좌로 구성하였다. 7층의 탑신부는 기와지붕 건물 모양이며 1층은 연화좌 위에 높고 볼록한 몸돌을 얹었다. 꼭대기에는 흰돌로 만든 보 주장식을 올렸다. 1층 몸돌에 새겨진 "성화(成化)6년' 이란 글씨를 근거로 1470년(조서 성종)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춘당지 동영상
식물원
아, 벼가 익어가는 모습
관덕정과 집춘문 ( 觀德亭, 集春門 )
관덕정은 1642년에 지었으며 활을 쏘던 정자였다. 앞쪽의 넓은 빈터는 군사훈련과 무과 시험장으로 쓰였다고 한다. 정자 뒤로는 단풍숲이 우거져 여러 임금들이 단풍의 아름다움을 읊은 시가 전한다. 집춘문은 관덕정 북쪽 담장에 난 궁문으로 문묘(文廟, 또는 성균관)가 마주 보이는 곳에 있다. 역대 임금님들이 문묘로 나갈 때 이 문을 이용했다.
백송
백송은 나무껍질이 하얗고 껍질 조직이 오래되면 저절로 떨어지는 특징이 있으며 잎은 3개씩 모여 난다. 백송은 중국이 원산지인 희귀한 나무로 조선 시대에 중국을 와래하던 사신들이 가져다 심었다. 현재는 대부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홍화문
홍화문(弘化門)
창경궁 홍화문은 창경궁의 정문으로 조선 성종 15년(1484)에 지은 건물이다. 임진왜란(1592) 때 불에 타, 광해군 8년(1616)에 다시 지었고 지금 있는 건물은 그 뒤로도 여러 차례 수리하였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의 2층 건물로 동쪽을 향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며, 지붕은 앞쪽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아래층은 기둥 사이마다 2짝씩 문짝을 달아 사람이 드나들게 하였으며 위층은 마루를 깔고 앞뒤 벽면에 조그만 널문들을 달아 여닫을 수 있게 만들었다. 지붕 꼭대기 양끝의 조각과 부드럽게 굽어 내린 내림마루 부분의 조각상이 건물의 위엄을 한층 더 돋구고 있다. 여러 차례의 수리와 단청으로 고유의 아름다움을 잃었지만, 창경궁·창덕궁과 같은 건물과 함께 17세기 초반 목조건축의 연구자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건물이다.
창경궁 홍화문은 다른 문과 달리 매우 독특한 용도로 활용된 적이 있다. 영조는 조선의 역대 임금 가운데 가장 긴 52년간 재위하였다. 비록 자신의 아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지만, 달라지는 시대적 변화에 맞춰 민생문제를 해결하려 하였고, 학문을 진작시켰으며, 탕평책을 통한 왕권의 안정 등 다방면에서 업적을 남겼다. 그는 1749년 음력 8월, ‘임문휼민의(臨門恤民儀)’를 직접 만든다. 임금이 직접 궁궐 정문에 나아가 백성들의 어려움을 듣고 위로하며 곡식을 나누어주는 궁중의례다. 영조는 의례를 만든 지 채 열흘이 되지 않아, 홍화문에 왕세자를 거느리고 나아가 의례를 행하였고, 이후에도 여러 번 백성의 어려움을 직접 듣고 위로하였다. ‘조화(造化)를 넓힌다’는 뜻의 ‘홍화(弘化)’에 맞게, 임금이 직접 백성의 의견을 묻고 듣는 소통의 조화를 이루는 장소로 사용된 것이다. - 국가유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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