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형무소, 안산(296m), 봉원사
- ( 2025.02.28 )
내일이 106주년 삼일절인데, 때마침 서대문형무소와 인근의 안산(296m) 정상을 산행하여 보았습니다. 서대문 형무소는 일제 시대의 악명 높은 감옥소입니다. 얼마나 많은 독립지사들이 이곳에서 처형되거나 고초를 당했는지 모릅니다. 특히 순국열사 유관순 동상 앞에서는 어린 18세의 나이로 나라의 독립운동을 하다 이곳에서 모진 고문으로 순국하고, 고향 아우내장터에서는 3000여명의 군중과 같이 독립만세를 외치다 아버지, 어머니가 총살당하는 아픔을 겪은 유관순 열사를 생각하며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나는 오늘은 감옥소 내부를 돌아보지 않고, 늦은 시간이므로 운동을 조금 하려고 바로 안산 산행을 하였습니다. 안산은 낮은 산이지만 정상에 봉화대가 있으며, 주변의 경치가 남달리 수려합니다. 마주보는 인왕산(338m)의 모습이 아름답고, 멀리 서울의 배후를 이루는 국립공원 북한산(727m)의 경치가 또한 아름다운 곳입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남산(270)과 서울n타워는 서울의 랜드마크 같아보입니다. 남쪽으로는 한강이 좌우로 흘러내리고 있으며 서울 시내 경치를 굽어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시계가 맑지 않아 한강 너머의 관악산 등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안산 등산을 한 후에는 하산길에 봉원사 절을 들러보았습니다. 봉원사 절은 낮은 안산 자락에 있지만 규모는 상당한 것 같았습니다. 봉원사 절에서 조금만 내려오면 숲속한방랜드가 있으며, 그 앞에 봉원사 공용주차장과 7024 시내버스 종점이 있습니다. 나는 이 버스를 타고 5호선 서대문역에 내려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옸습니다. 조금 늦은 시간에 바쁘게 산행을 마쳤지만 오랜만에 가보는 안산 경치는 잊지 못할 것입니다.
▶ 산 책 : 걸음수 7,530 steps, 거리 4.23 km, 소모열량 246 kcal, 소요시간 01:18 hrs, 속도 3.2 km/h, 기온 13 ℃.
▶ 코 스 : (3호선) 독립문역 - 서대문형무소 - 안산 정상(봉수대) - 봉원사.
● 서대문형무소:
독립문역 4번 출입구
독립문
독립관
3.1운동기념탑
애국열사 유관순
유관순 열사 어록
"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참을 수 있아오나
내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를 위해 바칠 목숨이 하나 밖에 없는 것 만이
나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
( 유관순 열사 마지막 유언)
유관순 동상
유관순은 1902년 12월 16일 충남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 (현 주소: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유관순 생가길 18-2)에서 태어난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 때 거족적인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곧 귀향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장터에는 아침 일찍부터 천안 일대뿐만 아니라 청주, 진천동에서 3천여 명의 시위 군중이 모여들었으며, 이 때 유관순은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시위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고 시위 대열의 선두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 행진을 주도하였다. 이에 일본 헌병은 총검을 휘두르고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여 유관순의 아버지 유종권과 어머니 이소재 등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30여 명이 부상 당하였으며, 일제는 유관순을 이 독립만세운동의 주동자로 체포하였다. 유관순은 옥중에서의 모진 고문에도 1920년 9월 28일 18세의 꽃다운 나이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할 때 까지 계속 대한민국만세를 외쳤디. 정부에서는 유관순 열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2019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가로 서훈하였다. 이 동상은 서대문 형소에서 순국한 유관순 열사의 순국 100주년을 기리고자 건립되었다. 건립자: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
▶ 유관순 열사:
출생과 입교:
유관순(柳寬順) (1902~1920) 은 천안 동면 지령리에서 아버지 유중권(柳重權)과 어머니 이소제(李少悌) 사이의 둘째 딸로 출생하였다. 당시에는 서구의 종교와 사상, 문물이 쏟아져 들어올 때였다. 특히 기독교가 급속히 확산되며 신도의 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지령리에도 기독교가 전파되자 온 마을이 기독교로 개종했으며, 유관순 일가도 교회에 입교하게 되었다. 따라서 어린 유관순에게도 동네 교회는 배움터이자 놀이터로서 기능하였다.
서울 유학과 3.1운동 참여:
유관순은 1915년 공주 감리교회의 제이 햄몬드 샤프 여사의 추천으로 이화 학당 (梨花學堂)에 유학하여 기숙사 생활을 하며 공부하였다. 사촌 언니 유예도(柳禮道)도 샤프 여사의 추천으로 1년 먼저 이화 학당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유관순은 주말마다 3·1운동의 준비 장소 가운데 하나였던 정동교회(貞洞敎會)의 예배에 참석했으며, 당시 담임목사였던 손정도(孫貞道), 이필주(李弼柱) 목사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신앙심과 애국심을 더욱 키웠다. 3월 1일 만세 운동이 시작되고 학생들의 만세운동에 참여가 폭증하자 일제는 서울의 각급 학교에 휴교령을 내려으며, 이화학당 역시 문을 닫자 유관순은 사촌언니 유예도와 함께 고향 집에 돌아왔다.
병천면에서의 만세운동과 옥중 투쟁:
유관순이 고향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3월 14일 고향 인근의 목천보통학교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자극을 받아 지령리에서도 만세운동이 계획되었다. 3월 16일 주일예배가 끝나고 아버지 유중권과 작은 아버지 유중무, 그리고 조인원 등은 아우내 장날인 4월 1일을 기해 만세운동을 거사할 것을 계획하고. 이때 유관순과 유예도가 주변 지역으로의 연락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마을의 부녀자들은 태극기를 그리며 운동을 준비하고, 유관순은 주변으로의 연락을 위해 수십 리의 길을 밤이든 새벽이든 가리지 않고 걸어다니며 만세운동의 확산을 도모하였다. 드디어 4월 1일 오후 한 시, 수천의 장사꾼들이 아우내 장터를 덮었고, 조인원이 긴 대나무 장대에 태극기를 세우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한독립만세” 를 선창하자 수천의 군중이 이에 호응하며 아우내 장터의 만세운동은 시작되었다.
이렇게 거대한 군중이 만세를 부르자 아우내 장터 근처의 일본 헌병들은 칼을 휘두르며 이를 진압하였다. 시위대의 선두에 선 이들이 칼을 맞고 쓰러지자 만세를 부르던 시위대는 흥분하여 주재소를 향했고, 이에 일본의 헌병들은 더욱 무자비하게 진압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 헌병들은 시위대의 앞에서 태극기를 들고 있던 유관순을 찌르고 깃대를 부러뜨렸다. 이때 이를 저지하는 과정에서 유관순의 부모인 유중권과 이소제는 일본 헌병이 발포한 흉탄에 유명을 달리하게 되었다. 총칼을 앞세운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시위 후 유관순은 동생들이 걱정되어 동리로 돌아왔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공주감옥에 수감되었다. 미결인 상태로 1개월가량 공주형무소에 복역하다가 1919년 5월 9일 1심에서 징역 5년을 언도받았다. 3·1운동의 주도자였던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천도교를 대표했던 손병희(孫秉熙)가 3년 형을 받았던 것에 비하면 유관순에게 내려진 형량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유관순을 비롯해 아우내 장터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이들은 1심 판결에 불복, 항고하여 서울 서대문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1919년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유관순은 3년 형을 언도받았는데, 다른 이들은 상고를 하였지만 유관순은 상고를 포기하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3년간의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3·1운동이 발발한 지 1주년이 되는 1920년 3월 1일을 기해 유관순은 다시 만세를 외쳤으며, 이러한 유관순에 호응하여 수많은 수감자들도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간수들은 이러한 유관순을 구타했는데, 이때 유관순은 방광이 파열되는 상처를 입어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은 건강이 더욱 악화되었다. 1920년 4월 28일 일본 정부는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과 일본왕족 나시모토(梨本宮)의 장녀인 방자(方子)와의 결혼을 기념하여 5천여 명의 정치범에 대해 사면령을 내렸고, 이때 유관순도 사면을 받았다. 그렇지만 아우내 장터에서의 만세운동 당시 허리에 상당한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 옥중에서 제대로 된 치료는 고사하고 변변한 식사도 못한 채 계속된 투쟁으로 인한 구타와 고문으로 방광이 터져나간 유관순은 가석방이 이루어지기 전인 1920년 9월 28일 18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유관순이 죽었을 때 유관순의 부모도 이미 세상을 떠났으며, 오빠 유우석도 수감 중이었고, 사촌오빠 유경석 역시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도피 중이었기 때문에 유관순의 사망 사실을 가족에게 알리는 것조차 어려웠다고 한다. 결국 15일이나 지난 10월 12일 이화학당에서 유관순의 시신을 수습해 갔으며, 이틀 후인 14일 생전 이화학당 재학시절 유관순이 주일마다 찾았던 정동 예배당에서 장례식을 치렀다.
유관순의 마지막 기도:
" 원수 왜(倭)를 물리쳐 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소서. 내일 거사할 각 대표들에게 더욱 용기와 힘을 주시고 이로 말미암아 이 민족의 행복한 땅이 되게 하소서. 주여 같이 하시고 이 소녀에게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
서대문, 1919
그날의 함성
전시: 3.12독립만세운동과 함께한 태극기, 3.1(토) ~ 3.2(일) 태극기 게양대 앞
<- 방문자센터, <- 독립관, <- 3.1운동기념탑
여옥사
서울 구 서대문 형무소 (지정번호: 사적 제324호):
옛 서대문 형무소는 1907년 일제가 한국의 애국지사들을 투옥하기 위해 만든 감옥이다. 옛 서울 서대문형무소의 처음 이름은 경성감옥이었는데, 서대문감옥, 서대문형무소, 경성형무소, 서울형무소, 서울교도소 등으로 바뀌다가 1967년에 서울구치소가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를 비롯하여 애국시민, 학생들이 투옥되었고, 광복후에는 반민족행위자와 친일 세력들이 대거 수용되었다. 후 4.19, 5.16 군사정권 시기를 거치면서 많은 시국사범들이 수감되었다. 1987년에 옛 서울구치소를 경기도 의왕시로 옮길 때 옥사는 모두 15개 동이었다. 이 가운데 역사성과 보존가치를 고려하여 제9~12옥사, 나병사, 사형장등을 남겨두었다. 1968년 부터 공원을 만들기 시작하여 1992년 부터 '서대문 독립공원'으로 부르고 있다.
서울 구 서대문형무소
서대문형무소는 일본제국주의가 지은 근대식 감옥이다. 1908년 10월 문을 열어 1987년 11월에 페쇄될 때 까지 80년 동안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옥사는 붉은 벽돌로 지어졌고 수감자를 효과적으로 감시할 수 있는 원형 감옥형태인 패놉티콘 구조로 만들어졌다. 일제강점기에는 식민 지배에 맞섰던 많은 항일 독립 운동가들이 갇혔으며, 해방 후에는 독재정권과 군사 정권에 저항했던 민주화 운동가들이 갇혔던 역사의 현장이다. 1908년 경성감옥, 1912년 서대문감옥, 1923년 서대문형무소, 1945년 서울형무소, 1961년 서울교도소, 1967년 서울구치소로 이름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1987년 11월 서울 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한 뒤 역사성과 보존가치를 고려하여 보안과 청사, 제9~12옥사, 공작사, 힌센병사, 사형장 등을 남겨두고 나머지 시설들은 모두 철거되었다. 이후 서대문구에서 현장을 보존하고 역사의 교훈으로 삼고자 1993년 11월 5일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개관했다.
영역 번호:
1. 보안과 형사, 2. 중앙사, 3. 12옥사
4. 11옥사, 5. 10옥사, 6. 공장
7. 한센병사, 8. 9옥사, 9. 추모비
10. 사형장, 11. 시구문, 12. 옥사 토와 붉은 벽돌
13. 격벽장, 14. 창고, 15. 여옥사
16. 담장과 망루, 17. 건축부재, 18. 취사장
유인매표소 ->
관람안내:
관람시간: 3~10월: 09;30 - 18:00 / 12월~2월: 09;30 - 17:00
입장마감: 3~10월: 17:30 / 12월~2월: 16:30
휴관안내: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 추석날
관람료:
어 른: 개인 3,000원 / 단체 2,400원 (19세 이상 ~ 64세 이하)
청소년: 개인 1,500원 / 단체 1,200원 (13세 이상 ~ 18세 이하)
어린이: 개인 1,000원 / 단체 800원 ( 7세 이상 ~ 12세 이하)
군 인: 개인 1,500원 / 단체 1,200원 (병장 이하의 군인(군복 착용)
경로우대자: 무료 (65세 이상)
유아, 장애인, 국가보훈대상자: 무료
-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서대문형무소 역사전시관
== < ▼ 2018.02.21 사진 START > ==
자유와 평화를 향한, 80년 1908~1987,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억압과 공포의 상징, 서대문형무소:
서대문형무소는 대한제국 말기, 일제에 의하여 1908년 10월 21일 경성감옥으로 개소되었다. 개소 당시 전국 최대규모의 근대식 감옥으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맞서 싸운 한국인을 처치하고 탄압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일제강점기에는 한국인에 대한 억압과 처벌의 장소로 이용되어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수감, 순국하였으며, 광복 이후에는 독재정권에 의해 많은 민주화 운동가들이 수감되어 고난을 치렀던 곳이다. 이곳 서대문 형무소는 1908년 부터 1987년까지 80여년의 운영 기간동안 식민권력과 독재정권에 항거하여 자유와 평화를 위해 수많은 희생이 있었던 역사의 현장이다.
서대문형무소 모형...
창문 추, 용마루 기와...
전국 형무소 배치도 (1936)
재소자 고무신, 빨래방망이 ...
민족저항실Ⅰ...
민족의 저항, 독립운동:
대한제국 말기, 우리민족은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을 전개하여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고, 1910년 강제합병으로 나라를 잃은 후에도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거세게 전 민족이 독립운동을 펼쳤다. 1910-1945년에 걸친 일제강점기 동안 한국민은 의혈투쟁, 비밀결사 조직, 해외 독립군 지지 창건, 독립군 양성, 3.1 독립만세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6.10만세운동, 대일 무력 투쟁및 사회,문화,노동,농민,학생운동 등 다양한 방법의 독립운동으로 나라를 되찾기 위해 싸웠다. 이곳 민족저항실에서는 이 과정 속에서서대문형무소에 수감 또는 순국 하였던 독립운동가들과 관련된 주요 사건 및 활동을 중심으로 전시하였다.
서울진격보고서 (1907.11)..
이강녕 의병장 옥중서한 (1908년)..
곽한일 의병장 칼...
이강년 의병장(1858-1908):
1896년 문경세ㅓ 유인석 의병부대 유격장으로 활약. 1907년 제천전투에서 적 500여명 토멸. 13도창의군 호서창의대장 추대. 1908년 충북 청풍 까치성 전투에서 피체. 그해 9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
허위 의병장(1854-1908):
1896년 갑산(현 김천)에서 의병 거의. 1907년 13도 창의군 진동창의대장 추대, 1903년 13창의군 군사장 추대, 서울탈환작전 전개, 동대문 부근 12km 지점까지 진격, 5월 임진각 유역 활약중 피체. 9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
이인영 의병장(1867-1909):
1895년 춘천.양구 지역에서 의병 거의. 1907년 원주 등지에서 의병규합, 관동창의대장 활약. 7월 전국의병을 모아 연합군 조직, 1908년 부친 부고로 문경 귀향. 1909년 6월 체. 9월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
1910년 강제합병.
1910~1945년, 독립운동....안중근의사도 보인다.
양기탁, 양전백, 편강렬/ 김구, 차이석, 윤치호/ 이승훈, 유동렬, 이명룡
족쇄 (일제강점기)
수갑
의열투쟁: 의열투쟁은 개인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쳐 일본제국주의 요인이나 친일파를 처단하고, 식민지 통치기관을 파괴하였던 독립운동 전략의 하나였다. 이는 적들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남겨 일제의 식민통치에 협조하는 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대표적으로 이재명, 강우규, 채경욱, 송학선 의사 등이 거사를 결행하였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하여 순국하였다.
* 의사(義士): 목숨을 바쳐 무력적인 행동으로 적에 대한 거사를 결행하신 분.
* 열사(烈士): 목숨바쳐 맨몸으로 적과 싸워 투쟁하신 분.
* 지사(志士):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헌신하고 적에게 항거하신 분.
광복회:
1915년 경북 대구에서 박상진을 중심으로 조직. 전국 해외지부 설치, 친일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 모집활동 전개.
1917-1918년 친일파 장승원, 박용하 처단. 1918년 박상진, 김한종, 채기중, 임봉주, 장두한, 강순필등 서대문 형무소 수감.
1921년 채기중, 김태경, 임봉주, 강순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
1921년 박상진, 김한종 대구형무소에서 옥사.
의열단:
1918년 중국 지린에서 김원봉,김세우 등을 중심으로 조직.국내외 일제고관및 친일파 처단.
1920년 곽재기 지사 조선총독부 폭파 계획중 피체 서대문형무소 수감.
1923년 김상옥 으시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의거. 은신중 일경과 총격전 긑에 자결.
1924년 김지섭 으사 일본 도쿄 황궁 폭탄 투척 의거.
1926년 나석주의사 동방척식주식회사에 폭탄투천 의거 자결.
27결사대:
1918년 만주에서 활동하던 이탁등 독립운동가 27명을 국내진입.
1919년 서울에서 이완용등 매국노 7인을 처단할 목적으로 결사대 조직.
국내에서 임종환등 5명 합류.
1919년 고종 인산시 매국노 처단. 일제 주요기관 파괴활동 전개.
1919년 임종환등 23명 피체. 서대문형무소 수감. 양종환 옥사.
조선민족대동단:
1919년 전협,최익환등이 독립운동 필요성 자각하여 조직. 활동 중 주목되는 것은 의친왕(義親王)이강(李堈)을 망명시켜 임시정부에 참여시키려던 계획이다. 1919년 대동신보 발행, 10월 제2의 3.1독립만세운동 추진. 11월 정남용, 이을규(李乙奎), 한기동(韓基東), 송세호(宋世浩) 등이 의친왕과 함께 수색역을 출발해 열차편으로 압록강을 통과해 11월 12일 만주 안동역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의친왕의 탈출계획을 사전에 안 일경에 의친왕은 서울로 호송되고 전협, 정남용, 이을규 등이 차례로 체포, 중형 언도받음.
유관순 열사...
벽면에 붙어 있는 순국열사들의 사진...
태극기 목각판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3.1독립만세운동 직후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어 명실공히 대한민국 정부가 탄생되었다. 임시정부는 최고지휘부가 되어 연통제를 실시해 국내의 독립운동 연락망을 구축하였고, 외교,교육,문화등 다방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1940년 9월 광복군을 창설하여 일제에 선전포고를 하고 대일전쟁을 전개하는등 관복의 서막을 열었다. 이 과정에서 국내외에서 활약하던 많은 임시정부 요인들이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그 중 여러명이 옥중 순교하였다.
제2의 만세운동, 6.10만세운동: 6.10만세 운동은 1928년 6월 10일 각계각층의 다양한 독립운동 세력이 연합하여 펼친 만세시위운동이다. 순종의 인산일 약 30만명의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5~600여명의 학생이 일제히 독립만세를 고창하여 시위를 전개하였고 지방 곳곳에서도 만세 시위가 이어졌다. 이 시위로 서울에서 21명이 체포되었고, 권오성, 권오상, 이선호, 유연희를 비롯한 대부분의 관여자들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공명 단신문기사 (1929.4.18)
조선어학회사건: 조선어학회는 일제의 한국어 사용 금지 등 민족말살정책에 저항하여 사전편찬, 한글보급을 통해 민족사상을 고취하였던 단체이다. 일제는 1942년 10월부터 1944년 2월까지 한글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던 한글학자 33명을 검거하였고, 이로 인해 조선어학회는 해산되었다가 광복후 한글학회로 재조직 되었다.
사형장 가는 길
사형장 지하 시신수습실 모형.
사형장 및 벽에 붙어있는 독립투사들 사진들...
시구문...시체 내어가는 문.
서대문 형무소 지하고문실: 이곳 서대문형무소 보안과 지하실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던 독립운동가들을 취조하였던 공간이다. 각 방은 취조실과 임시구금실, 독방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곳에 끌려온 독립운동가는 취조과정에서 견디기 힘든 온갖 고문을 감당해야했다. 이러한 이유로 이곳 지하수감실은 수감자들 사이에서 악명 높은 지하고문실이라 불렸다. 이렇게 서대문형무소 지하고문실은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에 자행했던 폭력과 국권을 되찾기 위해 피흘리며 노력한 한민족이 겪어야 했던 고통을 증명하고 있다.
물고문...강제로 수조에 머리를 집어넣거나, 코나 입에 물을 마구들이 부어 호흡을 곤란하게하여 고통을 주었던 고문 방법. 심지어는 폐에 물이 차서 흉막염에 걸려 매우 고통스럽게 사망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다. 여기에 고문현장은 오리지 않겠다. 끔찍하다.
취조광경
손톱자르기고문..가늘고 날카로운 꼬챙이를 손톱 밑으로 찔러 고통을 주었던 고문 방법. 심할 경우 손톱뿐만 아니라 입 속까지 마구 찌러 고통을 주기도 했으며, 심지어 그 고통으로 기절하는 경우도 있엇다.
태 (1912년)
상자고문...상자 안쪽에 날카로운 못을 박아 놓고, 사람을 상자 안에 집어넣어 마구 흔들며 못에 찔리게 하여 고통을 주었던 고문도구.
벽관고문...옴짝달싹 할 수도 없이 좁은 공간에 사람을 감금하여 앉을 수도 움직링 ㄹ수도 없는 고통을 주었던 고문도구. 벽에 서 잇는 관이라 하여 '벽관'이라 이름 붙여졌다.
지하독방...취조후 옥사로 이동하기 전 감금했던 곳. 곳곳에서 들려오는 고통의 비명소리와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고문과 공포로 휩싸인 공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지하독방에서도 독립운동가는 만세소리를 멈추지 않았고, 독립의 다짐을 되새겼다.
되찾은 조국, 광복의 환희:
2008년 11월 서대문형무소 개소 100년, 1998년 11월 15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개관, 1987년 11월 15일 서울구치소 경기도 위왕시로 이전..
==< ▲ 2018.02.21 사진 END > ==
12옥사
사각연못 & 한센병사
초기 사형장 터
11옥사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연혁
1908.10.21- 경성감옥 설치
1912.09.03- 서대문 감옥으로 명칭 변경
1923.05.05- 서대문 형무소로 명칭 변경
1945.11.21- 서울 형무소로 명칭 변경
1961.11.23- 서울 교도소로 명칭 변경
1967.07.07- 서울 구치소로 명칭 변경
1987.11.15- 서울 구치소 경기도 의왕시 이전
1998.11.05- 서울형무소 역사관 개관
한성과학고등학교
▶ 안산 등산:
서대문형무소 외곽길
등산로 입구에서 보이는 인왕산
안산자락길: 총 7km.
<- 서대문독립공원, 독립문역, 아진아 기념도서관, 영천시장, -> 안산자락길 (능안정) 1.35km
대한민국장 김좌진 장군:
핵심공적: 대한광복회 부사령, 대한군정 사령관, 1920년 한국독립군 전투사상 최대의 성과를 올린 청산리대첩 승리의 주역.
주요 업적: 1889.112.6 충남 홍성군 갈산면 출생, 1908 호명학교 설립 계몽운동, 1917 대한광복회 부사령, 1920 대한군정서 사령관으로 청산리대첩, 1925 신민구 총사령관 겸 군사부 위원장, 1929 한족총연합회 결성, 1930.1.24 (40세) 고려공산청년회 박상실에 의하여 피살, 순국. 1945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참고: 주요 가족: 자: 김두한 (<- 둘째부인), 손녀: 김을동 ( <- 김두한 ).
대한민국장 안창호
핵심공적: 초기 상해 임시정부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으며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과 통일을 위해 노력.
주요약력:
1878년 11월 9일: 평안남도 강서군 출생
1905년: 공립협회 설립 계몽운동
1907년: 신민회 설립 국권 회복 운동
1919년: 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
1923년: 국민대표회의 부의장
1930년: 한국독립당 창당
1938년 3월 10일 (59세): 옥중 순국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 2024.05.21 사진 > 대한민국장 민영환
핵심공적: 1898년 정부 고위관료로서 독립협회를 적극 지지라였고 그 후 일제의 을사늑약 강제체결에 항거하여 자결, 순국함으로써 국민의 항일의식 고취에 공헌했다.
주요약력:
1878년 7월 25일(음력): 서울 견지동 출생.
1888년: 정부의 고관으로서 독립협회 자주 민권자강운동을 적극 지지
1905년 11월 30일: 을사늑약에 항거 국민을 분기시켜 국권회복운동을 일으키고자 자결.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 1.0km 안산자락길, ↑ 410m 안산정상(봉수대),
↓ 안산자락길(능안정) 605m, -> 인왕산 800m
역사스토리
서울이 한눈에 보이는 " 안산 봉수대"
서대문구 안산(鞍山)은 인왕산 자락에 솟아오른 바위산(해발 295.9m)입니다. 형상이 말 안장 처럼 생겼다 해여 무악(毋岳), 갈마재로도 불렸으며 정상에는 봉화대가 있어 봉우재로 부르기도 합니다. 안산 봉수대에 올라서면 서울 시내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습니다. 남쪽으로 한강이 보이고 용산, 여의도, 목동 등 서울 남부지역의 빌딩 숲이 펼쳐지며, 관악산 줄기도 감상할 수 있습니다. 봉수대는 과거 연기나 불을 피워서 변방의 긴급한 사정을 중앙과 해당 지역의 주민들에게 알리는 통신 체계 였는데, 불을 피워서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알아볼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무악산에는 동.서 두개의 봉수대가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전국 봉수대를 모두 없애며 터만 남아읶던 봉수대 중에서 무악 동봉 봉수대 터(지금의 안산 봉수대 터)를 서울 정도 600년 기념 사업 일환으로 1994년 8월 모형을 설치하여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3호로 지정하였습니다. 비록 지금은 본연의 기능을 상실하였으나, 서울에서 일출.일몰 명소로 멋진 전경을 자랑하며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 셔대문구.
인왕산 방향
안산 전망대
안산에서 본 서울
남산서울타워 / 청계산 / 관악산 / 삼성산 / 63스퀘어 / 한강 / 국회의사당
안산에서 바라본 서울
조두리봉 / 향로봉 / 비봉 / 승가봉 / 문수봉 / 보현봉 / 기차바위 / 인왕산 / 북악산 / 한양도성
천도 후보지 & 무악 봉수대
무악산 동봉수대 터 (서울특별시 기념물)
동봉수대 터는 무악산에 있는 동.서 두개의 봉수대 중에서 동봉수대가 있던 자리이다. 봉수제는 연기나 물을 피워서 변방의 긴급한 사정을 중앙과 해당 지역의 주민들에게 알리는 통신 체계이다. 높은 산몽우리에 봉수대를 설치하고 불을 피워서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알아볼 수 있도록 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오는 봉수는 남산에서 집결하였고, 남산에는 제1봉수대부터 제5봉수대까지 다섯 곳의 봉수대가 있었다. 이 중 제3봉수대는 평안도 강계-> 황해도-> 경기도-> 서울 무악 동봉수로 이어지는 봉수를 받는 곳이었다. 즉 무악산 동봉수대는 남산의 제3봉수대에 최종 보고되기 바로 전 단계의 봉수대인 것이다. 현재의 동봉수대는 1994년 서울 정도 6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서울특별시에서 복원한 것이다.
서대문 역사 문화 해설 '나만의 힐링로드'
천도후보지, 무악 봉수대
봉수제는 20~30리 정도 일정한 거리마다 산꼭대기에 봉수대를 세우고 밤에는 횃불로, 낮에는 연기로 변경의 긴급한 상황을 중앙에 전달하던 군사통신 수단이었다. 평안도 변경에서 출발하는 내륙 노선 제3로와 바닷가를 거쳐오는 제4로가 이곳 무악 동봉수와 서봉수를 거쳐 남산 경봉수로 갔으니 이곳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태조 이성계가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어디에 지을 것인가, 즉 주산을 어디로 할 것인가를 놓고 큰 논쟁이 있었다. 처음에 하륜은 '무악(안산) 주산론'을 주장 했으나 터가 좁다는 이유로 받아들여 지지 않았고, 제왕남면의 원칙을 강하게 주장하는 정도전의 주장이 힘을 얻으며 백악 주산론이 채택된다. 그리하여 좌청룡 우백호로 낙산과 인왕산을 좌우에 거느리고 남산을 안산으로 삼아 백악산 밑에 경복궁을 세웠던 것이다.
무악재 - 승전봉 - 봉수대 - 봉원사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일대
인왕산과 안산 사이 무악재
드론 비행 금지! NO DRONE ZONE!
헬기장
▶ 하산길 ( -> 봉원사):
무악정
▶ 봉원사:
서댜문 역사 문화 해설 '나만의 힐링로드'
도삼 속 천년 고찰 봉원사
안산 남쪽에 위치한 봉원사는 한국 태고종의 본산으로 신라 진성여왕 3녀(889)에 창건되었다. 진성여왕 3년 도선국사가 부유한 신도의 집을 희사받아 연세대 터에 '반야사'란 절을 처음 지었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효종 2년(1651)에 새로 지었으며 영조 24년(1748) 현재 위치로 옮겼다. 연조는 친필로 현판을 내렸으며, 이때부터 이 절을 새로 지은 절이라 하여 '새절'이라 부르게 되었다. - 서대문구.
한글학회 창립한 곳
이 곳 유서깊은 봉원사는 우리 말글의 연구와 굥육을 목적으로 1908년 8월 31일 국어연구학회(지금의 한글 학회)가 창립 총회를 연 곳으로 그 높은 뜻을 길이 남기고자 학회 창립 100돌에 이 표식을 세우다. 2008년 8월 31일 한글학회 창립 백돌 기념사업회.
삼천불전
대웅전
봉원사: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동 산1번지
봉원사는 889년(신라 진성여왕 3년) 도선(道詵) 스님이 현재 연세대가 들어서 있는 곳에 창립하였으며, 고려 말에는 태고보우(太古普遇) 스님이 사찰을 중창하였다. 임진왜란을 거치며 소실된 전각을 지인(知仁) , 극령(克齡), 휴엄(休嚴) 스님이 중건하였으며, 1748년 (조선 뎡조 24년) 찬즙(贊汁), 증암(增岩) 두 스님에 의해 지금의 터전으로 이전하였다. 이때 영조가 친필로 '봉원사'라는 현판을 내렸고, 신도들 사이에서는 새로 지우은 절이라 하여 '새절'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후 8.25를 거치면서 전각과 영조의 친필 현판 등 많은 유물이 소실되었으나, 영월(映月) 스님 등 여러 주지 스님과 사부대중이 합심하여 중창 불사가 원만히 성취돠어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2011년 전통사찰로 등록된 봉원사는 한국불교의 전통종단인 태고종의 총본산으로서 잔법 수행의 맥을 이어 가고 있으며,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63호 단청장 기능보유자 만봉(萬奉) 스님92006년 입적)과 국가무형문화제 제50호 영산재 보유자 송암(松岩) 스님(2000년 입적)께서 주석하였다. 현재는 구해(九海) 스님이 후학양성과 보존에 힘쓰고 있으며, 특히 영산재는 2009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재유산으로 지정되는 등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대웅전
▶ 7024번 버스종점:
- 주요노선: (봉원사-서대문역(5호선)-서울역-신촌역(2호선)
- 배차간격: 16분.
▶ 숲속한방랜드, 숯가마22시: ( 02-365-2700 / 서울 서대문구 봉원동 51 ),
- 영업시간: 06:30 - 22:00
- 이용요금:
* 숯가마: 대인-중학생: 16,,000원 / 초등학생 9,000원
* 목욕: 대인-중학생: 10,000원 / 초등학생 8,000원
* 무료주차가능: 목욕 4시간, 숯가마 12시간. 그 이후로는 10분당 500원입니다.
봉원사 공영주차장....10분당 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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