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 역사가 숨 쉬는 곳 (2012-01-10)
새해 벽두에 남한산성에 올랐다. 나는 이 산에 오를 떄 마다 고통스런 역사의 현장이다 라는 생각이 든다. 고색창연한 남한산성이 이러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미중유의 국란 속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겨되는 피할 곳 없는 수만은 민초들의 삶이 생각나는 것이다. 생즉사 사즉생_生卽死 死卽生의 정신으로 역사의 진행 방향도 모른채 적의 칼날앞에 목숨을 날려버렸을 민초들의 삶이 슬프게 느껴지는 곳이다. 남한산성은 역사가 숨 쉬는 곳이다. 정묘, 병자 호란을 보면 한 국가가 역사의 방향과 진행을 얼마나 민감하게 파악하고 대처해야 국란을 묘면할 수 있느가 알 수 있게 된다.
<병자호란의 개요>: 1936년 12월 부터 1637년 1월에 걸쳐 벌어진 전쟁으로 조선의 전쟁 역사상 가장 크고 치욕적인 것이었다.
1627년: 후금의 제1차 침략 (정묘호란): 조선과 후금은 형제제지국의 맹약하고 양국관계가 정리됨.
1632년: 후금은 만주지역을 석권하고 명나라를 공격하면서 말 3,000필, 정병 3만과 세폐(歲幣)를 요구해 옴.
1936년: (동년 4월): 용골대와 마부태를 보내 신사(臣事)를 요구함. 후금 태종은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청(淸)으로 개칭함. 조선의 조정은 척화파와 주화파로 갈려 서로 대립함. 척화파가 주화파를 압도하고 잇었음. 이는 국제정세에 어두운 조정의 실정을 말해 주고있다. (동년 12월): 청태종은 직접 조선 침략을 감행함. 이는 청나라의 중국 지배시 배후의 후환을 없애기 위한 조치였다.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 하고자 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남한산성으로 대피함. 이때 성 안에는 군량이 도합 2만 3,800여 석이 있었는데, 이 분량은 군병과 백관이 도합 1만 4,000여명이 있었으므로, 약 50일분에 해당하는 식량 이었다. 남한산성이 10여 만 명의 청군에 포위당한 채 고립되자 성안의 사정은 날로 피폐하여 갔으며 차차 강화론이 일어나고, 주전파도 난국을 타개할 별다른 방도를 내놓지 못했다.
1937년: (정월 1일): 청태종은 남한산성 아래의 탄천(炭川)에서 12만 명의 청군을 결집하고 있었다. (1월 2일): 인조는 청군에 문서를 보냈는데, 청은 매우 강압적인 답서를 보내왔다. 이틀 후에는 청군에 의해 강화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강화도에 피신했던 빈궁과 대군이하 200여 명이 포로가 되어 남한산성으로 호송되었다. (1월 28일) 청군은 용골대, ·마부대를 보내 9개조의 강화조약 조건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① 청나라에게 군신(君臣)의 예(禮)를 지킬 것, ② 명나라의 연호를 폐하고 관계를 끊으며, 명나라에서 받은 고명(誥命) ·책인(刪印)을 내놓을 것, ③ 조선 왕의 장자 ·제2자 및 여러 대신의 자제를 선양에 인질로 보낼 것, ④ 성절(聖節:중국황제의 생일) ·정조(正朝) ·동지(冬至) ·천추(千秋:중국 황후 ·황태자의 생일) ·경조(慶弔) 등의 사절(使節)은 명나라 예에 따를 것, ⑤ 명나라를 칠 때 출병(出兵)을 요구하면 어기지 말 것, ⑥ 청나라 군이 돌아갈 때 병선(兵船) 50척을 보낼 것, ⑦ 내외 제신(諸臣)과 혼연을 맺어 화호(和好)를 굳게 할 것, ⑧ 성(城)을 신축하거나 성벽을 수축하지 말 것, ⑨ 기묘년(己卯年:1639)부터 일정한 세폐(歲幣)를 보낼 것 등이다. (1월 30일) 인조는 세자 등 호행(扈行) 500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에 설치된 수항단(受降壇)에서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례(降禮)를 한 뒤, 한강을 건너 환도하였다. (2월 15일) 청나라는 소현세자 ·빈궁(嬪宮) ·봉림대군등을 인질로 하고, 척화의 주모자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 등 3학사를 잡아 철군하기 시작하였다. 전후에는 수많은 전쟁 고아들과 납치당한 사람들의 속환(贖還)문제가 대두되었다. 특히 청나라 군은 납치한 양민을 전리품으로 보고, 속가(贖價)를 많이 받을 수 있는 종실 ·양반의 부녀를 되도록 많이 잡아가려 하였으나, 실제 잡혀간 이들 대부분은 속가를 마련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속가는 대개 150∼250냥이었고, 비싼 경우 1,500냥에 이르렀다. 따라서 개인과 ·국가 모두 속환의 재원을 마련하는 것이 큰 일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순절(殉節)하지 못하고 살아돌아온 것이 조상에게 죄가 된다 하여, 속환여(贖還女)들을 배척하여 이혼문제가 사회·정치문제로 대두하였다. 이것이 수난의 대략이다. 전쟁의 후유증이 얼마나 큰가? 오늘의 국제정세도 민감하게 대처해야 이러한 슬픈 역사의 반복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등산코스: 마천동 남한산성 등산로입구- 성불사 - 연주봉 옹성- 서문(우익문) - 연주봉 옹성 - 위례둘레길- 금암산- 광암정수장
겨울의 산은 전체적으로 침잠되어 있는 것 같다. 잎사귀가 모두 떨어진 나목들의 서 있는 모습은 왠지 측은한 감정이 들게한다. 봄, 여름의 생기발랄한 기운은 없어지고 멜랑콜리(melancholy)한 분위기만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이 조용하고 차분한 겨울산 등반을 할 수 있게 하고 겨울 등산이 최고라고 말하기도 한다. 오늘은 늘 다니던 산이지만, 평소 가보지 않은 등산로를 가 볼 수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새로운 것은 항상 호기심을 발동하게 된다. 오늘 하산길 중 위례둘레길을 거쳐 광암정수장으로 내려 오는 코스는 사람이 거의 없어 매우 조용하고 걷기에 좋았다. 마천동 입구에서 서문에 올랐다 하남시 고골의 좌측 능선길을 따라 광암정수장 앞으로 내려서게 되었는데 참 좋은 코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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