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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구릅/일상들 ( life )

① 여주 명성왕후 생가, 강천보,여주보, 엄지매운탕 - (2016-02-10)

by the road of Wind. 2016. 2. 10.

명성왕후 생가, 강천보,여주보, 엄지매운탕 ①     - (2016-02-10)

 

 

명성왕후 생가:

 

 

경기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에 있는 명성황후 생가를 다녀왔다. 명성왕후가 태어나 8세 이전까지 이곳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생가(生家)이다. 명성황후는 8세에 여주에서 한양으로 올라간 후 왕비로 간택 책봉될 때까지 서울에 있는  감고당에서 지냈다. 명성황후 생가 주변에는 민유중의 묘와 신도비, 순종이 직접 글을 지은 명성황후탄강구리비’ 등이 있으며, 1995년이 이곳을 정비하면서 명성황후기념관, 민가마을 등을 짓고 서울 북촌에 있던 감고당을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명성왕후 생가솟을대문이 있는 행랑채, 사랑채와 중문이 있는 문간채, 안채, 바깥쪽에 별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옥의 규모가 아주 크지는 않지만 짜임새있게 꾸며진 양반가옥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원래 1687년에 숙종의 장인이자 인현왕후의 아버지인 민유중의 묘를 관리하기 위한 묘막으로 건립되었는데 당시 건물로 남아있는 것은 안채뿐이었으나, 1995년도에 경기도와 여주군 명성황후의 업적을 기리고 역사의 산 교육현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명성황후생가 성역화사업을 추진하여 사랑채.행랑채.별당 등을 복원하였다. 

 

명성왕후 생가를 둘러 보면서 역사 공부도 하게되고 격랑의 근대사에서의 어려웠던 국가 정세도 생각하게 되었다. 힘이 없는 나라는 불쌍하다. 외세에 지배되어 그 고통은 말 할 수 없고 크다. 나라를 튼튼하게 유지 성장시키지 못 하고 퇴보 시킨 지도자들, 권력에서 내려오지 않으려는 사람들, 위중한 국제 정세에서 지도층의 분열...이런 것들은 고스란히 그 영토안에 살아가는 민중의 고통으로 전가된다. 지금도 우리나라는 경제, 정치적으로 격랑의 시대에 있다. 온 나라 사람들이 혼연일치가 되어 이를 극복하여야 한다. 이기적인 생각, 집단적인 이해관계에 매몰되는 지금의 사회 현실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너무나 태평성대한 느낌으로 살아온 우리였다. 사실 휴전선은 아직도 전선인데 우리들은 낮잠을 자고 있는 형국이다. 여러가지 생각에 머리가 혼란 스럽다. 한편으로 평화를 지키며, 다른 한편으로 성장가도를 달릴 수 있는 미래 성장 산업의 양성이다. 지금 젊은이들은 방황하고 있다. 3포, 5포등 포기의 시대에 있다고 한다. 나 부터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명성황후는 비운에 갔다. 2002년 작가 김진명씨가 끈질긴 추적 끝에 찾아낸 명성황후 살해 당시 현장에 있던 20대의 젊은 조선정부의 내부 고문관인 에조가 본국에 보낸  비밀보고서인 '에조(英臟) 보고서' 에 의하면  "정말로 이것을 쓰기는 괴로우나...(중략)....민비의 유해 곁에 있던 일본인이 같은 일본인인 나로서는 차마 묘사하기 괴로운 행위를 하였다. ....."  "...무리들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왕비(王妃)를 끌어내어 두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혔다(處刃傷). 나아가 왕비를 ...( 중략)....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름(油)을 부어 소실(燒失)시키는 등 차마 이를 글(筆)로 옮기기조차 어렵다. 그 외에 궁내부 대신을 참혹한 방법으로 살해(殺害)했다." 라고 적고 있다고 한다. 이 보고서를 맨 처음 찾아낸 사람은 일본의 역사학자 야마베 겐타로(山健太郞,1905∼1977)이라고 한다. 참으로 원통하여 기가 막힌다. 우리들은 일본의 이러한 만행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명성황후의 드라마 주제곡을 들어본다. 명성황후의 처절하고 내밀한 마음이 읽히는 것 같다. 강인하고 똑똑한 여성으로서 외세에 의하여 한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이 깜박이고 있을 때 몸부림치듯하는 그 상황이 전달되어 오는 듯 하다. 민성황후의 최후는 우리 조국의 절규와 같은 것 이었으리라. 지금도 우리나라는 허리가 두동강 난채로 주변의 열강들에 의하여 앞날의 운명이 불투명한 상황이다.

 

 

쓸쓸한 달빛 아래
내 그림자 하나 생기거든
그땐 말해볼까요 이 마음 들어나 주라고

 

(........) 


나 슬퍼도 살아야 하네
나 슬퍼서 살아야 하네

이 삶이 다 하고 나야 알텐데
내가 이 세상을 다녀간 그 이유


나 가고 기억하는 이
나 슬픔까지도 사랑했다 말해주길

 

(.......)

 

  -  <  조수미, " 나 가거든", 드라마 명상황후 주제곡 중 일부 >

 

 

 

 

 

명성왕후 생가 유적지:   

 

명성황후 생가 유적지 입구 방향으로 바라보다. 오른 쪽 건물이 매표소이다.

관람시간: 하절기(3~10월) 09시~18시, 동절기(11~2월) 09시~17시, 휴관일 1.1일, 매주 월요일/ 성인 1,000원, 주차료 1,000원. .

 

명성황후 생가 종합안내판 및 생가 설명서.. 

 

소나무가 기품이 있다. 

 

생가 유적지 안의 연못.....연못 가의 정자... 

 

명성황후 관람순서도...  1. 명성황후 기념관 -> 2.명성황후 생가 -> 3. 감고당 -> 4. 민속마을.

 

 

 

정자 위에서 연못을 내려다 본다. 건너 편에 명성황후 생가도 보인다.   

 

 

 정자에서 담 넘어 동남 배실골 방향.....조그만 출입문이 하나 있다.

 

 

문예관.. ...closed...

 

명성왕후 추모비....이 추모비는 명성황후 애국에 대한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제작되었으며, 두 개의 직사각형은 과거와 현대를 상징하는 기둥이며 역사의 중심에 서 있는 명성황후의 모습을 비문으로 표현하였고 조각 상층부에는 빛의 포현으로 우리 민족사에 길이 빛날 명성황후의 상징으로 표현되었다고 한다. - <명성황후생가>

 

 

 

 

오오 왕후시여

 

아득히 장하신지고

국가 비운의 막막한 시대에

지존의 배필께서

지혜와 용맹으로

구국의 선봉이 되셨음이여

 

여기에 감히

황국의 곤전을 해하는

흉진이 어찌 번득였을꼬

황후시여

이 나라 유구한 역사에서

가장 심각한 통분이며 치욕이

이 일이 나이다

 

오나 다시금

세계안에 약진하는

조국이 되었으며

황후의 단심을

이 겨레의 심장으로 품으오니

평안히 고향에 쉬시며

조국을 길히 가호해 주소서

오오 황후시여

 

2001년 3월  일

                     김남조 짓고

                     구자송 쓰다

 

 

 

 

 명성황후기념관....기념관에는 여러가지 기념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명성왕후 어찰, 시해도, 어보, 고종어척, 국장, 지휘도, 구국이념 '이이제이(以夷制夷)' 등등...  이이제이란 오랑케로 오랑케를 제압한다,  명성왕후의 외교술, 다시 말해 외세 침략세력 끼리 서로 견제하고 싸우게 하는 외교술의 통치학을의한다.

 

 

명성황후 ...

 

명성태황후(1851~1895): 고종(高宗)의 왕비, 추존황후. 인현왕후의 생부인 민유중의 6대 후손으로 아버지는 민치록이고, 어머니는 감고당  이씨이다. 명성황후는 민치록(閔致祿)의 외동딸철종 2년 9월 25일 경기도 여주 근동면 섬락리에서 태어났다. 여흥 민씨는 조선조에 태종비 원경왕후(元敬王后)와 숙종 비 인현왕후(仁賢王后)를 배출한 노론세력의 집안이기도 하다. 명성왕후는 13살의 어린 나이에 대원군의 부인 민씨와 외척의 발호를 염려한 대원군이 친정아버지, 친형제가 없는 명성왕후를 왕비로 간택하여 고종의 정비가 되었다. 그러나 고종과의 사이에 5년 동안 아이를 갖지 못하다가 첫 왕자를 생산하였으나 1871년 5일 만에 잃었고, 이 때 대원군은 고종과 궁녀 사이에 나은 완화군 선을 좋아하여 간극이 벌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서로의 정치적 지향점이 다른데서도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 후 명성왕후는 최익현 등과 손잡고 흥선대원군의 간섭을 물리치고 고종의 친정을 유도했다. 그리고 민씨 척족을 기용함으로써 세도정권을 부활시켰으며, 1882년 임오군란 후 일본의 견제를 위해 청나라의 지원에 의존하다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한 후에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했다. 맨 처음에는 개항에 미온적이었으나, 점진적인 개화시책을 통해 친일성향을 띤 급진개화파의 개화정책에 제동을 걸었다. 그녀는 주한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의 조종에 의하여 일본인 병사와 낭인들에게 암살당했다. 사후 대한제국이 성립되면서 황후로 추봉되었다. 정식시호는 효자원성정화합천홍공성덕제휘열목명성태황후(孝慈元聖正化合天洪功誠德齊徽烈穆明成太皇后)이다.

 

 

명성황후 역사연표:

 

1851.9.25(양력11.17) - 명성황후 출생

1863년- 고종즉위 9조선26대)

1866년- 왕비로 책봉

1867년- 경복궁 중건

1871년- 원자 출산 (4일 뒤 사망)

1873년- 공주출산 (2.13) (9.28사망), 11.5 국왕 친정선포 (대원군 실각)

1874년- 순종(척) 출산

1874년- 조일수호통상조규 조인

1882년- 6.5 임호군란, 6.16 명성황후 장호원으로 피신, 8.1 환궁

1883년- 태극기를 국기로 제정, 전국에 반포

1884년- 갑신정변

1887년- 이화학당 교명 하사

1894년- 1.10 동학혁명, 6.23 청일전쟁, 6.25 갑오경

1895년- 8.20(양력 10.8) 명성황후 시해(을미사변)

1896년- 2.11 아관파천, 8.4 충주부->경기도 여주군으로 환원

1897년- 10.11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결정, 10.12 명성왕후에서 명성황후로 개칭, 11.22 명성황후 국장 거행

 

 

 

 

"대한민국! 사랑합니다."......  명성황후의 염원이기도 하리라... 

 

명성황후 순국숭모비... 명성황후는 개화기에 개혁을 추진하던 중 1895년 10월 8일 새벽. 경복궁에 있는 건청궁 내 옥호루에서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 당하였다. 1981년 건청궁 내 동쪽 , 구릉지에 건립하였던 이 숭모비는 건청궁의 복원과 개방으로 인하여 이전 대상지를 물색하던 중 명성황후 시해 112주기를 맞이하여 2007년 10월 8일 현재의 위치로 이전·설치하였다. - <명성황후생가>

 

 

 

 

 

명성황후 생가:

 

 

명성황후생가.... 명성황후 생가 안채는 고종황제의 황후로 개화기 국정에 참여하였으나 을미사변으로 일인에 의해 시해되어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던 명성황후가 출생하여 8세까지 살던집이다. - < 명성황후생가 >

 

 

 

 

 

 

 

 

 

 

 

 

 

 

 

 

 

 

 

 

 

 

명성황후 생가를 나서면서 밖의 유적지를 바라보다.

 

 

황확산 산림욕장... <- 1.1km...  시간적 여유가 있었더라면 이 산림욕장도 걸어보았을 걸...   

 

 

 

 

 

명성황후탄강구리비...조선 제26대 고종의 비 명성황후(1851~1895)의 생가 옆에 명성황후가 태어나신 옛 마을을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비석이다. 비 앞면에는 「명성황후탄강구리(明成皇后誕降舊里)」(명성황후가 태어나신 옛 마을)이라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광무팔년갑진오월일배수음체경서(光武八年甲辰五月日拜手飮涕敬書)」(광무 8년 갑진 오월 어느 날 엎드 려 눈물을 삼키며 공경히 쓰다)라고 쓰여져 있으나 정확히 누구 의 글씨인지는 알 수 없다.  - < 명성황후생가 >

 

 

 

민유중 신도비...민유중(1630~1687)선생은 숙종의 장인으로 자는 지숙, 호는 둔촌, 본관은 여흥이다. 아버지는 광훈, 좌의정 정중의 아우이며 인현왕후의 아버지이다. 송시열, 송준길의 문인으로 효종 원년(1650) 중광문과에 병과를 급제한 뒤 숭문원을 거쳐 예문관에 보직되었다. 숙종이 즉위하던 1681년 호조판서로서 자의대비 복상문제 때 9개월의 대공설을 지지 했다. 속중 7년(1681) 딸이 숙종의 계비(인현왕후)가 되자 영돈 녕부사가 되어 여양부원군에 봉해졌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장이다.   - < 명성황후생가 >

 

 


 

민가마을:

 

 

 

 

 

 

 

 

 

감고당:

 

 

 

 

 

감고당:  경기도 여주시에 있는 조선시대의 목조건물로 본래 서울 안국동에 있던 것을 이전·복원한 것이다. 조선시대 제19대 숙종이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친정을 위하여 지어준 집이다. 인현왕후의 부친인 민유중(閔維重)이 살았으며, 인현왕후가 폐위된 후 이곳에서 거처하였다. 이후 대대로 민씨가 살았으며, 1866년(고종 3) 이곳에서 명성황후가 왕비로 책봉된다. 왕비로 책봉된 명성황후는 과거 인현왕후의 일을 회상하여 '감고당(感古堂)' 이란 이름을 붙였다. 본래는 서울 안국동 덕성여고 본관 서쪽에 있던 것을 여주시의 명성황후 유적 성역화 사업에 따라 경기도 여주시 명성황후의 생가 옆으로 이전·복원되었다.  - < 두산백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