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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구릅/일상들 ( life )

남대문시장, 창덕궁, 창경궁 - ( 2016.09.13 )

by the road of Wind. 2016. 9. 13.

남대문시장, 창덕궁, 창경궁

  -  ( 2016.09.13 ) -



남대문시장 (경일안경, 부원냉면):



경일안경: ~  남대문 시장 갈 일이 생겼다. 지금 쓰고 있는 안경 렌즈가 흠집이 너무 많아  시야가 뿌옇게 보여 불편하였는데 추석을 기해 오늘 교체하기로 하였기 때문이다. 전철 7호선 뚝섬유원지역~ 건대역 2호선 환승~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4호선 환승~ 회현역 하차. 이렇게 복잡하게 환승하며 갔다. 그래도 전철은 교통체증이 없어 좋다. 오늘 추석 연휴 시작 전날이어서 그런지  전철에서도 남대문시장에서도 사람들은 많다. 외국인 관광객들도 많다. 평소 안경 단골인 회현역5번 출구 800여m 고려안경도매상가 지하1층에 있는 경일안경 ( 02-779-0022 / 서울 중구 남창동 52-1 ) 에 들러 안경렌즈를 바꿔끼웠다. 이 집은 남대문 안경 도매점이 안경 값이 싸다는 소문을 듣고 처음 갔다가 인상이 좋아 단골이 된 집이다. 안경 렌즈는 1년에 한번 정도는 갈아 주어야 한다는데, 렌즈관리를 잘 못하여 시야가 맑지 않았다가 새로운 렌즈로 바꾸니 참 밝아지고 좋다. 진작 바꿀 걸 미련탱이가 여지껏 이런 것을 렌즈라고 쓰고 다녔나? 싶었다.  



회현역 5번 출구로 나오자 마자 남대문시장 길을 바라본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고, 수많은 가게들이 현란하고,...나는 순간적으로 촌 사람이 되어버리고 별세계에 온 것 같은 착각이든다. 매일 이런 곳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만약 내 같은 사람이 이런 곳에 기대어 살아간다면 그게 가능할까?  생존할 수 있을까? 늘 그런 생각이든다. 남대문 시장은 대단한 시장이다.


고려안경도매상가.... 경일안경도 여기에 있는 안경점이다. 친절하다. 안경에 대해 모르니 늘 여기에서 믿고 산다. 의심하지 않으니 편하다. 상대가 나를 배려해 줄 것이다란 그 믿음 때문이다. 믿음은 대단한 것이다. 성경에는 "믿음은 보이지 않은 것들의 실상이다." 란 구절이 있다.  타인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나는 이미 성취된 것으로 100% 믿는 다는 것이다.


경일안경 점포... 안경도 많군!



부원면옥:~  안경 렌즈를 바꿔  좋은 기분 상태에서 조금 이르기는 하지만 근처 모자골목(?)에 있는 잘 알려진 평양냉면 집 부원냉면 ( 02-753-7728 / 서울시 중구 남대문 시장 4길 41-6 (남창동)) 을 찾아 갔다. 유명한 냉면 한 그릇 맛 보려는데 여기가 맞나? 의문이 들어 옆의 가게에 물어보니 이 곳에는 냉면 집이 이곳 뿐이라고 한다. 맞군! 여기가... 여기 여기 냉면 맛은 어떨까?  호기심이 발동한다.  


평양냉면 전문...부원집 02-753-7728 ... 부원면옥...


방송인 김종국 2015.3.25 처음온 날에...냉면 먹기엔 조금 쌀쌀한 날씨일 텐데 좋아하는가 보다. "....이제부터 열심히 오겠읍니다.... 눈물이 납니다." 란 휘갈긴 글씨가 걸려있다. 그리고 일본어 선전 포스터도 걸려있다. 이 집 유명한가보다... 음식점가면 유명인들의 사인을 이렇게 해논 집들이 많다. 오늘은 지금 이 시간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사람이 거의 없다. 내가 모두 먹고 내려가는데 입구에서 회사 단체 예약 손님들인 듯 여러명이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life & style...셰프의 냉면집, 부원면옥....(내용생략).... 박찬일 (셰프).  무슨 잡지일까?  우명하긴 한 것 같다... 그리고 벽에는 "한그릇 1만6000원까지...냉면값이 너무해" 하는 내용의 신문 스크랲을 확대하여 걸어놨다.


부원면옥...평양냉면의 모습...   국물이 말갛다. 달걀을  단정히 칼로 썰은 것 몇 조각, 흰 닭고기 살 2점, 오이 썰은 것 그리고 면발이 쫄깃하고 약간 강한 느낌의 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국물 맛은 약간 단 맛이 나는 것으로보아 닭 삶은 국물과 함께 만든 것 같다. 맛은 시원하고 면발 씹는 맛도 있도 좋았다. 오늘 날씨도 더운데 시원히 잘 먹었다. 맛 담백하고 좋았다. 유명한 집에서 냉면 한 그릇 한 것이 나에겐 영광이다.


메뉴...물냉면 7,000, 비빔냉면 7,500, 온면 7,500, 빈대떡 4,000 ...1,3주 일요일 정기휴일, 2,4주 일요일 정상영업..., 각종 유명인사(?)들의 싸인인가?   냉면 값이 착하긴 착하다. 냉면도 먹었겠다 고궁을 한번 가볼까? 창덕궁으로 향한다. 전철 안국역에서 내려 걸어갔다.





문화와 역사가 살아 숨쉬는 아름다운 우리 궁궐 (1)


창덕궁


창덕궁 은 1405년 (태종 5년) 조선왕조의 이궁으로 지은 궁궐이다.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한다 하여 이웃한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이라 불렀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불에 타자 광해군 때에 다시 짓고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하기까지 정궁 역할을 하였다.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임금들이 거처했던 궁궐이다. 경복궁의 주요 건물이 좌우대칭의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면 창덕궁은 산자락을 따라 건물들을 골짜기에 안기도록 배치하여 한국 궁궐건축의 비정형적 조형미를 대표하고 있다. 또한 비원으로 잘 알려진 창덕궁 후원은 다양한 정자, 연못, 수목, 괴석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곳이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의 궁궐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창덕궁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배치가 탁월한 점에서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 < 문화재청 >


'창덕'이란 '덕의 근본을 세워 창성하게 하라'  뜻일 것이다. 창덕궁은 조선왕조 5대 궁궐중 하나이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이 5대의 궁궐로 오늘 창덕궁, 창경궁 구경을 해본 것이다. 특히 창덕궁은 270년간의 조선왕조의 법궁이었다. 창덕궁, 창경궁은 경복궁의 동쪽에 있어 동궐로 불리기도 했다. 오늘 참 유서깊은 역사의 현장을 방문한 것이다. 



창덕궁의 정문...돈화문(敦化門).  창덕궁 1405년 태종때 건립된 궁궐로서  처음 법궁(法宮)경복궁에어 이궁(離宮)으로 창건되었다. 


‘돈화(敦化)’라는 말은 원래 중용에서 인용한 것으로 ‘공자의 덕을 크게는 임금의 덕에 비유할 수 있다’는 표현으로 여기에서는 의미가 확장되어 ‘임금이 큰 덕을 베풀어 백성들을 돈독하게 교화 한다’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보물 제 383호인 돈화문은 현존하는 궁궐의 대문 중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1412년 5월에 세워졌으며, 1609년(광해원년)에 중수(重修)했다고 한다. 돈화문에는 원래 현판이 없다가 성종 때 서거정에게 분부하여 이름을 지어서 걸게 하였다.  - < 문화재청 >



창덕궁 안내도...1. 돈화문 일원 2. 인정전 일원 3.선정전 일원 4.희정당 5.대조전 일원 6. 성정각 일원 9. 낙선제일원...


돈화문- 창덕궁의 정문이다.

인정전- 정사를 보는 가장 위엄있게 보이는 법궁이다. 

선정전- 평상시 임금이 신하와 일상업무를 논하던 편전이다.

희정당- 임금의 침실이 딸린 편전이다. 나중에 어전 회의실로 사용되었다.

대조전- 대조전은 왕비가 거처하는 내전 중 가장 으뜸가는 건물이다.

성정각- 왕세자가 머물던 동궁으로서 국왕의 처소인 희정당 동쪽편에 자리잡고 있다.

낙선제- 일제강점기 이후 황족들이 마지막 여생을 보낸 곳으로 유명하다.



나는 오늘 불시에 창덕궁, 창경원을 구경하였으므로 동선 게획을 잡지 못 하였다. 사전에 그 날 일정의 중요한 곳을 미리 파악하고 공부도 좀 하고 가이드 없이도 모든 것을 파악하고 왔으면 좋았을 텐데 감각으로만 움직였으므로 고궁을 제대로 간찰하고 음미 하지 못 하였다. 유적지는 반드시 사전에 관련  역사 공부를 좀 하고 내력을 파악하고 관광을 나와야 한다는 점을 알았다. 특히 창덕궁 비원, secret garden을 보지 못 한 것이 아깝다. 그러나 집에 4시 까지는 들어가야할 사정이 있는데 오전 늦게 남대문에서 일보고 창덕궁, 창경원을 대충이라도 둘러볼 수 있었던 점이 참 다행이다. 부지런히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바람 소리가 날 많큼...서울에 세계문화유산의 유서 깊은 고궁을 돌아본다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시간인가를 알게되었다. 고궁이란 큰 것 같지만 어떻게 보면 좁디좁은 곳에서 지존의 권력과 함께 살아간 궁인들의 애로가 고통 스럽게 느껴져 왔다. 한번 들어가면 죽어서 나온다던 궁궐...권력 앞에 규율은 얼마나 엄격하였겠는가?  



인정전 가는 길...오래된 나무들이 연륜을 말해준다...이 나무는 회화나무다. 궁궐에 이런 나무를 심는 이유는 중국 주나라 시대 이후 풍속으로

나무 밑에서 정승들이 국사를 의논하라는 의미라고 한다. 지금은 창덕궁에만 회화나무가 있다.



창덕궁 안내...↗ 창경궁 입구, 비원 입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창덕궁 표시석.....


진선문...진선문은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敦化門) 다음의 중대문이다. 돈화문과 인정문 사이에 다시 한 번 문을 만들어 창덕궁 정전(正殿)인 인정전의 권위를 높이기 위함이다. 조선왕조 실록에는 태종과 영조 때 진선문 안에 신문고(등문고)란 북을 설치하여 백성의 민원을 듣고자 하였다고 한다.  진선문으로 들어가는 길에 금천교란 돌 다리가 있다.  인위적으로 물을 흐르게 하고 그 위에 만든 교량이다. 배산임수의 풍수설에 입각한 것이라고 한다.



오늘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경복궁 구경하는 아가씨들 아니 선녀님들이 많았다. 한복을 입은 나이 어린 소녀들이 션녀보다 아름답다. 한복의 우수성이 여기에서 빛나고 있다.


인정전으로 가는 길...


인정문.... 창덕궁 정전인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이다. 이 문앞에서 임금님의 즉위식이 거행되기도 하였다. 연산군,효종,숙종,영조,순조,철종,고종이 여기에서 즉위식을 가졌다. 말하자면 인정문 앞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이 문으로 들어가 인정전의 용상에 오르게 된다. 국보 제813호이다.



인정전... 위용이 사뭇 다르다. 인정전 앞 뜨락에는 좌우로 품계석이 도열해 있다. 인정전 지붕의 하얀 용마루에 오얏꽃 5개가 있으며 이는 순종이 창덕궁에 이어할 무렵 수리하면서 설치되었다고 한다. 인정문에는 3개가 있다. 국보 제225호이다. 인정전 뒷편에는 해와 달을 상징하는 둥근모양의 일월성신의 보호를 받는다는 뜻의 일월담이 직선으로 쌓아져 있다.


‘인정(仁政)’ ‘어진정치’ 라는 뜻이며, 인정전 창덕궁 법전(法殿) 이 된다. 법전은 왕의 즉위식을 비롯하여 결혼식, 세자책봉식 그리고 문무백관의 하례식 등 공식적인 국가 행사 때의 중요한 건물이다. 광해군 때 중건된 이후 순조 3년(1803)에 일어난 화재로 인한 재건, 그리고 철종 8년(1857년)에 보수공사이후 지금에 이르고 있다.인정전의 넓은 마당은 조회가 있었던 뜰이란 뜻으로 조정(朝廷)이라고 부른다. 삼도 좌우에 늘어선 품계석은 문무백관의 위치를 나타내는 표시로 문무관으로 각각 18품계를 새겼다. 그러나 정(正)4품부터는 종(從)을 함께 포함시켰으므로 정1품에서 시작하여 정9품으로 끝나며 각각 동, 서로 12개씩 있다.정조 때 조정의 위계질서가 문란해졌다고하여 신하의 품계에 따른 비석을 세우게 된 것인데, 3품 이상을 당상관(堂上官)이라하고, 3품 이하를 당하관(堂下官)이라 한다. 품계석에 맞추어 동편에는 문관, 서편에는 무관이 중앙을 향해 서는데, 문관은 동쪽에 위치하므로 동반, 무관은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반이라 하였으며 이를 합쳐서 조선시대의 상류 계급인 양반이 된다. 문무관은 임금님을 향해 바라보는게 아니라 문관은 무관을, 무관은 문관을 서로 마주보며 종렬로 서게되는데 임금님께 절을 하라고 “배(拜)-”하는 구령이 떨어지면 홀을 든채 국궁배례하며 서있는 채로 마주보며 절을 하고, 이것을 ‘곡배(曲拜)’라고 부른다.    





용상과 일월오악도...


인정전의 내부: 인정전 안에는 정면에 임금님의 용상이 있고 그 뒤에는 나무로 만든 곡병과 곡병 뒤에는 일월오악도(日月五岳圖)라는 병풍이 있다. 병풍에는 음양을 뜻하는 해와 달이 있으며 이는 다시 왕과 왕비를 상징한다. 그 아래 다섯 개의 산봉우리는 우리나라의 동,서,남,북,중앙의 다섯 산을 가리키며 이는 국토를 의미한다.이것은 임금이 중앙에서 사방을 다스리고, 음양의 이치에 따라 정치를 펼친다는 뜻을 담고 있기도 하다.그리고 주변에는 유리창을 비롯하여 전구나 커튼 등 서양 장신구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구한말 외국과의 수교 후 다양한 외래 문물이 들어 온 것이며, 1907년 순종이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한 후에 인정전의 실내바닥이 전돌에서 마루로 바뀌고, 전구가 설치되는 등 부분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참고로 5대궁 중에서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온 곳은 1887년 경복궁이다.   - < 문화재청 >


용상 주위가 약간 서양식으로 된 것은 순종이 이 곳에 이어하면서 1907년 무렵 서양식 가구와 실내장식이 도입되고서 부터라고 한다.



인정전에서 바라보는 뜨락..


인정전에서 인정문을 바라보다...대신들은 어디 갔는고? 빨리 오라 그래...


인정전의 서쪽 방향...계단이 있는 월대를 올라야 인정전으로 드어갈 수 있다.


인정전의 측면...


선정문 방향으로 나가다...



선정문....선정전 으로 들어가는 문. 인정전 동쪽의 행각에 위치하고 있다.



선정전...청기와 지붕의 건물....창덕궁 유일의 청기와 건물이다.


선정정 은 임금의 일상적인 집무공간이다. 인정전 바로 동쪽에 남향으로 지어졌다. 여기에서 임금은 신하들과 국사를 의논하며, 학문을 토론하며, 신하, 유생, 종친을 불러 시험을 보게 하기도 했다. 중국, 일본 사신을 만나기도 했으며, 왕비, 왕족들과 대소 연회를 열기도 했다..



선정전 내부의 어좌........어좌 뒤에 일월오악도 병풍이 있다.


별채 너머 인정전...




밝은 단청이 아름답다...



대조전 일원...



려춘문....대조전과 희정당 중간 쯤에 있는 문이다. '아름다운 봄'이란 뜻이다. 춘은 음양이론상 동쪽을 뜻한다고 한다. 아름답고 따뜻한 양기가 느껴진다.


 청향각...청향각은 대조전 동쪽 뒤편 건물이다. 1917년 대조전이 화재로 소실되자 1920년경 경복궁 교태전을 헐어다가 복구하였는데 이 때 딸려온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의 용도는 대조전등의 사용 물품을 보관하는 용도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내가 일정한 동선을 계획하지 않고 빙 둘러 구경 다녀서 뒤에서 돌아 나오며 순서가 좀 이상하게 되었다.


건축미가 아름답다..문살 하나하나가 에술이다.


대조전이 바라보인다. 대조전에는 다른 건물과 달리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이런 지붕을 무량각(無樑閣)이라 한다. 대조란 뜻은 큰 공을 이룬다는 것이다. 큰 공이란 왕자를 생산한다는 의미도 들어있다. 왕의 침전이 있었던 희정당과 연결되어 있다.


대조전....대조전은 왕비가 거처하는 내전 중 가장 으뜸가는 건물이다. 이 건물에서 조선 제9대 왕인 성종을 비롯하여 인조·효종이 죽었고, 순조의 세자로 뒤에 왕으로 추존된 익종이 태어나기도 하였다. 조선 태종 5년(1405)에 지었는데 임진왜란 때를 비롯하여 그 뒤로도 여러 차례 불이 나서 다시 지었다. 1917년 또 화재를 당하여 불에 탄 것을 1920년에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고 그 부재로 이곳에 옮겨지어 ‘대조전’이란 현판을 걸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차례에 걸쳐 다시 지었기 때문에, 건물 자체는 물론 주변의 부속 건물들도 많은 변화를 거쳤다. 대조전은 현재 36칸으로 앞면 9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건물 가운데 3칸은 거실로 삼았으며, 거실의 동·서쪽으로 왕과 왕비의 침실을 두었다. 각 침실의 옆면과 뒷면에는 작은 방을 두어 시중 드는 사람들의 처소로 삼았다. 건물 안쪽에는 서양식 쪽마루와 유리창, 가구 등을 구비하여 현대적인 실내 장식을 보이고 있다.  - <문화재청>


                                                                                       대조전 내부..



선평문....대조전 남쪽에 잇는 정문이다. 희정당과 통한다. 높은 계단위에 세워져 있다. 왕비의 대조전을 함부로 볼 수 없게한 것 같다.



대조전 밖으로 나왔다. 시원한 공간이 펼쳐진다. 희정당 안내문이 아주 멋진 소나무 아래 서있다.  넓은 공지 맞은 편에는 음료등을 먹을 수 있는 편의점이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이 쉬고 있었다. 나는 창경궁 방향, 낙선제 방향으로 게속 걸었다.


영현문... 성정각의 남문이다. 성정각은 왕의 경연, 욍세자의 서연이 열리던 곳이다. 영현은 '어진 분을 맞이하는 문' 이란 듯이다.



보춘정(報春亭).. 창덕궁의 성정각(誠正閣)안의 누각으로, 성정(誠正)이란 말은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의 앞글자를 따온 것이다.




낙선제 일원:


낙선재는 1847년에 지어진 창덕궁의 건물이다. 본래 이름은 낙선당이었으며, 창경궁에 속해 있었다. 정면 6칸, 측면 2칸의 단층 건물이다. . 2012년 국보 제1759호로 지정되었다. 고종 황제도 이곳에서 지낸 바 있으며, 1917년 창덕궁에 큰 불이 났을 때 순종 황제도 내전 대신 낙선재에 머물렀다. 이곳은 황족들이 마지막을 보낸 곳으로 유명하다. 낙선재 일원은 창덕궁 영역의 생활공간으로 낙선재, 석복현, 수강제가 하나로 영역을 이루고 있다.


* 조선의 마지막 왕비 순정효황후- 1906년 13세의 나이에 동궁의 계비로 책정되었다, 1907년 순종이 황제에 오르자 황후가 된 분이다. 6.25사변 때 피신을 못하고 낙선재에 있었지만 미굼의 도움으로 부산에 피신할 수 있었다. 전쟁후 이승만 정권의 거부로 낙선재로 돌아오지 못하고 정릉 수인재에서 기거하다 1960년 석복현으로 환궁하였다.

* 영왕비 이반자 여사- 1963년 귀국하여 1989년 까지 낙선재에 기거하였다.

* 비운의 덕혜옹주 - 1912년 고종과 복영당 양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7년 환적에 입적함. 1919년 공종 서거. 1921년 복녕당 아가씨로 부르다 덕혜라는 호를 받음. 1925년 강제로 일본에 끌려가 학습원 입학함. 1931년 대마도 도주 후예인 백작 소오 다케유키와 정결혼 함. 이듬해 딸 마사에 출산, 병세 악화. 1955년 이혼. 외동딸 마사에(정혜) 결혼 실패 및 일본 남알프스 실종. 이승만 정부 반대로 환국 좌절. 박정희 대통령의 배려로 1962년 실어증 등 병든 몸으로 78세에 귀국. 1989년 78세로 수강제에서 비극적인 삶 마감함.





장락문...낙선제로 들어가는 문이다. 현판의 글씨는 대원군이 써 넣었다고 한다. 대문 가운대를 없애 초헌이 지나갈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오래도록 장수하며 즐거움을 누리라는 뜻인 것 같다. 중국 설화 서왕모가 살았다던 장락궁에서 따온 이름이라한다. 신선이 사는 곳으리 은유한다고 한다.


낙선재 일원의 건물은 전체적으로 모두 소박하나 세련되게 꾸며져 있다.


낙선제..."오래도록 즐거움이 있다." 낙선제엔 여러 황족들이 마지막을 보낸 곳이다. 마지막 황후 순정황후 윤씨, 마지막 왕 영친왕, 마지막 공주 덕헤공주, 조선과 일본 두나라 사이에 있던  등 이방자 여사 주로 비운의 주인공 들이다. 1917년 창덕궁 화재시 순종황후더 머물렀다. 모든 건물들이 소박하고 어느 양반가의 저택 같이 느겨져 친근감이 있다.  


석복헌....낙선재의 안사랑채 역할을 하는 곳이다. 조선 24대 헌종의 빈인 경비이 거처한 곳이다. 헌종은 첫째 왕비 효헌황후가 16세로 세상을 뜨자 이듬해 왕비를 간택했는데 대와대비가 명헌왕후 홍씨를 간택했는데 마음에 들지 않았고 후사도 없었다. 그러자 본인이 3년전 본 김재청의 딸을 후궁인 경빈으로 맞아드리고 여기에 살게 했다.



수강제....수강이란 오래 건강하게 산다는 의미이다. 정조9년(1785) 단종이 머물렀던 옛 수강궁 자리에 수가강제를 세웠다. 순조 27년(1827)부터 대리청정을 했던 효명세지(익종)의 별당이었다. 헌종14년(1848)에는 헌종의 할머니 순원황후의거처로 중수하였다. 수강제는 낙선제, 석복헌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있다.  



낙선제 일원을 돌아보고 가을 감나무에 노란 감이 열려있다. 궁궐인데도 이 나무 하나를 보니 세상의 초가 삼간이 생각난다.


자시문...1782년 정조6년에 지어진 문이다. 원래 중희당 자리이다. 자시문은 중희당의 서문에 해당한다. 이곳 중희당 자리에서 현종과 철종이 정사를 본 곳이며, 고종이 명성황후를 아내로 맞고 서양과 통상조약을 맺은 곳이며, 임오군란 때는 명성황후가 상궁으로 변신하여 피신한 곳이기도 하다.





문화와 역사가 살아 숨쉬는 아름다운 우리 궁궐 (2)


창경궁



창경궁(昌慶宮)은 조선 성종 때에 건축한 궁궐이다. 성종이 당시의 세 대비, 곧 세조 비 정희왕후 윤씨, 덕종 비 소혜왕후 한씨, 예종 비 안순왕후 한씨를 위해,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 머물렀던 수강궁으로 세종이 그 자리에 1483~1484년에 걸쳐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하여 세운 궁궐이다. 창경궁은 서쪽으로 창덕궁과 붙어 있고 남쪽으로 종묘와 통하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창덕궁과 함께 동궐(東闕)이라고 하였다. 그 후 성종 14년(1483년) 새 대비를 모시기 위하여 새로 중건하고 이름을 창경궁으로 바꾸었다. 창경궁은 숙종이 인현왕후를 저주한 장희빈을 처형한 일과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일 등 크고 작은 궁중 비극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에 동물원과 식물원, 이왕가 박물관이 들어서고, 이름도 ‘창경원’(昌慶苑)으로 격하되는 등 수난을 겪었다. 1963년 1월에 사적 제123호로 지정되었고, 1983년에는 동물원과 식물원을 서울대공원으로 옮기고 이름도 창경궁으로 되찾았다.



창경궁 가는 길..


통명전, 경춘전 뒷 길...


해시계 등이 있다.


성종 태실 및 태실비.....해시계가 있는 길을 따라 조금 내려오니 위 쪽으로 성종 태실비 안내가 보였다. 이곳은 일제시대 전국에 있던 조선왕실 태실을 모아 고양 서삼릉으로 옮길 때 성종 태실만은 연구 목적으로 창경궁 후원 언덕에 남겨 놓앗다고 한다. 태실이란 왕족의 태반을 묻어 기념했던 조형물이다. 태실은 원래 전국의 풍수가 좋은 곳에 흩어져 있었다.     


창경궁 춘당지 가는 길...

아름다운 춘당지...정말 멋 있는 연못이다. 이어가 가득 했다. 오리들이 노닐고 있었다. 주변으로 산책로가 있다.




춘당지 옆의 창경궁팔각칠층석탑...


춘당지 북쪽에 있는 창경궁 대온실...창경원 식물원으로 알려진 곳이다. 일본인 후쿠바가 설계했고 프랑스 회사가 시공하였다고 한다. 1909년 융희3년에 준공하였으며 당시 동아시아 최대엿다고 한다. 등록문화재 제83호이다.  


자생식물학습장...


춘당지의 오리, 잉어, 그리고 비둘기...


푸르름의 춘당지...


백송(白松)...흰소나무..  난 생 처음 보네....와우 대단하다! 어디서 백송을 보나?


통명전 , 경춘전 가는 길...왼쪽은 창경궁...



통명전.. ...창경궁 안에 있는 왕의 생활공간으로 연회 장소로도 사용했던 곳이다. 조선 성종 15년(1484) 처음 지었던 건물이 임진왜란의 피해로 불에 타 버려 광해군 때 고쳐 지었으나 정조 14년(1790)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다. 지금 있는 건물은 순조 34년(1834) 창경궁을 고쳐 세울 때 같이 지은 것이다. 규모는 앞면 7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지붕 위에 용마루가 없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공포는 새 날개 모양으로 뻗쳐 나온 재료 구성이 조선 중기 양식의 특징과 정결한 건물의 느낌을 잘 살리고 있다. 건물 왼쪽으로 돌난간을 만들어 놓은 연못과 둥근 화강석을 두른 샘, 건물 뒤쪽에 꾸민 정원이 한층 더 정감 어린 풍경을 만들고 있다. 궁궐 안 내전 중 가장 큰 건물로 옛 격식을 잘 보존하고 있으며 19세기 건축 양식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는 문화재이다


경춘전....

환경전..


경춘전(景春殿)과 환경전(歡慶殿)은 서로 어슷하게 내외하듯 쳐다보고 앉아 있다. 경춘전은 인수대비의 말년의 삶과 인현왕후의 죽음, 그리고 혜경궁 홍씨의 아들, 정조의 출생을 바라보기도 하였다. 환경전은 왕과 왕세자 등 남자들이 주로 사용했던 곳으로 중종과 소현세자가 여기서 죽음을 맞았다. 순조 때 화재가 나 새로 지었을 때만 해도 온전하였으나 일제 때 창경원이 되면서 방을 뜯어내고 통마루를 깔아 전시관으로 쓰면서 본모습을 잃었다.환경전 남쪽의 잔디밭은 지금은 없는 옛 건물의 무덤이고 그 잔디밭 위에 선 석탑은 창경원 시절에 조경용으로 그냥 옮겨 놓은 것이라 한다.  
 




함인정......숭문당 오른편 빈양문(賓陽門)을 넘어서면 왕과 왕비의 기거 활동 공간인 내전이 펼쳐진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물은 정자인 ‘함인정(涵仁亭)’이다. 함인정은 사면이 모두 트인 형태의 정자로 정자로서는 규모가 큰 편이다. 천장을 보면 가운데가 우물천장으로 되어 있고 둘레는 서까래가 다 드러나 있으며, 내부 바닥에 깐 마루도 중앙부가  둘레보다 한 단 높이 설치되어 있는 등 가운데와 둘레의 구별이 보이는 구조로 되어 있다. 영조는 함인정에서 문무과에 급제한 인재들을 만나보기도 하였다 한다. 함인정 내부의 사면에는 사계절에 관한 시, ‘사시(四時)’가 춘하추동 한 구절씩 방위에 맞춰 동남서북에 배치되어 있다.


빈양문... 지금 나는 창경궁 뒤편에서 정문 쪽으로 나가고 있마.  빈양문 뒤에 함인정이 있다.


창경궁 명전전 측면 ....이곳을 돌아 나간다.


명전전.....


명정전 은 창경궁의 정전으로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의 큰 행사를 치루던 장소로 사용하였으며,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장소로도 이용하였다. 조선 성종 15년(1484)에 지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광해군 8년(1616)에 다시 지었다.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의 1층 건물로, 경복궁의 근정전과 창덕궁의 인정전이 2층 규모로 거대하게 지어진 것에 비해 궁궐의 정전으로서는 작은 규모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며,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기둥 위의 장식적인 짜임은 그 짜임새가 매우 견실하며, 그 형태가 힘차고 균형이 잡혀 있어 조선 전기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내부 바닥에는 벽돌을 깔았고 왕이 앉는 의자 뒤로 해와 달, 5개의 봉우리가 그려진 일월오악도 병풍을 설치하였다. 건물 계단 앞에는 신하들의 신분을 나타내는 24개의 품계석이 놓여 있다. 명정전 남측의 문정전과 주변 행각은 1983년부터 3년간에 걸친 복원공사로 대부분 복원하였고, 일제 때 격하되었던 창경원의 명칭을 창경궁으로 환원하였다. 창경궁의 명정전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지은 건물이지만, 조선 전기 건축 양식의 특징을 잘 계승하고 있는 건물로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창경궁 명전전 내부 용상...



명전전 앞 뜨락의 품계석...


명전문...


명전전의 모습...명전문에서 뒤돌아 바라보다.


창경궁 정문..뒤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