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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구릅/일상들 ( life )

서울역사박물관, 경희궁 - (2021.11.16)

by the road of Wind. 2021. 11. 16.

서울역사박물관, 경희궁 

- (2021.11.16) 

 

with wife

 

오늘 우연히 서울의 도심 광화문 일원을 걸어보았습니다. 집사람과 함께 인천 월미도 구경을 가보려고 전철을 타고 가는데, 옛날의 동대문운동장 부근을 지나갈 때 쯤 인천역까지의 전철 소요시간이 거의 2시간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는 전철 타는 것이 너무 지루하고 힘들어서 자기는 더 이상 가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하는 수 없이 광화문역에서 내리게 되었습니다. 차라리 늦게 월미도로 가서 여기저기 제대로 다닐 수도 없고, 월미도에서 점심 먹는다고 이 식당, 저 식당 찾아다닐 수도 없고 하여 , 차라리 경복궁이나 관람을 하는 것이 낫겠는 판단이 섰습니다.   

 

광화문역에 내려 새종문화회관으로 나오니 시간은 11:44분입니다. 점심 부터 먹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세종문화회관 뒷편에 있는 갈비탕 맛집, 송추가마골인어반 광화문점 ( 02-6031-6210 / 서울 종로구 새문안로5길 31, 센터포인트빌딩 2F)을 찾아갔습니다. 점심시간이 직장인들과 겹쳐 예약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매우 분빕니다. 이곳에서 갈비탕 (12,000원)으로 점심식사를 한후 광화문 경복궁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대 광화문대로는 새롭게 광장을 정비하느라 높은 철판 휀스를 둘러치고 아주 어수선 하였습니다. 그리고 광화문( 나중 확인 결과:  경복궁은 매주 화요일 휴관 ) 을 바라보니 문이 닿혀있습니다 . 오늘은 월요일도 아닌되 왜 닿혀있지? 궁금해 하며, 광화문이 문을 열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대안으로 서울역사박물관으로 향했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문을 열고 잇었습니다. 박물관 주변과 지금 열리고 있는 '육조거리(六曹大路_육조대로)' (2021.11.16~2022.3.27)를 관람하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서울역사박물관 곁에 있는 경희궁 관람 한 후 집에 돌아왔습니다. 경희궁은 일부 보수중이었으나 인조에서 철종까지 10명의 왕이 머물렀던 곳답게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경희궁<숭전문-> 숭전전-> 지정전-> 태령전-> 숭전문>으로 구경한 후 궁을 나와 흥화문을 통해 걸어 나왔습니다. 그리고, 서울역사박물관을 거쳐 광화문역으로 전철을 타러 갔습니다. 역에 도착하니 2:50분입니다. 인천 월미도 대신 서울역사박물관, 경희궁 관람은 뜻하지 않은 보람이 되었습니다.   

 

산 책: 걸음수 3,995 steps, 거리 2.79 km, 소모열량 157.4 Kcal, 소요시간 00:40 hrs, 속도 4.1 km/h.

코 스 (5호선) 광화문역 - 세종문화회관 - 센터포인트 빌딩 (송추가마골인어반, 점심) - 서울역사박물관 - 경희궁 - 광화문역. 

 

 

 

세종문화회관

 

 

노란 은행나무 가로수

 

 

센타포인트 빌딩 2F, 송추가마골인어반 광화문

( 02-6031-6210 / 서울 종로구 새문안로5길 31, 센터포인트빌딩 2F)

 

 

갈비탕 (12,000원)

이 갈비탕은 국물도 많고 시원하며 간도 잘 맞고, 맛도 좋아 아주 먹을만 하였다. 

 

 

식사후 사가져 갈 수 있는 포장 메뉴가 다양하다.

 

 

 

외교부

 

 

길고양이

 

 

 

'조선어학회 한말글 수호 기념탑'

 

1942년 10월 1일, 일제가 일으킨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수난을 겪은 지 72주년이 되는 2014년에 정부청사 앞 공원에 세운  '조선어학회 한말글 수호 기념탑'이다. 

 

주요한 시비

 

빗소리
                    주요한

  
비가 옵니다.
밤은 고요히 깃을 벌리고
비는 뜰 위에 속삭입니다.
몰래 지껄이는 병아리같이.

이즈러진 달이 실낱 같고
별에서도 봄이 흐를 듯이
따뜻한 바람이 불더니,
오늘은 이 어둔 밤을 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다정한 손님같이 비가 옵니다.
창을 열고 맞으려 하여도
보이지 않게 속삭이며 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뜰 위에, 창 밖에, 지붕에,
남 모를 기쁜 소식을
나의 가슴에 전하는 비가 옵니다.

 

                  1923. 3

 

 

 

 

서울의 찬가

 

                              작사.작곡 길옥윤

 

종이 울리네 꽃이 피네
새들의 노래 웃는 그 얼굴
그리워라 내 사랑아
내 곁을 떠나지마오
처음 만나고 사랑의 맺은
정다운 거리 마을의 거리
아름다운 서울에서
서울에서 살으렵니다


봄이 또 오고 여름이 가고
낙엽은 지고 눈 보라 쳐도
변함없는 내 사랑아
내 곁은 떠나지마오
헤어져 멀리있다 하여도
내 품에 돌아오라 그대여
아름다운 서울에서
서울에서 살으렵니다

 

 

 

정부청사

 

 

광화문 광장, 공사로 온통 어수선 하다.

광화문대로는 조선시대 부터 육조거리라 부르며 중요 관청이 있던 거리이며 유서깊은 곳인데,

경복궁에서 부터 남산 방향으로 좌우 대칭이 되는 넓고 시원한 대로가 흘러야 될 것 같은데,   

왜 자꾸만 이랬다 저랬다 세금만 잡아먹는 공사를 반복하는지 알 수가 없다.

더군다나 비대칭으로 길을 분활하는 공사라고 하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나라 경제나 가정 살림이나 절약은 중요한 미덕일 것이다. 

 

오늘 화요일인데, 광화문이 굳게 닫혀있다. 다른 출입문으로 입장가능한지 모르겠다.

그러나, 다른 문을 찾아 다니기 싫어서 발길을 돌려 서울역사박물관, 경희궁 방향로 향했다. 

 

 

세종문화회관

 

 

WIENER
PHILHARMONIKER &
RICCARDO MUTI
--
빈 필하모닉 & 리카르도 뮤티
2021.11.14  SPU 세종문화화관 대극장

 

 

 

 " 첫눈처럼 만나요 "

 

 

책 읽는 사람

 

 

 



     정지용 (1902~1950)
 
누워서 보는 별 하나는
진정 멀-고나.  

아스름 다치랴는 눈초리와
금실로 이은 듯 가깝기도 하고,  

잠 살포시 깨인 한밤엔
창유리에 붙어서 엿보노라.  

불현듯, 솟아날 듯
불리울 듯, 맞어드릴 듯  

문득 영혼안의 외로운 불이
바람처럼 일는 회한에 피여오른다.  

흰 자리옷 채로 일어나
가슴 위에 손을 녀미다.

 
 정지용(1902~1950): 충북 옥천군 옥천읍 출생. 휘문고등학교와 일본 도시샤(同志社)대학 졸업. 1926년 '학조' 창간호에 <카페·프란스>를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구인회의 창립멤버이며, 일제의 탄압이 이어지자 모더니즘에 눈을 돌리기도 하였다. 청록파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와 윤동주 등을 추천함. 그리고 일제와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된 1942년 이후 붓을 꺾고 글을 쓰지 않았다. 1950년 6.25 전쟁시 피난길에 오르지 못한 채 서울에 남아있다 납북되었고 평양감옥에 수감되었다가 폭격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은행 잎이 노란 거리 풍경

 

 

교보빌딩 &  불멸의 이순신 장군

 

"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

 

 

FOUR SEASONS HOTEL SEOUL

포시즌스 호텔

여기 호텔의 뷔페식당이 유명하다고 한다.

 

 

새로지은 새문안교회 

 

 

새문안교회 ( 새문안로 79 )

 

새문안교회는 1887년 9월 27일(화요일) 저녁, 언더우드 선교사의 주재하에 한국 최초의 장로교 조직교회로서 탄생되었다. 그동안 선교사들이 중심이 된 영어 예배 집회만 있었으나, 이제 한국인들에 의해 한국 말로 예배를 드리는 한국인 교회가 조직되게 된 것이다. 이날 밤 한국인 14명이 참석한 가운데 언더우드 선교사의 주관으로 새문안교회가 서울 장안 정동에 위치한 한옥(韓屋)에서 창립 모임을 가졌다. 마침 이날 교회 창립 모임에는 서상륜을 파송했던 만주의 로스(John Ross, 羅約翰) 목사도 참석하였다. 새문안교회는 초기에는 정동예배당(貞洞禮拜堂) 또는 정동교회(貞洞敎會)로 불렸으며, 1895년 서대문안 대로변으로 옮긴 후 부터는 정동교회 혹은 서대문교회(West Gate Church)가 혼용되어 쓰이다가, 1907년 이후 현재의 위치인 염정동으로 교회를 옮긴 다음부터 새문안교회(Saemoonan Presbyterian Church)로 불렸다. 옛날 돈의문(敦義門)을 세워 그것을 ‘새문’ 이라 했기 때문에 그 안쪽을 새문안이라 불렀던 것이다. 그 후 일제시대에는 한문으로 신문내교회(新門內敎會)로 또한번 교회 명칭이 변경 되는 등 1세기의 역사만큼 교회 명칭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새문안교회 100년사)

2019년 3월 신축된 새문안교회는 이은석 경희대 교수가 설계프로젝트를 진행하였으며,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2019 건축 마스터상(AMP)’ 의 건축설계분야 문화건축 부문 수상작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이제 134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한국 최초의 개신교회가 세계 속에서 중요한 위상을 갖게 된 뜻깊은 건축물이 되었다. 

 

 

 

구세군회관, THE SALVATION ARMY OFFICE BUILDING

 

 

 

● 서울역사박물관:

 

운현궁에서 기증한 석물

 

 

전차관람안내

- 관람시간: 오전 10:00 ~ 오후 5:00.
* 월요일휴관일입니다.

전차 381호는 등록문화재 제467호로 등록된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아들아, 도시락 가져 가라!! 하며 등교하는 이름을 부르는 것 같다.

오빠~~~!

 

 

전차 381호
Streetcar No. 381

지정번호: 등록문화재 제467호/ 제조시기: 1930년경


이 전차는 1930년경 부터 1968년 11월까지 약 38년간 서울 시내를 운행하였다. 서울에서 전차운행이 처음 시작된 날은 대한제국 광무 3년인 1899년 5월 17일 이었으며, 운행구간은 서대문에서 청량리까지 였다. 이후 전차는 1960년대 초반가지 서울시민의 대표적인 교통수단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이후 버스와 자동차 운행에 오히려 방해가 되자 서울시에서는 1968년 11월 전차운행을 일제히 중단하였다. 이 전차는 서울에 마지막 남은 2대의 전차 가운데 하나다. 2007년 12월 서울역사박물관으로 옮겨온  후 1년간 보존처리 과정을 거쳐서 전시하고 있다.   

 

 

 

흥선대원군의 조부 은신군의 신도비 등...


가운데 비석이 은신군신도비(恩信君神道碑), 왼쪽 것이 은신군묘표(恩愼君墓表)이다. 은신군 진(桭)(1755-1771)은 정조의 동생이며 게보상 흥선대원군에게는 조부가 된다. 그는 정치적인 이유로 17세의 젊은 나이에 제주도로 귀양가 죽었다. 요절한 그를 위해 정조는 즉위 후 정성을 다해 제사를 지내주었고, 다음 임금인 순조는 인평대군의 후손 남연군으로 하여금 그의 가계를 잇도록 하였다. 은신군신도비는 1783년(정조7)에 건립되었는데, 형인 정조가 직접 글을 짓고 손수 글씨를 써서 세웠다. 본문에는 은신군의 죽음에 대하여 애통해 하는 마음이 담겨 있으며 그의 이력과 인품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다. 정조의 문장 솜씨와 글씨를 감상할 수 있다. 은신군묘표는 1871년(고종8)에 건립되었으며 이재원(李載元)이 짓고 이재면(李載冕)이 글씨를 썼다. 이 묘비는 은신군이 죽고 약 100년이 지난 다음에 건립되었는데, 1871년 2월 그의 시호가 소민(昭愍)에서 충헌(忠獻)으로 개정된 다음에 세운 것이다. 낙천군 묘표는 낙천군 온(縕) (1720-1737)의 묘비이다. 1764년에 건립되었으며 본무은 김광진(金光進)이 기록하고 글씨는 신광수(申光綏)가 썼다. 낙천군은 본래 채(埰)의 아들인데, 계보상 연령군의 아들이자 은신군의 부친이 된다.

 

 

문인석

 

 

서울역사박물관

 

 

아현고가, 서대문고가, 홍제고가 

시설물 부재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 부재

 

 

광화문의 콘크리트 구조 부재

 

 

주간포

 

기둥과 기둥 사이 중간에 배치한 공포로 살미, 첨자, 소로를 사전에 제작하여 목조 건축과 같은 방법으로 조립하고 순각판을 거푸집으로 사용하였다.

 

 

귀포

 

모퉁이 기둥 위에 배치한 공포로 공포부재인 살미, 첨자, 소로의 귀한대가 별도로 제작되어 조립되었다.

 

 

내부 계단

 

문루 내부 계단으로 계단난간 손잡이, 난간 조각 돌을 미리 만들어 조립하였다.

 

 

추녀와 선자연

 

지붕의 모서리 방향의 높이는 추녀와 부채살 모양으로 배치한 서까래부분으로 지붕 속 흙처리가 되는 산자공간을 구조로 사용하고 서까래를 천장에 메달았다.

 

 

여상:

육축 위 낮은 담장으로 태극 8괘 문양 (하늘. 땅. 불. 물. 못. 우래. 바람. 산)과 전벽돌 벽 부분을 콘크리트 패널로 제작후 거푸집으로 사용하였다.

 

우물천장:

우물 정(井)자 모양으의 장식천장으로 반자 틀과 널 부분을 일체형 콘크리트 구조로 만들었다.

 

 

 

서울역사박물관

관람시간: 평일, 토. 일. 공휴일 : 09:00 - 18:00.
- 휴관: 공휴일을 제외한 매주 월요일. 1월 1일.
관람료: 뮤료. 

 

 

마야 신성한 도시 

타칼리크아바흐

2021.11.9 - 2022.2.6

 

 

과테말라 과테말라주 산 후안 사카테페게스의 마야 까치엘 민족 전통 일상복

 

 

왕의 자리, 용상  & 일월오봉도

 

 

한양의 상징대로

육조 거리 

2021.11.16 - 2022.3.27

 

 

▶ 한양의 상징대로 육조거리: 

육조거리는 광화문에서 세종로 사거리에 이르는 대로를 말합니다. 조선왕조가 한양을 수도로 정하고 법궁(法宮)인 경복궁을 건설하면서 그 앞의 육조거리는 국가의 권위를 상징하였습니다. 육조거리에는 의정부를 비롯한 육조, 사헌부, 한성부 등이 자리하였는데, 한양의 핵심 가로로서 주요 정책들이 만들어지는 공간이었습니다. 

조선을 움직이는 육조대로의 관청들:

<경국대전>에 '경관직(京官職)' 을 기준으로 보면 한양에는 중앙 관청이 총 84개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 육조거리에 위치했던 것은 국정 운영의 핵심 관청이었던 의정부와 육조, 사헌부, 한성부, 중추부 등이었습니다. 육조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것 자체가 이들 관청이 지닌 품격이자 위상이었습니다.

육조거리로 출근하는 사람들:

<경국대전>에 따르면 조선시대 관원들의 출퇴근 시간묘사유파(卯仕酉罷), 즉 묘시에 출근해서 유시에 퇴근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습니다. 묘시는 지금 시간으로 오전 5시에서 7시 사이, 유시는 저녁 5시에서 7시 사이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관원원칙적으로 하루에 12시간을 관청에 나와서 근무해야 했습니다.  

 

- 서울역사박물관.

 

 

 

육조거리 관청들의 서열 정리

1405년 (태종 5)의 관제 개혁 때 육조 관청들은 정3품에서 정2품으로 승격되었고, 소속 관청이 설치되면서 관장 업무가 확대되었다. 태종 재위 당시 육조의 서열은 '이-병-호-형-예-공'의 순이엇으나 세종 때 '이-호-예-병-형-공'의 순으로 정리되었다. 아울러 세종 때 상군부가 혁파된 자리에 에조가 들어시게 되면서 육조거리의 관청 배열에도 변화가 생겼다. <신중동국여지승람>에는 세종 때 정비된 관청 배열이 그대로 반영되었는 데, 동쪽에 의정부-이조-한성부-호조, 서쪽에 예조-중추부-사헌부-병조-형조-공조 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육조거리의 관청 배치 변화 

          광화문                                             광화문

삼군부|         | 의정부                예조/중추부 |           | 이조                                               

사헌부|   육   | 이조                   사헌부         |   육     | 이조
병조   |   조   | 한성부                병조            |   조     | 한성부 
형조   |   거   | 호조                   형조            |   거     | 호조
공조   |   리   | 예조                   공조            |   리     |

 

      < 태종 대 >                                   <세종 대 이후>

 

 

교지

 

진사홍언철문과병과

제28인급제출신자

건륭28년10월24일

 

 

<해동지도> 중 <경도> 부문, 18세기 < 서울대학교규정각국학연구원>

 

 

 

정본당

 

 

황각고실

 

 

황희 영정

 

 

김육 신병 초도정사

불윤비답

 

 

훈련원인   &  사복시제조인

 

 

어제어필

 

관복

 

 

서울역사박물관 홀

 

 

경희궁. 서울역사박물관 주차장

 

 주차요금:   (시간제요금)

- 소형(20인미만) : 기본(최초1시간): 1,000원,  5분당 400원, 일주차 22,000원.
- 대형(20인이상) :  기본(최초1시간): 3,000원,  5분당 800원, 일주차 44,000원.

 

 

● 경희궁:

 

 

경희궁: 조선시대 궁궐로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定遠君))이 살던 새문동집터를 광해군(光海君)이 몰수해서 1617년(광해군 9년)에 짓기 시작하여 1620년 (광해군 12년)에 완성하였으며, 그 후 10대에 걸쳐 임금이 정사를 보았던 궁궐이다. 1760년(영조 36년) 경희궁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서쪽에 자리하여 서궐로도 불렀으며, 조선의 이궁(離宮)으로, 경운궁(덕수궁)과 홍교로 연결되어 있었다. 정전, 동궁, 침전, 별당을 비롯해서 모두 98채의 건물이 들어섰던 경희궁은 경복궁, 창경궁과 함께 조선왕조의 3대궁으로 꼽힐 만큼 큰 궁궐이었다.  본래는 100여 동이 넘는 전각들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심하게 훼손되어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정문이었던 흥화문과 정전이었던 숭정전, 그리고 후원의 정자였던 황학정까지 세 채에 불과하다. 5대궁 가운데 비극적으로 가장 철저히 파괴된 궁이다. 사적 제 271호이다.

 

 

 

경희궁지:

지정번호: 사적 제271호/ 시대: 1617년 (광해군9)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55

 


이곳은 조선시대 5대 궁궐로 꼽히는 경희궁 터다. 경희궁은 광해군 때 창건되어 조선 후기 동안 중요한 궁궐로 자리매김 하였다. 창건 당시에는 경덕궁이라 하였지만 영조 때 경희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또 창덕궁과 창경궁을 합쳐 동궐이라 부르는데 이 말과 짝을 이루어 경희궁을 서궐이라고도 하였다. 원래 경희궁에는 정전인 숭정전과 편전인 자정전 외에도, 임금의 침전으로 융복전과 회상전이라는 두 개의 침전이 있었으며, 흥정전과 장락전을 비롯한 수많은 전각들이 지형에 맞게 어우러져 있었다. 궁에는 정문인 흥화문(興化門이 있고 동쪽에는 흥원문(興元門), 서쪽에는 숭의문(崇義門), 남쪽에는 개양문(開陽門, 북쪽에는 무덕문(武德門)이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 소유가 넘어가면서 전각들이 철거하여 이전되었고 궁역이 축소되어 궁궐로서의 웅장한 면모를 잃었다. 지금의 경희궁은 몇몇 전각들이 복원되었지만 대부분의 전각들이 사라지고 궁궐터도 많이 축소되어 예전의 모습과 많이 다르다.   

 

 

 

숭정문

 

숭정문(崇政門):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으로 들어가는 정문이다. 광화군 때에 지어진 것으로, 이 숭정문(崇政門)에서 경종,정조, 그리고 헌종이 즉위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월대를 2층으로 쌓아 경사를 극복하였고, 계단 중앙에는 봉황이 새겨진 답도가 있고 그 양 옆으로는 돌짐승 모양의 소맷돌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탕의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답도((踏道)

 

어도(御道)의 계단 중간에는 답도(踏道)가 있으며, 답도는 '밟고 지나가는 길' 이라는 뜻이다. 임금님은 연이나 가마를 타고 오르니 지나가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경운궁(덕수궁)을 제외한 4대 궁궐( 경복궁, 창덕궁,창경궁,경희궁)에는 답도에 상징적인 동물인 봉황이 조각되어 있다.  봉황태평세월이 되면 나타난다는 상징적인 동물이다. 

 

 

 

숭정문에서 숭의정 가는 길:

삼도(三道)

 

임금님이 거둥(임금님의 행차) 하실 때 사용하는 길을 어도(御道)라고 한다. 삼도(三道)에서 중앙의 길을 말한다. 임금님만의 길인 것이다. 숭정전 앞 어도 양편에는 신하들의 품계석이 놓여있다. 

 

 

 

 

 

숭정전 (崇政殿): 


숭정전: 경희궁의 정전(正殿). 경희궁 창건 공시 초기인 1618년(광해군10) 경에 건립되었다. 국왕과 신하들이 조회를 하거나 궁중연회, 사신 접대 등 공식 행사가 행해졌던 곳이다. 특히 경종,정조,헌종등 세임금의 즉위식이 거행되었다.그러나 일제가 경희궁을 훼손하면서 1926년 숭전전 건물을 일본이 사찰에 팔았는데 현재는 동국대 정각원(正覺院)으로 남아있다. 현 위치의 숭전전은 복원된 것이다.

 

 

 

숭정전 내부 용상

 

 

 

 

자정전

 

자정전(資政殿): 경희궁의 편전(便殿). 1617~1620년(공해군 9~12)사이에 건립되었다. 국왕이 신하들과 회의를 하거나 경연을 여는등 공무를 수행하던 곳이다. 선왕들의 어전이나 위폐를 모시기도 하였다. <서궐도안>에 의하여 현재의 건물을 복원하였다. 태령전(泰寧殿): 영조의 어진(御眞:초상화)을 보관하던 곳. 본래는 특별한 용도가 지정되지 않은 건물이었다. 그러니 영조의 어진이 그려지자 1744년(영조20)에 이곳을 중수하여 보관하였다. 일제에 의하여 흔적도 없이 파괴되었지만 2000년 <서권도안>에 의하여 정면5칸, 측면2칸의 건물로 복원되엇다. 현판은 석봉 한호의 글씨를 집자하여 만들었다.

 

 

 

 

 

2019.7.19 서암사진

서암 (瑞巖)

 

서암: 태녕전 뒤에 있는 바위이다. 바위샘이라는 뜻을 갖는 ‘암천(巖泉)’으로 불리는 샘이 그 속에 있다 이 바위는 임금님 바위라는 뜻의 ‘왕암(王巖)’으로 불렸는데, 그 이름으로 인하여 광해군이 이 곳에 경희궁을 지었다는 속설도 있다. 1708년 (숙종34)에 이름을 상서로운 바위라는 뜻의 ‘서암(瑞巖)’으로 고치고, 숙종이 직접 ‘서암’ 두 글자를 크게 써서 새겨 두게 하였다. 현재는 서암을 새겨두었던 사방석은 전해지지 않고, 다만 바위에 깎아 놓은 물길이 옛 자취를 전해주고 있다.

 

태령전

 

태령전(泰寧殿): 영조의 어진(御眞:초상화)을 보관하던 곳. 본래는 특별한 용도가 지정되지 않은 건물이었다. 그러니 영조의 어진이 그려지자 1744년(영조20)에 이곳을 중수하여 보관하였다. 일제에 의하여 흔적도 없이 파괴되었지만 2000년 <서권도안>에 의하여 정면5칸, 측면2칸의 건물로 복원되엇다. 현판은 석봉 한호의 글씨를 집자하여 만들었다.

 

 

 

태령전 내부

영조의 어진.

 

 

 

경희궁의 정문

흥화문

 

흥화문: 경희궁의 정문이다. 원래는 현재의 구세군 자리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제가 박문사(博文寺) 정문으로 사용하려고 떼어간 것을 1988년 경희궁 복원사업을 하면서 옮겨세웠다. 

 

 

흥화문 앞  경희궁. 서울역사박물관 주차장 출입구:

 

주차요금:   (시간제요금)

- 소형(20인미만) : 기본(최초1시간): 1,000원,  5분당 400원, 일주차 22,000원.
- 대형(20인이상) :  기본(최초1시간): 3,000원,  5분당 800원, 일주차 44,000원.

 

 

 ↖  느티나무길 ( 서울역사박물관 방향 가는 길 )

 

 

흥선대원군의 아들 흥친왕의 신도비

 

흥친왕의 왕 (1845~ 1912)의 신도비(神道碑)이다. 흥친왕은 흥선대원군의 장남이자 고종의 형이다. 처음 이름은 재면이었는데 1910년 국권피탈 직전에 희로 바꾸고 흥친왕에 봉해졌다. 그는 1863년 과거에 급제하면서 규정각 대교, 승정원 가주서를 거쳐 도승지, 형조판서,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1900년 완흥군에 봉해졌고 1910년 8월에는 흥친왕이 되었다. 신도비는 1932년에 건립되었으며 본문은 김윤식이 짓고, 윤용구가 쓰고, 전자는 김성근이 쓴 것이다. 처음에 신도비는 1913년에 경기도 김포군 고림대면 흥곡동에 소재한 묘소에 건립되었는데 1920년 묘소가 남양주 장현리로 이전되었다 이후 1932년에 비석을 다시 만들면서 비문내용이나 글이 이전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신도비의 구조는 옥개석, 비신, 대석으로 이울어져 있는데, 전채 높이는 361cm이고, 옥개석, 비신, 대석의 높이는 각각 69cm, 215cm, 77cm이다. 비신에는 제액으로 흥친왕신도비명이라는 글씨가 전서로 새겨져 있다. 본문은 전면과 좌측면, 흐면에 걸쳐 써져 있다. 대석은 귀두로 만들어진 웅장한 느끼밍 들게 하였다. 

 

 

장명등 과 망주석

 

장명등 과 망주석: 운현궁 일가 묘소에 있던 장명등과 망주석이다. 장명등은 혼을 밝게 인도하든가 불을 밝히므로써 사악한 잡귀를 물리치는 벽사(礔邪)의 기능을 한다. 대체로 봉분 앞 상석 전방에 배치되는데 묘역의 중앙에 위치하게 된다. 망주석은 멀리서 바라보아 묘소의 위치를 쉽게 알아보도록 해주는 기능을 한다. 망주석에는 세호(細虎)를 표시하도록 되어있는데 실제로는 다람쥐처럼 그리는 경우가 많다. 

 

 

 

오층석탑

 

 

오층석탑:  시대- 고려, 재질- 화강석, 높이- 2.91m.

오층석탑은 하층 기단에 새겨진 안상(眼象)무늬와, 이전 시기에 비해  층수가 늘어나고 옥개석의 받힘수가 줄어든 형태로서 고려석탑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또한 수평을 이루는 옥개석의 처마 등에서 통일신라 석탑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  결실된 부분은 원래의 부재들과 유사한 종류의 석재로 전통 석재가공 기술을 적용해 제작 복원하였다.  

 

 

다시 서울역사박물관 앞, 금천교가 보인다.

 

 

2019.7.19 금천교 사진

 

경희궁 금천교...경희궁의 흥화문과 경희궁 내의 여러 전각들 사이에 흐르던 금천(禁川)에 놓인 돌다리. 난간의 돌짐승들이나 홍예사이에 새겨진 도깨비 상은 바깥의 나쁜 기운이 궐내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는 상징성을 띤 것이다.

 

 

 

흥국생명 앞 움직이는 조형물

 

 

재미있는 라바(LARVA) 조형물

 

 

주한 오만 대사관

 

 

세종문화관 S-Theater

 

 

책 읽는 소녀상

 

 

 

서시 (序詩)
                    운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1917-1945): 중국 길림성 회룡면 명동촌 출생. 연희전문대 졸업. 일본 릿코대학 문학부 입학. 그러나 피어보지 못한 꽃 같은 젊은 시인은 해방을 불과 6개월 앞두고 후쿠오까 형무소에서 28의 젊은 나이에 옥사하였다. 안타깝다.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의 詩>.